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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요10:13-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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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김경형목사 |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0장 13절-15절: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3절-14절: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삯꾼 목자는 돈만 받아먹고 적당히 일을 한다. 교회에서 사례비만 바라보고 적당히 목회를 하는 것도 삯꾼 목자요, 신앙 질적인 면에서 성도들의 영적인 면은 돌아보지 않고 자꾸 육적인 쪽으로 가르치고 인도하는 것도 삯꾼 목자다.
목사님들의 집회(주-김경형목사님 생존 시에 교역자 대상으로 매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던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에 말씀이 좋다는 소문을 듣고 여기에 와서 말씀을 들으니 자기가 지금까지 육적 세상적으로 가르쳐 온 것보다 옳은 것은 알겠는데 강사 목사님의 말대로 하면 교회가 안 되겠다고 생각을 해서 모임에 안 나오는 목사가 있는데 이 사람은 삯꾼 목자다. 자기에게 옳은 정신 사상의 이치가 왔을 때 ‘그렇게 하다가는 교인들이 떨어져 나가겠는데, 교회가 부흥이 안 되겠는데’ 라고 한다면 이 목사는 세상 밑으로 도망을 간 거고, 이런 사고방식으로 교인들을 가르치는 것은 삯꾼 목자다.
교회는 영적으로 길러지는 것이니 옳은 것을 받아서 그 나라를 상속받을 때 영능의 실력대로 그 나라를 다스리고 누리게 된다. 그래서 믿음이 성장하라고 하는 거다. 이 안에는 교회를 다스리고 치리하는 면도 들어있다. 그러나 거짓 종은 이게 없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게 세상적이라면 밥 먹기 위해 목회를 하는 거고, 이는 거짓 종이요 삯꾼 목자다. 신앙의 이치를 모르면 이런 짓을 하게 된다.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양을 돌아본다는 것은 ‘성도들이 영적인 면으로 어떻게 자라나?’ 하면서 영적인 면을 돌보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양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다른 말로는 성도들의 영적인 상태를 전혀 모른다는 말이 되는 거다.
세상적인 교회에서는 충성봉사를 잘하는 것을 믿음이 좋다고 하지만 아무리 목숨을 내놓고 충성봉사를 할지라도 아가페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다른 말로 하면 거짓 목자나 삯꾼 목자에게 이용을 당하는 거다. 교회는 영의 눈으로 보는 거지 육의 눈으로 보는 게 아니다. 그래서 가난해도 믿음에 부요자가 있고, 물질 부요자라고 해도 믿음에 거지가 있다. 예수 믿으면서도 하나님의 심판에 떨어질 자가 많다.
교회는 영적인 상태를 밝히 알고 죄를 이기고 영능의 실력적으로 자라야 하는데, 영적인 면의 죄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일반적으로는 행동적으로 죄가 나타나야 죄라고 하지만 교회는 성령의 눈으로 보는 것이라서 사람 속의 정신의 향방과 질을 보고 ‘죄다. 의다’ 라고 한다. 한 마디로 마음에 주님을 품지 않고 세상을 품고 있으면 죄다. 마음에 세상을 품고 있으면 이 사람의 모든 이해타산과 행복성은 다 물질로 들어간다. 이건 죄요, 형벌이요, 심판이다. 이러면 이 사람의 머리는 썩어들어 간다. 그러니 끝내는 모든 활동이 중지될 수밖에 없다.
거짓 종이나 삯꾼 목자는 교인들이 세상물질에 먹혔는지, 세상 비진리적 이질적인 가르침을 받는 건지, 하나님의 의사단일로 적중적으로 가는 건지를 전혀 모른다. 거짓 종이나 삯꾼 목자는 교인들의 영적인 상태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양을 돌아볼 수 없는 거다.
세상은 민주주의 식으로 하는 거지만 교회는 하나님의 독권이다. 그렇다고 해서 목사가 억압으로 하라는 것은 아니다. 교회에서는 이치적으로 깨닫게 하는 거지 억압과 강압으로 누르는 게 아니다. 교인들로 육의 생각과 영의 생각을 구별 분별을 하게 하고, 산 것과 죽은 것, 사는 것과 죽는 것을 구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 교회 인도자는 이 일에 능통해야 한다.
