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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사65: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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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 참고 : | http://dabia.net/xe/11042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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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https://youtu.be/Zg3HipEbT-g
성경본문 : 이사야 65:1-9
“내가 벌하리라!”
사65:1-9, 성령강림 후 2주, 2025년 6월 22일
자연숭배
오늘 설교 제목은 “내가 벌하리라!”입니다. 불편하게 들릴 수도 있는 제목입니다. 우리말 성경 <개역 개정>의 사 65:7(b)은 “그들의 품에 보응하리라.”입니다. 이를 <공동 번역>은 “내가 톡톡히 … 벌하리라.”라고 번역했습니다. <공동 번역>이 더 자연스럽게 들립니다. 사 65:7절 전체를 <공동 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산들 위에서 분향하고 언덕들 위에서 나를 모욕하는 그들의 죄를 조상들의 죄와 겸하여 벌하지 않을 수 없다. 야훼의 말이다. 내가 그들의 소행대로 톡톡히 벌하리라.
선지자들의 문장에는 ‘여호와의 말씀이다.’라거나 ‘여호와가 말씀하셨다.’라는 표현이 종종 나옵니다. 그래서 그들의 선포 행위를 신탁(神託)이라고 합니다. 선지자들도 인간적인 한계가 있기에 그들의 신탁이 맞을 수도 있으나 틀릴 수도 있습니다. 그걸 구분하기가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구약 역사에서 거짓 선지자가 오히려 큰소리칠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렘 28장에 나오는 예레미야 선지자와 하나냐 선지자의 충돌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그들의 소행대로 톡톡히 벌하리라!”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신탁은 옳은가요? 옳다면 왜 옳은가요?
답을 찾으려면 먼저 벌 받게 될 이들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아는 게 필요합니다. 위에서 인용한 구절에 따르면 여호와께서 “산들 위에서 분향하고 언덕들 위에서 나를 모욕하는 그들의 죄를” 벌하십니다. 비슷한 내용이 앞선 구절인 3-4절에 조금 더 자세하게 나옵니다. 이렇습니다.
곧 동산에서 제사하며 벽돌 위에서 분향하여 내 앞에서 항상 내 노를 일으키는 백성이라 그들이 무덤 사이에 앉으며 은밀한 처소에서 밤을 지내며 돼지고기를 먹으며 가증한 것들의 국을 그릇에 담으면서 …
여기서 ‘동산’은 다산 종교의식을 행하던 거룩한 수풀을 가리킵니다. 이사야는 이미 1:29절에서 “너희가 기뻐하던 상수리나무로 말미암아 너희가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요 너희가 택한 동산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할 것이며”라고 발언한 적이 있습니다. 무덤과 은밀한 장소(동굴)는 죽은 자들의 영에게 꿈으로 계시를 받으려고 잠자면서 머물던 곳을 가리킵니다. 돼지고기와 가증한 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 먹지 말아야 할 것들입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가나안의 이방 종교의식에 참여해서 거기에 사용되었던 제물을 나눠 먹곤 했습니다. 이방 종교의식에 참여한 고대 유대인들의 행태를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으신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단호한 어조로 “여호와께서 벌하신다.”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동산에서 분향하는 일이 왜 그렇게 잘못일까요? 우상 숭배니까 당연히 잘못이지, 하고 생각하면 충분한 대답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만으로는 고대 유대인이 왜 선지자들이 반복해서 경고한 바알 숭배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도 풀리지 않습니다. 고대인들은 자기들의 생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풍년과 다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풍년이 들어야만 굶주림을 면할 수 있고, 자녀가 많아야만 대가 끊이지 않습니다. 풍년과 다산을 보장하는 힘은 누가 봐도 자연에서 나옵니다. 풍년은 농부의 노력만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태양 빛이 절대적이고, 비가 적당하게 내려야 합니다. 그들에게 태양과 달과 비와 바람은 신이었습니다. 신격화한 자연 앞에서 분향하는 일은 합리적인 행동입니다. 아기를 낳는 일도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고대사회에서는 출산하면서 죽는 아이들과 출생한 뒤 일 년 안에 죽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생존의 근거인 풍년과 다산을 보장하는 신이 가나안에서는 남신(神)을 대표하는 바알과 여신을 대표하는 아세라였습니다. 그들은 성지 수풀이나 언덕에서 분향하고, 운세를 점쳤으며, 아주 특별한 경우에는 인신 제사를 지냈습니다. 자연숭배 의식을 실행한 것입니다.
