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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홀씨> 제36호: 슬퍼하는 자는 행복하다

무엇이든 김재성............... 조회 수 562 추천 수 0 2003.07.14 22: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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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호 / 2003 년 7월 12일 발행 (부정기 발행)
발행처: 민들레성서마을    발행 및 편집인: 김재성

슬퍼하는 자는 행복하다  - 문동환/ 한신대 명예교수

마 5:4, 24:37-38, 렘 8:8:20-23

시작하는 말

슬픔이란 피할 수 없는 삶의 비극을 보면서 솟아오른 심정이다. 고난으로 점철이 되는 세상에서 슬픔을 맛보지 않은 자가 없다. 누구나 다 삶의 슬픔을 맛보게 된다. 그렇다면 누구나 다 행복한 자가 된다는 말인가? 그럴 수는 없다.
우리는 자신의 죄 때문에 비극을 겪으면서 슬픔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슬픔이 우리에게 행복을 초래하지 않는다. 슬픔이 아니라 참회를 해야 새로운 삶을 맛볼 수 있다. 이 슬픔이란 사랑하는 자 혹은 사회가 죄 값으로 파멸로 달리는 것을 볼 때의 느낌을 말한다. 이것은 성숙한 사랑을 가진 자의 슬픔을 말한다.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죄로 말미암아 산지 사방으로 흩어져서 고생할 것을 보면서 슬퍼한 예레미야의 슬픔, 계속 하나님에게 반역함으로 장차 무너질 수밖에 없게 된 예루살렘 성을 보면서 슬퍼하는 예수님의 슬픔이 그것이다. “슬퍼하는 자는 행복하다”라는 팔복의 두 번째 복은 이런 의로운 자의 슬픔을 말한다. 그런 자들은 결국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그렇게 슬퍼하는 자들은 누구이고 어떻게 위로를 받을 것인가?

1. 죄와 악의 결과를 아는 자

죄란 자기 앞만 생각하는 삶의 자세다. 자기 행복만이 중요하고 남이 어떻게 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기 느낌이 중요하고 다른 사람의 느낌이란 아불관이다. 자기 생각만이 제일이고 다른 사람의 생각이란 들어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자기의 이익만이 중요하고 다른 사람은 망해도 좋다. 악이란 이런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남을 해치는 행위다. 힘을 가진 자일수록 이웃을 짓밟아 비참하게 만든다. 이런 그릇된 자세를 가진 자의 종말이란 비참한 것이다. 이것을 꿰뚫어 보는 자는 슬퍼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사람은 악한 자들로 말미암아 희생되는 자들을 생각하면서 슬퍼하고 아집에 사로잡힌 자들이 받을 엄한 심판을 생각하면서 슬퍼한다.
모든 예언자들은 다 그랬지만 예레미야는 더욱 그랬다. 그는 위로 우상을 섬겨 하나님을 배반하고 아래로 서로 뜯어먹어 상처투성이 된 백성들을 보면서 예레미야는 슬퍼한다.

“여름도 지나고 추수도 끝났건만
우리는 이제 살아나갈 길이 없습니다.
내 딸 내 백성이 치명상을 입었는데
전들 어찌 아프지 않겠습니까?
앞이 캄캄하고 떨립니다.
길르앗에 약이 떨어질 리 없고
의사가 없을 리 없는데
어찌하여 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치료하지 못합니까?
내 머리가 우물이라면
내 눈이 샘이라면,
밤낮으로 울 수 있으련만,      
내 딸, 내 백성의 죽음을 곡할 수 있으련만.“

우리 주 예수님도 그랬다. 법의를 입고 하나님을 섬긴다는 대사제의 무리들은 로마와 손을 잡고 자기들의 배만 채우고 백성들의 길잡이라고 자처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은 자기들의 스스로 거룩한 척 하면서 백성들을 죄인으로 몰아쳐 땅에 붙은 무리들의 한이란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들의 서러운 한을 품에 안으신 예수님은 배고픈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병든 자들을 고쳐주시고 외로운 자들을 찾아 가 주시고 소외된 자들을 껴안아 주시면서 그들이 오히려 하늘나라에 더 가깝다고 격려하여 주어 그들 사이에 서로 위하고 아끼는 생명공동체를 이룩하셨다. 그리고 스스로 거룩하다고 하는 자들의 가면을 벗기시고 수탈하는 자들의 진면목을 폭로함으로 그들의 회개를 촉구했다. 그러나 저들은 오히려 예수를 신성을 모독죄로 몰아 처형하려고 했다. 이런 철면피한 무리들에게 내리실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아신 주님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너희는 예언자들을 죽이고
하나님께서 보낸 자들을 돌로 치는 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들을 모으려 했던가.
그러나 너희들은 응하지 않았다.
너희 성전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황폐해지리라.“

라고 한탄을 하셨다.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은 그를 위해서 우는 여인들에게 “나를 위해서 울지 말고 너와 너희 후손들을 위해서 울라”고 말씀하셨다. 팔복에서 말하는 슬픔이란 이런 의로운 자들의 슬픔을 말한다.

