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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요12:40-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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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김경형목사 |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2장 40절-43절: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40절: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영이 아닌 마음을 완고하게 했다고 한다. 가룟유다의 경우에 마음이 문제다. 하나님의 주권과 독권으로 영이 중생을 해서 기본구원을 얻었다고 할지라도 마음이 회개가 안 됐다. 요13:에서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라고 하신 것은 가룟유다를 제외한 다른 제자들은 목욕을 했다는 것으로 다른 제자들은 회개를 했다는 거다. 그러나 자람성에서 실수가 있을 수는 있다.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라고 하는 것은 이방인을 향해 한 말씀이냐,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 한 말씀이냐? 하나님의 백성이다. 신령한 영의 눈이 어두우면 이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뜻, 곧 자기의 구원을 깨닫는 면에 대해 무디거나 모른다. 무딘 사람은 완고한 면도 있다.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선과 악을 육신의 눈이나 이성의 눈, 즉 일반지식을 기준으로 보는 것은 일반양심으로 보는 것으로 이것을 기준해서는 하나님 앞에서의 선과 악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성적 작용이나 철학의 개념으로는 못 깨닫는다. 성령으로라야 깨닫는 거지 일반지식으로는 안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깨달으려고 할 때 하나님의 신이 깨닫게 도우신다. 안 믿는 사람들이 자기의 앞길이 어떤지를 몰라서 귀신들린 자를 찾아가기도 하는데, 이러면 결국은 귀신의 장난에 놀아나게 된다.
선악과 따먹은 지식의 차원에서는 사람의 행동을 보고 선과 악을 말하는데, 선악과 따먹은 사람의 양심은 타락성이기 때문에 아무리 선적인 말과 행동을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악이 된다. 하나님 앞에서의 선과 악은 하나님의 일에, 사람이 온전케 되는 일에 놓고 ‘선이냐, 악이냐?’ 를 따진다. 일반적인 선과 악은 하나님과 반대쪽이라서 다 악이다. 또한 교회에서 하나님의 뜻, 온전의 이치는 말하지 않고 충성봉사를 강조한다면 이것도 악이다. 하나님 앞에서 세상의 기준을 가지고 말을 하면 이건 악이다. 세상을 기준으로 하는 말은 사람이 온전케 되는 것과는 관계가 없고 일과 관계가 있다. 모든 성경은 우리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려고 기록이 되었다.
예수 믿는 사람이 그동안 하던 술도 안 먹고, 노름도 안 하고, 도둑질도 안 한다고 해서 무조건 회개를 한 거고 성화가 된 게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는 자기 몸은 하나님이 계시는 전이니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거룩성을 입기 위해 육적 세상적인 소원 목적을 버리고 하늘에 소망을 두고 그런 것을 끊는 거다. 이래야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바로 서게 된다.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진리지식을 가지면 사람에 따라, 환경에 따라, 시대에 따라 자기에게 닥치는 모든 것을 자타의 구원에 이용 활용하게 된다. 이게 회개가 바로 된 거다.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진리말씀을 듣고 마음으로 깨닫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나 모양이나 형태 등을 기준으로 깨닫는다는 거다. 행동은 상대가 깨닫고 고칠 일이고, 문제는 ‘내가 보는 눈이 어떤 기준을 가졌느냐?’ 하는 거다. 이 눈이 잘못되어서 예수 믿으면서 회개가 안 된 사람이 많다. 이런 사람에게 감쪽같이 속을 수 있다. 이런 사람을 볼 때 일반인들은 열심을 부리니 신앙이 좋다고 하겠지만 ‘신앙을 하는 지식이 생명과를 먹고 나온 지식이냐, 선악과를 먹고 나온 지식이냐?’ 하는 면에서 생명과의 바꾸지 못하면 아무리 선행을 해도 세상 타락된 짓이 된다.
베드로는 ‘오늘 밤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라는 말씀이 생각나서 이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해서 고쳤다. 그러나 가룟유다는 자기를 향한 예수님의 말씀을 잡지 못했다. ‘처음부터 마귀니라. 돈을 사랑하는 자다. 그릇에 손 넣는 자가 나를 팔 자다’ 라고 하실 때 ‘나를 보고 하는 말씀이구나’ 하고 이 말씀을 붙잡고 고쳤다면 예수도 안 팔고 목도 안 맸을 텐데 자기의 이성적 양심으로 자기의 잘못에 대해 반성을 한다고 한 게 목을 매서 죽은 거다.
