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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0::13-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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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0장 13절-16절: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13절: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삯꾼 목자는 양을 돌보지 않는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게 양을 돌보는 거냐? 춘계 대 심방, 추계 대 심방을 계속하는 게 돌보는 거냐? 이것은 돌보는 것은 맞는데 질이 다르다. 안 하는 것과, 못하는 게 같으냐, 다르냐? 하고 싶어도 못해서 못하는 것과, 할 줄 아는데도 안 하는 게 같으냐, 다르냐? 성경을 글자 문자대로만 생각을 하면 영적인 면의 깨달음이 막히고, 외식신앙이 되고, 눈으로 보는 것을 기준으로 신앙을 하게 된다.
성령님이 사람의 눈에 보이느냐? 안 보인다. 그러면 안 보이는 성령님께서 지금 성도들을 돌보시느냐, 안 돌보시느냐? 성령님의 돌보심이 사람의 눈에 보이는 거냐, 안 보이는 거냐? 안 보인다. 그러면 성령님의 역사를 어떻게 의식을 하느냐? 의식을 할 수 있는 활동이 있고, 없는 활동이 있는데 내가 진리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면 내 속에서 말씀이 지식화 되어서 이 힘으로 살게 되는데 이게 성령님께서 내 속에서 역사를 하는 거다. 성령님은 항상 진리와 동반을 한다.
학생이 공부를 잘하는 것은 이 학생이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잘 알기 때문이다. 즉 학교에서 배운 지식이 자기의 공부의 힘이 되어서 공부를 잘하는 거다.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진리이치의 말씀이 나의 지식화로 되어있으면 이게 자기의 힘이 되어서 이 힘으로 살고 이 힘으로 판단을 하게 된다. 이것이 내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거고, 성령님께서 내 속에서 역사하는 거다.
이런 일이 이적이나 기사로 내가 의식을 하는 가운데 되어지는 것만 아니라 내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당신이 주권적으로 하시는 경우도 있고, 또는 말씀의 교훈이 자기의 지식화 되어서 자기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하는 것도 있으니 이것을 믿음으로 하는 거라고 하고, 이게 다 성령님의 역사다. 말씀이 없이 제 마음대로 해놓고 믿음으로 했다고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참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의 뜻대로 하는 거다.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목자가 영적인 면을 모르면 양을 돌아보지 못하는 거고, 영적인 면을 모르면서도 양을 돌보게 되면 성도의 영적인 면을 돌보는 게 아니라 ‘대 심방, 소 심방’ 등의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계속해서 성도들을 찾아가고, 등을 두들겨주거나, 직분을 줘서 코를 꿰거나 하는 등의 눈으로 보이는 면으로 돌본다. 오늘날 이런 교회가 얼마나 많으냐? 이건 양을 돌봄이 아니다. 영적인 면을 위함이 아니면, 진리이치의 깨달음이 아니면 양을 돌봄이 아니다.
믿음은 진리이치를 받고 이것이 자기의 지식이 되어서 이 지식을 따라 살 때 신앙이 강해지고 깊어지는 거다. 이러면 교회의 교훈이 구별 분별이 들어가게 되는데, 이건 영의 눈이 밝은 거다. 이러면 거짓 종이나 삯꾼 목자에게 속지 않는다. 교회에서 비진리를 받으면 자기의 일생이 통째로 날아간다. 그래서 아무 교회에나 몸을 담고 충성봉사를 하면 안 된다. 교회가 바로 왕의 통치라면 빨리 탈출을 해서 모세의 인도를 찾아서 자유자가 되어야 한다. 잘못된 곳에서 충성봉사를 하면 할수록 자기 속에서 잘못된 게 자꾸 커지기 때문에 심판도 자꾸 커진다. 이건 사망성공이다.
교회는 반드시 진리본질의 교훈이 나와야 한다. 그리고 교인들은 진리본질의 사람이 되어서 나오는 성격과 성질과 성분을 가지고 충성봉사를 하고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이게 주님의 의사와 적중이고, 이게 헬라어에서 주님 안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의 IN이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이 옆으로 비켜 가는 것도 있고, 위에서 아래로 비켜 가는 것도 있고, 아래에서 위로 비겨가는 것도 있으니 이것은 다 이질적인 신앙에 속한다.
