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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선언

김재성............... 조회 수 1540 추천 수 0 2005.02.12 10:5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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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호/2005.1.12  발행처: 민들레성서마을 발행 및 편집인: 김재성

민들레 홀씨 제135호: 무죄선언

롬 5:12-21

1. 죄에 물든 세계

바울 사도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고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죄는 한 사람을 통해서 들어온 것인데 곧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아담의 불순종을 말한다. 바울은 아담을 장차 오실 분의 모형(typos)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아담은 인류의 원 조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인간 유형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오실 분의 모형이다. 즉 여기서 두 개의 대립적 인간상이 대조되고 있는데 하나는 아담이라는 인간상이요 하나는 오실 분이라는 인간상이다. 오실 분은 복음서에서 “오실 그 이”라고 표현되기도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이것은 유대의 묵시문학적 사고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역사를 두 개의 시대로 보고 지금의 시대는 낡은 시대이고 가야 할 시대이고 저 세상 새 시대가 오고 있다는 의식이다. 바울은 지금의 세상, 인간은 그들이 의식하든 하지 않든 모두 죄에 물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 죄의 본질은 아담의 불순종이다.

요즘 한배호 교우가 홈페이지에 <삶의 의미>라는 제목으로 라인홀드 니버의 글을 번역해서 올려서 함께 읽고 있다. 거기에는 인간들이 갖는 비관주의나 낙관주의의 한계를 설명했는데, 특히 마르크스를 비롯한 낙관주의에 대해서 그것이 잘못된 메시아니즘과 종말론으로 갈 때 히틀러와 같은 형태가 되어 인간을 예속시킨다는 날카로운 분석을 하고 있다. 사회주의가 이상은 좋았지만, 지금의 중국이나 러시아를 보면 사회주의를 한다고 해서 인간이 개인의 탐욕을 억제하고 이전보다 나은 인간으로 나아간다는 믿음은 갖기 힘든 것 같다.

오늘날 생태계 파괴와 남아시아 지진, 그리고 산업사회가 주는 비인간화와 삭막함은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국민소득은 올라가지만 부익부빈익빈은 심화되고 사람들은 행복하지 못하는 현상은, 이 세상이 죄와 죽음으로 치닫고 있다는 말에 동의하게 만든다. 이대로 두면 정치 체제나 교육이나 모든 것이 제대로 될 것이라는 낙관을 할 수가 없다. 분명히 전보다 잘 사는 것 같은데, 죄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죄에 빠져드는 것 같은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2. 불순종의 시스템에 예속된 인간

더 심각한 문제는 오늘의 산업사회는 거대한 시스템으로 화해서 개인은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도 없고 어떻게든 적응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1년 전쯤에 웜 바이러스 때문에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2000과 윈도우XP 사용자들이 컴퓨터를 쓰지 못하게 되는 일이 일어났다. 그러자 다들 큰 일이 일어난 것처럼 야단법석을 벌였고, 세상의 그 어떤 일보다도 그것을 정상화하는 것이 급선무인 것처럼 긴급하게 복구하였다. 이제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가 없는 생활을 상상하기 힘들어졌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아무리 미국 자본의 위협을 경계한다고 해도 이미 마이크로소프트라는 프로그램에 예속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원자력 발전이 위험한 줄 알아도 이미 전기 쓰는 문화에 예속되어 있고, 아무리 매연이 나쁜 줄 알아도 이미 자동차 타는 문화에 예속되어 있다는 말이다. 아무리 입으로는 자유와 독립을 외쳐도, 이것을 벗어나지 않는 한에서 그렇다는 것이 된다. 이것이 시스템 속에 있고 체제 속에 있는 개인의 무력함이요 한계다.

죄 문제도 그렇다. 이제는 개인이 혼자 착하다고 해서 죄를 짓지 않고 살 수는 없다. 이미 시스템이 부패하고 죄짓게 만드는 것이면 개인은 그 안에서 저항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이라크를 공격하는 것이 아무리 개인적으로 싫다고 해도 이미 미국이라는 시스템에 들어 있는 사람들은 거기에 미군을 파견하게 되어 있다. 우리도 이라크에 한국군을 파견하는 게 아무리 개인적으로는 싫다고 해도 이미 경제적, 군사적, 외교적 이해관계가 밀접하게 물려 있는 시스템 속에서 개인은 무력하고 오히려 그 부대에 들어가려는 지원 경쟁률이 10대 1이 넘고 그러는 것이다.

