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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 출처 : | 최주훈 목사 페이스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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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력?>
매년 12월이 되면 한국교회 강단에는 성탄 메시지가 올라온다. 부활절이 오면 부활 설교를 한다. 그런데 한 가지 묘한 점이 있다. 성탄절과 부활절 '사이'에 무엇이 있느냐고 물으면, 대부분의 교인은 물론이고 적지 않은 목회자도 얼버무리거나 입을 다문다. 그 '사이'가 텅 비어 있는 것이다. 강단에서 다루는 주제는 담임목사의 관심사나 시사 이슈, 혹은 개인의 영적 성장에 관한 연속 강해로 채워진다. 교회가 2천 년 동안 신앙의 리듬으로 삼아 온 흐름, 즉 교회력이라는 시간의 지도를 대개의 한국교회는 갖고 있지 않다.
교회력(Church Year 또는 Liturgical Year)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구속 사건을 한 해의 주기 안에 배치한 시간 체계다. 서양에서는 이를 '전례력'이라고도 부르는데, 전례(典禮, Liturgy)란 교회의 공적 예배 행위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니, 전례력이란 곧 '예배의 달력/ 일정표'라는 뜻이다. 이 달력은 대림절(Advent)로 시작하여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성주간, 부활절, 승천일, 성령강림절을 거쳐 다시 대림절로 돌아오는 순환 구조를 갖는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는 것으로 한 해를 열고, 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의 임재를 거쳐 다시 기다림으로 돌아오는 이 원(圓)은 단순한 달력이 아니라 복음 전체를 시간 속에 새겨 넣은 구조다.
왜 필요한가
시간을 어떻게 구획하느냐는 단순한 실용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세계관의 문제다. 유대교의 시간은 안식일과 절기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이슬람의 시간은 히즈라력의 리듬을 따른다. 세속 사회의 시간은 경제 주기와 국가 기념일이 지배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시간은 무엇을 중심으로 돌아가야 할까? 교회력은 이 질문에 대한 초대교회 이래의 응답이다.
교회력 기원은 놀라울 만큼 이르다. 이미 2세기 무렵, 초세기 교회는 매주일의 예배를 '작은 부활절'로 지켰고, 유월절과 연결된 연례 부활 축제(Pascha)를 가장 중요한 절기로 삼았다. 4세기에 이르면 성탄절이 등장하고, 대림절과 사순절이라는 준비 기간이 형성된다. 이 과정은 위로부터의 제도적 결정이 아니라, 신앙 공동체가 자연스럽게 복음의 이야기를 시간 안에 살아내려 한 결과였다. 중세를 거치면서 교회력은 지나치게 복잡해진다. 성인 축일이 그리스도 중심의 절기를 잠식하는 문제가 이때 생겼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를 비판했지만, 루터는 교회력 자체를 폐기하지 않았다. 그는 성인 축일의 과잉은 걷어내되, 그리스도의 생애를 중심으로 한 절기 구조는 오히려 복음 선포에 유용한 틀로 여겨 보존했다.
성서정과
교회력과 짝을 이루는 중요한 도구가 있다. 바로 성서정과(Lectionary)다. '정과(正課)'란 '정해진 과업'이라는 뜻으로, 교회력의 흐름에 따라 매 주일 읽어야 할 성경 본문을 체계적으로 배열한 목록이다. 같은 개념을 '성서일과(聖書日課)'라고도 부르는데, '일과'는 '날마다의 과업'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 매일 혹은 매주의 예배에서 읽을 본문이 지정되어 있다는 뉘앙스를 갖는다. 실질적으로 성서정과와 성서일과는 같은 대상을 가리키며, 교단이나 학자에 따라 선호하는 용어가 다를 뿐이다.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쓰이는 성서정과는 개정공동성서일과(Revised Common Lectionary, RCL)로,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중심으로 하는 3년 주기(A년, B년, C년)로 구성하고, 여기에 구약, 시편, 서신, 복음서의 네 본문을 매주 배정한다. 이 체계는 가톨릭, 루터교, 성공회, 장로교, 감리교 등 폭넓은 교단이 공유하고 있다. 말하자면 서울에 있는 중앙루터교회와 뉴욕의 감리교회, 런던의 한 성공회 성당이 같은 주일에 같은 성경 본문을 읽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깊다. 성서정과를 따르는 교회는 그 교회 담임목사의 관심 영역에만 갇히지 않고, 전 세계 교회와 함께 성경 전체를 순환하며 읽어나간다.
