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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 성경본문 : | 요12:20-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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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김경형목사 |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2장 20절-25절: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20절-22절: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대.’ 예수님을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가서 예수님에 대해 물으면 좋게 말을 할까, 나쁘게 말을 할까? 칭찬이 들어가고 덕스러운 말이 나올까, 까는 말이 나올까?
동방박사들이 유대 땅에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라고 하자 이 말을 들은 헤롯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하고 물으니 유대 베들레헴에서 난다고 했다. 그러자 헤롯이 동방박사들을 불러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라고 했는데, 이 말을 하는 헤롯의 마음속에서 무엇이 움직였을까? 사람이 남의 말을 하거나 들을 때는 자기 마음속에서 움직이는 게 있는 거다.
교인이 다른 교인을 만나서 대화를 할 때 자기가 다니는 교인이 몇 백 명 이상이 되면 ‘우리 교회는 교인이 많다’ 라고 하며 자랑스럽게 말을 할 거다. 우리 교회 교인들은 사람의 숫자나, 큰 건물이나, 목사님의 학벌이나 경력을 말하지 말고 자기가 깨달은 복음을 말을 하라.
안 믿는 사람이나 믿음이 없는 사람이 교회의 흉을 볼 수 있다. 이럴 때는 ‘너는 얼마나 잘 믿느냐? 너는 하나님 앞에 바로 사느냐?’ 라고 하면서 그 입을 틀어막아라. 같이 덩달아서 교회의 흉을 보게 되면 너도 같은 수준이 된다. 이건 마귀의 놀음에 같이 노는 거다. 그리고 누가 믿음이 좋은 사람을 까 내릴 때 나도 그 사람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덩달아 까 내리지 말아라. 같이 까 내리다가는 너는 얼마 안 가서 하나님께 얻어맞는 일이 나온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얼굴을 들겠느냐? 한 번 두 번 사건이 와서 이런 걸 알게 해 줬는데도 계속 그런다면 하나님께서 순식간에 졸지 간에 어떻게 처벌하실 런지를 생각을 하면 두려운 거다.
세상사람들은 선악과를 먹기 때문에 남을 까 내리고 자기를 올리는 습성이 있다. 그리고 자기를 올릴 때는 자기의 현재를 말하지 않고 ‘내가 왕년에 어땠다’ 라고 한다. 자기가 과거에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현재 별 볼일 없이 살고 있다면 자기의 화려했던 과거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
믿는 사람이 외식신앙을 가졌다면 생명과를 먹는 진리를 까 내리는 선악과 먹은 사상을 가진 거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의사적으로 하나님과 팽팽하게 대립이 되어있다. 이런 사람이 교회나 목사나 교인들에 대해 좋지 않게 말을 할 때는 단순히 개인감정으로 말을 하는 것으로만 보지 말고 진리를, 주님을 까 내리는 것으로 봐야 한다. 이런 사람은 복음에 대적자들이다.
진리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룰구원의 이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느 교회에 가더라도 주님을 자랑하고 신앙이 성장하는 이치를 전해야 한다. 그런데 그곳이 인본주의 교회이면 누가 진리를 전하면 ‘그건 네 믿음이고’ 하고 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바리새 교인들이 예수님을 보고 ‘그건 당신의 믿음이고’ 이런 식으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성격이나 성질이나 신앙지식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이다. 믿는 사람이 선악과 먹은 지식에서 나온 종교적인 옷을 입고 있으면 이리가 양의 옷을 입은 것과 같다. 이게 마지막 시대의 교회의 현상이다. 여기에 속으면 안 된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신앙은 질적인 면에서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된 구원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이들의 신앙은 아예 처음부터 뿌리부터 마른 신앙이다. 예수 믿는 신앙은 처음부터 기반을 잘 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룟유다에게 ‘처음부터 마귀니라’ 라고 했듯이 근본부터가 문제요 저주로 들어간다.
