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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녀 마리아의 결단
불임 부부의 출산 이야기는 성경의 내러티브에 종종 등장하는 소재이다. 나이 들어 자녀 출산의 희망이 사라진 아브람과 사래 사이에 태어난 이삭의 이야기(창 17~18장)나 엘가나와 한나 사이에 출생한 사무엘의 이야기(삼상 1:1~20), 그리고 제사장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아들 요한의 출생에 얽힌 이야기(눅 1:5~25)는 구속사를 설명하고자 하는 성경의 주제에 잇닿아 있다. 아론의 마른 지팡이에서 꽃이 피어 살구가 열린 것도 같은 맥락이다(민 18:8). 엘리사를 극심히 섬긴 수넴 여인이 득남한 이야기(왕하 4:17)와 그 아들이 죽었을 때 엘리사가 아이 위에 엎드려 아이의 신체에 자신의 신체를 포개는 행위(왕하 4:33~37)를 통하여 아이를 살리는 이야기는 영락없는 구속사를 설명하는 내러티브다.
으레 건국시조들의 탄생 신화는 인간의 아들이 갖는 불완전성을 간파한 때문인지 대개 인간 아버지가 철저히 부정된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도 인간 아버지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한 마태복음 1장은 “아브라함은 이삭을, 이삭은 야곱을,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를,”(마1:2)로 시작하여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이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가 나셨다”(마 1:16)로 마친다. 아버지가 아들을 낳는 계보의 연속성이 요셉까지 이르지만 그다음 예수에게로 이어지지 않는다. 아버지들에게서 아들들로 이어지던 계보는 여기에서 멈추고 뜬금없이 어머니 마리아가 등장한다.
그렇지만 마태는 마리아가 예수를 낳았다고 기록하지 않았다. 마태가 기록한 족보에서 아들들은 목적어로 표현하여 능동태의 형식(낳고)을 가졌다. 그런데 예수님은 주어로 표현하여 수동태의 형식(나셨다)을 취하였다. 이는 예수님을 구속주로 표현하고자 한 마태의 서사적 의도이다. 예수님은 여느 사람과는 다른 본질의 존재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속성을 갖고 인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오신 존재인 그를 사도신경에서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로 요약한다.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에게 나심을 믿습니다”
이 신앙고백은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이시고 완전한 하나님이다’는 고백이다. 예수님을 신성과 인성을 고루 갖춘 분으로 섬긴다는 것이 이성을 숭배하는 이들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일 것이다. 계몽시대 이전의 암흑시대에나 가능했던 고백이라며 비웃고 조롱거리로 삼을 수 있다. 하지만 믿음은 이성을 초월한다. 이성에 갇힌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 이 고백이 시대에 뒤처진 것처럼 보여도 이 고백에 담긴, 생명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인류의 유일한 희망임이 틀림없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세류를 거슬러 사는 것은 옛일만은 아니다.
“멸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이치가 한낱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하지만 구원받을 우리에게는 곧 하나님의 능력으로 됩니다.”(고전1:18)
동정녀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할 것이라는 수태고지(눅 1:26~38)는 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의 자료가 되었다. 그 가운데 아프리카계 미국 화가 헨리 오사와 태너(1859-1937)의 <수태고지>는 그동안 우리가 익숙하게 여겼던 중세의 작품과는 다른 감동을 준다. 천사 가브리엘은 익숙한 날개옷을 입지 않았다. 그는 빛으로 나사렛 시골 처녀 마리아를 찾아왔다. 마리아도 우리에게 익숙한 성모의 모습이 아니다. 침실이라는 사적 공간에 찾아온 하나님의 사자를 맞는 마리아의 비스듬히 앉은 자세와 표정이 매우 복잡해 보인다. 천사가 전하는 믿기 어려운 말을 들으며 마리아는 두려움과 의구심의 표정을 숨기지 않고 있다. 하지만 마리아는 빛을 피하지 않고 직면하고 있다. 고민하면서도 피하지 않는 마리아의 표정과 꼭 모은 손에서 순명하기로 결심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어려서부터 성경 이야기를 듣고 자란 사람일수록 엄청난 이야기를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수태고지를 듣는 마리아의 마음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영광과 감격과 외경심의 상태가 아니다. 도리어 동정녀에게 그것은 비극의 시작이며 인생의 어두운 그림자다. 오사와 태너의 <수태고지>는 그런 점을 잘 묘사하였다. 미술사에 나타난 <수태고지>는 한결같이 마리아를 거룩한 장소에서 순종하는 성녀로 묘사하였다. 그에 비하여 태너는 으슥하고 남루한 골방의 초라한 침대에 앉은, 아직 소녀의 티를 다 벗지 못한 모습으로 그렸다. 희미한 등잔과 물항아리가 있을 뿐 소녀의 방은 아무런 장식도 없다. 빛을 향해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그녀의 눈은 질문하는 눈빛이 영력하다. 하지만 그녀의 마주 잡은 손은 이미 순종을 결심하고 있다.
아, 이것이 한 시골 처녀로 하여금 메시아의 어머니가 되게 하는 장면이다. 인류를 절망하게 하던 죄의 인력을 무효화시키는 단초가 되는 현장이라고 읽는다. 자신 속에 하늘을 잉태하는 저 눈길, 두렵고 의아하면서도 하나님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 이 눈길이 마리아를 복되게 하였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눅 1:38)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인류 구원을 위하여 다가와 하나님의 뜻을 밝히며 헌신을 전언하는 천사 앞에 기꺼이 제 삶을 송두리째 바치겠다는 마리아의 결연한 의지가 참으로 복되고 귀하다. 그렇게 하여 인류 구속을 위한 그리스도의 잉태는 성사되었다. 천사의 강압에 의한 굴종이 아니다. 마리아 스스로 판단하고 결단한 자발적 순종이다. 이 순종이 거룩한 구속사의 물길을 텄다. 하나님의 구속사는 초월적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인간의 의지를 무시하지 않는다.
이 땅에 하나님을 오시게 하는 일은 마리아의 헌신 한 번으로 완성되었다. 하지만 오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일은 한 번의 헌신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수없이 반복해도 늘 버겁고 서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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