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
2002. 8. 25. 설교방송 (설교본문)
큰 사람 세례요한 마태복음 11:7-11
======================================================================
제가 아주 어렸을 때 저희 외삼촌댁이 남산 후암동에 있었습니다. 저는 어려서 외삼촌댁엘 잘 가곤 했었습니다. 외삼촌댁은 아주 부잣집이었고 저희는 아주 가난한 집이었는데 언제나 가면 따뜻하게 잘 대해 주었기 때문에 혼자서도 잘 찾아가곤 했었습니다.
초등학교 때인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외숙모 님을 따라 후암 시장을 갔습니다. 당시 시장 바닥은 비가 온 후여서 그랬는지 아주 질퍽했습니다. 신발을 더럽히지 않고 걸을 수 없으리만큼 길이 좋지 못했습니다.
그때 저희 외숙모 님은 제 앞에서 걸음을 걸으시면서 저에게 당신 발자욱을 따라 짚고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 조카의 신발이 더럽혀지지 않게 좁은 보폭으로 걸음을 걸어 길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때 그 모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것이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았던 우리 외숙모 님의 행동은 저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어른이란 어린 아이의 길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조금 발전하여 '큰 사람이란 다른 사람들이 걸어갈 깨끗한 길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되었습니다.
크고 훌륭한 사람은 작고 어리고 약한 사람들의 '갈길'과 '살길'을 마련해 주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많은 학식과 아무리 많은 재산과 아무리 높은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작고 어리고 약한 사람들의 '갈길'과 '살길'을 마련해 주지 아니하고 저 혼자만 잘 살겠다고 욕심을 부리며, 오히려 작고 어리고 약한 사람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덩치만 키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점점 작고 어리고 약한 사람들의 '갈길'을 막고 '살길'을 막막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사람은 아무리 재산이 많고 아무리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라고 하여도 우리는 그를 큰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는 작은 사람보다 작은 사람이요, 못난 사람보다 못난 사람입니다. 세상에는 덩치는 크나 사람은 작고 못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강하고 힘이 있는 사람이 좋은 길을 걷고 약하고 작은 사람들이 험한 길을 걷는 세상입니다. 강하고 힘이 있는 사람들의 길을 점점 넓어지고 그렇지 못한 약자들의 길은 점점 더 좁아지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전체가 다 그런 모습이지만 그래도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를 보면 후진국보다 부하고 강한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대하여 어른다운 책임을 잘 감당하는 나라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책임감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나라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세례요한은 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가난하여 낙타 털옷을 입고 살았습니다. 저희 부모님이 옛날에 몽골쪽에 사신 적이 있으셨는데 부모님으로부터 가난한 사람들이 양털을 입고 살더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여름에는 털이 밖으로 나오게 입고 겨울에는 털이 안으로 나오게 입더라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바로 그와 같이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정말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회적인 신분이 전혀 없는 아주 낮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의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그는 큰 사람이 아니라 아주 작은 사람 중의 작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큰 사람이라고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세례요한을 큰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까닭은 그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길을 내는 그런 큰 사람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러 온 사람이라고 불리어 지는 사람입니다. 주의 길이란 사람의 '갈길'과 '살길'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이란 사람들의 '갈길'과 '살길'을 예비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갈길'을 열어 주고 '살길'을 마련해 주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며칠 전 어느 일간지 문화면에 소개된 방글라데시의 지식인 무하마드 유누스(62)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는 약 26년 전에 최빈층에게 신용만으로 건당 평균 150 달러를 융자해 주어 삶의 바탕을 마련해 주려고 그라민 뱅크라는 은행을 설립한 사람입니다. 저는 오늘 그 일간지에 실린 기사를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사방은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시신들은 우리 집 대문 앞에 나뒹굴었지만, 부족함 없이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우리에게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았다... 땅바닥에 서로 껴안은 채 웅크리고 있는 어머니와 자식이 우리와 같은 세상 사람들인지 아니면 이미 다른 세상으로 떠났는지 알 수 없었다."