양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게 목사가 교인의 이름을 다 모른다는 건지, 심방을 안 한다는 건지? 목사가 아무리 자기 목숨을 바쳐서 교인을 돌본다고 해도 자신부터가 영적인 면을 모르면 교인들의 영적인 면을 못 돌본다. 하나님의 자녀는 영적인 면에 돌봄을 받아야 여기에서 판단이 나오고 스스로 이룰구원의 생활을 하게 되는 거지 목사가 일일이 ‘하라. 마라’ 해서는 영적인 면이 자라지를 못한다.
삯꾼 목자가 양을 돌보지 않고 달아날 때 어디로 달아날까? 사람이 안 사는 데로 달아날까, 사람이 사는 데로 달아날까? 달아난다고 하니까 거리적으로 먼 곳으로 도망을 가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그게 아니라 정신이 물질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영적인 면은 모른 채 교인들을 물질성의 정신과 소원 목적으로 끌고 들어가는 게 삯꾼 목자다. 거짓 목자는 비진리로 나가는데 삯꾼 목자나 거짓 목자는 정신과 사상은 같지만 나타나 보이는 게 조금씩 다르다. 그래서 삯꾼 목자나 거짓 목자를 알아보려면 신앙의 질을 봐야 한다.
14절: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나는 선한 목자라.’ 뭐가 선한 목자냐? 양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버리는 게 선한 목자다. 그러나 삯꾼 목자는 이리가 오면 달아난다. 양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거나, 이리가 오면 달아나는 거나 유형적인 행동이나 활동을 말하는 게 아니라 정신적 움직임을 말하는 거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버린다고 했는데, 어떻게 버리는 거냐? 우리 주님은 이 땅에서의 33년의 삶을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죄에 빠져 있는 당신의 양들을 구원해서 하나님 앞에 합격이 되게 하는 삶을 사셨다. 당신의 양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의 지공법에 100% 만족을 드린 삶을 사셨다. 마찬가지로 참 목자는 주님의 양을 살리기 위해 자기의 모든 사고방식이나 이해타산이나 가치판단이나 평가성을 주님의 것을 가지고 성도의 영적인 면을 위한 일을 한다. 이것을 교훈적으로 말을 하면 참 꼴이요 참 양식이다.
목사라면 교인들이 진리인지 비진리인지를 판단할 수 있게 가르쳐야 하는데 잘못 가르쳐서 교인들이 영적인 면에서 마귀에 끌려가면 어떻게 책임을 질 거냐? 그래서 목사라면 영의 눈이 밝아야 하고, 교훈을 구별 분별할 수 있어야 하고, 자기의 일생을 주님 앞에서 어떻게 걸어가야 하겠다고 하는 신앙의 결심과 각오가 있어야 한다.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선한 목자는 하나님의 마음과 정신을 품고 있기 때문에 당신의 양을 안다. 그리고 주님의 양은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 금방 주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안다. 설교로 말을 한다면 참 양은 목사의 설교가 재미있고 재미없고가 아니라 진리인지 비진리인지를 질적으로 구별 분별을 한다. 교회의 가르침은 영적으로 영원히 가는 것이라야 하는데 오늘날 교회 안에 세상을 가르치는 거짓 목자나 삯꾼 목자가 많기 때문에 이것을 구별 분별하려면 진리본질이 아니면 안 된다.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양이 목자를 어떻게 아느냐? 아기가 자기 엄마의 소리를 명확히 구별 분별을 못하면 엄마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사람을 따라가게 된다. 그런가 하면 엄마의 말속에는 자식을 향한 따뜻한 마음이 들어있기 때문에 이걸 느끼는 자식은 자기 엄마가 감기에 걸려서 변한 목소리로 말을 해도 금방 엄마의 목소리임을 안다. 우리가 이것을 신앙의 질적으로 돌려서 생각을 하면 믿는 사람이 진리본질을 모르면 주님을 모르는 거다. 간단히 말을 하면 주님 앞에서 배운 자는 주님의 뜻이 뭔지를 안다.
그래서 교회 인도자는 교인들에게 주님의 뜻을 가르쳐야 한다. 주님의 뜻을 모르면 주님의 양이 안 되고 세상의 소리를 따라가게 된다. 이러면 두려움과 떨림으로 이뤄지는 이룰구원이 안 되고 은혜에서 떨어진다. 믿는 우리는 육신의 눈에 보이는 면보다 자기의 영원한 존귀 영광과 행복과 기쁨과 쾌락이 되는 이룰구원을 더 엄하게 직시해야 한다.
