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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9::25-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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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9장 25절-39절: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저희가 가로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저희가 욕하여 가로되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25절-27절: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저희가 가로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사람들이 눈을 뜬 사람에게 ‘네 눈을 뜨게 한 분이 어떤 분이냐?’ 하고 묻는 것은? 첫째는 예수님을 잘 알아보고 믿으려는 건지, 두 번째는 말을 할 때 약점을 잡아서 눈 뜬 자도 죽이고 예수님도 죽이려는 건지? 예수를 믿는다면 예수님으로부터 말씀을 들을 때 자기를 살펴야지 남을 자꾸 보는 것은 마귀의 미혹에 빠진 거다. 이러면 남을 자꾸 정죄하게 된다. 이 자기를 회개하지 않으면 고통 중에 죽을 수도 있다. 이건 자기에게 저주다.
예수를 믿으면 자기에게 증거가 있어야 한다. 자기에게 사건이 오는 것은 ‘네가 눈을 떴느냐?’ 하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건데, 예수를 바로 믿고 바로 깨달은 사람은 이 가운데서 영적인 세계를 밝히겠지만 묵묵부답이라면 이 사람이 예수를 믿는 거냐, 안 믿는 거냐? 성경에 말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고 했는데, 평소에 성경을 안 읽어서 이단자들이 와서 성경구절을 들고 설득을 할 때 꼼짝없이 당한다면 무슨 망신이냐?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눈을 뜬 자가 이렇게 쏘아 붙이는 것은? 1.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말라는 거다? 2. 진실을 감추지 말고 양심을 바로 가지라는 거다? 2번이 정답이다.
28절-29절: ‘저희가 욕하여 가로되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유대인들이 눈을 뜬 소경의 말에 대해 양심이 찔리면서도 한다는 소리가 자신들은 모세의 제자라고 한다. 신18:15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찌니라’ 라고 했는데, 이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심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성전 안에서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보내서 왔다.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의 말이다’ 라고 하셨는데, ‘성전 안에서’라 함은 성역을 말한다. 주님은 성역을 하신다는 거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셨으니까 예수님께서 하는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면서 예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말씀을 하시는 것을 기록해서 우리로 보게 하는 것은 어떤 말이 하나님의 말씀인지를 깨달아서 목사의 말을 들을 때 ‘저 목사가 하나님이 보내서 왔느냐, 마귀가 보내서 왔느냐?’ 하는 것을 깨달으라는 거다.
목사가 성경을 들고 세상을 자랑하고 세상 것을 기준해서 말을 한다면 마귀가 보낸 종이다. 제도나 간판이 문제가 아니라 신앙을 하는 목적관이 비뚤어졌으면 마귀가 보낸 거다. 마:에서 마귀가 예수님께 세상을 기준해서 자랑을 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말씀은 천국을 말하고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데 마귀가 보낸 거짓 종들은 성경을 들고 세상을 자랑하고 가지라고 한다. 이는 거짓 종이요, 세상에 속한 교회요, 인본주의 교회다. 이런 세상적인 교훈은 자라야 할 성도의 영의 성장을 죽이는 짓이기 때문에 거짓 종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놓여져 있다.
음식에 독약을 탔다고 하면 누가 그 음식을 먹겠느냐? 그런데 예수 믿는 기독자들 중에는 독약인데도 보약으로 알고 먹는 자들이 많다. 믿는 자기에게 일반은혜를 주시는 것은 특수은혜를 잘 받으라는 거다. 창조의 목적이 그렇다. 그런데 일반은혜를 받으면서도 특수은혜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안 믿는 사람처럼 산다는 증거다. 이것은 독약을 보약으로 알고 먹는 거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언행심사를 통해 아버지께로부터 온 사람은 땅에서 하늘의 일을 하고, 하늘의 사람으로 만드는 일을 하고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을 알게 해 주셨다. 믿는 사람은 목사님은 물론이고 교인들도 이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성문적인 율법을 지키라고 말만 했지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고쳐지고 만들어지는 구원을 몰랐다. 예수님은 율법의 정죄 아래 있는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율법의 은밀한 요구를 다 이루셨는데 당시의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죄를 짊어지실 분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30절: ‘그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날 때부터 소경이 되었던 사람은 광명을 주신 그 분이 양심에 믿어진다는 거다. 이 믿음을, 광명이 된 이 자유를 무엇이 와서 없애겠느냐? 교권이 와서 없애겠느냐, 세권이 와서 없애겠느냐, 물질적 재권이 와서 없애겠느냐, 가족이나 인정정실이나 공갈과 협박이 와서 그 신앙을 지울 수 있겠느냐?
