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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만 모르는 사도신경 한 구절 “음부에 내리시사”>
루터교회 예배에 처음 참석한 분들이 가장 당황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익숙한 사도신경을 함께 고백하다가 "장사된 지 사흘 만에"라는 구절에서 낯선 문장이 튀어나올 때입니다. "음부에 내리시사." ("장사하여 음부에 내리신지 사흘만에") 어떤 이는 흠칫 놀라 주위를 둘러보고, 심한 경우 이단 아닌가 싶어 일어나 나가버리기도 합니다. 정말 이 교회는 이상한 단체일까요?
지옥불이 아니다
우선 가장 큰 오해부터 풀어봅시다. 여기서 말하는 '음부'(라틴어 inferos, 그리스어 hades)는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유황불 타오르는 지옥(Gehenna)과는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게헨나가 최후의 심판 후 악인이 가는 영원한 형벌의 장소라면, 음부는 죽은 자들이 머무는 곳, 죽음 그 자체의 상태, 하나님과 단절된 죽음의 영역을 뜻합니다. "음부에 내리시사"는 예수님이 지옥불에 떨어져 고통받으셨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이 죽음을 완전히 경험하셨고, 죽음의 세력이 지배하는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가셨다는 엄숙한 선언이자 고백입니다(참조: 벧전 3:18-20, 4:6; 엡 4:8-9).
이는 그리스도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곳은 없으며, 심지어 죽음의 세계조차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강력한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인간이 볼 수도 없고, 경험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곳, 이성이 도달할 수 없는 모든 영역까지 하나님의 통치가 미친다는 것—이것이 이 한 문장에 담긴 교회의 신앙고백입니다.
한국 교회에서 이 구절을 삭제한 건 치열한 신학 논쟁의 결과가 아니라 선교 초기 '현실적 타협'이 만들어낸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최초의 장로교 찬송가인 언더우드의 『찬양가』(1894)를 펼쳐보면, 사도신경에 "지옥에 나려가셨더니"라는 구절이 분명히 나옵니다. 당시 장로교 선교사들은 본국 교회의 전통을 충실히 따랐고, 이 구절을 번역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불과 3년 후인 1897년, 감리교 선교사들이 펴낸 『찬미가』에는 이 구절이 보이질 않습니다.
여기에는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데, 웨슬리는 미국 감리교인들을 위한 ‘25개 신앙조항’를 제정하면서, 성공회가 사용하고 있던 신앙의 39개 조항 중 제3조 '그리스도의 지옥 강하' 부분을 성경적 해석이 모호하다는 이유로 생략했던 바가 있습니다. 18세기 웨슬리의 이 판단이, 19세기 말 미국 감리교 선교사들(아펜젤러 등)을 통해, 20세기 초 한국 땅에 그대로 이식된 것입니다.
결정적 순간은 1908년입니다. 장로교와 감리교가 교파 연합을 위해 최초의 통합 찬송가 『찬숑가』를 만들 때였습니다. 서로 다른 사도신경 문구를 통일해야 했고, "분쟁의 소지가 있는 문구는 뺀다"는 원칙이 적용되었습니다. 감리교가 반대하고 장로교 내에서도 의견이 갈렸던 이 구절은 그렇게 최종 삭제되었습니다. 아쉽게도 교파 간 화합이라는 실용주의가 신학적 풍성함을 희생시킨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 교회는 어떻게 고백하는가
한국 교회가 이 문장을 지운 사이, 역설적으로 세계 교회는 이 구절의 신학적 깊이를 재발견하고 있었습니다. 장로교의 아버지뻘인 장 칼뱅은 『기독교강요』 최종판에서 이 구절을 삭제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히 주장합니다. 칼뱅은 이를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겪으신 극심한 영적 고통,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은 그 절규의 순간으로 해석하며 대속의 깊이를 강조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다른 각도에서 이 구절을 조명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가 죽음의 세계에 승리자로 내려가 사탄의 권세를 멸하셨다는 '승리'의 관점을 강조했습니다. 음부 강하는 굴욕이 아니라 개선장군의 행진이었다는 것입니다(참조. 골 2:15).
20세기 신학자들은 여기서 더욱 깊은 의미로 해석합니다. 칼 바르트, 위르겐 몰트만,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같은 거장들은 이 구절을 통해 "하나님이 인간의 가장 깊은 절망과 고독, 죽음의 자리에까지 함께하신다"는 위로의 메시지로 해석합니다. 아우슈비츠 이후, 히로시마 이후, 인류가 극단적 고통을 경험한 시대에 이 고백이 더욱 풍성한 의미로 다가온 것이지요.
미국 장로교(PCUSA)를 비롯한 서구 개신교단들도 20세기 중반 이후 예배 의식에서 이 구절을 복원하기 시작했습니다. 1950년 미국 남장로교가 이 조항을 복원한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참혹함을 겪은 후, 죽음과 절망의 한가운데서도 그리스도가 함께하신다는 고백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입니다.
지금 한국 찬송가 앞표지를 펼쳐보십시오. 한글 사도신경 옆에 인쇄된 영문 사도신경(The Apostles' Creed)에는 한글에 없는 "He descended into hell"이 선명하게 적혀 있을 겁니다. 같은 책 안에서 한글과 영어가 서로 다른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이 기묘한 광경은, 한국 교회의 신앙고백이 세계 교회의 표준과 어긋나 있음을 보여줍니다.
침묵을 깨고
"음부에 내리시사"의 복원은 옛 문장 하나를 되살리는 고고학적 작업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고백의 온전함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연대를 선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겪을 수 있는 가장 비참한 상태, 죽음과 단절의 자리까지 낮아지셨습니다. 동시에 죽음에 대한 승리를 고백합니다. 죽음의 세계조차 하나님의 통치 영역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라도 주님이 그곳에 먼저 계셨다"는 사실은 단순한 위로를 넘어선 실존적 복음입니다. 극단적 선택을 생각하는 이에게,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이에게, 이 한 문장은 "당신이 가려는 그곳에도 그리스도가 먼저 가셨다"고 말합니다.
2002년, 한국 교계에서도 사도신경 재번역을 논의하며 이 구절의 복원을 진지하게 검토한 적이 있습니다. 예장 통합 제87회 총회에서 재번역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신학자들이 머리를 맞댔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유감스럽게도 "성도들의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이유로 복원 포기였습니다. 다른 교단들은 논의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혼란'을 핑계로 풍성한 신앙의 유산을 덮어두어야 할까요? 120년 전 선교 초기 상황에서 내려진 타협의 결정을, 21세기에도 계속 따라야 할까요? "음부에 내리시사"는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아니라, 가장 낮은 곳까지 임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절정의 문장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교회는 함께 고백합니다. "음부에 내리시사(죽음의 세계로 내려가사)" 한국 교회만 침묵합니다. 이제 그 침묵을 깨야 할 때가 아닐까요.
글. 최주훈 목사
*루터의 대교리문답 수요강해 원고(2025.12.03)에서
*덧) 고신은 2023년 개정헌법에 이 구절을 넣었답니다. 이 글쓰고 나서 귀인에게서 하나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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