아론의 지팡이는 생명이 있어서 꽃이 피었다. 우리는 날 때부터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고 하나님의 생명을 입게 되었으니 이제는 이룰구원으로 생명의 꽃을 활짝 피워야 한다. 그런데 꽃은커녕 싹도 안 난다면 무슨 열매가 있겠느냐?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사는 가치와 맛을 느끼기 위해 타고 다니고, 날아다니고, 기어 오르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참 생명을 만난 게 아니라서 그럴수록 더 허무해진다. 믿는 우리는 자기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샘솟듯이 나와야 한다. 즉 말씀을 통해 기쁨과 만족과 행복을 느껴야 한다. 세상의 기쁨은 외부로부터 자기에게 들어와야 하지만 하나님의 기쁨은 자기 속에서부터 솟아 나온다. 믿는 우리는 각자가 생수를 마신 야곱의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자가 되어야 한다.
15절: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주님이 나를 아시고’ 라는 말도 된다.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같이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아버지를 잘 아신다’ 라는 거다. 이런 말씀을 하심은 나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씀이다.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구속성 대속성이 들어있는 말씀이다. 양을 돌본다는 것은 진리이치의 말씀으로 돌보는 것을 말한다. 교회의 목사도 교인들을 이렇게 돌봐야 한다.
16절: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다른 양들’이란 교회에 안 나오는 안 믿는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예수를 믿지만 하나님의 진리본질로 들어오지 못한 양들을 말한다.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라고 하는 것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진리본질로 들어오지 않고 세상 짓을 하는 교회도 많은데, 여기에는 성도 개인도 있고, 교회라고 하는 조직 안에 들어있는 사람도 있으니 진리본질로 들어오지 못한 이들의 인간적인 것을 다 벗겨내고 하나님의 본질의 것을 입게 해준다는 거다.
성경에 ‘구원은 유대로부터 난다’는 말씀이 있는데, 이는 유대인들에게 진리본질의 라인을 친다는 의미다. 이렇게 해야 그 다음으로 ‘베들레헴’ 하고 나오게 되는 거다. 즉 진리복음은 본질로 본질로 점점 찾아 들어가다가 본질을 만났으면 이 본질이 점점 확대가 되어나가는 거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 하나님의 본질로 들어오지 못한 양들이 많다. 유형교회에 들어와서 예수를 믿고 있지만 아직 진리본질을 깨닫지 못한 상태의 사람이 많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하나님의 본질 안에 들어오지 못한 신앙은 이질성이요 세상성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양인데도 우리 안에 들어오지 못한 상태다. 계:에 보면 신앙의 질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전 안으로 쑥 들어온 게 아니라 전 밖에 있는 사람이 있다. 세상 소원 목적적으로 예수를 믿고 있으면 이 사람은 예수님 밖이다. 질적으로 성 밖이다. 우리는 이것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을 볼 수 있어야 ‘성 밖에 있는 자는 밟힌다’고 하는 게 무슨 뜻인지 알게 된다.
자기의 신앙이 질적으로 성 밖이냐, 성 안이냐? 맨 세상 이해타산으로 믿고 있으면 이 사람은 성 밖이다. 성 안에서 예수님의 의사단일로 있는 사람은 성 밖의 신앙이 어떤 건지를 안다. 본질을 알면 이질을 알게 된다. 개인적으로 한 이치라도 바르게 적중으로 깨달으면 그 하나하나마다가 성 안이 되는 거다. 그 하나하나마다는 주님 쪽으로 밀착이 된 거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믿고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 안심하고 있으면 안 된다. 자기의 신앙이 성 안에 있는 건지, 성 밖에 있는 건지 알아야 한다. 이것에 따라 성도들이 죽고 사는 일이 일어난다. 교회 인도자들은 항상 이 면을 명심해야 한다.
