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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요12:28-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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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김경형목사 |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2장 28절-35절: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우뢰가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저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28절-31절: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우뢰가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저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임금이 쫓겨나리라.’
예수님께서 성육신으로 오심은 우리에게 본을 보여서 우리로 하여금 진리로 행하게 하려는 것도 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지공법에 만족을 드리는 삶을 사시니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만들어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사람들의 소원 목적이 아닌 오직 하늘에 대한 소원 목적, 인간의 구원에 관한 소원 목적, 하나님으로 온전케 되는 소원 목적으로 사시니 당신이 가는 곳곳마다 사람이 온전케 되는 일이 나타난다. 주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을 표현하자면 만능의 능력이고, 교훈적으로 말을 하면 진리이치의 가르침이다.
사람에게 옳은 하나님의 진리지식이 들어가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된다. 그리고 사람에게서 이런 역사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면 영광스럽게 만들어 줄까 라고’ 하시는데, 영광스럽게 해 주심이 때로는 세상사람들이 받지 못할 일을 통해 나타내시기도 한다. 예를 들면 아무나 욥의 환난을 받을 수 있느냐? 아무나 욥처럼 환난을 잘 이겨내서 두 배의 복을 받을 수 있느냐? 아니다. 욥에게만 가능하다. 하나님께서 욥의 믿음을 보시고 사단을 통해 고난을 주신 거다.
예수님의 오심은 우리의 기본구원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이 기본구원을 깔고 이룰구원으로 나가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면 영광스럽게 해 줄까?’ 라고 하시는데, 나를 영광스럽게 해 주려면 나에게 하늘의 일이 주어져야 하고, 하늘의 일이 나타나야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고, 이 영광이 나타나야 나에게도 영광이 된다. 이것을 교훈적 부분적으로 보면 진리이치를 깨달아서 그 이치대로 사는 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거고, 자기가 영광스러워지는 거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이 이치를 모르면 세상에서 먹고 마시며 부자로 살고자 하는 소원 목적으로 살게 된다. 이건 창조의 목적에서 빗나간 삶이다. 이렇게 사는 것은 저수지의 물이 도랑으로 흐르다가 도랑 밖으로 흘러버리는 것과 같은 거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만들어지는 게 인생의 원 노정이다.
32-33절: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예수님께서 죄인으로 몰려서 십자가에서 죽는데 이것으로 인해 모든 사람을 당신에게 이끈다고 하신다. 땅에서 들린다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심을 말하는 거다.
예수님의 죽음이 어떤 죽음이냐?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은 구원 얻을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심으로 죄 사함을 주는 사건이다. 주님의 죽음은 죄를 짓다가 버려진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공법에 만족을 드림으로 우리를 영생으로 살리는 죽음이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교훈으로, 생명의 말씀으로 우리를 당신에게로, 즉 구원으로 이끌어 주셨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언행심사와 살으심은 창세 이후로 마지막 그 날까지의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죽고 살으신 거다.
사람들이 모여서 어떤 일을 할 때는 각 사람의 위치와 성격과 성질과 하는 일 등이 다 드러난다. 그런가 하면 어떤 한 사건이 일어나면 이 사건에 적극적인 사람이 있고, 멀리 도망가는 사람이 있고, 도망을 가 놓고도 자기가 다 한 것처럼 말을 하는 등 각 사람의 속이 다 드러난다. 예수를 믿는 것도 각 사람마다 라인이 처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위치와 자리와 신앙의 질을 못 속인다. 이것을 아는 우리는 사건 환경이 왔을 때 그것을 통해 주님께로 더 가까이 밀착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통해 역사를 하시고, 당신의 일을 하신다.
막15:에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라고 했듯이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하고도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이들로 멀리서도 이걸 보게 해서 당신께로 이끄셨고, 온 세상의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 승천의 사건에 대해 ‘그 때 이런 일이 일어났구나’ 라고 하면서 주님을 쳐다보게 해서 주님께로 이끌었고, 부활로 살아나셔서 손과 발과 옆구리를 보이시면서 ‘이래도 모르겠느냐?’ 라고 하시며 주님께로 이끌었다.