저는 자연숭배, 또는 자연주의 인생관을 꼭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연을 존중하고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면서 자연 안에서 인간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이니까요. 우리나라의 토속신앙인 샤머니즘도 기본에서는 자연주의 종교입니다. 그 논리가 너무 기복적이고, 도덕과 윤리와 사회성은 무시되고 개인의 운명에만 치우친다는 점에서 품격이 떨어지기는 하나 자연과의 조화를 찾으려고 한다는 점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무속과는 거리가 먼 듯한 현대인들의 삶에도 비슷한 현상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경쟁적으로 경치 좋은 산이나 초원이나 바다에 가서 힐링한다고, 영혼의 휴식을 얻는다고 합니다. 자연 속에서 일종의 종교 경험을 하는 겁니다. 그들이 표면적으로 분향까지는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간절한 마음만은 거의 비슷할 겁니다.
자연숭배의 위험성
이사야는 왜 숲이나 동산에서 분향하는 이들을 하나님께서 벌하신다고 외치는 걸까요? 바로 여기에 근동 종교와 구약 종교의 차이가 있습니다. 구약 종교는 자연의 엄청난 능력 앞에서 놀라워하는 건 똑같으나 자연 자체를 숭배하지 않습니다. 태양을 신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자연도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견지합니다. 자연 자체보다는 자연을 창조한 존재가 있다는 사실에 집중했습니다. 그 존재는 하나님입니다. 그 창조주 하나님은 자연을 초월하는 분입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말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하나님을 자연의 어떤 형상으로 제한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자연을 초월하는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근동의 자연종교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태양이 뜨고 지는 걸 보고 누가 태양을 신으로 여기지 않을 수 있나요. 폭풍과 지진과 화산폭발과 해일과 일식 현상을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자연 현상을 그들은 신처럼 숭배했습니다. 일종의 자연 숙명론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런 자연 숙명론자들을 벌하신다는 이사야의 신탁을 듣고 당시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별로 진지하게 반응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들이 볼 때 세상은 자연주의 종교가 오히려 합리적이었으니까요. 그게 대세였으니까요. 세계의 모든 제국을 보십시오. 다 자연주의 종교가 중심이었습니다.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등등이 다 그렇습니다. 지금 이사야 선지자의 신탁을 듣는 고대 유대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50년 이상 머물다가 조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본 바벨론 제국의 문명은 거대하고 찬란했습니다. 그걸 경험한 고대 유대인들은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기와 비교하면 유일신 여호와를 믿던 그들은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었습니다. 열등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가난하게 살던 1960-80년대 미국이나 서유럽을 생각하면 됩니다.
나름 합리적이고 매력적인 자연주의 종교를 따르는 게 왜 문제일까요? 그들이 악하고 부도덕하게 살기 때문일까요? 인생이 쪼그라들기 때문일까요? 사업이 망할까요? 삶이 유치해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따르는 고대 유대인들도 부도덕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나 믿지 않으나 실제의 삶은 거의 비슷합니다. 물론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으면 믿지 않는 사람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에서 정의와 평화를 실천하면서 살기는 하나, 그렇게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많지 않습니다. 거꾸로 믿음이 없어도 세련되게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사람의 됨됨이 자체만을 기준으로 자연주의 종교를 비판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그들이 숭배하는 자연이 궁극적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자연은 그렇게 아름답기만 하지 않습니다. 숲속에서도 살육이 벌어집니다. 자연이 어느 순간에 폭력적으로 변합니다. 젊은이들도 순식간에 늙은이로 변합니다. 더 근본에서 자연은 무상합니다. 무상한 대상을 신으로 섬기면 결국 허무에 떨어집니다.
교회 밖에 있는 지성인들은 여기에 다음과 같은 반론을 펼칠 겁니다. 우리 앞에는 자연 외에 더 절대적인 대상은 없다고 말입니다. 철저하게 유물론적인 사고방식입니다. 물리적인 자연만이 세상의 모든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진화론을 생각해 보십시오. 동산에서 분향하듯이 현대인은 진화론을 절대화하고 숭배합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뇌가 바로 인간입니다. 뇌가 신을 만듭니다. 「만들어진 신」과 「이기적 유전자」를 집필한 리처드 도킨스는 인간을 뇌 결정론, 유전자 결정론이라는 범주에 가두었습니다. 이런 주장은 이미 전문적인 학계에서 정당성을 잃었으나 일반 대중들은 그의 그럴듯한 전문 식견과 자극적인 언어 기술에 현혹당한 상태입니다. 그의 논리에서 가장 결정적인 허점은 부분의 합이 전체가 아니라는 명제를 놓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람의 몸에 해당하는 원소를 시험관에 넣고 가열한다고 해서 사람이 만들어지는 게 아니듯이 말입니다. 마르쿠스 가브리엘은 한 스위스 방송국(SRF)에서 진행된 “Worin irren sich Atheisten?”이라는 제목의 대담에서 오늘날의 무신론과 자연주의를 허무주의와 연결합니다. 무신론적 자연주의는 인간 삶에서 순간적인 즐거움 외에는 의미 있는 게 없다고 여기고, 삶의 목적을 이기적인 자기만족으로 축소합니다. 거칠게 표현해서 인생은 한번 가면 오지 못하는 순간에 불과하니까 자기 마음껏 즐겨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현대인의 영혼을 지배하는 생각이 바로 이것 아닌가요?
