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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0:14-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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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0장 14절-16절: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14절-15절: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예수님께서 당신의 양을 안다는 것은 내가 예수님을 몰라도 예수님은 나를 아신다는 뜻으로 안다는 거다. 그런데 이 예수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다’ 라고 하셨지만 우리가 이 예수님이 선한 분인 줄을 모르게 되면 예수님께서 나를 알지 못한다는 말도 되고, 내가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는 말도 될 수 있는 거다.
창세 이후로 자신을 두고 ‘나는 선한 목자다’ 라고 말을 한 사람은 예수님 외에는 한 사람도 없다. 이것을 풀어서 말을 하면 주님처럼 안 죽는 부활성으로 생명성으로 산 선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말이 된다. 그럼에도 이 세상 사람 중에 ‘나는 선한 목자다’ 라고 말을 한다면 이 자는 악한 자라는 거다. 왜냐? 모든 인간은 아담 타락 이후로 생명과를 안 먹고 선악과를 먹고 타락되고 저주받은 지식으로 살고 있고, 선악과를 먹고 타락된 성품과 성향을 가지고 살고 있어서 모두가 악한 자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다’ 라고 하는 것은 죽음 저 너머까지 영원히 가는 효력성을 지닌 말이다. 주님은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은 선이시라. 인격적 성품적 실상적으로 선이시라. 당신 자체가 선이요, 당신의 언행심사와 오각의 오감성 자체가 선이시니 당신 마음대로 해도 전부가 선이다. 악한 것이 전혀 없다. 질적 본질적으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전부가 악한 거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권 밖의 것은 전부가 악한 거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당신처럼 질적 본질적인 선의 사람으로 만들어져 가는 거다.
안 믿는 세상사람들이나 이방 종교인들은 자체적 선의 사람이 아무도 없다. 유교에도 없고, 불교에도 없고, 소크라테스도 선의 사람이 아니다. 악인이다. 방편이나 행동에서 일반사람들보다 앞섰을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전혀 선으로 인정이 되지 않는 악한 사람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의 속성을 배우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 일반사회의 윤리 도덕성의 지식을 기준으로 이웃에게 선행을 하는 것을 선이라고 주장한다면 이 사람은 악한 자요, 거짓 종이요, 이단자요, 마귀의 자식이다.
하나님은 선이시라. 자체적 본질적 실상적 존재적 선을 모르면 교회에서 자꾸 행동을 강조하게 된다. 이것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거다. 이런 활동적인 선행을 하려면 물질이 있어야 하고, 시간이 있어야 하고, 건강해야 하는데 우리가 얼마나 부자라고, 무슨 수로 물질로 선을 행하겠느냐?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특수은총과 일반 자연은총을 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교육하고 양육해서 영능의 실력자로 성장시키는 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이다.
믿는 우리가 죽음 저 너머까지 영원히 가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선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면 이 사람은 인격적 성품적으로, 그리고 가치판단 평가성 도덕성 등의 모든 면에서 만들어진 만큼 선행이 나온다. 이 선행은 그 뿌리가 신적인 감동 감화에서 나오는 것이라서 하나님께서 받아주시고 인정을 해 주신다. 이것은 자기의 몸을 의의 병기로 쓰는 거다. 이것을 바꿔서 말을 하면 주님의 본질적인 것을 받아들여서 자체화 시키는 성도를 주님께서 알아주신다.
누가 어떤 말을 해도 하나님의 본질의 선이 나오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도리를 말한다면 이 말은 주님의 말씀이 된다. 그러나 어떤 웅변가가 감동적으로 말을 할지라도 질적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선이 나오지 않으면 주님의 말씀이 아니고, 따라서 주님을 따르는 종이 아니다. 그래서 말을 잘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진리를 따르는 양심에서 진리본질의 말씀을 증거하는 게 중요한 거다.
인간이라면 모두가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목적을 따라 지어진 존재이니 이 목적대로 하나님의 본질로 만들어지는 게 복된 사람이다. 사람 자체가 복된 거다. 사람 자체가 복된 사람이 되면 옳은 것으로 돌격적이고, 진취적이고, 정복적이고, 정직한 사람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 물질적인 것도 주신다. 그러나 물질을 기준으로 사람을 따지는 것은 사람을 외모로 보는 것이니 이런 사람이 어디를 간들 발을 붙이고 살 수 있겠느냐?
사랑은 마음만 가지고 하는 거냐? 몸을 왜 주었느냐? 사랑을 나타내라고 준 거다. 몸으로 안 나타내고 말로만 하는 사랑을 누가 못하겠느냐? 말로만 한다면 자기가 하나님도 해먹을 수 있다. 말쟁이는 실천이 없다. 말로만 사랑, 말로만 감사는 몸이 없는 사람과 같다. 이러면 은혜를 못 받는다.
