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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요12:36-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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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김경형목사 |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2장 36절-40절: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36절: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왜 숨으시느냐? 숨어 있다가 ‘짠’ 하고 나타나려는 거냐? ‘찾지 말아라. 따라오지 말아라. 너희들에게는 안 나타난다’ 이 말이다. 나타나면 이용만 하려고 하니까 나타나기 싫다는 거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숨으신다면 빛 되신 이 분이 어디에, 어떻게 숨을까? 해가 비취다가 구름 속에 숨으면 햇볕이 비취지를 않듯이 빛 되신 분이 이렇게 숨는 거냐? 예수 믿는 사람에게 빛 되신 분이 숨으면 자기는 캄캄해진다. 주님이 나타나면 깨달음이 밝은 건데 숨어버리면 안 깨달아진다. 성경을 아무리 봐도 안 깨달아지는 것은 자기에게 주님이 숨은 거다. 뭔가에 가려진 거다. 나타나 봐야 이적 기사나 보려고 하고 먹을 것을 달라고 하면 숨어버린다. 하늘에 계신 분이 세상의 소원을 들어주려고 오신 게 아니다.
성경의 문자는 눈에 보여서 읽을 수 있지만 영적인 뜻이 안 보인다면 이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숨어 계시는 거다. 영적인 뜻이 어떤 사람에게는 잘 보이는데 자기에게는 안 보인다면 주님이 자기에게 숨어 계시는 거고,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이 잘 보인다면 자기에게 빛 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거다.
예수님께서 숨으시는 이유는, 첫째는 예수님을 자꾸 핍박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을 자꾸 핍박하면 핍박을 받는 사람이 안 나타나고 숨어버린다.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를 자꾸 멀리하면 예수님께서 안 나타나신다. 주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의 이치를 핍박하는 거다. 이러면 주님이 안 나타나신다.
두 번째는 진리생명의 말씀의 이치를 무시하면 말씀의 뜻이 안 깨달아지는데, 이것도 주님이 안 나타나는 거다. 세 번째는 교만한 자에게도 안 나타난다. 교만자는 은혜를 못 받는다. 네 번째는 기복주의 구복주의자에게도 주님이 안 나타난다. 다섯 번째는 이적 기사와 표적만 보려고 하는 자에게도 주님이 안 나타난다. 마귀가 소원하는 것을 소원하고 있으니 주님이 나타나서 들어줄 리가 없다. 자기 신체로 뭘 나타내면서 성령이라고 하면 주님은 이 사람에게 안 나타난다.
37절-38절: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사53:1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라고 말을 했는데, 이 말을 선재적 그리스도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말씀을 안 해 주셨는데 이사야 선지자가 자기 마음대로 말을 한 거냐? 선재적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이사야 선지자가 백성들에게 이 말을 한 거다. 그래서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라고 말을 하는 거다.
선지자는 백성들이 순종이나 불순종의 여부에 따라 어떤 사건을 겪게 되는 것만 예언하는 게 아니라 본문의 경우에 사람에게 직접 이뤄지는 일을 예언한 거다. 믿는 우리를 깨닫게 하는 것은 어느 시대에 전쟁이 일어난다든지 홍수가 난다든지 하는 자기 몸 밖의 사건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사람들 속의 마음이나 정신의 움직임을 통해서도 깨닫게 하신다.
예를 들면 노아 당시에 사람들이 가인의 길로, 그 목적으로, 그 정신으로, 그 사상으로 몰려가다가 홍수심판을 받았는데, 이것은 믿는 사람들의 정신과 소원 목적이 세상에 빠지면 물 아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을 목적하며 사는 가인의 사상을 가지고 살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것을 홍수로 통해 보여주는 거다. 활동이 일어나기 전에 성령의 눈으로 정신세계를 보는 자가 선견자요 예언자요 선지자다.
성경에서 사람에게 직접 관계가 되는 말씀은 과거에 말씀을 하셨어도 시간이나 장소에 상관이 없이 인간에게 그대로 역사가 되어 나가는 거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의 국어책을 읽는 것처럼 보는 게 아니라 ‘네가 이렇게 살면 네가 이렇게 복을 받고, 이렇게 살면 이렇게 저주를 받는다’ 라고 자기의 삶을 말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특수 창조물로서 자기를 인간으로 만드신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알고 출생에서 죽음의 선을 너머까지의 그 목적대로 사는 게 인생의 정로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인생의 정로로 생각을 한다. 그러니 사람 자체가 파멸이다. 이방종교의 팔만대장경이 인간이 특수목적물로 지어진 특수적인 창조물이라는 것을 말해주느냐? 무슨 신령한 도사라는 사람이 이것을 알려주느냐? 성경을 통해서 성령님께서 가르쳐 주지 않으면 모르는 거다.