한국교회에 없는 시간
한국 개신교의 주류를 형성한 장로교와 감리교 전통은, 아이러니하게도 교회력과 성서정과의 유산을 갖고 있다. 장로교의 뿌리인 칼뱅은 교회력에 대해 루터보다 비판적이었지만, 20세기 들어 스코틀랜드와 미국 장로교는 교회력을 적극적으로 수용했고, 심지어 개정공동성서일과의 개발에도 깊이 참여했다. 한국에 복음을 전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사역하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는, 미국 장로교 내에서도 교회력에 대한 인식이 아직 본격화되기 전이다. 한국 감리교의 경우도 사정은 비슷하다. 이런 이유로 한국교회는 교회력이라는 유산을 '받지 못한 채'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무엇이었을까? 한국교회의 한 해는 대체로 신년감사예배, 부활절, 어버이주일,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 성탄절이라는 몇 개의 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점들 사이의 넓은 공백은 담임목사 개인의 설교 계획으로 채워진다. 물론 뛰어난 목회자는 그 공백을 탁월하게 채울 수 있다. 그러나 구조적으로 보면, 이는 교회 전체의 시간을 한 개인의 신학적 관심과 역량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만드는 취약한 체계다. 어떤 목사가 바울 서신을 좋아하면 교회는 몇 년간 바울만 듣고, 구약에 관심이 적으면 구약은 강단에서 사라진다. 교인들이 성경의 어떤 부분을 듣고 어떤 부분을 듣지 못하는지가, 복음의 전체 내러티브가 아니라 한 사람의 취향에 의해 결정되는 셈이다. 일종의 편식을 피할 수 없다.
시간의 지도
교회력을 사용한다는 것은 교회에 하나의 시간 지도를 펼치는 일이다. 대림절이 시작되면 교회는 함께 기다림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고, 사순절이 되면 회개와 자기 성찰의 시간을 공유한다. 부활절이 오면 그것은 단발적 이벤트가 아니라 50일간의 부활 축제(Eastertide)로 이어진다. 성령강림절 이후의 긴 녹색 시기(일상 시기, Ordinary Time)는 제자도와 신앙의 성숙을 다루는 시간이 된다. 이 흐름 안에서 성서정과가 제공하는 매주의 본문은 교회 강단을 목사 개인의 편향에서 벗어나 복음 전체의 지형 위를 걷게 만든다.
여기서 오해 한 가지를 바로 잡자. 교회력은 '형식'이 아니다. 그것을 형식으로 보는 시선이야말로 한국교회가 교회력을 외면해 온 이유 중 하나다. '그런 건 가톨릭이나 하는 것 아니냐', '성경에 대림절을 지키라는 말씀이 어디 있느냐'는 반응을 심심치않게 만난다. 맞는 말이다. 교회력은 성경에 안 나온다. 하지만 교회력은 성경에 명시된 명령이 아니라, 교회가 성경의 이야기를 시간 속에 살아내기 위해 발전시킨 신앙선배들의 지혜 유산이다. 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표현을 빌리면 이것은 '아디아포라(adiaphora)', 즉 성경이 명하지도 금하지도 않은 자유의 영역에 속한다. 그런데 바로 그 자유의 영역에서 교회는 복음을 더 풍성하게 선포할 도구를 찾아왔고, 그 가운데 교회력은 가장 오래되고 검증된 도구 가운데 하나이다.
교회의 시간
이 글을 쓰는 이유는 한국교회가 당장 교회력을 전면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이 글은 일종의 초대이다. 매주일 무엇을 설교할지 고민하는 목회자에게, 2천 년 교회가 함께 읽어 온 본문의 흐름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 성탄절과 부활절 사이의 텅 빈 시간에, 사실은 풍성한 신앙의 계절들이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전하고 싶다. 내 교회의 강단이 전 세계 교회의 강단과 같은 본문 위에 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다.
교회력을 따른다는 것은 결국 이런 고백이다. 우리의 시간은 우리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며, 우리의 이야기는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이야기 안에 놓여 있다는 고백, 시간을 어떻게 사느냐가 신앙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교회가 시간을 어떻게 구획하느냐는 그 교회의 신학을 드러내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 질문을 던져볼 만하다. 당신의 교회가 따르고 있는 시간표는 정말로 교회의 시간표인가?
글. 최주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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