세계 최고의 인구밀도, 거듭되는 홍수와 기아, 1인당 국민소득 369 달러의 가난한 나라, 방글라데시의 지식인 무하마드 유누스(62)는 1974년 대기아 앞에서 격은 참혹한 심경을 이렇게 토로했다. 그는 미국 유학을 거쳐 치타공 대학에 재직하던 경제학자였다. 그는 고민했다. "길바닥에선 사람들이 굶어죽고 잇는데, 도대체 경제학이론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는 미국 대학으로 돌아가 안락하게 살자는 미국인 아내를 떠나보내고 빈곤 퇴치에 헌신했다. 그리고 그라민 뱅크를 설립하였다. 그라민 뱅크란 최빈층에게 신용만으로 소액융자(건당 평균 150 달러)를 해 주는 기관이다. 1976년 42명에게 856카타(27달러)를 빌려주는 것으로 시작해 현재 방글라데시에서만 240만명에게 1,600억 타카(3조 6천억원)클 대출해 주었다.
유누스는 "구걸하는 습성은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행위"이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적선이 아니라 평등한 기회"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는 자본주의가 "가진 자는 가진 것만큼 더 쉽게 가진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앞으로도 더 가질 수 없다"는 법칙과 함께 굴러가고 있음도 직시했다. 당시 방글라데시 은행들은 빈곤한 국민들을 외면했다. 반면에 부자들은 거액의 융자를 받은 뒤 경제 위기를 빌미로 빚을 탕감 받았다. 방글라데시 국경 산업개발은행의 원금 회수율은 10%에 불과 했을 정도다.
유누스는 먼저 "가난한 이들은 무책임하다"라는 편견에 도전했다. 특히 빈곤층 여성들에게 주목했다. 이들은 기아가 닥치면 가장 먼저 굶어야 했고 지참금 문제로 고통받았다. 그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조금이라도 주어진다면, 여성은 남성보다 더 투쟁적이 된다"고 믿었다. 결과적으로 그라민 뱅크의 회원 95%는 여성이고 이들은 90%를 웃도는 원금 상환율을 보인다. 인근마을 5명의 대출자끼리 한 조가 돼 서로 경쟁, 협력하고 장래의 신용도를 연대 평가받게 한 덕분이다.
"어릴 적에는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부모님께 재수 없다는 소릴 들었어요. 보모님은 지참금이 한 푼도 없었거든요. 어머니는 내가 태어났을 때 살려두지 말아야 했는데 하는 이야기를 항상 하셨어요. 저는 감히 융자를 받을 수 있으리란 생각을 해 본 일이 없어요" 하에라 베굼은 시각장애자 남편과 결혼했고,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그라민 은행은 하에라의 삶을 바꿨다. 그는 2,000타카(50달러)를 빌려 송아지를 산 뒤, 새 삶을 일궈나가고 있다.
유누스는 빈곤 문제 해결에 팽배한 관료주의와 부패를 비판한다. 그는 외국 원조액의 75%는 자국의 금융 앨리트를 고용하는데 쓰이고, 나머지는 수혜국의 부패한 관료들에게 돌
아 간다고 지적했다. 그는 세계은행 본부를 워싱톤에서 방글라데시의 타카로 옮기면 기실 가난 문제 따위는 관심이 없는 선진국 엘리트 대부분이 퇴사할 것이라고 비꼬기도 했다.
