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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요10:37-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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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김경형목사 |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0장 37절-42절: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찌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 저희가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다시 요단강 저 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주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37절-38절: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찌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 예수님께서 오죽하면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이라는 말씀을 하셨을까?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찌라도 그 일은 믿으라.’ ‘죄를 사함 받는 거, 귀신이 쫓겨 나가는 거, 소경이 보게 하는 거,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거, 문둥병자가 고쳐지는 거, 간질병이 낫는 것 등을 보고 나를 믿어라’ 이 말이다.
성경은 성령님의 감화 감동으로 쓰여졌으니 우리가 말씀을 깨달을 때도 성령님의 감화 감동이라야 깨달을 수 있는 거다. 믿는 우리는 육신은 소유격이요 내 속에 있는 영인이 주격인데, 우리가 앞에서 말한 예수님께서 각종 병자를 고치신 것을 보면서 우리의 영인성장 면에서 사람을 온전케 고치시는 분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영이 중생이 되어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의 이치로 성장을 해야 하니 주님의 말씀을 영적인 면으로 알아 들으라는 거다. 그런데 성령님의 말씀을 못 알아듣는 귀는 육신 쪽으로 알아듣고 자꾸 육신 쪽으로 나간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영에 속한 일이기 때문에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귀신이 쫓겨 나가고, 사람의 죄를 사하는 것을 병원에서는 못한다. 병원에서 의사가 의술을 써서 간질병을 고치고 문둥병자를 고친다고 해도 영적인 면으로 간질병이 들고 문둥병이 든 것을 모르고, 고치지도 못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각종 병을 고쳐주신 것은 그 시대에는 이런 병을 고치는 병원이 없기 때문에 고쳐주려고 오신 게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신 분이라야 하늘의 능력으로 사람을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케 고칠 수 있기 때문에 이 일을 하려고 오신 거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 믿는 자기는 어떤 기준으로 성경을 보느냐?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찌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거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하는 예수님을 왜 ‘아들’이라고 하는 거냐?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 역시 하나님의 아들이니 예수님께서 하신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거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다는 면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요, 하나님의 아들들은 교회를 관할하고 가르치고 성도들의 영을 책임지고 있는 신분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는 일은 영원 전서부터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설계 된 일이고, 설계가 된 대로 오셨고, 설계 된 대로 예수님께서 성도들을 온전케 하는 일을 하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어떤 병자를 고치던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설계대로 고치는 거다. 오늘날 교회에서 가르치는 말씀도 다 이 설계대로 나와야 한다. 그리고 우리 교인들은 어느 교회에 가던 그 교회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는 예수님의 일을 하는지를 봐라.
사람이 태어나면 자기의 생계목적을 위해 산다. 자식도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하기 위해 가르치고 키운다. 그런데 자식이 부모의 마음대로 되더냐? 학교공부가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가르치느냐? 믿지 않는 사람은 당연히 모르는 거고, 믿는 사람이라고 해도 이걸 알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창세 이후로 오늘날까지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대로 100% 죽지 않을 자로, 죽은 것이 없는 자로 살아간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목사가 이걸 안다면 이방종교와 손을 잡거나 선악과 따먹은 지식으로 설교를 하겠느냐? 세계적으로 개신교보다는 천주교를 더 알아주는데, 그러면 교황의 설교가 땅에 속한 거냐, 천국에 속한 거냐? 땅에 속한 거다. 세상에는 생명의 말씀을 먹은 생명적인 지식과, 선악과를 먹은 사망적인 두 지식이 흐르고 있는데,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박사들이라고 해도 이것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사람을 죄에서 해방시키는 교훈은 전혀 주지 못한다.
이스라엘은 충청도만한 크기의 땅이고, 그 주위에 강국들이 많이 있지만 어느 나라에도 꿀리지 않는다. 이 이스라엘 안의 작은 도시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예수님을 전 세계인들이 찬양을 한다. 안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표면적인 것을 보고 찬양을 하는 거지만 예수님을 믿는 오늘날 교회들은 주님의 말씀을 신앙 사상적으로 깨달아야 하겠는데 안 믿는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표면으로만 알아서 영적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어쨌든 사람을 많이 끌어모으고 돈을 많이 끌어모아서 건물을 크게 짓고 종교적인 업적을 많이 남기는 것을 신앙으로 알고 있다.