‘나는 선한 목자라.’ 이 ‘선’이 무슨 선이냐? 행동적 활동적 선이냐, 인격적 성품적 자체적 선이냐? 예수 믿으면서 사람을 해코자 하면 안 된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것을 기준해서 선악을 말하는 게 아니라 죽음 저 너머까지 갈 수 있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선의 사람으로, 진리본질로 자체화 되는 것을 선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는 게 선의 사람이다. ‘내가 선행을 해야지’ 라고 하기 전에 선의 사람으로 되어있으면 이 사람은 환경과 장소와 사람에 따라 선행이 나오게 된다. 이걸 말하는 거다.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선이 인격적 성품적 실상적으로 자기 자체화로 되어있지 않으면 선이 안 나온다. 이러면 자기가 선행을 하려고 해도 환경에 따라, 조건에 따라 자기에게 불리하면 선행을 하지 않게 된다. 본질적 선의 사람으로 자체화 되어있지 않으면 환경에 지배를 받기 때문에 악의 사람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의 기준을 바로 잡아야 한다.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당신의 양을 아신다고 한다. 존재를 아는 것은 전제를 하고 질적인 면을 안다는 거다. 행동적 선이 아닌 인격적 성품적으로 하나님의 선의 사람으로 자체화 되면 이 사람은 교훈을 들을 때 누구의 교훈인지를 안다.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아버지는 자식이 어떤 자식인지 알고, 아들은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안다는 거다. 아버지와 아들은 돈이나 재산이나 재물로 관계가 되는 게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로 아는 거다. 교훈으로 이걸 깨닫게 한다.
부모나 자식이나 형제나 이웃 간에 인격적 관계는 없이 물질 대 물질로 관계를 가지게 되면 서로를 죽이는 게 나오게 된다. 우리가 이런 것을 보면서 나쁜 일이라고 하는 것으로 끝낼 게 아니라 왜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건지 그 이치를 알아야 한다. 이런 이치를 깨닫게 해주는 게 사람교육이다. 사람을 인격적으로 알지 않고 골육적으로만 알면 환경과 상황에 매이게 된다.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사람을 안다는 게 뭐냐? 시간적으로 같이 오래 있으면 알아지느냐? 부부간에 서로가 인격적으로 비뚤어진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서로를 알아지느냐? 서로 잘 통하느냐? 아니다. 부부는 인격적으로 한 길, 한 사상, 한 노선으로 가는 거다. 그런데 오늘날 부부들이 고깃덩어리를 보고 만났고, 재산이나 재물을 보고 만났고, 물질적 이해타산으로 결혼도 하고, 붙었다 떨어졌다 하고 있다. 이건 서로 아는 게 아니다.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이룰구원 차원에서 예수님께서 나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버렸는데, 어떻게 버렸느냐? 가슴이 뭉클하지 않느냐? 나를 사랑해서 죽은 나의 영을 살리려고 당신의 목숨을 버렸다. 어떻게 살리느냐? 율법은 ‘너는 이 면에 이 면에 죄를 지었다. 그러니 너는 죽어라. 죽어라’ 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이 죽은 것에서 하나하나를 다 살려낸다. 당신의 말씀의 적중성으로 나를 살리신다.
이 이치를 가지고 오늘날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살려면 모든 이해타산이 말씀에 적중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렇게 살면 자기의 수권범위 내에서 연관이 되는 것은 다 살아난다. 세상의 지식은 이걸 모른다. 세상의 지식을 가지고는 이 지식을 받지 못한다.
16절: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당신의 생명권 진리권 아가페권 치리권 안에 들지 않은, 즉 성 밖에 있는 양들이 있다는 거다. 교회 안에 같이 앉아있어도 우리에 들지 아니한 양이 많이 있을 수 있다. 신앙사상이 질적으로 안 들어와 있구나.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우리에 들지 않은 양들을 인도하신다고 한다. 인도하시는 방편은 교훈이 들어간다. 즉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를 가지고 인도를 한다. 이게 주님의 교훈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가 아니면 주님의 인도가 아니다.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단순히 말만을 듣는다는 게 아니라 주님의 말씀 속에 들어있는 질을 깨닫는다는 거다.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역사적으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로 한 마음으로 영능의 실력을 닦으며 가나안으로 올라간 것처럼 주님의 인도를 받은 사람이 하나같이 주님과 의사단일로 나간다는 거다.
오늘날 곳곳에 교회가 있기 때문에 각 교회에서 많은 설교가 선포되지만 원칙적으로 설교의 본질은 하나다. 하나의 사건을 놓고 어떤 종은 거룩으로 말을 하고, 어떤 종은 사랑으로 말을 할지라도 하나님의 본질이 나온다면 하나다. 그러나 아무리 유창한 말로 설교를 할지라도 세상지식을 기준으로 해석을 한다면 주님과 하나가 아니다.
생명의 말씀은 인간의 신앙양심에 방망이질을 한다. 그러나 비진리는 행동을 강조한다. 이건 하나가 아니다. 행동강조, 종교적 의식강조 이건 아니다. 이게 마지막 시대의 교회의 현상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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