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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씨와 도둑>은 최용우 개인 책방의 이름입니다. 이곳은 최용우가 읽은 책의 기록을 남기는 공간입니다. 최용우 책방 구경하기 클릭! |

향기 수업
때로 내 마음은 근심의 직물을 짜는 공장이기도 하지만
그 공장 옆으로 바람이 불고 심호흡하는 꽃들을 보며
하늘하늘 너풀너풀 내 근심은 간데없이 날아가기도 하지
꽃의 문을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하는
봄, 저 나른한 봄의 학교에서
개화도 낙화도 생을 단련하는 수업이지만
나비나 벌들이 잠깐 향기 은은한 꽃술에 앉아
평정을 누리는 향기 수업의 자리를 곁눈질하다
봄날이 다 갔네
행인 같은 봄이 끌고 사라진 꽃수레의 체온이
마른 잎맥에서 가슴 언저리께 남아 잔물결을 일으키지만
숱한 이별과 친해져야 할 누덕누덕한 날들 위로
성큼 다가올 여름이 심호흡하는 소리를 듣고 있네
명랑의 둘레
홀로 산길을 걷다 자주 발걸음을 멈추는 곳
두루미천남성 군락이 있지
긴 헛줄기 끝에 긴 모가지를 쑥 뽑아올리고
외로이 먼 곳을 응시하는 듯한 두루미를 닮아 친해졌어
가시덤불과 바위들이 발걸음을 더디게 하는
울퉁불퉁한 오르막길을 헐떡이며 걷다
호젓한 꽃그늘에 앉아 숨을 고르다보면
외로움이 출렁, 온몸을 흔드는 순간도 있지만
입석(立石) 같은 외로움이
또 한 번 출렁, 한 무더기 빛살로 쏟아지기도 하네
홀로 피어난 것이 홀로 가는 것들을 감싸는
환한 둘레가 되는 일
뒤에 두고 온 두루미천남성이 던져준 빛이네
저물녘 산길을 내려오다보니
이미 오래 전 입적해버린 새의 주검 위로
나뭇가지에 열린 새들 뱃종뱃종 명랑의 둘레가 되고
초록 스크랩
탈탈거리는 이앙기 지나간 뒤로
어린 모들 반쯤 물에 잠긴 채
초록 기쁨을 찰랑이네
저 산밭 쪽에서 날아온
재두루미 한 쌍
초록 기쁨을 스크랩하려는 듯
논물 위로 성큼 뛰어내려
못밥 먹듯 개구리 한 마리씩 낚아채어
날아오르네
이앙을 다 마친 팽씨 노인
허기진 듯 구부정한 몸을 끌고 논배미를 떠나자
정처 없이 흘러 소요하는 게 전업인
뭉게구름 일가(一家)
저 오뉴월 초록 기쁨 다 내 차지라는 듯
어린 모들을 내려다보며
빙그레 웃고 있네
고로쇠나무 우물
그 오지에는 지금 갈 수 없으므로
그 오지의 빙설에 갇혀 있을 고라니 애인을 생각한다
이른봄의 궁기 털어낼 듯
아지랑이 피어올라 산허리를 친친 애무하고
혹한을 견딘 나목(裸木)의 팔뚝마다
연둣빛 꽃눈 톡톡 튀어올라
봄의 빗장 여는 소리로
곰배령 계곡은 잔뜩 들떠 있겠지만
아직 꽝꽝 얼어붙은 계류가 녹지 않아
물 한 모금 쉽게 마실 수 없을
고라니 애인의 목마름을 생각한다
길 없는 산길
더듬더듬 더듬어 올라가면
우람한 고로쇠나무 우물이 있어,
그 우물에 두레박을 내려
겨우 해갈의 기쁨을 누리고
그 우물에 상표를 붙이는 이들을 연민할
산토끼의 충혈된 눈도 생각한다
험준한 산등성이 헐떡거리며 넘던
구름 탁발승이 내려와
초췌한 얼굴 비쳐보고
기러기 순례도 깊이 빨대를 꽂고
그믐달 술래도 몰래 발을 적시고 갈
고로쇠나무 우물의
샛노란 빈혈에 대해 생각한다
늦게 해가 떠오르고 일찍 해가 떨어지는
곰배령 계곡
그 오지에는 지금 갈 수 없으므로
그 오지에서 사랑의 빈혈을 앓고 있을
멀대처럼 키만 큰 고로쇠나무 우물을 생각한다
입춘 무렵
겨우내 웅크리고 있던 텃밭의 파들이 힘차게 기지개를 켜고 있네
내일이 입춘,
겨우내 흰 광목을 한 필씩 제 몸에 두르고 있던
파, 파, 파들이 파랗게 날 선 창끝으로 광목을 쭉쭉 찢으며 소리치네
봄이야!
고해
꽃사슴 농장 앞을 지나다가 움찔, 놀라 멈춰 섰습니다.
얼추 스무 마리쯤 될 사슴들이 더러운 진구렁 속에 우뚝 멈춰 서서 마흔 개쯤은 될 동그란 눈빛으로 일제히 날 응시했습니다.