이런 사고방식의 지식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 왔다면 어떻게 떡집(주-베들레헴의 뜻이 떡집, 즉 ‘말씀이 나오는 곳’이라는 뜻임)의 인물이 되겠느냐? 어떻게 마리아처럼 생명(아기예수)을 안고 피난을 가겠느냐? 아기예수를 안은 마리아가 애굽으로 가면 그곳에 조상이 있느냐? 이웃이 있느냐? 일가친척이 있느냐? 아무도 없다. 그렇지만 마리아가 구원(예수=구원)을 안고 있으면 생명을 안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기예수를 보호하려니 요셉과 마리아를 보호하게 된다.
요셉과 마리아가 애굽의 생활이 힘이 든다고 해서 생명을 버린다면 요셉과 마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한다. 이 시대에 믿는 사람 중에 누가 이런 정신을 가지고 있느냐? 이 정신으로 사는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거다. 자기에게 있는 생명을 내버리고 세상에 대한 이해타산을 가지고 살아봐야 별 볼 일 없다. 고작 해봐야 하루 세 끼 밥을 먹다가 죽는 것뿐이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살다가 그 징계로 당시의 강대국인 로마에게 잡아먹혀서 압제 아래 살고 있으면서도 족보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율법을 문자적으로 철저히 지키고 있으니 옳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위안제를 마시고 있었다. 지금은 어떠냐? 아브라함의 신앙의 후손으로서 전통이요 정통으로 믿고 있고, 자기가 다니는 교회가 세워진 지가 백 년이 넘었다고 하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아브라함의 신앙사상을 가진 자가 몇이나 될까?
아브라함의 신앙은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신 말씀을 붙잡고, 즉 자기의 소원 목적과 계획대로가 아니라 물질선 인정선 생명선을 하나님께 맡기고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말씀의 인도대로 간다. 그리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모리아 산에서 자신을 흠과 티가 없이 드릴 수 있는 신앙으로 길렀다. 이 가정에서 메시아이신 주님이 태어났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신앙이라야 메시아가 임하는 거다.
아브라함의 가정이 부자 되기를 바라고 세상에서 유명하게 되기 바라는 가정이었더냐? 오직 말씀만 따라가는 신앙이었지만 한 번 인본주의(하갈로 통해 이스마엘을 낳은 거)를 썼다가 이로 인해 죽을 때까지 골머리를 앓았고, 그 후유증이 아라비아로 퍼져서 지금도 고통을 겪고 있다. 다윗도 한 번 죄를 지은 것으로 인해 죽을 때까지 고통이다. 그런데 우리는 한 번이 아니라 날마다 죄를 지으면서도 밥술이나 떠먹고 있다고 해서 ‘이게 천국이 아닌가?’ 하고 있다면 보통 큰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자부하던 바리새 교인들의 운동을 돕더냐? 이들의 신앙은 외식이었다. 속 중심은 변화가 없이 겉으로만 성경대로 하는 게 외식신앙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화를 선언하셨는데 오늘날 나는 이 화를 받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느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오각의 오감성을 왜 준 것 같으냐? 그리고 마음속에서 왜 희로애락이 일어나는 거냐? 말씀으로 변화를 받으라는 거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대신 자기에게 해가 되게 믿는 사람이 많다. 진리이치의 말씀을 받고 이 말씀이 옳은 것을 알면서도 세상의 향락을 좇아 산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래, 네 뜻대로 만들어 주마’ 라고 하신다. 이건 버림받은 거다. 일반적으로도 자기가 자기를 해 되게 하려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해가 되지 않게 사는 것만 아니라 질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으로 성장을 해야 자기를 영적으로 해롭게 하지 않는 거다. 이게 교회요 성경의 가르침이다. 하나님의 신이 아니면 이 역사가 안 된다.
