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88933810699.jpg

장 마 

 

폐허의 담벽 아래, 

성스런 신의 병사들이 

지구의 왼쪽 관자놀이를 찢는 총성이 울리고 

그 피와 살을 받아 핥는 

시퍼런 잡초와 갈가마귀의 혀가 비릿하다. 

 

골고다, 

(우주배꼽?), 

거기, 

여전히 신생아들의 울음소리도 

들린다지? 

 

안 보았어도 좋을, 홍건히 피에 뜬 조간을 보며 

질긴 탯줄을 씹듯 간신히 조반을 삼켰다. 

장마가 쉬 그칠 것 같지 않다.

 

 

---

진흙 붕대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들과 겹쳐지며 

숲길을 걷다 보면, 

바람이 애기솔 도래솔들의 파르스름한 머리를 

빗질하고 있는 곁을 기분좋게 

지난다 

 

푸른 솔과 내 숨결이, 때로 솔 아래 

묻힌 이와 내가 

바람의 정다운 끈으로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느낄 때 

 

나는 그이들이 내뿜는 

숨결보다 훨씬 더 

큰 숨결에 닿아 있는 것이 아닐까 

 

더러, 상처 입은 솔의 벗겨진 밑둥을 

벌건 진흙 붕대로 싸매고 있는 손과 악수를 나누고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 볼 때

 

 

---

지게게 

 

잿빛 뻘밭을 잰걸음으로 달리는 귀여운 

지게게를 본 적 있니? 

 

조개 껍데기든 나무 조각이든 제 몸을 

감출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등에 지고 잰걸음으로 

달리는! 

 

오늘은 소래 부근 뻘밭을 발갛게 

물들이는 수십만 평 노을을 

등에 지고

 (가벼움의 극치를 보여주듯) 

 재게재게 달리다 

 물방울 뽀글뽀글 솟는 

 뻘구멍 속으로 쏙!

 

 (暗電!)

  ......본 적 있니? 

  

  

---

미완의 불상 

 

읍내 나가는 길가에 뿌연 돌가루 날리는 석재공장이 있었다 

 

어느날, 석재공장 뒤꼍을 돌아가는데 

 

버려진 폐석더미 속에 

한쪽 귀 한쪽 팔 떨어진 

앉은뱅이 부처가 

저녁놀에 붉게 물들어 

깊은 명상에 잠겨 있었다 

 

아, 너무 반가웠다 

그 돌덩이는 불구(不具)인 날 쏙 빼닮아 있었던 것이 었다 

 

 

---

부활절 무렵 

-청동나비 

 

바람이 불면, 우리집 처마끝에 풍경(風磬) 삼아 매달 아놓은 청동나비가 하늘로 날아오를 듯 날개를 펄럭거리 지만, 진짜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가는 일은 없겠지요. 

부활절, 그래요, 알록달록한 알 껍질을 깨뜨리는 부활절 무렵이 돌아오면, 이런 엉뚱한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만, 

때때로 청동빛 물(物)의 바다에 빠져 질척거리는 생에, 이런 상상의 날개를 달아줘 보는 일도 쓸모 있다고 생각 지 않으시는지요?

 

 

---

겨울 연못

 

겨울 연못은, 기억의 수면 위로, 연꽃들을 띄워올린다. 

 

갑자기 눈에 낀 비늘을 털어낸 이의 눈앞에 피어난 

연분홍빛 고요의 개화(開花), 싸움의 매연을 옷깃에 묻혀온 마음에도 

꽃잎은 제 속을 열어 고요를 물들여줄까. 

 

살얼음 막 풀린 겨울 연못은, 돌이끼 덮인 부도처럼 

그 깊은 속을 헤아릴 수 없다. 어둡다. 누군가 돌을 던져 

번져가는 파문의 겹동그라미들 속엔 

幻의 욕망을 좆는 

눈먼 전사(戰士)들의 

죽음의 그림자조차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텅 빈 서천(西天)의 노을빛 속으로 흘러가는 구름의 소유권을 

잠시 주장하다 그냥 놓아버린 겨울 

연못 위로 흐르는, 흐린 기억의 연꽃구름.

 

 

---

쥐, 쥐캥거루 

 

쥐는 나의 유일한 벗. 

베니어판을 붙인 벽 속에서 너무 굶주려 

베니어판을 갉고 있는지 

쉴새없이 바스락바스락거리는 쥐는, 별 말씀도 

안 들려주시는 하느님을 

가까이하고 지내는 요즘 나의 유일한 벗. 