현재 그라민 은행의 이상은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다. 수많은 제 3세계 젊은이들이 '선진 금융기법'을 배우겠다며 미국으로 몰려들지만, 그라민 은행은 세계최빈국 방글라데시의 금융기법을 미국으로 수출한다. 이들은 1996부터 2005년까지 세계 100만 가구에 소액융자를 준다는 목표를 실천하고 있다. 유누스 총재는 97년 2월 소액융자 정상회담에서 연설했다. "인간은 라이트 형제가 12초 동안 공중을 날았던 이래 불과 65년 만에 달에 발을 디딜 수 있었습니다. 이제 정상회담이 열린 오늘로부터 50년이 채 되지 않아서 우리는 우리의 달에 발을 내디딜 것입니다, 우리는 마침내 가난 없는 세상을 이룩할 것입니다">
이상이 거의 삭감이 없는 신문 기사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무하마드 유누스가 바로 이 시대의 세례요한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길이 없는 최빈층의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살길'을 열어주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시대의 세례요한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혹 신학적인 문제가 생길는지 모릅니다. "그는 크리스천이 아닌데 어떻게 세례요한이 될 수 있느냐?" 누가 만일 그렇게 질문을 한다면 저는 이렇게 되묻고 싶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왜 크리스천인데 그와 같은 삶을 살고 있지 않느냐?..." 물론 그 '당신' 속에는 저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저는 무하마드 유누스의 삶이 바로 세례요한의 삶이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큰 사람'의 삶이라고 믿어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그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세례요한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 말씀을 설교로 준비하는 저에게 하나님은 무하마드 유누스에 대한 기사를 읽게 하셨습니다. 저는 성경과 신문을 통하여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세례요한을 성경을 통해서 보고 듣고 공부만 하지말고 너희가 세례요한과 같은 큰 삶을 사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무하마드 유누스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지난주에 저는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아이들만 모아 교육을 시키는 소위 대안학교를 세워 몇 년 동안 최선을 다하고 있는 교육자 한 분을 만났습니다. 술과 담배를 말할 것도 없고 선생님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심지어는 구타까지 마다하지 않는 아이들과 3년 동안 씨름하여 마침내 성공한 교육자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이 세운 대안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 출판이 되었습니다. 그 책은 '세인고 사람들'이라는 책인데 그 책 앞부분에 나오는 프롤로그를 여러분들에게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2002년 2월 8일, 세인 고등학교의 첫 번째 졸업식은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식을 시작한지 다섯 시간이 지나도록 졸업생들은 차례대로 연단에 올라, 3년 동안 세인고에서 생활했던 감회와 앞으로의 포부를 말하고 있었다.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학부모와 교사등 모든 세인고 사람들은 때로는 폭소를 터트렸으며, 때로는 눈물바다를 만들기도 했다.
세인 고등하교의 첫 입학생이자 졸업생인 이들은, 주위 환경 때문에 공부에 열중하지 못하고 겉으로만 떠돌던 아이들이었다. 입학하기 전의 그들은 학업에 대한 자신감도 없었고, 과연 졸업이나 제대로 할 수 잇을지 자신에 대한 확신도 없었다. 그러던 아이들이 3년 동안 세인고에서 지내면서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이다. 장래에 대한 꿈과 목표를 가지게 되었으며 졸업생의 90% 이상이 대학에 진학하는 결과를 얻었다. 세인고등학교의 모든 일이 그랬던 것처럼 이 졸업식 또한 예사롭지가 않았다. 졸업생들은 힘겨운 상황에서도 사랑으로 자신들을 보살펴주신 선생님들께 감사의 뜻을 전했으며 동고동락했던 친구들과의 이별을 아쉬워했다.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자꾸 눈물이 나와서 참을 수가 없네요. 우리 세인의 이름대로 세계를 품고 남을 도와 줄 수 있는 바른 인간이 되겠습니다"
여섯 시간이 지나서야 졸업생들의 이야기는 모두 끝났다. 경황이 없어, 학교 설립 후 3년이 지나도록 만들지 못하다가 졸업식 이틀 전에야 겨우 완성시킨 교가가 세인 가족들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진리의 빛 임하여 이 땅을 비추니
이 민족이 하나 되어 열방을 섬기리
개마고원 자락에서 천산의 빙벽 아래서
아라랏의 기슭에서 이웃 위해 이 몸 바치리
새 시대 새 역사를 이루어갈 우리들
주신 달란트 갈고 닦아 손에 손잡고 하나 되어
그의 나라 그의 뜻 이루는 일꾼이 되리라
그의 나라 그의 뜻 이루는 사랑의 우리 세인고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2절까지 열창했다.