광명이 와서 영적인 면의 눈을 띄워졌는데 이것을 세상의 물질이나 그 무엇이 와서 다시 눈을 감기게 하겠느냐? 자기 스스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않는다면 눈이 감기겠지만 세상의 그 무엇도 다시 눈을 감기게 할 수 없는 거다. 그런데 성경을 안다고 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그들이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온전케 하신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며 죄인으로 몰아붙이고 있으니 말이 되는 거냐?
31절-32절: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예수님에 대한 증거를 유대 종교인이나 바리새인들이 하는 게 아니라 눈을 뜬 자가 한다. 눈을 뜬 자가 예수님을 증거하는 거다. 이게 바로 눈이 밝은 자의 설교다. 옳은 신앙자의 증거다.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 예수님을 광고하거나 자랑을 하지 않고 이방 불신자 쪽에 붙어서 그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유대인들은 사람의 눈을 뜨게 하는 일을 못하고, 이런 자들에게는 성령님께서 역사도 하지 않는 건데 이런 자들이 예수님을 자꾸 죄인으로 몰아가고 있다. 주님께서 교회 인도자들에게 성경을 가지고 교인들의 영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는 일을 맡겼는데 목사부터 흑백이 분명하지 못하고, 세상과 천국이 분명하지 못하고, 모든 소원 목적이나 사고방식이 세상 것에 들어가 있으면서 진리본질을 전하는 사람을 이단시 한다면 이 목사는 거짓 종이요, 마귀의 종이요, 이런 교회는 마귀의 집단이다.
교회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본질을 따르지 않는다면 교회가 아니다. 교회 인도자가 진리본질을 따르지 않고 세상을 가르친다면 이런 교회에 사람이 아무리 많이 모여도 주님께서 이런 교회를 교회로 인정을 하시겠느냐?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같이 있겠다’고 하신 것은 주님께서는 진리본질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교회로 인정을 하신다는 거다. 주님은 악인의 기도를 멀리하신다고 했다. 여기서의 악인이란 세상목적으로 믿는 사람을 말하는데, 이 사람의 기도는 안 들으신다는 거다.
인생의 노정에서 세상을 소원 목적하며 예수를 믿는 것은 길가에 앉아서 돈 바구니를 앞에 놓고 구걸을 하는 소경이다. 행:에서도 이걸 밝혀준다. 앉은뱅이가 성전에 올라가는 길옆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러 가는 교인들의 눈길을 자기에게 돌리게 하고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데, 이것은 천국을 향해 가는 사람들을 세상의 것으로 유혹하는 것을 보여준다. 오늘날 교회가 거의가 길가에 앉아서 예수이름으로 세상을 구걸하고 있다. 이것은 신앙이 앉은뱅이요 소경이다. 앉은뱅이는 자기의 환경과 상황에서 일어나지를 못한다. 신앙정신이 땅에 붙어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앉은뱅이다.
33절-34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아무 일’이란 영에 속한 일을 말하는 거냐, 세상살이도 못하고 돈도 못 벌고 하는 세상의 일을 말하는 거냐? 영에 속한 일이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적인 일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거다.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보내지 않았다면 이 사람이 어디서 왔겠느냐? 세상으로부터 왔고, 세상이 보낸 거다. 이 사람이 교회에서 일을 한다면 무슨 일을 하겠느냐? 교인들의 속사람이 만들어지는 일은 하지 못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이라야 영의 일을 하는 거다. 곧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일을 한다. 영의 눈을 열어서 주님을 보게 하고 깨닫게 해서 고치게 한다. 이게 하나님의 일이다.
