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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언어

이성희............... 조회 수 1820 추천 수 0 2004.01.07 23:3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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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언어 가운데 가장 고귀한 언어는 침묵의 언어입니다. 문화인류학자인 에드워드 홀은 그의 문화인류학 4부작 가운데 「침묵의 언어」를 집필했습니다. 그는 대화의 10가지 방법을 열거하면서 침묵이라는 언어로 대화하는 법을 설명합니다. 실제로 커뮤니케이션 이론에 의하면 말에 의한 의사소통은 8퍼센트밖에 되지 않습니다. 나머지 92퍼센트는 다른 것이고 그 중 57퍼센트가 몸짓이라고 합니다.
저의 선친께서 돌아가시기 전 일년 동안 병상에 계셨습니다. 저는 그 기간이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선물이라고 고백합니다. 아버지를 섬길 수 있는 최고의 기회였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아버지 곁을 떠나 공부하며 살았습니다. 섬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는데 병상에 계실 때에 그 기회가 온 것입니다. 섬김의 은총을 주신 것입니다. 돌아가시기 전 몇 달 동안 아버지께서는 언어를 상실하셨습니다. 그러나 대화는 계속되었습니다. 말씀은 못하시지만 아버지의 눈빛만 봐도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돌아눕고 싶으신지, 목이 마르신지, 화장실에 가고 싶으신지 눈을 보면 알 수 있었습니다. 언어는 끊어졌지만 대화는 계속되었습니다. 눈의 대화이며 침묵의 대화입니다.
저에겐 돌이 막 지난 외손자가 있습니다. 지난 여름, 미국의 딸아이의 집에 보름간 가 있다가 그 식구들과 함께 귀국하여 그들은 한 달간 한국에 머물다가 돌아갔습니다. 달포를 함께 있는 동안 외손자와 많은 정이 들었습니다. 밖에 나가 있다가도 외손자가 보고 싶어 일찍 돌아왔습니다. 잠을 자는 모습도 예쁘고, 뒤뚱뒤뚱 걷는 모습도 예쁘고, 울어도 예쁩니다. 집안을 어지럽게 해 놓아도 귀엽기만 합니다. 외손자와 함께 놀기도 하고, 자기도 하고, 목욕도 함께 했습니다. 걸음마는 겨우 배웠지만 말은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외손자와의 대화는 전혀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언어가 없기에 몸짓의 대화가 살아납니다. 침묵의 대화는 계속됩니다. 침묵은 말보다 힘이 있습니다. 침묵은 최상의 언어입니다. 침묵은 최상의 인격입니다.
성대 수술 후 두 달 동안의 침묵은 최상의 언어를 만들어냈습니다. 가족들은 나의 눈을 보고 내 마음을 압니다. 내 얼굴의 표정을 보고 마음속을 읽어냅니다. 아내의 얼굴에 비친 마음을 보듯이 크고 지루한 언어가 필요 없는 침묵의 언어가 있습니다. 침묵은 입으로 구사할 수 없는 언어의 세계입니다. 침묵은 그 자체가 언어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그의 책에서 “교만한 침묵과 겸손한 침묵”을 구분합니다. 교만과 겸손은 둘 다 내적인 침묵을 찾습니다. 교만은 조작된 부동성(不動性)으로 하나님의 침묵을 흉내내려고 합니다. 교만도 외적인 침묵을 얻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교만의 침묵은 죽음의 침묵입니다. 교만한 자에게 침묵은 죽음과도 같은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침묵은 순수한 생명의 완성입니다. 겸손한 침묵은 하나님의 침묵을 배우고 닮아갑니다.
교만한 자에게 침묵은 고통입니다. 겸손한 자에게 침묵은 기쁨입니다. 교만한 자에게 침묵은 내적 소요입니다. 겸손한 자에게 침묵은 내적 평안입니다. 교만한 자는 침묵할 때도 끝없는 내적 언어의 소리가 있습니다. 겸손한 자는 침묵할 때에 내적인 언어의 소리도 함께 침묵합니다. 교만한 자는 침묵할 때에 자신의 귀를 닫습니다. 겸손한 자는 침묵할 때에 자신의 귀를 엽니다. 교만한 침묵은 영혼이 잠잠합니다. 겸손한 침묵은 영혼이 깨어납니다.
- 이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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