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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요한복음 궁극이............... 조회 수 27 추천 수 0 2025.07.20 08:5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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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10:7-8 
설교자 : 김경형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107-8: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하면 사람이 들어가기도 하고 나가기도 한다. 사회에서 보면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고 한 곳이 있기 때문에 문이 있다고 해서 함부로 들어가면 도둑취급을 받는다. 이 문은 자격자의 문이다. 그 다음에 시험에서 몇 점 이상이라야 들어갈 수 있는 실력의 문이 있다. 또한 몇 시부터 몇 시까지 문을 연다할 때는 기회의 문이다.

 

이런 여러 가지 성격의 문이 있는데, 예수님은 나는 양의 문이다라고 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이 문으로 들어가느냐? 양이라야 들어간다. 이리는 못 들어간다. 다른 동물은 못 들어간다. ‘염소를 바쳐라. 소를 바쳐라하는 게 있는데, 이것은 제사의 성격을 말한다. 소는 힘 있는 제사요 순종의 의미다. 이게 아니면 통과가 안 된다. 성격과 성질의 성품성을 말한다.

 

나는 양의 문이라고 했는데, 양의 성격이 어떠냐? 양은 순하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잘 만들어진 것처럼 주님으로 잘 만들어진 양(성도)은 천국에 들어간다는 의미다. 기독교는 영의 눈으로 보는 하나님의 신적 사역의 세계인 고로 질을 모르면 타 종교와 같은 하나의 종교처럼 된다. 예수 믿으면서도 기독교의 본질을 모르면 믿고 싶으면 믿고, 안 믿고 싶으면 안 믿는 식의 하나의 종교인에 머물게 된다.

 

기독교는 하나의 종교가 아니다. 이건 사회에서 하는 말이고, 기독교라고 할 때 기독은 그리스도다. ‘그리스도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쉽게 말하면 성령님의 역사로, 하나님의 신으로 만들어진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게 기독자다. 그런데 주님의 사람으로 안 만들어진 상태에서 교회에 다니고 직분을 받았다면 이 사람은 표면적으로는 기독자이지만 질적으로 보면 곰과 같은 성격이 들어있을 수도 있고, 사자와 같은 성격이 들어있을 수도 있다. 이런 것을 깨달으라고 하나님께서 짐승을 만들어 놓고 우리로 그것들의 성격과 성질을 보고 자기 자신의 신앙의 성격과 성질을 깨닫게 하신 거다.

 