육에 속한 신앙은 물질을 강조하고 종교적인 업적을 강조한다. 종교적인 업적을 강조하는 것은 기독교가 아닌 이방 불신세계나 이방종교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물질로 되는 일이라면 육의 일이니 예수를 안 믿어도 할 수 있고, 영이 죽은 사람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의 일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되는 거다. 거듭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일은 하나님의 신으로 말미암아 되는 거다. 이 일은 교회에서 주님께 수종을 드는 자들이 하는 거다. 교회에서 이 일을 안 하면 세상에는 이 일을 할 곳이 없다.
날 때부터 소경이 된 눈을 뜨게 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예수=구원’이니 당신의 이름이 당신의 일이요, 당신의 일이 당신의 이름이다. 예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신실한 종은 주님이 하신 것처럼 성도들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해서 신령세계를 볼 수 있게 한다. 주님으로부터 영의 눈이 뜨인 사람은 보는 눈이 달라지기 때문에 세상을 보고 염려 걱정이나 원망이 나오지 않는다.
성경은 자기의 마음을 비춰주는 거울이다. 믿는 사람이 성경을 보면서도 자기의 마음을 고치지 못한다면 성경을 바로 보는 게 아니다. 거울 앞에 서 있는 자기가 보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자기를 가꿀 수 있겠느냐? 성경이라는 거울 앞에서 자기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면 자기의 마음과 정신이 어디에서 병이 났는지 알지 못하게 되고 고침을 받지 못하게 된다. 교회 인도자가 이렇다면 어떻게 교회를 인도할 수 있겠느냐? 예수 믿는 사람이 영과 육의 분별이 없다면 소경처럼 길가에 앉아서 세상을 구걸하고 있다고 보는 거다.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이 말 자체는 맞는 말이다. 모든 인간은 죄 가운데서 났다. 성경에서 ‘너는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죽은 자 가운데서 났다’고 하는데, ‘죄 가운데서 난 자’란, 첫 번째로 세상 온 인류를 말한다. 두 번째는 기본구원을 얻어서 영이 살아났어도 세상의 이방정신을 가지고 사는 자를 말한다. 세상을 돋보며 달라고 하는 것은 죄 가운데 사는 자다.
세 번째는 종교적인 업적이나 신비로운 체험을 목적으로 믿는 자도 죄 가운데 사는 자다. 이적과 기사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인데 인간의 의지나 노력이나 고행적인 것으로 신비로운 것을 만들려는 하는 것은 죄 가운데 사는 자다. 이런 교인은 일반사람만도 못한 거다. 이런 사람들이 어디서 나오는 거냐? 국가의 허가를 받아서 가르치는 신학교에서 배워서 나온 게 아니냐? 세상의 국가가 뭐가 이단인지, 뭐가 거짓 종인이, 뭐가 참단인지를 아느냐? 국가는 영이 죽어있고 선악과 따먹은 사람의 차원에서 나라를 이끄는 건데 이들이 하나님에 대해, 신앙에 대해 뭘 알겠느냐? 이런 자들로부터 허가를 받아서 하나님을 가르치는 신학교에서 옳은 가르침이 나오겠느냐?
신앙이 아닌 종교적인 정신을 가진 자들이 예수님을 데려다가 예수님을 판단을 한다는 게 예수님의 일을 더 잘 할 수 있게 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죽여 놓는다. 그러니 이들은 성경을 가지고 있지만 소경이다. 그런데 이들의 입장에서는 자기들은 의인이라고 한다. 사람이 거듭나지 못하면 바른 신앙이 안 되는 건데 자신들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을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으니 의인이라고 하는 거다. 믿는 자의 가정에서 가인도 있을 수 있고 에서도 있을 수 있는 건데 이 역사를 잘 알면서도 이들은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의 유대인들이 눈을 뜬 소경이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것은 죄 가운데서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 소경이 눈을 떠서 이제는 예수님을 알게 되었지만 자신들은 여전히 죄 가운데서 소경으로 살고 있는 거다. 그러니 주님을 모르는 거다. 기본구원을 얻은 사람이라고 해도 영적인 면에서 눈을 뜨지 못하면 이룰구원이 되지 않으니 이것은 아직까지 죄 가운데 있는 거다. 예수님께서 바리새 교인들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보고 ‘독사의 자식들아, 외식자들아, 화 있을진저’ 라고 했다.
