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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요12: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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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김경형목사 |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2장 3절-6절: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줄 가룟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3절: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마리아가 지극히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다. 문헌에 보면 이 향유는 지구에서 제일 높은 산, 올라가기 힘이 드는 히말라야에서 난다고 한다. 목숨을 걸고 채취를 해야 하니 그만큼 귀한 거다. 아무 것도 섞이지 않은 지극히 순전한 300데나리온이다.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의 품삯이라면 300일 분의 금액이다.
마리아에게 이 최고급 향유는 처녀로서 시집갈 밑천이라 할 수 있겠는데 이것을 예수님께 전부 드렸다. 시집갈 밑천이라면 자기 꿈이나 미래의 행복이 다 들어있는 것이니 마리아의 일생이 다 들어있다고 할 수 있다. 자기의 미래를 위해 준비한 거지만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것을 보면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구원을 위해서라면 언제고 기쁨으로 드릴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거다. 그러니까 예수님으로 인해 다시 산 마리아는 주님을 사랑하는 농도가 점점 진해지다 보니 자기의 미래를 얼마든지 주님께 드릴 수 있을 정도로까지 주님을 사랑하게 된 거다. 이게 기름이다.
이런 마리아가 평소에 게으르거나 물질을 허비하며 살았겠느냐? 일반적으로도 부지런한 사람이 한 푼 두 푼 아끼고, 자기 먹을 것을 덜 먹으면서, 절제를 하면서 부자가 된다. 자기 노력이 없이 남의 덕으로 부자가 되면 내일은 어떻게 될 런지도 모른 채 헛으로 쓴다. 이런 사람은 미래를 보는 눈이 없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으니 향유냄새가 온 집안에 진동을 한다. 예수님께서는 가는 곳곳마다에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살리는 하나밖에 없는 귀한 생명운동을 하시는데 이 일을 위해 마리아의 무엇이 아까워서 드리지 못하겠느냐? 귀함으로 따진다면 예수님께서 천국에서 오셔서 이 땅에서 전도를 하는 그 발걸음이 마리아가 준비한 향유에 비하겠느냐?
이 귀한 사역을 하며 돌아다니시느라 먼지가 뽀얗게 묻고 땀과 피를 흘린 그 발을 어떻게 밥 먹은 그릇을 씻는 수세미로 씻을 수 있겠느냐? 그래서 기꺼이 자기 머리털로 씻어드렸다. 마리아가 자기의 온 정성과 생명과 마음을, 즉 전 인격, 전 삶을 다하여 예수님을 섬긴 신앙의 냄새가 2천 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의 코에까지 전해지는구나.
마리아의 언행심사는 하늘의 거다. 순 하나님의 신으로 된 거다. 이 신앙정신의 냄새를 맡는 사람에게서도 마리아의 그 영감이 움직이고, 그 감화 감동이 움직이고, 가정적으로는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의 가정처럼 천국의 잔치가 되는 거다. 한 집안 식구가 자기 위치에서 할 일을 다 하면 그 집은 평화롭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집인데도, 예수 믿는 사람인데도 마음속에 세상 육적 죄악성의 냄새가 자기 집 문밖으로 새어나가서 다른 사람들이 다 안다면 이런 가정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까? 나사로의 가정이 참으로 부럽다.
4절-5절: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줄 가룟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가룟유다의 이 말에서 시궁창 섞는 냄새가 난다. 그 분위기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사람들이 모인 장소에서 자기의 감정만 들어있는 말을 하면 분위기가 흐트러진다.