바울은 그것을 이미 오래 전에 보았다. 이미 인간은 고대 사회에서도 이런 시스템 속에 있었는데, 그것을 바울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인간의 시스템이라고 본 것이고 죄라고 본 것이다. 누구도 그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죄의 결과는 죽음이라고 오늘 본문에서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이것이 성서가 증언하는 중요한 것이다. 성서는 모든 인간 시스템의 종말을 선언한다. 그것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바울이 꿰뚫어 본 죄의 본질은 아담의 불순종이요, 죽음의 본질은 유죄 판결(정죄)이다. 아담의 불순종은 창세기 3장 타락 이야기에 나오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게 된 것은 뱀의 유혹 때문인데, 그 유혹의 핵심은 그것을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는 것이다. 즉 불순종은, 그저 고분고분하지 않은 저항적 성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끝없는 탐욕을 말하는 것이다. 신을 대신하려는 인간의 이런 끝없는 욕망 때문에 인간이 죄에 빠지고 다른 사람을 죽이게 되고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고 본 것이다.

어느 인간이나 이런 시스템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데, 그에게 나타나는 것은 필연적으로 자기가 잘못하고 있다는 죄의식이고 그것이 사회적으로 나타날 때는 유죄 판결, 즉 정죄가 되는 것이다. 사람이 죽음을 경험하는 것은 생물학적 죽음이 아니다. 생물학적 죽음은 맞이하는 순간 의식을 못하게 되니 진정으로 경험할 수는 없다. 인간이 경험하는 진정한 죽음이란 정죄함이다.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자책과 돌이킬 수 없다는 후회 그리고 심판을 받게 된다는 두려움이 인간에게 죽음을 맛보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한 사람의 범죄로 죄가 들어와서, 유죄 판결을 받았고,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3. 카산드라 크로싱

바울이 보기에 이제 인류는 마치 절벽을 향해서 치닫고 있는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와 같다. 브레이크가 없어서 그 누구도 멈출 수가 없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방향을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시대는 가고 새 시대가 와야 한다는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은 가고 오실 그이 마지막 아담이 오셔야 한다는 것이다. 그분은 이미 오셨고 그의 은혜와 사랑과 생명으로만 우리는 그 멸망을 향해 치닫는 기관차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카산드라 크로스>라는 영화가 있다. 한 테러리스트에 의해 천여 명의 승객을 태운 대륙횡단 열차가 세균에 감염이 된다. 미국방부 정보국에서는 세균의 확산을 막고 미국의 세균 개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그 열차를 외딴 곳으로 격리시키려고 한다. 이 열차는‘카산드라 크로싱’이라는 다리를 건너게 되어 있는데, 승객 가운데는 그 다리는 너무 낡아서 절대로 열차가 지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이가 한 명 있었다. 기관차는 브레이크 없이 앞으로만 달리게 되어 있고 그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는 그 다리에 이르기 전에 사람들을 다른 객차로 옮기고 자신이 탄 객차를 가스를 채워 폭발시킴으로써 승객들이 탄 객차를 기관차로부터 분리시킨다.

바울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이 영화가 생각이 났다. 인류는 멸망을 향해서 치닫고 있는데 거기에는 제동장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우리에게 그 죄에서 풀려나서 생명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바로 이 은혜가 가장 결정적으로 나타난 것은 우리에게 무죄 선언이 내려진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우리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다. 율법을 지켜서 이룩한 업적도 아니다. 우리는 아무 한 일이 없는데 선물로 주어진 것이다.

4. 무죄 선언

사춘기 때 갑자기 몸과 마음에 변화를 겪으면서 죄의식에 시달렸던 경험이 있다. 하지만 어느 날 친구들과 이야기하다가 내가 고민하고 있는 것이 다른 친구들이 다 공유하고 있는 것임을 알고 죄가 아닌 줄 알게 되었다. 게다가 중학교 체육 선생님이 당시로는 파격적으로 성교육을 해주셨는데, 비로소 의문이 풀렸다. 내가 가졌던 죄의식은 쓸데없는 것이고, 나는 지극히 정상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의 해방감은 날아갈 듯했다. 청소년에게는 기본적인 성교육이 지독한 죄의식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수도 있는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도 이와 같은 것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전혀 죄가 되지 않는데 자기들끼리만 죄가 되는 것이 있었다. 이를테면 할례다. 할례를 받지 않고도 우리는 아무런 죄의식 없이 살지만 그들은 할례를 받지 않은 자는 죄인이라는 의식이 있다.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는 의식이 있다. 예수는 이것을 허물었다. 할례를 받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함으로써 그 고정관념에 매여 죄의식에 매여 있던 사람들을 해방해 주었다.

