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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한테 욕먹다

산호수나무 꼭대기에서 우짖는

저 쬐고만 새,

시발시발시발……

누굴 욕하는 것 같다.

짝짓기 철이라 저리 운다는데

짝찾는 소리치곤 참 고약타.

이젠 욕계를 떠난 고모부한테

평생 욕바가지로 살던

풍물시장 야채장수 고모 생각도 나지만

저 많은 욕 먹지 않고

어찌 세상이 맑아지며

만물의 귀가 파릇파릇해지겠는가.

귀 있는 자들은 들으라

시발시발시발……

저 욕 한 사발 먹고 오늘 아침은

밥 안 먹어도 배 부르느니.

하늘에 보험 들다

행구동 언덕 복숭아나무 가지들 사이로 떠오른

달이 생명보험처럼 또렷하다

복숭아밭 지나 개구리 떼 우짖는 논둑길

개구리 떼 펼쳐놓은

울음의 카펫 위를 천천히 걷는 기분도 괜찮다

저물녘이면 어스름 벗 삼아 함게 걷던

그녀는 오늘따라

바짝 몸을 붙여 살갑게 팔짱을 낀다

하늘에 보험 든 삶이 불안한 걸까

한 쌍의 개구리처럼 논둑길에 쪼그리고 앉아

어제부터 팬 이삭에 대해

여물지 못하고 늙어만 가는 생에 대해

눈주름 하나 없이 언제나 눈부신

젊은 달에 대해

질투하거나 억울해하거나 하는 기색도 없지 않지만

무한천공

깊어진 어둠의 면벽에 삿대질하는

젊은 달을 보고

끼룩끼룩 날짐승의 웃음을 터뜨린다

논둑을 박차고 일어나

컴컴해진 길을 되짚어 가는데,

흙빛 어둠에 보험 든 지렁이 한 마리가

꿈틀꿈틀

달빛 부서지는 길 위를 건너간다.

연탄을 갈며

무쇠난로의 연탄을 갈던 열아홉 청년은 어디로 가고

쉰내 나는 쉰다섯의 중년이 연탄을 갈고 있나.

도대체 어디로 갔나, 황당한 물음은 잠시 접어두고

연탄구멍을 찬찬히 헤아려 본다. 어라, 옛날엔 십구공탄이었는데, 다시 헤아려보아도

이십오공탄. 하지만 여전히 팔팔한 청춘이다.

내 나이 이십오공일 때,

그 팔팔한 청춘일 때 어디서 뭘 하고 놀았던가. 이런 구멍마다

이글이글 연정의 불꽃을 피워 올렸었던가.

때론 과열로, 과부하로 불끈거리는 욕망의 집을 다 태워먹기도 하지 않았던가.

이제 구멍은 점점 많아지고, 오백 년 묵은 느티나무 밑둥치에 패인 구멍처럼 구멍도 점점 넓어져

찬바람만 숭숭 드나드는데, 오십오공, 오 오십오공에도 다시 불을 지필 수 있을까. 없는 청춘을 불사를 수 있을까.

나는 난로에서 빼낸 재를 들고 집 앞 공터로 간다.

겨우내 버린 연탄재 해골더미처럼 수북하다. 이십오공도, 오십오공도, 그 팔팔했던 청춘의 기억도 이 재의 공동묘지에 들면 모두 空! 나는 삼가 두 손을 모은다. 合掌!

문어

발 디딜 틈도 없는 자갈치시장

할매들 쪼그리고 앉아 생선 배를 따는 어물전 속으로

이리 떠밀리고 저리 떠밀리며 걷는데,

한 어물전 앞

고무함지박에 갇힌 한 마리 미끈 빠져나와

철퍼덕, 떨어지며 길바닥을 제 몸의 그물무늬로 덮는다

여덟 개의 붓을 한 손에 움켜잡고 단숨에 휘갈기는

저 거침없는 문장, 아직은 싱싱하다 아무 데도 결박당하지 않고

자유자재로 대해(大海)를 누비던 본능의

흘림체, 하지만

그 동작이 굼뜨다 아귀힘이 좀 쇠진한 걸까

그 순간,

어물전 안에서 연탄불을 쬐던 할매 쪼르르 달려 나와

문어 모가지를 휙 낚아채는데,

그새 찰거머리 정이라도 든 걸까 길바닥에 달라붙은 흡반 떨어지는 소리 쩌억, 쩌억, 쩍…… 억센 손아귀에 달려 올라가 잠시 흐느적이는

목마른 문장, 허공에 쓰는 흘림체가 무겁구나.

