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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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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공 없는 초식은 맹목이고 초식 없는 내공은 허무하다"
서민식
김동호 목사님께.
잘 계시던 동안교회를 나와 높은 뜻 숭의교회를 섬기시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저같이 맨 땅에 헤딩하듯 개척한 사람은 높은 뜻 숭의교회가 개척교회로 보이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부목사님께서 10월 20일(아시는 대로 교회 설립 1주년을 막 넘긴 때였습니다) 강도 시간에 "아직 우리 교회는 개척교회다"라고 하시는 것을 보니 뭔가 덜 갖추어진 것이 있나보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글을 쓰는 까닭은 목사님의 저서 '깨끗한 부자'(규장)를 읽고 그 내용에 대해 궁금한 점, 제가 좀 다르게 생각하는 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곧장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책을 읽으면서 내내 궁금했던 점이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생각하시는 "깨끗한"의 개념과 "부자"의 개념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 어떤 과정을 거치고 어떤 나쁜 짓들을 하지 않았을 때 "깨끗"하다고 할 수 있는지, 어느 정도 돈을 벌어야 "부자"라고 할 수 있는지 그 부분이 제시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런 개념들은 자로 잰 듯 어디까지가 깨끗하고 어디까지가 깨끗하지 않다, 통장에 얼마가 있어야 부자다, 라는 설명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최소한 몇 개라도 선은 그어야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해는 합니다. 제 짧은 목회 경험으로 보면 교인 수가 오백 명이 넘고 천 명이 넘는 교회의 목사님들은 각론에 약하셨습니다. 사실 약하신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 말씀하시지 않는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하여간 무슨 말씀을 하실 때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고 말씀하시는 경우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 까닭이 교인의 많음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얼마 전입니다(아니 어쩌면 그렇게 두루뭉실하게 말하기 때문에 많은 수의 교인이 모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교인 수가 많으면 별별 교인이 다 있을 터 그네들 마음에 상처가 될 만한 말을 함부로 쏟아놓을 수는 없을 겁니다. 그 사정을 이해하더라도 그 이전에 쓰신 '생사를 건 교회개혁'(규장)에선 상당히 세부적인 내용까지 언급하셨기에 저는 이번 '깨끗한 부자'에서도 어느 정도 구체적인 내용들이 써 있을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책은 다소 실망스러웠습니다.
책 내용을 보겠습니다.
목사님께서는 "물질은 복이 아니"고 "은사에 가깝다"(21. 이하 숫자만 쓰여있는 경우는 '깨끗한 부자'(2001.10.30. 초판)의 페이지입니다)고 하시면서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다 받은 것이 아니"(21)라고 하셨습니다. 현실적으로 예수 믿는 사람 모두가 많은 돈을 버는 것은 아니니 그 말씀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물론 보편적으로 예수를 잘 믿으면 물질적으로 안정되고 넉넉해진다"(15)는 말씀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이어 "그러나 그것이 절대적이지는 않다"(15)고 하셨지만 책 내내 진행되는 내용은 "부함과 강함에 대해 좀더 긍정적인 눈을 가져라", "할 수 있는 대로 강한 자가 되라. 높은 자가 되라. 부한 자가 되라. 뛰어난 사람이 되라. 그렇게 되기를 힘쓰라"(이상 196) 입니다. 결론적으로 "돈에 대해, 세상에 대해, 권력에 대해 반듯한 믿음의 자세를 갖춘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즉시 천국 열쇠를 주셔서 우리 마음대로 이 땅에서도 '풀고 매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 땅에서 부자도 되고 권력자도 될 것이다"(204)까지 다다릅니다. 이 결론대로라면 가난한 사람들은 돈에 대해, 세상에 대해, 권력에 대해 반듯한 믿음의 자세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 결론까지 가는 과정은 찬찬히 살피기로 하고, 먼저 '은사'에 대해 따지겠습니다. IVP 성경사전(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에 보니 은사는 "단수형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선물(롬 5:15, 16; 6:23), 또는 어떤 특별한 은총이나 자비(고전 7:7; 고후 1:11)를 칭하는데 쓰였고, 복수형은 주로, 특별한 봉사를 위해 신자에게 주어진 성령의 갖가지 은사들을 일컫는데 쓰였다"고 써 있습니다. 이어 "이 은사들의 주요한 목적은, 교회(조직으로서)를 세우는 데 유익하게 사용되는 것이다(고전 12:4 이하)(괄호는 원문에 있던 것)"랍니다. 이어 본래적인 은사(말하는 것, 예언, 영 분별, 가르치는 것, 방언, 통역 등)에 대한 설명이 있고 "한편 실무적인 봉사를 위한 은사 중...<중략>... 이른바 '자비의 은사'에는 (약한 자를) '돕는 행위', '구제', '긍휼을 베푸는 일', '섬기는 일'(특히 '집사'의 소임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임) 등이 속한다"(역시 괄호는 원문에 있던 것)라고 나와 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물질이 은사다"라고 하지 않고 "은사에 가깝다"(21)고 하셨지만, 제가 알기로는 돈은 은사와 전혀 가깝지 않습니다. 약한 자(또는 가난한 자)를 돕거나 구제하는 것은 그 마음이 은사라는 것이지 돈이 은사라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누가 어떤 사람을 칼로 찔러 죽였을 때 그 칼에 죄를 묻지 않고 사람에게 죄를 묻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은사는 돈이 아니고 (돈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 돕고자 하는 마음이라는 겁니다. 이런~ 처음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합니다.
목사님께서는 "우리가 소유한 물질이 과연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를 늘 판단해야 한다"(23)고 하시며 "하나님의 방식과 법대로 번 돈이라야 하나님이 주시는 돈이 된다"(23), "하나님의 방식과 법대로 돈을 벌어도 그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쓰지 않으면 그 돈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돈이 되고 만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것을 모두 자기 것으로 알아 욕심 사납게 땅에 쌓아두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물질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이상 24)고 하십니다. 그리고 10만원 짜리 운동화의 예를 들어 '존재가치, 소유가치'를 말씀하시곤 "하나님의 뜻과 말씀대로 살면 사람들은 누구나 궁극적으로 부유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믿는다"(72)고 하십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누구나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돈과 관련된 내용이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곧 이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와 상급으로 주시는 부가 있다... 그것을 청부(淸富)라고 부를 수 있다"(72)는 내용만 없었더라면 은혜를 받을 뻔 했습니다. 누구나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지만 그것은 돈과 관련된 내용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돈과 상관없이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내용 아닙니까?
