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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복

신명기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69 추천 수 0 2025.08.30 19: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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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신30:9-14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1104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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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https://youtu.be/iUpYS1MbtUs 

성경본문 : 신명기 30:9-14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복

신30:9-14, 성령강림 후 5주, 2025년 7월 13일

 

하나님의 복

 

우리말 성경 <개역개정> 신명기 30장에는 ‘복 받는 길’이라는 표제가 달렸습니다. 사실은 30장만이 아니라 전체 34장에 이르는 신명기의 핵심 주제가 바로 ‘하나님의 복과 저주’라 해도 잘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양을 돌보는 목자처럼 자기 백성을 지키시는 분이시기에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신앙 자체가 틀린 건 아닙니다. 오늘 설교 본문에도 복의 내용이 아주 리얼하게 묘사되었습니다. 9-10절에서 일부 내용을 읽어보겠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가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을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

 

위 내용을 문자의 차원에서 보면 세상 사람이 모두 부러워할 정도로 잘 살게 해주겠다는 뜻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 복을 원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생존의 불안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동물들은 그런 생존의 불안이 없습니다. 지금 당장 배가 부르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사람만은 미래를 위해서 더 많은 것을 준비해야 하고, 더 많은 후손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생각을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위 구절은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그걸 보장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에서는 이런 성경 말씀이 그대로 실현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사람은 늘 넉넉하게 살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힘들게 사는 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무리 잘 믿어도 불행한 인생으로 떨어질 수 있고, 믿지 않아도 행복한 인생이 펼쳐지기도 합니다. 착하게 살아도 인생살이가 풀리지 않을 수 있고, 악하게 살아도 인생살이가 잘 풀리기도 합니다. 구약의 유대 백성을 보십시오. 하나님 말씀을 그들만큼 성실하게 듣고 순종한 민족은 없습니다. 선지자들이 볼 때는 늘 부족했으나 다른 민족과 비교하면 그들은 월등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부자 나라가 되지 못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 기원전 721년에 망했고, 남유다는 바벨론에 기원전 587년에 망했습니다. 기원후 70년에는 로마제국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초토화되었습니다. 히틀러 시대에는 600만 명의 유대인이 희생당했습니다. 그런 기구한 운명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거꾸로 지금 유대 민족의 후손이라고 자부하는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에서 벌이는 잔인한 행위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지금의 이스라엘은 그야말로 잘 먹고 잘사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강소국의 대표입니다. 사실상 핵무기 보유국입니다. 그 어떤 나라도 이스라엘을 비난하지 못한 정도로 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나라 없이 디아스포라로 떠돌던 시절보다 하나님 말씀을 더 청종했기 때문일까요?

 

복의 근원

 

본문을 비롯한 하나님의 복에 관해서 언급하는 모든 성경 본문은 복 자체를 말하는 게 아니라 복의 근원을 말하는 겁니다. 복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9-10절이 복 받는 전제 조건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다시 그 대목을 읽겠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이 율법책에 기록된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

 

