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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요11:53-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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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김경형목사 |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1장 53절-12장 2절.
11장 53절-57절: 이 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여기를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유하시니라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케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 저희가 예수를 찾으며 성전에 서서 서로 말하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저가 명절에 오지 아니하겠느냐 하니 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
12장 1절-2절: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쌔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11장 53절-54절: ‘이 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여기를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유하시니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를 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유대인들 가운데 드러나지 않게 다닌다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신앙과는 교제가 없다는 뜻이요, 그들은 영적인 면에서 성령님의 역사가 없다는 뜻이다. 왜냐? ‘예수=구원’인데 이 분을 죽이려고 하니까.
구원을 죽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거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자기의 존귀 영광과, 영능의 실력과,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을 스스로 죽이는 거다. 이러면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내려지는 게 당연하다. 이게 하나님의 선이다. 행한 대로 받고 뿌린 대로 거둬지는 게 하나님의 공의요 선이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에게 세 천사가 찾아왔는데 두 천사는 롯에게 가고 한 천사는 아브라함과 계속 대화를 했다. 이 세 분을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아브라함과 대화를 하는 분이 아브라함에게 생명계대의 약속의 큰 복을 가지고 왔구나. 쉽게 말을 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받은 거다. 그런데 롯에게는 재앙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면 아브라함과 롯 두 사람에게 왜 각기 다른 일이 벌어진 거냐? ‘평소에 살아온 결과가 그렇게 되는구나’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리가 아브라함을 돋보고 아브라함이 받은 복을 받기 원한다면 평소에 아브라함이 가졌던 신앙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평소가 없는 결과는 없다. 어제가 없는 오늘은 없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으니까 예수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않고 에브라임에 거하신 것을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아서 지옥에 가게 된 것을 의미한다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이것을 천국에 가고 지옥에 가는 기본구원에 놓고 말을 하면 맞지 않고 이들에게 성령의 역사도 없고 이룰구원의 역사도 없다는 이룰구원 면으로 깨달아야 한다.
성경의 구원에 관한 말씀을 전부 천국과 지옥으로 말을 하게 되면 예수 믿는 사람이 마귀 짓을 하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얻어맞는 게 해석이 안 된다. 성경에서 ‘구원’이라고 할 때 기본구원보다는 이룰구원에 관한 말씀이 더 많은데 무조건 ‘천국과 지옥, 또는 택자와 불택자’로 말을 하게 되면 이룰구원의 교훈이 없어지고 이룰구원이 없어진다. 이걸 분별을 못하면 자기를 못 보고 남만 정죄하게 된다. 자기 자신을 보면 성경도 보여지는 건데 자기에게는 관대하고 남만 정죄를 한다면 이 사람은 엉터리다.
성경에 많이 얻어맞기도 하고 적게 얻어맞기도 하고, 잘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높이 올려주기도 하고 잘못하면 선지자를 보내서 고치라고 하는 게 있는데 이런 것들은 남이 아닌 나에게 하는 말씀이다. 이룰구원 면에서 이런 것을 잘 알면 스스로 조심하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 살려고 하게 된다.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유하시니라.’ ‘에브라임’의 뜻은 ‘열매 맺는 두 밭’ 또는 ‘두 배의 과일’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두 배의 주시는 은혜를 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빈 들’이란 다른 사람은 없이 주님과 제자들만 같이 있는 곳이니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이 없는 곳에서 제자들만 옹골차게 두 배로 은혜를 받게 된 거다. 우리도 두 배의 은혜를 받을 줄 알아야 한다.
많은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성경대로 한다고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거지만 우리가 예수님의 기준으로,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면 이들은 주님의 의사와는 거역적이다. 정반대로구나. 그러니 이들의 신앙은 종교적인 세상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안 믿는 게 아니라 종교적 세상으로 나가니 주님의 의사와는 대립이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의 온전의 인격과 성품으로 만들어지는 게 옳게 믿는 건데 이들은 성경구절을 가지고 종교적 사역적 의미로 일 크게, 많이 하자는 외모 외형 형식 사역위주로 나가니 속이 만들어진 게 없다. 속이 없는 신앙을 가진 게 주님과 거역적인 거다. 주님의 구원과는 팽팽하게 거역적인 의사를 가지고 있는 거다. 믿는 사람들에게 이런 면이 많이 있다. 특히 목사님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다. 정말 완고하다. 이들은 주님과의 거역적인 신앙을 가지고서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진행을 방해하는 일에 한몫을 하느라고 대단히 바쁘게 돌아간다. 사람을 죽이는 운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다.
주님께서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향해 한 말이지 이방인들을 향해 한 말이 아니다. 즉 잘못된 가르침으로 성도들의 영인성장 면을 죽이는 자들에게 한 말씀이다. 이건 영적 살인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눈에 안 보이는 이 살인을 잘 모른다.