가룟유다가 목을 매달아 스스로 죽었기 때문에 지옥에 갔다고 하거나 회개를 했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주님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의 잘못을 고치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을 우리로 알게 하려고 목을 매달아서 죽도록 허용을 하신 거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판 후에 양심에 가책을 받아 스스로 목을 매서 죽은 게 일반적으로 자기의 잘못을 책임지고 깨끗하게 죽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회개를 하면 될 텐데 회개를 하지 않고 스스로 죽었으니 오히려 책임회피가 되는 거다.
자기가 잘못했다고 해서 스스로 죽어버리면 자기의 잘못이 책임이 져지는 거냐? 자기로 인해 다른 사람이 이미 피해를 입었고 망가졌는데 자기가 죽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고쳐지거나 잘 되는 거냐? 스스로 죽는 것은 자기의 잘못을 고치는 것도 아니고, 회개도 아니고, 일종의 반성이요 뉘우침일 뿐이다. 그런데 가룟유다보다 더 악한 사람은 자기가 잘못한 것을 남에게 둘러씌운다.
영적인 지식과 육적인 지식은 그 지식의 근원과 본질이 다르다. 반성은 예수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일반적인 이성을 가지고 얼마든지 한다. 이것은 신앙과는 관계가 없다. 회개는 살아계신 진리생명의 말씀에 의해 정신과 사상이 바로 잡아지는 거다. 회개가 바로 된 상태에서 그 정신으로 행동을 하면 주님의 성품으로 닮아진다. 그래서 반성과 회개는 질적 근원적으로 다른 거다.
41절: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이렇게 말한 것’이란 앞 절에서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라고 한 말씀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런 자들과는 달리 주님의 역사하심을 보고 주의 영광을 본 자는 주에 대해 말을 하게 된다는 거다.
주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이요 궁극적 소원 목적을 가지고 인간을 지은 분이다. 우리가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말씀에 순종을 하게 되고, 영능의 실력자가 되고, 하나님 온전의 사람이 된다. 즉 예수 그리스도처럼 만들어 진다. 그러니까 당신이 인간으로 나타나고 물 위로 걸으신 것 등등은 ‘내가 너희들을 나처럼 만들어 주마’ 이게 들어있는 거다.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 이 온전하심을 맞본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본 자요, 하나님의 영광을 본 자는 신의 감화 감동으로 주님을 증거하게 된다. 그런데 마음이 완고하다는 것은 이런 것을 증거하는 선지자의 말을 안 믿은 것을 말한다. 그러니 이런 사람은 소경일 수밖에 없다.
42절-43절: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관원 중에 예수를 믿는 자가 많은데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없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 이유가 바리새파로부터 출교를 당할까 염려해서요,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예수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하나님의 본질로써 죽은 거, 죽을 게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은 전부가 우리를 죄에서 자유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영생의 천국으로 살리는 일이다. 이렇게 사심은 우리로 이룰구원 차원에서 주님의 삶을 본받아서 주님을 닮으라는 거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공의와 아가페의 활동이요, 우리를 영원 무궁히 존귀 영광과 능력과 행복의 극치의 사람이 되게 하는 삶이다. 그래서 타락되고 저주받은 인간이 이 주님을 믿고 주님의 성품으로 만들어지면 주님처럼 영광스런 자가 된다. 물질세상에서 물질의 요소로 된 영광은 임시적인 영광이다. 물질의 요소로 된 것은 다 시간에 속한 거고, 썩고, 병들고, 요동될 것이고, 가견적 임시성이요, 현상적이요, 전부는 지나가는 것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으로 말미암아 된 것은 영원하다.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과 반대되는 것을 목적하고 살면 인간을 만드신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에서 이탈이 된 고로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로 영원히 멸망을 당하게 된다. 지옥에 간다는 게 아니라 영원히 멸망이라는 거다. 학교에 다니며 공부를 안 하면 공부를 못하는데, 공부를 못했다고 해서 학교에 안 다닌 게 아니듯이 영원히 멸망이라는 것은 지옥에 간다는 말이 아니라 주님을 닮지 못하면 그 나라에서도 주님을 영원히 닮지 못한다는 거다.
믿는 세계에는 이런 게 있는데 믿는 자기가 세상의 영광만을 위해 산다면 그 책임을 누가 져야 하느냐? 누구를 탓해야 하느냐? 주님께서 우리의 영의 눈을 띄워주어야 영의 눈을 뜰 수 있는 것이니 영적인 면을 알게 해달라고 하면 하나님의 신으로 역가가 되어나가는 건데 자꾸 눈으로 보이는 것을, 이적 기사를 목적으로 삼으면 이 사람은 영적인 면이 막힌다. 영의 눈이 안 열린다. 만일 육적인 면에, 물질적인 면에 신경을 쓰고 있는 사람에게 영의 눈을 띄워준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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