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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박한 하나님 나라

누가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7 추천 수 0 2025.08.30 19: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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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0:1-11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1104597 

jys.jpghttp://dabia.net/xe/1104597

설교보기 : https://youtu.be/k3En-6r3acc 

성경본문 : 누가복음 10:1-11 

임박한 하나님 나라

눅10:1-11, 성령강림 후 4주, 2025년 7월 6일

 

누가복음은 로마 제국의 고위 관료인 데오빌로에게 교회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는 변증서입니다. 눅 1:1-4절에서 집필 목적을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3절)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의 연작입니다. 집필자가 똑같고 수신자도 같습니다. 사도행전의 서론에 해당하는 행 1:1-11절에는 예수의 부활 및 승천 이후 당시 교회가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8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당시 교회는 선교 공동체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예수의 파송 이야기

 

초기 그리스도교의 선교 지향적 정체성이 오늘 설교 본문에서는 예수 공생애 중에 벌어진 어떤 이야기와 연결되어서 표현됩니다. 예수께서 칠십 명의 제자 무리를 둘씩 짝지어서 선교 파송을 보내셨다고 합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여러 동네에 들어가서 해야 할 일을 자세하게 설명하셨습니다. 일종의 ‘선교 매뉴얼’입니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라는 3절 말씀은 누가복음 공동체가 처한 상황에 대한 아주 적절한 표현입니다. 기원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로마 제국에 의해서 무너진 다음에 유대교는 성전 종교의 특징을 잃고 율법 종교가 됩니다. 유대교의 율법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그리스도인들은 회당에서 축출당합니다. 교회 공동체가 소멸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불안했을 겁니다. 위 구절이 말하듯이 어린 양이 이리 떼 사이에서 생존을 구해야 하는 상황이니까요. 그런데 본문은 더 심한 말을 합니다. 4-5절입니다.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낯선 지역에 가려면 만반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다른 이들에게 민폐 끼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여행에 필요한 물품을 어느 정도는 준비해야 합니다. 넉넉하게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최소한으로는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무전 여행하듯이 빈손으로 다니라는 겁니다. 중세기 때 탁발 수도승들에게서 볼 수 있는 태도입니다. 그들에게 그런 삶의 태도가 가능한 이유는 그들이 최소한의 생존 조건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삶의 내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빈손 영성’이라 할 ‘일용할 양식’만으로 영혼의 만족이 가능한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게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은 아니겠지요.

 

현대인은 일용할 양식만으로는 불안해서 견디지 못합니다. 100년쯤 먹을 수 있는 양식이 있어도 불안해합니다. 소유가 늘어날수록 더 불안해지고, 무한경쟁 심리에 더 고착됩니다. 오늘날은 소유 지향적 삶의 태도가 무의식까지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세상은 둘째 치고 교회마저 이런 시대정신에서 벗어나지 못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만약 대한민국 교회가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라는 저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교회에서 벌어지는 많은 문제가 해결될 겁니다. 성경을 문자의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한국교회가 빈손 영성에 관한 저 말씀만은 외면합니다.

 

저는 현대인들의 성정이 유독 삐뚤어져서 성장과 소유와 경쟁에 매달린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처한 실존을 외면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앞에서 읽은 3절에서 확인했듯이 당시 교회의 실존은 어린 양이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았습니다. 아차, 하면 이리에게 잡아먹힙니다. 파멸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상황에서 전대가 무슨 소용이 있으며 배낭과 신발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따지고 보면 인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늘 이리 떼 가운데 둘러싸인 어린 양과 비슷한 실존에서 삽니다. 그게 실제로 무엇인지 일상에서 늘 경험되는 것이라서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살아간다는 사실 자체가 아주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겁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공장에서 안전사고로 목숨을 잃는 노동자들도 많고, 부모의 손에 목숨을 잃는 어린아이들도 있습니다. 내일 당장 무슨 일을 당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런 특별한 일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결국 80-90년 살다가 죽습니다. 이런 운명은 이리 떼에 둘러싸인 어린 양의 실존과 다를 게 없는 겁니다. 여기서 예외는 없습니다. 탁발 수도승들은 이런 사실을 매 순간 절감했기에 완전한 무소유의 삶을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인생은 불쌍하고,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즐거운 일을 평생 다 누린 인생은 행복하다고 사람들은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런 생각이 정말 옳을까요?