믿음으로 이것을 본 자는 예수 믿으면서 진리에 환난을 준 일은 없는지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그렇다면 자기는 예수 믿는 믿음 때문에 고난을 받은 일이 있는지? 예수 믿는 믿음 때문에 누가 내 옆구리를 쑤신 일은 없는지? 예수 믿는 믿음 때문에 누가 내 마음을 아프게 한 일은 없는지? 이런 일을 당하면 주님의 고난에 동참을 하는 거고, 믿는 사람에게 이런 짓을 하는 것은 예수님께 고난을 주는 거다.
예수님께로 이끌림을 받은 사람은 이제는 나를 위하여 죽은 예수님만 말을 하지 말고 나를 위해 영원히 죽지 않을 자로 살아나신 그 분을 자랑삼아 말하는 게 사람을 예수님께로 이끄는 거다. 쉽게 말을 하면 예수님의 마음과 정신, 그리고 안 죽고 살아나는 거, 현재에서 구원역사를 하는 것 등을 속속들이 자랑하는 게 예수님께로 이끄는 거다.
‘예수를 믿으니 세상 것이 어떻고’ 하면서 세상을 자랑하는 것은 예수님께로 이끄는 게 아니라 예수이름을 빙자해서 사람을 세상으로 이끄는 거다. 예수님은 물질축복을 말하지 않고 있는 물질을 팔아서 영생을 얻으라고 했다. 그럼에도 오늘날 교회에서 예수 믿어서 세상에서 부자가 되라고 하는 것은 마귀의 말이다. 가룟유다에게 교인들 앞에서 설교를 하라고 한다면 세상을 자랑하고 가르치게 되어있다.
무당이나 점쟁이들은 사람을 통째로 망하게 한다. 이건 저주다. 거짓 종들은 이런 정신을 교회로 가지고 와서 성경구절을 이용하면서 세상을 가지라고 한다. 무당이나 점쟁이들은 일반적으로도 사람을 못 쓰게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을 찾지 못하게 한다. 이것보다 더 큰 문제는 예수 믿는 사람이 마귀의 꾀임에 빠져서 세상을 소원 목적하게 되면 말로는 예수님을 높이지만 인격적 성품으로는 예수님의 정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이 살게 된다. 이건 귀신이 들린 거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다윗의 자손이여.’ 귀신들린 자가 예수님을 향해 한 말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이런 일들이 얼마나 많으냐? 성경구절을 쓰면서 마귀 짓을 하는 목사가 많다.
믿는 사람이 이룰구원을 이루며 사는 게 창조의 목적관에 적중이요, 이게 인생의 정로다. 바로만 들어가면 모든 은혜와 복을 다 차지하는 건데 이걸 모른 채 살면 많은 세월을 통째로 날려버리게 된다.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 이런 것을 보고 민망하다고 하시는 거다. 기가 차다는 거다. 기본구원을 얻었으니 이룰구원의 효력을 봐야 되겠는데 멸망의 길로 가고 있으니 기가 차다는 거다.
34절: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들은 대로 이 말을 한 건데 영적인 면이 아닌 세상 일반적인 개념으로 말을 한 거다. 이걸 보면 일반개념으로 성경을 가르치고, 일반개념으로 생각을 하고 말을 하는 신앙의 결과가 얼마나 위험하고 무섭고 떨리는 일인지?
‘이 인자는 누구냐.’ 유대인들은 율법을 듣기는 들었는데 문제는 예수님을 못 알아보고 있다. 그래서 ‘인자는 누구냐?’ 하고 묻는 거다. 유대인들은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선재적 그리스도를 도성인신 하신 예수님과 연결을 시키지 못하고 있다. 즉 선재적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성을 입혀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의 사람으로 만드신다. 그리스도성으로 만드는 이것은 성령님의 역사로 되는 거다. 예수님 당시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이것을 모르고 있다면 인간창조의 목적대로 이루고 가야 할 구원을 영원히 이루지 못하게 된다. 이러면 그 인생은 실패다.
이방세상은 물질을 두고 성공이니 실패니 하지만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네가 누굴 닮았느냐?’ 하는 것으로 성공이나 패배나 멸망을 보신다. 그리스도께서 오심은 우리 인간을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대로 당신처럼 만드심에 있다. 이 계획과 목적과 설정이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되었다. 예수 믿으면서 이걸 모르고 산다면 무목적적으로 사는 것이니 자기가 주님의 구원사역을 무효화시키는 셈이 된다.
