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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0:11-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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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0장 11절-24절: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혹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시니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
11절-12절: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사람 속에는 ‘나는 모르겠다. 내 책임이 아니다’ 하는 마음이 들어있다. 거짓 목자나 삯꾼 목자가 도망을 가는 것은 하나님 품이 아닌 세상으로 도망을 가는 거다.
눈으로 보이는 유형교회의 목사들은 다 자기가 참 목자라고 하겠지만 교인들을 세상으로 끌고 간다면, 즉 눈에 보이는 것을 구하게 하고, 물질의 복을 받으라고 한다면 이 목사는 세상으로 달아나는 꼴이요, 거짓 목자요, 삯꾼 목자다. 세상으로 달아나는 목자는 자기가 죽으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살려고, 안 죽으려는 거다. 그러나 신앙의 본질을 두고 영적으로 보면 세상으로 도망을 가는 것이라서 스스로 죽는 길로 가는 거다.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쪽으로 가게 되어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신앙의 이치를 정확하게 알아야 자기가 자기에게 안 속는다. 구원의 본질을 모른 채 믿게 되면 자기는 정확하게 똑똑하게 바로 한다고 해도 잘못된 길로 가게 된다. 우리의 신앙의 기준은 주님이다. 인간 내 마음에 맞고 틀리고가 아니라 주님의 기준, 성경의 기준에 의해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해야 한다. 인간의 생각을 가지고 ‘세상의 교회가 다 그러던데’ 라고 하는 것은 벌써 기준이 틀렸다. 기준이 틀리면 이 사람은 상황과 사건이 불리해지면 필연적으로 세상 쪽으로 가게 된다.
13절-21절: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혹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예수님에게 귀신이 들렸다고 하는 이 자들이 대제사장 서기관 율법사 바리새 교인들인데, 이들이 율법을 들고서 예수님에게 소경이나 문둥병자나 각종 병자를 안식일에 고치지 말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들은 안식일은 물론이고 안식일이 아닌 다른 날에라도 이런 병자들을 고친 적이 있느냐? 없다. 자신들은 고쳐주지도 못하면서 각종 병을 고쳐주시는 예수님이 귀신이 들려서 미쳤다고 하니 알고 보면 누가 귀신이 들리고 미친 거냐?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 놓은 거지 하나님을 위해 만든 게 아니다. ‘너를 고쳐주겠다, 높여주겠다. 차원 높은 것을 받아라’ 하고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만들어 놓은 거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이 눈으로 보이는 병이 있으면 이건 고쳐달라고 야단을 하면서 영적인 면에서 영원히 가는 심적 정신적인 면이 비뚤어진 것을 하나님처럼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을 하셨는데도 왜 이 면에는 고침 받을 욕심이 없을까?
세상에는 길고 짧은 것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고, 사람들의 마음이 ‘영원히 영원히 행복했으면 좋겠다’ 라고 하는데, 영원한 행복한 아닌 임시적인 행복에 욕심을 내고 있으니 이 정신이 온전한 거냐? 네 육신의 존재는 시간 속에 들어있다. 너무나도 빤한 사실이다. 그런데 왜 시간 속에 들어있는 임시적인 것에 집착을 하느냐? 이 정신이 온전한 거냐? 흑백을 모르고, 길고 짧은 것을 모르고, 너를 창조한 구원의 목적을 모르는 네가 정신이 있는 거냐? 이제라도 이런 것을 알았다면 두 번 다시는 ‘세상 복 복’ 하는 교회에 나가면 안 된다. 자기가 가지고 있던 세상 것이 없어지면 눈물이나 질질 흘리고 있다면 하나님 앞에 큰 심판이다.
자기는 영의 눈을 떴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못 알아본다면 이 사람의 정신이 온전한 거냐? 자기가 영의 눈을 떴다면 자기를 지은 분, 구원자를 알게 되어있고, 창조자에 대해 묻게 되어 있다. 이걸 성경에 분명히 밝혀놨는데 자기는 영의 눈을 떴다고 하면서 세상을 따라간다면 어떻게 된 거냐? 쉽게 말을 하면 자기를 낳은 부모를 안 따라가고 이상한 사람을 따라간다면 이게 정신이 있는 거냐? 사람들의 영의 눈을 뜨게 한 분이 귀신이 들렸느냐? 눈이 밝아져서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죄인이냐, 이방 로마권 밑에서 종노릇 하는 자들이 죄인이냐? 질을 두고 판단을 해봐라.
