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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요12:14-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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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김경형목사 |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2장 14절-19절: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이는 기록된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거한지라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찌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 하니라.
14절-15절: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이는 기록된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예수님께서 한 어린 나귀를 타셨는데, 누가 이 어린 나귀를 제공했을까?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님의 일에, 진리의 운동에 수종을 들면 그만큼 은혜가 내려진다. 주님을 맞으면서 마르다는 집에서 기쁜 마음으로 잔치로 수종을 들고, 이 잔치를 영의 눈으로 보면 뜻이 또 나온다. 어떤 성도는 지극히 값진 향유로 수종을 들고, 어떤 성도는 나귀를 이용하도록 수종을 든다. 남아 돌아가는 것으로 수종을 드는 게 아니다.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시온은 적들이 감히 쳐들어올 수 없는 요새요 다윗의 통치가 있었던 곳이다. 이것을 사람의 정신 사상 면으로 보면 그런 곳에 살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그런 곳을 도읍으로 정하지 미련한 사람은 그러지를 못한다. 그러니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정신의 수준과 신앙의 수준을 알 수 있는 거다. 사람이 높이 올라갔다고 할 때 무엇으로 올라갔느냐? 물질적 요소로 올라간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닌 마귀의 역사지만 진리이치로 높아지고 무장이 되었다면 하나님의 신으로 된 거다. 이것을 보면 ‘이 사람이 평소에 어떻게 살았구나’ 하는 걸 알 수 있는 거다.
구약에서 보면 시온을 이방 왕이 다스리고 있었다. 그런데 왜 다윗으로 된 것처럼 말을 하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당신의 백성에게는 모든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시기 때문에 이방인들이 아무리 좋은 것을 가졌어도 어떤 방편으로건 그걸 뺏어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신다고 하는 것을 말해주는 거다. 예수를 믿어도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짓을 자꾸 하면 하나하나 빼앗긴다. 모든 지식도, 지혜도, 가진 것도 다 빼앗기고 나중에는 비참으로 들어간다. 자기 밭에 풀이 무성하면 오만 짐승이 기어 다니는 것과 같다.
적군이 감히 쳐들어올 수 없는 곳을 신앙사상으로 말을 하면 지혜지식성과 도덕성과 능력성이 차원 높은 신앙사상이다. 이런 차원 높은 신앙은 주님을 왕으로 모시기 때문에 차원 높은 그 분이 이 사람을 다스리니 자기에게 손해될 게 없고 죽음이 두렵지 않다. 왜냐? 주님 당신이 죽음을 이기시고, 시험을 이기시고, 마귀를 정복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는 주님의 손아귀에 있다. 그래서 주님을 왕으로 모시는 신앙자들은 주님을 호산나로 맞아들인다. 율법사나 서기관들은 이 분을 왕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을 보고 두려워하고 전쟁을 보고 두려워한다. 세상의 어떤 요소를 보고 두려워한다.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나귀 새끼는 군마가 아니다. 나귀를 타고 전쟁을 할 수 없다. 장군이 군마를 타고 군중들 앞에 나타나면 위엄이 가득하고 위풍당당하다. 왕이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겸손의 상징이다. 그렇다면 겸손의 상징인 이 나귀를 제공한 사람의 신앙은 어떨까? 건방질까? 이 사람은 마음속에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있는 거다. 예수님은 이 사람의 신앙을 알기에 당신께 드린 나귀를 쾌히 사용하셨다. 그 마음을 기쁘게 받아주신 거다. 사람이 주님 앞에서 겸손해야 은혜를 받고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역사를 하신다.
나귀를 제공한 사람은 신앙의 겸손이 높다. 주님께서는 차원 높은 신앙자들이 딸처럼 사랑스러워서 이런 고상한 신앙자들에게 왕으로 임하신다. 그래서 ‘시온 딸아’ 라고 하신 거다. 자기 집의 딸의 마음이 담이 없는 집과 같아서 자유분방하게 산다면 그 마음가짐이나 정신가짐이나 자기를 단속함이 사랑스럽겠느냐? 성경에서 ‘시온 딸’이라고 할 때는 그 인격의 수준이나 정신의 수준이 고차원이고 귀함을 말한다.
16절: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나마 다행이다. 제자들이 처음에는 이 일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대로 되는 거로구나’ 라고 했는데, 이 일이 어디에 기록이 되었느냐 하면 슥9:9에 기록된 게 생각이 난 거다. 그래서 ‘성경대로 이 일이 임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을 한 거다.
믿는 우리도 ‘어느 말씀이 나에게 예언으로 임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빨리빨리 알아차려야 한다. 베드로가 죽는 데까지 주님을 따라간다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오늘 밤에 닭이 두 번 울 때 세 번 나를 부인한다’ 라고 했는데, 베드로가 자기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신 일이 임할 때 순간적으로 깨닫고 밖에 나가서 통곡을 했다. 그러나 못 깨닫는 자는 자기가 이런 일을 하면서도 모른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 이 말이 예수님께서 생각이 났다는 말인지, 제자들이 생각이 났다는 말인지, 유대인들이 생각이 났다는 말인지, 유대 율법사들이 생각이 났다는 말인지? 제자들이다.