성경에 보면 여로보암 때 단과 벧엘에서 우상을 섬겼고, 아무나 제사장을 하고, 아무나 자원을 하면 지도자로 세웠다. 지금의 교회가 이런 판이다. 교회 안에 여로보암의 사상이 판을 치고 있다. 여로보암 교회도 있고, 여로보암 총회도 있고, 여로보암 노회도 있고, 여로보암 교인도 있다. 이러면 어떻게 되겠느냐? 결과가 빤한 거다. (계속)
10장 13절-16절: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13절: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삯꾼 목자는 양을 돌보지 않는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게 양을 돌보는 거냐? 춘계 대 심방, 추계 대 심방을 계속하는 게 돌보는 거냐? 이것은 돌보는 것은 맞는데 질이 다르다. 안 하는 것과, 못하는 게 같으냐, 다르냐? 하고 싶어도 못해서 못하는 것과, 할 줄 아는데도 안 하는 게 같으냐, 다르냐? 성경을 글자 문자대로만 생각을 하면 영적인 면의 깨달음이 막히고, 외식신앙이 되고, 눈으로 보는 것을 기준으로 신앙을 하게 된다.
성령님이 사람의 눈에 보이느냐? 안 보인다. 그러면 안 보이는 성령님께서 지금 성도들을 돌보시느냐, 안 돌보시느냐? 성령님의 돌보심이 사람의 눈에 보이는 거냐, 안 보이는 거냐? 안 보인다. 그러면 성령님의 역사를 어떻게 의식을 하느냐? 의식을 할 수 있는 활동이 있고, 없는 활동이 있는데 내가 진리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면 내 속에서 말씀이 지식화 되어서 이 힘으로 살게 되는데 이게 성령님께서 내 속에서 역사를 하는 거다. 성령님은 항상 진리와 동반을 한다.
학생이 공부를 잘하는 것은 이 학생이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잘 알기 때문이다. 즉 학교에서 배운 지식이 자기의 공부의 힘이 되어서 공부를 잘하는 거다.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진리이치의 말씀이 나의 지식화로 되어있으면 이게 자기의 힘이 되어서 이 힘으로 살고 이 힘으로 판단을 하게 된다. 이것이 내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거고, 성령님께서 내 속에서 역사하는 거다.
이런 일이 이적이나 기사로 내가 의식을 하는 가운데 되어지는 것만 아니라 내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당신이 주권적으로 하시는 경우도 있고, 또는 말씀의 교훈이 자기의 지식화 되어서 자기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하는 것도 있으니 이것을 믿음으로 하는 거라고 하고, 이게 다 성령님의 역사다. 말씀이 없이 제 마음대로 해놓고 믿음으로 했다고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참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의 뜻대로 하는 거다.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목자가 영적인 면을 모르면 양을 돌아보지 못하는 거고, 영적인 면을 모르면서도 양을 돌보게 되면 성도의 영적인 면을 돌보는 게 아니라 ‘대 심방, 소 심방’ 등의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계속해서 성도들을 찾아가고, 등을 두들겨주거나, 직분을 줘서 코를 꿰거나 하는 등의 눈으로 보이는 면으로 돌본다. 오늘날 이런 교회가 얼마나 많으냐? 이건 양을 돌봄이 아니다. 영적인 면을 위함이 아니면, 진리이치의 깨달음이 아니면 양을 돌봄이 아니다.
믿음은 진리이치를 받고 이것이 자기의 지식이 되어서 이 지식을 따라 살 때 신앙이 강해지고 깊어지는 거다. 이러면 교회의 교훈이 구별 분별이 들어가게 되는데, 이건 영의 눈이 밝은 거다. 이러면 거짓 종이나 삯꾼 목자에게 속지 않는다. 교회에서 비진리를 받으면 자기의 일생이 통째로 날아간다. 그래서 아무 교회에나 몸을 담고 충성봉사를 하면 안 된다. 교회가 바로 왕의 통치라면 빨리 탈출을 해서 모세의 인도를 찾아서 자유자가 되어야 한다. 잘못된 곳에서 충성봉사를 하면 할수록 자기 속에서 잘못된 게 자꾸 커지기 때문에 심판도 자꾸 커진다. 이건 사망성공이다.
교회는 반드시 진리본질의 교훈이 나와야 한다. 그리고 교인들은 진리본질의 사람이 되어서 나오는 성격과 성질과 성분을 가지고 충성봉사를 하고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이게 주님의 의사와 적중이고, 이게 헬라어에서 주님 안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의 IN이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이 옆으로 비켜 가는 것도 있고, 위에서 아래로 비켜 가는 것도 있고, 아래에서 위로 비겨가는 것도 있으니 이것은 다 이질적인 신앙에 속한다.