 

임박한 하나님 나라

 

칠십 명의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유랑 선교활동에 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그들을 환영하는 동네에 들어가면 그들이 준 음식을 먹고, 거기서 병자를 고치며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해야만 했습니다. 제자들을 영접하지 않는 동네에서도 이렇게 말해야만 합니다. 11절입니다.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제자들을 영접하는 동네나 영접하지 않는 동네를 가리지 않고 똑같이 전해야 할 핵심 메시지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예수의 제자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주어진 선교 사명입니다. 그걸 느끼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도 있고, 전혀 무감각한 그리스도인도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이 메시지는 무슨 뜻일까요?

 

우선 낱말 뜻을 살펴봅시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어 ? βασιλε?α το? Θεο?의 번역입니다. βασιλε?α(kingdom)는 나라만이 아니라 주권과 다스림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신약성경 시대는 로마 제국이 지중해 연안의 많은 지역을 다스렸습니다. 로마 제국의 통치가 미치는 곳에서 사람들은 예외없이 로마법을 따라야 합니다. 당시에 로마 시민권은 특권에 속했습니다. 요즘 미국 시민권이 그렇듯이 말입니다. 시민권이 있으면 그 지역에서 특권을 누릴 수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리스도인에게 하늘나라의 시민권이 있다고 썼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디서나 하늘나라 시민으로 대접받는다는 말이 되겠지요. 하늘나라의 시민권이 있는데도 그걸 모른다면 어리석은 일입니다. 빌 3:20-21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바울이 말하는 하늘의 시민권은 예수 그리스도와 직결됩니다. 로마 제국의 영역에서는 로마 제국이 지배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통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는 만물의 복종입니다. 만물의 복종은 곧 그의 능력이자 그의 영광입니다. 예수께서 세상과의 경쟁에서 승리한다는 게 아니라 예수께서 ‘영광의 몸’으로 변화하셨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영광의 몸은 곧 부활의 몸입니다. 바울은 부활하시어 영광의 몸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영광의 몸으로 변하게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게 실제로 말이 되나요?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의 온갖 일들에 치여 살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세상에서 영접받든지 못 받든지 상관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에 온전히 기대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영광은 하나님께만 가능한 생명 충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만 생명 충만한 존재라서 하나님만 영광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그 영광의 빛에 휩싸여서 사는 거고요. 이 땅에서 우리 스스로는 생명 충만하게 살지 못합니다. 그걸 바울은 ‘낮은 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생명 충만은 다른 말로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이 곧 생명의 영이니까요. 지금 우리는 여전히 성령으로 충만하게 살지 못합니다. 온갖 걱정을 머리에 이고 삽니다. 그게 지나쳐서 심리적인 우울증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성령이 아니라 오히려 악령에 사로잡히는 겁니다. 생명 충만, 성령 충만은 비유적으로 어린아이들의 놀이와 비슷합니다. 놀이에 빠진 아이들은 놀이에만 정신을 팝니다. 놀이의 영이 아이들을 완전히 지배하는 겁니다. 어린아이들이 놀이에 집중하듯이 우리가 성령에 집중하면 우리는 영광의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영광의 몸으로 완전하게는 변화되지 못했습니다. 완전한 영광의 몸은 종말에 완성될 것입니다. 그게 실제로 어떤 몸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씨앗만 본 사람은 거기서 꽃이 핀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 없고, 애벌레만 본 사람은 그게 변해서 나비가 된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 없는 거와 같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인류 역사에서 예수만이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었다고 믿습니다. 영광의 몸으로 변화한 예수를 통해서 우리 역시 종말의 생명인 영광의 몸으로 변화될 미래를 기다리면서 삽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와 관계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로 사는 사람은 아직 ‘낮은 몸’에 묶여서 살지만 영광의 몸을 기다립니다. 아이들이 친구들과 노는 때를 기다리듯이,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듯이 말입니다. 그 순간이 바로 생명 충만한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은폐성

 

