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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씨와 도둑>은 최용우 개인 책방의 이름입니다. 이곳은 최용우가 읽은 책의 기록을 남기는 공간입니다. 최용우 책방 구경하기 클릭! |

소리의 집
수십 마리 새들이 날아와 우짖을 때
나무는 수직의 악기가 된다
가까이 다가가면 홀연 침묵에 휩싸이고
다시 멀어지면 생음악이 연주된다
둘이 한 몸이 된
반수반조半樹半鳥의 생음악
쌩쌩 바람이 불면 음악은 더 격렬해진다
고요하고 차분하던 수직의 문장이
수직의 악기로 바뀔 때
미치광이처럼 흥분하지 않을 수 없다
나무야, 새들아, 나도 너희처럼
온몸으로 악기가 되고 싶어
생음악을 연주하는 소리의 집이 되고 싶어
소리의 집, 시의 집, 생생한 시집이고 싶어
우릉 우르릉~
천둥이 하늘과 땅을 울리는 이 요란한 계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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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위
까닭 없이 울고 싶은 날
거위 우리로 다가가면
곡비哭婢처럼 거위가 대신 울어주네
몇 켤레의 신발을 버리듯
떠나간 사랑이나
흔해빠진 이별은 서럽지 않지만
길게 쑥 뽑아든 울대 부르르 떨리는
저 흙피리 소리처럼
돌아가다 만난 낯선 이정표 앞에서
왜 까닭 없이 울고 싶은 것이냐
품삯도 못 받고 울대를 흔들어주는
하얀 곡비와 멀어질 때 왜
산천은 막막한 생의 대답인 양
울컥울컥 초록을 쏟아놓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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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과
아직 덜 익은 채 떨어진
황달 기 느껴지는 노란 연민을
책상 모서리에 올려놓고
하루 몇 번씩 킁킁 코를 대봅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있으면
그윽한 체취의
팔등신이
내 품을 파고듭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나무 밑을 지나다니지만
어찌 팔등신을 품에 안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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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운 장화
예초기로
산밭의 풀을 베고 나니
장화에 파랗게 풀물이 들었네
집을 향해 걷는데
길 위의 공기가
풀 향기로 붐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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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 밥상
-불편당 일기
잡雜이라는 말이 들어가면 깔보지만
우리 가족은
잡초에 꽂혀 하루하루 삶을 영위하지
잡초로 비빔밥을 해먹고
잡초로 갖가지 요리를 만들어
밥상에 올린다네
모름지기 살아 있다는 건
허접한 잡雜과 친해지는 일이며
구두 뒤축에 짓밟히는
질경이 같은 생과 공명하는 일인 것을
짓밟힌 인생 잡놈들과 친했던
예수나 해월,
그래서 더욱 친근하거니
드난살이 같은 우리 가족의 식탁엔
세상 잡것들도
소외되는 일은 없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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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경이
아무리 밟히고 또 밟혀도 살아나는 저것들,
저 흔한 것 들,
누가 눈길이나 주나 누가 상감賞鑑이나 하나
흔한 게 저를 살리는 줄도 모르고,
흔한 걸 홀대할 때 제 가 죽는 줄도 모르지
길바닥에 찰싹 달라붙어
땅이 곧 하늘인 줄 모르는 천박 을 끌어 내리고,
바닥을 기는 너와 나를 높이높이 하늘까 지 들어 올리지
그래, 그래, 오늘은 한껏 들어 올려다오
늘 기고만장인 하늘도 오늘은 네 겸허에 물들어
밭고랑 구름 그늘 속으로 몸을 감추느니
어떤 시의 행간보다 더 깊은 길바닥 속으로 스며
흔하디 흔한 증식의 싹을 틔우느니,
밟히고 또 밟히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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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른자
어릴 적 밥상에 올라온
달걀프라이 노른자가 아까워
흰자위를 젓가락으로 헤적이고 있으면
할머니는
아가, 노른자부터 먹으렴!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 이후로
매 순간 생의 핵심을 찾는 버릇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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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까치
동틀 녘 문 열고 내다보니
연둣빛 싹이 돋기 시작하는
산뽕나무 가지에
물까치가 앉아
청회색 꼬리를 까딱이며 인사하네
그래, 저 명랑한 물까치가
오늘의 내 운세
안 되는 일이 없겠구나
혹
안 되는 일 있어도 섭섭지 않겠구나
물까치여, 오늘이여
어처구니없는 일 많이 겪다 보니
너에게 기대게 되는구나
물까치여
오늘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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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새벽에 일어나 앉아,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묻지 않았네
다만,
뒷산에서 들려오는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네
내 안에
고요의
종자種子를 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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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욕
서른 몇 살 때, 처음 대면한 자리에서
무위당 장일순 선생은 일갈했지
이보게, 하느님이 어디 따로 있는 줄 아나
자네가 하느님이여!
그 말씀 너무 감당하기 어려워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욕 꾹 참고
벌떡 일어나 그냥 넙죽 절을 올렸지
얼마 전 선생 묘소에 갈 일이 생겨
다시 절을 올리며 깨달았네
그때 선생이 한 그 말씀이
무지한 나를 향한 유쾌한 욕이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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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불숲 묵상
간밤 멧돼지들이 출몰해
뭉툭한 주둥이를 쟁기날 삼아
겨울 고구마밭을 갈아놓았다
땅속의 지렁이를 사냥했을까
굶주린 짐승이 훑고 지나간 자취를 보며
잠깐 연민이 일었지만
간밤의 사나운 꿈자리가 떠올라
뜬금없이 일어나는
생각들이나 굶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덤불숲 같은 내 머릿속은
생각들이 출몰하곤 하는
들짐승들 놀이터 같지 않던가
그렇다고
아직 꽁꽁 얼어붙은
마음의 묵정밭 가는 일을
멧돼지에겐 맡길 순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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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위로
시작시인선3046
지은이/고진하
펴낸곳/천년의 시작
펴낸때 /202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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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하
- 1953년 강원도 영월 출생.
- 감리교신학대학 졸업.
- 1987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 시집으로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1990), 『프란체스코의 새들』(1993), 『우주 배꼽』(1997), 『얼음 수도원』(2001), 『수탉』(2005), 『거룩한 낭비』(2011) , 『호랑나비 돛배』(2012), 『꽃 먹는 소』(2013), 『명랑의 둘레』(2015), 『야생의 위로』(2020) 등이 있음.
- 김달진문학상(1997), 강원작가상(2003), 영랑시문학상(2016) 수상.
-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 원주 한살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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