그들이 교가를 부른 동안 나는 지난 3년 동안의 많은 일들을 떠 올렸다. 중학교 때의 성적표에 '가'와 '양'이 수두룩한 까닭에 스스로 '가양'중학교 출신이라고 자조하였던 아이들. 교사를 못한 나머지 욕설까지 퍼부으며 거칠게 대들었던 아이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우리에게 자부심을 갖게 하는 보배가 되었다. 꿈조차 가질 수 없어 마음 깊이 접어 두었던 아이들은. 이제 너무나 많은 꿈을 갖게 되어 주체를 못할 정도라고 말한다. 자신의 것만 챙기기에 바빴던 아이들이 동료와 후배들을 가족처럼 사랑하게 되었으며 마음의 문을 열고 선생님과 부모님을 깊이 존경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제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해가는 힘을 갖게 되었다. 공부의 '공'자도 듣기 싫어하던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공부를 시작하더니 대부분 대학에 진학했고, 나머지 학생들도 대학을 못간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에 따라 다른 길을 선택했다. 인생의 설계에 따라 취업을 한 학생도 있었고, 소홀했던 공부를 보충하기 위하여 다시 학업의 길을 택한 학생도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중국, 미국, 호주, 필리핀등으로 유학을 떠나갔다. 세계를 품은 바른 인간을 만들겠다는 목표에 따라 학교의 이름을 세인(世人)이라고 지었는데 이젠 그들 스스로 원대한 꿈을 품고 세계로 뻗어 나갔다.
.............
오늘의 결실은 뜻을 함께 했던 많은 동지들이 있기에 가능했다. 현실감 없고 대책 없는 사람들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심지 깊게 이 자리를 지켜온 분들이다. 월급이라고는 고작 20여 만원을 받아 가면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었던 동지들. 34 년 간의 교직생활과 교장이라는 경력을 버리고 스스로 정문 수위를 맡아 학생들을 지도했던 김용문 교장선생님. 특히 아이들의 식사 하나하나에 손수 신경을 써주시다가 운명을 달리하신 오경님 사모님은 하늘 나라에서도 오늘을 가장 기뻐하실 것이다. 이 모든 분들이 계셨기에 세인고의 첫 졸업식을 가질 수 있었다.>
오늘도 우리 주위에는 세례요한과 같이 힘없고 약하고 낮은 사람들의 '갈길'을 열어주고 '살길'을 열어 주기 위하여 자신의 삶을 희생하며 사는 너무나 크고 훌륭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에서 그와 같은 사람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 교인들이 그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이 살고 일하고 있는 현장에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는 세례요한과 같이 이 세상에 주님의 길을 닦으려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과 함께 힘을 합하여 사역을 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참으로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시작하지 얼마 되지도 않는 우리 교회에 그와 같은 훌륭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많이 보내주시고 소개해 주시고 계십니다. 저들이 우리 교회와 함께 사역을 하고 싶어서 자기 발로 찾아오고 있습니다.
사실은 모두가 다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모두가 다 적지 않은 재정적 부담을 해야만 하는 일이요 신경을 써야 하는 일들입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이와 같은 일들은 부담스러워하거나 거추장스러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이곳에 높은 뜻 숭의교회를 세워주시고 또 남달리 축복해 성장케 하심은 바로 그와 같은 짐을 감당하라고 하시는 것인 줄을 믿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 사회 그리고 역사와 같은 구체적인 삶의 현장 속에서 사람들의 '갈길'과 '살길'인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삶을 살아가는 높은 뜻 숭의교인들이 되시기를 바라며, 그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후원자가 되고 동역자가 되는 큰 시대적인 사명을 감당하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되기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큰 사람 세례요한 마태복음 11:7-11
======================================================================
제가 아주 어렸을 때 저희 외삼촌댁이 남산 후암동에 있었습니다. 저는 어려서 외삼촌댁엘 잘 가곤 했었습니다. 외삼촌댁은 아주 부잣집이었고 저희는 아주 가난한 집이었는데 언제나 가면 따뜻하게 잘 대해 주었기 때문에 혼자서도 잘 찾아가곤 했었습니다.
