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요10:16-21 |
---|---|
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0장 16절-21절: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혹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16절: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우리에 들지 아니한 양들이 내게 있다. ‘우리’란 라인을 말한다. 그러니까 ‘내게 들지 아니한 양들이 있다’ 라고 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진리본질의 생명 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신앙자들이 있다는 거다.
교회의 교훈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진리본질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이룰구원이 나와야 하고, 예수 믿으면서 주님으로 인격화 성품화 되는 게 자기의 참 실상이요 영원한 자기의 실상인데 이 실상은 안 죽는다. 그러니까 하나를 닮던 둘을 닮던 주님을 닮게 하는 거, 즉 하나님의 것이 사람 속에 차이면서 세상의 구정물이 자꾸 빠져나가게 하는 게 교회의 교훈이다. 우리는 성령의 눈으로 자타의 신앙정신이 하나님의 진리본질로 들어오지 못한 것을 보고 이것을 채워나가야 한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죽이려 하고 있고, 예수는 안 따르면서 예수이름으로 병을 고치려는 무리가 있고, 또 예수님을 만나려고 외국에서 왔지만 안 만나지는 게 있고, 또는 동방에서 박사들이 와서 어린 예수를 만나고 가는 무리도 있고, 또는 진리를 따라 예수를 믿는 제자들이 있고, 이적과 기사를 보고 신기하다고 하며 예수를 따라다니는 사람도 있다. 지금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여러 가지 믿음의 형태가 있다. 예수를 믿어도 진리 가운데로 들어온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이 있는데 성경은 이걸 밝혀준다. 같은 무리 속에 있다고 해서 같은 신앙으로 취급을 해서는 안 된다.
무리가 예수님을 왕 삼으려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도망을 가시기도 했고, 무리가 예수님을 찾는데도 숨어서 가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무리가 예수님을 찾는데 왜 숨으신 거냐? 그것은 그들이 예수를 찾고 따른다고 하지만 그 속성이 예수님께서 안 나타나는, 안 만나주는, 못 만나는 속성이라는 거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자들과는 같이 할 수 없다는 거다. 이런 무리와 같은 기도, 이런 무리와 같은 믿음에는 예수님이 같이 할 수 없다는 거다. 그래서 숨는다고 표현을 한 거다.
구약에서 아합이나 이세벨이나 발람 등을 말을 하고, 신약에서 일곱 교회를 말을 하는 것은 이런 사람들의 속성들이 교회 안에서 활동을 한다는 거다. 하나님의 본질이 아니면 이런 이질적인 신앙을 가려낼 수가 없다. 시대적으로 마지막 시대의 교회가 이런 혼란하고 혼탁하고 혼잡스런 신앙사상이다. 그래서 교회의 인도자들이 문제다.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있다는 것은 아직 예배당 안에 들어오지 않은 성도가 있다는 게 아니라 예수를 믿는데도 신앙상태가 하나님의 진리본질로 들어오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거다. 예수를 믿어도 진리본질 안이 아니라 진리본질 밖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있다는 거다. 이 사람에게는 은혜가 주어지지 않는다. 이것을 좋게 말을 하면 아직 깨닫지를 못해서 세상적인 정신과 목적으로 예수를 믿고 있는 건데, 이것은 양으로 말을 하면 우리 밖이고, 신앙으로 말을 하면 성 밖이고 생명권 밖이다.
야곱이 기도를 해서 원하는 대로 받았는데, 야곱이 기도를 한 게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을 구했느냐, 하나님의 자녀들이 구하는 것을 구했느냐?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을 구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을 구하지 말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했다. 그러니까 신구약 성경을 보는 우리는 구약에서 야곱이 기도한 대로 받았지만 받은 그것으로 인해 되어진 결과를 보면서 야곱처럼 세상 것을 구할 게 아니라 주님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지 왜 야곱처럼 짐승을 구하고, 사람을 구하고, 재물을 구하느냐?
믿는 우리는 소원 목적이 야곱처럼 돌아가면 안 된다. 우리는 일을 하는 것은 돈이 목적이 아니라 자타의 구원을 위한 수단이요 방편이다. 우리가 옳은 목적을 품고 있다면 수단과 위주와 방편도 진리적으로 해야 한다. 옳은 목적을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 담배나 술을 판다거나 사람의 몸이 망가지게 하는 일을 하면 안 된다.