읽다 보니 목사님 책에 각론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목사님께선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는 예수의 말씀을 인용하여 그 법에 대해 설명하셨습니다. 영수증 예를 들었던 도둑질한 돈, 몸 파는 여자의 헌금에 빗댄 정당하지 못한 직업으로 벌어들인 돈, 도박의 경우처럼 불로소득으로 벌어들인 돈, 권력과 지위를 이용하는 등 공정하지 않은 방법으로 벌어들인 돈 등등은 하늘에 쌓을 수 없다(이상 103-111)는 내용입니다. 너무 포괄적인 설명이 아닌가 싶지만 이런 기준들만이라도 모두 지킨 사람이 있을까 했는데 목사님께서는 이랜드의 박성수 회장을 예로 들었습니다. "뇌물 주지 않고 탈세하지 않는"(111) 박 회장은 편법으로 상품권을 유통시키지 않을 뿐 아니라 "망하면 망하리라는 각오로 10년쯤 열심히 뛰다보니 자기가 일등이 되어 있"(112)었다는 간증을 인용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랜드에서 노동조합을 탄압했던 것은 어떻게 되는 일입니까? "진리가 밥 먹여준다"고 당당하게(113) 내세울 수 있는 근거가 이랜드라 하셨는데 혹시 그 회사 직원들이 어떻게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저는 사업하는 사람들에게 적용할 하나님의 방식과 법에 이 정도는 포함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첫째, 부가세(버는 돈의 10%라는 것을 아실 겁니다), 재산세 등 각종 세금을 제대로 낸다(절세 운운하지 말고 정직하게 다 내라는 겁니다). 둘째, 노동자들의 임금을 착취하지 않는다(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라는 뜻 뿐 아니라 이랜드처럼 아침부터 나와 회사 청소를 시키는 등의 일은 명백한 노동 착취입니다). 셋째, 노동자들을 회사의 동반자로 인식하고 노조를 불온시하지 않는다. 이 세 가지는 대단히 진보적인 생각도 아니고 단지 이 나라 법에 규정되어 있는 내용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쩨쩨하게 나라 법에 매여 그것만 지킬 수 있겠습니까마는 일단은 그것만이라도 지키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덧붙인다면 물건을 주고 받을 때 현금으로 결제하는 것(혹시나 싶어 설명하겠습니다. 하청 업체에서 물건이 오면 대부분 힘있는 회사들은 어음을 끊어주지 않습니까? 그게 잘못된 관행임을 이미 아실 겁니다), 여성 노동자들에게 육아 휴직(유급)을 정당하게 보장하는 것 등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과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목사님께서 하늘에 쌓을 수 없다고 하신 첫 번째, 곧 도둑질한 돈이라는 것이 설마 소매치기나 은행강도같은 경우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목사님 말씀마따나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수시로 도둑질하며 살아가고 있"(104)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에게 정당한 임금을 주지 않고, 또는 이른바 비자금이라는 것을 만드는 기업주들의 행태 역시 도둑질에 해당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목사님 책에서 유일하게 실명으로 거론된 제대로 된 부자인 이랜드 박성수 회장의 경우는 위에 쓴 몇몇 이유로 적당한 예가 아닙니다. 아, 물론 모르실 수 있습니다. 어찌 세상 돌아가는 것을 모두 아실 수 있습니까? 그렇지만 아무리 부자에게 초점을 맞춘다 하더라도 노동자라는 이유만으로 터무니 없는 대우(흔히 착취라고 합니다)를 받는 그들에게도 한 번쯤 관심을 가지실 필요가 있기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목사님께서는 이상과 같이 깨끗한 부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신 후, 돈을 벌더라도 그 돈이 모두 내 것이 아님을 다소 장황하게 설명하셨습니다. 내 것이 아닌 부분을 살펴보니 크게 두 가지로 나누셨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몫이고 둘째는 다른 사람의 몫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몫에선 십일조가 강조되었고, 다른 사람의 몫에서는 세금 문제, 임금, 노동, 빚, 구제가 설명되어 있었습니다. 내용은, 세금 잘 내라, 정당한 임금을 주라, 품삯을 받은 만큼 일 해라, 빚이 있다면 (먼저)최선을 다해 빚을 갚아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그 몫을 떼라, 입니다. 비록 두루뭉실하게 말씀하시긴 했지만 맞는 말씀이니 제가 뭐라 할 부분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여전히(어쩌면 영원히 그렇겠지만) 노조 문제는 거론하지 않으십니다. "크리스천 기업가들은 기업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위해 기업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141)고 하셨는데 그 방안이 작업 환경을 제대로 만들어 주고 등록금, 주택 자금을 지원해 주는 것이라면 삼성과 다를 바 없습니다. "너네에게 다 줄테니(사실 다 주는 것도 아니지만) 노조만은 안 된다" 아닙니까? 보다 높은 보수, 쾌적한 작업 환경 등이 중요하긴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사업주의 시혜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고 노동자를 동등한 인격체로 대우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 그게 기독교 정신입니다. 예전 사진이지만 제가 굳이 이랜드 노조에서 따온 사진을 보십시오. 사진을 보면 아시겠지만 "성실 교섭 촉구를 위한 단식 결의"랍니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위치로 이야기하자는 겁니다. 사장님들은 그걸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기독교 정신대로라면, 돈 더 주고, 좋은 환경을 꾸며주고, 아파트 줄테니... 가 아니고 그래 너나 나나 하나님 앞에서 귀한 존재니 동등하게 이야기하자, 그게 필요하다는 겁니다. 노동 부분에서는 어느 사업가의 말을 인용한 후 "우리는 하루에 최소한 여덟 시간씩 일하겠다는 것을 전제로 임금을 받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하루 여덟 시간의 일을 해야 한다"(143)고 하셨습니다. 근래 문제가 되는 '주 5일 근무'의 경우 어느 쪽이 더 발악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프랑스에서는 이렇다더라, 미국은 이렇다더라, 등의 이야기에 그건 그 나라 형편이 좋아서 그런 거고...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아직 더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루에 여덟 시간 일하는 것을 '전제'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그 외에 일하는 것은 '시간 외 수당'을 지급해야 한다는 것도 아실 겁니다. 이랜드를 비롯한 여러 "예수 믿는" 사장들이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품삯을 받은 만큼 일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다"(144) 맞습니다. 그러나 이건 양비론입니다. 너도 잘못했고 그 옆의 너도 잘못했고... "아니 대감 마님, 그렇다면 누가 잘못했다는 말씀이십니까?", "허허~ 임자 말도 옳소" 예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의 잘못을 지적하시면서 그 앞에 있던 일반인들에게 너희는 그렇게 하지 마라고 하셨지 그들이 이런저런 잘못이 있는데 너네라고 뭐 잘하고 있는 줄 아냐는 식으로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어떤 말이든 대상이 정확하게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곧 말 그 자체가 편드는 일이라는 겁니다. 책을 보면 목사님께서 여러 사람들 말을 익명으로 인용하시면서 노동자의 말을 하나도 담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시무하시는 교회에 돈 많은 사장님들과 사장 후보들만 다니는 것은 아닐 텐데, 어쩌면 대기업의 노조에서 활동하는 성도들도 있을 텐데 그들의 목소리가 전혀 없다는 것은 의외였습니다(아시겠지만 노동 환경은 중소기업체가 더 열악합니다). "직원들이 하루 세 시간만 집중해서 일을 해주면 좋겠다"(143)는 어느 사업가의 말을 인용하셨다면, 그 전 항목인 '임금'에서 "사장들이 회사 돈으로 차 사고, 집 사고, 집안 가구 바꾸는 짓 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노동자의 말 쯤은 인용하셨어야 그나마 공평하지 않았겠는가, 그런 생각입니다. 높은 뜻 숭의교회에 노동자들이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그들과는 개인적으로 전혀 만나는 자리가 없기 때문에 그들의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고 하신다면... 쩝... 입니다.
