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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요12:4-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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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김경형목사 |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2장 4절-11절: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줄 가룟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4절-7절: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줄 가룟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무슨 말끝에 이 말씀을 하신 거냐? 앞에서 나사로의 여동생 마리아가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자 가룟유다가 이것을 보고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라는 말을 한 후에 이 말씀을 하셨다.
마리아와 같은 성도가 자신의 값비싼 것을 팔아서 주님에게 바쳤을 때 헌금 궤를 맡은 가룟유다가 마음속으로 ‘저거 내가 훔쳐 가야지’ 라고 했다면 가룟유다 스스로가 자신이 도둑이라는 것을 안다. 예수님께서도 가룟유다의 마음에 도둑이 들어있다는 것을 가룟유다보다 더 잘 아신다. 그런데 본문에 가룟유다의 마음에 도둑이 들어있다는 것을 말을 했기 때문에 우리가 가룟유다가 도둑이라는 것을 알지만 만일 이 말을 안 써놨다면 우리가 가룟유다가 도둑이라는 것을 전혀 알 수 없는 거냐?
믿는 사람이 헌금을 하던 뭘 하던 물질 이해타산적으로 들어있다면 이 사람은 신앙 면에서 다 도둑을 맞는다. 그리고 이런 마음으로 드린 물질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 그리고 이런 마음으로 드리면 영적 신앙 면에 유익이 없다. 믿는 사람이 육적으로 나가면 소원 목적이 세상이기 때문에 자기의 모든 것을 도둑맞는 거다.
주님을 위해, 진리를 위해, 천국복음을 위해 믿는다면 하나님의 선물과 은혜가 내려지지만 육적인 마음으로 믿으면 이 사람은 이룰구원이 없다. 구원이 없는 삶은 도둑맞는 삶이요, 믿음이 자라지 못하고, 그러니 시간과 물질을 들여서 열심히 하고서도 얻어맞는다. 왜냐? 멸망 길, 사망 길, 세상의 사고방식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세상사람들은 물질 이해타산으로 산다. 세상 속화된 교인들도 마찬가지다. 주님은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물질 이해타산으로 계산을 하니까 강도라고 하셨는데, 제사장들의 마음이나, 가룟유다의 마음이나, 오늘날 육덩이 신앙으로 나가는 사람들의 마음이나 신앙의 질이 똑같다. 이런 신앙은 요사스럽고 간사한 거다.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이 말은 예수님이라는 한 사람이 죽기 전에 장사를 준비하라는 육의 개념이 아니라 주님이 살아계실 때, 사람을 진리생명으로 살리는 천국복음의 일을 하실 때, 진리운동을 활발하게 하실 때 구원의 일을 열심히 하라는 거다. 이 일이 끝이 나면 못한다. 환난 핍박이 오면 못한다. 어두운 밤이 오면 못한다. 그러니 주님의 정신 사상의 움직임을 잘 봐야 한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이 늘 물질적인 것만 보고 듣고 마시며 살다 보니 육신에 찌들어서 어두움에 갇힌 채 이 면으로는 볼 줄을 모르고 생각이 안 들어가서 깨달을 것을 다 놓치고 자기의 일생을 헛 살다 가는 사람이 많다.
8절: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가난은 나라도 구제를 못한다는 말이 있다. 가난한 사람이 있으면 가진 사람들이 도움을 줘야 하겠지만 건강하고 움직일 수 있어서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일을 해서 먹고 사는 게 옳다. 사람은 자기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일을 해야 한다. 복음은 세상이 못하는 것을 하는 거다. 사람을 세우는 일은 세상이 못하기 때문에 주님이 오셔서 천국복음으로 사람을 바로 세우는 거다.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기간이 있다는 거다. 진리가 있는 동안에, 주님이 있는 동안에 주님으로부터 구원의 효력을 봐야 한다. 주님이 없는 곳에서는 말씀으로 인격화 자체화 되는 게 안 된다. 그런데 기독자들이 이걸 생각을 못해서 진리의 교훈이 아닌 곳에서 신앙생활을 하니 자기의 노력봉사 충성봉사를 다 도둑맞는다. 이걸 어떻게 아느냐? 열심히 충성봉사를 했으나 깨닫는 게 없는 게 그 증거다.