55절-57절: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케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 저희가 예수를 찾으며 성전에 서서 서로 말하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저가 명절에 오지 아니하겠느냐 하니 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
많은 사람이 자기를 정결케 하려고 예루살렘으로 미리 올라간다. 이 열심과 정성은 알아주어야 할 것 같은데 문제는 예수님을 열심히 찾는 이유가 예수님에게 현상금이 붙어 있어서 사람들이 ‘이번 명절에 예수가 예루살렘에 오지 않겠느냐?’ 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잡아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넘겨주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거다. 성경에 상금을 준다는 말이 없는데? 아니,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들이 잡아서 죽이려고 하는 예수를 잡아 오면 아무런 보상도 없이 그냥 보내겠느냐? 그래서 사람들이 모이면 예수를 잡을 얘기고, 예수를 잡아서 상금을 타려고 하고 있다. 세상위주로 사는 사람들이 돈밖에 더 있겠느냐?
참 성결은 예수 그리스도로 진리의 속성적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인데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성문적인 율법대로 양을 잡아서 제사를 드려도 영적인 면에 성결함이 없다. 마음이 거듭나지 못하고 정신과 소원과 목적과 인격이 거듭나지 못한 상태에서 외부적 표면적인 의식을 지킨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성결해지는 게 아니다.
오늘날도 예수를 믿으면서도, 말씀을 들으면서도, 세례를 받았으면서도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종교적 의식과 활동만 할 뿐 주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지 못한 사람이 많다. 돈을 사랑해서 스승을 판 가룟유다가 세례를 안 받았겠느냐? 예수 믿는 우리로 깨닫게 하려고 가룟유다를 우리 눈앞에 보여주는 거다. 예수 믿는 사람이 돈을, 물질을, 세상을 좋아하고 사랑하면 반드시 예수를, 자기의 구원을 세상에 팔아먹게 된다. 성경을 보면서 자기를 못 깨달으면 안 된다.
영적 신앙 사상적으로 보면 예수 믿는 사람이 자기의 자유를 가지고 비진리적, 세상적, 육적, 옛사람 부패성적, 마귀적인 정신으로 사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이 자유는 사망적이고 죄적인 자유다. 진정한 자유는 진리로 자유하는 거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자유를 억압과 강압으로 꺾지 않고 마음대로 하게 하면서 그 자유를 이용해서 당신의 구원사역을 이뤄가신다.
사람이 사망적 자유를 많이 누릴수록 자타가 자꾸 망가지고 죽는다. 예를 들면 교통법규를 안 지키는 것을 자기 자유라고 하면서 안 지키면 어떻게 되느냐? 목적지에 도착이 안 되고 중간에서 죽고 만다. 이럴 때 이 자유를 꺾지 않고 마음대로 두는 게 하나님의 공의다. 그러면서 진리의 성도들이 그런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서 구원을 잘 이뤄가든지, 아니면 자기 자유로 사망적이고 죄적인 삶을 살든지 하는 것을 선택해서 살게 하신다.
유대인들은 거듭나지 못한 종교적인 정신을 가지고 성문적 종교적 의식을 행하면서 예수님의 영적 진리 생명적 구원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예수를 죽이려고 했다. 오늘날 우리도 성령님의 감화 감동을 입어서 하늘의 이치, 영적 이치, 주님의 온전한 성품을 닮을 수 있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를 받아들이지 않고 영접지 않는다면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자기 속에서 예수를 죽이는 거다.
타락된 세상이지만 사람들은 어찌하든 자기에게 손해가 되는 일은 안 하고 이익이 되는 일을 하려고 한다. 우리 믿는 사람들도 어찌하든 영적인 면에서 손해가 되는 일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믿는 사람이 정신과 소원 목적적으로 세상을 가지는 것은 선악과를 먹는 거다. 이 이치를 따질 줄 모르는 사람들은 목사가 하나님의 축복으로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라고 하면 ‘아멘. 아멘’ 한다. 이건 마귀의 말에 넘어간 거다. 오늘날까지 이렇게 믿어 나왔다면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밖에 없다. 어쩔 도리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중간이 없다. 반드시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
12장 1절: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베다니는 예루살렘과 가까운 곳이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자가 있는 곳이요,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곳이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린 것을 보니 예수님은 죽지 않을 분이고, 죽음과 상관이 없는 분이고, 영원히 죽지 않는 분이다. 영원히 죽지 않을 분이라야 사람을 영적인 면에서 살릴 수 있는 거다. 이게 이치다. 이걸 교훈적으로 보면 영원 궁극적인 면에서 내 것이 되는 말씀을 받아야 영생도 되고, 생명도 되고, 현재 이룰구원도 되는 거다. 살아나는 일이 된다. 또한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에서 오심을 보니 인간창조의 근본을 아는 분이요, 만능의 능력과 주권을 가진 분이요, 사람을 영원히 죽지 않게 하실 분이다.