부자가 되되 하늘에 보물을 쌓는 부자가 되어야 하는데, 땅에 쌓아서는 안 되는 이유가 "돈을 믿을 수 없고", "돈에 대한 욕심은 우리 눈을 나쁘게 하기 때문이고", "돈에 대한 욕심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앗아가기 때문"(160-166)이기에 그렇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돈을 믿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면 "돈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땅에 보물을 쌓지 않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가난한 사람이 되려고 할 필요"가 없으니 "도리어 성경은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부자가 되되 그 부함을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고 말씀하신다"(167)고 하셨습니다. 성경 어느 부분에 "적극적으로 부자가 되"라는 말씀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도 그 앞에 인용하신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마 6:20)(166)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으신 듯 합니다. 되새기자면 이 말씀은 산상수훈 중에 있는 말씀으로 그 앞에는 '주기도'가 있고,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라는 말씀이 있고, 외식하지 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19절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이어 20절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뜷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24절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리고 25절부터 "먹고 마시고 입는 거 염려하지 말라" 그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 후 32절부터,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을 그 날에 족하니라"고 쓰여 있습니다. 당연하게도 "기독교에서 가난은 죄도 아니고 부끄러움도 아"(167)닙니다. 그렇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부자가 되"(167)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성경은 우리의 부함과 가난함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구원 사역이 좌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편 '의로운 부자 되기'에서 50억원의 3분의 2 이상 되는 액수를 헌금한 장로님 예(169)를 드셨는데 이로 미루어 결국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는 성경 말씀을 '헌금 하기'(십일조, 구제가 다 포함되는)로 이해하면 되겠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책장을 넘기니 "이 장로님과 같은 의로운 부자가 많으면 좋겠다. 자기의 필요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를 위해 큰돈을 벌고 쓸 줄 아는 사람이 많으면 좋겠다"(170)는 내용이 나옵니다. 제가 맞게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목사님의 또 다른 책 '생사를 건 교회개혁'에는 '마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부록으로 실려 있었습니다. 출판사에서 분위기 띄우려 끼워 넣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베드로 성당을 보고 개탄했던 그이 같으면 50억을 들인 예배당, 100억을 들인 동안교회 예배당을 보고 "이만해도 싸게 지었군..." 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이는 베드로 성당을 지으려 면죄부를 발행한 R.C.C. 지도부를 욕했습니다. 면죄부 자체로도 죄가 되지만, 하나님께서는 혹세무민하여 돈을 긁어모은 것에 대해서도 죄를 묻지 않겠습니까? 성전을 짓는데 그만한 돈도 들이지 않겠다는 거냐... 제가 잘못 넘겨짚었습니다. 건물을 말하는 성전 개념은 이미 없어지고 우리가 성전(참조, 고전 3:16)임을 목사님께서 모르실 리 없습니다. 단지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100억 짜리 예배당을 지은 호사가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간다는 북한의 형제들(152)에게 주라고 1억을 헌금한 것으로는 상쇄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 잊었습니다. 지금은 동안교회를 떠나 높은 뜻 숭의교회에 계신 걸 깜박했습니다. 그 교회는 예배당 없이 숭의여대 강당을 빌어 사용하고 있는 것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100억 짜리 예배당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신다면 어디서라도 "그때 동안교회 예배당을 그렇게 많은 돈으로 지을 필요가 없었다"고 말씀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으니 당연하지 않습니까? 목사님께서 생각하시는 '하늘에 쌓는 보물'은 "십일조, 구제, 그리고 예배당 지을 때 연보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경 어느 부분에 이런 것들을 두고 하늘에 쌓는 것이라 하는지, 저는 과문한 탓에 전혀 알지 못하겠습니다. 앞서 마태복음 6장을 살피지 않았습니까? "보물을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마 6:19-20)는 말씀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로 결론지어 집니다. 예배당같이 물질적인 문제를 놓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저는 목사님께서 보다 일상적인 내용에 대해 세밀하게 고민하시길 바랍니다. 단적으로 높은 뜻 숭의교회에도 사무 보는 성도들이 있을 텐데, 그 성도들에게 하루 여덟 시간 노동을 보장하십니까? 높은 뜻 숭의교회에는 주일 저녁 예배나 수요 예배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별 문제가 안될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을 쓰실 당시에 계셨던 동안교회에서도 사무 보는 성도들에게 여덟 시간 노동을 보장하셨습니까?(그 말이 '최소한'(143)일 뿐이라면 그것도 역시 쩝...) 수요일이나 금요일에 아침에 나와 밤늦게 예배(또는 기도회)까지 다 하고 가야 한다고 하시지는 않았습니까? 예배는 예배일 뿐...? 제가 꽤 많은 수의 교인이 모이는 교회에서 부교역자 생활을 할 때 거기 있던 사무실 성도들은 수요 예배를 노동의 연장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회에서 교인들에게 수요 예배 참석을 강요하지 못하듯 사무실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제가 있던 교회에서는 "교회에서 돈을 받으면서 예배를 빠져?"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물론 목사님을 이렇게 수준 낮은 목사들과 같이 취급하는 것은 천만부당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을 다스리는 자리에 서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동등한 자리에 놓고 생각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이는 곧 (누구라도)부자가 되어서 그럴 수 있겠는가(돕고 섬기고(180)) 라는 질문에 닿아있으며 보다 근본적으로 노동자들을 사람 대우 하고, 노조를 인정하고, 비자금을 형성하지 않고, 하청 업체를 업신여기지 않고, 세금을 꼬박꼬박 내면서도 목사님께서 생각하시는 그만한 부자가 될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정직한"이라는 제한 사항을 가슴에 품고 돈을 번다면, 비록 생활에 어려움이 없을 만큼 벌고 쓸 수는 있어도 남들에게 부자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벌기는 힘듭니다. 그 "정직한"에 세상 법적인 규정뿐 아니라 기독교인으로서 지켜야 할 여러 '명령'을 포함시킨다면 더 더욱 힘듭니다. 그러므로 그 돈으로 예배당을 짓든 구제를 하든 원칙적으로 그 돈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자들과 과부'(막 12:41-44) 아시잖습니까? 왜 하필 부자들의 많은 연보와 비교하여 과부의 두 렙돈을 말씀하셨을까... 왜 성경에는 부자가 자기 돈 다 털어내는 내용이 나오지 않을까... 예전에 그런 고민을 했었습니다. 답은, 부자는 그럴 수 없다, 였습니다.
