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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능력인 하나님의 사랑

로마서 정용섭 목사............... 조회 수 47 추천 수 0 2025.07.20 20:5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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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롬5:1-5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1104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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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https://youtu.be/Tt6rflBUjUo 
성경본문 : 로마서 5:1-5 
구원의 능력인 하나님의 사랑
롬5:1-5, 성령강림 후 1주 (삼위일체 주일), 2025년 6월 15일
 
이신칭의
 
바울은 롬 4장에서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사실을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서 짚었습니다. 소위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입니다. 그는 이어지는 5장에서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의 삶에 관해서 말합니다. 1절은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믿음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는 말을 일상적인 이야기로 바꾸면 이렇습니다. 여기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나가는 배우가 있다고 합시다. 그가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영화는 늘 ‘대박’을 터뜨리기에 그 사람의 출연료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습니다. 비중이 낮은 조연으로만 뛰는 삼류 배우가 있다고 합시다. 그의 출연료는 최저 생활비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런데 앞의 배우는 자기의 인기에만 몰두하고, 뒤의 배우는 영화 자체에 집중합니다. 영화 투자자와 대중들은 일류 배우에게 열광하지만, 영화의 본질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삼류 배우를 최고로 칩니다. 바울의 설명에 따르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기준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와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믿음입니다.
 
이런 가르침은 관념적이어서 우리의 실제 삶에서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순전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만 의로워지고 세상살이에서는 완전히 실패해도 괜찮냐고 말입니다. 여기서 의롭다는 말을 행복이나 즐거움이나 영혼의 만족으로 바꿔도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은 위 본문 1(b)절이 말하듯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립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생명과의 평화입니다. 그런 사람이 실제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가난해도 그는 영혼의 평화를 잃지 않습니다. 세상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 명예를 부러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2(b)절에서 이런 은혜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희망하면서 즐거워한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물론 돈과 권력과 여흥이 신처럼 숭배되는 이 세상에서는 이렇게 살기가 만만치는 않습니다. 세상이 한편으로는 우리로 온갖 걱정을 머리에 이고 살아야만 하는 것처럼 위협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돈만 해결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듯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여전히 믿음을 통한 의로움 가운데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자는 바울의 고백을 인정할 수 있을까요?
 
환난에서 희망까지
 
바울은 세상물정 모르고 하나님만 열광적으로 믿는 광신자가 아닙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어려움을 하나님께서 모두 간단히 기계적으로 해결해 주신다고 떠벌이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잘 믿기만 하면 건강과 물질 축복은 두말할 것도 없고, 자식의 팔자도 피고, 만사형통한다는 주장은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아예 성립되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을 전하는 바울을 보십시오. 결혼하지 않았고, 따라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지도 않았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뒤로 복음을 전하다가 고생을 바가지로 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에게서 인정받지도 못했습니다. 바울은 시련을 외면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거기에 주눅 들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 문제를 영적 합리성에 근거해서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3-4절을 들어보십시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患難)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바울은 놀랍게도 환난(근심과 재난) 중에도 즐거워한다(자랑한다)고 말합니다. 이게 사실은 말이 안 됩니다. 근심과 재난이 있으면 밤잠을 설치기 마련이니까요. 현대인은 없는 근심거리까지 끌어다가 미리 걱정하니까요. 모든 사람이 질색하는 환난마저 그가 자랑하는 이유는 환난이 결국 희망의 사람이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 논리에서 네 단어가 이어집니다. 환난, 인내, 연단, 소망이 그것입니다. 근심과 재난이 인내심을 키우고, 인내심을 통해서 내면이 단단해지고, 내면이 단단해지면 희망이 생깁니다. 그 희망은 2절 후반절이 가리키듯이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 ”라는 문장에 나오는 ‘바라고’가 바로 그리스어로 ?λπ??(hope)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희망하는 삶의 태도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자랑거리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환난도 결국에는 이런 희망으로 연결되기에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희망하는 삶은 어딘가 우리의 현실에서 거리가 있게 느껴지고 경제적으로 잘살게 되는 것에 대한 희망이 실제로 우리의 자랑거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이런 생각이 21대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여야 구별 없이 모든 유력 후보는 경제 성장을 가장 중요한 선거 표어로 내세웠습니다. 국민의 염원이 거기에 담겨 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직접 표가 되지 않는 이야기는 피합니다. 예를 들어서 차별금지법이 그렇습니다. 유력 후보들은 그것을 반대하거나 유보했습니다. 이번 대선 결과는 이렇습니다.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49.42% 지지를 받아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국민의힘 후보는 41.15% 지지를 받았고, 개혁신당 후보는 8.34% 지지를 받았습니다. 유일하게 차별금지법을 찬성하고, 경제 성장보다는 경제 정의를 내세운 민주노동당 후보는 0.98% 지지를 받았습니다. 진보적인 후보가 1%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는 게 우리나라 정치 지형의 현주소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총체적으로 성장 만능론이라는 이데올로기에 포로가 된 건 아닐까요? 하나님의 영광은 개에게나 던져주고, 우리는 중단없이 무한 성장하겠다는 야망을 불태우는 건 아닌가요? 이런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만이 우리의 희망이라고, 그래서 환난마저, 가난과 질병과 외로움의 운명마저 자랑한다고 말할 수 있나요?
 