창세 이후로 마지막 그 날까지 세상 모든 인간 중에 자기를 인간으로 만들어 놓으신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아는 자가 몇 명이나 될까? 우리는 이걸 안다는 것만으로도 긍지가 대단한 거다. 그런데 이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을 할만한 일꾼이 없다. 달을 밟고 해를 입은 일꾼이 없다. 세상을 보면서 인간창조의 목적관을 두고 하나님의 일을 염려 걱정하는 것은 우주적이요 천국적인 생각이다. 이런 사람은 천국의 이해타산을 놓고 사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본질을 놓고, 예수 그리스도를 놓고 ‘질적으로 어떻게 주님을 닮아가느냐?’ 하는 면으로 나간다면 이 사람은 사는 목적과 방향이 분명한 거다. 믿는 사람은 말씀의 이치로 하나님의 성품으로 온전케 되어서 대인관계 대사관계 대물관계에서 써먹어야 한다. 이단자나 거짓된 자들은 성경을 들고 말을 해도 그 질은 세상이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다 우리에게, 나에게 하는 말씀이다. 그래서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누구를 생각할 게 없고 ‘나에게 하는 말씀이구나’ 하고 받아들여야 자기가 고쳐진다. 남의 말로 들리면 자기가 안 고쳐진다.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선지자가 인간창조의 목적에 관한 말씀을 했는데 이 말씀을 믿지 않았다는 거다. 물질이 풍부하던 가난하던 성품과 인격 면에서 진리로 만들어지지 않으면 자기의 생이 완전히 멸망이 되는 건데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는 자들은 이것을 전혀 모르는 거다. ‘예수 믿어라’ 라고 하니까 ‘안 믿으련다’ 이 말이 아니라 인간 자기의 창조의 목적을 전혀 모른다는 거다.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들으면 이 사람에게서 주님의 역사가 안 나타난다. 예수 믿는 사람 모두가 처음 믿을 때부터 이룰구원에 관한 영능의 역사, 믿음의 역사, 존귀 영광의 실력을 이뤄갈 수 있는 말씀을 듣는다면 이게 얼마나 큰 복이냐? 그런데 이런 귀한 말씀을 듣는데도 이것을 안 믿는다면 이 사람에게는 주님의 역사의 축복은 없다. 우주만물을 움직이는 분에게 밉보이면 행복할 게 뭐가 있겠느냐? 설령 행복한들 그게 며칠이나 가겠느냐?
‘마지막 시대에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하셨으니, 첫째는 전하는 자가 하나님의 본질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지, 아니면 유황 불 못에 사라지는 롯의 사상을 전해서 부끄러운 구원, 불탈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인지? 가인의 믿음이냐, 롯의 믿음이냐, 아브라함의 믿음이냐? 지금도 이게 있는 거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는 명령을 주셨다. 롯에게 준 게 아니다. 아브라함은 이 명령에 순종해서 집을 떠났고 롯은 이 아브라함을 따랐는데, 롯이 아브라함과 같이 간다고 해도 아브라함과 같은 신앙이 아니라 롯의 신앙은 따로 있다. 따로 있는 그 마음이 어디에 가서 드러나느냐?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고’ 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드러난다. 롯이 그냥 소돔성으로 가니 그곳이 유황불 바다가 된 게 아니라 아브라함과 같이 살 때 롯의 마음이 이미 소돔 고모라가 선택이 된 거다.
아브라함과 롯이 같이 있다고 해서 아브라함의 신앙과 롯의 신앙이 같은 것으로 보면 안 된다. 롯이 아브라함과 동등한 믿음으로 가다가 선택의 기로에서 타락이 된 게 아니라 자기 속에 든 대로 선택을 한 거다. 이 선택이 자기 속에 뭐가 들었다고 하는 것을 말해주는 거다.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팔’ 할 때는 역사를 의미한다. ‘주님의 역사를 다 안 믿는데 주님의 역사가 나타나겠습니까?’ 이 말이다. 첫째는 인간창조의 목적에 관한 말씀을 안 믿으니 하나님의 재창조의 역사가 있을 수 없구나.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는 말이 안 믿는 사람에게 하는 말로 볼 수 있지만 믿는 우리에게 향한 말씀이기도 하니 ‘이룰구원의 성장성의 역사가 누구에게 나타났습니까?’ 이 말이다.
둘째는 말씀을 받는 자의 마음상태에 따라 주님의 역사가 나타난다는 거다. 세상에 관한 소원성으로 말씀을 받고 있다면 이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의 역사가 없다. 즉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받는 자의 마음의 상태에 따라 하나님께서 역사를 하신다는 거다. 그래서 예배 때 마음의 태도가 아주 중요하다. 말씀 한 마디를 받고 안 받고에 따라 자기의 생의 갈림길이 달라지는 건데 이렇게 생각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39절-40절: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이유는 이사야 선지자가 미리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들이 보려고 하는데 아무 이유 없이 밝은 눈을 멀게 했다면 고약한 하나님이 된다.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고침을 받으려고 하는데 악하게 만들어서 고침을 받지 못하게 했다는 말로 들린다. 글자적으로만 보면 하나님이 악하게 보여진다. 그러면 하나님이 과연 이런 분이냐? 하나님은 선이시라. 무슨 일을 하셔도 선이시라. 어린아이까지 다 죽이라고 해도 선이시라. 왜냐? 구원을 위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일반적으로는 이해를 못 할 말이다. 하나님의 의중을 모르고는 이해가 안 되는 말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의이시고, 절대 공평하시고, 절대 공의이시고, 하나님의 이 마음과 속성은 영원불변이다. 그런데 이런 분께서 왜 그들의 눈을 멀게 하고 못 보게 하셨을까? 이걸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까?
