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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종소리

정원............... 조회 수 1287 추천 수 0 2003.12.09 23:32:33
.........

[글모음910] 저녁 종소리

 

제대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79년도 가을의 어느 날 저녁, 황혼이 깃들 무렵, 나는
부하 사병 셋과 함께 외출을 나갔습니다.
버스가 오기 전에 이들이 배가 고프다고 툴툴거렸으므로 우리는 그 주위의 한 자그마한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부대주변의 식당이 대체로 그러하듯이 이 집은 밥도 팔고, 술도 팔고, 따라서 술을 따르는
아가씨도 있는, 그런 집이었습니다.

부하들은 내 눈치를 슬슬 살피면서 밥과 함께 소주를 시켰습니다.
사실 그들은 밥이 고팠던 것이 아니라 술이 고팠던 것입니다.
나는 모처럼 외출을 나와서 기분을 풀고 싶은 그들의 심정을 모르는바 아니었기에 그대로
묵인해 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술을 따르기 위해 나온 아가씨를 보고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스물 대 여섯 쯤의 나이에 비교적 큰 키의 미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첫 눈에도 상당히 지적으로 느껴지는 눈매와 어딘가 침범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으며 전혀 그 술집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묘한 것은 이 아가씨를 보자마자 웬지 그녀는 기독교인 것 같은, 마치 오래 전부터
기독교적인 분위기가 몸에 밴 것 같은 느낌이 그냥 들었던 것입니다.

부하들은 아가씨를 상대로 이런 저런 농담 짓거리를 하면서 술을 마셨습니다.
아가씨는 적당히 상대를 하며 분위기를 맞추려는 듯 하였으나 웬지 잘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보기 드문 청초한 꽃이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좀 어색한 모습이었으나 당황한 빛은 아니었고,
오히려 차분하게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나는 아까부터 무엇인가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끊임없는 의문들이 솟구쳐 올라왔습니다.
이 아가씨는 어떤 사람일까? 그는 어디서 왔을까? 왜 이곳에 오게 되었을까?
무슨 사연이라도? 하는 등의....

그러나 어떻게,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고, 용기도 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묵묵히 식사를 하는 편이었으며, 부하들도 뭔가 어설픈 분위기가 마음에 걸린 듯
차츰 말이 적어졌고, 그녀도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므로 우리들 가운데에는 미묘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나는 차츰 이 침묵이 지겨워졌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이 침묵을 깨뜨릴 용기는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 적막은 마치 영원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이 적막이 깨지는 순간이 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웃하고 있는 작은 교회의 저녁 종소리였습니다.
아마 그날이 수요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종소리는 수요일 저녁 예배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였던 것입니다.
'땡그랑, 땡그랑, 땡그랑...'
아아, 그 종소리는 얼마나 맑게 느껴졌는지요!
너무나도 부드럽고, 은은하게, 그리고 따뜻하게 그 종소리는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대부분의 교회는 차임벨소리가 종소리를 대신하고 있었고, 그런 땡그랑거리
는 소리는 시골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소리였던 것입니다.

그 종소리를 듣고, 마치 나는 그런 종소리를 듣고 자랐던 어린 시절의 향수가 되살아나듯
이, 꿈에서 깨어나듯이 용기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말을 시작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마 대충 기억하기는 이렇게 이야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
"아가씨, 저녁 종소리가 들리고 있군요. 교회 갈 시간이 되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녀의 눈에 순간적으로 스쳐 가는 충격파를 읽으면서 나는 확신할 수 있었습니
다.

'그녀는 그리스도인이다. 분명히!'
처음의 완강한 부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포기되고, 그녀는 조금씩 그녀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모태신앙이었으며, 어릴 적부터 교회에 나갔었습니다.
모 신학대학에 다니던 중 그녀는 충격적인 일련의 사건을 통하여 인생의 심연에 굴러
떨어졌습니다.
절망 끝에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여기저기 흐르다가 이곳까지 왔다고 합니다.
대충 그녀가 말한 내용의 요지였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다 들은 후, 나는 그녀에게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할 수 있는 한 부드럽게, 따뜻하게, 그리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는 그녀에게 이야기했습
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 그리고 새로운 차원의 믿음으로 성장하는 단계에서 필연적으로
통과하게 되는 고통과 좌절을.
그리고 조심스럽게 덧 붙였습니다.
하나님의 품으로, 가정으로 돌아가라고.

부하들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형태의 침묵, 긴박감이었으며, 부하들 모두가 그녀가 회복되기를, 삶의 희
망을 되찾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차츰 이야기가 진전되자 그녀는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집에 가고 싶다고, 엄마가 보고 싶다고 하면서 그녀는 울었습니다.

나는 마침 가지고 있던 책을 그녀에게 선물했습니다.
그 책은 [감옥생활에서 찬송생활로] 라는 책입니다.
그 책은 매사에 사고뭉치였던 범죄자가 하나님을 만난 후 변화되어 가는 내용의 이야기
입니다.

이 책에는 삶의 고통과 좌절, 비참한 현실 가운데 있을 때에, 오히려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함으로써 환경이 바뀌고 놀라운 섭리가 이루어지는 이야기가 감동적으로, 생생한
드라마틱한 간증으로 기록되어 있는 책입니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 우리는 일어났습니다.
그녀는 멀리 까지 전송을 나왔으며 우리는 아쉽게 헤어졌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에 나는 다시 그 식당에 들렀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식당 주인의 말이 그녀는 며칠 전에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었습니
다.

뭔가 허전한 마음으로 부대에 돌아온 나는 한동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는데, 일 주일
만에 그녀로부터 편지가 왔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간 그녀가 내게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분홍빛 편지봉투에 파란색 편지지, 그리고 섬세한 필치의 초록색 글씨가 다음과 같은
사연으로 그 안을 꽉 메우고 있었습니다.

"[감옥생활에서 찬송생활로], 참 좋은 책이군요. 많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제 파도치듯
하는 마음이 조금 가라앉은 것 같아요. 용기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모든 것을 사랑하
기로 했어요. 청소하는 것, 접시 닦는 것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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