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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요11:26-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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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김경형목사 |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1장 26절-34절: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형제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의 맞던 곳에 그저 계시더라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의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26절: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네 오라비가 지금 다시 사는 것을 네가 믿느냐?’ 라는 주님의 물음이다. 즉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라는 거다. 예수 믿는 이치가 육신이 살아서 믿는 거지 육신이 죽은 후에 믿을 수 있느냐? 육신이 죽으면 예수를 못 믿는다. 그러니까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하는 말씀은 신앙성의 질이 부활성으로 믿느냐는 거다. 즉 지금 영적인 면에서 이룰구원을 이뤄가느냐는 거다.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예수 믿는 사람의 현재의 신앙성이 죽지 않는 것으로 들어가면 부활 때 그대로 살아난다. 그래서 현재 영적인 면에서 이렇게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하는 거다. 우리는 영원히 죽지 않는 예수를 믿어야 한다. ‘예수=구원’이니 내 속이 주님으로 닮아지고 주님의 속성이 입혀지는 것도 구원인데 이 구원의 질은 우리의 육신이 죽어도 마지막 날 육신이 부활할 때 영과 육이 순간적으로 결합, 단일이 되어서 천국에 들어간다. 인간 자기를 만드심이 이 목적을 두고 만들었다.
우리가 세상의 정신과 마음과 지식을 가지고는 예수를 바로 못 믿는다. 세상의 지식을 따라 예수를 믿으면 세상사람이 된다. 안 믿는 사람과 속 중심이 똑같다. 예수를 믿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것이니 살아서 이렇게 되면 이 사람에게 영원히 죽지 않는 하나님의 질이 들어간다. 이게 기독교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가르침이 맨 세상 판이다. 그러니 믿는 사람이 하나님으로 닮는 것은 없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죽는 쪽으로 믿는 게 아니라 사는 쪽으로 믿는 거다.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의 33년 전체의 생애가 죽지 않는 영생으로 살으신 것을 믿느냐는 말이다. 예수님은 33년 동안의 모든 언행심사가 죽지 않는 자로 살았다는 거다. 모든 인간은 죽은 자로 살고 있고, 죽을 자로 살고 있다. 그래서 부활 때 살아나오는 게 없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인간에게 이런 게 있다는 것을 모른다면 이 사람은 열심히 충성봉사를 해도 믿음의 성질이 세상성이다. 이게 참 딱한 거다. 주님은 이걸 보고 통분히 여기신다.
이룰구원이란 주님의 온전한 성품으로 닮는 것이니 이 소원성을 가지고 예수를 믿고, 이 소원성을 가지고 교회에 다니고 있다면 이 사람은 죽지 않는 믿음을 가진 거다. 어떻게 아느냐? 식물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매일 성장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현재의 믿음을 보면 알 수 있고 부활 때 보면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오심은 ‘너도 나처럼’ 하는 게 들어있는 건데 예수 믿는 사람이 이건 없고 자꾸 뭘 달라고 한다면 이 사람은 저질이다. 우리는 이렇게 믿으면 안 된다. 저질이 되는지 안 되는지 안 믿어지거들랑 한 일 년만 그렇게 살아봐라. 말하자면 그렇게라도 하나님을 시험해 보고 확실한 믿음을 갖든지 하라는 거다. 이런 믿음을 가지면 시험을 못 이긴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오심은 ‘너도 나처럼’ 하는 게 있으니 지금 하나님의 성품을 닮고자 하는 소원성을 가지고 예수를 믿는다면 이 사람은 아버지께서 이끌어준 신앙자인데 이것을 네가 믿느냐? 하나님의 질적 본질에서 하루를 살다가 죽은 사람이 있고, 십 년을 살다가 죽은 사람이 있고, 백 년을 살다가 죽은 사람이 있을 때 각 사람의 정신과 소원 목적을 보면 신앙의 차이를 금방 알 수 있다. 학교공부도 열심히 공부를 한 사람과, 안 한 사람이 앎의 양이 다르듯이 예수 믿는 것도 마찬가지다. 특히 우리 교회에서 예수 믿는 사람은 이게 확연히 드러난다. 이게 자기 수준의 자리다. 말씀에 의해 이렇게 나타나는 것이니 누구를 탓하지 말아라.
세상은 너를 위해 있는 거지 네가 세상에 불타기 위해 있는 게 아니다. 세상은 불에 타는 것이니 불에 타기 전에 세상 것을 이용 사용 활용해서 부지런히 자타의 구원을 위해 살아라. 그러려면 목사님들의 메시지 속에서 이룰구원의 이치가 밝히 나와야 한다. 예수님은 오셔서 이걸 다 가르쳐 줬고 알도록 했는데 목사가 이걸 모르고, 안 가르쳐 줬다면 목사부터 심판을 받아야 한다. 베다니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가 5리쯤 되니까 걸으면 30분 정도의 거리다. 이렇게 가까운 곳인 예루살렘에 예수님이 계시는데 오늘날 자기의 신앙은 주님과 어느 정도의 거리감인지?
학교는 안 가고 길에서 놀기만 한 학생과, 열심히 공부를 한 학생이 실력이 같으냐? 다른 학생들은 실력적으로 앞으로 달아났는데 자기는 매일 놀고 있다면 앞날이 어떻게 되겠느냐? 예수 믿는 정신이 학교에 다니는 것만도 못한 거냐? 의인과 악인으로 부활이 될 삶이 현재에서 너에게 이루어지고 있다.
