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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
한국 교회에서 이 구절만큼 자주 인용되면서 동시에 오해받는 말씀도 드물다. 부흥회 단골 메뉴다. ‘뜨겁게 기도하는 자가 천국을 쟁취한다, 적극적인 신앙으로 하나님 나라를 움켜잡아라.’ 이런 설교를 우리는 익히 들어왔다. 신앙의 열정을 강조하려는 뜻은 좋지만, 과연 이런 해석이 맥락상 맞는 것일까? 예수님도 그런 의도 말씀하신 걸까?
“침노 당한다”로 번역한 헬라어 동사 '비아제타이'(βιάζεται)를 문법적으로 보면 중간태와 수동태 형태가 같다. 중간태로 읽으면 "천국이 힘차게 전진한다"가 되고, 수동태로 읽으면 "천국이 폭행당한다"가 된다. 문법만으로는 어느 쪽인지 판단할 수 없다. 그러니 문맥을 봐야 한다. 그리고 문맥을 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난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제자들이 승승장구하는 그런 평화로운 상황에서 하신 게 아니다. 세례 요한이 헤롯의 감옥에 갇힌 바로 그 순간, "요한의 때부터"(마 11:12)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영역(천국)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말씀하고 계신다. 요한의 운명 자체가 이 말씀의 살아있는 주석이다.
요한이 요단강에서 회개 운동을 시작하자, 하나님 나라가 구체적인 현실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대안적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천국이 말과 관념에만 머물러 있을 때는 세상에서 권력을 잡은 자들이 별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그 천국이 신자들의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면 충돌이 일어난다. 요단강에서 요한이 회개와 하나님 나라를 외치자 사람들은 모여들었고, 실제로 자신의 삶을 돌이키기 시작했다. 그 결과 요한은 감옥에 갇혔고 참수당하게 된다. 이것이 "천국이 침노당하는" 현실, 하나님의 뜻이 세상에 펼쳐질 때 일어나는 ‘폭행당하는 천국’의 현실이다. 이 충돌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 역설이 있다. 그렇게 무법자들이 폭행한다고 천국을 정말 빼앗을 수 있는가? 요한을 가둘 수는 있어도 그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를 가둘 수는 없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는 있어도 부활을 막을 수는 없다. 빼앗으려 한다, 그러나 결국 빼앗지 못한다. 이것이 이 구절에 숨겨진 약속이다.
감옥에서 요한이 묻는다. "오실 그분이 당신입니까?"(마 11:3) 그리도 강력하게 메시아를 선포하던 마지막 예언자가 감옥의 어둠 속에서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의심하는 요한을 나무라지 않으신다. 대신 ‘지금 이 땅에 일어나고 있는 일을 보라’고 하신다. 눈먼 자가 보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해진다(마 11:5). 군대의 행진이 아니다. 정적의 처형이 아니다. 치유와 회복의 일로 눈을 돌리게 한다. 하나님 나라는 폭력이 아닌 은혜로, 정복이 아닌 섬김으로 온다. 이것이 세상과의 충돌 지점이다. 세상이 좋아할 리 없다. 그래서 천국은 폭행당한다.
루터는 하나님의 부재와 침묵을 경험하는 신앙의 어두운 밤을 '영적 고투/시련'(Anfechtung:안페히퉁)이라 불렀다. 감옥에 갇힌 요한의 질문은 바로 이 시련 속에서 터져 나온 것이다. 마지막 예언자 요한도 흔들리는데 우리라고 흔들리지 말라는 법은 없다. 흔들려도 신앙이다. 다만, 요한의 모습이 크게 보이는 건, 그가 자신의 의심을 예수에게 그대로 가져가 물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요한을 향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마 11:11)라고 부른 이유가 바로 이것 아닌가 싶다.
바른 말 하고, 정의를 실천하다가 부침을 겪고 꺾이더라도 너무 빨리 낙심하지 말자. 제대로 제 길 잘 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폭행당한다. 그러나 빼앗기지 않는다. 이것이 복음의 약속이다.
참으로 나를 위한 말씀이다.
*대림절 셋째 주일 중앙루터교회 교회력 복음서 설교 준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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