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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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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가 막힌 <조선일보> 사설, '가까운 싱가포르도 …'
고태진 기자 ktjmms@kornet.net
잠든 12살짜리 내 아들을 들여다본다. 얼마 전 다가오는 생일 선물로 좋아하는 게임CD 하나를 미리 사달라고 하도 떼쓰길래 하루에 30분씩만 한다는 다짐을 받고 사주었더니 세상을 다 얻은 듯이 기뻐했었다.
하지만 게임에 빠져서 할 일을 소홀히 할까봐 노심초사인 엄마·아빠의 마음을 아는지 나름대로 절제하고자 노력하는 기특한 모습을 보이곤 한다.
그런데 맙소사, 내 아들과 동갑내기인 12살 아이가 자살을 하다니! '물고기처럼 자유롭고 싶어' 스스로 죽음을 택하다니 정말 믿어지지 않는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얼마나 현실의 삶이 힘겨웠으며 희망을 찾을 수 없었기에 그러한 선택을 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여느 부모와 같이 자식 하나 잘 키워보겠다고 살아온 그 아이의 부모는 또 평생을 얼마나 큰 죄책감과 회한을 지니고 살아야 할 것인가?
물론 그 아이나 부모의 개인적인 사정의 영향도 얼마간 있을 것이나,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숨막히는 경쟁구도와 또 그에서 승리하기 위한 광적인 교육열을 생각해볼 때 이것은 비단 그 아이의 가족의 문제라고 치부할 수가 없는 것이다.
도대체 부모의 보살핌 속에 잠들어야 할 12살 어린아이가 늦은 시간까지 학원과 과외수업을 전전해야하는 현실이 과연 무엇 때문인지나 알기나 했었는지 궁금하다.
그런데 11월 12일자 조선일보의 사설을 보면 기가 막힌다. '가까운 싱가포르도 입시철 초등학생 자살은 많다'고 한다. ''장벽' 앞에 절망하는 아이는 조정과 단련도 필요하다'고도 한다. 또 '부모들 모두가 '어미사자'를 흉내내는 것은 아니겠으나, 아이들도 절벽 밑에서 기어올라 자랑스러운 '새끼'가 되고 싶다'고도 한다. 짐짓 현실을 비판하는 듯했으나 결국 냉혹한 현실을 인정하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우리 사회가 언제부터 이렇게 비정한 사회가 되었나?
싱가포르도 입시철에 초등학생 자살이 많으니 이까짓 것쯤은 절벽 밑에서 기어오르는 자랑스러운 '새끼'를 키우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인가?
최소한 우리 아이들이 자라는 환경이 양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정글이 되어서는 안 된다. 힘세건 약하건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경쟁에서 탈락하면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사회가 된다면 탈락자들이 택하는 길은 뻔하다. 스스로의 존재를 지우든지(자살을 하든지), 분노와 증오로 세상에 복수하려고 들든지일 것이다.
세계화의 시대에 유능하고 경쟁력 있는 인재를 키우려면 일찍부터 경쟁을 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야만 우리나라가 더욱 경쟁력 있는 나라가 된다고도 한다.
그들은 일찍부터 수준에 맞춰 교육하기 위해 고등학교, 나아가 중학교까지도 평준화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찍부터 될 아이들만 키우자는 주장이다. '되지 않을 아이'들은 그럼 어떡할 것인가? 그건 알 바 없다고 한다. 죽든지 말든지...
그런데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이 사회의 기득권층이거나, 그런 계층을 대변하는 언론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십분 이용하여 일찍부터 줄을 나눠 자손들에게 기득권을 공고히 물려주고 싶은 안달에 다름 아닌 것이다. 있는 사람들은 아예 미국 시민권을 자식에게 선물하든지, 조기 유학을 시키든지, 그도 아니면 엄청난 사교육비를 어릴 때부터 투자하든지 할 것이다.
자식사랑은 돈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이다. 돈 없는 사람이 돈 있는 사람들이 투자하는 것을 따라잡으려니 가랑이가 찢어진다.
