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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세기의 신학자18] 사라 코클리(Sarah Coakley, 1950~ )
더깊은신앙으로 samyoung.park............... 조회 수 5 추천 수 0 2026.07.06 22:01:23| 출처 : | www.facebook.com/samyoung.park.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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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사라 코클리(Sarah Coakley, 1950~ )
사라 코클리는 케임브리지를 배경으로 하버드에서 연구한 신학교수이다. 하지만 그녀는 단순히 학자라기보다, 침묵의 내부에서 사유가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끝까지 추적하는 탐험가에 가깝다. 그녀의 작업은 교리의 확장이 아니라, 기도라는 행위가 사유를 어떻게 뒤틀고 재구성하는지에 대한 집요한 관찰이다. 신학이 텍스트 위에 세워진 학문이라면, 그녀에게 신학은 무릎 위에서 시작된다.
그녀는 삼위일체를 개념의 구조로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삼위일체를 “기도 중에 발생하는 관계의 사건”으로 밀어 넣는다. 즉,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떻게 붕괴되고 다시 형성되는지를 본다. 이 지점에서 그녀의 신학은 철학을 넘어 거의 생리학에 가까워진다. 생각이 아니라 호흡, 논증이 아니라 긴장, 결론이 아니라 떨림이 중심이 된다.
Coakley의 가장 급진적인 제안은 단순하다. “기도는 신학 이전에 있다.” 그러나 이 단순한 문장은 학문 전체의 질서를 흔든다. 신학은 보통 사유의 정점에서 시작하지만, 그녀에게 신학은 무력한 침묵의 바닥에서 시작된다. 사람이 말할 수 없을 때, 그때 이미 신학은 작동하고 있다.
그녀는 권력의 언어에도 민감하다. 특히 젠더와 욕망, 영성과 억압의 구조를 삼위일체 신학과 연결시키면서, 신학이 얼마나 쉽게 지배의 언어로 변질되는지를 드러낸다. 그녀의 글에서는 신학적 개념이 중립적이지 않다. 모든 개념은 몸을 가지고 있고, 모든 교리는 권력의 흔적을 품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파괴자가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해체된 자리에서 더 느린 언어를 다시 만들어낸다. 그녀의 문장은 공격적이지 않지만, 읽는 사람을 서서히 무너뜨린다. 그것은 논리의 붕괴가 아니라, 익숙한 신앙의 속도가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 경험이다.
Coakley의 작업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관상(contemplation)”이라는 단어의 재정의다. 관상은 도피가 아니라 가장 깊은 참여다. 세계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가장 깊은 균열 속으로 들어가는 방식이다. 그래서 그녀의 신학은 조용하지만 결코 안전하지 않다.
그녀는 신학이 말이 아니라 “머무름”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리고 그 머무름은 항상 불편하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 오래 머무를수록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이 누구인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Coakley는 신학을 이렇게 바꿔 놓는다. 신학은 설명이 아니라 훈련이다. 사고의 기술이 아니라, 침묵을 견디는 기술이다. 그녀의 세계에서는 가장 깊은 지식이 가장 깊은 무력함과 구별되지 않는다.
박삼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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