예수를 팔아넘겨서 자기 주머니를 채울 자가 어디에 끼어 있느냐? 이 잔치의 주격이 누구냐? 영의 눈으로 보면 악령의 분위기냐, 성령의 분위기냐? 우리는 이걸 볼 줄 알아야 한다. 그 분위기에 따라 말도 하고 안 하고 하는 건데 분위기 파악도 하지 못하고 함부로 말을 하다가는 눈칫밥을 먹게 되고 모자라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예수를 팔 자가 열두 제자들 중에 끼어있고, 배우는 사람들 중에 끼어있고, 또 마:10:1에 보면 사도들 중에 끼어있다.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가 끼어있으면 잘 모른다. 그러나 추리고 추려서 열두 사람으로 좁혀 들어가고, 여기서 또 추리면 최종적으로 가룟유다가 드러난다. 이걸 개인적으로 좁혀보면 자기 속에도 가룟유다와 같은 요소가 죽을 때까지 빠지지 않을 수도 있다. 자기 속의 이런 요소성을 죽이고 않고 계속 살게 되면 마귀의 일을 이루고 심판을 받게 된다.
요시야 왕이 전을 수리하다가 율법책을 발견해서 종교개혁을 했고, 유월절을 회복시켰다. 그래서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았으나 자기 속의 교만성을 버리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왕 바로느고를 보냈는데, 바로느고가 와서 하나님께서 유대가 아닌 앗수르와 싸우라고 했다는 말을 하는데도 요시야 왕은 우리 식으로 말을 하면 ‘하나님 앞에 신앙이 좋다면 나 이상 좋은 사람은 없는데, 하나님은 내 편인데 어디 믿음 없는 게 와서 하나님을 팔고 있느냐?’ 라고 하면서 바로느고를 대적하다가 므깃도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고 39세의 나이로 죽었다. 요시야 왕은 종교개혁은 했으나 질적인 면에서 신앙개혁은 못했다. 이게 안 되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애굽 왕 바로느고를 들어서 보여준 거다.
요시야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다면 바로느고가 요시야 왕을 죽이려는 술수로 유대가 아닌 앗수르가 자신들의 싸움의 상대라고 하고서 앗수르를 치는 척하면서 요시야를 죽이려고 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건 요시야에게 이 사실을 알게 해 주시고, 안 죽게 해 주신다. 그런데 요시야가 하나님의 뜻을 안 찾고 자기의 교만한 생각으로 변장을 해서 바로느고와 싸우러 나갔다가 죽었다. 요시야가 변장을 하고 전장에 나간 것은 요시야 왕의 마음과 정신에 인간적인 변장술이 들어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거다.
종교의식을 크게 했다고 해서 요시야의 신앙이 좋은 거냐? 이렇게만 보면 안 된다. 인간적인 교만과 술수가 들어있는 요시야가 아무리 변장을 해도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신앙의 마음이 아니니 아닌 말로 하나님께서는 바로느고가 어느 방향으로 활을 쏴도 화살이 요시야 왕의 가슴으로 날아가게 하신다.
돈을 좋아하는 목사 속에는 세상성이 들어있고, 자기의 노후대책이 들어있다. 이런 목사는 지식만 팔아먹고 자기는 변화가 안 된다. 가룟유다가 제자들과 사람들 가운데 끼어 있으니 사람들이 가룟유다의 속을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건과 상황에서 그 속이 다 드러나게 하신다.
스승을 파는 가룟유다 한 사람으로 인해 열한 제자들이 오해를 받게 된 것처럼 기독교인 한 사람으로 인해 기독교인 전체가 욕을 먹을 수도 있다. 사람은 자기 속에 들어있는 대로 밖으로 나오게 되어있다. 속은 도둑인데 남을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 나올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훔치고 도둑질하는 일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마리아가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것은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의미가 들어있다. 그런데 가룟유다는 주님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생각한다. 향유를 삼백 데니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고 하는 것은 주님이 할 말이지 가룟유다가 나서서 할 말이 아니다. 그런데 왜 자기가 이 말을 하느냐? 이건 건방지고 교만한 거다.
안 믿는 세상사람들이나 육적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을 위해 값비싼 향유를 부어드리는 것은 낭비로 여겨지고 가룟유다의 말이 일리 있게 들린다. 그러나 낭비 같으나 주님의 신분과 사역을 놓고 보면 살리는 운동에 드리는 거다. 마리아만이 아니라 자기의 모든 언행심사를 사망운동이 아닌 살리는 운동에 바치면 하나님께서 그걸 받으셔서 이 사람을 영원히 빛나게 기념되게 하신다.