22절: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수전절은 유대백성의 3대 절기인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처럼 지키라는 명령은 없지만 BC160년 경에 수리아의 안디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하나님의 제단자리에 이방의 자기 신을 세워놓고 제사를 드렸다고 한다. 이게 얼마나 수치냐? 이에 B.C. 164년경 유다 마카비가 군사를 일으켜 수리아 군대를 물리치고 성전을 정화하여 하나님께 봉헌한 날을 기념하는 축제다
무슨 말을 하려고 갑자기 이 수전절을 말씀하는 걸까? 민족적으로 지나간 재앙과 또 앞으로 다가올 재앙을 암시하는 건데,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결국은 예수님을 죽이고, 이 죄로 인해 유대나라는 주후 70년에 로마군대의 말발굽에 짓밟히고 말았다. 이것을 보는 지금의 믿는 우리가 이 말씀을 하시는 영적인 뜻을 모른 채 눈으로 보이는 육적인 것에만 이해타산을 따지고 있다면 이것은 교회 안에서 돼지를 잡아 이방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과 같은 일을 하는 거다.
돼지는 고깃덩어리에 값어치가 있다. 신앙 면에서 돼지처럼 산다는 것은 세상 소원 목적으로 사는 것을 말한다. 교회에서 ‘예수 잘 믿어서 세상에서 부자가 되라’ 라고 하는 것은 육덩이 신앙이요, 돼지 같은 정신 사상의 신앙이다. 교회 안에서 돼지의 사상, 즉 육의 사상, 세상의 사상을 놓고 하나님께 ‘이것을 이뤄주시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거다.
구약에 자식을 불 위로 걸어가게 하는 것은 무당이 작두 위로 걷는 것과 같은 거다. 예수 믿는 사람이 실지로 돌부처를 섬기지는 않겠지만 세상 제일주의로 돌아갔다면 이 사람은 자기의 정신과 마음과 몸과 소원 목적을 우상 앞에 바치는 거다. 이것은 자기를 불 속에 집어넣는 거고, 자기를 우상 앞에 태우는 사상이다. 사람은 몸보다 먼저 정신이다. 그래서 ‘어떤 정신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에 따라 이 사람의 일생을 어디에 바치는 게 나오는 거다.
아브라함이 자식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물로 드렸지만 이 아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받은 바가 되었다. 다시 받을 때는 단순히 이삭이 아니라 이삭 속의 예수 그리스도를 받은 거다. 표면적으로는 이삭이지만 이삭을 통해서 구원계대가 내려가는 거다.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이 있지만 아브라함이라는 가정을 통해 구원계대가 내려가는 거다. 그 후손들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다고 했다.
그런데 믿는 사람인데도 신앙 믿음이 손으로 보고 만지고 눈으로 보는 것에만 관심이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면에는 무관심한 것은 선악과 사상이다. 이 사상을 가지고 이해타산을 따지며 산다면 어떻게 성령님께서 역사를 하시겠느냐? 맨날 얻어맞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살면 사람이 사는 가치가 없다.
23절: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시니.’ ‘솔로몬 행각’이라고 부르게 된 이유가 역사적으로 B.C. 586년 유대가 바벨론에게 정복을 당했을 때 이 행각은 파괴되지 않고 지은 그대로 남아있어서 솔로몬 행각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 사건을 다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조상들이 겪은 일들이고, 이 역사를 상기하라고 조상들이 후손들에게 계속 전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래를 다 아는 예수님께서 이들이 이런 일을 또 다시 당하지 말라고 구원을 주시려고 하는데도 예수님을 차디찬 겨울날처럼 얼마나 박대를 하는지? 이것은 또 다시 하나님의 분노를 만들고 있는 거다.
24절: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에워싼 것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이들이 예수님을 독차지한 셈인데, 그렇다면 성경에 대해 묻고 배울 절호의 기회인데 그러지 않고 하는 말이 ‘언제까지 우리의 마음을 의혹하려 합니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라고 했다.