교회에 처음 들어오면 누구든지 안 믿는 정신이 그대로 들어있다. 예수를 믿으면서 마음과 소원과 목적을 예수님의 정신으로 바꿔나가는 거다. 그런데 목사부터가 예수 믿어서 세상에서 부자가 되라고 설교를 한다면 교인들이 안 고쳐진다. 이러면 간판은 교회라고 붙였어도 교회가 아니다. 교회란 영이 중생 된 사람을 말한다. 예수를 믿는다면 자기의 신앙을 뿌리부터 검토를 하고 믿어갈수록 뿌리가 살아나야 싹이 올라오고, 그 싹이 기둥이 되고, 가지가 커져서 열매가 나오게 된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성공이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사람성공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말씀을 따라 살면서 영원히 존귀 영광자요 영능의 실력자가 되는 게 성공이다. 물질개념으로 들어있으면 이 사람은 자꾸 예수 덕으로 세상에서 부자가 되고, 커지고, 넓어지는 것을 구하게 된다. 진리이치의 신앙은 전체가 아니라 개개인이면서 전체다. 개개인을 무시하면 전체가 무너진다. 그러니 예수 믿는 믿음은 ‘단체가 크다 작다. 조직이 있네 없네. 전통이다 정통이다’가 문제가 아니라 각자가 하나님의 진리생명의 본질로 만들어져야 한다.
진리를 가지고 자타를 볼 때 뿌리부터 마른 신앙을 알겠느냐? 이것을 알지 못하고 예수를 믿으면 신본주의도 모르고 인본주의도 모르게 된다. 이런 사람은 교회의 행사나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있으면 자기 세상을 만난 것처럼 날뛴다. 이건 신앙이 아니다. 사람이 주님의 성품으로 만들어져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그런다면 좋은 거지만 그렇지 않고 자기 기분 자기 감정에 취해서 그런다면 문제가 크다.
옳은 신앙을 가진 사람은 아무리 가난해도 그 중심이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 있다. 신앙 믿음은 정신만 바로 서면 물질이 있고 없고에 관계가 없이 성장이 된다. 오히려 가난할수록 튼튼히 자랄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표면적으로 볼 때 주님께서 가난한 자를 불렀을 수도 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보면 이적 기사를 보려고 따르는 사람이 있다. 또 예수이름으로 신비적인 것만 보려는 신비주의성이 있다. 이것은 귀신의 장난이요 마귀의 장난이다. 또 물질축복 중심으로 믿는 사람이 있다. 이건 믿음이 아니다. 또 예수만 보면 죽이려고 하는 외식주의자들이 있다. 진리를 죽이는 것은 예수를 죽이는 거다. 지금 말한 이런 자들은 사람의 외모 모양 껍데기 재산 직장 등을 우선시 한다. 눈으로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놓고 산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를 믿기는 믿는데 현재의 이룰구원을 몰라서 주님으로부터 통분히 여김을 받았다. 지금도 이런 신앙자들이 많다. 바리새 교인들은 부활을 믿는다. 마르다와 마리아도 부활을 믿는다. 그런데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는 예수를 따르지만 바리새 교인들은 예수를 따르지 않는다. 마르다와 마리아와 바리새인들이 부활을 믿고 있지만 이룰구원 차원에서 현재적으로 사는 것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것을 통해 이룰구원 차원에서 지금 사는 것을 가르쳐 주신 거다.
바리새 교인들은 율법도 지키고 제사의식과 순서와 절차를 다 지키지만 예수를 따르지 않기 때문에 항상 죄 아래 있다. 율법은 문자대로 지키라는 게 아니라 주님의 정신과 사상으로 만들어지라는 거고, 예수를 따르면 이렇게 되는 건데 바리새 교인들은 율법은 철저히 지켰지만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의 성품으로 만들어지는 게 없다. 그러니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예수님의 의사성과는 팽팽한 대립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이런 일이 많다. 별스런 교회가 많다.