그런데 이런 것은 낭비로 보이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뭔가를 많이 주면 영광을 돌리겠다고? 이건 영광이 뭔지도 모르고 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속성적 구원을 모르면 큰 건물을 짓고, 사람이 많이 모이고, 활동을 크게 하는 것을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한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의 속을 들여다보면 전부는 썩을 세상이 가득 들어있다.
가룟유다의 말은 안 믿는 사람들이나 세상 속화된 채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옳다고 하겠지만 그런데 주님께서 가룟유다의 숨은 마음을 성경을 통해 밝혀놓았으니 우리는 밝혀놓은 것을 보면서 예수 믿는 사람 속에 세상의 물질 이해타산이 들어있으면 어떤 상황에서 말씀 팔고, 예수를 팔고, 예수를 부정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영의 눈으로 보는 이런 정신 사상의 이치를 알아야 한다.
6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헌금 궤에 넣은 돈을 훔쳐 간다는 게 실지로 헌금 궤의 돈을 훔치는 것만 아니라 믿는 사람이 신앙하는 위주와 목적이, 가르치는 위주와 목적이 세상물질의 누림성으로 들어있는 것도 같은 의미가 되는 거다. 용어야 다르지만 질은 똑같다.
시간 속에 들어있는 것은 다 물질이요, 물질성이니 믿는 사람이 세상 물질성적 소원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가룟유다처럼 돈에 욕심을 품고 있는 거다. 이러면 자기가 어려우면 얼마든지 예수를 팔아치우게 된다. 안 그렇다가 아니라 이치가 이렇게 되게 되어있다. 믿는 사람의 마음이 ‘신앙이다. 아니다’ 하는 게 종이 한 장 차이라서 우리가 이 면에 둔하면 ‘아차’ 하다가는 신앙에서 벗어나게 된다.
목사가 자기 집도 사고, 땅도 사고, 논밭도 사고, 자식들은 외국으로 보내고, 교회의 일보다 자기를 위한 일이 앞선다면 이런 게 다 가룟유다의 사상에 들어간다. 다른 말로는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사상과 같아서 땅에 묻어놓은 거다. 이러면 신앙에 유익이 없다. 깨달음에 유익이 없다. 물질은 사람을 위해 쓰고 깨달음을 위해 써야 인간창조의 목적에 맞는 거다. 일반적으로도 보면 타락된 세상이지만 지혜가 있는 부모는 논밭을 팔아서라도 자식이 공부하는 것에 투자를 한다.
예수 믿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 분수를 넘어서 사는 사람이 많다. 자기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면서 하나님의 것을 떼먹고서 ‘나중에 합쳐서 더 내면 되지’ 하다가 하나님께서 이자로 칠 배나 더 받아 가시면 어쩔 참이냐? 하나님께 드리기로 한 것을 ‘지금 급한 곳이 있으니 여기에 쓰고 나중에 이자를 붙여서 드리면 되지’ 하는 비뚤어진 신앙양심을 가지게 되면 세상 육위주 물질위주로 살게 되고, 이러면 나중에는 사람의 마음을 도둑질하는 도둑이 된다. 자기의 신앙양심을 속이면 반드시 세상위주 물질위주가 나온다.
도둑의 마음을 가진 가룟유다를 남이 죽였느냐, 자연사를 했느냐, 스스로 목숨을 끊었느냐? 주님께서 평소에 회개할 기회를 주셨는데 회개를 안 했다. 평소에 말씀을 잡고 신앙의 길을 가야 하는데 평소에 이게 없었다. 그 결과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리까지 갔다. 오늘날 자기를 훑어보면 어떤 자기인지 스스로에게 정답이 내려진다. 이게 성경이다. 우리는 이렇게 깨닫고 고치는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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