선악과 먹고 타락되고 저주받은 세상은 항상 환난과 핍박과 시련과 연단과 걱정과 근심과 빈부가 교체된다. 세상이 끝날 때까지 이 일이 지속되는 곳이 세상이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자기가 원치 않아도 사계절이 반복이 되고 사건 환경이 늘 자기를 스쳐 간다. 안 믿는 사람은 물론이고 믿는 사람인데도 이런 세상에 살면서 돈만 알고 남이 대우해 주는 것만 알지 하나님 앞에 인격이 바로 되는 것은 거의가 생각을 못한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머리에 값비싼 향유를 부어드리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은 것은 마리아에게 있는 최고의 것을 주님께 바친 거다. 이것을 나에게 적용을 해서 말을 하면 자기에게 진리의 교훈이 오면 이것은 자기가 사는 역사요 살리는 역사이니 이 일이 잘 되도록 자기의 전 인격을 다해서 순종하라는 거다. 생명의 일을 자원적으로 하면 이것은 하늘나라와 직결이다. 하나님과 직결이다. 그 성질은 하나님과 의사단일로 된 것이기 때문에 생명에 직결이다. 하나님의 본질로 된 것은 그대로 나타나게 하는 게 하나님의 공의다.
신15:에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라고 했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보면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도우라는 말씀이지만 성경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말씀이 가난한 자에게 말씀을 나누어 주라는 거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계속 부어주신다. 하나님의 것을 남에게 주려면 자기가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물질 이전에 영적인 면을 먼저 보신다. 믿는 사람이 영적인 면에 가난에 찌들어 있는데 이 면에 욕심을 내지 않고 물질에 욕심을 내서 사람의 마음을 도둑질 한다면 이 사람은 저주다. 주님의 이름을 팔아서 사람의 마음을 도둑질하는 것은 저주다. 가룟유다가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라고 한 것은 영적인 뜻이 아니라 육적인 뜻으로 말을 한 거고, 자기가 훔쳐 가려고 한 말이다.
신15:에서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라고 하는 말씀에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첫째는 애굽 같은 세상을 탈출하여 약속의 땅을 향해 구원을 이뤄가는 형제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거다. 두 번째는 교회에 나오면서 소원 목적이 세상에 붙은 사람을 도우라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주님의 뜻을 찾아 살아볼까?’ 하는 사람을 도우라는 거다.
세 번째는 육신의 형제들이 있다면 교회로 짐을 지우게 하면 안 되고 교인 중에 신체상 활동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있다면 도와야 한다는 거다. 육신은 건강한데 게을러서 어렵게 산다면 이 사람은 정신을 차려야 한다. 구원이 있는 생애인데 네 건강을 어디에 낭비를 하느냐? 믿는 사람은 손발 하나를 움직여도 주님께 영광이 될 수 있는 주님의 일을 위해 움직여야 한다.
네 번째는 자기의 몸은 예수님께서 피로 사신 주님의 것이니 자기의 몸을 자타의 이룰구원에 이익을 주는 일에 써야 한다는 거다. 다섯 번째는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서 자타에 고통을 주고 교회로 염려가 되게 하면 안 된다는 거다. 우리의 이룰구원은 멀리 있거나 어려운 게 아니다. 자기의 하루하루의 삶에서, 자기의 환경 가운데서 얼마든지 이뤄갈 수 있는 거다. 못할 것을 하라고 하는 게 아니다.
9절: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렸다는 소문이 많이 퍼져 나갔다. ‘예수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예수님께서 어디에 계시느냐? 죽은 곳에 계시느냐, 산 곳에 계시느냐? 산 곳에 계신다. 그렇다면 무엇이 산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러면 무리가 어디로부터 왔다는 거냐? 나사로가 살아난 것을 알고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집, 예수님을 모시고 잔치를 하는 집, 값비싼 히말라야의 향유의 향기가 나오는 집으로 왔다. 그러니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있는 집이요, 구원이 있는 집, 즉 최고의 좋은 것이 다 모인 곳으로 온 거다. 이런 곳에 주님이 계신다.