이룰구원이 없는 교훈은 예수이름을 가지고 사람의 마음을 도둑질하는 간사성이다. 하나님 앞에서 알랑알랑 하며 사람의 마음을 도둑질하고, 헌금이라는 명목으로 갈취를 한다. 도둑질을 하는 방편이 여러 가지다. 펜대로 도둑질을 하기도 하고, 말로 도둑질을 하기도 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죄인에게는 법정에서 변호를 하지 않아야 하는데 변호사가 변호를 해주는 것은 죄인을 보호해주고 돈을 벌자는 거다. 그러니 누가 진짜 죄인이냐? 이런 게 세상이다. 죄가 있어도 변호를 잘하면 형이 감해지는 게 세상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말을 잘하는 게 소용없다. 진리대로 들어간다. 구원이치대로 말을 하는 게 말을 잘하는 거다. 이건 성령님의 감화로 되는 거다.
2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헬라인 몇이 예수님의 제자 빌립에게 말을 하고, 빌립은 안드레에게, 안드레와 빌립은 예수님께 전했는데 예수님의 대답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라고 했다.
어떤 뜻으로 이 말씀을 하셨을까? 1. 헬라인들과 유대인들이 합세해서 예수님을 죽일 것이라서 이 말씀을 했다? 2.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찾은 것을 좋게 여기시고 그들에게 미래적으로 많은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해 주겠다는 의미로 이 말씀을 하신 거다? 믿음의 선물을 받게 해 주겠다는 의미로 이 말씀을 하신 거다? 즉 이들이 당신의 말씀을 받고 존귀 영광자로 올라갈 것이라서 ‘너희는 내 영광이다’ 이런 의미로 이 말씀을 하신 거다?
3. 헬라인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보니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것을 알고서 예수님을 헬라로 피신시키려고 했는데 예수님께서 이 마음을 알고 ‘너희가 그런 계획을 해도 소용이 없다. 나는 인간구원을 위해 반드시 십자가에 죽을 거다’ 하는 의미로 당신이 십자가에 죽는 게 영광이라는 의미로 이 말씀을 하신 거다? 어느 거냐?
예수님께서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당신이 십자가에 달려야 구원사역이 성취되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을 말하는 거다. 당신이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놓고 ‘내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라고 하신 거다. 창세 이후로 아무도 이 일을 못했는데 오직 주님만이 이 일을 하셨으니 주님께 영광이다. 예수님과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인격적 관계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이뤄가면, 즉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고 예수님처럼 만들어지면 나도 영광이 되는 거다. 헬라인 몇이 예수님을 뵈옵고자 하는 말끝에 영광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이 헬라인들에게 많은 열매를 맺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기도 하다.
욥에게 하나님의 시험이 왔다.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자꾸 욥의 믿음을 자랑하니까 마귀가 ‘하나님이 돌봐주니까 그렇지요’ 라고 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러냐? 그러면 욥의 목숨은 건드리지 말고 신체를 쳐서 시험을 해봐라’ 라고 했다. 마귀가 이 말을 듣고 욥의 몸과 재산을 짓이겨 놓았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이런 시험을 허락하시는 것은 욥의 믿음이 그걸 다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욥이 아니면 그 시험이 감당이 안 된다. 욥은 그 시험을 다 이기고 더욱 영광스럽게 되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지금의 나에게 ‘너에게 욥과 같은 시험을 주마. 이기면 두 배의 복을 주겠다’ 라고 한다면 ‘알겠습니다. 나에게도 욥과 같은 시험을 주십시오’ 라고 하겠느냐, ‘나는 그 시험을 안 받고 그 복도 안 받겠습니다’ 라고 하겠느냐? 신앙 믿음은 자기의 속이 만들어진 대로 답을 하게 된다. 욥의 시험은 아무나 못 받는다.
우리를 구원하고 영광을 받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세상의 유혹과 미혹을 다 이기고, 죄와 사망을 다 이기고, 마귀의 시험을 다 이기고, 율법의 요구를 일점일획이라도 놓친 게 없이 다 이루어서 하나님의 은밀한 최고의 지공법에 만족을 이뤄드리고, 실력적 생명적으로 영원히 죽지 않은 자로, 죽은 것이 없는 자로, 부활로 승리를 거둔 분만이 영광을 받을 수 있다. 이 일을 하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그래서 이제는 십자가를 지고 승리의 사건만 남았다는 면에서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라고 하신 거다.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 말씀은, 첫째는 예수님께서 하신 우리의 기본구원에 대한 사역을 전제를 하고, 둘째는 당시의 제자들과 지금의 우리의 이룰구원의 사역을 말하는 거다. 즉 먼저는 예수님께서 기초를 놓으셨고, 그 다음에 이 기초를 바탕으로 우리의 이룰구원을 이뤄가는 것을 말한다.