초등학교 때인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외숙모 님을 따라 후암 시장을 갔습니다. 당시 시장 바닥은 비가 온 후여서 그랬는지 아주 질퍽했습니다. 신발을 더럽히지 않고 걸을 수 없으리만큼 길이 좋지 못했습니다.
그때 저희 외숙모 님은 제 앞에서 걸음을 걸으시면서 저에게 당신 발자욱을 따라 짚고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 조카의 신발이 더럽혀지지 않게 좁은 보폭으로 걸음을 걸어 길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때 그 모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것이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았던 우리 외숙모 님의 행동은 저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어른이란 어린 아이의 길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조금 발전하여 '큰 사람이란 다른 사람들이 걸어갈 깨끗한 길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되었습니다.
크고 훌륭한 사람은 작고 어리고 약한 사람들의 '갈길'과 '살길'을 마련해 주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많은 학식과 아무리 많은 재산과 아무리 높은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작고 어리고 약한 사람들의 '갈길'과 '살길'을 마련해 주지 아니하고 저 혼자만 잘 살겠다고 욕심을 부리며, 오히려 작고 어리고 약한 사람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덩치만 키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점점 작고 어리고 약한 사람들의 '갈길'을 막고 '살길'을 막막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사람은 아무리 재산이 많고 아무리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라고 하여도 우리는 그를 큰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는 작은 사람보다 작은 사람이요, 못난 사람보다 못난 사람입니다. 세상에는 덩치는 크나 사람은 작고 못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강하고 힘이 있는 사람이 좋은 길을 걷고 약하고 작은 사람들이 험한 길을 걷는 세상입니다. 강하고 힘이 있는 사람들의 길을 점점 넓어지고 그렇지 못한 약자들의 길은 점점 더 좁아지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전체가 다 그런 모습이지만 그래도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를 보면 후진국보다 부하고 강한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대하여 어른다운 책임을 잘 감당하는 나라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책임감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나라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세례요한은 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가난하여 낙타 털옷을 입고 살았습니다. 저희 부모님이 옛날에 몽골쪽에 사신 적이 있으셨는데 부모님으로부터 가난한 사람들이 양털을 입고 살더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여름에는 털이 밖으로 나오게 입고 겨울에는 털이 안으로 나오게 입더라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바로 그와 같이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정말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회적인 신분이 전혀 없는 아주 낮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의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그는 큰 사람이 아니라 아주 작은 사람 중의 작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큰 사람이라고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세례요한을 큰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까닭은 그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길을 내는 그런 큰 사람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러 온 사람이라고 불리어 지는 사람입니다. 주의 길이란 사람의 '갈길'과 '살길'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이란 사람들의 '갈길'과 '살길'을 예비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갈길'을 열어 주고 '살길'을 마련해 주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며칠 전 어느 일간지 문화면에 소개된 방글라데시의 지식인 무하마드 유누스(62)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는 약 26년 전에 최빈층에게 신용만으로 건당 평균 150 달러를 융자해 주어 삶의 바탕을 마련해 주려고 그라민 뱅크라는 은행을 설립한 사람입니다. 저는 오늘 그 일간지에 실린 기사를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사방은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시신들은 우리 집 대문 앞에 나뒹굴었지만, 부족함 없이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우리에게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았다... 땅바닥에 서로 껴안은 채 웅크리고 있는 어머니와 자식이 우리와 같은 세상 사람들인지 아니면 이미 다른 세상으로 떠났는지 알 수 없었다."