도무지 삶의 목표가 가족의 건강하고 행복한 삶인지, 자식 교육시키기 위해 악착같이 돈 모으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세상이다. 자살한 불쌍한 아이의 부모는 열심히 돈벌어서 자식 학원비, 과외비만 잘 대면 자식이 잘 될 것이라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바란다. 내 아이가 고등학교 때까지는 엄마 아빠의 따뜻한 품에서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하며 미래의 꿈을 키우는 '자유로운 물고기'가 되었으면 한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우리 아이들을 그렇게 놔두게 하지 않는다.
오늘도 아이들은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학원으로 과외로 내몰린다. 심지어 우리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유아들에게조차 영어로 말할 것을 강요하는 기막힌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아무리 시험에서 1등을 한 대도 자기 자식이 자살하기를 바라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자살 사건을 보고도 '가까운 싱가포르도 입시철 초등생 자살은 많다'는 태연한 소리가 나오는 이유를 모르겠다. 우리의 아이가 장벽 앞에서 절망한다면 정녕 필요한 것은 따뜻한 위로와 격려이지 '조정과 단련'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아직은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가 아닌가?
내가 어렸을 적에 '개구쟁이라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라고 말하는 어린이 영양제 선전이 있었다. 내 아이들은 휴일에 나하고 같이 자전거 타러 가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 나도 우리 아이들과 자전거 타러 가는 게 즐겁다. 나와 내 아이들이 같이 자전거 타고 놀 만큼 건강하고 잘 커는데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제발 철없는 우리 아이들조차 천박한 자본주의의 경쟁지옥으로 몰아넣으려는 부추김은 없었으면 한다. 가뜩이나 살기 힘든 세상이다. 아이들만이라도 '자유로운 물고기'로 자라도록 하자. 그것이 또한 진정한 경쟁력을 가지는 아이로 자라는 길이다.
뛰어난 업적을 이룬 사람이 조기 교육을 통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진정한 경쟁력과 뛰어난 능력은 자유로운 상상력과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전공을 연마할 때 나오는 것이 아닌가? 일찍 핀 꽃은 다 피지도 못하고 일찍 시들어 버리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조선일보> 11월 12일자 사설 전문
[사설] “물고기처럼 자유로워지고 싶다”
한 어린 생명이 제 목숨을 끊은 엊그제 자살건은 우리 사회에 방치된 가장 비극적인 억압구조를 드러낸다. 이번 경우는 아니지만, 어린애의 눈높이로 봤을 때 쉴틈없는 과외, 성적부진, 따돌림, 학원폭력, 지나친 간섭, 몰이해, 학대, 가정불화…로 둘러싸이면 그것은 숨쉬기 힘든 장벽이 될 것이다.
지난9월 교육부가 낸 국감자료는 초등생의 53.1%가 가출충동을, 27.6%가 자살충동을 느낀 것으로 돼있다. 맞벌이 부부의 아들인 이 초등 5년생도 그중 하나였고, 아이는 마지막까지 세상과 통교하고픈 신호를 보냈다.
여자친구와 채팅에서 “자살도구를 준비해놨다 바이바이”라고 했고, 일기에는 “왜 어른보다 어린이가 자유시간이 적은지 이해할 수 없다”고 썼다. 열한살짜리 이 아이는 “죽고 싶을 때가 많다…물고기처럼 자유로워지고 싶다”고까지 했으나 최후의 호소를 귀담아 들은 어른은 없었다.
이 아이도 줄이은 ‘학원고(苦)’에 시달렸다시피, 초등생의 학원수강은 작년 115만5000명에서 올해 145만6000명으로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영·수 선행학습에다, ‘특목고 과외’, ‘대학입시 심층면접 준비’, 그리고 라틴어까지 가르치고 있다. 초등생은 현재 대한상의가 주관하는 워드인증시험 접수자의 33.4%를 차지하고 있다.
물론 아이를 온실에서 키울 순 없다. ‘장벽’ 앞에 절망하는 아이는 조정과 단련도 필요하다. 가까운 싱가포르도 입시철 초등생 자살은 많다. 부모들 모두가 ‘어미사자’를 흉내내는 것은 아니겠으나, 아이들도 절벽 밑에서 기어올라 자랑스러운 ‘새끼’가 되고 싶다. 이 아이 역시 그 고통속에도 오히려 “성적도 우수하고 성격도 쾌활했다”는 증언에서 어린 것의 안간힘을 본 것 같아 착잡하다. 사회전반의 ‘과열’도 문제지만, 그에앞서 아이가 마지막으로 내민 손을 잡아줄 창구가 없었던 것이 애통한 것이다
고태진 기자 ktjmms@kornet.net
잠든 12살짜리 내 아들을 들여다본다. 얼마 전 다가오는 생일 선물로 좋아하는 게임CD 하나를 미리 사달라고 하도 떼쓰길래 하루에 30분씩만 한다는 다짐을 받고 사주었더니 세상을 다 얻은 듯이 기뻐했었다.