본문이 말하는 ‘율법책’은 신명기를 가리킵니다. 신명기(Deuteronomy)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신명기는 둘째 율법이라는 뜻입니다. 모세가 40년 광야 생활을 끝내고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모압 광야에서 자기 백성들에게 연설한 내용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첫째 율법은 광야 생활 시작할 때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율법이 그것인데, 이 내용은 출애굽기와 레위기와 민수기에 나옵니다. 첫 율법이나 둘째 율법이나 실제로는 비슷한 내용이 겹칩니다. 출애굽 공동체로 불리는 고대 유대 민족의 정체성은 율법으로 시작해서 율법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곧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일까요? 율법이 유대 사회가 건강하게 유지되는데 빼놓을 수 없긴 하겠으나 율법 준수가 곧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다른 설교에서도 말씀드렸는데, 율법을 오늘의 우리나라 실정법으로 생각해도 좋습니다. 우리나라는 법치국가입니다. 헌법 제1조는 이렇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왕정이나 귀족 정치가 아니라 일반 국민의 선택으로 결정되는 공화정이라는 뜻입니다. 인류가 선택한 정치 제도 중에서 가장 좋은 제도로 인정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민주공화국이라는 제도가 모든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자칫 선동 정치가에 의해서 나라가 잘못된 길로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북한도 표면적으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입니다. 실제로는 김일성과 김정일과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왕정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히틀러도 선거로 집권했습니다. 세계를 온통 관세 전쟁으로 몰아넣고 있는 미국의 트럼프도 선거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다른 길이 없어서 우리가 민주공화국 체제를 유지할 뿐이지 그런 체제가 한 나라와 세계를 정의롭고 평화롭게 만든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신명기에 나오는 율법도 그렇습니다. 당시 유대인 공동체에서 벌어지는 온갖 문제들을 율법이 다루고 있습니다. 율법의 뼈대라 할 십계명만이 율법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신 4장에는 깨끗한 짐승과 더러운 짐승을 구별하는 규례가 나옵니다. 짐승 중에서 굽이 갈라지고 새김질도 하는 짐승은 먹을 수 있으나 둘 중에서 하나라도 문제가 있는 짐승은 먹지 못합니다. 돼지고기는 당연히 먹지 못합니다. 신 21장에는 전쟁 포로 중에서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집으로 데려가 아내로 삼을 수 있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신 22:22절은 불륜 문제를 다룹니다. “어떤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나거든 그 동침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신명기는 아니지만 똑같은 율법에 해당하는 레위기 20:13절은 동성애자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니라.” 유대의 율법 학자들은 율법이 죽은 문자로 떨어지지 않고 실제로 유대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드는 토대가 되게 하려고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현대사회에서도 법 전문가들이 나름으로 애쓰듯이 말입니다. 법체계와 조문이 아무리 발전해도, 법 전문가들이 아무리 많아도 세상이 크게 좋아진다는 보장이 없듯이 사람이 율법을 아무리 열정적으로 지킨다고 해도 그것 자체가 하나님께 돌아온 것이라는 보증은 아닙니다.

 

율법의 한계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사람들이 마지못해 억지로 율법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그게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80킬로미터 지정 속도 도로에서 단속만 피할 수 있다면 많은 이들이 90킬로미터 이상의 속도로 달립니다. 우리나라 입법기관의 중심인물들인 국회의원이 실제로 법을 지키나요? 법에 따라서 나라를 이끌어가야 할 대통령과 장관들은 법을 실제로 잘 지킬까요? 장관 청문회 때마다 확인되는 바처럼 법을 다 지키는 공직 후보자들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기가 직접 농사를 짓지 않으면서도 농지를 소유한 사람도 많습니다. 어린 자녀에게 집과 땅과 거액의 예금을 넘겨줍니다. 발각되지만 않으면 괜찮은 법은 있으나 마나 한 것이겠지요.

 

다른 하나는 율법 지키는 것을 자랑거리로 여기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초기 그리스도교 당시 율법주의자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종종 일어났던 현상입니다. 자기는 금식 기도를 정기적으로 행하고, 십일조를 준수하며, 어려운 이들을 돕는다고 자랑하는 겁니다. 이런 일은 칭찬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칭찬받는다고 해서 하나님께 칭찬받는 보장은 없습니다. 이게 바로 율법 종교인 유대교의 한계이고 딜레마였습니다. 그들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온전하게 지킬 수 없는 율법을 부둥켜안고 살았습니다. 한편으로는 가련하게, 다른 한편으로는 뻔뻔하게요.

 

한국의 많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적인 신앙에 갇혀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법으로 이해합니다. 제칠일안식교인들이나 여호와의증인 교도들처럼 고지식하게 신앙생활을 이어가면 그런대로 인정받을 만합니다. 안식교인들은 구약이 금지한 돼지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여호와의증인 교오들은 비폭력 무저항의 가르침에 따라서 불이익을 감수하고 군대에 가지 않습니다. 주류 정통교회은 성경을 철저하게 지키지 못하면서도 성경에 근거해서 동성애자들을 ‘왕따’ 시키는 데에는 열을 올리고, 경제 정의 문제는 사회주의 정책이라고 반대합니다. 저는 그분들의 신앙과 인격이 왜곡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근본을 정확하게 모르면 외양에 치우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자기 외모에 치우치면 내면에 관심을 기울일 수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궁극적인 것에 관한 관심의 총량은 비슷하니까요.