17절-18절: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거한지라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호산나로 예수님을 영접한 자들은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무덤에서 살아나온 것을 본 자들이다.
사람이 완전히 죽어서 무덤에 묻혔는데 이렇게 죽은 자를 살려낸 이는 창세 이후로 예수님 외에는 없다. 그래서 ‘호산나’ 하면서 왕으로 모시려고 하는 거다. 우리도 이룰구원의 이치를 깨닫고 예수님의 구원사역을 깨달으면 예수님을 왕으로 맞아들이게 되고, 예수님은 왕으로 임하신다. 칼을 들고, 몽둥이 들고 임하는 게 아니라 나귀를 타고 겸손의 왕으로 임하신다. 너를 겸손으로 대해준다는 말이다.
신체 면이나 정신 면에 각종 병이 있는 사람을 온전케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분을 만나본 자들이 이 소문을 내니 많은 사람들이 이 소문을 듣고 ‘이번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오시지 않겠느냐?’ 라고 하며 기다리고 있다가 예수님께서 오시니 큰 무리가 모여서 호산나로 맞아들인다.
성경에 어떤 사건이 일어날 것이 기록이 되었다면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성경을 본 사람은 성경에 예언된 사건이 자기 앞에서 일어나면 예언된 진리생명의 말씀의 약속을 믿고 그 사건의 결과를 미리 알고 그 사건에서 자기의 구원에 유익이 되는 쪽을 선택한다. 우리에게는 사건이 진행이 되는 것을 보면서 ‘너는 어떤 자들에게 속해있느냐? 너는 무엇을 보고 어디에 가 있느냐? 너는 어느 정신, 어느 사상, 어느 입장에 서서 살고 있느냐?’ 하는 게 놓여져 있다. 이런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면 이 사람은 불의적 사망적으로 살아가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성전을 헐라. 삼 일 만에 일으키리라’ 라고 했고, 발을 씻기는 장면에서는 ‘너희가 후에는 알리라’ 라고 하시는 등 당신의 창조물들을 비유로 들어서 하나님의 영적인 뜻을 알게 하시는데, 이런 것들을 통해 영적으로 깨닫지 못하면 이 사람은 눈앞에 나타내 보여줘도 모른다. 모르면 성경에 예언된 것이 자기 눈앞에서 이뤄져서 지나가는데도 모르게 된다. 지금도 앞으로도 과거에도 언제든지 성령과 악령이 자기 안팎에서 역사를 하고 있는데도 이걸 모르면 모르는 거다.
19절: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찌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 하니라.’ 이들은 세례요한이 물세례를 줄 때도 사람들이 세례요한에게 가지 못하게 방해를 했고,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는 일에도 방해를 하면서 죽일 모의를 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우리의 구원의 일을 인간들이 어떤 방법으로 막겠느냐? 어떤 방법으로도 못 막는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그 어떤 방해도 다 구원에 이용 활용해 버리는데 무슨 수로 막겠느냐? 방해를 하면 할수록 이용만 당하고 형벌만 누적이 될 뿐이다.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 일을 크게 벌리면 벌릴수록 그들의 잔꾀가 다 구원에 이용되도록 하신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타락된 이후로 모든 인간은 그 어떤 일을 해도 그리스도로 통한 의가 아니면 불의요, 생명이 아니면 사망성인데 마지막 그날까지 이것이 계속 진행이 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면 이 사람은 구원의 지식이 없는 거다. 이 구원의 지식이 창세 이후로 선지자들의 입으로, 신앙의 선조들의 믿음으로 계속 내려가고 있는데 이걸 모르는 자들은 한 마디로 물질적 개념으로 살게 된다. 이방인들도 그렇고, 하나님의 백성들도 이 지식을 모르면 물질개념으로 살게 된다. 그렇다면 오늘날 자기의 신앙의 성질은 어느 쪽으로 가까운 것 같으냐?
믿는 우리가 진리생명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지혜지식성과 도덕성을 가지면 세상사람과 대립이 없다. 그러나 일반 지혜지식이나 도덕성으로 관계성을 가지면 많은 사람을 죄 아래 가두게 되고 대립을 하게 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간을 구원하고 죄에서 자유케 하는 일을 막는 교회가 있다면 이는 애굽사상에 물이 든 거고 이방우상을 섬기는 바벨론에 물이 든 거다.
계:에 보면 물을 타고 앉은 교회도 있고, 짐승을 타고 앉은 교회도 있고, 산을 타고 앉은 교회도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생명운동을 방해하는 자들이요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지 않은 교회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의 이 일에 방해자들이 이방인들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런 자들을 향해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하셨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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