세계 최고의 인구밀도, 거듭되는 홍수와 기아, 1인당 국민소득 369 달러의 가난한 나라, 방글라데시의 지식인 무하마드 유누스(62)는 1974년 대기아 앞에서 격은 참혹한 심경을 이렇게 토로했다. 그는 미국 유학을 거쳐 치타공 대학에 재직하던 경제학자였다. 그는 고민했다. "길바닥에선 사람들이 굶어죽고 잇는데, 도대체 경제학이론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는 미국 대학으로 돌아가 안락하게 살자는 미국인 아내를 떠나보내고 빈곤 퇴치에 헌신했다. 그리고 그라민 뱅크를 설립하였다. 그라민 뱅크란 최빈층에게 신용만으로 소액융자(건당 평균 150 달러)를 해 주는 기관이다. 1976년 42명에게 856카타(27달러)를 빌려주는 것으로 시작해 현재 방글라데시에서만 240만명에게 1,600억 타카(3조 6천억원)클 대출해 주었다.
유누스는 "구걸하는 습성은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행위"이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적선이 아니라 평등한 기회"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는 자본주의가 "가진 자는 가진 것만큼 더 쉽게 가진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앞으로도 더 가질 수 없다"는 법칙과 함께 굴러가고 있음도 직시했다. 당시 방글라데시 은행들은 빈곤한 국민들을 외면했다. 반면에 부자들은 거액의 융자를 받은 뒤 경제 위기를 빌미로 빚을 탕감 받았다. 방글라데시 국경 산업개발은행의 원금 회수율은 10%에 불과 했을 정도다.
유누스는 먼저 "가난한 이들은 무책임하다"라는 편견에 도전했다. 특히 빈곤층 여성들에게 주목했다. 이들은 기아가 닥치면 가장 먼저 굶어야 했고 지참금 문제로 고통받았다. 그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조금이라도 주어진다면, 여성은 남성보다 더 투쟁적이 된다"고 믿었다. 결과적으로 그라민 뱅크의 회원 95%는 여성이고 이들은 90%를 웃도는 원금 상환율을 보인다. 인근마을 5명의 대출자끼리 한 조가 돼 서로 경쟁, 협력하고 장래의 신용도를 연대 평가받게 한 덕분이다.
"어릴 적에는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부모님께 재수 없다는 소릴 들었어요. 보모님은 지참금이 한 푼도 없었거든요. 어머니는 내가 태어났을 때 살려두지 말아야 했는데 하는 이야기를 항상 하셨어요. 저는 감히 융자를 받을 수 있으리란 생각을 해 본 일이 없어요" 하에라 베굼은 시각장애자 남편과 결혼했고,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그라민 은행은 하에라의 삶을 바꿨다. 그는 2,000타카(50달러)를 빌려 송아지를 산 뒤, 새 삶을 일궈나가고 있다.
유누스는 빈곤 문제 해결에 팽배한 관료주의와 부패를 비판한다. 그는 외국 원조액의 75%는 자국의 금융 앨리트를 고용하는데 쓰이고, 나머지는 수혜국의 부패한 관료들에게 돌
아 간다고 지적했다. 그는 세계은행 본부를 워싱톤에서 방글라데시의 타카로 옮기면 기실 가난 문제 따위는 관심이 없는 선진국 엘리트 대부분이 퇴사할 것이라고 비꼬기도 했다.
