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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천 이발소

뉴델리에서

 

손님 기다리는 일에는 이골이 났다

오후 들어 야채카레 한 접시를 비운 뒤

지나가던 열풍의 긴 꽁지머리를 뭉텅잘라준 기억밖에 없다

비리* 몇 모금 빨고 나서

빈 나무의자 깊숙이 늙은 몸을 눕힌다

얕은 꿈결에

면도날 같은 시퍼런 문장이 지나가며

오랜 그리움의 새 별자리를 보여주었지만

문맹이라 받아 적지 못했다

*나뭇잎으로 말아 실로 묶은 인도 담배.

적멸의 문장

 

아열대숲 사이로 흐르는 강, 애 터지게 느리고 길다

강물에 얼비친 활엽수들의 봉두난발을 어루만지며

흐르는 강이

흐느끼는 것 같지는 않다

얼기설기 엮은 대나무 꽃상여에 얹힌

주검을 메고 가는

검은 사내들의 무표정한 실루엣도 강물에 얼비친다

황금빛 수의 밖으로 얼굴을 내놓은 초로의 주검

딱히 응혈 진 암흑이 있어

벌떡 일어나 천둥 칠 것 같지도 않다

꽃상여에 뉜 단 한 줄 적멸의 문장, 애 터지게 느리고 길다

 

새가 울면 시를 짓지 않는다

 

뱅골 땅에서 만난 늙은 인도 가수가

시타르를 켜며 막 노래 부르려 할 때

창가에 새 한 마리 날아와 울자

가수는 악기를 슬그머니 내려놓고 중얼거렸다.

저 새가 내 노래의 원조라오.

그리고 새의 울음이 그칠 때까지

울음을 그치고 날아갈 때까지

노래 부르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도

새가 울면

시를 짓지 않는다.

 

꽃 먹는 소

 

인도의 소읍, 어느 성인의 탄신을 기리는 축제라던가?

떠들썩 떠들썩한 축제 행렬 막 지나간 길, 꽃으로 가득한 트럭 위에서 사내들이 던진 꽃들 질펀하게 깔려 있네

흠! 흠!

붐비는 재스민 금잔화 향기 맡고 나타났을까, 난데없이 어슬렁거리며 등장한 흑소 몇 마리,

더 넓을 순 없는 여물통, 뜨겁게 끓는 아스팔트에 깔린 꽃들 우적우적 씹고 있네

갈비뼈 아른아른 비쩍 마른 흑소들, 야윈 신들,

꽃으로 주림을 채우고 있네 오, 공양(供養)? 맞네! 저 석조사원의 죽은 신들보다 죽은 성인들보다

살아 있는 신들을 먹여야 하리

무엇보다 꽃으로 먹여야 하리

꽃으로!

노천카페

 

허름한 노천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조개탄 연기가 푸른 실비단처럼 길 위에 깔립니다

낡은 담요 한 장 둘둘 말아 품에 안고

또 가없는 길을 나서는 저 노숙인에 아침도

쿨룩, 쿨룩대며 맨발에 실비단을 휘감으며 지나갑니다

여기는 여직 맨발이 통하는 세상

카페 주인은 제 맨발을 닮은 시커먼 냄비에

우유를 붓고 이글거리는 화덕에 올려놓습니다

이내 냄비 뚜껑이 들썩, 들썩거리기 시작하고

아까부터 날 따라붙던 비루먹은

황구 한 마리가 카페 앞에 와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짜이 한 잔, 비스킷 한 조각 황구와 나눠 먹고

짐 꾸려 다시 길 나설 즈음,

나보다 저만치 앞서 맨발이 꽃피우며 가는

만행(漫行)의 푸른 곡선이 그리워

한결 홀가분해진 발걸음을 천천히 떼어놓습니다

 

소똥

 

그 물건이 땅바닥에 주르르 흘러 떨어지는 동안, 긴 꼬리는 포물선을 그으며 허공을 떠받치고 분홍빛 항문은 둥글게 열려 있다

그 물건이 뚝, 뚝, 뚝 떨어지며 다정히 포개져 막 쪄낸 쑥찐빵처럼 모락모락 더운 김을 피워 올릴 때, 대기의 온도도 내 사랑의 체온도 몇 도쯤 올라가고 길을 걷던 이들의 시선은 사뭇 조심스러워진다

그 물건을 내려놓은 임자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길모퉁이를 돌아 어슬렁어슬렁 사라지면, 그 물건과 그 물건을 내려놓은 임자는 분리되지만, 둥글게 열려 있던 분홍빛 항문은 내 망막에서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