이 벌건 대낮에 초롱초롱 피어난
저 눈빛들이 판관(判官)이시라면
사랑을 시비하는 판관이시라면
없는 죄도
탈탈 털어 고해(告解)하고 싶은
봄날.
움직이는 사원
매일 걷는 농로에서
길을 더듬어 가시는
민달팽이를 보았네.
우주와 교신할 안테나를 쑥 뽑아올리고
조심조심 길을 더듬으며
어디로 가시는지.
그렇게 가시다 해님도 한번 슬쩍 쳐다보고
대낮에 불 밝힌
달맞이꽃 성좌도 힐끗 쳐다보고
제 곁에 쪼그려 앉아 저를 들여다보는
인간도 무심코 쳐다보며
어디로 가시는지.
지상에 무슨 신성한 사원이 있다면
저 느리디느린 보행 사이,
두 더듬이 사이에나 있을 것이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저 고요 속에……
잡초비빔밥
흔한 것이 귀하다.
그대들이 잡초라고 깔보는 풀들을 뜯어
오늘도 풋풋한 자연의 성찬을 즐겼느니.
흔치 않은 걸 귀하게 여기는 그대들은
미각을 만족시키기 위해
숱한 맛집을 순례하든 찾아다니지만,
나는 논밭두렁이나 길가에 핀
흔하디흔한 풀들을 뜯어
거룩한 한 끼 식사를 해결했느니.
신이 값없는 선물로 준
풀들을 뜯어 밥에 비벼 꼭꼭 씹어 먹었느니.
흔치 않은 걸 귀하게 여기는 그대들이
개망초 민들레 질경이 돌미나리 쇠비름
토끼풀 돌콩 왕고들빼기 우슬초 비름나물 등
그 흔한 맛의 깊이를 어찌 알겠는가.
너무 흔해서 사람들 발에 마구 짓밟힌
초록의 혼들, 하지만 짓밟혀도 다시 일어나
바람결에 하늘하늘 흔들리나니,
그렇게 흔들리는 풋풋한 것들을 내 몸에 모시며
나 또한 싱싱한 초록으로 지구 위에 나부끼나니.
모란
꽝꽝한 한겨울 돌담 아래
모란(牧丹),
꽉 다문 묵언의 입술처럼
깊은 침묵에 잠겨 있네.
저 단단한 목질을 뚫고 나올
연둣빛 말씀의
봄은 아직 먼데
얼마 전 저승 떠난
노모의 사망신고서
아직 잉크도 덜 말랐을 텐데
달관일까, 아님 체념일까
모란 둘레에
지그시 눈길 던지며 아내가 중얼대네
나 죽으면
저 밑에 묻어줘요
들을 귀 있어 들었다면
올봄
연둣빛 받침 위로
벌어질 모란꽃 더욱 붉겠네
봄의 첫 문장
온종일 집에 혼자 있었네
자주 열어보던 인터넷 창도 열지 않고
잉크가 번지는 종이정원에도 얼씬거리지 않았네
잔설 위에 쌓이는 눈송이 같은
첫 문장을 받아쓰고 싶은 생각도 없었네
아궁이의 불을 지피고
개똥 무더기 치우고 나서
혹한에 얼어 죽을까 염려되어
겨우내 감싸둔
어린 감나무의 짚 붕대를 풀어주었네
짚 붕대를 풀자
입을 꽉 다문 연둣빛 잎눈이
온종일 침묵을 지킨 내 잎을 열었네
오, 살아 있었구나!
무심코 잎눈과 나눈 봄의 첫 문장이었네
무청
된장국을 끓이겠다고
겨우내 바람벽에 매달려 흔들리던
마른 시래기를 떼어다 달라고 아내가 말했다.
시래가 된 무청은 영양가가 풍부하다고.
그렇다면
평생 숱한 시련의 바람을 맞으며
시래기보다 더 시달린 나는
이 나이 먹도록
왜 영양가가 있는 사람이 되지 못했을까
왜 지혜가 풍부해지고
슬기가 자라지 못했을까
왜 저 인간은
저승사자도 안 데려가는 거야,
그런 소리나 자꾸 들어야 할까
시래기 된장국 끓는 냄새가
집 밖까지 솔솔 새어나오는 아침
여직 장독대에 쌓인 눈과
이마에 얹히는 햇귀와
함께 식탁에 앉을 생각에 행복해하면서도
어떻게 무청처럼 영양가 높은
청정한 사람이 될까
하는 생각으로 골똘해진다
뒷간
뒷간에 가는 일은 소중하다
간밤에 쌓인 술독을 빼기 위해 가기도 하지만
슬픔의 독을 덜어내기 위해 가기도 한다
슬픔의 독이든 술독이든
변기의 물과 함께
그냥 주르르 흘려보내는 것이 다반사이지만
못대가리처럼 벽에 붙은
귀뚜라미가 그것들을 가져가 귀뚤귀뚤 울어대기도 한다
그러나 뒷간에 갈 때마다
뭘 빼거나 덜어내기 위해서만 가는 건 아니다
하늘로 향한 창밖 총총한 별들 바라보며
별들의 희열을 탁본하기도 하고
별들이 읊어주는 시를 베껴오기도 한다
뒷간에 가는 일이 소중한 건
적어도 거기서는 뭘 움켜쥐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빼고 덜어낸 뒤 시원스레 흐르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는 것이다
귀뚜라미야
변소에 들어가면
귀뚜라미들 울지도 않고
못대가리처럼 벽에 조용히 붙어 있네
볼일을 끝내고
다시 방에 들어와 있으면
금세 귀뚜라미 울음소리 들리지
귀뚜라미야!
