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 성경본문 : | 요11:48-52 |
|---|---|
| 설교자 : | 김경형목사 |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1장 48절-52절: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48절: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이 말이 대제사장의 생각이지만 사실은 유대 지도자들의 정신과 사상이 소원 목적적으로 이미 이방정신에 감염이 되어 속국이 된 거다. 로마를 상전으로 모시고 노예처럼 죄 아래서 죄를 짓고 살면서 백성들을 사랑하고 나라를 지키는 애국자들처럼 말을 하고 있다.
강대국 로마에 속국이 되었으면 그 정신세계는 이미 노예로 들어간 거다. 그들의 현실이 이걸 증명한다. 그런데도 자기 백성을 사랑하는 것처럼 말을 하고 있다. 이런 게 세상이다. 어느 나라를 가도 마찬가지다. 자기 밥그릇을 챙기면서 국민과 백성을 사랑한다고 한다. 법으로 부정부패를 강하게 막고 있기 때문에 겉으로는 노골적으로 부정부패가 없는 것 같으나 뒷구멍으로 슬슬 해 먹기 때문에 부정부패가 표면화 되지 않은 채로 세상이 흘러가고 있는 거다.
천국을 사랑하고 성도를 사랑하는 자는 공의를 행한다. 성도사랑은 등 두들겨 주고 업어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주는 거다. 하나님의 것을 나눠주는 자가 공의를 행하는 자요, 하나님을 가진 사람이 보배요, 능력자요, 존귀 영광자다. 세상을 나눠주고, 세상을 소원 목적하게 하고, 가지게 하고, 구하게 하면 공의가 아니라 불의요, 거짓 종이요, 이단자요, 악한 자다. 신앙의 세계에서는 이걸 알아야 한다. 공의가 아닌 것은 하나님의 의사단일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에 교회사랑도 아니고 주님사랑도 아니다.
영과 육을 구별을 못하는 인도자들은 소경이다. 이들은 영에 속한 것도 모르고 육에 속한 것도 모른다. 눈으로 보이는 것만 주장을 하게 되면 영에 속한 것을 모른다. 영에 속한 것을 모르면 자기가 육을 강조하게 되고, 육을 강조한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를 모른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존귀나 심판성이 결과적으로 어떻게 오는 것을 모르니 소경이다. 소경은 앞을 못 본다. 소경은 자기 자신을 못 본다. 설교는 눈을 열어서 신령한 세계를 보게 하는 역할이 있기 때문에 선지자적 역할이 들어있고, 왕적인 역할이 들어있고, 제사장적인 역할이 들어있다. 설교 속에는 복합적으로 이런 역사가 들어있다.
49절-50절: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왜 ‘대제사장’이라고만 말을 하지 않고 ‘대제사장인 가야바’라고 하면서 이름까지 말을 했을까? 가룟유다에게는 그냥 ‘예수를 판 자’라고 하지 않고 왜 ‘예수를 판 가룟유다’라고 했을까? 왜 이름을 지적해서 말을 하는 거냐? 계시적으로 보면 자기 양심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면 이건 하나님께서 자기를 집어서 고치라고 지적을 하는 거다. 고치라고 하는 것은 사랑이다. 고치라고 하는데도 안 고친다면 너의 미래가 어떻게 되겠느냐?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가야바가 자랑스럽게 대표적으로 한 마디 했다. 그러면 가야바가 예수를 알고 이 말을 한 거냐, 모르고 한 거냐? 모르고 한 말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라고 한 말 자체는 맞다. 그런데 이 말이 강대국 로마를 의식해서 한 말이냐, 하나님을 의식해서 한 말이냐, 아니면 상황적인 말이냐, 아니면 절대적인 말이냐, 아니면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이적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고 하는데 예수님이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된다는 말이냐? 가야바의 말인즉 예수가 꼭 죽어야 한다는 것인데, 예수가 자꾸 사람들을 미혹하기 때문에 그대로 두었다가는 유대가 약해질 것 같아서 죽어야 한다는 거냐,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백성들이 죄 사함이 되고 온전케 되어서 강해지기 때문에 이를 위해 죽어야 한다는 거냐?