주님께서 들리심은 구원 얻을 자의 죄를 짊어지고 죽어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기 위함인데 유대인들은 성경을 가지고도 이것을 모르고 있었다. 오늘날은 어떤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께서 죽지 않을 자로 사셨고, 살리는 일을 했고, 죽었다가 부활 승천을 하셨다는 것은 잘 알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그 정신과 목적과 삶을 따라 살지 않고 세상을 소원 목적하며 사는 자들이 많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심과 죽으심과 부활 승천을 무효화 하는 셈이다. 그러니 주님께서 이것을 보실 때 얼마나 답답할까? 얼마나 기가 막힐까?
35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잠시’란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는 잠시요, 부활 승천 전까지의 잠시다. 이 기간 중에 교훈을 하시는데 이 교훈이 빛이다. 모든 것을 구별 분별할 수 있는 교훈이 나가는 게 빛이다.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빛이 비췰 때 이 빛을 못 붙잡으면 어두움에 갇히게 된다. 선악과 따먹고 저주받고 타락된 지식에 붙들린 채 예수를 믿는 것은 어두움에 붙잡힌 거다. 이러면 구별 분별이 안 된다. 이런 것에 붙잡히면 ‘열심히 충성봉사를 하라. 그러면 천국에서 상급이 많다’ 하는 가르침에 붙잡히게 된다. 우리는 마귀의 속셈을 잘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생명과를 먹고 지키고 다스리고 충만하고 땅에 편만하라’는 말씀을 하셨고, ‘선악과를 먹으면 정령 죽으리라’ 라고 하시면서 선악과를 따먹으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그런데 인간이 자유의지로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되고 저주를 받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짐승을 죽여서 가죽옷을 해서 그들에게 입혔다. 이것은 죄인 된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말하는 거다. 이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한 자는 생명과를 먹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이성적 지식으로 받아들이는 자가 있고, 인격적으로 성령님의 감화 감동으로 받아서 성품화 되는 자가 있는데, 그러나 후자의 사람이 많지는 않다.
예수님께서 성육신으로 이 땅에 오시기 전 선재적 그리스도로 하늘나라에 계실 때 지구상에 있는 것과 신령계에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유대 조상들에게 직접 말씀으로, 또는 천사로, 또는 선지자로, 또는 지진으로, 또는 흉년으로, 또는 짐승으로, 또는 물고기로, 또는 풍랑으로, 또는 크고 작은 사건으로, 또는 예언하신 대로 이루시는 것 등등으로 하나님을 알게 했다. 그리고 영적 이스라엘을 정의와 공의로 보존하여 무궁케 할 것이라는 약속을 하셨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조상들에게 이뤄진 게 그 후손인 자신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친 것을 알고 있고, 믿음의 조상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이뤄진 것은 조상들의 변질이 없는 신앙인격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조상들에게 하신 일에 대해 역사적인 지식만 가지고 있지 자신들은 조상들처럼 인격화 성품화된 것이 없기 때문에 예수로 오신 그리스도와 성질적으로 늘 대립과 마찰과 충돌만 일으켰지 신앙을 하는 효력은 입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들에게 약속한 대로 오시고, 사시고, 약속한 대로 가실 분인데도 이것을 전혀 모르고 있으니 참 딱한 일이다.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빛으로 오셔서 잠깐 머물다 가신다. ‘생명의 빛’이란 사람이 영원히 살 수 있는 생명을 말하는 것이고 ‘어두움’이란 사망이요 멸망이요 심판을 말한다.
창세 이후로 지금을 거쳐서 세상 마지막 날까지 인간들 앞에는 빛 되게 밝게 사는 길과 어두움에 묻혀서 사는 두 길뿐인데, 이 길을 가르쳐준 자가 누구냐? 석가냐? 공자냐? 소크라테스냐?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다. 인간을 만드신 분이 빛 된 길과 사망의 길을 알지 지음을 받은 존재가 어떻게 알겠느냐? 근원을 따지고 들어가면 예수님과 세상의 인간은 하늘과 땅 차이인데 왜 공자나 석가를 예수님과 같이 취급을 하느냐? 세상이 이렇게 된 것은 교회의 책임이 크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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