성경에 사람을 성격적 성질적으로 짐승처럼 표현을 해놓은 게 있는데, 교회에서 사람을 위한다고 하면서 육적으로만 위하게 되면 이것은 영의 눈으로 보면 영원히 갈 성도의 영인성장을 막는 것이기 때문에 사기꾼이요, 간사요, 궤휼이요, 마귀의 시험이다. 그래서 우리는 안 믿는 사람들처럼 하나의 종교의식이나 활동을 보고 신앙을 판단해서는 안 되고 사람 속에는 생각과 마음이 활동을 하는데 이것이 무엇을 붙잡고 어떤 목표를 가지고 하는 활동이냐?’ 하는 것을 가지고 판단을 해야 한다. ‘말과 행동을 하는 게 악령의 감화냐, 성령의 감화냐?’ 이걸 보고 판단을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어 놓으신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이 있으니 이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온전이다. 그런데 사단 마귀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성품의 온전을 입지 못하게 사람을 통해서나, 거짓 종들을 통해서나, 한 집안 식구를 통해서나, 부모 형제나 이웃이나 친구를 통해서나, 교회를 통해서 역사를 하는데, 성경은 이런 것을 다 구별 분별할 수 있는 원칙을 말씀해 놓았다.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할 때 여러 가지 비유나 이유나 예를 들어서 말을 할 수 있지만 이 문은 하나님의 본질로 된 성격과 성질이라야 통과를 할 수 있는 문이다. 구체적으로, 예수 믿는 사람이 통과하는 문이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사람도 별스런 성격과 성질이 있다. 이단성의 성질과 거짓성의 성질도 있다. 예수님에게는 이런 질이 없기 때문에 양이 이질을 가지고 이 문을 통과하려고 하면 이 문에 걸린다.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하는 것은 질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면 질이 뭐냐? 진리본질인데, 이 본질을 분해하면 시간적으로 영원히 가는 거고, 물질에 속한 게 아니라 영적인 신령세계에 속하는 거다. 물질에 속한 것은 다 불타고 썩고 변질이 되지만 본질은 변질이 없고, 제일 강하고, 영원히 간다. 이것이 우리에게 올 때는 하나님의 지혜지식성이나 도덕성이나 능력성으로 나온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항상 질적으로 동일하시다. 그래서 시간에 매이지 않는다. 시간초월이다. 따라서 교회에서 시간 속에 든 것을 가지라고 하는 것은 거짓된 교훈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하늘의 거, 시간에 속하지 않는 거, 불에 타지 않는 거, 사건 환경에 동요되거나 동화되지 않는 거, 바람에 불려가지 않는 하늘의 것을 전하셨다. 성경은, 그리고 본질의 믿음을 가진 사람은 시대가 변하고, 환경이 변하고, 사람이 변해도 요동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물질계를 다스리듯이 본질의 믿음을 가진 성도는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고, 주위의 환경을 다스리고, 물질을 자타의 구원에 이용 활용을 잘 한다. 이 사람이 능력자다. 예수 믿는 것에는 이게 들어있다. 그럼에도 예수 믿는 사람이 눈에 보여지는 가견적 현상적인 것에 욕심을 내고 달라고 한다면 거짓 믿음이다. 이런 믿음으로 계속 나가게 되면 속성적으로 주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게 없기 때문에 끝에 가서는 이단이 된다.

 

오늘날 기독교계에서 어떤 사람을 향해 이단이라고 손가락질을 하는데, 우리는 그들과 합세해서 그 사람에게 함부로 이단이라고 속단을 내리면 안 된다. 왜냐? 이단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남에게 이단이라고 손가락질을 하다가는 너도 똑같은 이단자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이단이다. 거짓이다할 때는 하나님의 본질을 놓고 말을 해야 한다.

 

믿는 사람은 세상을 판단할 위치에 있는 거다. 그럼에도 세상에게 비판받을 짓을 한다면 이 사람은 신앙의 성질이 혼성이고 혼합이다. 혼성적인 신앙을 가지게 되면 자기와 비슷한 자들과 합세를 하게 되니 이러면 혼합성이 된다. 그리고 이런 자들은 구별성이 있는 일이 아닌 혼돈적인 일을 한다. 기독자는 세상을 하나님의 창조의 법을 가지고 봐야 한다. 우리는 지키고 다스리고 통치할 입장인데 믿는 사람이 바른 것을 잡지 못하면 이런 것에 휘말리게 된다.

 

교회가 사회에 책임성을 느낀다면 교회에서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를 하나님 앞에서 생각을 해야 한다. 평소에 바른 것을 잡지 못하면 바람이 불면 움직이게 되어있다. 배는 다 닻을 가지고 있는데, 정박을 해서 닻을 내리지 않으면 이 배는 물결을 따라, 바람을 따라 흘러간다. 그래서 배라고 하면 밧줄과 닻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예수 믿는 자기는 진리본질의 밧줄이나 닻을 가지고 있느냐?

 

나는 양의 문이라.’ 이 문은 하나님의 본질로 되어있다. 성격적 성질적 성분적으로 주님과 같은 속성으로 되지 않았으면 양의 문이 아니다. 그러면 가짜 문이라고 해도 이 문을 통과만 하면 가짜 문이 진짜 문이 되는 거냐? 아니다. 양의 문은 하나밖에 없다. 신앙에서 원칙을 모르면 편법이 나오고, ‘이 정도면하는 인조적인 행동이 나오게 된다.