책 표지에 "크리스천이 고민하는 돈 문제의 명쾌한 해답"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습니다. 이 나라 크리스천들이 돈 문제를 놓고 "정직하게 버는 방법이 무엇인가" 고민하는지, 아니면 "예수든 뭐든 어떻게 해야 떼돈을 벌 수 있을까" 고민하는지 모르겠지만 아주 막되먹지 않은 교인이 "죄악이 가득한 세상이라지만... 먹고 살자니 돈은 벌어야겠고... 기왕 버는 거 남들만큼은 벌어야겠고..."에 대한 답이라면 "명쾌한 해답"이 맞습니다. 아시겠지만, 지금 보기에 그렇게 황당한 면죄부도 당시에는 치밀한 논리를 갖고 있었습니다(미덥지 않으시면 자크 르 고프가 쓴 "연옥의 탄생"(문학과지성사)을 권해드립니다).
꼭 의도는 그렇지 않더라도 이 책을 읽는 예수 믿는 젊은이들이 몇몇 내용(도둑질 하지 마라, 권력을 이용해서 돈 벌지 마라 등등)을 지키고 그 결과 많은 돈을 벌어서 십일조, 구제, 예배당 건축에 "많"(막 12:41)이 내면 자신이 "깨끗한 부자"라고 생각할까 봐 저으기 염려가 됩니다. 성경에 기초한 깨끗한 부자는, 최소한 지금 이 나라에서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목사님께선 익숙하시지 않겠지만 글 부제목을 "내공 없는 초식은 맹목이고 초식 없는 내공은 허무하다"라고 달았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선배 목사가 가끔 쓰는 말입니다. 둘 다 중요합니다.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고 그 말씀을 적절하게 강도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깨닫고 실천하게 하는 것 모두 중요합니다. 뭐가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적용하려 하고 교육하려 해도 말씀대로 되지 않습니다. 맹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초식은 화려하나 내공이 없더라... 제가 목사님의 책을 읽고 섬찟한 느낌이 들었던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었나 봅니다.
건덕(建德)에 더욱 힘쓰시길 바랍니다.
덧붙여.
목사님께선 성경 말씀을 적용할 사람(주체)이 있고 적용 받을 사람(대상)이 있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셨습니다. 예컨대 예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잠들었던 베드로에게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은 약하도다"(마 26:41)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께서 말씀하셨으니 맞는 것이지 베드로가 그 말을 하는 것이 맞냐는 지적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또 다른 강도 시간에 비슷하게 바울의 예를 들어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엡 5:22)는 아내들이,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 5:25)는 남편들이 스스로 알아들어야 할 말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뒤바뀌면 안 된다는 지적이셨습니다. 그 지적에 비추어 저도 목사님께 한 가지 지적해 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은 목사가 어떤 차를 타고 다니는지, 몇 평짜리 아파트에서 사는지, 한 달에 생활비는 얼마나 받는지, 그런 것에 지나치게 관심이 많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 목사의 목사 됨을 판단한다"(194)면서 "좁은 아파트에서 사는 것 또한 거룩함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194)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작은 차를 타고 좁은 집에 살고 적은 돈으로 생활하는 목사가 할 말이지 큰 차를 타고 넓은 아파트에서 살면서 많은 돈으로 생활하시는 목사님이 하실 말씀이 아닙니다. 목사님께서 강도 시간에 말씀하신 것처럼 "그렇게 하면 웃깁니다"
위내용에서 하나 더 말씀드리자면 "넓은 아파트에서 사는 것이 성공의 척도가 아니라면 좁은 아파트에서 사는 것 또한 거룩함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194)고 하셨는데, 이 말은 마치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키가 크다고 해서 주택에 사는 사람이 대학을 나왔다고 볼 수 없다"는 말처럼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성공과 거룩함은 등치 개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적하는 김에 하나 더 하겠습니다. 다른 교회에 가셔서 상표처럼 사용하시는 형식이라 굳이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교인들에게 "가난한 사람과 부자가 서로 다툴 때 하나님은 과연 누구 편을 드시겠는가?"라는 질문을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대부분의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답이다. 정답은 둘 중 '옳은 사람'이"(44; 비슷하게 69에 다시 쓰여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시는지 두 번씩이나 쓰셨는데, 이런 종류의 질문은 마치 "100층짜리 빌딩에서 백인과 흑인이 뛰어 내렸다. 누가 살겠는가? 흔히 백인이 살았다고 한다. 틀렸다. 답은 낙하산을 매고 뛴 사람이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려 하는지 잘 아실 겁니다.