유대인들의 이 말은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들을 죄를 더 짓게 하는 악한 말이라는 거다. 자신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옳은 것을 말씀하실 때 양심에 찔리면 고쳐야지 왜 죄를 더 짓게 하는 말로 들릴까? 옳은 말씀을 들으면 깨닫고 회개를 해야지 왜 의혹케 한다고 하는 거냐? 예수님의 말에 넘어가면 자신들이 죄를 짓는 것으로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진리생명 길, 하나님의 의사단일 길로 적중으로 가게 하는 말씀을 하시는데, 믿는 사람이 이 길로 가는 게 하나님 앞에 바로 가는 건데 이걸 오해를 해서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의혹케 한다고 하는 거다.
의혹케 한다는 것은 사람을 미혹한다는 말인데,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목적인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서 다른 길로 가도록 마음 도둑질을 하는 게 미혹이다. 인정정실이건 물질이건 어떤 방법을 써서든지 적중된 구원의 생명 길에서 떠나가게 하는 게 미혹이다. 그런데 이들은 질적인 이 면을 모르고 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향하게 하는 것은 미혹이 아니냐? 영원히 살리는 것이기 때문에 미혹이 아니다. 생명 길을 떠나가게 하고, 진리말씀을 못 받게 하고, 말씀을 따라 사는 일을 게으르게 만들고, 세상 것을 소원 목적하게 하는 게 미혹이다. 이것은 창조의 목적관을 허무하게 하는 거다.
미혹이란 세상의 물질을 욕심내게 하고 인간사랑을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인 것처럼 잘못된 믿음의 길로 이끄는 여러 가지 수단 방법들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진리의 종들의 가르침은 사망 길, 넓은 길, 세상 길을 가다가 깨우쳐서 생명 길, 좁은 길, 하나님의 의사단일 길로 가게 한다. 예수님께서 천국에서 오셨으니 교회에서 성도들을 천국으로 가게 하는 교훈을 하는 것은 성질적 영능의 실력적으로 옳은 거다. 이 가르침이 아니라면 질적인 면에서 교회라고 보기가 어렵다.
성경을 볼 때 성경의 인물 중에 ‘누가 믿음이 있고, 없고’를 보기보다는 사람의 정신과 사상의 질을 봐라. 야곱이 물질적 소원 목적을 가지고 집을 출발해서 삼촌 집에 가서 20년을 살면서 한 살림 잔뜩 짊어지고 나온다. 야곱은 임시적인 물질을 취하느라고 세월을 보냈다. 이룰구원 면에서 보면 야곱이 형도 속이고, 아버지도 속이고, 외삼촌도 속인 정신은 진리본질에서 떠난 이질이다. 야곱이 삼촌 집으로 도망을 갈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서 야곱에게 약속하신 것을 다 받은 것은 야곱이 믿음이 좋았기 때문이냐?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에 물질도 많고 자식도 많지만 자식들이 하도 애를 먹여서 정신과 마음이 얼마나 시련과 연단을 받았는지? 아무리 물질이 많더라도 이런 고통을 겪는데도 복이라고 할 수 있느냐? 어떻게 보면 물질이 없는 게 더 나았을 런지도 모른다. 그리고 열한 자식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꿈을 가진 요셉이 야곱을 애굽으로 모셔서 장자노릇을 했다. 자식이 많다고 해서 좋은 게 아니라 사람다운 자식이 있느냐가 문제다.
우리가 언제 예수를 믿었건 겉핥기식으로 믿으면 믿는 참 맛이 없다. 예수를 믿어갈수록 자기가 보여져야 믿는 맛이 나오는 건데 하나님의 말씀이 남 얘기처럼 들리고 하나의 전설처럼 들린다면 어떻게 믿음으로 들어가겠느냐?
라헬은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 되었고,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라고 하는 것은 지금도 육덩이 교회 안에는 언니와 자식 낳기 경쟁을 한 라헬의 사상이 있다는 거다. 반면에 언니는 조상의 묘에 묻혔는데, 우리는 레아가 조상들의 묘실에 들어간 것처럼 질적인 면에서 신앙사상이 진리본질의 믿음 안으로 쑥 들어가야 한다. 하나님의 본질로 쑥 들어가서 진리본질로 성장을 해야지 이질로 성장을 하면 안 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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