 

도대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율법을 지킨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겁니까? 저런 가르침은 시대에 한참이나 뒤처진 것이니까 폐기하는 게 옳은가요? 저는 율법주의자는 물론 아닙니다. 율법이 아니라 복음을 생명의 길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비롯한 모든 구약의 선지자들이 유대 백성을 향해서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하나님 말씀을 청종하라고 외친 이유는 압니다. 그 이유를 알기에 교회 전통에 따라서 지금도 선지자들의 글을 읽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자기 생명을 걸만한 절대적인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분명히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라고 표현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은 맛집을 찾아다니는 거와는 차원이 완전히 다릅니다.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건다는 뜻입니다. 자기 생명을 바치는 겁니다. 이와 비슷한 표현이 신 6:4-9절에 나옵니다. 이 구절에는 히브리어 ‘쉐마’라는 제목이 붙습니다. 쉐마는 듣는다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 ‘샤마’의 명령형입니다. 우리말 성경으로는 ‘이스라엘아 들으라.’로 나오지만, 실제 히브리어 성경에는 ‘들으라, 이스라엘아!’로 나옵니다. 그 구절의 일부를 읽어보겠습니다. 마음을 열고 들어보십시오. 고대 유대 민족의 영혼을 불살랐던 문장들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

 

이런 문장이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끼는 분도 있을 겁니다. 마치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 나그네> 마지막 24곡 “거리의 악사”(Der Leiermann) 악보만 보고도 그 노래의 풍경이 머릿속에 그려지듯이 말입니다. 혹은 고형렬 시인의 「오래된 것들을 생각할 때에는」라는 시집에 실린 ‘꽃씨’라는 시를 읽고 생명의 신비로움을 실감하듯이 말입니다. ‘꽃씨’ 마지막 두 연을 읽어보겠습니다. “꽃씨들은/ 꽃을 피웠지만 다시 살아난 것이란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생각할 수 없는 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꽃들은 자신의 존재를 알지 못합니다/ 자신의 작년의 꽃을 모릅니다// 그 마지막 얼었던 꽃씨들만 소란한 꽃을 피운답니다/ 돌아온다는데 꽃이 소란하지 않고 어쩌겠습니까”

 

중독 사회에서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 영혼을 걸고 살지를 못합니다. 생명을 그분께 온전히 맡기지 못합니다. 자기 영혼과 자기 생명을 자기가 해결하려고 손으로 움켜쥐고 안간힘을 쓰면서 살아갑니다. 세상의 기준에 따라서 다른 사람보다 더 행복하게 살지 못하면 불안하고 분하고 서러워집니다. 더 예뻐 보여야 하고, 더 건강해 보여야 하고, 더 ‘있어’ 보여야 합니다. 그게 현대인의 삶에서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알코올 중독자처럼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소비하는 방식의 삶에 자기도 모르게 중독되었습니다. 여기에는 못된 사람이나 착한 사람이나, 인격이 턱없이 떨어지는 사람이나 상당한 품격을 보이는 사람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소수이기는 하나 이런 세상에서도 정신 차리고 삶의 본질에 집중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오늘날 시대정신은 소유와 소비중독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올여름에 벌어지는 극심한 기후 불안정이 그 결과로 나타나는 건 아닐까요? 이런 마당에 어떻게 하나님께 돌아오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나요? 고대 유대 백성들도 반복해서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고, 형식적으로만 따른 채 하나님을 외면했습니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 같군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게 헛말인가요? 여기서 잠시 예수께서 말씀하신 복과 화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마태복음의 산상설교와 대조되는 누가복음의 평지설교에(눅 6:20절 이하)는 복과 화가 이중으로 나옵니다. 가난한 자와 굶는 자와 우는 자와 박해받는 자가 복이 있고, 부자와 배부른 자와 웃는 자와 칭찬받는 자는 화가 있을 것입니다. 너무 심한 거 같지요? 이건 사실이 아니라 상징으로 들리지요? 저는 진리라고 믿습니다. 에너지를 물 쓰듯 써서 기후 위기를 불러오는 부자 나라 사람들은 화를 당하고, 사용할 에너지 자체가 없는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복을 받을지 모른다고 말입니다. 그 방법은 하나님만 아시지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복을 받고 싶으신가요?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의 복인지를 아직 다 모릅니다. 대통령이 되는 게 복이 아니라 오히려 화가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이 말하는 복에 대한 목록은 그것 자체로 복이 아닙니다. 가장 큰 복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삶의 뿌리는 내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가난도 복입니다. 고독도 복입니다. 어떤 조건에서도 생명 충만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임마누엘이신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길을 갑니다. 그 길이야말로 하나님의 복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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