덧붙임이 너무 길었습니다. 이만...
서민식
김동호 목사님께.
잘 계시던 동안교회를 나와 높은 뜻 숭의교회를 섬기시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저같이 맨 땅에 헤딩하듯 개척한 사람은 높은 뜻 숭의교회가 개척교회로 보이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부목사님께서 10월 20일(아시는 대로 교회 설립 1주년을 막 넘긴 때였습니다) 강도 시간에 "아직 우리 교회는 개척교회다"라고 하시는 것을 보니 뭔가 덜 갖추어진 것이 있나보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글을 쓰는 까닭은 목사님의 저서 '깨끗한 부자'(규장)를 읽고 그 내용에 대해 궁금한 점, 제가 좀 다르게 생각하는 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곧장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책을 읽으면서 내내 궁금했던 점이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생각하시는 "깨끗한"의 개념과 "부자"의 개념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 어떤 과정을 거치고 어떤 나쁜 짓들을 하지 않았을 때 "깨끗"하다고 할 수 있는지, 어느 정도 돈을 벌어야 "부자"라고 할 수 있는지 그 부분이 제시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런 개념들은 자로 잰 듯 어디까지가 깨끗하고 어디까지가 깨끗하지 않다, 통장에 얼마가 있어야 부자다, 라는 설명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최소한 몇 개라도 선은 그어야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해는 합니다. 제 짧은 목회 경험으로 보면 교인 수가 오백 명이 넘고 천 명이 넘는 교회의 목사님들은 각론에 약하셨습니다. 사실 약하신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 말씀하시지 않는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하여간 무슨 말씀을 하실 때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고 말씀하시는 경우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 까닭이 교인의 많음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얼마 전입니다(아니 어쩌면 그렇게 두루뭉실하게 말하기 때문에 많은 수의 교인이 모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교인 수가 많으면 별별 교인이 다 있을 터 그네들 마음에 상처가 될 만한 말을 함부로 쏟아놓을 수는 없을 겁니다. 그 사정을 이해하더라도 그 이전에 쓰신 '생사를 건 교회개혁'(규장)에선 상당히 세부적인 내용까지 언급하셨기에 저는 이번 '깨끗한 부자'에서도 어느 정도 구체적인 내용들이 써 있을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책은 다소 실망스러웠습니다.
책 내용을 보겠습니다.
목사님께서는 "물질은 복이 아니"고 "은사에 가깝다"(21. 이하 숫자만 쓰여있는 경우는 '깨끗한 부자'(2001.10.30. 초판)의 페이지입니다)고 하시면서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다 받은 것이 아니"(21)라고 하셨습니다. 현실적으로 예수 믿는 사람 모두가 많은 돈을 버는 것은 아니니 그 말씀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물론 보편적으로 예수를 잘 믿으면 물질적으로 안정되고 넉넉해진다"(15)는 말씀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이어 "그러나 그것이 절대적이지는 않다"(15)고 하셨지만 책 내내 진행되는 내용은 "부함과 강함에 대해 좀더 긍정적인 눈을 가져라", "할 수 있는 대로 강한 자가 되라. 높은 자가 되라. 부한 자가 되라. 뛰어난 사람이 되라. 그렇게 되기를 힘쓰라"(이상 196) 입니다. 결론적으로 "돈에 대해, 세상에 대해, 권력에 대해 반듯한 믿음의 자세를 갖춘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즉시 천국 열쇠를 주셔서 우리 마음대로 이 땅에서도 '풀고 매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 땅에서 부자도 되고 권력자도 될 것이다"(204)까지 다다릅니다. 이 결론대로라면 가난한 사람들은 돈에 대해, 세상에 대해, 권력에 대해 반듯한 믿음의 자세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 결론까지 가는 과정은 찬찬히 살피기로 하고, 먼저 '은사'에 대해 따지겠습니다. IVP 성경사전(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에 보니 은사는 "단수형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선물(롬 5:15, 16; 6:23), 또는 어떤 특별한 은총이나 자비(고전 7:7; 고후 1:11)를 칭하는데 쓰였고, 복수형은 주로, 특별한 봉사를 위해 신자에게 주어진 성령의 갖가지 은사들을 일컫는데 쓰였다"고 써 있습니다. 이어 "이 은사들의 주요한 목적은, 교회(조직으로서)를 세우는 데 유익하게 사용되는 것이다(고전 12:4 이하)(괄호는 원문에 있던 것)"랍니다. 이어 본래적인 은사(말하는 것, 예언, 영 분별, 가르치는 것, 방언, 통역 등)에 대한 설명이 있고 "한편 실무적인 봉사를 위한 은사 중...<중략>... 이른바 '자비의 은사'에는 (약한 자를) '돕는 행위', '구제', '긍휼을 베푸는 일', '섬기는 일'(특히 '집사'의 소임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임) 등이 속한다"(역시 괄호는 원문에 있던 것)라고 나와 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물질이 은사다"라고 하지 않고 "은사에 가깝다"(21)고 하셨지만, 제가 알기로는 돈은 은사와 전혀 가깝지 않습니다. 약한 자(또는 가난한 자)를 돕거나 구제하는 것은 그 마음이 은사라는 것이지 돈이 은사라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누가 어떤 사람을 칼로 찔러 죽였을 때 그 칼에 죄를 묻지 않고 사람에게 죄를 묻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은사는 돈이 아니고 (돈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 돕고자 하는 마음이라는 겁니다. 이런~ 처음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합니다.
목사님께서는 "우리가 소유한 물질이 과연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를 늘 판단해야 한다"(23)고 하시며 "하나님의 방식과 법대로 번 돈이라야 하나님이 주시는 돈이 된다"(23), "하나님의 방식과 법대로 돈을 벌어도 그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쓰지 않으면 그 돈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돈이 되고 만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것을 모두 자기 것으로 알아 욕심 사납게 땅에 쌓아두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물질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이상 24)고 하십니다. 그리고 10만원 짜리 운동화의 예를 들어 '존재가치, 소유가치'를 말씀하시곤 "하나님의 뜻과 말씀대로 살면 사람들은 누구나 궁극적으로 부유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믿는다"(72)고 하십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누구나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돈과 관련된 내용이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곧 이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와 상급으로 주시는 부가 있다... 그것을 청부(淸富)라고 부를 수 있다"(72)는 내용만 없었더라면 은혜를 받을 뻔 했습니다. 누구나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지만 그것은 돈과 관련된 내용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돈과 상관없이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내용 아닙니까?