현재 그라민 은행의 이상은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다. 수많은 제 3세계 젊은이들이 '선진 금융기법'을 배우겠다며 미국으로 몰려들지만, 그라민 은행은 세계최빈국 방글라데시의 금융기법을 미국으로 수출한다. 이들은 1996부터 2005년까지 세계 100만 가구에 소액융자를 준다는 목표를 실천하고 있다. 유누스 총재는 97년 2월 소액융자 정상회담에서 연설했다. "인간은 라이트 형제가 12초 동안 공중을 날았던 이래 불과 65년 만에 달에 발을 디딜 수 있었습니다. 이제 정상회담이 열린 오늘로부터 50년이 채 되지 않아서 우리는 우리의 달에 발을 내디딜 것입니다, 우리는 마침내 가난 없는 세상을 이룩할 것입니다">
이상이 거의 삭감이 없는 신문 기사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무하마드 유누스가 바로 이 시대의 세례요한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길이 없는 최빈층의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살길'을 열어주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시대의 세례요한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혹 신학적인 문제가 생길는지 모릅니다. "그는 크리스천이 아닌데 어떻게 세례요한이 될 수 있느냐?" 누가 만일 그렇게 질문을 한다면 저는 이렇게 되묻고 싶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왜 크리스천인데 그와 같은 삶을 살고 있지 않느냐?..." 물론 그 '당신' 속에는 저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저는 무하마드 유누스의 삶이 바로 세례요한의 삶이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큰 사람'의 삶이라고 믿어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그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세례요한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 말씀을 설교로 준비하는 저에게 하나님은 무하마드 유누스에 대한 기사를 읽게 하셨습니다. 저는 성경과 신문을 통하여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세례요한을 성경을 통해서 보고 듣고 공부만 하지말고 너희가 세례요한과 같은 큰 삶을 사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무하마드 유누스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지난주에 저는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아이들만 모아 교육을 시키는 소위 대안학교를 세워 몇 년 동안 최선을 다하고 있는 교육자 한 분을 만났습니다. 술과 담배를 말할 것도 없고 선생님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심지어는 구타까지 마다하지 않는 아이들과 3년 동안 씨름하여 마침내 성공한 교육자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이 세운 대안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 출판이 되었습니다. 그 책은 '세인고 사람들'이라는 책인데 그 책 앞부분에 나오는 프롤로그를 여러분들에게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2002년 2월 8일, 세인 고등학교의 첫 번째 졸업식은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식을 시작한지 다섯 시간이 지나도록 졸업생들은 차례대로 연단에 올라, 3년 동안 세인고에서 생활했던 감회와 앞으로의 포부를 말하고 있었다.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학부모와 교사등 모든 세인고 사람들은 때로는 폭소를 터트렸으며, 때로는 눈물바다를 만들기도 했다.
세인 고등하교의 첫 입학생이자 졸업생인 이들은, 주위 환경 때문에 공부에 열중하지 못하고 겉으로만 떠돌던 아이들이었다. 입학하기 전의 그들은 학업에 대한 자신감도 없었고, 과연 졸업이나 제대로 할 수 잇을지 자신에 대한 확신도 없었다. 그러던 아이들이 3년 동안 세인고에서 지내면서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이다. 장래에 대한 꿈과 목표를 가지게 되었으며 졸업생의 90% 이상이 대학에 진학하는 결과를 얻었다. 세인고등학교의 모든 일이 그랬던 것처럼 이 졸업식 또한 예사롭지가 않았다. 졸업생들은 힘겨운 상황에서도 사랑으로 자신들을 보살펴주신 선생님들께 감사의 뜻을 전했으며 동고동락했던 친구들과의 이별을 아쉬워했다.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자꾸 눈물이 나와서 참을 수가 없네요. 우리 세인의 이름대로 세계를 품고 남을 도와 줄 수 있는 바른 인간이 되겠습니다"
여섯 시간이 지나서야 졸업생들의 이야기는 모두 끝났다. 경황이 없어, 학교 설립 후 3년이 지나도록 만들지 못하다가 졸업식 이틀 전에야 겨우 완성시킨 교가가 세인 가족들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진리의 빛 임하여 이 땅을 비추니
이 민족이 하나 되어 열방을 섬기리
개마고원 자락에서 천산의 빙벽 아래서
아라랏의 기슭에서 이웃 위해 이 몸 바치리
새 시대 새 역사를 이루어갈 우리들
주신 달란트 갈고 닦아 손에 손잡고 하나 되어
그의 나라 그의 뜻 이루는 일꾼이 되리라
그의 나라 그의 뜻 이루는 사랑의 우리 세인고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2절까지 열창했다.