환난에서 시작해서 인내와 연단을 거쳐서 희망에 이른다는 바울의 설명을 앞에서 잠깐 짚었는데 조금 더 실질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자영업자가 실패해서 수억 원의 빚을 졌을 수도 있고, 또 어떤 이는 큰 병에 걸릴 수도 있고, 친구나 연인에게 배신당할 수도 있습니다. 자식이나 형제가 심각한 장애를 겪을 수도 있습니다. 누구나 피하고 싶은 환난을 실제로 당했다고 합시다. 거기서 자포자기에 떨어지지만 않는다면 다른 사람이 흉내 낼 수 없는 인내심이 생깁니다. 인내심이 단단해지면서 연단에 이릅니다. 우리말 성경이 연단이라고 번역한 그리스어 δοκιμ?는 character, worth, proof, evidence 등등의 뜻이 있습니다. 루터 성경은 이 단어를 증명이라는 뜻의 Bewahrung으로 번역했습니다. <공동번역> 성경은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라고 번역했습니다. 요즘 식으로 번역하면 삶의 ‘내공’입니다. 삶의 내공이 깊어지면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희로애락으로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삶의 본질에 천착할 수 있습니다. 환난 없이 즐거운 인생을 산 사람을 부러워하지도 않습니다. 쓸데없는 욕심과 망상이 사라지면서 오히려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우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의 신비까지 알게 됩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만이, 즉 하나님의 은혜만이 자기 삶의 목표라는 사실을 더욱 절실하게 느낍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쩔쩔매는 환난이 결국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희망하게 만든다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δ?ξα το? Θεο?)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현존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다음과 같은 천사들의 합창을 들었다고 합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 6:3) 누가복음은 예수 탄생 전승에서 다음과 같은 천사들의 합창을 전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영광이라고 해서 무지갯빛이 나거나 후광이 찬란히 빛나는 장면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세속적인 이해타산이 개입되지 않는 절대적 평화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서로 배척하고 죽이는 게 아니라 서로 환대하고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인지를 정확하게는 모릅니다. 하나님의 뜻이 온전하게 실현되는 상태라고만 말할 수 있습니다. 창조의 온전한 실현, 사랑의 온전한 실현,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온전한 해방, 생명과의 온전한 일치와 온전한 평화 등등이 그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런 세상을 희망합니다.
 
이런 희망을 안고 살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잠시 그런 희망에 휩싸이다가도 순간적으로 인간적인 분노와 서운함과 불평과 걱정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세상에서의 영광에 목말라합니다. 무엇이 문제인가요? 바울은 5절에서 정확하게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제가 그 뜻을 살려서 다듬은 문장으로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우리의 희망은 우리를 부끄러움에 떨어지지 않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채워졌기 때문입니다.
 