눈은 보는 기관이다. 눈이 밝아야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눈이 어두우면 아무 것도 못한다. 기본구원을 얻은 기독자들은 보는 눈이 둘이다. 하나는 육신의 눈이고, 하나는 영의 눈이다. 영적인 면을 보는 눈과 물질세계를 보는 눈 두 가지다. 육신의 눈은 가견적 현상적인 사물을 보고 인식하고 일을 하고 대처하며 살게 한다. 그래서 육신의 눈이 어두우면 안 된다. 영의 눈은 영적 신령한 실상세계를 보는 눈이다. 신령한 실상세계를 볼 수 있는 눈, 사람의 정신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이 옳은 눈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진리생명의 말씀을 듣고, 읽고, 배우고, 깨닫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과 활동의 세계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를 알아야 영능의 실력의 하나님의 온전의 사람으로 만들어 진다. 이 일을 하는 영의 눈이 소경이거나 어두우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원인과 동기와 목적대로 살지 못하게 된다. 이것은 인간존재 목적의 큰 실패다. 본문은 영적인 눈을 멀게 하셨다는 건데, 눈을 멀게 하신다면 눈을 고쳐서 밝게 하실 수도 있는 거다.
생명도 두 가지가 있다. 육신의 생명과 영의 생명이 있는데, 영의 생명은 신앙생명이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이 기도하고 가르치고 소원 목적하는 게 세상에서 부자가 되고 세상의 명예와 영광을 구한다면 이 사람은 육의 생명을 주격으로 사는 거고,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면 영의 생명을 주격으로 사는 거다. 영 주격으로 살면 영의 눈이 밝고, 지혜롭고, 신앙의 차원이 높기 때문에 모든 이해타산이 영을 위하는 쪽으로 내리게 된다.
그런데 왜 이런 저주를 받을까? 육신의 눈이 어두운 것도 일반적으로 한스러운 건데, 그래서 육신의 눈이 멀어서 물질적인 것을 못 보면 이 사람은 물질세계를 보는 면에서 저주를 받았구나. 물질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 활용을 할 수 없다는 면에서 일종의 저주성이라는 거다. 눈만 아니라 사대육신을 영적인 면을 위해 사용 활용하라고 줬는데 어느 한 기관이라도 고장이 나서 구원에 활용을 못하면 그 면에 저주가 아니냐?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대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구원을 보게 해 주시려고 선지자로 통해서 ‘선악과를 먹으면 심판이다. 생명과를 먹으면 영생이다’ 하는 것을 알게 했고, 말씀으로,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이 일을 위해 늘 역사를 해 나왔다. 하늘 속한 것과, 땅에 속한 것과, 바다에 속한 것, 그리고 신령계에 속한 것 등 모든 창조물을 동원해서 활동과 변화와 성장과 그 원인과 결과를 다 보게 했고, 증거 했고, 예언의 성취도 보여주셨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약속도 했다. 개인적으로도 희로애락을 느끼게 했고, 가치판단 평가를 해서 선택을 해서 영원히 손해를 보지 않게도 했다. 그런데도 왜 안 믿어질까?
참사람의 인격자로 만들어지는 것은 육신의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안 믿어지고, 육신의 눈에 보여지는 것은 자극이 되어서 가치 있게 생각이 되고 믿어지는 사람은 영의 눈이 감겼구나. 저주를 받은 눈이로구나. 이런 면이 안 보이면 저주를 받은 눈이다. 물질의 축복과 저주는 늘 말을 하면서 왜 영적인 면의 축복과 저주는 신경이 안 쓰여질까? 사람이 왜 영적인 면에는 가치를 두지 않고 늘 돈에 가치를 둘까? 이건 저주다. 평생 충분히 먹고 살 게 있는 부자가 있고, 아무 것도 없지만 믿음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눈에 드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 안 가서 누가 승리가 되고, 가면 갈수록 누가 망해 들어갈까?
물질부자를 목적으로 살면, 첫째로 사람의 머리가 망한다. 왜냐? 늘 물질을 가지고 ‘어떻게 더 늘릴까?’ 하며 신경을 쓰기 때문이다. 세상사람들이 부자가 되었다가 가난해지고, 또 노력을 해서 부자가 되었다가 망하고 하는 것은 믿은 우리로 어디에 목적을 두고 살아야 하는지를 깨달으라는 거다. 이런 것을 보면서도 못 깨달으면 미련한 채로 죽는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살아온 게 사망성이요, 자기 속에 성령의 열매가 없다면 너는 영인이 망했구나. 영적인 면에서 성장이 없으니 망했구나.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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