가야바의 말이 하나님의 일을 놓고 한 말이냐, 유대인의 육적인 면을 놓고 한 말이냐, 로마를 위한 말이나, 예수를 위한 말이냐? 자기 나라 백성들의 육적인 면을 위한 말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이 땅에 오신 거냐? 로마를 위해서냐, 유대나라를 위해서냐, 예수 자신을 위해서냐? 자기 나라의 백성을 위해 오셨는데, ‘자기 나라’ 라고 하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유대나라를 말하는 거지만 영적으로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얻을 백성을 말한다.
우리가 대제사장 가야바의 말을 단순하게 보지 않고 분해를 해서 보면 순 육적이고 세상적인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예수 믿는 것도, 설교를 듣는 것도 생각을 하고 믿고, 들어야 한다. 믿는 사람이 자기 마음을 분석하지 못하면 영육을 구별을 못한다. 일반사람들은 영육을 구별을 할 지식도 능력도 없지만 우리 교인들은 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품화 되고 안 되고는 나중의 일이고 먼저 지식적으로 영을 위한 설교인지 육을 위한 설교인지 구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날짜적으로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지만 안식을 누리지 못했고, 또한 자신들은 사람을 고쳐주지도 못하면서 안식일에 각종 병자를 고쳐주시면서 죄 사함을 주시고, 고통과 아픔과 슬픔을 멎게 해서 마음에 온전한 기쁨과 평안을 주시는 주님을 비방하고 죽이려고 하고 있다.
주님께서 죄를 사하시고, 영과 육을 구별 분별케 해 주시고, 가치판단 평가를 바로 할 수 있게 해 주시는 것은 다 사람을 온전케 하는 거다. 사람이 이렇게 되면 안식이 되는 건데 이런 일을 하는 분을 죄인이라고 하고, 당신을 하나님과 동일시 한다고 하며 참람하다고 하며 이 분을 죽일 모의를 하고 있으니 종교적인 제도를 가지고 하나님의 공의를 죽인다면 이들의 결과가 어떻게 될까? 그 결과가 금방 오나 나중 오나 진노의 형벌과 멸망뿐이다. 이들에게 그런 결과가 반드시 온다고 하는 현재의 증거는 현재에 영인성장이 없다는 거다. 이게 없으면 결과는 형벌과 멸망뿐이다.
이런 사람은 현재에 사업이 망하고 안 망하고 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이미 인격과 성품이 망한 거다. 이렇게 되면 영육을 구별 분별을 못하고, 그 다음에는 물질위주로 살기 때문에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고, 이러면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 나오게 된다. 그리고 자기를 못 다스리기 때문에 술을 먹고 울고불고 하며 위로자를 찾아다니게 된다. 그러나 세상에는 진정한 의미의 위로자가 없다.
51절-52절: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스스로 한 말이 아니라면 누가 시켜서 한 말일까? 마귀냐? 로마냐? 하나님이냐? 대제사장의 직을 걸고 한 말이냐? 하나님이 시켰다고 한다.
대제사장 가야바가 육적인 뜻으로 말을 했다면 땅에 속한 말이고, 영적인 뜻으로 말을 했다면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말이다. 그런데 가야바는 예수님을 살려두면 유대나라가 로마에게 망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예수를 죽여야 한다고 말을 했다. 하나님께서 가야바의 입을 통해 예수가 죽어야 한다고 말을 하게 하신 건데, 그 이유는 당신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려면 예수님께서 번제물로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제사장이 말을 한 의미와,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게 하신 의미는 다르지만 예수님께서 죽어야 한다는 것은 같다. 이걸 보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하시려고 하면 예수를 믿는 사람이던, 종교인이던, 악인이던 어떤 사람을 들어서라도 결과적으로 구원이 되게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으로 신비롭고 오묘하다. 베드로의 입을 열어서 신앙고백을 하게 한 것처럼 대제사장의 입을 열어서 우리의 구원도리를 말을 하게 하셨다. 이런 일을 사람의 입을 열게 해서 하는 것만 아니라 뱀의 입도, 나귀의 입도, 물고기의 입도 열어서 하게 했다.
