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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홀씨> 제128호: 예수의 가족

김재성............... 조회 수 1893 추천 수 0 2004.11.10 16:4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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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호 / 2004 년 11월 9일 발행 (부정기 발행)발행처: 민들레성서마을    발행 및 편집인: 김재성  

예수의 가족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를 찾아와서 바깥에 서서 사람을 들여보내서 예수를 불러내려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예수는 즉시 맞이하러 나오기는커녕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고 하였다. 이 말만 보면, 예수는 밖에서 기다리는 부모와 가족을 자기와 상관 없다고 부인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예수는 왜 그렇게 말한 것인가?

먼저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를 찾아왔으면 바로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사람을 시켜서 불러내려고 한 것이 좀 이상하다. 이런 의문은 앞의 21절을 보면 어느 정도 풀리는데, 거기에는 예수의 가족이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서 그를 붙잡으러 나선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그들은 좋은 마음으로 예수를 지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예수가 위험하거나 불순한 운동을 하고 다닌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말리러 온 것이다. 마치 대학교 가서 데모에 참여하는 아들을 찾아온 부모가 데모 현장에는 들어가지 않고 교문 밖에서 아들만 불러내서 데리고 가려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하겠다. 이런 상황을 고려한다면, 예수가 “누가 내 어머니며 형제들이냐”고 말한 것은 다소 냉정하게 들리기는 해도, 가족을 부끄러워하거나 부인하는 말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보다 깊은 뜻이 있다. 그것은 그 다음 구절들에서 좀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말씀하셨다.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34-35절, 표준새번역).

이 구절을 개역성경에서는 좀 달리 번역하였다.

“둘러앉은 자들을 둘러 보시며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34-35절, 개역).

두 개의 번역을 비교해 보면 미묘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개역을 보면, 마치 둘러앉은 사람들은 그저 청중들일 뿐이고, 예수는 그들에게 이러저러한 조건을 갖춘 사람들이 자기의 모친이요 동생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표준새번역을 보면, 예수는 둘러앉은 사람들을 가리켜서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자매들이다” 하고 선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헬라어 성경을 보면, 개역보다 표준새번역이 훨씬 더 정확한 번역이다. 예수는 막연한 대상이 아니라 바로 거기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자신의 가족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를 둘러앉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헬라어 단어는 흔히 ‘무리’로 번역이 되는 오클로스(ochlos)다. 그들은 가난하거나 굶주린 사람들이며 일정한 거처나 직업이 없는 사람들이다. 예수가 그들을 자신의 가족과 동일시한 것은, 혈연을 넘어설 뿐 아니라, 권위 중심, 재산 중심이던 당시의 가부장적 가족 구조를 단숨에 깨뜨려버리는 매우 파격적인 선언이다.

이것이 얼마나 파격적이었는지는 마태 기자가 이 구절을 변경시킨 데서 알 수 있다. 마태 기자는 예수가 이 선언을 무리를 가리켜서 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가리켜서 한 것처럼 고쳤다. 그것으로도 안심이 안 되었는지 예수가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키면서” 그 말을 했다고 하였다(12:49). 누가 기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둘러앉은 자들을 둘러보시며”라는 구절을 아예 삭제해버렸다. 그리하여 예수가 무리를 가족과 동일시 했다는 논란 자체가 일어날 수 없게 하였다(8:21). 물론, 이처럼 파격적인 요소를 그대로 담고 있는 마가의 본문이 가장 역사의 예수에게 가까운 것이다.

학자들은 맨 끝에 나오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는 구절(35절)과 그 앞에 나오는 전체 이야기(31-34절) 사이의 관계에 대해 논란을 벌였다. 요약하자면, 말씀을 중시하는 불트만 같은 학자는 끝 구절만이 예수의 말씀이고 앞의 이야기는 그 말씀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후대 사람들이 지어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를 따르면, 어떤 조건을 제시하는 듯한 끝 구절만 중요하고 무리들을 자신의 가족과 동일시한 파격적인 내용은 지어낸 말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말씀보다 일을 중시하는 디벨리우스 같은 학자는 앞의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난 일을 묘사하는, 중요한 것이고 끝 구절은 그것을 설명하거나 정리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를 따르면, 예수의 파격적인 선언과 실천이 중요한 것이고, 끝 구절은 부연 설명에 불과한 것이다. 헬라어 성경을 보면 끝 구절(35절)은 ‘가르’(gar=왜냐하면)라는 접속사로 시작한다. 이는 그것이 앞에 나온 선언의 이유를 설명하는 맥락에서 나온 것임을 의미하며, 이런 점에서 디벨리우스의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 하겠다.