하지만 게임에 빠져서 할 일을 소홀히 할까봐 노심초사인 엄마·아빠의 마음을 아는지 나름대로 절제하고자 노력하는 기특한 모습을 보이곤 한다.
그런데 맙소사, 내 아들과 동갑내기인 12살 아이가 자살을 하다니! '물고기처럼 자유롭고 싶어' 스스로 죽음을 택하다니 정말 믿어지지 않는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얼마나 현실의 삶이 힘겨웠으며 희망을 찾을 수 없었기에 그러한 선택을 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여느 부모와 같이 자식 하나 잘 키워보겠다고 살아온 그 아이의 부모는 또 평생을 얼마나 큰 죄책감과 회한을 지니고 살아야 할 것인가?
물론 그 아이나 부모의 개인적인 사정의 영향도 얼마간 있을 것이나,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숨막히는 경쟁구도와 또 그에서 승리하기 위한 광적인 교육열을 생각해볼 때 이것은 비단 그 아이의 가족의 문제라고 치부할 수가 없는 것이다.
도대체 부모의 보살핌 속에 잠들어야 할 12살 어린아이가 늦은 시간까지 학원과 과외수업을 전전해야하는 현실이 과연 무엇 때문인지나 알기나 했었는지 궁금하다.
그런데 11월 12일자 조선일보의 사설을 보면 기가 막힌다. '가까운 싱가포르도 입시철 초등학생 자살은 많다'고 한다. ''장벽' 앞에 절망하는 아이는 조정과 단련도 필요하다'고도 한다. 또 '부모들 모두가 '어미사자'를 흉내내는 것은 아니겠으나, 아이들도 절벽 밑에서 기어올라 자랑스러운 '새끼'가 되고 싶다'고도 한다. 짐짓 현실을 비판하는 듯했으나 결국 냉혹한 현실을 인정하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우리 사회가 언제부터 이렇게 비정한 사회가 되었나?
싱가포르도 입시철에 초등학생 자살이 많으니 이까짓 것쯤은 절벽 밑에서 기어오르는 자랑스러운 '새끼'를 키우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인가?
최소한 우리 아이들이 자라는 환경이 양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정글이 되어서는 안 된다. 힘세건 약하건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경쟁에서 탈락하면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사회가 된다면 탈락자들이 택하는 길은 뻔하다. 스스로의 존재를 지우든지(자살을 하든지), 분노와 증오로 세상에 복수하려고 들든지일 것이다.
세계화의 시대에 유능하고 경쟁력 있는 인재를 키우려면 일찍부터 경쟁을 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야만 우리나라가 더욱 경쟁력 있는 나라가 된다고도 한다.
그들은 일찍부터 수준에 맞춰 교육하기 위해 고등학교, 나아가 중학교까지도 평준화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찍부터 될 아이들만 키우자는 주장이다. '되지 않을 아이'들은 그럼 어떡할 것인가? 그건 알 바 없다고 한다. 죽든지 말든지...
그런데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이 사회의 기득권층이거나, 그런 계층을 대변하는 언론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십분 이용하여 일찍부터 줄을 나눠 자손들에게 기득권을 공고히 물려주고 싶은 안달에 다름 아닌 것이다. 있는 사람들은 아예 미국 시민권을 자식에게 선물하든지, 조기 유학을 시키든지, 그도 아니면 엄청난 사교육비를 어릴 때부터 투자하든지 할 것이다.
자식사랑은 돈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이다. 돈 없는 사람이 돈 있는 사람들이 투자하는 것을 따라잡으려니 가랑이가 찢어진다.
도무지 삶의 목표가 가족의 건강하고 행복한 삶인지, 자식 교육시키기 위해 악착같이 돈 모으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세상이다. 자살한 불쌍한 아이의 부모는 열심히 돈벌어서 자식 학원비, 과외비만 잘 대면 자식이 잘 될 것이라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바란다. 내 아이가 고등학교 때까지는 엄마 아빠의 따뜻한 품에서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하며 미래의 꿈을 키우는 '자유로운 물고기'가 되었으면 한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우리 아이들을 그렇게 놔두게 하지 않는다.