 

양의 문은 하나님의 본질로 된 하나밖에 없는 절대 정확한 규격이다. 이 문은 성도들이 기본적으로 들어가는 문이요,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과 영능의 실력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기도 하다. 후자의 문은 기회의 문이다. 우리 교회에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양의 문으로 통과할 수 있는 기회다. 이미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이 문을 통과했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주님이 책임을 지고 있고, 그런데 교회는 시련과 연단을 통해 영능의 실력자가 되어야 하는데, 이렇게 되는 것은 자기에게 사건과 환경이 다가왔을 때 말씀을 잡고 이겨나오면, 즉 주어진 기회를 이기고 나오면 이 문을 통과하게 된다.

 

자기에게 다가오는 사망성의 시험을 이기면 양의 문을 통과하게 되지만 이 시험에서 구원을 이루지 못하면 사망성이요 심판성이다. 교회는 죄와 사망성을 이기고, 선악과를 따먹은 도덕성을 이길 수 있는 진리성 생명성을 가져야 한다. 마지막 시대의 교회가 이게 없다는 게 슬픈 일이다.

 

믿는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은 우리의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이 되어있기 때문에 내가 신경을 쓸 게 아니다. 우리는 이 문은 이미 통과가 되었다. 문제는 영능의 실력이다. 이 실력의 문을 통과해야 한다. 이 실력에 능한 자는 그만큼 교회에서 우두머리요, 사회에 나가도 사회에서 필요한 사람이다. 요셉은 애굽에 내려가서도 다스리더라. 노예로 잡혀간 요셉이 애굽의 실권자요, 바로 왕은 허수아비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 영능의 실력자에게는 이렇게 들어가는 거다. 요셉은 계속 생명과를 먹고 생명과의 사상으로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된 거다.

 

우리의 이룰구원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된다. 이게 절대 정확한 규격이다. 우리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통해 이룰구원을 이뤄가는 거다. 이게 하나님의 온전이다. 하나님의 온전으로 되는 여기에는 모든 말씀이 이 규격에 맞춰서 나온다. 인간 조작배기로는 안 된다.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인도자들의 설교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 규격에 맞아야 생명 길이요, 좁은 길이요, 하나님 한 분의 의사로만 가는 길이다. 그러나 넓은 길은 각자가 주장하는 대로 제 멋대로 믿고 제 멋대로 간다. 교회에서 세상화로 가르치면 여기에는 진리의 법이 없기 때문에 교인들이 제 멋대로 간다. 교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는데 사람이 살려면 숨을 쉬는 것이 절대이듯이 하나님의 법은 인간이 시인하고 말고가 없이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는 거다.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게 하나님의 의사단일 길의 규격에 맞아야 성도들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온전해지고 참사람으로 만들어진다. 참사람으로 만들어지는 여기에는 지혜도 있고, 지식도 있고, 명철도 있고, 도덕성도 고차원적이다. 이게 인간창조의 목적대로 바로 들어가는 거다. 그런데 안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은 없고, 자기 머리 위에 세상을 올려놓고 산다.

 

세상사람들은 물질이 행복의 조건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 다음이 너요, 네 발아래는 세상이라고 한다. 세상의 것을 밟으라는 말이다. 그런데 세상 속화된 교인들은 세상을 자기 머리 위에 올려놓고 하나님께 이걸 이뤄달라고 기도를 한다. 이것은 자기 머리 위에 세상을 올려놓고 이 세상을 위해 하나님을 자기의 종으로 부려 먹는 셈이다. 사람이 이렇게 살면 그 결과는 생각도 찌그러지고 일도 찌그러진다. 그러니 고통이요 근심이요 번민으로 살 수밖에 없다.

