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 성경본문 : | 요10:40-11:5 |
|---|---|
| 설교자 : | 김경형목사 |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0장 40절-11장 5절.
10장 40절-42절: 다시 요단강 저 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주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11장 1절-5절: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10장 40절-42절: ‘다시 요단강 저 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주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당신을 잡으려고 하니까 요단강 저 편 요한이 처음 세례를 주던 곳으로 피했다. 그런데 이곳의 많은 사람들이 하는 말이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라고 했고, 이 말을 듣고 많은 사람이 믿었다고 한다. 세례요한으로부터 주님을 증거하는 소리를 듣고 물세례를 받은 사람은 주님을 믿었지만 주님을 증거하는 소리를 듣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잡아 죽이려고 한다.
세례요한은 마지막 선지자요, 주님 당신이 이 땅에 오시기 6개월 전에 보낸 종이다. 그래서 세례요한으로부터 주님에 대해 들은 사람은 예수님께서 오시면 ‘아, 세례요한이 말한 분이 이 분이구나’ 하고 예수님을 믿게 된다. 이것을 지금의 우리에게 적용을 하면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어느 목사님에게 예수님에 대해 배웠는데 나중에 예수님을 만나서 말씀을 듣게 되면 ‘아, 그 목사님이 예수님에 대해 가르친 게 진짜였구나’ 라고 하거나 ‘그 목사가 예수님에 대해 말한 게 가짜였구나’ 하게 된다. 정답을 알면 틀린 답을 알게 되고, 틀린 답을 버리게 된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목사들은 정답을 가르쳐야 한다. 세상을 가르쳤거나 세상 것을 구하게 했다면 마귀가 보낸 거다. 이런 것을 보고 거짓 종인지 참 종인지 알 수 있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목사님들이 자기가 어느 큰 조직 속에 들어있으면 그 조직이 다른 누구를 이단이라고 하면 자기도 그들과 합세해서 그 사람이 이단이라고 손가락질을 한다. 우리 입장에서는 이런 목사의 말을 들으면 무조건 그 말을 따르지 말고 성경을 통해 정말 이단인지 확인을 해야 한다.
이단이란 기독교의 7대 기본교리 중에 하나라도 없애거나, 부인하거나, 왜곡하는 것을 말한다. 정통 기독교 안에 있으면서도 이런 자들이 많이 있다. 천주교도 그 중에 하나다. 이것은 교리적인 면에서 이단이고, 그런가 하면 기본교리를 다 시인을 하고 인정을 하지만 영적 이치적으로 보는 면에서 세상을 소원 목적하며 믿으면 하나님의 성품을 닮지 못하게 되는데, 이것은 성질적인 면의 이단이다. 어찌 되었건 진리본질에서 이탈이 된 것은 이단이요 거짓이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 들어있으면서 표면 껍데기로는 예수께서 자기를 위해 죽었고,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을 믿는다고 하는데 말씀 속에 들어있는 신앙의 본질을 제시하지 못하고 세상을 자랑하고, 외모 모양 껍데기를 취하게 하고, 이것을 가지고 못 가지고 한 것을 신앙의 기준으로 말을 한다면 이 가르침은 하나님의 온전을 닮지 못하게 하는 가르침이라서 교인들이 이런 가르침을 받으면 진리본질의 신앙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되니 이런 교훈을 하는 자는 이단자요 거짓자다. 이런 곳에서 아무리 열심히 충성봉사를 해도 주님으로부터 ‘난 너희들을 모른다’ 라고 하는 선언을 듣게 된다. 믿는 자기가 옳은 이치를 가지면 먼저는 자기가 보인다.
우리 교회는 진리본질에 정통으로 적중이 되는 교육이다. 진리본질의 교훈에는 변명이 있을 수 없고 전부는 아멘을 할 수밖에 없다. 믿는 사람이 이걸 부정한다면 예수를 모르는 거다. 다른 교회에서 어떻게 예수를 믿었던 세례요한과 같은 주님이 보낸 종을 만났다면 이 종으로부터 받는 교훈에 반대를 하면 안 된다.
동방박사들이 공중에 뜬 별을 따라가면 아기예수가 계신 곳으로 인도가 된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성령님의 감동 감화를 따라 성도들을 진리로 인도해야 한다. 교회는 진리가 아닌 인정정실에 끌려가거나, 교회 초기의 멤버라느니, 일가친척이 나온다느니 하는 것으로 되는 게 아니다. 주님께서 ‘네 부모 형제보다 나를 사랑하라’는 것은 진리를 붙잡고 가라는 거다. 그래야 네가 하나님 앞에 산다.