이와 유사한 것은 얼마든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성 윤리가 올무가 되어 평생 죄의식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고민이라는 게 성교육 한번 받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이 많다. 윤리라고 하는 것도 그렇다. 늘 변하고 있다. 이스라엘에서 금기가 되는 돼지고기가 우리에게는 아무렇지도 않다. 유럽사람에게는 식용은 상상도 못할 개고기가 우리에게는 아무렇지도 않다.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것일 뿐이다. 창세기에 나오는 족장들은 일부다처제도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고 지금도 아랍에서는 그런 제도가 있다. 이혼 문제나 혼외관계 문제도 그렇다. 어떤 나라에서는 관대하고 어떤 나라에서는 엄격하다. 하지만 절대적인 윤리는 없다. 절대적이 아닌 것을 절대적으로 만들어서 사람들을 옥죄는 것은 결국은 유죄판결이다. 정죄함이다. 율법은 바로 이 유죄판결을 내려줌으로써 사람들을 죄짓지 못하게 하려고 했는데, 바울이 볼 때 이것은 이미 시대에 뒤진다는 것이다. 그 시대는 이미 갔다는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시스템이 죄를 지어서 혼자서 아무리 율법을 실천해도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청소년이 성교육을 통해서 무지에서 해방되고 정죄함에서 해방되는 것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 선언을 통해서만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고 죄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이런 선물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자기를 내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새로운 인간은 율법을 지켜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죄 선언을 받아들이고 정죄함에서 벗어나서 그분이 주시는 생명을 누리는 길 뿐이라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선언은 절대로 개인의 내면적 심리적 해방만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사회적 무죄선언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정죄함에서 풀려난 사람은 이 세상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함에서 풀려나도록 하기 위해서 실천하게 되어 있다. 그것은 개인의 내면적 죄의식에서 해방할 뿐 아니라, 사회적 죄의식으로부터도 해방하는 것이다. 사회적 죄의식은 다시 말하면 이 사회 속에서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들이 갖는 열등감이나 소외 의식이다.

우리가 신과 같이 되려고 하는 무한한 욕망 가운데서 사는 동안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자신을 정죄하고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게 된다. 몇 십 년 전 기준에서 보면 잘 사는 사람도 지금은 가난한 사람으로, 똑똑한 아이도 경쟁에서 밀리면 바보로, 멀쩡한 아이도 조금만 이상하면 소외되고 왕따로 취급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이렇게 치열한 경쟁사회에서는 소수의 성취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자신이 가난하다 열등하다 실패했다는 의식을 갖고 살아간다. 게다가 갈수록 치열한 경쟁 속에서 대기업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거의 다 도산하고, 대기업은 살아남기 위해서 정리해고를 하기 때문에 소수의 정예 간부 외에는 파트타임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니까 무수한 파트타임 일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열등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금 죄 의식은 무슨 범죄를 저지른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불행한 의식이 죄 의식이다. 자기가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의식, 자기가 뭔가 성취를 하지 못했고, 정상 궤도에 있지 못하다는 의식은 은연중에 죄처럼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그것이 한없이 사람을 작게 만들고 자기 속으로 들어가게 만들고, 사이버 세계나, 어디든 좋으니 돈을 주는 곳이나 풀타임 잡(job)을 주는 곳이면 그곳에 기꺼이 예속이 되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 기업이 무슨 기업이고 사회에 무슨 역할을 하는 것 따위는 물을 겨를이 없다. 그저 안정된 직장을 주는 대학이 좋은 대학이고 그런 직장이 선한 직장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욕심을 추구하는 결과로 나타난 현대판 유죄판결이다.

교회는 사람들을 바로 이런 유죄판결에서도 구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의 대표적 대형교회들은 이른바 백화점 형, 슈퍼마켓 형으로 변해가고 있다. 탐욕으로 치닫는 오늘의 문화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추종하고 있다. 그러니 그 속에 와서 소외된 사람들이 정죄함을 벗어버리고 해방되기는 어렵다. 역시 그런 속에서는 사회에서 느끼는 것과 똑같은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자연히 죄로부터 해방은 내면적, 심리적인 것으로 머물고 만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바울의 가르침을 왜곡하는 것이 될 수 있다.