그러면 베드로의 그물에 잡힌 고기들이 재수가 없어서 잡힌 거냐, ‘거기에 그물을 던져라’ 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느라고 고기가 잡혀준 거냐? 후자다. 유에서 무를 창조하신 분이 무엇인들 못하시랴? 이렇게 믿는 게 어리석은 거냐,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신앙이냐? 이적 기사는 당신의 주권과 능력에서 나오는 거다. 그런데 이 분의 주권을 안 믿는다면 이 사람은 신앙이 없는 거다.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대제사장의 말은 하나님께서 입을 열어서 말을 하게 했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 뜻은 다르다. 베드로의 고백은 영적으로 정확한 말이지만 대제사장의 말은 땅에 속한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하나님의 대국적인 사역을 가야바의 믿음 없는 말을 통해서 우리로 깨닫게 하시는 거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는데, 자기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인간적인 생각으로 받게 되면 이 사람은 하나님께 쓰임을 받은 후에 버림을 받게 되지만 자기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로 받아들이면 자기에게 상이 가고, 존귀 영광자가 되는 거다. 우리는 부지깽이처럼 다른 사람의 구원에 쓰임을 받고 버림을 받는 존재로 살면 안 된다. 부지깽이는 밥이 다 되도록 일을 한 후에 밥이 다 되면 불 속에 들어가서 재가 된다.
우리가 악하게 살면 의인들의 깨달음에 이용물이 된다. 그렇다면 누가 이런 이용물의 인생으로 살겠느냐? 자기는 자타의 구원에 쓰임이 되어야지 죄를 짓고 악한 짓을 하는 일에 쓰임이 되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느냐?
가야바가 한 사람이 죽어서 많은 사람을 살린다고 한 말을 얼핏 들으면 맞는 것 같으나 영적인 면에서 그 분이 어떤 분인지를 모르고 육을 위해 한 말이기 때문에 이치에 전혀 안 맞는 말이다. 그래서 대제사장으로서의 직분과 권위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백성들을 죄에서 자유케 하는 영적인 면으로 쓴 게 아니라 예수를 죽여야 만이 유대가 위험하지 않고 로마의 압제를 받지 않는다고 하는 육적인 면에 써버렸다. 예수님은 백성을 죄에서 풀어내는 분인데 가야바는 대제사장이면서 영적인 면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교회 인도자는 진리지식을 가지고 교회를 하나님의 본질로 다스리고, 구별 분별케 해야 하는데 오늘날 교회가 진리지식의 의사단일의 본질이 없기 때문에 교회에 귀신들린 무당들이 판을 치고 있다. 사람이 귀신에게 붙잡히면 일반적인 생활도 제대로 못하고 신앙생활도 바로 하지 못한다. 오늘날 이런 교회가 한 두 교회냐?
대제사장 가야바가 훗날 진리본질을 깨닫는다면 예수님을 죽여야 한다고 한 말에 대해 ‘내가 그 때 하나님의 뜻을 잘 이뤄드렸다’ 라고 하며 자랑이 될까, 아니면 회개를 할까? 베드로의 경우에도 훗날 사도가 되어서 자기가 예수님 앞에서 신앙고백을 한 것에 대해 ‘내가 그 때 참 신앙이 좋았다’ 라고 생각을 할까, 아니면 ‘내가 그 때 말은 정확하고 옳게 했는데 내 신앙의 수준은 그게 아니었다’ 라고 하며 스스로 부끄러울까?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 아무리 의롭고 선한 일을 했다고 해도 그 일을 한 자기 속의 지식의 질을 생각하면 자랑할 것은 하나도 없고 전부가 회개밖에 없다. 이에 대해 회개가 아닌 과거에 선행을 많이 했다고 자랑을 한다면 이는 교만이고,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성경을,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의를 세상 식으로 풀게 된다. 이런 것은 사람의 인격에 관한 게 아닌 행동이나 활동에 관한 것이라서 이런 일을 아무리 많이 해도 사람은 안 바꿔지고 종교활동 위주의 사람이 된다. 이건 교만이다.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다.
