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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모음 2069. 「불혹」불혹에 관한 시
차례
불혹 / 이도윤
불혹 / 김명기
불혹 / 신혜경
불혹(不惑) / 성선경
불혹의 집 / 전영관
불혹의 연가 / 문병란
불혹(不惑) / 이도윤
사십이다.
안방에 걸린
활짝 핀 모란 같은 나이
공자(孔子)는 기원전(紀元前),
세상일에 미혹하지 않았다 했는데
쓰다듬을 만큼 수염이 자라
이제 늙어가는 일만 남아있는가
흰머리를 뽑는 나의 불혹은
잔주름 같은 실수로 이마에 금을 긋고
말 수만 줄어든 채 어금니로 박혀있다
만화 같은 불륜의 오늘은 서러울 뿐
만취도 없이
피끓는 연애의 설레임도 없이
어떻게 사나
부디 철들지 마시라 나의 마흔이여
- 이도윤,『산을 옮기다』(도서출판 詩人, 2005)
불혹 / 김명기
사랑에는 도무지 이방인인 내가
또 하나의 사랑을 놓아버린 다음날
작은 포구 선술집에 앉아
연탄난로 위 자작자작 졸아드는
매운탕 냄비를 들여다본다.
누군가는 내가
술 마시지 않는 것에 대해 불평을 하고
나는 그 불평을 또 다른 누군가가
내게 퍼붓는 욕설처럼 듣고 있다.
이렇게 뜨겁게 달아오르는 동안
점점 졸아드는 것이 사랑인가.
다 졸아들면 끈끈하게 엉키는 잔반처럼
남는 것은 검붉은 안타까움인데
어느 적엔 푸르고 단단했을 무 한 조각,
졸아들다 졸아들다 시커멓게 변해버린
대책 없이 물큰해진 무 조각처럼
뜨거움을 견디지 못한 내가
양은냄비 속에 한없이 쪼그라들고 있다.
더는 유혹에 흔들리지 않아야 할
반란 같은 생의 날은 언제쯤 오는 것일까
뜨거운 속내 깊숙한 곳에
아주 오래 끓어오를 것 같던 사랑은 다 졸아들어
냄비 속 잔반처럼 속절없이 끈적해져 가는데
누군가는 여전히 내가 술 마시지 않는 것이 불만이고
나는 그것을 지독한 욕설처럼 듣고 앉아
졸아드는 냄비 속에 차가운 물 한 사발 들어붓는다.
- 김명기,『북평 장날 만난 체 게바라』(문학의전당, 2009)
불혹(不惑) / 신혜경
오동 꽃 진다
이 산 저 산 찔레꽃 모두
피라고 해라
가시도 제 몸이거든 옹골지게
물 올리라 해라
지는 꽃잎 서럽거든 죽죽
울라고 해라
그리고,
여름 오기 전
잊어라 해라
꽃이었던 날들 모두
잊어라 해라
나비도 벌도 떠나버린 남은 생은
꽃 진 자리 바라보며 견디는 일임을
알라고 해라
- 신혜경,『달전을 부치다』(문학수첩, 2011)
불혹(不惑) / 성선경
흔들리지 않아서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아서
한그루 소나무 옆의 바위처럼 조용히 누울와(臥)
개울가에서 발 담그면 고요히 흐를유(流)
수풀 사이에 몸 숨기면 들꽃 옆의 나비접(蝶)
새벽 강가에 서면 곱게 가라앉은 물안개 같아서
……불혹(不惑)……
들녘에 선 한 촌로나
촌로의 낫 아래 베어진 벼 밑동 같아서
그저 그리하여서
한 점 미혹됨이 없는 시(詩)여야겠는데
낙락장송 옆에서도 이미 학이 떠난 빈둥지같이 빌공(空)
개울가에서는 피래미나 송사리같이 깜짝 놀라 달아날주(走)
수풀 사이에선 또 이미 볼품없이 시든 꽃 추할추(醜)
새벽 강가에선 머저리같이 흔들리는 갈대처럼 꺾어질좌(挫)
저 들녘에선 흔들리는 허수아비
장바닥을 뒹구는 널부러진 호미
혹은 괭이자루
밑창 떨어진 헌 짚신짝
배추뿌리나 무우꼬랑지 같은
시인(詩人)이여.