39절: ‘저희가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이들은 성경이 있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왜 인간을 창조하셨는지, 왜 메시아를 약속하셨는지, 왜 부활을 시키시는지, 왜 신령천국이 있는지를 몰랐다. 모르면 알려고 해야 하는데 알려고 하지 않고 교권과 세권이 합세가 된 세상 속화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 교회는 어떠냐? 말로는 예수를 부르지만 그 정신이 세상성으로 합세가 되어있다. 교회가 세상의 정신과 합세가 되면 세상사람들처럼 자신들의 힘을 과시할 조직을 만들게 되고, 그 다음에는 자신들의 조직에 위협이 되는 진리의 교회를 핍박하게 된다. 이것은 노아홍수 때의 사람들처럼 물 아래, 심판 아래 든 거다.
교권과 세권이 합세가 된 그들의 신앙사상에는 예수구원의 본질의 사상이 잡혀주지를 않는다. ‘저희가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교권과 세권이 합세가 된 사상으로는 예수구원이 안 잡힌다. 예수구원이 없는 곳에는 성령의 역사가 없다. 육신적으로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붙잡혀 주실 수도 있지만 정신 사상은 그들에게 안 붙들린다. 구원이, 예수가, 진리이치가, 하나님께서 그런 사상에는 안 잡힌다. 오늘날 교회가 이 계시를 모르기 때문에, 교회 안에 어떤 사상이 주격을 이루고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불바다를 향해 내려가고 있다.
예수님은 교권과 세권에 합세가 된 신앙에는 안 잡힌다. 믿는 자기 속이 이런 사상이 주격으로 되어있으면 죽을 때까지 예수를 믿어도 말씀을 한 이치도 못 깨닫고 가게 된다. 불쌍하고 처절하다. 이런 신앙은 주님과는 물과 기름 같아서 결합이 안 된다. 가는 길이 다르니 대화도 안 된다. 그러면 주님이 어느 신앙에 잡혀주느냐? 진리본질, 진리진실, 하나님의 본질성의 신앙에 잡히신다.
40절-42절: ‘다시 요단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주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예수님께서 다시 어디로 가셨느냐? 세례요한이 처음으로 세례를 주던 요단강 저 편으로 가서 거했다. 이곳에 가시니 그곳의 많은 사람이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다’ 라고 했다.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믿어지는 건데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새겨듣지 않고 표적만 보려고 했다. 그러나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참인 줄 알고 예수님을 믿었다. 이들은 성경을 달달 외우는 율법 학자들보다 인격적으로 참 믿음을 가졌다. 성경구절을 달달 외우는 것과, 인격적으로 주님을 믿는 것은 다르다.
말이 많은 사람은 쓸 말이 별로 없다. 말이 많은 이유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자기 속에서 정립을 해서 그 말에 합당한 대답을 해야 하는데 이런 게 없이 자기가 속에 든 대로 말을 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여기에 자기의 생각까지 집어넣어서 말을 하면 이중 삼중으로 거짓말이 되고, 하나도 쓸 말이 없는 말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당을 짓고 싸움을 일으킨다. 이런 사람과 같이 다니면 자기도 물이 든다.
이곳의 사람들은 성경을 잘 아는 율법 학자들이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나 바리새 교인들보다 옳은 믿음을 가졌다. 질적 본질적 근원적으로 이들과는 질이 다른 믿음을 가졌다. 인격적으로 들어간 믿음과, 다른 사람을 시험하려고 하는 것과는 질이 다른 거다. 우리는 인격적 질적으로 봐야 한다. 본질을 모르면 질을 못 찾는다. ‘비슷한데, 저 정도면 잘 하는 건데’ 이러면 본질을 못 찾는다. 이런 정신으로 믿으면 심판이 누적이 된다. 오늘날 교회가 근본적으로 질이 다른 믿음이 많다.
믿음은 진리생명의 말씀을 들음에서 생긴다. 눈으로 보고 믿으려고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표적을 보려고 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다. 말씀을 듣고 인격이 변화가 되는 게 믿음의 사람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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