위 구절에 따르면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즉 절대적이고 온전한 평화와 사랑과 기쁨에 사로잡히지 못하는 이유는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 ?γ?πη το? Θεο?)이 우리 마음에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데 어떻게 평화롭게 살며, 사랑과 기쁨으로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나요? 인간에게는 그게 본래 불가능합니다. 자연적인 인간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정치와 경제와 사교육과 법조계와 의료계 등등, 사회 전반에서 벌어지는 탐욕적 현상이 어떤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어느 정치인도 지속 가능한 사회를 위해서 성장을 멈추자고 말하지 못합니다. 자기의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서 모두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요구를 비효율적이라고, 역차별이라고 무시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죄와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
 
교회 밖에 있는 여러분의 지인이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뭐냐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뭐라 대답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영광과 비슷한 의미로 ‘임마누엘’, 즉 하나님의 함께하심입니다. 그걸 느끼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이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받지 못한 겁니다. 마 6:28 이하에는 아주 중요한 예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솔로몬의 영광도 들의 백합화보다 못하다고 말입니다. 만인지상의 왕이 되려면 온갖 권모술수를 동원해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왕이 되어도 요즘 우리 주변에 널려있는 망초보다 나을 게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흔하디흔한 망초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니까요. 그걸 알면 하나님의 사랑도 아는 겁니다.
 
가장 결정적이고 궁극적인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건져내신 구원 사건입니다. 그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롬 5:6-11절에 나옵니다. 이 단락에서 특징적인 표현이 반복됩니다. 6절에서는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라 나오고, 8절에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가 나오고, 10절에서 다시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가 나옵니다. 연약한 우리, 죄인인 우리, 원수인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께서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났다는 겁니다. 8절만 읽겠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자기들은 죄인이 아니니까 예수의 죽음은 자신들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주장할 겁니다. 자기들 스스로 구원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그리스도인들 ‘너희나 잘해!’라고 말할지 모르겠군요. 그렇습니다. 현대인은 자기 구원에 대한 자신감과 열정이 넘칩니다. 더 풍성하고 더 쾌적하고 더 낭만적이며 더 흥미진진한 인생을 설계하느라 정신이 없을 지경입니다. 어쩌면 앞으로 완벽한 지성과 외모와 건강을 갖춘 아이들만 세상에 태어날지 모릅니다. 태아의 유전자를 과학 기술의 도움으로 조작할 테니까요. 그런 세상이 와도 인간은 여전히 만족하지 못할 겁니다. 더 좋은 조건에서 더 심하게 경쟁하고, 더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몸부림을 칠 겁니다. 선한 일을 하면서도 인간은 자기 중심성을 버리지 못하니까요. 교만이라고도 하는 그 자기 중심성이 그리스도교가 죄라고 말하는 인간의 본질입니다.
 
죄라는 본질에 묶인 인간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증이라는 이 말씀이 실제로 무슨 뜻일까요? 그 교리가 담는 내용이 무엇일까요? 롬 5:9절에서 분명한 대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를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것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예수께서는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로 살았던 분이십니다. 그는 신성모독과 사회 소요죄라는 죄목으로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그를 제거한 이들은 유대교 권력자들과 로마 정치권력자들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엘리트들입니다. 그들은 늘 세상에서 큰소리를 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가장 큰 악을 행한 겁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세상 권력이 아니라 예수를 따랐습니다. 이들을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라는 표현이 롬 5:1절과 9절에 나옵니다. 이 표현이 전체 단락의 토대를 이룹니다. 이 단락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 전반의 토대입니다. 그 말은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세상 권력자들에게 잘 보이지 않아도 얼마든지 충만하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런 단계로 들어가면 영혼의 평화를 얻습니다. 온 세상에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해방하는 구원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붙들고 각자의 일상을 수행적으로 살아갑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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