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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귀한 세가지 금은 황금, 소금, 지금 이라고 한다. 나도 좋아하는 세가지 금이 있다. 현금, 지금, 입금 이다 ㅋㅋㅋ(햇볕같은이야기 사역 후원 클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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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갈 수 없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우리에게 열어 보이셔야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열어 보여주시는 것을 가리켜 계시(啓示)라고 한다.
하나님의 계시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일반계시인데 자연만물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다. 늦가을의 숲에 가보라. 짙은 단풍을 보고 창조주의 솜씨를 감탄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겨울산에 올라 보라.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린 달관의 그 단순함을 느끼면서 신의 숨결을 체험하지 않겠는가. 사람 몸의 그 오묘한 기능을 생각하면 조물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자연만물의 아름다운 조화를 보면서도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이 많다. 피조물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가 죄 때문에 흐려지고 희미해졌기 때문이다.하나님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는 계시가 있는데 특별계시라고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셔서 그분의 삶과 사역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곧 예수 그릭스도시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아주 명백하게 하나님을 알게 된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우리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는다.
성경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다. 그러니까 성경은 특별계시의 내용을 담은 책이다. 신구약 66권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가르치며 그래서 하나님을 알게 한다.
성경의 내용을 우리에게 전달되는 과정이 '말씀의 선포'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 말씀의 선포는 강의나 강연과 다르다. 강의의 주된 목적이 정보의 전달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인격을 담아 진리를 전하는 것이다. 듣는 사람의 삶을 변화하게 하는 것이다. 강의나 강연이 자기 논리와 주장을 펴는 것이라면 말씀의 선포는 하나님의 뜻을 대언(代言)하는 것!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 일을 해내야 한다. 자신이 선포하는 말씀에 죽고 사는 문제가 걸려 있다. 선포할 때마다 그때가 마지막인 것처럼 설교해야 한다. 말씀을 듣는 회중은 겸손한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 듣는 것이 강연이나 강의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선포되는 말씀에 마음 문을 열고 '아멘'으로 화답하며 들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일하신다. 바울 사도는 그렇게 말씀을 들어서 축복을 받은 사람들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이다.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말씀 선포의 시간이다. 예배 순서 각각이 중요하고 의미가 있다. 그러나 가장 핵심적인 순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시간이다. 그래서 기독교의 예배는 말씀의 선포를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
설교를 들을 때 '저 말씀이 나에게 하는 것이구나' 하고 느껴지면 복이다. 나를 격려해도 복이고 책망해도 복이다. 문제는 말씀을 들어도 내게 와닿지 않을 때다. 설교를 듣고 '참 설교 잘한다' 생각하며 교회당을 나온다면 설교를 헛들은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의 선포를 통해서 '지금, 이 자리에서, 나에게' 말을 거신다. 내 삶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기를 원하신다. 내 삶에서 버려야 할 것과 바꾸어야 할 것을 우리가 알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말씀의 선포는 언제나 실존적이며 현재적이며 구체적이다.
교회가 힘을 잃어갈 때마다 나타난 공통적인 현상은 말씀의 선포가 약화되는 것! 설교의 횟수나 출판되는 설교집의 숫자나 설교자가 얼마나 많으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씀의 선포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깨닫는 설교자와 또 그런 깨달음을 가지고 말씀을 듣고 삶을 주님께 드리는 회중이 없다는 말이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설교자를 위해서 기도하라. 말씀이 선포되는 시간에 신앙생활의 승부를 걸어라. 한국 교회의 강단을 통해서 영적 각성이 일어나도록 기도하라.
하나님의 계시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일반계시인데 자연만물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다. 늦가을의 숲에 가보라. 짙은 단풍을 보고 창조주의 솜씨를 감탄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겨울산에 올라 보라.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린 달관의 그 단순함을 느끼면서 신의 숨결을 체험하지 않겠는가. 사람 몸의 그 오묘한 기능을 생각하면 조물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자연만물의 아름다운 조화를 보면서도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이 많다. 피조물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가 죄 때문에 흐려지고 희미해졌기 때문이다.하나님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는 계시가 있는데 특별계시라고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셔서 그분의 삶과 사역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곧 예수 그릭스도시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아주 명백하게 하나님을 알게 된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우리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는다.
성경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다. 그러니까 성경은 특별계시의 내용을 담은 책이다. 신구약 66권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가르치며 그래서 하나님을 알게 한다.
성경의 내용을 우리에게 전달되는 과정이 '말씀의 선포'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 말씀의 선포는 강의나 강연과 다르다. 강의의 주된 목적이 정보의 전달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인격을 담아 진리를 전하는 것이다. 듣는 사람의 삶을 변화하게 하는 것이다. 강의나 강연이 자기 논리와 주장을 펴는 것이라면 말씀의 선포는 하나님의 뜻을 대언(代言)하는 것!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 일을 해내야 한다. 자신이 선포하는 말씀에 죽고 사는 문제가 걸려 있다. 선포할 때마다 그때가 마지막인 것처럼 설교해야 한다. 말씀을 듣는 회중은 겸손한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 듣는 것이 강연이나 강의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선포되는 말씀에 마음 문을 열고 '아멘'으로 화답하며 들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일하신다. 바울 사도는 그렇게 말씀을 들어서 축복을 받은 사람들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이다.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말씀 선포의 시간이다. 예배 순서 각각이 중요하고 의미가 있다. 그러나 가장 핵심적인 순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시간이다. 그래서 기독교의 예배는 말씀의 선포를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
설교를 들을 때 '저 말씀이 나에게 하는 것이구나' 하고 느껴지면 복이다. 나를 격려해도 복이고 책망해도 복이다. 문제는 말씀을 들어도 내게 와닿지 않을 때다. 설교를 듣고 '참 설교 잘한다' 생각하며 교회당을 나온다면 설교를 헛들은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의 선포를 통해서 '지금, 이 자리에서, 나에게' 말을 거신다. 내 삶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기를 원하신다. 내 삶에서 버려야 할 것과 바꾸어야 할 것을 우리가 알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말씀의 선포는 언제나 실존적이며 현재적이며 구체적이다.
교회가 힘을 잃어갈 때마다 나타난 공통적인 현상은 말씀의 선포가 약화되는 것! 설교의 횟수나 출판되는 설교집의 숫자나 설교자가 얼마나 많으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씀의 선포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깨닫는 설교자와 또 그런 깨달음을 가지고 말씀을 듣고 삶을 주님께 드리는 회중이 없다는 말이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설교자를 위해서 기도하라. 말씀이 선포되는 시간에 신앙생활의 승부를 걸어라. 한국 교회의 강단을 통해서 영적 각성이 일어나도록 기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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