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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신학자37] 팀 켈러(Timothy J. Keller, 1950~2023)
더깊은신앙으로 samyoung.park............... 조회 수 4 추천 수 0 2026.07.25 22:49:31| 출처 : | www.facebook.com/samyoung.park.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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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팀 켈러(Timothy J. Keller, 1950~2023)

팀 켈러는 소음 속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설교가였다. 신앙을 믿는 사람에게만 말한 것이 아니다. 신앙을 의심하는 사람, 무관심한 사람, 심지어 비웃는 사람에게도 말을 걸었다. 그의 강단은 교회 안에 있었지만, 그의 청중은 도시 전체였다.
그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지만, 자신의 무대를 세계에서 가장 회의적인 도시 가운데 하나인 New York City에 세웠다. 1989년 그가 세운 Redeemer Presbyterian Church는 단순한 교회가 아니었다. 그것은 신앙과 문화가 충돌하는 실험실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도시를 신앙의 무덤이라고 생각할 때, 켈러는 오히려 도시를 신앙의 최전선이라고 보았다.
그의 특별함은 확신보다 설명에 있었다. 그는 상대를 몰아붙이지 않았다. 대신 질문을 더 깊은 질문으로 연결했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전도사의 목소리보다 철학자의 논리를 들었고, 철학자의 논리 속에서 목회자의 따뜻함을 발견했다.
켈러의 책들은 그를 세계적 사상가로 만들었다. 특히 The Reason for God는 종교를 향한 현대인의 회의에 정면으로 답한 작품이다. 그는 “신앙은 생각을 포기하는 행위가 아니라, 생각을 끝까지 밀고 가는 행위”라고 보여주었다. 또한 The Prodigal God에서는 탕자의 비유를 완전히 뒤집었다. 문제는 집을 떠난 아들만이 아니라 집에 남아 있던 아들이기도 하다는 통찰은 수많은 독자를 놀라게 했다.
그는 거대한 체계를 세우는 학자는 아니었다. 새로운 교리를 창안한 신학자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오래된 복음을 현대인의 언어로 번역하는 데 탁월했다. 마치 수백 년 된 고전을 오늘 아침 신문처럼 읽히게 만드는 편집자 같았다.
켈러의 신학은 개혁주의 전통에 뿌리를 두었지만, 그의 시선은 울타리 밖을 향해 있었다. 그는 진리를 방어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진리가 왜 아름다운지 설명하려 했다. 그의 설교에는 논리가 있었고, 그의 논리에는 상상력이 있었다.
2023년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영향력은 여전히 살아 있다. 많은 설교자가 답을 전달한다. 켈러는 질문을 다시 설계했다. 많은 목회자가 교회를 세운다. 켈러는 도시 속에 복음의 언어를 심었다.
그를 한 문장으로 말하자면 이렇다.
“팀 켈러는 기독교를 더 크게 만든 사람이 아니라, 현대인이 다시 들을 수 있도록 더 선명하게 만든 사람이었다.”
또 한가지 그의 정체성과 비전을 나타내는 단어 Presbyterian(장로교)를 그가 유지한 것은 단순히 교단 충성심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장로교 전통이 가진 몇 가지 강점을 매우 높게 평가했다.
첫째, 지성과 신앙의 결합이다. 켈러는 장로교, 특히 Presbyterian Church in America 전통이 감정만이 아니라 사유를 중시한다고 보았다. 그는 복음이 현대 도시인의 질문을 견딜 만큼 지적으로 탄탄해야 한다고 믿었다. 뉴욕의 변호사, 교수, 금융인, 예술가들을 설득하려면 단순한 열정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둘째, 은혜 중심 신학이다. 그는 장로교의 개혁주의 전통이 인간의 성취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의 설교는 늘 “더 열심히 살아라”보다 “이미 주어진 은혜를 보라”에 가까웠다.
셋째, 교회의 공동체성과 질서이다. 켈러는 카리스마적 지도자 한 명이 모든 것을 이끄는 구조보다 장로들이 함께 책임지는 구조를 선호했다. 이는 목회자의 독주를 막고 교회의 지속성을 높인다고 생각했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장로교인이었지만 교파주의자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장로교인으로 소개했지만, 복음주의 전체를 위한 사역에 더 관심이 많았다. 실제로 그의 책은 장로교인보다 침례교, 성공회, 오순절, 무교파 교회에서 훨씬 넓게 읽혔다.
그 결과는 상당히 독특했다.
한편으로 그는 장로교의 이미지를 바꾸었다. 미국에서 장로교는 종종 “학문적이지만 차갑다”, “정통적이지만 대중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켈러는 그 전통이 도시 선교와 문화 참여에도 강력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또 다른 결과는 도시 중심 교회개척 운동이었다. 그는 Redeemer City to City를 통해 전 세계 수백 개 도시에서 교회 개척을 지원했다. 그의 영향을 받은 목회자들은 장로교인뿐 아니라 다양한 교단 출신이었다.
그러나 비판도 있었다. 일부 보수 장로교인들은 그가 문화와 대화하려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온건하다고 보았다. 반대로 일부 진보 진영은 그가 여전히 전통적 교리를 고수한다고 비판했다. 켈러는 양쪽 모두에게 완전히 환영받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그의 위치를 보여준다. 그는 “장로교를 키우려는 사람”이라기보다 “복음을 도시 속에서 설득력 있게 만들려는 사람”이었다. 장로교는 그가 선택한 집이었지만, 그의 시선은 언제나 집 밖 거리로 향해 있었다.
그래서 오늘날 켈러의 유산은 특정 교단의 승리라기보다, “개혁주의 신학도 현대 대도시의 언어를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데 있다. 그것이 그가 Presbyterian을 붙들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이자, 가장 큰 성과였다.
박삼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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