나귀가 하나님께서 시킨 대로 사람의 말을 한 후에 ‘내가 발람 선지자를 깨우쳤다’ 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는 거냐? 나귀가 자기 자랑을 할 입장이냐? 발람 선지자가 나귀와 대화를 한 것은 누가 어리석은 거냐? 짐승이 사람을 깨우친다면 이건 ‘사람이 짐승만도 못하구나’ 이렇게 되는 거다. 마귀가 예수님께 세 가지 시험을 걸고 난 뒤에 뒤돌아서서 ‘내가 한 판만 더 시험을 하면 예수를 이길 수 있었는데’ 라고 할까, 아니면 ‘세 가지 시험으로 인간들이 받을 모든 시험을 알게 해 줬다’ 라고 할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거나 강압하지 않고 인간의 자유를 이용해서 우리의 구원의 뜻을 건설적으로 이루신다. 이것을 통해 우리로 자기의 분수를 벗어난 언행심사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서 고치게 하고 조심하게 하신다.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다. ‘하나님의 나라’라고 할 때 영원 궁극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있고, 영원히 누리는 천국의 나라가 있는데, 우리는 성장적인 면의 하나님의 나라다. 하나님의 나라인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애정권 사랑권 안에서 가르침을 받고 간섭을 받으면서 성장이 되는 거다. 그리고 우리는 장차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거하게 되는데, 하나님 나라의 왕은 주님이시고, 우리는 그 나라에서 진리법 생명법의 통치를 받으며 산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인 우리를 영능의 실력자로, 영원한 존귀 영광자로 만들어 주시려고 자원하여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 던지셨다. 이 은혜와 사랑을 입은 우리는 내 몸이 부서져서 가루가 된다고 해도 주님 앞에 바로 서고 주님의 집이 잘 되는 일을 해야 한다. 일반적으로도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은 죽음을 불사하고 군대에 뛰어 들어가서 총칼을 잡는다. 자기는 주님의 교회다. 교회로서 영능의 실력자가 되면 자기에게서 성령님의 역사가 폭발적으로 일어난다.
세상에는 새 것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이 과거의 것을 현재에서 이리저리 돌리면서 살아가는 거다. 에덴동산에서 타락 후에 많은 사람이 태어났고 멸망을 당했는데 멸망을 당한 사람들이 현재의 우리의 생각과 전혀 다른 별개의 순 악 덩어리의 사람이었느냐? 그 때 사람들의 타락된 정신이 지금도 여전히 세상과 교회 안에 있는 거다.
구약 때 멸망을 당한 사람들이 신약시대에 멸망을 당한 사람들을 보고 ‘저 사람들은 우리가 짓지 않았던 전혀 새로운 더 악한 죄를 지어서 하나님께 명망을 당했구나’ 라고 하겠느냐? 아니다. 그들이 지었던 죄와 똑같은 죄를 짓는다. 죄의 질은 똑같지만 다만 물질문명이 발달을 했기 때문에 더 흉악성 괴악성 괴퍆성 포악성이다.
은혜와 사랑을 입은 내 몸은 주님의 거다. 이런 나인데 우리가 잘못해서 주님이 우리를 두들겨 팬다면 누구의 마음이 더 아프겠느냐? 자기가 얻어맞을 때 ‘나를 때리시는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 하고 주님을 걱정해 봐라. 주님의 몸인 우리는 주님의 교회로서 주님의 사람으로 바로 서는 게 주님의 일이다. 인본주의 육본주의 세상주의의 교회는 망해야 하고 새사람의 교회는 계속 서 나가야 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