11장 1절-3절: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베다니의 나사로가 병이 들었다. ‘베다니’란 ‘대추야자’라는 뜻이다. 그의 누이 마리아와 마르다가 있는데, ‘마르다’란 ‘여주인’이라는 뜻이다. 마르다는 이름의 뜻대로 집에서 살림을 잘하는 듯하다. 다른 곳에 보면 이 마르다가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 부지런을 떨기도 했다.
반면에 마리아는 요12:3에서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라고 했고, 11:2에서도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라고 한 것을 보면 예수님의 복음운동에 열심히 수종을 들었던 것 같다. 예수님을 사랑치 않으면 이런 활동이 나오지 않는다.
나사로가 죽을병이 들었는데 부모님은 돌아가셨는지 보이지를 않는다. 이들의 집이 이곳인지, 아니면 예수님께서 이들을 형제처럼 사랑하고 돌봤기 때문에 예수님과 가까이 있기 위해 집을 나와서 이곳에 사는 건지 모르겠으나 이들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졌다.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누이들이 오빠를 위하여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서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라고 말을 하게 부탁을 했다.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라고 하는 이 사랑은 ‘필레오 사랑’이다.
4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듣고 놀라실 줄 알았는데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다’ 라고 했다. 예수님의 말씀인즉 병 자체가 안 죽는 병이라는 거고, 죽더라도 예수님께서 살리신다는 의미가 들어있는 거다.
병이라고 할 때 여러 종류의 병이 있는데, 몸이 아픈 병도 있고, 몸이 약한 것도 병이요, 마음이 슬픈 것도 병이요, 고난을 당하는 것도 병이다. 모든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기쁜 것도 병이고 행복한 것도 병이다. 사는 것 자체가 죄요, 사망성이다. 반면에 신앙 면에서 보는 사람이 온전한 것은 하나님의 본질로 만들어진 것을 말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본질을 놓고 슬퍼하는 것은 병이 아니다. 사람을 살리는 쪽으로 염려를 한다면 이건 병이 아니다.
예수님의 오감의 오감성에서 나오는 희로애락과, 안 믿는 사람들의 오각의 오감성에서 나온 희로애락은 그 질이 전혀 다르다. 예수님은 하늘의 질이고, 안 믿는 사람들은 땅의 질이다. 그런데 세상사람들은 하늘의 질을 모르기 때문에 신체가 건강하면 건강한 것으로 알지 사람의 정신 면이 온전치 못한 것은 전혀 모른다.
사람은 자기의 정신에 의해 못된 짓도 하고 죄도 짓게 되는데, 선악과를 먹은 모든 인간은 정신마저도 죄에 잡혀있기 때문에 온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 한 명도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영인성장 면에서 불안하다. 말하자면 진리의 사람으로 강하지 못하고, 강하지 못하니 그 무엇에건 압박을 받고 있다. 이게 영적인 면의 병이다. ‘저 사람이 마음속에서 앓고 있구나. 신음을 내고 있구나’ 이걸 볼 줄 모르면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 사람에게 육적 마음적인 병이 있는 것은 이 병을 보면서 영적인 병을 느낄 줄 알라는 거다.
사람이 살다 보면 병이 들기도 하는데, 신앙적으로 보면 나사로가 왜 병이 들었을까? 나사로라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건가, 병이 문제인가? 사람이 문제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병이 문제인 것처럼 말을 한다. 그래서 자기가 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를 당하면 상대에게 문제가 있는 것으로 말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일을 당하면 상대를 탓하기 전에 모든 면에서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고, 지혜를 쓰고, 늘 주위를 살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사람이 감기에 걸리면 사람이 문제냐, 날씨가 문제냐? 환절기에 감기를 조심하라고 하는 것은 날씨를 보고 하는 말이냐, 사람을 보고 하는 말이냐? 사람에게 말을 하는 거다. 그러니 사람이 문제다. 어린 아기가 감기에 걸리면 아기가 문제냐, 부모가 문제냐? 부모가 문제다. 아기를 누가 만든 거냐?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에 아기도 하나님께서 만든 거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기를 잘 아신다. 아기를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아이를 초달하라고 하는데 세상은 초달을 하지 말라고 한다. 아이가 초달을 받지 않고 자라면 사회에서 일꾼이 될까?