읽다 보니 목사님 책에 각론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목사님께선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는 예수의 말씀을 인용하여 그 법에 대해 설명하셨습니다. 영수증 예를 들었던 도둑질한 돈, 몸 파는 여자의 헌금에 빗댄 정당하지 못한 직업으로 벌어들인 돈, 도박의 경우처럼 불로소득으로 벌어들인 돈, 권력과 지위를 이용하는 등 공정하지 않은 방법으로 벌어들인 돈 등등은 하늘에 쌓을 수 없다(이상 103-111)는 내용입니다. 너무 포괄적인 설명이 아닌가 싶지만 이런 기준들만이라도 모두 지킨 사람이 있을까 했는데 목사님께서는 이랜드의 박성수 회장을 예로 들었습니다. "뇌물 주지 않고 탈세하지 않는"(111) 박 회장은 편법으로 상품권을 유통시키지 않을 뿐 아니라 "망하면 망하리라는 각오로 10년쯤 열심히 뛰다보니 자기가 일등이 되어 있"(112)었다는 간증을 인용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랜드에서 노동조합을 탄압했던 것은 어떻게 되는 일입니까? "진리가 밥 먹여준다"고 당당하게(113) 내세울 수 있는 근거가 이랜드라 하셨는데 혹시 그 회사 직원들이 어떻게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저는 사업하는 사람들에게 적용할 하나님의 방식과 법에 이 정도는 포함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첫째, 부가세(버는 돈의 10%라는 것을 아실 겁니다), 재산세 등 각종 세금을 제대로 낸다(절세 운운하지 말고 정직하게 다 내라는 겁니다). 둘째, 노동자들의 임금을 착취하지 않는다(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라는 뜻 뿐 아니라 이랜드처럼 아침부터 나와 회사 청소를 시키는 등의 일은 명백한 노동 착취입니다). 셋째, 노동자들을 회사의 동반자로 인식하고 노조를 불온시하지 않는다. 이 세 가지는 대단히 진보적인 생각도 아니고 단지 이 나라 법에 규정되어 있는 내용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쩨쩨하게 나라 법에 매여 그것만 지킬 수 있겠습니까마는 일단은 그것만이라도 지키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덧붙인다면 물건을 주고 받을 때 현금으로 결제하는 것(혹시나 싶어 설명하겠습니다. 하청 업체에서 물건이 오면 대부분 힘있는 회사들은 어음을 끊어주지 않습니까? 그게 잘못된 관행임을 이미 아실 겁니다), 여성 노동자들에게 육아 휴직(유급)을 정당하게 보장하는 것 등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과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목사님께서 하늘에 쌓을 수 없다고 하신 첫 번째, 곧 도둑질한 돈이라는 것이 설마 소매치기나 은행강도같은 경우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목사님 말씀마따나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수시로 도둑질하며 살아가고 있"(104)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에게 정당한 임금을 주지 않고, 또는 이른바 비자금이라는 것을 만드는 기업주들의 행태 역시 도둑질에 해당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목사님 책에서 유일하게 실명으로 거론된 제대로 된 부자인 이랜드 박성수 회장의 경우는 위에 쓴 몇몇 이유로 적당한 예가 아닙니다. 아, 물론 모르실 수 있습니다. 어찌 세상 돌아가는 것을 모두 아실 수 있습니까? 그렇지만 아무리 부자에게 초점을 맞춘다 하더라도 노동자라는 이유만으로 터무니 없는 대우(흔히 착취라고 합니다)를 받는 그들에게도 한 번쯤 관심을 가지실 필요가 있기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목사님께서는 이상과 같이 깨끗한 부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신 후, 돈을 벌더라도 그 돈이 모두 내 것이 아님을 다소 장황하게 설명하셨습니다. 내 것이 아닌 부분을 살펴보니 크게 두 가지로 나누셨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몫이고 둘째는 다른 사람의 몫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몫에선 십일조가 강조되었고, 다른 사람의 몫에서는 세금 문제, 임금, 노동, 빚, 구제가 설명되어 있었습니다. 내용은, 세금 잘 내라, 정당한 임금을 주라, 품삯을 받은 만큼 일 해라, 빚이 있다면 (먼저)최선을 다해 빚을 갚아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그 몫을 떼라, 입니다. 비록 두루뭉실하게 말씀하시긴 했지만 맞는 말씀이니 제가 뭐라 할 부분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여전히(어쩌면 영원히 그렇겠지만) 노조 문제는 거론하지 않으십니다. "크리스천 기업가들은 기업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위해 기업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141)고 하셨는데 그 방안이 작업 환경을 제대로 만들어 주고 등록금, 주택 자금을 지원해 주는 것이라면 삼성과 다를 바 없습니다. "너네에게 다 줄테니(사실 다 주는 것도 아니지만) 노조만은 안 된다" 아닙니까? 보다 높은 보수, 쾌적한 작업 환경 등이 중요하긴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사업주의 시혜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고 노동자를 동등한 인격체로 대우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 그게 기독교 정신입니다. 예전 사진이지만 제가 굳이 이랜드 노조에서 따온 사진을 보십시오. 사진을 보면 아시겠지만 "성실 교섭 촉구를 위한 단식 결의"랍니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위치로 이야기하자는 겁니다. 사장님들은 그걸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기독교 정신대로라면, 돈 더 주고, 좋은 환경을 꾸며주고, 아파트 줄테니... 가 아니고 그래 너나 나나 하나님 앞에서 귀한 존재니 동등하게 이야기하자, 그게 필요하다는 겁니다. 노동 부분에서는 어느 사업가의 말을 인용한 후 "우리는 하루에 최소한 여덟 시간씩 일하겠다는 것을 전제로 임금을 받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하루 여덟 시간의 일을 해야 한다"(143)고 하셨습니다. 근래 문제가 되는 '주 5일 근무'의 경우 어느 쪽이 더 발악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프랑스에서는 이렇다더라, 미국은 이렇다더라, 등의 이야기에 그건 그 나라 형편이 좋아서 그런 거고...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아직 더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루에 여덟 시간 일하는 것을 '전제'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그 외에 일하는 것은 '시간 외 수당'을 지급해야 한다는 것도 아실 겁니다. 이랜드를 비롯한 여러 "예수 믿는" 사장들이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품삯을 받은 만큼 일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다"(144) 맞습니다. 그러나 이건 양비론입니다. 너도 잘못했고 그 옆의 너도 잘못했고... "아니 대감 마님, 그렇다면 누가 잘못했다는 말씀이십니까?", "허허~ 임자 말도 옳소" 예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의 잘못을 지적하시면서 그 앞에 있던 일반인들에게 너희는 그렇게 하지 마라고 하셨지 그들이 이런저런 잘못이 있는데 너네라고 뭐 잘하고 있는 줄 아냐는 식으로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어떤 말이든 대상이 정확하게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곧 말 그 자체가 편드는 일이라는 겁니다. 책을 보면 목사님께서 여러 사람들 말을 익명으로 인용하시면서 노동자의 말을 하나도 담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시무하시는 교회에 돈 많은 사장님들과 사장 후보들만 다니는 것은 아닐 텐데, 어쩌면 대기업의 노조에서 활동하는 성도들도 있을 텐데 그들의 목소리가 전혀 없다는 것은 의외였습니다(아시겠지만 노동 환경은 중소기업체가 더 열악합니다). "직원들이 하루 세 시간만 집중해서 일을 해주면 좋겠다"(143)는 어느 사업가의 말을 인용하셨다면, 그 전 항목인 '임금'에서 "사장들이 회사 돈으로 차 사고, 집 사고, 집안 가구 바꾸는 짓 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노동자의 말 쯤은 인용하셨어야 그나마 공평하지 않았겠는가, 그런 생각입니다. 높은 뜻 숭의교회에 노동자들이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그들과는 개인적으로 전혀 만나는 자리가 없기 때문에 그들의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고 하신다면... 쩝... 입니다.