나는 그 물건의 이름을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발음해본다, 소똥! 가슴이 뻐근하다, 다시 발음해본다, 소통! (잘못 발음했지만 역시 뻐근하다) 둥글게 열린 내 입술이 분홍빛 항문처럼 열려 다물어지지 않는다

 

검정개

 

식솔도 없는 외톨이가 아니구나. 붐비는 식당 앞에 퍼질러 앉아

네 마리나 되는 새끼들에게 마른 젖을 물리고 있는 검정개. 아까 노천 화장터 부근에서 어슬렁거리던……

 

저렇게 빨리면 젖몸살이라도 날 것 같은 비쩍 마른 개. 사납게 덤비는 새끼들에게 마른 젖가슴을 온통 내맡기고 있다 지글지글 타다 남은

누구 종아리 살이라도 뜯어 먹고 왔나, 누런 갠지스 강물 들이켜다 거기 퐁당 잠긴 해님 날갯죽지라도 뭉텅 베어 먹고 왔나.

 

저마다 이쑤시개를 물고 나오는 점심시간. 붐비는 식당의 손님들이 다 빠져나가도록,

마른 젖꼭지를 새끼들에게 물린 채 곤히 오수(午睡)에 빠진, 검정개의 수유는 아직 끝나지 않고 있다 꿈속에,

누구 종아리 살이라도 찾으러 오대양육대주를 발발거리고 다니는지.

 

폭염 속에서 / 고진하

 

섭씨 사십 도를 웃도는 뉴델리,

냉방이 싫어 세미나실을 나와 님나무 그늘에서

폭염을 피하고 있었다 가만히 서 있어도

굵은 땀방울이 비 오듯 쏟아졌다

님나무 씨앗들이 그늘 아래 사방 흩어져 있었다

씨앗 몇 톨을 주워 가방에 담으며

조금 전 세미나 때 눈 맑은 인도 여성시인

루커미 니이르가 한 말을 기억해내곤

역시 마음 가방에 챙겨 넣었다.

 

― 인간은 죽음의 공포 속에 있다

― 무자비한 시간 속에서 위안을 주는 것이 시다

 

솔직히 말하면 그녀가 한 말보다

흑요석 같은 그 맑은 눈에 더 끌렸다

오래전 어느 꽃사슴 농장 앞을 지나다

스무 마리쯤 되는 꽃사슴들이 일제히 날 응시하던

눈빛들이 떠올랐다 그 겹의

황홀한 기억으로

잠깐, 무자비한 시간 밖으로 나갈 수 있었던가

땀에 젖어 다시 세미나실로 걸음을 떼는데

정원사인 듯한 허름한 사내가

폭염으로 말라가는 나무에 물을 주려는지

작은 분수대 쪽에서 긴 고무호스를 질질 끌어오고 있었다

 

물의 장례

ㅡ 심재관에게

 

여신의 축복을 받으며 죽고 싶은 이들이 모여드는

갠지스 강에서도 수장(水葬)은 드문 일이다 죄를 모르고 죽은 갓난아이나

업(業)의 씨앗 뿌리지 않은 수행자만 불로 태우지 않고

물의 장례를 지내준다

꼿꼿이 가부좌 튼 채 입적한 수행자의 시신이 배로 옮겨졌다 황금색 보자기에 싸인 시신은

한 아름 금잔화 다발 같다 물속 극락이 있어

그 극락을 장식할 꽃일까 신은 가장 아름다운 인간을 꺾어 당신의 정원을 꾸미려는 것일까

노가 젓는 힘으로 배는 강물을 헤치고 나간다

물살이 잔잔한 강 한복판 배꾼들이 황금빛 꽃에 돌을 달아 첨벙, 강물에 던지자

악어처럼 큰 입을 벌린 강물이 꽃과 돌을 한입에 꿀꺽 삼킨다

이내 강물이 잠잠해진다 물속 극락의 일은 아무도 모르는 일, 눈물의 촛불 켜 망자를 배우하며

강가를 서성이던 사람들 머리 위로 시커먼 하늘의 한쪽 옆구리가 툭 터지며 갑자기 천둥이 우르릉거린다

때아닌 법우(法雨)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하리잔*

 

흐르는 물속에 비석처럼 세워놓은 빨랫돌 위로

물에 적신 빨래를 빙빙 돌려 내리치는

도비왈라라 불리는, 빨래꾼들을 보았네

하얗게 피어오르는 물안개에 젖은

해님의 수줍은 얼굴이 찰랑이는 랄반 호수.

질기디질긴 업(業)의 괴로움 따윌 모르는

흰 오리들 둥, 둥, 둥, 떠다니며 자맥질하는

잔잔한 물속

탁한 영혼을 지닌 척추동물의 슬픔과 오욕을

빙빙 돌려 내리치고 쥐어짜고 흔들어

호수 둑에 가지런히 펴서 너는

빨래꾼들을 보았네

차라리 뇌도 없는 무영혼이기를!