2. 슬퍼하는 자는 위로를 받을 것이다.

그렇게 슬퍼하는 자는 위로를 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받을 위로란 어떤 것인가?
그 슬픔이 자기를 위한 슬픔이라면 그 위로란 자기 개인의 구원일 것이다. 그러나 그 슬픔이 패망으로 달리는 사회를 위한 것이라면 그 위로란 그 사회가 생명이 차 넘치는 정의와 평등의 사회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슬퍼하는 그들의 심정의 따뜻한 기운이 사회 밑바닥을 구성하는 무리들의 심정에 단비처럼 내리고 누룩처럼 퍼져서 누가 무어라고 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우는 자와 같이 울고 웃는 자와 같이 웃는 인정 공동체가 우후죽순처럼 솟아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가신 곳마다 그런 인정 공동체가 탄생했었다. 그것이야말로 슬퍼하는 자에게 주시는 위로가 된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뒤 예루살렘에 이룩된 서로 주고 나누는 공동체가 그런 것이었다. 갈릴리에서 세차게 일어나 지중해 연변으로 확산이 된 인정 공동체가 그런 것이었다. 예수님과 같이 슬퍼하는 자들을 통해서 타락했던 교회에 놀라운 개혁이 일어나고 그들을 통해서 이 생명의 도가 세계 방방곡곡에 확산이 된 것이 그것이다. 그것이 다 사랑 때문에 슬퍼한 자들에게 주신 위로다. 그래서 그 도가 우리 한반도에도 뿌리를 박게 되었다.

3. 슬퍼하는 자를 기다리는 오늘의 세계

예수님은 오늘의 세계를 보시면서도 슬퍼하신다. 남과 북으로 갈라져서 오십 여 년 동안 한 맺힌 삶을 산 민족을 보고 슬퍼하신다. 억울하게 갈라져서 겪은 쓰라린 삶을 청산하고 새 출발을 하려는데 이에 찬물을 끼얹는 강자들을 보면서 슬퍼하신다. 가공할 만한 폭격에 잿더미가 된 폐허 밑에서 아우성을 치는 이라크 민을 보면서, 무정한 탱크와 몸으로 맞서서 싸우는 이스라엘과 아랍 테러단을 보면서, 자본주의자들의 무자비한 수탈로 굶주리고 병든 제삼세계의 땅에 붙은 무리들을 보면서 예수님은 오늘도 슬퍼하신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슬퍼할 자들을 기다리신다.
그런데 많이 소유하는 것을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무리들의 눈에는 이 쓰라린 무리들의 몸부림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귀에는 한 맺힌 무리들의 아우성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도 모른 척 지나가는 사제처럼, 레위인처럼 교회마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슬퍼하지 않는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을 더욱 슬프게 한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오늘의 세상에도 예수님과 같이 슬퍼하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들이 있다. 위협을 무릅쓰고 인의 벽을 만들려 이라크로 가는 자가 있지 않는가. 궂은 날이나 맑은 날이나를 가리지 않고 평화 시위를 하는 자가 있지 않는가. 자나 깨나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심정으로 사는 자들도 수두룩하다. 평화운동을 위해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는 자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다닌다. 생명을 아껴 슬퍼하는 무리들이 날이 갈수록 늘어난다. 그런 사람들은 교회 밖에도 얼마든지 있다. 그들의 심정이 단비가 되어 인류의 마음을 부드럽게 한다. 그래서 날이 갈수록 깨닫고 돌아서는 무리들이 늘어난다. 밑에서부터 일어나는 슬퍼하는 무리들의 아우성이 온 누리를 뒤흔들어 기어이 새 날을 동트게 할 것이다. 날로 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이것이 슬퍼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커다란 “위로”다.

맺는 말

죽음의 길로 달리는 인류를 보시면서 슬퍼하신 예수님은 “슬퍼하는 자는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는 생명을 천하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셨기 때문이다. 우리도 사랑하는 자가 되자. 우리도 슬퍼하는 자가 되자. 우리 주변이 인정공동체가 이룩되는 것을 보면서 주님과 더불어 위로를 받는 영광을 누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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