믿는 사람이 영의 눈을 떴으면 예수님을 알아본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의 심령과 골수를 쪼개고 정신상태를 뚫고 들어가서 수술을 하고 고친다. 그러니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영적인 면의 죄를 고침 받아야 한다. 말씀으로 자기를 고치지 못하면 자기 고집적으로 살다가 고집적인 정신으로 자기 일생을 마칠 수도 있다.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유대인들의 생각이 눈을 뜬 소경에게 ‘네가 눈을 떴으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라고 하면 눈을 뜬 소경이 자신들의 말을 따를 줄 알았는데 소경이 이 말에 대해 예수님을 두고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라고 하자 이들이 의인 되신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눌러버렸다. 그러나 예수님으로부터 눈을 뜬 소경은 자기의 신앙양심에 증거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증거하는데 있어서 꿇리지 않는다. 믿는 사람은 먼저 눈을 뜬 사람으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게 당연한 거다. 그런데 나이나 목회자의 연조나 직분이나 직위를 가지고 옳은 가르침을 눌려버리는 자들이 많다.
눈을 뜬 소경의 입장에서는 그들에게 붙잡혀서 끌려다니는 것보다 쫓겨나오는 게 훨씬 더 자유롭다. 교회는 끌려서 다니면 안 된다. 목사는 억압 강압으로 교인들을 끌고 다니면 안 된다. 행:에서 목에 매단 것을 먹지 말라고 한 것은 짐승의 목을 매달아서 죽이는 것처럼 교인들을 억압 강압으로 끌고 다니지 말라는 거다.
그들이 눈을 뜬 소경을 향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는 것은 눈을 뜬 소경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종교적 세력을 확장하는데 이용물로 쓰려는 간사한 마음으로 하는 소리다. 그래서 눈을 뜬 소경은 그들로부터 탈출을 해야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35절-36절: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눈을 뜬 소경을 쫓아냈다는 말을 들으시고 그를 만나서 ‘네가 인자를 믿느냐?’ 라고 하셨다. ‘인자’란 ‘하나님의 아들’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 눈을 뜬 소경이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라고 했는데, 이 말은 ‘나의 눈을 뜨게 한 분이 구주심을 믿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바로 내 앞에 계신 예수님이십니까?’ 라는 거다.
그러면 눈을 뜬 소경이 왜 예수님이 구주로 믿어지는 거냐? 자기의 영의 눈을 열어서 하나님의 아들을 보게 했고,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을 하는 분인지 알게 되었고, 사건 환경을 섭리하는 분을 보았고, 자기를 영능화 시켜주는 분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예수 믿는 나는 이런 것들이 인격적으로 믿어지느냐? 아무리 오랫동안 예수를 믿었다고 해도 자기 속에 지식적인 변화가 없으면 이런 것이 안 믿어진다. 믿음이 안 생긴다. 자기에게서 지식적인 변화가 일어나면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를 찾아오신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아오신다.
37절-38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눈을 뜬 소경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죽이려는 자들을 떠나니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와서 ‘네가 눈을 뜰 때 아른하게 보여진 그 예수가 지금 너와 말하는 나다’ 라고 하시자 ‘주여, 내가 믿나이다’ 라고 하면서 예수님께 엎드려 절을 했다. 이것은 소속과 입장에 완전히 주님께로 옮겨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실 일을 말씀해 주신다.
3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이게 무슨 심판이냐? 마지막 불바다가 되는 심판인지, 지금의 얘기인지? 보고 못 보고 하는 심판이 미래에까지 연속이 되는 면을 말한다. 영적인 세계를 보고 못 보게 하는 권세는 하나님의 권세요 예수님의 주권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셨기 때문에 인간으로 구원을 보게 하고 못 보게 하는 것은 예수님의 주권이다. 인간 제 생각 제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다.