비나리한 적은 없겠지만

맨날 두들겨 맞는 빨랫돌보다 오래 살기는 틀린

거대한 상처의 물집 같은

랄반 호수에서

하얗게 탈색된 숱한 타인의 그림자들과 오늘도 씨름하는……

*간디는 인도의 사성계급에도 들지 못하는 불가촉천민들을 하리잔, 곧 '신의 자녀'라 불렀다.

 

벵골의 딸

 

태양의 화로는 참 이글이글했습니다

그 드높은 화로에서 막 뛰어내린 듯

당신은 온통 새빨갛게 그을려 있었습니다

함께 뛰어내린 것일까요

태양의 혼령 같은 붉은 볏 닭들만

어슬렁거리는

아열대의 땅, 지구의 마지막 전사답게

당신은 홀로 흙집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시뻘건 표토를 긁어모아 놓고

저수지 물을 항아리로 떠다가 확 끼얹더니

맨발로 밟고 또 밟아

나지막한 흙집을 쌓고 또 쌓고 있었습니다

저렇게 느린 굼벵이가 또 있을까요

질척질척 반죽된 당신 젖무덤보다 큰 흙덩이를 들고

흙발의 굼벵이걸음으로 걸어

홀로 철썩철썩 흙벽을 치고 있었습니다

흙벽을 칠 때마다 흙벽에 새겨지는

손자국 무늬, 고행의 아름다움이라 할까요

극빈의 슬픔이라 할까요, 그렇게

두꺼운 한쪽 벽의 모서리를 쌓고 또 쌓던 당신은

잠시 일손을 멈추고

흙손을 툭툭 비벼 털더니

저수지 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놓았습니다

저 가없는 대평원,

태양의 화로는 여전히 이글이글거리고

검은 머리채를 치렁대며 걸어가는

당신의 굽은 등 뒤로

바짝 마른 대지가 제 뿌리를 보듬어 안 듯

붉은 흙먼지를 후끈 피워올리고 있었습니다

 

벵골의 개들

 

열대야에 시달리다가 겨우 잠들었는데, 우우우······ 섬뜩한 소리에 잠이 깼습니다 가만 귀 기울여 들어보니 꼬리에 꼬리를 무는 슬픔, 야생의 들개 떼 울부짖는 소리였습니다 건기(乾期)의 밤하늘이 금세 소리의 소낙비에 흠뻑 젖어들었습니다

별들의 무덤 같은 벵골의 밤, 내 그토록 그리워한 야성이 저 단순한 슬픔, 단 한 줄짜리 엑타르를 물어뜯고 있었습니다

밤의 광견(狂犬)들, 한낮엔 어슬렁어슬렁 순한 양처럼 나무 그늘에 기생하곤 했지요 또, 야성을 순치시키는 사원의 종소리에도 쫑긋 귀를 세우곤 했지요 하지만, 이슥한 밤이 되면 그따위 소리 들은 바 없다는 듯 캄캄한 비명의 이빨만 날카로웠습니다

문득, 우우우우······ 쏟아지던 소리의 소낙비 뚝 그치고, 내 불면의 하늘 위로 꼬리 긴 슬픔들만 어슬렁 어슬렁거립니다 비몽사몽 얕은 꿈길에 찍히는 야성의 발자국들, 깊고 고요합니다

최후의 성모

(소가 神이거나 말거나!)

어스름 내리는 저물녘,

들일을 막 끝내고 소 엉덩이에 바짝 붙어

어슬렁

어슬렁 따라가는,

그렇게 따라가다가, 느닷없이

소가 내지른

김이 모락모락 나는 똥 덩어리를

검은 비닐봉지에 얼른 두 손으로 쓸어 담는

저 늙은 아낙은 -

 

문예중앙 시선 028

『꽃 먹는 소』

- 지은이 / 고진하

- 펴낸 곳 / 중앙북스(주)

- 펴낸 때 / 2013년 8월

고진하

- 1953년 강원도 영월 출생.

- 감리교신학대학 졸업.

- 1987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 시집으로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1990), 『프란체스코의 새들』(1993), 『우주 배꼽』(1997), 『얼음 수도원』(2001), 『수탉』(2005), 『거룩한 낭비』(2011) , 『호랑나비 돛배』(2012), 『꽃 먹는 소』(2013), 『명랑의 둘레』(2015), 『야생의 위로』(2020) 등이 있음.

- 김달진문학상(1997), 강원작가상(2003), 영랑시문학상(2016) 수상.

-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 원주 한살림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