27절: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이 대답은 기본적인 신앙의 말이다. 믿는 사람은 으레 이 말이 나와야 한다. 예수를 믿는다면 기본적으로 이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기본적인 믿음이 있어야 이것을 바탕으로 이룰구원을 이뤄나갈 수 있고, 이게 있어야 신앙이 성장이 되는 하나님의 역사가 자기에게 있는 거다. 뿌리가 있어야 성장이 되는 거다. 원리가 그렇다.
그런데 이것마저도 모르는 교인들이 많다. 목사 중에도 많더라. 글자적으로야 읊어도 정신 면에서 이 기본적인 신앙이 없다. 몰라서,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다. 그러니 이런 목사에게 자꾸 성경에 대해 물으면 ‘많이 알면 교만해진다’ 라고 하며 얼버무린다. 예수님에게 성경에 대해 물으면 샘에서 물이 나오듯이 진리이치가 자꾸 나온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배에 탔는데 아무 것도 묻지를 않으니 예수님께서 자버렸다.
28절: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형제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마르다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라는 고백을 하고 집으로 달려가서 마리아를 몰래 불러서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라고 했다. 왜 몰래 불렀을까? 다른 사람은 들어서 안 될 소리라서 그런 거냐? 따라 나오는 사람이 귀찮아하고 싫어하면 ‘너만 나와라’ 라고 하는 수도 있다.
29절: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언니 마르다가 자기에게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라고 하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황급히 예수님께로 뛰어간다. 예수님에 대한 소식이 왔을 때 정신이 번쩍 들어서 자기가 있었던 사망적인 곳에서 얼른 주님께로 달려갔다. 진리의 소식이 오면 자기 속에서 얼른 역사가 일어나서 진리말씀을 붙잡아야 한다.
30절: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의 맞던 곳에 그저 계시더라.’ 예수님께서 마르다가 신앙고백을 했던 그 자리에 그대로 서 계셨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느냐? 인간 자기가 신앙의 이치를 깨닫고 ‘참 옳다’ 라고 생각이 된다면 자기가 예수님께로 가야 하겠느냐, 예수님이 자기에게 와야 하겠느냐? 주님의 말씀 속에는 구구절절 보화가 박혀있는데 이것을 못 깨달으면 자기의 인생이 다 사망계로 흘러간다. 생산이 안 되는구나. 이룰구원의 생산이 안 된다.
31절-32절: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의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언니 마르다가 자기에게 조용히 지혜롭게 전했으면 자기도 언니처럼 지혜롭게 슬그머니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를 못했다. 마리아가 후다닥 뛰어나가니까 위로하던 자들이 마리아가 무덤에 가서 다시 곡을 하려는 것으로 알고 마리아를 따라 나오니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나자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서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라고 했는데, 앞에서 언니 마르다도 같은 말을 했다. 이걸 보면 언니와 동생이 ‘예수께서 안 계셔서 우리 오빠가 죽었다’ 라고 하며 원망을 했던 것 같다.
33절: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이것을 인간의 말로 하면 원통하고 분하고 답답하고 걱정스럽다는 뜻이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이런 믿음을 가지고 앞으로 어떻게 인생을 살아나갈까? 로마의 세력과 바리새 교인들의 유혹과 미혹에 안 끌려가고 바로 믿어나갈 수 있을까? 오늘날 교회가 많은데 거의가 살아있는 예수님의 정신이 안 보인다. 이 교훈을 받으면서도 이런 수준에 있다면 울화통이 터질 일이다.
마리아가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라고 한 것은 예수님의 기대에 어긋나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이 말 때문에 원통하고 분한 게 아니라 ‘내가 그 동안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말씀을 들려주었는데 어째 이것밖에 안 되느냐?’ 라는 거다.
예수 믿은 지 몇십 년이 되었는데 금방 믿은 사람과 소원 목적이 똑같다면 이건 분명히 잘못 믿은 거다.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고 갈 우리인데 목사가 어떻게 가르쳤기에 교인들의 신앙이 안 믿는 사람과 똑같으냐? 마르다와 마리아는 일반 인간적인 감정에 사로잡혀서 신앙이 생명적으로 살아나지 못하고 꽉 막혀 있구나. 이런 일이 어찌 마르다와 마리아만의 얘기겠느냐?
34절: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마지막 부활을 위해 나사로를 곱게 정성을 들여 잘 싸서 돌무덤 속에 안치해 뒀다는 거다. 아무리 사랑하고 절친해도 숨이 떨어지면 썩는다. 자기 집 식구를 사랑한다면 영의 눈을 가지고 신앙성의 성질이 점점 죽어가는 건지 살아가는 건지를 느껴라. 집에 돈이 있고 자식이 공부를 잘하면 아무런 걱정이 없는 거냐? 주님이 이런 걱정을 하시느냐?
사람이 숨이 떨어지면 보기 싫다고 얼굴도 가리고 손발도 묶어서 관속에 집어넣어서 산에 버리든지 불에 태워버린다. 이건 매정한 게 아니라 인간은 숨이 떨어지면 이렇게 되는 존재로구나. 산 사람이 죽은 사람과의 정을 끊지 못하고 자꾸 죽은 사람을 생각하면 악령이 들게 된다. 죽은 사람의 소유물은 다 치워라. 숨이 떨어지면 땅속에 묻거나 태우는 게 관례고 상식이지 시체를 집에 그대로 두면 질병이 퍼져서 살아있는 사람도 죽게 된다.
정신과 사상 면에서 자기 속에 죽은 게 들어있으면 이 사람의 정신은 썩어들어간다. 이러면 다 자기를 싫어한다. 세상도, 하나님도 싫어한다. 예수 믿으면서 이렇게 되지 않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는 신앙의 바탕을 찾고 다지면서 천국을 상속할 수 있는 신앙생명을 잡아야, 현재 살리는 그 분을 잡아야 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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