그렇다면 위의 구절들이 의미하는 바는 이제 어느 정도 분명해진다. 그것은 찾아온 어머니와 동생들을 부정하는 냉정한 말도, 어떤 조건을 갖춘 막연한 대상을 가정하여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자신의 가족과 동일시하는 말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목자 없는 양 같이 떠도는 무리들을 자신의 가족과 동일시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의미의 가족을 선언하는 것이다. 흔히 세상 사람들은 자기 부모라도 초라한 모습이면 모른 척하려고 하는데, 예수는 자기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초라한 무리들을 자신의 가족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새로운 가족이 탄생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는 것이다.

당시의 로마법에서 가부장의 권위는 매우 강화되었다고 한다. 로마 사회에서 가장은 흔히 세 가지 권위를 가졌다. 첫째는 자녀와 손자들 그리고 종들에 대한 권위요, 둘째는 그의 재산에 대한 권위요, 셋째는 그의 부인과 며느리들에 대한 권위이다. 그들은 철저히 가부장적 구조 속에 있었고 그 정점에는 황제가 있었다. 그들은 넓은 의미에서는 황제를 “주인”(kyrios) 즉 가장으로 모시는 “황제의 가족들”이었다. 가장은 생물학적 아버지를 의미하기보다는 가족의 권위자를 의미했다. 가족은 친족관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존과 종속의 관계에 의해 규정되었다. 그런 점에서는 이미 그들도 혈연을 넘어선 가족을 생각한 셈이다. 그러나 그것은 혈연을 넘어서는 사랑의 가족이 아니라 혈연을 넘어서까지 종속되는 더욱 철저한 가부장제라 할 수 있다. 예수는 이런 종속적 가부장제를 넘어서는 새로운 가족을 선언하였다. 그것은 사회에서 소외되고 약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부모로 받아들이고 형제자매로 받아들이는 전혀 새로운 의미의 가족이다.

바울은 예수의 이런 새로운 가족을 그대로 계승하여 새로운 가부장주의로 발전시켰다. 아마도 그는 초대교회가 현실적으로 당시의 가부장제를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초대교회가 일반적 가부장주의에 머물지 않고 예수의 파격적 가족의 의미를 살리는 하나님의 가족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황제를 가장으로 하는 “황제의 가족”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을 아버지로 하는 “하나님의 가족”을 제시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 위함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였다(갈 4:6). 이런 관계는 바울과 교회 사이에서도 적용이 된다. 바울은 신도들에게 “내가 여러분을 낳았다”고 하며,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이” 그들을 대한다고 한다(고전 4:15; 살전 2:11). 오네시모나 동역자 디모데를 자기의 아들이라고 말하며, 또 동역자의 어머니를 자신의 어머니도 된다고 한다(몬 10; 빌 2:22; 롬 16:13).