처음엔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무척 귀에 거슬려 

요놈의 쥐새끼! 쥐새끼! 

쌍욕도 했지만 

막무가내 내 곁에 있으려 하는 쥐, 너를 

너를 벗삼기로 했지. 까짓, 시끄러워봐야 

얼마나 시끄럽고 갉아먹어봐야 얼마나 갉아먹겠어.

가난한 사제관의 쥐라더니, 너야말로 

먹을 것 넉넉지 않은 사제관의 벽 속이며 

천장 속에 깃들여 

딱딱한 목질(木質) 의 어둠을 쏠며 그 알량한 수도자 

흉내를 내는 것이냐. 벗끼리는 

서로 닮는다더니, 너는 어느새 나를 닮아 있다. 

아니, 나도 너를 닮고 있다. 물기라곤 전혀 없는 

베니어판을 수삼일째 갉아먹고 있는, 

저 호주 사막 밤이슬에 젖은 풀씨 속의 

극소량의 수분만을 섭취하고 산다는 

쥐캥거루처럼 

메마름의 시간을 잘도 견더내는 너, 

너를 닮으려 한다. 송곳니만큼 새어나오는 

극소량의 소음, 가늘디가는 

네 창자 길이만한 식욕, 

천장 위를 달릴 때 네 쬐그만 뒷발로 딛는 만큼의 

경쾌한 속도감을 사랑한다. 물론 나는 

이 긴 겨울 가뭄이 끝나, 네가 내 곁을 떠난 뒤 

벽 속에 천장 속에 

다산(多?)의 네가 새끼 치듯 깔아놓은 고요와 

고독도 물리치진 않으련다. 딱딱한 목질의 

어둠과 함께 

너의 부재(不在)가 남겨둔 이 진귀한 선물을 

 

---

장님굴새우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삼척 환선굴(幻仙窟)에는 

장님굴새우가 산단다. 

 

툭, 불거진 까만 두 눈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길쭉한 뿔더듬이로 칠흑의 석회암동굴 속을 

더듬더듬 더듬는...... 

 

생각해보면, 

질퍽거리는 물욕(物慾) 의 어둠에 빠져 허우적이며 

신의 빛을 더듬어 찾는다는 당신도 

장님굴새우보다 나을 게 없지!

 

 

---

木神 

 

늦가을 

예배당 빈 터에 나무를 심는 늙은 양씨는 

누런 앞니만 두어 개 남아 있고 

건들거리는 실업자다 

 

어제 심어놓은 감나무에 양씨는 

오늘 볏짚을 두르고 있다 

 

늦가을 햇살이 

재게재게 손을 놀리고 있는 그의 손과 볏짚에 인화되어 

금빛으로 활활 타오른다 

 

나무를 하느님처럼 사랑하니, 

양씨가 죽으면 

품 큰 목신(木神)이 기꺼이 품어줄 게다 

 

 

---

나 무 

 

꼬리 긴 겨울볕에 기댄 나무는 

햇살이 만드는 그림자를 늘리며 

가볍게 흔들린다 

 

새보다 가벼운 몸짓이다 

 

어느새 벌거벗은 나뭇가지 사이로 

붉은 황혼이 파고들어도 

내일을 모르는 

나무는, 고즈넉이 스미는 

어둠의 둥우리에 

제 몸을 다아 맡긴다 

 

내일에 보채지 않고 

오늘을 

오늘로서 살고자 하는 자, 

저 자족(自足)의 나무의 

가벼운 혼들림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

 

어느새

어둠과 하나 되어 어둠 속으로 사라진`

 

---

우주배꼽

세계사시인선69

지은이/ 고진하

펴낸곳/ 세계사

펴낸때/1997.3.15

ce8e795c-1fef-4efe-a258-70d4fd480d9e.jpg

고진하

- 1953년 강원도 영월 출생.

- 감리교신학대학 졸업.

- 1987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 시집으로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1990), 『프란체스코의 새들』(1993), 『우주 배꼽』(1997), 『얼음 수도원』(2001), 『수탉』(2005), 『거룩한 낭비』(2011) , 『호랑나비 돛배』(2012), 『꽃 먹는 소』(2013), 『명랑의 둘레』(2015), 『야생의 위로』(2020) 등이 있음.

- 김달진문학상(1997), 강원작가상(2003), 영랑시문학상(2016) 수상.

-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 원주 한살림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