그들이 교가를 부른 동안 나는 지난 3년 동안의 많은 일들을 떠 올렸다. 중학교 때의 성적표에 '가'와 '양'이 수두룩한 까닭에 스스로 '가양'중학교 출신이라고 자조하였던 아이들. 교사를 못한 나머지 욕설까지 퍼부으며 거칠게 대들었던 아이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우리에게 자부심을 갖게 하는 보배가 되었다. 꿈조차 가질 수 없어 마음 깊이 접어 두었던 아이들은. 이제 너무나 많은 꿈을 갖게 되어 주체를 못할 정도라고 말한다. 자신의 것만 챙기기에 바빴던 아이들이 동료와 후배들을 가족처럼 사랑하게 되었으며 마음의 문을 열고 선생님과 부모님을 깊이 존경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제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해가는 힘을 갖게 되었다. 공부의 '공'자도 듣기 싫어하던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공부를 시작하더니 대부분 대학에 진학했고, 나머지 학생들도 대학을 못간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에 따라 다른 길을 선택했다. 인생의 설계에 따라 취업을 한 학생도 있었고, 소홀했던 공부를 보충하기 위하여 다시 학업의 길을 택한 학생도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중국, 미국, 호주, 필리핀등으로 유학을 떠나갔다. 세계를 품은 바른 인간을 만들겠다는 목표에 따라 학교의 이름을 세인(世人)이라고 지었는데 이젠 그들 스스로 원대한 꿈을 품고 세계로 뻗어 나갔다.
.............
오늘의 결실은 뜻을 함께 했던 많은 동지들이 있기에 가능했다. 현실감 없고 대책 없는 사람들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심지 깊게 이 자리를 지켜온 분들이다. 월급이라고는 고작 20여 만원을 받아 가면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었던 동지들. 34 년 간의 교직생활과 교장이라는 경력을 버리고 스스로 정문 수위를 맡아 학생들을 지도했던 김용문 교장선생님. 특히 아이들의 식사 하나하나에 손수 신경을 써주시다가 운명을 달리하신 오경님 사모님은 하늘 나라에서도 오늘을 가장 기뻐하실 것이다. 이 모든 분들이 계셨기에 세인고의 첫 졸업식을 가질 수 있었다.>
오늘도 우리 주위에는 세례요한과 같이 힘없고 약하고 낮은 사람들의 '갈길'을 열어주고 '살길'을 열어 주기 위하여 자신의 삶을 희생하며 사는 너무나 크고 훌륭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에서 그와 같은 사람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 교인들이 그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이 살고 일하고 있는 현장에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는 세례요한과 같이 이 세상에 주님의 길을 닦으려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과 함께 힘을 합하여 사역을 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참으로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시작하지 얼마 되지도 않는 우리 교회에 그와 같은 훌륭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많이 보내주시고 소개해 주시고 계십니다. 저들이 우리 교회와 함께 사역을 하고 싶어서 자기 발로 찾아오고 있습니다.
사실은 모두가 다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모두가 다 적지 않은 재정적 부담을 해야만 하는 일이요 신경을 써야 하는 일들입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이와 같은 일들은 부담스러워하거나 거추장스러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이곳에 높은 뜻 숭의교회를 세워주시고 또 남달리 축복해 성장케 하심은 바로 그와 같은 짐을 감당하라고 하시는 것인 줄을 믿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 사회 그리고 역사와 같은 구체적인 삶의 현장 속에서 사람들의 '갈길'과 '살길'인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삶을 살아가는 높은 뜻 숭의교인들이 되시기를 바라며, 그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후원자가 되고 동역자가 되는 큰 시대적인 사명을 감당하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되기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