한 알의 씨에는 생명이 들어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인데,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 성경을 들고 구원도리와 이치가 없는 말을 하면 이것은 생명의 씨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껍데기만 자꾸 키우자고 하고 부자가 되자고 하는 것은 외식신앙이요, 안 믿는 사람이나 이방 종교인들도 이런 소원 목적을 가지고 있다. 믿는 우리가 이런 말을 들으려고 교회에 다니는 거냐?
생명이 없는 씨를 밭에 심는 농부는 없다. 생명이 없는 씨를 심는 것을 신앙 면에서 비유적으로 말을 하면 가라지를 심는, 세상정신을 심는 마귀와 거짓된 세상에 속한 종들이다. 이런 씨는 아무리 심어도 잔꾀만 자라지 싹도 나지 않고 자라지도 않는다. 사람이 안 바뀐다.
씨 속에 들어있는 생명은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땅에 떨어져서 심기기만 하면 싹이 나오고 자란다. 신앙 면에서 믿는 사람이 자기의 위치와 상황과 삶이 사람들에게 짓밟힐지라도 생명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있으면 그 가운데서 살아 올라온다. 자기가 거지가 되고 직장을 잃어도 신앙생명이 있으면 그것을 헤쳐나오게 된다. 믿는 사람이 자기의 형편과 상황을 앞세워서 ‘가난해서 못 살겠다. 죽어야지’ 라고 하는 것은 믿음생명 신앙생명이 없는 거다. 다른 사람은 그 사건과 환경을 이용해서 ‘나는 살았소’ 하고 솟아 나오는데 자기는 왜 죽겠다고 하느냐?
생명이 있는 씨를 해마다 심으면 자꾸 불어나서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린다. 그러나 씨가 귀하다고 해서 그릇에 담아두면 한 알 그대로 있다가 싹을 터야 할 기회를 놓친 씨는 말라 죽는다. 씨의 목적은 많은 열매를 맺는 거다. 씨가 땅에 떨어지면 서서히 뿌리를 내리고 싹이 나오면서 씨의 껍데기를 떨쳐내 버린다.
24절의 말씀을 23절의 말씀과 연결해서 생각을 하면 예수님께서 죽고 부활하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죄에서 해방이 되니 당신이 이 땅에 오심과 33년 동안 역사하신 효과가 나오니 영광이라는 거다. 십자가의 효과가 없으면 영광이라고 하지를 않는다. 또한 이룰구원 차원에서 예수님을 바로 믿고자 진리를 찾는 자들에게, 그리고 예수님을 찾아온 헬라인들에게 많은 열매를 맺게 하겠다는 약속이기도 한다. 예수님께서는 목자로서 당신의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을 진리 안에 들게 해서 구원의 열매,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
25절: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십자가의 사건으로 인해 되어지는 효력성을 말하는 것으로 당신의 백성을 진리 안으로 들어오게 해서 구원의 열매,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해 주시겠다는 말씀이다. 주님께서는 나사로의 죽음과 살리심을 통해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를 이룰구원의 신앙으로 들어오게 했다. ‘오빠가 사는 것을 지금 네가 볼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은 이룰구원의 신앙의 이치를 말하는 거다.
믿는 사람이 현재에서 이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에 삼킨바 되는 이룰구원의 믿음을 모르면 예수님께서 통분히 여기신다. ‘예수 믿어서 세상에서 부자가 되자고 하는 것은 사는 믿음이 아니다. 마지막 부활을 믿는 게 문제가 아니라 현재 네가 사는 것을 믿느냐?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은 현재에서 되는 거다. 현재 이룰구원을 이루지 않는 상태에서 순교라도 하겠다는 사람은 자기의 목숨에 위협이 오면 도망을 간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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