나사로가 왜 몸 저 드러누울 만큼 약해졌을까? 무엇이 좋아서 무엇을 붙잡으려고 하다가 병이 든 건가, 아니면 무엇을 놓치고 마음으로 무엇을 붙잡으려다가 병이 든 건가? 사람의 영육 간의 모든 병은 마음에서 난다. 마음이 병이 들면 육신은 따라 들어간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사로의 병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한다.
그러면 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병이 든 걸까? 나사로의 입장에서 ‘주님이 떠나면 병이 드는구나’ 하는 이치를 가르쳐 준다. 진리로 힘을 삼고 있고 빛으로 구별의 힘을 삼고 있는 성도에게서 주님이 떠나면 이 성도는 캄캄해진다. 이치가 그렇다. 이치를 어기면 안 된다. 예수 믿는 것은 이치가 분명한 거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이냐? 첫째는 나에게서 하나님의 지혜지식성이 나타날 때 하나님께 영광이다. 또한 내가 신적 지혜지식성을 모르고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지혜지식성을 나타내면 이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 ‘하나님을 믿으니 사람이 저렇게 영특하고 세상에서 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구나’ 하게 되면 이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거다. 요7:에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하속들에게 예수님을 잡아 오라고 했는데 이 하속들이 돌아와서 하는 말이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라고 했다. 예수를 잡으러 간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감화가 된 거다. 이들로 통해 주님의 영광이 나타난 거다.
두 번째는 나의 언행심사로 통해 하나님의 신적인 도덕성이 나타나는 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거다. 신적인 도덕성이란 한 마디 말을 해도 구원이 나타나는 거다. 안 믿는 사람들은 도덕성이 아무리 좋아도 세상에 속한 거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잘 참지 못하는 사람에게 서로를 위해 참으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격 자체를 참을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신다. 사람이 이렇게 만들어지면 ‘참아라. 참아라’ 라고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세 번째는 나에게서 하나님의 능력성이 나타나는 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거다. 내가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의 옳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 어떤 사건 환경 장소에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되니 이러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 성경에 라합이나 다말 등이 비상수단을 쓴 게 그 예다. 이게 능력이다.
자기에게서 하나님의 지혜지식성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도덕성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능력성이 나타난다면 나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거고,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입은 거고, 내가 이것을 보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거다, 그리고 이것이 나의 인격화 되면 나는 하나님의 영광의 사람이 되는 거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이 들었다는 말을 듣고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라고 하신 것은 나사로를 살리신다는 뜻이 전제가 된 말이다. 죽은 인간을 살리면 숨을 들이키고, 기운이 돌아오고, 살아가면서 미래적으로 어떤 업적을 이루는 게 들어있다. 주님께서 우리의 죽은 영을 살리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입을 자들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자들이다. 그런데 믿는 자들이 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것을 등한시 하느냐?
자기는 하나님의 영광을 입을 자요, 자기로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하고, 나를 영광스런 영능의 실력자로 만들기 위해 하나님께서 천군 천사를 움직이고, 하늘을 움직이고, 지구 땅덩어리를 움직이고, 사계절을 움직이고 계시는데 이것을 못 느끼느냐? 태어나서 그냥 살다가 병들어 죽는 존재냐? 믿음은 하나님과 나와 일대 일이다. 나 하나를 위해 창:에서 계:까지 기록이 된 거다. 그리고 나를 깨닫게 하려고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간 것을 보여주는 거다. 그런데 믿는 사람이 마음에서 무슨 일이 더 급하다고 느끼느냐?
5절: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예수님께서 그들을 본래 아가페 사랑으로 사랑했다. 그러면 언제부터 본래냐? 이 본래가 나사로가 출생한 때부터를 말하는 거냐,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부터를 말하는 거냐? 무엇을 놓고 본래라고 하는 거냐? 말하자면 주님께서 지금의 나를 언제부터 사랑했느냐? 태어나서부터냐, 태어나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부터냐? 나를 사랑하는 설계가 언제부터냐? 내가 태어나서부터가 아니라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 하나님의 설계 속에 들어있는 그 내가 본래부터다. 나사로를 찾아오신 예수님에게는 본래부터 나사로가 들어있기 때문에 나사로를 찾아오신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