양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게 목사가 교인의 이름을 다 모른다는 건지, 심방을 안 한다는 건지? 목사가 아무리 자기 목숨을 바쳐서 교인을 돌본다고 해도 자신부터가 영적인 면을 모르면 교인들의 영적인 면을 못 돌본다. 하나님의 자녀는 영적인 면에 돌봄을 받아야 여기에서 판단이 나오고 스스로 이룰구원의 생활을 하게 되는 거지 목사가 일일이 ‘하라. 마라’ 해서는 영적인 면이 자라지를 못한다.
삯꾼 목자가 양을 돌보지 않고 달아날 때 어디로 달아날까? 사람이 안 사는 데로 달아날까, 사람이 사는 데로 달아날까? 달아난다고 하니까 거리적으로 먼 곳으로 도망을 가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그게 아니라 정신이 물질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영적인 면은 모른 채 교인들을 물질성의 정신과 소원 목적으로 끌고 들어가는 게 삯꾼 목자다. 거짓 목자는 비진리로 나가는데 삯꾼 목자나 거짓 목자는 정신과 사상은 같지만 나타나 보이는 게 조금씩 다르다. 그래서 삯꾼 목자나 거짓 목자를 알아보려면 신앙의 질을 봐야 한다.
14절: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나는 선한 목자라.’ 뭐가 선한 목자냐? 양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버리는 게 선한 목자다. 그러나 삯꾼 목자는 이리가 오면 달아난다. 양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거나, 이리가 오면 달아나는 거나 유형적인 행동이나 활동을 말하는 게 아니라 정신적 움직임을 말하는 거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버린다고 했는데, 어떻게 버리는 거냐? 우리 주님은 이 땅에서의 33년의 삶을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죄에 빠져 있는 당신의 양들을 구원해서 하나님 앞에 합격이 되게 하는 삶을 사셨다. 당신의 양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의 지공법에 100% 만족을 드린 삶을 사셨다. 마찬가지로 참 목자는 주님의 양을 살리기 위해 자기의 모든 사고방식이나 이해타산이나 가치판단이나 평가성을 주님의 것을 가지고 성도의 영적인 면을 위한 일을 한다. 이것을 교훈적으로 말을 하면 참 꼴이요 참 양식이다.
목사라면 교인들이 진리인지 비진리인지를 판단할 수 있게 가르쳐야 하는데 잘못 가르쳐서 교인들이 영적인 면에서 마귀에 끌려가면 어떻게 책임을 질 거냐? 그래서 목사라면 영의 눈이 밝아야 하고, 교훈을 구별 분별할 수 있어야 하고, 자기의 일생을 주님 앞에서 어떻게 걸어가야 하겠다고 하는 신앙의 결심과 각오가 있어야 한다.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선한 목자는 하나님의 마음과 정신을 품고 있기 때문에 당신의 양을 안다. 그리고 주님의 양은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 금방 주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안다. 설교로 말을 한다면 참 양은 목사의 설교가 재미있고 재미없고가 아니라 진리인지 비진리인지를 질적으로 구별 분별을 한다. 교회의 가르침은 영적으로 영원히 가는 것이라야 하는데 오늘날 교회 안에 세상을 가르치는 거짓 목자나 삯꾼 목자가 많기 때문에 이것을 구별 분별하려면 진리본질이 아니면 안 된다.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양이 목자를 어떻게 아느냐? 아기가 자기 엄마의 소리를 명확히 구별 분별을 못하면 엄마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사람을 따라가게 된다. 그런가 하면 엄마의 말속에는 자식을 향한 따뜻한 마음이 들어있기 때문에 이걸 느끼는 자식은 자기 엄마가 감기에 걸려서 변한 목소리로 말을 해도 금방 엄마의 목소리임을 안다. 우리가 이것을 신앙의 질적으로 돌려서 생각을 하면 믿는 사람이 진리본질을 모르면 주님을 모르는 거다. 간단히 말을 하면 주님 앞에서 배운 자는 주님의 뜻이 뭔지를 안다.
그래서 교회 인도자는 교인들에게 주님의 뜻을 가르쳐야 한다. 주님의 뜻을 모르면 주님의 양이 안 되고 세상의 소리를 따라가게 된다. 이러면 두려움과 떨림으로 이뤄지는 이룰구원이 안 되고 은혜에서 떨어진다. 믿는 우리는 육신의 눈에 보이는 면보다 자기의 영원한 존귀 영광과 행복과 기쁨과 쾌락이 되는 이룰구원을 더 엄하게 직시해야 한다.