거룩한 낭비

이 휘황한 물질적 낙원에서

하느님

당신은 도무지

소용 없고

소용 없고

소용 없는

분이시니

내 어찌

흔해빠진

공기를 낭비하듯

꽃향기를 낭비하듯

당신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마당

눈도 못 뜬

흰 강아지들이

마당에 나와

꼬물거리며 놀고 있었다.

강아지들의

마당엔

빛이 가득했는데,

어디 딴 데서

흘러온 빛이 아니라

흰 강아지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 같았다.

인간의

마당하곤

달랐다!

거룩한 낭비

적설 30cm, 때아닌

폭설에 갇혀 모처럼 쉬다

그렇게 맥 놓고 쉬는데,

또 난분분 난분분 뜨는

창밖의 잔눈송이들 보며

詩情에 드니 모처럼 시다

오늘따라 낭비를 즐기시는 하느님이 맘에 든다

흰 눈썹을 낭비하고,

흰 섬광의 시를 낭비하는 하느님이 맘에 든다

내리는 족족 쌓이는 족족 공손히 받아 모시는

겨울나무들처럼

나 두 팔 벌려 하느님의 격정을 받아 모신다

받아 모시니,

시다!

추평 저수지

막 피어나는 연초록 버들가지들이 저수지 물에 머리를 감으려는지 긴 머리칼 풀고 흐느끼듯 온몸을 흔들었습니다 무덤가에 앉아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보이지 않는 고요의 사원에 잔물결로 미소 짓고 계신 당신께 제 마음도 미끄러져 들어갔습니다

누가 보면 뻔뻔스럽다 할지도 모르지만 들끓는 제 마음속 분요와 괴로움 그대로 당신에게 미끄러져 들면서 헛살지 않았구나 자위했습니다 헛살았다면 어찌 버들가지처럼 머리 풀고 흐느낄 수 있었겠습니까

타작

가을은 흠씬 매를 맞고 싶었을까.

흑염소 사육장 옆 공터, 팽씨 노인이 휘두르는 도리깨는

새파란 허공을 휙, 휙, 가르며

마른 깻단을 작살낸다.

하루가 다르게 울긋불긋 단풍이, 기온이 급강하하더니,

밤새 내린 무서리가 또 작살낸 공터 옆 호박밭, 시커멓게 축축 늘어진 넝쿨들,

쇠락은 아름답지 않다. 아니, 아름답다.

저 칠순의 팽씨 노인, 도리깨가 야무지게 몸에 붙어, 아직 콩 타작 깨 타작에 도 능해 지칠 줄도 모르지만, 신의 타작의 흔적인,

성성한 백발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잔혹한

하늘 도리깨, 잘 여문 것들을 알뜰살뜰 추려 내시는가.

문득 창을 열고 내다보니,

팽씨 노인의 도리깨는 여직 멈출 줄 모른다.

공터 위에 뜬 저녁놀 매를 맞아 온통 시뻘겋다.

우포늪

물 밑 속사정은 궁금하지 않았다.

물이 밀어낸 길 위로 자운영이 푸른 싹을 내밀고

물 위로 비상하는 이른 봄의 새 떼,

새 떼의 날갯짓 소리에도 끼룩끼룩 봄이 움트고 있었다.

물 위로 물이 불쑥 꺼내든

애기 손 같은 버들가지들과 푸른 악수를 나누고

물에 비친 새 떼의 그림자,

물에 비친 나뭇가지들의 그림자,

그 녹색 그림자의 幻에 취해 사진도 몇 장 박았다.

깊어지는

빈 시간의 그림자들과 함께

사랑과 육체와 불만의 덩어리로 이루어진

인간의 그림자도 고즈넉 가라앉고,

아무리 가라앉아도 인간은 깃들 수 없는

물 아래 마을의 고요, 그 질척거리는

진흙 속으로 발을

깊이 밀어 넣지는 않았다.