하나님 나라는 결국 세상 종말이 와야 그 실체가 드러나니까 지금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위에서 씨와 꽃을 비유로 들었습니다. 씨가 꽃은 아니나 씨가 없으면 꽃도 없습니다. 지금의 우리 자신이 없으면 궁극적인 미래의 영광스러운 몸도 없습니다. 꽃처럼 영광스러운 몸의 미래가 오늘 씨처럼 사는 우리의 삶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영광스러운 삶이 미리 당겨서 들어온 것입니다. 이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씨처럼 단조롭게 사는 거 같으나 내면에서는 꽃처럼 풍요롭게 삽니다. 겉모양은 씨지만, 속 사람은 꽃입니다. 꽃은 씨 안에 은폐되어 있으니까요. 문제는 우리의 관심이 씨에만 머물거나 씨의 미래인 꽃을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씨가 아무리 잘나도 얼마나 잘났겠습니까. 도토리 키재기라는 말처럼 대통령이나 일반 노동자는 차이가 없습니다. 요즘 잘나가는 IT 업계의 CEO나 전업 주부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 겉모습보다는 그가 꽃이라는 미래를 당겨서 사느냐, 하는 게 핵심입니다.

 

이를 우리의 일상과 연결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려야겠습니다. 그렇게 복잡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나이가 들면서 어떻게 변화(완성)되어야 할까요? 어떻게 우리는 영광의 몸에 가까이 갈 수 있을까요? 한 가지 특징은 영혼의 평화가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문학적으로 표현하면 영혼에서 향기가 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말을 교양 있게 하거나 옷차림이 세련되거나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갔다고 해서 영혼의 향기가 나는 게 아닙니다. 그의 영혼이 하나님의 평화로 충만해야만 그게 가능합니다. 영혼이 하나님의 평화로 충만한 사람은 누가 알아봐주지 않아도 고유하게 빛나는 야생화처럼 자기의 삶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좋은 조건을 부러워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시기하지도 않습니다. 그의 영혼이 하나님의 평화로 충만하니까 상대적 우월감이나 열등감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은 우리를 생명 충만하게 하는 하나님의 평화가 바로 옆에 왔다는 뜻입니다.

 

왜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평화가 느껴지지 않을까요? 느껴지지 않는 게 오히려 자연스럽습니다. 누구나 작곡가가 되고, 누구나 시인이 되고, 누구나 예술가가 되는 게 아니듯이 말입니다. 예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를 따르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종교 전문가들인 제사장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예수를 거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죄와 죽음에서 해방된다는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그들에게는 너무 밋밋했습니다. 율법과 종교적 업적과 교양과 스펙 쌓기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생각에 묶여서 살았기 때문에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평화를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서울에 있는 일류 대학교 나와서 높은 연봉을 받지 않으면 행복하게 살지 못한다는 고정 관념에 묶이는 겁니다. 자기들이 잘났으니까 늘 그런 대접을 받으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러니 어떻게 그의 영혼이 평화로울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기쁨의 나라나 사랑의 나라로 생각해도 됩니다. 믿음의 나라라고 보는 게 더 옳을지 모르겠군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우리의 주님이라는 믿음의 세계가 깊어지고 넓어지는 것이 곧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메시지에 충실한 삶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믿음은 저절로 생기지 않습니다. 사람은 믿기보다는 의심하는 동물에 가깝습니다.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일수록 세상에서 조금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조금이라도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의심합니다. 연인들끼리도 믿지 못하니까 자꾸 ‘당신 나 사랑해?’라는 식으로 확인하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 전체에, 특히 21세기 대한민국에 불신이 충만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살다 보니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메시지가 공허하게 들리는 겁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성경의 메시지를 속 시원하게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다 알지 못하기도 하고, 더 근본에는 저런 메시지는 문자나 말로 완전하게 해명되는 게 아니기도 하며, 그 경험이 개인에 따라서 다르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로서 저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여러분의 일상에 은폐된 하나님의 나라를, 즉 은혜와 사랑과 믿음의 능력을 보물찾기하듯이 찾아보십시오. 마 13:44절에 따르면 천국은 밭에 감춰진 보화와 같고, 45절에 따르면 천국은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꾼과 같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무조건 서두르면서 열을 낸다고 해서 찾아지는 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간다면 하나님 나라와 그 능력이 빛으로 경험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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