바울은 가부장제라는 틀은 유지하면서도 다만 가장을 황제 대신 하나님으로 바꾸었다. 그래서 트뢸취라는 학자는 이것을 “사랑의 가부장주의”라고 부른다. 예수가 선포한 가족의 파격성은 가부장제라는 틀 속으로 들어와서 다소 완화되긴 했지만 그래도 그 핵심은 살아 있다 하겠다. 오늘날의 교회에게 바울의 교회는 하나의 모델일 수 있다. 하지만 가장 근원적인 모델은 역시 예수의 파격적인 사랑의 가족이라 할 것이다. 교회는 이런 사랑의 가족을 늘 새로운 상황에서 이룩해가는 모임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교회들도 가부장주의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성직자들은 대부분 권위 있는 아버지 상이 많은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바울의 사랑의 가부장주의나, 예수의 파격적 사랑의 가족을 계승하고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바울의 교회나 예수의 공동체는 대개 20-30명을 단위로 하였다. 초대교회는 신도들의 가정에서 모였기 때문에(고전 16:19; 롬 16:5) 평균 30명 정도 모였으며 아무리 커도 100명이 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오늘날 대형교회들은 수퍼마켓형, 할인매장형으로 변모해가면서 교인수가 보통 수천, 수만, 수십만 명이 된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우리가 어떻게 초대교회나 예수의 사랑의 가족 속에서 느낀 것을 느낄 수 있겠는가. 이런 큰 교회에서는 한 주간 동안 경쟁사회에서 지친 심신을 위로받고 새로워지기는커녕, 다시 주일날도 주차 전쟁, 본당에 들어가기 위한 경쟁을 해야 한다. 나중에는 천국 가는 것도 경쟁으로 들어간다는 생각을 갖게 되지 않을지 모르겠다. 서울의 큰 교회들에서는 적어도 예배 시작하기 1시간 전에 가야 주차가 가능하다. 인근의 학교 운동장들을 주차장으로 쓰는데도 그렇다. 몇 번이나 교회 주변을 돌다가 자리가 없어서 불법주차를 하기가 일쑤이고 예배드리는 내내 딱지를 뗄까봐 정신이 없다고 한다. 본당에서 예배를 드리려면 적어도 예배 시작 30분 전에는 도착해야지 정시에 가면 대개 비디오실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조금이라도 늦게 가면 그나마 비디오실도 자리가 없어서 다음 예배 시간에 오라고 한다. 예배도 한번만 하는 게 아니라 새벽집회와 저녁예배를 빼고도 보통 주일예배만도 7회 가까이 하므로 언제라도 가서 예배드릴 수 있도록 배려를 하고 있다. 일곱 번을 하면 혹 설교를 여러 분이 나누어서 맡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대개가 부목사들은 사회만 보고 담임목사가 일곱 번의 설교를 다 맡게 된다. 일곱 번을 다하는 교회도 있지만 어떤 교회는 그 가운데 절반 정도는 녹화된 테이프를 틀어주면서 예배를 드린다. 이것이 어떻게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있을까. 어떻게 여기서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그런 분위기를 느낄 수가 있을까. 여기서는, 기업총수를 가장으로 하여 충성을 다하는 사원들과 같은 그런 기업형 가부장주의는 몰라도 예수의 사랑의 가족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영국에 있을 때의 이야기다. 크리스마스 때 다들 떠나고 혼자 기숙사에 남았는데, 톰 목사라는 분이 크리스마스에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면서 나를 집으로 초대해주었다. 그는 미국사람인데 네덜란드 출신 부인과 고등학생 딸과 중학생 아들이 있었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밤이 늦도록 웃고 또 웃은 기억이 난다. 처음 보는 나에게 그 집 자녀들은 참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접시를 건네 주기도 하고 음식을 떠 주기도 했다. 우리 주위에서 보면, 중 고등학생 자녀들은 대개 말도 없이 혼자 자기 먹을 것 먹고 일어나곤 하는데……. 참 자녀들을 잘 길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귀국하고 한참 지나서 우연한 기회에 나는 그분의 가족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깜짝 놀랐다. 그렇게 화목해 보이던 톰 목사의 가정의 두 자녀는 입양한 자녀들이었다. 난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그들의 모습이 너무나 밝고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톰 목사 부부는 그렇게 입양한 자녀를 친 자식과 같이 기를 수 있었으니, 아무 상관도 없는 나를 크리스마스 때 혼자 두지 않고 불러다가 대접해 준 것이다. 난 일년 동안 많은 기억이 있지만 가장 행복한 느낌을 가진 것은 그날 밤이다.

우리가 따뜻함이나 고마움, 행복함을 느끼는 것은 언제인가? 가족이 아닌 사람이 가족처럼 대해줄 때가 아닌가. 우리가 “내 가족만!” 하는 가족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서, 나와 아무 상관없는 내 주위의 사람들을 형제자매로 대하고 내 부모 같이 대하고, 내 자식 같이 대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의 사랑의 가족을 이룰 수 있다. 교회는 그것을 위해서 존재한다. 바로 그 사랑을 느끼고 경험하며, 연습하고 훈련하는 곳이 교회다.

김혜자 씨가 쓴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라는 책을 읽으면서, 너무나도 비참한 아프리카의 상황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전인류의 5분의 1인 12억 명이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1만 원이면 굶어 죽어가는 아이 한 명을 한 달 동안 먹일 수 있다고 호소하면서, 우리나라뿐 아니라 아프리카, 아프가니스탄, 인도 등 전세계의 아동들과 결연을 맺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그는 남들이 보기에 성공한 사람이요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는 행복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마음속 어딘가에 끝 모를 허무감을 느꼈다. 그는 “왜 지구의 어느 곳에서는 아이들이 8백 원짜리 항생제 하나가 없어서 장님이 되어야 하고, 말라리아에 걸려 누워 있는 아빠의 배 위에서 갓난아이가 굶어 죽어가야 하는지” 물으면서 그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였다. 그때 그는 자신이 왜 살아야 하는지 의미도 찾을 수 있었다. 거기에 버려진 아이들을 내 자식처럼 돌보는, 김혜자 씨를 비롯한 구호단체와 시민단체들이야말로 오늘날 그들에게 사랑의 가족이 되고 있다.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예수의 가족이 아닐까.
(월간 홀씨 2004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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