오늘도 아이들은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학원으로 과외로 내몰린다. 심지어 우리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유아들에게조차 영어로 말할 것을 강요하는 기막힌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아무리 시험에서 1등을 한 대도 자기 자식이 자살하기를 바라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자살 사건을 보고도 '가까운 싱가포르도 입시철 초등생 자살은 많다'는 태연한 소리가 나오는 이유를 모르겠다. 우리의 아이가 장벽 앞에서 절망한다면 정녕 필요한 것은 따뜻한 위로와 격려이지 '조정과 단련'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아직은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가 아닌가?
내가 어렸을 적에 '개구쟁이라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라고 말하는 어린이 영양제 선전이 있었다. 내 아이들은 휴일에 나하고 같이 자전거 타러 가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 나도 우리 아이들과 자전거 타러 가는 게 즐겁다. 나와 내 아이들이 같이 자전거 타고 놀 만큼 건강하고 잘 커는데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제발 철없는 우리 아이들조차 천박한 자본주의의 경쟁지옥으로 몰아넣으려는 부추김은 없었으면 한다. 가뜩이나 살기 힘든 세상이다. 아이들만이라도 '자유로운 물고기'로 자라도록 하자. 그것이 또한 진정한 경쟁력을 가지는 아이로 자라는 길이다.
뛰어난 업적을 이룬 사람이 조기 교육을 통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진정한 경쟁력과 뛰어난 능력은 자유로운 상상력과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전공을 연마할 때 나오는 것이 아닌가? 일찍 핀 꽃은 다 피지도 못하고 일찍 시들어 버리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조선일보> 11월 12일자 사설 전문
[사설] “물고기처럼 자유로워지고 싶다”
한 어린 생명이 제 목숨을 끊은 엊그제 자살건은 우리 사회에 방치된 가장 비극적인 억압구조를 드러낸다. 이번 경우는 아니지만, 어린애의 눈높이로 봤을 때 쉴틈없는 과외, 성적부진, 따돌림, 학원폭력, 지나친 간섭, 몰이해, 학대, 가정불화…로 둘러싸이면 그것은 숨쉬기 힘든 장벽이 될 것이다.
지난9월 교육부가 낸 국감자료는 초등생의 53.1%가 가출충동을, 27.6%가 자살충동을 느낀 것으로 돼있다. 맞벌이 부부의 아들인 이 초등 5년생도 그중 하나였고, 아이는 마지막까지 세상과 통교하고픈 신호를 보냈다.
여자친구와 채팅에서 “자살도구를 준비해놨다 바이바이”라고 했고, 일기에는 “왜 어른보다 어린이가 자유시간이 적은지 이해할 수 없다”고 썼다. 열한살짜리 이 아이는 “죽고 싶을 때가 많다…물고기처럼 자유로워지고 싶다”고까지 했으나 최후의 호소를 귀담아 들은 어른은 없었다.
이 아이도 줄이은 ‘학원고(苦)’에 시달렸다시피, 초등생의 학원수강은 작년 115만5000명에서 올해 145만6000명으로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영·수 선행학습에다, ‘특목고 과외’, ‘대학입시 심층면접 준비’, 그리고 라틴어까지 가르치고 있다. 초등생은 현재 대한상의가 주관하는 워드인증시험 접수자의 33.4%를 차지하고 있다.
물론 아이를 온실에서 키울 순 없다. ‘장벽’ 앞에 절망하는 아이는 조정과 단련도 필요하다. 가까운 싱가포르도 입시철 초등생 자살은 많다. 부모들 모두가 ‘어미사자’를 흉내내는 것은 아니겠으나, 아이들도 절벽 밑에서 기어올라 자랑스러운 ‘새끼’가 되고 싶다. 이 아이 역시 그 고통속에도 오히려 “성적도 우수하고 성격도 쾌활했다”는 증언에서 어린 것의 안간힘을 본 것 같아 착잡하다. 사회전반의 ‘과열’도 문제지만, 그에앞서 아이가 마지막으로 내민 손을 잡아줄 창구가 없었던 것이 애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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