오늘이 추수 감사절이라고 하는데, 교회는 세상의 유흥에 물들여진 축제 분위기에 빠지면 안 된다. 우리의 신앙사상은 날마다 유월절이요, 추수 감사절이요, 초막절이다. 이런 믿음이 될 때 자원적으로 충성봉사가 나오는 거다. 이런 절기를 잘 지키는 자체가 믿음이 좋은 게 아니라 평소에 자기의 삶 가운데서 신앙의 수입을 잡으면 이 사람은 늘 추수감사 절기를 지키는 거다. 추수감사 절기는 잘 지켰지만 영적인 면에서 추수가 없다면 어떻게 추수감사 절기를 지킨 게 되겠느냐? 우리는 성경의 유월절이나 오순절을 그 날 하루만 지키는 게 아니라 그 속에 들어있는 이룰구원의 사상은 계속이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선한 목자’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예수님을 선한 목자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은 선이시니 하나님의 선의 마음을 품고 계시기 때문이다. 선의 사람이 활동을 하게 되면 선한 활동이 나오고, 선한 분이 매를 들고 때려도 선한 행동이다. 왜냐? 하나님의 사람으로 닮아지라고 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한 부모는 자식에게 회초리를 들어도 선한 하나님의 마음으로 드는 거다. 매로 통한 말씀의 교육이 들어가는 거다. 그래서 아이에게 초달을 하면 늙어서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다고 하는 거다.
선한 목자는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다. 이걸 표현하자면 아름답고, 고상하고, 진리지식이 충만하고, 거룩하고, 신령적이고, 능력적인 것으로 인격화 성품화 자체와 실상화로 된 하나님의 온전이다. 이런 목자가 자기 양을 안다. 그러면 참 목자이신 주님께서 무엇을 보고 ‘내 양’이라고 하시느냐? 옷 입은 것을 보고? 모양새를 보고? 귀걸이를 한 것을 보고? 아파트가 큰 것을 보고? 인정정실을 보고? 주님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진리본질로 실상화 된 것을 보고 ‘나의 양이구나’ 라고 하신다. 주님의 참 종들도 이런 사람을 주님의 양이라고 한다.
오늘날 목사는 자기가 목자로서 어떤 성도가 주님께 속한 참 양인지 아느냐? 자기가 주님이 세우신 목자라면 주님의 양을 알아야 한다. 주님의 양이라고 할 때 인간세상의 종교적인 기준을 두고 하는 말인지, 주님의 성품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기준으로 하는 말인지?
이룰구원의 본질의 적중성을 가지고 보면 주님의 목자도 아니고 주님의 양이 아닌데 교회를 한답시고 세상적으로 흐르는 목사가 많은데, 이들의 입장에서는 자기의 기준이 세상이면서 목사 자기의 말에 순종을 잘하고, 물질 충성봉사를 잘하는 사람을 주님의 양이라고 한다. 주님 앞에 충성봉사가 아닌 목사 자기 앞에 충성봉사를 잘 하는 것을 보고 이런 말을 하는 거다. 이게 거짓 목자요 삯꾼 목자다. 인간의 수단 방법으로 교회를 크게 키웠을지라도 속 중심이 세상의 성질로 들어있다면 이 사람은 주님의 목자도 아니고 주님의 양도 아니다. 질을 두고 하는 말이다.
15절: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안다고 한다. 어떤 면을 아는 거냐? 껍데기냐, 속 중심이 선한 목자인 것을 아는 거냐? 아버지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것을 100% 가졌는지, 안 가졌는지 다 아신다. ‘인간적인 것은 하나도 없구나’ 하는 것을 아신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하나님께서 나의 무엇을 보고 당신의 아들이라고 하시는 걸까? 우리의 소원 목적이, 우리의 전 인격이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구원을 이뤄가는 것을 보시고 아들이라고 하신다. 그래서 오늘날 목사나 교인이 하나님의 자녀요 아들이라면 주님처럼 닮아지는 게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너는 내 아들이다’ 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으로 닮아지는 이 구원을 위해 당신의 삶을 통째로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치셨다.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글자대로 본다면 목자가 이리와 싸우다가 죽게 되면 양들은 이리에게 잡아먹히게 된다. 목자가 먹히면 양도 먹히는 거다. 그런데 이 말씀은 당신이 죽음으로 양이 산다는 말씀이니까 양을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버린다고 하는 것은 눈으로 보여지는 싸움을 말하는 게 아니라 정신 사상의 싸움을 말하는 거다.
그러니까 본 절의 말씀은 교회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지공법에 만족을 이뤄드린 번제로 드려진 삶을 말씀하는 거다. 이것이 있어야 십자가에 죽는 자격이 생기는 거다. 이 삶을 두고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라고 하시는 거다. 양들의 구원을, 즉 교회의 구원을 위해 당신이 이런 식으로 버려진다는 것을 말한다. 즉 ‘영적인 면의 이해타산을 두고 내가 너희들의 죄를 위해 죽는다’ 라는 말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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