부자가 되되 하늘에 보물을 쌓는 부자가 되어야 하는데, 땅에 쌓아서는 안 되는 이유가 "돈을 믿을 수 없고", "돈에 대한 욕심은 우리 눈을 나쁘게 하기 때문이고", "돈에 대한 욕심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앗아가기 때문"(160-166)이기에 그렇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돈을 믿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면 "돈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땅에 보물을 쌓지 않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가난한 사람이 되려고 할 필요"가 없으니 "도리어 성경은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부자가 되되 그 부함을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고 말씀하신다"(167)고 하셨습니다. 성경 어느 부분에 "적극적으로 부자가 되"라는 말씀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도 그 앞에 인용하신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마 6:20)(166)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으신 듯 합니다. 되새기자면 이 말씀은 산상수훈 중에 있는 말씀으로 그 앞에는 '주기도'가 있고,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라는 말씀이 있고, 외식하지 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19절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이어 20절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뜷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24절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리고 25절부터 "먹고 마시고 입는 거 염려하지 말라" 그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 후 32절부터,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을 그 날에 족하니라"고 쓰여 있습니다. 당연하게도 "기독교에서 가난은 죄도 아니고 부끄러움도 아"(167)닙니다. 그렇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부자가 되"(167)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성경은 우리의 부함과 가난함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구원 사역이 좌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편 '의로운 부자 되기'에서 50억원의 3분의 2 이상 되는 액수를 헌금한 장로님 예(169)를 드셨는데 이로 미루어 결국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는 성경 말씀을 '헌금 하기'(십일조, 구제가 다 포함되는)로 이해하면 되겠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책장을 넘기니 "이 장로님과 같은 의로운 부자가 많으면 좋겠다. 자기의 필요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를 위해 큰돈을 벌고 쓸 줄 아는 사람이 많으면 좋겠다"(170)는 내용이 나옵니다. 제가 맞게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목사님의 또 다른 책 '생사를 건 교회개혁'에는 '마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부록으로 실려 있었습니다. 출판사에서 분위기 띄우려 끼워 넣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베드로 성당을 보고 개탄했던 그이 같으면 50억을 들인 예배당, 100억을 들인 동안교회 예배당을 보고 "이만해도 싸게 지었군..." 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이는 베드로 성당을 지으려 면죄부를 발행한 R.C.C. 지도부를 욕했습니다. 면죄부 자체로도 죄가 되지만, 하나님께서는 혹세무민하여 돈을 긁어모은 것에 대해서도 죄를 묻지 않겠습니까? 성전을 짓는데 그만한 돈도 들이지 않겠다는 거냐... 제가 잘못 넘겨짚었습니다. 건물을 말하는 성전 개념은 이미 없어지고 우리가 성전(참조, 고전 3:16)임을 목사님께서 모르실 리 없습니다. 단지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100억 짜리 예배당을 지은 호사가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간다는 북한의 형제들(152)에게 주라고 1억을 헌금한 것으로는 상쇄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 잊었습니다. 지금은 동안교회를 떠나 높은 뜻 숭의교회에 계신 걸 깜박했습니다. 그 교회는 예배당 없이 숭의여대 강당을 빌어 사용하고 있는 것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100억 짜리 예배당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신다면 어디서라도 "그때 동안교회 예배당을 그렇게 많은 돈으로 지을 필요가 없었다"고 말씀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으니 당연하지 않습니까? 목사님께서 생각하시는 '하늘에 쌓는 보물'은 "십일조, 구제, 그리고 예배당 지을 때 연보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경 어느 부분에 이런 것들을 두고 하늘에 쌓는 것이라 하는지, 저는 과문한 탓에 전혀 알지 못하겠습니다. 앞서 마태복음 6장을 살피지 않았습니까? "보물을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마 6:19-20)는 말씀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로 결론지어 집니다. 예배당같이 물질적인 문제를 놓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저는 목사님께서 보다 일상적인 내용에 대해 세밀하게 고민하시길 바랍니다. 단적으로 높은 뜻 숭의교회에도 사무 보는 성도들이 있을 텐데, 그 성도들에게 하루 여덟 시간 노동을 보장하십니까? 높은 뜻 숭의교회에는 주일 저녁 예배나 수요 예배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별 문제가 안될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을 쓰실 당시에 계셨던 동안교회에서도 사무 보는 성도들에게 여덟 시간 노동을 보장하셨습니까?(그 말이 '최소한'(143)일 뿐이라면 그것도 역시 쩝...) 수요일이나 금요일에 아침에 나와 밤늦게 예배(또는 기도회)까지 다 하고 가야 한다고 하시지는 않았습니까? 예배는 예배일 뿐...? 제가 꽤 많은 수의 교인이 모이는 교회에서 부교역자 생활을 할 때 거기 있던 사무실 성도들은 수요 예배를 노동의 연장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회에서 교인들에게 수요 예배 참석을 강요하지 못하듯 사무실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제가 있던 교회에서는 "교회에서 돈을 받으면서 예배를 빠져?"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물론 목사님을 이렇게 수준 낮은 목사들과 같이 취급하는 것은 천만부당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을 다스리는 자리에 서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동등한 자리에 놓고 생각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이는 곧 (누구라도)부자가 되어서 그럴 수 있겠는가(돕고 섬기고(180)) 라는 질문에 닿아있으며 보다 근본적으로 노동자들을 사람 대우 하고, 노조를 인정하고, 비자금을 형성하지 않고, 하청 업체를 업신여기지 않고, 세금을 꼬박꼬박 내면서도 목사님께서 생각하시는 그만한 부자가 될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정직한"이라는 제한 사항을 가슴에 품고 돈을 번다면, 비록 생활에 어려움이 없을 만큼 벌고 쓸 수는 있어도 남들에게 부자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벌기는 힘듭니다. 그 "정직한"에 세상 법적인 규정뿐 아니라 기독교인으로서 지켜야 할 여러 '명령'을 포함시킨다면 더 더욱 힘듭니다. 그러므로 그 돈으로 예배당을 짓든 구제를 하든 원칙적으로 그 돈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자들과 과부'(막 12:41-44) 아시잖습니까? 왜 하필 부자들의 많은 연보와 비교하여 과부의 두 렙돈을 말씀하셨을까... 왜 성경에는 부자가 자기 돈 다 털어내는 내용이 나오지 않을까... 예전에 그런 고민을 했었습니다. 답은, 부자는 그럴 수 없다, 였습니다.