 

기독자들은 생각이 사람 쪽으로 되어있고, 안 믿는 사람은 일 쪽으로 되어있다. 일 쪽으로 된 것은 자기를 위함에 들어있다. 그래서 자기를 위해 일을 하다가 머리를 잘못 쓰면 자기가 피해를 입게 된다. 일이 도덕성이 있느냐? 자유가 있느냐? 자기가 일을 하다가 일이 잘못되어서 피해를 입는 것은 일 때문이 아니라 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일을 탓하는 것은 귀신들린 정신이다. 우리는 이런 정신을 정상적으로 정확하게 고쳐야 한다. 이러려면 바른 지식을 받아야 한다.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예수님보다 먼저 왔다는 게 무슨 뜻이냐? 예수님보다 먼저 태어났다는 말이냐? 이방종교의 교주 중에 석가는 예수님보다 먼저 태어났다. 아니면 주님의 진리진실보다 다른 것을 먼저 받아들였다는 말이냐? 이게 맞다. 이렇게 본다면 예수님을 믿는 자기는 질적으로 하나님의 본질을 받아들였느냐? 교회에 와서 하나님을 만났다고 할 때 그 교회의 분위기와 가르침이 물질성의 질이라면 하나님을 만난 게 아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고난을 받고 죽는다고 하자 베드로가 주여, 그리 마옵소서라고 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고 했는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베드로의 생각이 예수님께서 하려고 하시는 일보다 앞섰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것은 성도의 구원을 위한 일이요 이 일을 위해 죽으러 오셨는데 주여, 그리 마옵소서라고 하는 것은 죽지 말라는 것이니 이는 성도의 구원을 위한 일을 방해하는 말이 되는 거기 때문에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고 하신 거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내가 예루살렘에 가면 유대 종교인들에 의해 죽게 된다라고 하실 때 베드로가 , 죽으세요라고 해야 하는 거냐? 베드로가 어떤 말을 할지라도 예수님의 의사성에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에는 하나도 맞지 않는다. 왜냐? 베드로가 주여, 그리 마옵소서. 즉 죽지 마옵소서라고 한 게 인간의 정에 뿌리를 박고 한 말이냐, 하나님의 대국적인 뜻에 뿌리를 박고 한 말이냐? 천국에 뿌리를 박고 한 말이냐, 세상에 뿌리를 박고 한 말이냐? 인간의 정에 뿌리를 박고 말을 한 거고, 세상에 뿌리를 박고 말을 한 거다.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에 따라 목적관이 달라진다. 우리는 이걸 봐야 한다.

 

인간의 정에 박아놓고 한 베드로의 말은 예수님의 죽음을 욕되게 만드는, 즉 구원을 거스르는 말이다. 구원이 안 되게 하는 말이다. 같은 이치로 세상적으로 흐르는 설교는 그 방향과 질이 세상성이니 이것도 성도의 구원을 거스르는 말이 된다. 구원이 안 되는 설교를 들으면 성도들의 신앙이 저질이 되니 안 믿는 사람들과 똑같은 수준이 되어버린다.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라고 하는 것은 절도나 강도는 재산도 빼앗아 가고, 목숨도 빼앗아 가고, 사람의 일생도 빼앗아 가고, 시간성도 빼앗아 가고, 신앙을 하는 투자성도 빼앗아 가고, 젊음성도 다 빼앗아 가듯이 교회에서 세상적인 가르침은 사람을 영원히 행복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목숨과 재산과 신앙을 해친다는 거다. 세상적으로 흐르는 교회에서는 교인들이 피땀 흘려서 번 돈으로 낸 헌금을 사람들의 구원에 쓰기 보다는 목사 자기의 영예와 종교적인 활동에 써버린다.