자연과학이라는 신
이사야 선지자가 경고한 자연주의 종교는 생물학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닙니다. 오늘날 인공지능 기술이 더 압도적인 종교 행세를 합니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구원할 것으로 사람들은 기대합니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은 신입니다. 요즘 저는 구글 인공지능 Gemini를 이용해 봤습니다. 그 이전에는 주로 인터넷 검색창을 통해서 정보를 얻었습니다. 검색엔진은 고정된 정보를 연결해 주기만 하나 인공지능은 스스로 답을 생성해 줄 뿐만 아니라 대화도 가능합니다. 그게 실제의 대화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인공지능의 잠재력이 엄청나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모든 분야에서 모르는 게 없으니까요. 각각 다른 분야의 박사급 조교 백 명쯤을 옆에 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목사들이 스트레스를 받는 설교 준비도 인공지능으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인공지능이 오늘의 시대정신이라서 그런지 이재명 대통령도 우리나라에 인공지능 고속도로를 깔자고 말할 정도입니다. 앞으로 현대인은 24시간 인공지능과 함께 살아갈 것입니다. 임마누‘엘’이 아니라 임마누‘AI’가 되겠지요. 그런 미래가 우리의 천국일까요? 그런 세상에서 우리는 정말 인간답게 살아갈까요? 이 질문은 태양신을 섬기던 이집트 시대 사람들과 다신론을 당연하게 받아들인 로마 시대 사람들이 정말 행복했을까, 하는 질문과 다르지 않습니다.
저는 자연과학의 정점이라 할 인공지능의 저력과 편리성을 인정하나 거기에 저의 운명을 맡길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들을 신으로 섬길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인공지능 앞에 분향하지 않겠습니다. 인공지능은 전기나 핵에너지처럼 자연의 속성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게 좋게 쓰이면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하나 나쁘게 쓰이면 인류를 파괴할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자신들도 인공지능을 신으로 섬기는 게 아니라고 말은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정신과 의식은 분향이고 숭배에 기울어졌습니다. 모든 답을 인공지능에서 찾으려고 하니까요. 인공지능만 있으면 삶이 즐겁다고 느끼니까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가나안 원주민들도 바알이 풍년을 보장하고, 아세라가 다산을 보장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영혼이 바알과 아세라로 충만한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들을 하나님께서 벌하신다고, 영혼이 죽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이런 경고가 현실로 느껴지기는 힘듭니다. 현실은 여전히 풍년과 다산 이데올로기가, 즉 유물론적으로 잘 먹고 잘사는 성장 이데올로기가 지배하고 있으니까요. 이걸 극복하기가 정말 힘듭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을 보십시오. 지방에서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많은 청년이 서울로 올라갑니다. 대학교도 ‘인 서울’이 목표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수도를 서울에서 충청권으로 옮기려다가 “대한민국의 수도가 서울이라는 점은 불문의 관습 헌법”이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포기했습니다. 서울과 지방의 격차는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집값의 차이만 보면 같은 나라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전국적으로 명문대학이었던 경북대학교와 부산대학교도 그 명성을 잃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저도 까딱했으면 서울에 있는 교회에서 활동했을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대한민국 사람들이 모두 서울에 집중하는 이유는 서울에서의 삶이 지방에서의 삶을 압도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요즘 하나님을 믿는지 별로 분명해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제법 많다는 생각이 종종 듭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물질과 돈과 즐거움만 추종하는 세상 사람들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으니까요. 그들에게 자연주의적인 삶은 나름으로 고급스러워 보이고, 나름 ‘있어’ 보이는 겁니다. 그들의 인격이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라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동산에서 분향하는 삶에 만족한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벌하신다는 말씀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또는 남의 일이려니 하고 외면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살고 싶은 분들은 그렇게 살아도 됩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빛을 보았기에 거기에 머물 수가 없습니다.
이사야는 8-9절에서 벌하지 않을 자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종이고, 하나님이 택한 자들입니다. 8(b)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도 내 종들을 위하여 그와 같이 행하여 다 멸하지 아니하고
이사야가 정말 전하고 싶었던 내용이 바로 이 말씀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종들을 멸하지 않겠다는 말은 그들을 허무에 떨어지지 않게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자연을 창조하고 자연을 초월하는, 그리고 고유한 능력으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만을 믿고 예배하며 희망합니다. 그 하나님에게서 구원의 빛을 느낍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남보다 더 잘 먹고 더 잘 마시며 더 멋지게 차려입는 일로 염려하는 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규정하시고, 제자들로 그런 염려에 떨어지지 말고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에 집중하라고 말씀하신 게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럴듯해 보이는 유물론적인 무신론이 전횡을 일삼는 21세기 오늘날 우리 함께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하나님의 종으로 각자의 일상을 용감하게 살아갑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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