이 말씀은 아주 겁이 나고 무서운 말씀이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의 개인감정으로 하는 말로 들리기 쉽다. 그러나 예수님은 절대 공의의 분이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의 공의를 알면 이 말씀의 뜻을 충분히 알게 되고 받아들이게 된다. 심판을 하시는 것은, 첫째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양과 형상대로 인간을 지으시고 생명과를 먹고 다스리고 통치하고 지배하고 땅에 편만하라는 복을 주셨음에도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인류의 대표인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인해 그의 후손인 모든 인간이 타락이 되어서 계속해서 선악과의 정신과 사상으로 저주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생명과를 먹고 나온 하늘의 지식과, 선악과를 먹고 나온 타락된 세상의 지식 두 가지가 있는데, 타락된 인류는 선악과를 먹고 나온 지식을 따라 살고 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생명 길 좁은 길로 가면서 하나님의 의사단일의 정신으로 살면 이 사람은 생명과를 먹는 거고, 이러면 하나님의 성품을 입게 되지만 예수 믿으면서도 세상을 소원 목적하며 살면 이는 선악과를 먹는 것이니 하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믿는 우리는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지식이 있다는 것을 알고 반드시 생명과의 지식을 따라 살아야 한다.
사람이 말을 할 때는 말을 하는 사람이 의식을 하던 안 하던 어디에 근거를 두고 말을 하는 건지 그 출처를 자기 입으로 말을 하게 되어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이 영의 귀가 열렸으면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때 자기가 그 말을 계속 들어야 할지, 안 들어야 할지의 판단이 자동적으로 나오게 된다.
세상사람들이 아무리 행복하고 기쁘고 즐겁고 부귀 존귀 영광이라고 해도 천국에 속한 신령성은 하나도 없다. 인간 전폭의 삶 자체가 보고 듣고 느끼는 오각의 오감성이 전부는 땅에 속한 것이라서 신령한 하늘에 속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믿는 사람은 자기 속에서 구원의 역사가 시작이 되었기 때문에 영적인 면을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을 소경 되게 하는 일을 하게 되는 거다.
하나님은 신령계와 물질계를 만든 분이다. 물질계는 신령세계인 천국의 모든 존귀 영광과 능력성을 깨닫게 해 주는 비유요 비사다. 믿는 사람이 영의 눈을 뜨고 말씀에 붙들려 살면 이 세상의 만사를 보면서 영적인 면을 깨닫게 되어서 영능의 실력자가 되고, 존귀 영광을 얻고, 이름이 알려지고, 자기의 판도가 넓어지는 거다. 세상은 임시적인 곳이지만 이런 이치가 들어있으니 우리는 이 세상을 자타의 구원에 이용 활용 사용하면서 영적인 면의 실력이 올라가고, 판도가 넓어지고, 하나님께서 잡고 쓰시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이게 참 인간이다. 비유와 비사 속에는 상징도 있고, 형상도 있고, 형태도 있고, 징조도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이 영적인 면을 깨닫게 했다.
소경을 구분하면 육신의 소경과, 영의 소경이 있다. 육신의 소경은 세상에 있는 동안만 소경이다. 임시적인 소경이다. 임시적인 소경이라고 해도 예수를 믿고 옳은 이치를 깨달았다면 이 사람은 영의 소경이 아니기 때문에 눈을 뜬 거다. 영의 눈을 뜬 사람은 육신의 눈이 소경일지라도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육신의 눈을 떴어도 영의 눈을 뜨지 못했다면 세상일은 잘 할지라도 하나님의 일은, 사람을 살리는 일은 못한다.
육신의 소경으로서 앞을 보지 못하는 게 얼마나 원망스러울까? 그 안타까움을 어찌 말로 다 표현을 할 수 있겠느냐? 그런데 앞을 보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안약이라고 준 게 이 안약으로 인해 눈이 멀게 되었다면 이 노릇을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문제는 교회에서도 교인들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하기는커녕 멀게 하는 일이 있다는 점이다.
육적인 소경은 세상을 다 가졌다고 해도 죽을 때까지 밤이고, 도둑이 와서 다 가져가도 알지를 못하고 다 도둑을 맞게 된다. 예수 믿는 사람이 영적인 면의 눈을 뜨지 못하면 콩이나 녹두나 팥 속을 좀벌레가 야금야금 파 먹듯이 흐르는 시간이 자기의 시간성 물질성 노력성 젊음성을 야금야금 다 파 먹는다. 이렇게 되면 껍데기는 믿는 사람인데 속을 보면 쓸모가 없다. 이런 사람에게서 사람 사는 맛을 느낄 수 있겠느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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