 

하나님께 드린 헌금은 우선은 교인들이 특수한 은혜를 받게 하기 위한 곳에 써야 한다. 즉 복음에 투자를 해야 한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본질로 가는 목사가 어디에 교회를 세우는데 물질이 필요하다고 하면 같은 진리본질로 가는 교회들이 도와야 한다. 이게 성경적이다. 사도바울은 예루살렘의 교회가 가난해지니까 다른 곳에서 조달을 해서 필요를 채우게 했다. 이게 예수 믿는 형제다. 형제를 사랑치 않으면 거짓말쟁이다. 이것만 아니라 안 믿는 사람들이 교회로 통한 특수은혜를 받게 하기 위한 일에도 하나님께 드린 헌금을 써야 한다. 그런데 이때는 지혜를 써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사람을 거지로 만들어 놓게 되거나 강도로 키우는 결과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거짓된 종은 교인들의 노럭성 시간성 투자성을 다 빼앗아 가기 때문에 절도요 강도다. 그런데 이 거짓된 종이 다른 종을 길러내서 이 종이 다른 곳에 교회를 세운다면 이 종도 그곳에서 절도요 강도 짓을 하게 된다. 그 증거가 뭐냐? 이 목사가 교인들의 헌금으로 자기 집을 사고 땅을 사건 안 사건 간에 자기 교회 교인들에게 진리의 말씀이 아닌 세상의 정신을 넣어주기 때문에 교인들의 신앙이 말라버리는 거다. 교인들의 신앙이 자라지 못하는 게 증거다.

 

교인의 입장에서는 자기가 교회에서 열심히 충성봉사를 하면서 재산과 목숨까지 바쳤는데 세상을 가르치는 교회에 다니기 때문에 말씀 깨달음으로 하나님의 온전의 성품으로 만들어진 게 없다면 이 사람은 망했구나. 이런 사람은 교회의 직분이나 교회에 오래 다닌 것을 자랑하지만 자기의 속사람은 완전히 무능자다.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참 주님의 양은 절도나 강도의 말은 듣지 않는다는 거다. 그러면 참 교인들이 왜 절도나 강도의 말을 안 듣는 거냐? 천국복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진리본질의 말씀이 아니기 때문이다. 천국복음은 사람을 속성적으로 천국의 사람으로 만든다. 그런데 계:에 보면 어린 양이 있고, 새끼 양이 있다고 한다. 어린 양은 주님을 상징하고, 새끼 양은 세상에 속한 믿음을 말한다. 어린 양이나 새끼 양은 모양이 똑같기 때문에 같이 앉혀놓으면 겉으로는 구별이 안 된다. 그러나 사람 속에 들어있는 신앙사상을 보면 알 수 있다.

 

성경에 양과 이리도 나오는데, 양과 이리를 무엇으로 구별할 거냐? 육신의 눈으로 모양새를 보고 구분하는 것은 다 할 수 있는 거지만 이리에게 양의 가죽을 입혀놓으면 어떻게 구별을 할 거냐? 양의 피와 이리의 피가 같으냐? 하나님께서 개체마다 종별마다 피를 다르게 만들어 놨기 때문에 이것으로 알 수 있다. 쥐에게 코끼리의 피를 집어넣으면 쥐가 코끼리가 되느냐? 사람에게 피가 모자랄 때 짐승의 피를 집어넣으면 되느냐? 그런데 이것은 교회에게 주는 말씀이니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을 정신과 사상이 거듭났고 안 났고로 구별을 해야 한다.

 

세상에 속한 새끼 양은 세상에 속한 소리를 듣는다. 세상의 소리를 듣는 교회는 세상에 속한 교회로구나. 세상적으로 믿는 사람이구나. 세상에 속한 인본주의 교회는 천국복음의 구원의 소리를 알아듣지 못한다. 같은 교인이고, 같이 예수를 믿는데도 왜 이렇게 못 알아들을까? 그 속에서 움직이는 영이 다르구나. 또는 소원 목적이 다르구나. 물병에 물이 가득 차 있는데 여기에 참기름을 넣으면 섞이느냐? 이와 같은 이치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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