우리가 진리말씀을 깨달았더라도 깨달은 말씀대로 살아가는 힘이 없을 수 있다. 지식적으로 옳은 것을 알았더라도 이 말씀이 자기 자체화 인격화 되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리는 건데, 이렇게 되기까지는 하나님께서 해 주시는 게 아니라 자기 속에서 ‘어떤 사건과 환경을 만나더라도 말씀을 따라 살아야겠구나’ 라고 하면서 자기가 해 나가야 한다. 이러면 성령님께서 감동 감화로 도우신다. 하나님께서 내가 할 것까지 다 해 주시면 인간에게는 자유가 없어지고, 이러면 하나님의 공의성이 무너진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유를 건드리지 않고 당신의 공의성은 공의성대로 살리면서 진리로 가길 원하시는데 그 수단이 우리가 말씀의 이치를 깨달아야 하는데, 이 결정은 인간 자기가 내려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상급과 심판이 공의로 되는 거다.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주님이 무엇으로 인도를 하시느냐? 제자들을 무엇으로 인도하시느냐? 몽둥이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인도를 받으면 구원이 되는 거다. 구원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게 하늘의 사람으로 바로 서는 거다. 그래서 교회는 교훈이 굉장히 중요하다. 교회에 법궤가 있느냐? 진리본질이 있느냐? 이룰구원이 있느냐? 이치가 나오느냐? 이런 게 없는 교회는 율동이나 하고 분위기나 맞추다 마는 거다. 거짓된 교회는 이런 인도를 한다. 감투를 씌워서 코를 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인도가 아니면 교회가 아니다.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라고 하시는 것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인도가 아닌 교회도 있다는 암시이기도 하다. 왜냐? 당시의 바리새 교인들과 유대교인들이 그랬으니까. 사두개 교인들은 유대인들이면서 세상 판의 신앙이다.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예수님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느냐? 예수님의 음성이 고음이냐, 저음이냐? 예수님이 사투리를 쓰느냐, 표준말을 쓰느냐? 빨리 말을 하느냐, 천천히 말을 하느냐? 존칭어를 쓰느냐, 반말을 쓰느냐? 천국을 자랑하느냐, 세상을 자랑하느냐? 예수님은 하나님의 소원 목적을 말을 하고, 나를 인간으로 만드신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말을 한다. 믿는 사람이 자신을 만드신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안다면 성경을 다 아는 거다. 이 목적대로 만들어지는 게 진짜 구원이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거다. 어느 교회든 교회의 인도자를 통해 주님의 이 음성이 나와야 한다.
주님의 음성이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교훈을 말하고, 인간을 만드신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가르쳐 주는 게 주님의 음성이다. 주님께서 ‘공중에 나는 새를 봐라. 들의 백합화를 봐라’ 라는 말씀을 했는데, 이렇게 말씀하심은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따라 살라는 거다. 다른 말로 하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길, 즉 구원을 위해 살라는 거다.
17절: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아버지께서 나를 어떻게 사랑하시느냐? 목숨을 버린다고 한다. 세상의 부모라면 자식이 죽는다고 하면 말릴 텐데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양을 위해 죽는다고 하니까 기뻐하고 사랑한다고 한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무엇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거냐? 예수님의 죽으심이 우리의 구원과 관계가 있느냐, 없느냐?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죽으셨다. 우리는 자기의 목숨을 그냥 버리면 안 된다.
자녀를 기르면서 세상에 소원 목적을 두고 세상에서 일인자가 되라고 하는 것은 구약의 우상의 위에 불을 지펴놓고 이 불 위로 자식을 지나가게 하는 것과 같은 거다. 자녀를 세상의 정신과 사상으로 기르는 것을 신앙 사상적으로 말을 하면 자식을 세상이라고 하는 우상에게 바치는 거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주님께서 피로 사신 주님의 것이니 우리의 몸과 마음을 어디에 바쳐야 하겠느냐? 주님께 바쳐지는 게 처절한 거냐, 고상한 거냐?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만일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그냥 버린다면 얻어지는 게 없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인간들이 당신의 육신을 죽여도, 없애버려도 또 살아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말씀이다. 양들을 위해 당신의 임시성적인 목숨을 버리니, 투자를 하니 영원히 죽지 않는 목숨으로 살아난다는 거다.
구원을 위한 삶을 살면 이 사람에게는 육신이 죽더라도 죽지 않는 영생의 요소가 들어있기 때문에 다시 살게 된다. 이 영생을 가진 자를 아버지께서 사랑하신다. 이 삶의 정신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고 실상화 되는 신앙사상이다.