- 성선경,『몽유도원을 사다』(천년의시작, 2006)
불혹의 집 / 전영관
늦도록 야근이라도 했을까 두런두런
손 씻는 버드나무 야윈 팔 사이로
고단한 새벽만 우련하다
해쓱하게 마른버짐 핀 얼굴로 산은
종아리까지 발 담근 채 상류로
거슬러 오르는
갈대들의 연두 빛 걸음걸이를 헤아리는 중인데
청태 자욱한 자갈밭에 드문드문
헤집어 놓은 자리들 뽀얗다 지느러미 뭉툭해지도록
거친 바닥을 밤새 뒤척인 흔적이리니
세월이 잔잔하게 무두질한 강물도 속내는 그렇지 않아
높낮이가 있고 마름과 줄풀의 허름한 자리도
예정되어 있으리니 철 이른 연밭
무진무진 찾아든 열사흘 달빛이 물안개와
결 곱게 버무려지면서 불혹의 집을 세운다
유혹 아닌 것 없고 흔들리지 아니한 순간도 없더라만
봄이면 구멍 숭숭한 연근 속으로 환한 꽃빛이 들어차고
알자리를 저리 뽀얗게 마련하는 것과 같이
물푸레 손잡이 닳아지도록 날품팔이 아버지
망치질로 노임 채우던 소리의 깊이를
날계란 하나와 밀가루 한 움큼 계란떡으로 어머니
올망졸망 오남매 두레상으로 부르던 소리의 넓이를
철들은 줄 알았던 불혹의 어린 아들은
부지런한 아침볕이 짚어주는 물가를 따라가며
성긴 눈으로 가늠해본다
지금껏 어떤 터를 헤집고 있었는지
그 자리 오롯이 우리 식구 모여 앉아 있는지
- 전영관,『바람의 전입신고』(도서출판 세계사, 2012)
불혹(不惑)의 연가(戀歌) / 문병란
어머니,
이제 어디만큼 흐르고 있습니까
목마른, 당신의 가슴을 보듬고
어느 세월의 언덕에서
몸부림치며 흘러온 역정
눈 감으면 두 팔 안으로
오늘도, 핏빛 노을은 무너집니다.
삼남매 칠남매
마디마디 열리는 조롱박이
오늘은 모두 다 함박이 되었을까
모르게 감추어 놓은 눈물이
이다지도 융융히 흐르는 강
이만치 앉아서 바라보며
나직한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보셔요, 어머니
나주벌 만큼이나 내려가서
삼백리 역정 다시 뒤돌아보며
풍성한 언어로 가꾸던 어젯날
넉넉한 햇살 속에서
이마 묻고 울고 싶은
지금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시간입니다.
흐른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
새끼 네 명을 키우며
중년에 접어든 불혹의 가을
오늘은 당신 곁에 와서
귀에 익은 노래를 듣고 있습니다.
아직도 다하지 못한
남은 사연이 있어
출렁이며 출렁이며 흐르는 강
누군가 소리쳐 부르고 싶은
이 간절한 마음은 무엇입니까.
목마른 정오의 언덕에 서서
내 가슴 가득히 채우고 싶은
무슨 커다란 슬픔이 있어
풀냄새 언덕에 서면
아직도 목메어 흐르는 강
나는 아득한 곳에서 회귀하는
내 청춘의 조각배를 봅니다.
이렇게 항상 흐르게 하고
이렇게 간절히 손을 흔들게 하는
어느 정오의 긴 언덕에 서서
어머니, 오늘은
꼭 한번 울고 싶은 슬픔이 있습니다.
꼭 한번 쏟고 싶은 진한 눈물이 있습니다.
- 문병란,『내게 길을 묻는 사랑이여』(도서출판 모던, 2009)
https://blog.naver.com/edusang/22391500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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