무엇을 안다는 거냐? 앞에서 말한 최고의 것을 안다는 거다. 그 신앙사상을 안다는 거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런 곳을 찾는다. 죽은 것이 살아난 집을 찾는다. 이게 옳은 성도다. 무리가 모인 것을 하나님의 주권 섭리로 보면 하나님께서 보내심이고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진리이치의 복음의 소식을 듣고 나오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10절-11절: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제사장들이 계:에서 용이 해를 입은 여자를 해코자 하듯이 예수님만 아니라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를 한다. 눅: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찌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라고 했는데, 말씀을 영적으로 알아듣지 않으면 사람의 육신이 살아난 것을 보아도 주님을 안 믿는다는 거다. 이것을 영적으로 보면 말씀으로라야 죽은 신앙이 살아난다는 거다. 이걸 말하려고 나사로를 보여주는 거다.
살아난 나사로가 예수님 옆에 앉아있는 것은 생명이 없는 죽은 신앙이라도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 그 신앙이 살아난다는 것을 말해준다. 모든 성경도 그렇지만 나사로가 살아난 것을 영적으로 알아듣지 못하면 살아난 나사로를 보아도 예수님이 안 믿어지는 거다. 안 믿으려고 해서가 아니라 자기 속에 말씀이 있을 곳이 없으니 귀로 듣고 눈으로 보면서도 마음이 주님께 안착이 안 되는 거다. 예수님이 안 믿어지는 거다.
오늘날 교인들이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 예수 믿으면 죽어서 천국에 간다’ 하는 정도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마르다나 마리아나 나사로도 이런 정도의 신앙을 가지고 있고, 바리새 교인들도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를 믿으면 자기의 영이 살고, 깨달음적으로 성장이 되는 게 있는 건데 예수 믿으면서 이걸 모르는 사람이 많다는 점이다.
주님의 구속으로 살아난 영은 다시는 안 죽고, 말씀을 받고 말씀을 따라 살면서 하나님의 의사단일로 만들어지면 육신이 죽을 때 그 영은 천국에 가고, 마지막 때에 영과 육이 단일체로 변화 부활을 입게 되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 살아난 자기의 영을 못 믿으면 이런 게 안 믿어지는 거다. 이런 사람은 몸이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을 볼지라도 영이 살아나는 게 안 믿어진다. 왜 안 믿어질까? 알면서 일부러 안 믿는 게 아니라 안 믿어져서 못 믿는 거다.
대제사장들이 왜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하는 거냐? 나사로로 인해 많은 사람이 자꾸 예수를 믿기 때문이다. 나사로가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를 하지 않고 살아만 있어도 예수님이 증거가 된다.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이 이 교훈을 받고 마음이 변화를 받고, 심령이 살아나고, 하나님의 속성으로 만들어지면 이로 인해 예수님이 증거가 된다. 그런데 믿는 사람이 자꾸 이런 것을 구부러뜨리고, 내버리고, 생각이 없이 사니까 자기로 통해 예수님이 증거가 안 되는 거다.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 백성들이 살아난 나사로를 보고 자꾸 예수님 쪽으로 가기 때문에 이러다가는 큰일이 나겠다고 생각을 해서 나사로까지 죽이려는 건데, 사람이 살아났으면 반갑고 잔치를 벌릴 일이고 춤을 출 일인데 영이 살아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니 나사로를 죽이려고 하는 거고, 예수님을 안 믿는 거다.
예수님의 역사가 영적 실상을 위함이냐, 물질적 실상을 위함이냐? 영에 속한 일이냐, 육에 속한 일이냐? ‘예수=구원’의 일을 방해자들이 이방인들이냐,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냐? 평신도들이냐, 종교 지도자들이냐? 믿는 자들이 박해를 한다. 안 믿는 사람들은 방해를 못한다. 사단 마귀 짓을 하는 자들이 안 믿는 사람들이냐, 믿는 사람들이냐? 예수님은 신령계에서 온 고로 신령적인 일을 하신다. 마귀가 예수님께 세 가지 시험을 쳤듯이 교회에서 실력 없는 자들을 유혹하지 않고 교회를 인도하는 목사를 꾀인다. 그래야 수입이 많다. 목사가 잘못되면 교회는 같이 넘어간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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