18절: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세상의 인간 중에 자기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는 자가 있느냐? 그리스도 예수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조물주이시고, 다른 존재는 다 피조된 생명이다. 피조된 생명은 조물주의 생명을 빼앗지 못한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도 사람이요 예수도 사람이니 예수를 죽이면 그것으로 끝날 것으로 생각을 했지만 예수님의 자연생명은 조물주의 생명이기 때문에 인간은 이 조물주의 생명을 빼앗지도 못하고 죽일 수 있는 권세와 능력도 없는 거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에 죄로 인해 영 죽은 우리를 위해 당신이 죽어야 할 책임이 있다. 왜냐? 우리가 스스로 생겼다면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실 필요가 없겠지만 당신이 우리를 지었으니 끝까지 우리를 책임을 지셔야 하는 거다.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목숨을 버릴 수도 있고, 가질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고, 다시 살아날 수도 있는 계명을 아버지에게서 받았다고 한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처럼 나를 버릴 권세도 있고, 또 다시 얻을 권세도 있느냐? 없다.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오신 삶에는 처음부터 당신의 목숨을 버릴 수도 있고, 가질 수도 있는 계명이 들어있다. 이걸 풀어서 말을 하면 예수님의 삶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율법이 요구하는 말씀에 일점일획까지도 만족을 이뤄드린 삶을 사셨으니 이 삶은 100% 고스란히 영원히 죽지 않을 생명으로 되돌려 받게 되는 약속이 절대적인 계명처럼 들어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우리의 기본구원에 이 약속이 계명처럼 들어있기 때문에 살아서 믿는 자는 나중에 반드시 살아나는 거다.
우리의 기본구원에만 아니라 이룰구원 차원에도 이 약속의 계명이 들어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이 주님의 속성으로 만들어지면 그 성분 성격 성질도 살아나게 된다. 이런 게 있기 때문에 믿는 우리는 자기의 목숨을 죽어도 살아날 것에 투자를 해야 하고, 노력봉사를 해도 살아날 것을 위해 해야지 세상에 속한 곳에 가서 충성봉사를 하고 자기의 목숨을 바치게 되면 심판 때 ‘난 너희를 모르겠다’ 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믿는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사느냐에 따라 구원이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하는 것이니 어떻게 살아야 하겠느냐? 헛 살면 안 된다. 예수님께서 부활을 했는데 예수 믿는 나는 부활을 안 한다면 예수 믿을 필요가 있느냐? 부활도 부활의 권이 있는데, 우리의 이룰구원의 믿음에 이 약속이 계명처럼 들어있다.
19절-21절: ‘이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혹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유대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이런 저런 말을 하며 저희끼리 분쟁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오늘날 기독교계가 기독교의 잘못된 고정관념을 깨칠 수 있을까? 예수님의 밝고 거룩한 진리생명의 말씀의 이치는 우리의 심령골수를 파고 들어서 인간의 고정관념을 깨뜨려 버린다.
예수님의 말씀은 영적인 계시가 들어있는 비유이기 때문에 유대 율법사들도 깨닫기가 힘든 건데 성경을 안 본 일반인들이 어떻게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겠느냐?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해도 거의가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듣는다. 못 알아듣는 증거가 예수이름으로 세상 것을 구하고 있는 거다. 예수님께서 ‘나는 양이 문이다. 삯꾼 목자는 이리가 오면 양을 버리고 달아난다. 나는 내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가질 수 있는 권세도 있다’는 등의 말씀을 하셨는데 예수 믿으면서 세상을 구하고 있다면 이 사람이 어떻게 영적인 계시의 이런 말씀을 깨달을 수 있겠느냐?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생긴 이후로 유대인들이 한 번도 듣지 못한 말씀을 하셨으니 이 말씀의 뜻을 알아듣지 못한 자들은 예수님이 미쳤다고 한다. 지금도 예수 믿는 자들 중에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이상하게 듣는 자들이 있다. 미친 사람의 말로 듣는다. 육의 개념으로 말을 하면 좋아하고 쉽게 알아듣지만 예수님은 영의 말씀, 영적으로 말씀을 하시니 못 알아듣는다. 그래서 알아듣게 하느라고 비유로 말씀을 하는 거다. 예수님의 말씀을 영으로 알아들으면 소경이 눈을 뜨면 보게 되듯이 예수님이 죄인으로 보이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 보게 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