마른하늘에서 우르릉거리던 천둥도

조물주의 뜀뛰는 심장도 잠시 멎은 듯한

빈 시간,

빈 영혼들 잠시 떠돌다 가는 물 위로

금빛 노을이 촘촘한 그물을 드리우고 그까짓

그물 두려워 않는 새 떼 그물을 뚫고 훨훨 날아오르고

문고리

격자무늬 문에 붙은 문고리 같은

오래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시간이 오늘따라 싱싱하다

반질반질 닳은 검은 문고리,

저 문고리를 잡고서야 하루가 열리고

알을 낳았다고 꼬꼬댁거리는 암탉이 낳은 둥지의 알을 꺼내

그 따뜻한 우주에 불임의 생을 비벼볼 수 있다

풀꽃반지를 만들어 손가락에 끼우듯

저 문고리를 손가락에 걸고서야 새날이 동트고

탯줄이 끊어진 뒤 만나온

아무개 해와 아무개 달과 아무개 별들에게 보내는 엽서를 붙이러

자전거를 타고 고샅길로 나설 수 있다

무릇 동그란 저것에 내 생업이 닿아 있고

생로병사가 안 닿아 있지 않으며

뉘엿뉘엿 저무는 황혼의 시간 동그랗고 조그만 저것이 있어

고픈 배를 움켜쥔 귀가가 휴식을 취하고

어떤 알몸의 귀향처럼 끝내 저것을 놓자마자

흙을 손에 움켜쥔 채 흙으로 화한 손도 있는 것이다

문을 여닫을 때마다 달그락달그락거리는 저것이 있어

가벼운 것은 가벼운 것으로,

무거운 것은 무거운 것으로 돌아가나니

그렇게 다들 앞서 돌아간 뒤에도

여닫이문에 붙어 여명을 깨우는 수탉처럼

오늘도, 청청한 쇳소리로 나의 하루를 깨우는

돌의 자서전

장마 지난 뒤 집 앞 개울에서 돌 하나를 주워 낑낑거리며 거실에 들여놓았습니다 서너 돌 지난 아이 몸뚱이만 한 돌, 자고 나면 그 얼굴이 변했습니다. 이름 붙이기 좋아하는 시인이지만 그 천변만화하는 표정에는 도무지 이름을 붙일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은 천진한 아기동자의 모습, 어느 날은 아흔이 넘은 어머니 모습, 또 어느 날은 성모님의 모습, 또 어느 날은 꿈에서 본 낯선 외계인…… 내가 뭐라뭐라 호명해도 그 천변만화하는 표정 뒤에는 수억 년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침묵이 서려 있을 뿐, 그 견고한 침묵의 입을 열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혹, 돌이 스스로 침묵을 깨고 자서전(自敍傳)을 들려준다 해도 누가 그것을 대필할 수 있겠습니까.

골짜기 첫물로

구룡사 일주문 밖 부도들에겐

간밤에 빌려 입은 눈옷[雪衣]이 제격이다.

그 위에 산새 한 마리 포르르 날아와 앉자

한 뼘은 키가 더 자란 듯싶다.

동자승 이마처럼 새파란 얼음장 밑에서 솟는

저 골짜기 첫물로

내 詩의 발걸음을 삼아야지.

『거룩한 낭비』

- 지은이 / 고진하

- 펴낸 곳 / 문학에디션 뿔

- 펴낸 때 / 2011년 4월

고진하

- 1953년 강원도 영월 출생.

- 감리교신학대학 졸업.

- 1987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 시집으로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1990), 『프란체스코의 새들』(1993), 『우주 배꼽』(1997), 『얼음 수도원』(2001), 『수탉』(2005), 『거룩한 낭비』(2011) , 『호랑나비 돛배』(2012), 『꽃 먹는 소』(2013), 『명랑의 둘레』(2015), 『야생의 위로』(2020) 등이 있음.

- 김달진문학상(1997), 강원작가상(2003), 영랑시문학상(2016) 수상.

-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 원주 한살림교회 목사.

고진하 여섯번째 시집 『거룩한 낭비』

강원일보 / 2011-04-23

오석기 기자

영월 출신으로 시인이자 현직 목사인 고진하(58) 시인이 신작 시집『거룩한 낭비』를 펴냈다. 지난 2005년 출간된 시집 『수탉(민음사 刊)』이후 6년 만에 선보이는 여섯번째 시집으로 '새한테 욕먹다' '우주고물상' '닥나무 농사' 등 모두 64편의 시가 수록돼 있다.

이번 시집에서 고 시인은 시인으로서의 지난날을 떠올리며 오랫동안 지녀온 자의식을 선명하게 노래하며 시를 사유하고, 시를 통해 성찰·자각하는 순간을 반성하는 마음으로 고백한다.

유성호 문학평론가는 “고진하 신작 시집 '거룩한 낭비'는 오랜 자신의 시력(詩歷) 한마디를 충실하게 매듭지으면서, 이제 새롭게 펼쳐질 '시'에 대한 사유와 감각을 예비하고 있는 선연한 결실”이라고 말했다.

원주에서 시작활동을 펼치고 있는 고시인은 세계의 문학으로 문단에 데뷔(1987년)했으며 김달진문학상과 강원작가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시집 『프란체스코의 새들』 산문집 『목사 고진하의 몸 이야기』등이 있다.

뿔(웅진문학에디션) 刊. 128쪽. 1만원.

[출처] 시집 1011. 고진하 - 『거룩한 낭비』|작성자 느티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