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88937405129.jpg

 

빈 들 

 

늦가을 바람에 

마른 수숫대만 서걱이는 빈 들입니다 

희망이 없는 빈 들입니다 

사람이 없는 빈 들입니다 

내일이 없는 빈 들입니다 

아니, 그런데 

당신은 누구입니까 

아무도 들려 하지 않는 빈 들 

빈 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당신은

 

---

달맞이꽃 

 

빈집과 빈집 사이의 괴괴한 허공 가르며 

둥근 보름달이 

솟아오르는 가을 초저녁 

죽을 둥 살 둥 애오라지 일밖에 모르는 

대골 똥고집 노인 힘에 겨운 꼴짐 지고 

봉충다리 절며 걸어가는

외딴 산모롱이 풀숲길엔 

달빛 이슬에 젖어 함초롬히 피어난 

노란 달맞이꽃들이, 비칠비칠, 꾸부정한 그림자를 쫓아 

동행하고 있었다

 

---

폐가 

 

휘영청 밝은 달빛 쏟아지는 

솔고개 마루턱 

폐가 한 채 

반쯤 내려앉은 썩은새 지붕 위엔 

올망졸망 

쫓겨난 흥부네 새끼들 같은 

탐스런 조롱박들이 뒹굴고 있었다

 

---

연자매 

 

한가로이 흐르는 

한 무리의 양떼구름을 태워 버릴 듯 

핑핑 돌아가는 태양의 붉은 점 하나 정오를 가리키고 

 

뜨거운 지열을 내뿜는 

보리울 남궁씨네 도라지 밭 

늙은 아낙 혼자 꼼짝 않고 앉아 

호미질을 하고 있다 

 

언뜻 보면 좌선을 하고 있는 형상이다 

먹이를 노리는 잔뜩 독 오른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형상 같기도 하다 

 

그러나 쉴 새 없이 찍어 올리는 호미 날에 반사되어

날름거리는 태양의 붉은 혓바닥 

튀어 오르는 시간의 흙 조각들을 

뚝뚝 흘러내리는 굵은 땀방울로 다독이며 

 

하얗게 피어난 

도라지 꽃과 꽃들 사이를 헤쳐 나가는

늙은 아낙의 그늘 한 점 없는 등 뒤엔 

 

무성하게 우거진 잡초 덤불 속 

모로 쓰러져 누워 있는 

이끼 낀 연자매 한 짝.

 

---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 깨진 항아리 조각 같은 

달이 

터진 상처에서 비쳐 나오는 

붉게 엉킨 피를 물고 지상에 이별을 고하고 있다 짧은 이별 

뒤엔 곧 칠통 속 어둠이 

뚜껑을 열어 

검은 새들을 풀풀 날리고, 한밤 내 

검은 새들이 텅 빈 골짜기를 배회하며 

목젖 없는 아이가 질러 대는 시끄러운 소리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지저검을 토해 낸다 왜 새들은 

이 밤 칠통 속 둥지로 돌아와 

주둥이를 박고 잠들지 못하는 것일까 

삐끔히 열린 밤의 들창에서 새어 나오는 

역시 알아들을 수 없는 누군가의 고통스런 지저귐, 혹 은 누군가 

거칠게 코 고는 소리 어쩌면 지금 

악몽으로 뒤척이는 그들은 

긴 코를 땅에 박은 비행류*가 되어 

꿈마저 저당 잡힌 꿈길 위에 무서운 절망의 외발자국을 

찍고 있는지도 모른다 골짜기 도처

 

악취 풍기는 폐수와 썩지 않는 쓰레기 더미 위로 

무성하게 피어난 인공 독버섯 뒤덮인 땅에 

식식거리는 두 마리 황소를 앞세워 

분노의 쟁기질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아니다 그들은 지금 

품 안으로 날아드는 검은 새들과 함께 

쑥 넝쿨만 우거진 조상들의 무덤 속 죽음의 자력(磁力) 에 이끌려 

숯처럼 깨끗한 죽음을 연습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 사실 나는 모른다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鼻行類, 네 다리가 퇴화하여 코로 보행을 하며 살아가는 회귀동물류.