책 표지에 "크리스천이 고민하는 돈 문제의 명쾌한 해답"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습니다. 이 나라 크리스천들이 돈 문제를 놓고 "정직하게 버는 방법이 무엇인가" 고민하는지, 아니면 "예수든 뭐든 어떻게 해야 떼돈을 벌 수 있을까" 고민하는지 모르겠지만 아주 막되먹지 않은 교인이 "죄악이 가득한 세상이라지만... 먹고 살자니 돈은 벌어야겠고... 기왕 버는 거 남들만큼은 벌어야겠고..."에 대한 답이라면 "명쾌한 해답"이 맞습니다. 아시겠지만, 지금 보기에 그렇게 황당한 면죄부도 당시에는 치밀한 논리를 갖고 있었습니다(미덥지 않으시면 자크 르 고프가 쓴 "연옥의 탄생"(문학과지성사)을 권해드립니다).
꼭 의도는 그렇지 않더라도 이 책을 읽는 예수 믿는 젊은이들이 몇몇 내용(도둑질 하지 마라, 권력을 이용해서 돈 벌지 마라 등등)을 지키고 그 결과 많은 돈을 벌어서 십일조, 구제, 예배당 건축에 "많"(막 12:41)이 내면 자신이 "깨끗한 부자"라고 생각할까 봐 저으기 염려가 됩니다. 성경에 기초한 깨끗한 부자는, 최소한 지금 이 나라에서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목사님께선 익숙하시지 않겠지만 글 부제목을 "내공 없는 초식은 맹목이고 초식 없는 내공은 허무하다"라고 달았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선배 목사가 가끔 쓰는 말입니다. 둘 다 중요합니다.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고 그 말씀을 적절하게 강도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깨닫고 실천하게 하는 것 모두 중요합니다. 뭐가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적용하려 하고 교육하려 해도 말씀대로 되지 않습니다. 맹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초식은 화려하나 내공이 없더라... 제가 목사님의 책을 읽고 섬찟한 느낌이 들었던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었나 봅니다.
건덕(建德)에 더욱 힘쓰시길 바랍니다.
덧붙여.
목사님께선 성경 말씀을 적용할 사람(주체)이 있고 적용 받을 사람(대상)이 있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셨습니다. 예컨대 예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잠들었던 베드로에게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은 약하도다"(마 26:41)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께서 말씀하셨으니 맞는 것이지 베드로가 그 말을 하는 것이 맞냐는 지적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또 다른 강도 시간에 비슷하게 바울의 예를 들어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엡 5:22)는 아내들이,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 5:25)는 남편들이 스스로 알아들어야 할 말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뒤바뀌면 안 된다는 지적이셨습니다. 그 지적에 비추어 저도 목사님께 한 가지 지적해 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은 목사가 어떤 차를 타고 다니는지, 몇 평짜리 아파트에서 사는지, 한 달에 생활비는 얼마나 받는지, 그런 것에 지나치게 관심이 많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 목사의 목사 됨을 판단한다"(194)면서 "좁은 아파트에서 사는 것 또한 거룩함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194)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작은 차를 타고 좁은 집에 살고 적은 돈으로 생활하는 목사가 할 말이지 큰 차를 타고 넓은 아파트에서 살면서 많은 돈으로 생활하시는 목사님이 하실 말씀이 아닙니다. 목사님께서 강도 시간에 말씀하신 것처럼 "그렇게 하면 웃깁니다"
위내용에서 하나 더 말씀드리자면 "넓은 아파트에서 사는 것이 성공의 척도가 아니라면 좁은 아파트에서 사는 것 또한 거룩함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194)고 하셨는데, 이 말은 마치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키가 크다고 해서 주택에 사는 사람이 대학을 나왔다고 볼 수 없다"는 말처럼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성공과 거룩함은 등치 개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적하는 김에 하나 더 하겠습니다. 다른 교회에 가셔서 상표처럼 사용하시는 형식이라 굳이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교인들에게 "가난한 사람과 부자가 서로 다툴 때 하나님은 과연 누구 편을 드시겠는가?"라는 질문을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대부분의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답이다. 정답은 둘 중 '옳은 사람'이"(44; 비슷하게 69에 다시 쓰여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시는지 두 번씩이나 쓰셨는데, 이런 종류의 질문은 마치 "100층짜리 빌딩에서 백인과 흑인이 뛰어 내렸다. 누가 살겠는가? 흔히 백인이 살았다고 한다. 틀렸다. 답은 낙하산을 매고 뛴 사람이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려 하는지 잘 아실 겁니다.
덧붙임이 너무 길었습니다.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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