귀뚜라미야!
아무도 없는 데서
나도 울고 싶을 때가 있단다
벽에 이마를 짓찧으며
혼자 울고 싶을 때가 있단다
풍부한 시심(詩心)
저녁 무렵 시를 탈고하고 나서
누군가에게 낭랑한 목소리로 읽어주고 싶은
이 뚱딴지 같은 마음은 무엇인가
늦은 밤, 어둑한 마당으로 나가니
은밀한 사생활까지 속속들이 아는
달님이 벌써 큰 귀를 너펄너펄거리고 있었다
나무 상자 속에서 웅크리고 자던
어린 삽사리도 나와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선뜻 시를 낭송하지 못하고 머뭇머뭇거렸다
고독의 습(習)에 젖은 창백한 문장이
환한 달님 귀에 맞을까
광기 어린 내 창조의 열정이 천둥소리처럼 울리면
어린 삽사리가 화들짝 놀라지 않을까
조금은 쓸쓸하고 적요한 밤
무대도 조명도 완벽하고
몇 안 되는 청중도 쫑긋 귀를 세우고 있었지만
저 무심한 청중들과 나 사이의
깊은 강을 건너지 못하고 말았다
끝내 풍부한 시심을 낭비하지 못하고 말았다
새벽닭이 울 때까지,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봄 처녀
미수(米壽)가 다 된 어머니가
오늘은 봄 처녀가 되셨다
뒷짐 지고 개울가로 산보 나가셨다가
서너 줌 뜯어온 초록빛 돌나물이
까만 비닐봉지 속에서 수줍은 미소를 짓는다
쇠귀에 경 읽기란 말은
가는귀먹은 어머니에겐 해당되지 않는다
눈까지 침침하다 하시면서
못 보고 못 듣는 게 없으시다
돌나물 뜯다가 마른 풀섶에 놓인
종달새 알 몇 개를 보고
행여 누가 슬쩍해갈까봐
마른풀로 꼭꼭 숨겨주고 오셨단다
잘하셨다고 칭찬해드리니
어린애처럼 배시시 웃으신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가 누워
금세 드르릉드르릉 코를 골며 주무신다
수목장
이팝나무 여인숙은 북망 가는 길에 있네
새장만한 방이 이팝나무 둘레에
뺑 둘러 열두 칸,
빛 한 오라기 들지 않는 지하에 있다네
이팝나무 여인숙에 짐을 풀려면
삼십 년 선불 숙박료를 지불해야 하고
짐을 푼 뒤에는
동면에 든 곰처럼 쿨쿨 잠을 자야 한다네
물론 아무도 보지 않는 캄캄한 밤이면
슬그머니 방에서 빠져나와
천지사방 몽유(夢遊) 할 수는 있네
꽃을 향해 붕붕거리며 날아드는 벌나비 외에는
아무도 제 발로 걸어와 숙박을 청하지 않는
이팝나무 여인숙,
평생 가난과 고독의 악보에서
숨죽인 비명의 가락을 꺼내 불던 누이는
후드득 쏟아지는
흰 밥알 같은 꽃잎에 한 줌 재를 섞어 비빈
주먹밥으로 입주했다네
이제, 앞서거니 뒤서거니
적멸에 든 동숙자들과 함께
이따금 불면으로 뒤척이기도 할 누이는
달 뜨는 밤을 기다리겠네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 혼불처럼 타오를
이팝나무 꽃 모닥불
그 주위로 뺑 둘러서서
없는 손에 없는 손잡고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겠네 강강술래 강강수월래……
문학동네 시인선 076
『명랑의 둘레』
- 지은이 / 고진하
- 펴낸 곳 / 문학동네
- 펴낸 때 / 2015년 11월
고진하
- 1953년 강원도 영월 출생.
- 감리교신학대학 졸업.
- 1987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 시집으로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1990), 『프란체스코의 새들』(1993), 『우주 배꼽』(1997), 『얼음 수도원』(2001), 『수탉』(2005), 『거룩한 낭비』(2011) , 『호랑나비 돛배』(2012), 『꽃 먹는 소』(2013), 『명랑의 둘레』(2015), 『야생의 위로』(2020) 등이 있음.
- 김달진문학상(1997), 강원작가상(2003), 영랑시문학상(2016) 수상.
-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 원주 한살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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