 

---

늙은 농부들 

 

호미 날에 등가죽을 찍혀 뙤약볕 아래 

파헤쳐진 두더지처럼 

구슬땀과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빨리 

해 떨어지기만 기다린다 그러나 해종일 

폭염에 흐물흐물 녹아내리던 살점 

텅 빈 뼛속까지 파고드는 이 허망을 

문둥이처럼 견디며 사느니 

차라리 밭고랑에 길게 누운 그림자와 

아예 붙어 버릴까, 망령처럼 되뇌이면서도 

머리맡에 딱 붙어 앉아 임종을 

지켜봐 줄 이 없는 밤은 아직 두렵기만 하다 

두렵기만 하다 

불임의 곡신(谷神)들 숨죽여 우는 

휘휘한 빈집으로 

모래 버석이는 신발을 끌며 돌아가는 것은 

저당 잡힌 꿈속 희멀건 자식들의 

초롱초롱한 눈동자와 마주치는 것은

 

---

낮 

 

청청한 새소리 품어 시원함을 더해 주는 

여름 밤나무 숲 속 

동네 아낙네들의 빨래 방망이질 소리와 

낭랑한 웃음소리가 

반짝이며 흐르는 듯한 개울가에서 

웬 낯선 새우젓 장수 사내와 

닭 한 마리를 뜯어 놓고 소주잔을 

주거니 받거니 

대낮부터 거나하게 취한 

뜨내기 최가는 

만만한 동네 아낙네들 붙잡고 시비 걸어도 

아무도 대거리 해 주지 않자 

자기 집 헛간에 매 놓고 기르는 

누렁이 두 마리를 

망나니 칼춤 추듯 몽둥이를 휘두르며 

죽어라 

죽어라고 두들겨 패고 있었다

 

---

낫달 

 

무성한 풀잎을 베고 시퍼렇게 풀물 든 손등을 찍은 

낫 한 자루, 

뾰족한 유리봉 산마루에 기우뚱하니 걸려 있다 

 

하현달. 

찍힌 손등의 피 머금어 더욱 불그레해진 달, 

무작정 떠날 수도 머물 수도 없는 

저주 받은 땅 한 뙈기 부둥켜안고 울다 지친 충혈된 눈빛! 

 

차마 퀭한 그 눈빛 못 보겠는 듯 

귀면(鬼面)의 시커먼 구름 한 덩이 갑자기 밀려와 낫 한 자루를 삼킨다 

그러나, 

 

물 한 방울 홀리지 않고 피 한 방울 떨구지 않고 

 

유리봉 늙은 소나무에 기이하게 목매 죽은 

원 두루미의 형상조차 까맣게 까맣게 지워 버린 

칠흑의 하늘

 

 

---

티끌의 노래 

 

내 창가엔 

새로 피어난 잔별들 싣고 가는 살여울 물소리 

급하고 빠르게 들려오지만 

 

흐르는 물을 싣고도 

돌돌돌 구르지 못하는 낡은 물레방아인 양 

꿈이 정지된 사람들, 

 

만신창이가 된 생을 

장작단처럼 다발지어 굽은 등에 지고 

귀가하는 허기진 발자국 소리도 들린다 

 

부서지면 한줌의 모래이며 

티끌일 뿐인 것을...... 

 

아마도 불을 삼킨 취한의 혀에서 풀어짐 직한 

귀에 익은 노랫가락이 

살여울 물소리에 섞이며 아련히 멀어지고 

 

마침내 어둠의 물결에

모래 탑처럼 허물어져 가는 형상들이 

창가에 기대선 내 시간의 저울대 위에 쌓인다 :

 

---

쥐코밥상 

 

홀로 되어 

자식 같은 천둥지기 논 몇 다랭이 

부쳐 먹고 사는 홍천댁 

 

저녁 이슥토록 

비바람에 날린 못자리의 비닐 

씌워 주고 돌아와 

 

식은 밥 한 덩이 

산나물 무침 한 접시 

쥐코밥상에 올려놓고 

 

먼저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흙물 든 두 손 비비며,

 

---

민음의 시30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

- 지은이 / 고진하

- 펴낸 곳 / 민음사

- 펴낸 때 /  1990.4.30 초판

                2007.4.20 개정판

upfile1_1356338587_Picture 7247.jpg

 

---

고진하

- 1953년 강원도 영월 출생.

- 감리교신학대학 졸업.

- 1987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 시집으로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1990), 『프란체스코의 새들』(1993), 『우주 배꼽』(1997), 『얼음 수도원』(2001), 『수탉』(2005), 『거룩한 낭비』(2011) , 『호랑나비 돛배』(2012), 『꽃 먹는 소』(2013), 『명랑의 둘레』(2015), 『야생의 위로』(2020) 등이 있음.

- 김달진문학상(1997), 강원작가상(2003), 영랑시문학상(2016) 수상.

-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 원주 한살림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