예수님으로 인해 살아난 나사로는 이러한 사실들을 분명히 느낄 거다. 또한 살아난 나사로 본 자들도 앞에서 말한 것들을 다 느끼게 된다. 베다니에 살거나 베다니를 방문해서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을 본 자들이나 그 소문을 들은 자들은 주님이 사랑하는 자에게 진리의 생명이 오시면 살리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의 그 사건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같은 이치로 말씀을 하신다. 우리가 과거를 되돌아보면 나는 진리로 영적으로 살리는 역사가 전혀 없었고 인본주의 세상주의의 생각을 가지고 죽이는 일만 하며 살지 않았느냐? 이제부터라도 살리는 일을 해야 한다.
2절: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쌔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나사로와 두 여동생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그 날의 감격을 잊지 못할 거다.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으니 자동적으로 잔치다. 사람들은 명절이 되어서 일가친척들이 오래간만에 모이면 자동적으로 잔치를 한다. 그런데 자식 중에 집문서를 가지고 나가서 다 탕진을 한 자식이 온다고 하면 잔치가 되겠느냐? 지서에 신고나 하지 않으면 천만다행이다.
나사로와 두 여동생은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으니 그 날의 감격을 잊지 못하고 마음 깊은 데서 솟아올라오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자원적 잔치를 벌인다.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의 자동적인 감사의 잔치를 말해준다. 단순히 먹고 마시는 잔치가 아니라 진리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잔치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구원 얻은 자로 사는 게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마음속에 잔치가 있을 수 없다. 자기에게서 살아난 것이 발견이 안 되면 이 사람은 마음속에서 잔치가 있을 수 없다.
자기에게 말씀의 이치가 와서 ‘번쩍’ 하고 깨달은 경험이 있는 사람은 마음속에서 그 맛을 또 보려고 하는 애탐이 있게 된다. 마음속에서 잔치가 있는 사람은 진리이치를 깨닫는 사람이다. 잔치란 기쁨이다. 기쁘면 행복하고, 세상의 염려 근심과 걱정과 어두움이 물러간다. 이런 잔치가 없는 사람은 이룰구원 면의 구원이 없다.
마르다는 예수님과의 식사자리를 위해 몸으로 물질로 활동으로 수종을 들고, 나사로는 예수님 옆에 앉았다. 살아난 나사로가 주님 옆에 앉아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베다니에 오셔서 생명을 살리신 예수님의 발걸음이 증거가 된다. 그리고 마르다와 마리아의 입장에서는 자기 오빠가 살아나서 예수님과 같이 식사를 하는 게 얼마나 보기가 좋은지 마르다는 음식으로 물질로 마음과 정성을 다한다.
만일 예수님과 식사를 하는 나사로가 마음이 거듭나지 못해서 ‘반찬이 왜 이렇게 싱겁냐? 국은 왜 이렇게 짜냐?’ 라고 하고 있고, 여동생 마르다는 ‘먹기 싫으면 먹지 말아라. 주는 대로 먹어라’ 하고, 부엌에서 그릇 깨지는 소리가 나고, 마리아는 자기 방에서 화장을 하느라고 속옷 바람으로 거울 앞에서 얼굴을 두드리고 있다면 예수님의 마음이 어떨까? 말하자면 절친한 친구 집에 갔는데 친구의 아내가 자기가 온 게 못마땅해서 틱틱거리고, 밖으로 나가고 하면 손님의 마음이 어떨까? 두 번 다시 그 집에 안 갈 거다.
신령천국에서 어느 누가 예수님 바로 옆에 앉아있다면 천국의 성도들이 누가 봐도 그렇게 보기가 좋다. 그러나 천국에는 마귀의 마음을 가진 자는 없는 거지만 가정을 한다면 마귀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이걸 본다면 그렇게 보기가 싫은 거다.
사람이 세상을 사는 것은 살아가면서 배우고 듣고 깨닫고 잘못된 것은 고치면서 서로 간에 훈훈하고 따뜻한 사랑이 오가야지 모든 면에 이기적으로 산다면 자기가 어려울 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 평소에 가깝지 않은데 도와달라고 하면 도와주겠느냐? 이렇게 예수를 믿는 사람이 많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자원적 순종이다. 마음이 죽어있는 사람은 감각이 없다. 진리의 말씀에 생명이 살아난 사람은 감사가 나오고,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하는 찬송이 나온다. 인격 면에서 감사를 하면 사람이 순화가 되고 따뜻한 사람이 된다. 사람의 말이 가시 같으면 이 사람에게는 사람이 붙지를 않는다. 교만한 사람은 높은 산의 바위에 나무나 풀이 안 자라듯이 사람이 안 붙는다. 빨리 흐르는 물에는 고기가 살지 않는다. 우리는 이룰구원 면에서 지혜롭게 생활을 해야 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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