아론의 지팡이는 생명이 있어서 꽃이 피었다. 우리는 날 때부터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고 하나님의 생명을 입게 되었으니 이제는 이룰구원으로 생명의 꽃을 활짝 피워야 한다. 그런데 꽃은커녕 싹도 안 난다면 무슨 열매가 있겠느냐?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사는 가치와 맛을 느끼기 위해 타고 다니고, 날아다니고, 기어 오르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참 생명을 만난 게 아니라서 그럴수록 더 허무해진다. 믿는 우리는 자기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샘솟듯이 나와야 한다. 즉 말씀을 통해 기쁨과 만족과 행복을 느껴야 한다. 세상의 기쁨은 외부로부터 자기에게 들어와야 하지만 하나님의 기쁨은 자기 속에서부터 솟아 나온다. 믿는 우리는 각자가 생수를 마신 야곱의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자가 되어야 한다.
15절: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주님이 나를 아시고’ 라는 말도 된다.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같이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아버지를 잘 아신다’ 라는 거다. 이런 말씀을 하심은 나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씀이다.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구속성 대속성이 들어있는 말씀이다. 양을 돌본다는 것은 진리이치의 말씀으로 돌보는 것을 말한다. 교회의 목사도 교인들을 이렇게 돌봐야 한다.
16절: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다른 양들’이란 교회에 안 나오는 안 믿는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예수를 믿지만 하나님의 진리본질로 들어오지 못한 양들을 말한다.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라고 하는 것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진리본질로 들어오지 않고 세상 짓을 하는 교회도 많은데, 여기에는 성도 개인도 있고, 교회라고 하는 조직 안에 들어있는 사람도 있으니 진리본질로 들어오지 못한 이들의 인간적인 것을 다 벗겨내고 하나님의 본질의 것을 입게 해준다는 거다.
성경에 ‘구원은 유대로부터 난다’는 말씀이 있는데, 이는 유대인들에게 진리본질의 라인을 친다는 의미다. 이렇게 해야 그 다음으로 ‘베들레헴’ 하고 나오게 되는 거다. 즉 진리복음은 본질로 본질로 점점 찾아 들어가다가 본질을 만났으면 이 본질이 점점 확대가 되어나가는 거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 하나님의 본질로 들어오지 못한 양들이 많다. 유형교회에 들어와서 예수를 믿고 있지만 아직 진리본질을 깨닫지 못한 상태의 사람이 많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하나님의 본질 안에 들어오지 못한 신앙은 이질성이요 세상성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양인데도 우리 안에 들어오지 못한 상태다. 계:에 보면 신앙의 질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전 안으로 쑥 들어온 게 아니라 전 밖에 있는 사람이 있다. 세상 소원 목적적으로 예수를 믿고 있으면 이 사람은 예수님 밖이다. 질적으로 성 밖이다. 우리는 이것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을 볼 수 있어야 ‘성 밖에 있는 자는 밟힌다’고 하는 게 무슨 뜻인지 알게 된다.
자기의 신앙이 질적으로 성 밖이냐, 성 안이냐? 맨 세상 이해타산으로 믿고 있으면 이 사람은 성 밖이다. 성 안에서 예수님의 의사단일로 있는 사람은 성 밖의 신앙이 어떤 건지를 안다. 본질을 알면 이질을 알게 된다. 개인적으로 한 이치라도 바르게 적중으로 깨달으면 그 하나하나마다가 성 안이 되는 거다. 그 하나하나마다는 주님 쪽으로 밀착이 된 거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믿고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 안심하고 있으면 안 된다. 자기의 신앙이 성 안에 있는 건지, 성 밖에 있는 건지 알아야 한다. 이것에 따라 성도들이 죽고 사는 일이 일어난다. 교회 인도자들은 항상 이 면을 명심해야 한다.
성경에 보면 여로보암 때 단과 벧엘에서 우상을 섬겼고, 아무나 제사장을 하고, 아무나 자원을 하면 지도자로 세웠다. 지금의 교회가 이런 판이다. 교회 안에 여로보암의 사상이 판을 치고 있다. 여로보암 교회도 있고, 여로보암 총회도 있고, 여로보암 노회도 있고, 여로보암 교인도 있다. 이러면 어떻게 되겠느냐? 결과가 빤한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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