5. 몸을 구하는 백혈구

나는 이런 개인주의의 극대화, 내면주의 심리주의의 극대화가 오늘날 문화에서 상당히 호소력을 얻고 있는 것을 본다. 바울 시대에는 이런 것이 영지주의 형태로 나타났다. 요즘에는 과학기술, 또는 사이버 세계와 결합하여 훨씬 더 매력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으로 선풍적 인기를 끌었을 뿐 아니라 매트릭스라는 영화의 모체가 되기도 한 <공각기동대>라는 영화는 이미 인류의 미래적 구원을 <네트>(네트워크) 속에서 찾고 있다. 사람의 몸이 다 파괴되어도 의식은 죽지 않고 살아서 네트 속에 있는 프로그램으로 존재한다. 그러다가 그것은 다시 다른 몸을 입고 부활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여자 주인공은 거대한 도시의 불빛을 보면서 “네트는 광대하다”고 찬양을 한다. <매트릭스>라는 영화도 3편까지 나와서 인기를 끌었지만, 결국 우리가 분주히 투쟁하고 싸우는 세계는 사실은 그 누군가에 의해서 조종되는 <매트릭스>에 지나지 않고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핵심 메시지이다. 이것은 오늘날 소외의식과 죄의식에 시달리는 현대인들,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사이버 세계로 출구를 제공해주는 것 같다. 구세주는 피 흘리며 십자가 위에 있을 필요가 없다. 네트워크 속에 있고 프로그램으로 존재한다. 창조는 프로그래밍이요 재창조는 재부팅이다. 마음만 먹으면 안 되는 것이 없고 얼마든지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 가난이니 소외니 하는 것들은 재미없는 소재들이 되어서 매트릭스 바깥에 버려져 있다. 정죄함이니 죄의식이니 하는 것이 있을 필요가 없다. 이것은 어떤 점에서 현대판 영지주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바울은 이런 영지주의를 가장 경계했다. 그것은 어떻게든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겠다는 신화에 다름 아니다. 바울은 절대로 인간은 그렇게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무리 화려한 모습으로 변형을 한다 하더라도 속임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죄함에서 해방받는 길, 유죄판결을 무죄선언으로 돌리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이다. 카산드라 크로싱으로 달리는 기차를 떠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그것을 잊어버리고 아름다운 환각에 젖어서 정신만 거기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그렇게 객차를 파괴하는 이에 의하여 기관차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 바울은 후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이라고 보는 것이다.

바울이 본 대로, 인류 역사는 지난 2천 년 동안도 엄청난 무력과 폭력으로 사람들을 강제로 죄 짓게 만들었고, 이제는 환경을 파괴하여 대재앙을 불러오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정죄함을 못 박았고 무죄선언을 해 주셨지만, 그분이 다시 오시기까지 이제 그 무죄선언을 실천하고 확산해 가는 것은 우리에게 맡겨진 과제이다. 그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몸에 상처가 나면 세균이 감염된다. 조그만 상처인데 온 몸이 즉시 작동을 해서 비상을 걸어서 부지런히 그 세균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 백혈구를 만들어낸다. 평상시보다도 더 많은 백혈구를 만들어서 부지런히 그쪽으로 보내서 그 균을 삼키고 죽인다. 그게 고름이 된다. 그러니까 조그만 상처가 나도 약한 데를 보호하고 전체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움직인다. 인체뿐 아니라 생태 전체로 보아도, 어딘가 균형이 깨지면 그걸 가서 복구하려고 아주 눈물겹게 움직인다. 그걸 역동적인 균형이라고 한다.

크리스천은 죽음을 향하여 치닫는 몸을 구하기 위해서 뛰어든 백혈구와도 같다. 이 세상은 상처투성이이고 죽음을 향하여 치닫고 있다. 몸에 병균이 들어와도 백혈구가 싸워서 병을 이기고 균형을 유지하고 건강을 유지하듯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무죄선언을 받은 의로운 사람들, 은혜 받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 대해 낙망하지 않는다. 작은 상처라고 무시하지 않는다. 아무리 작은 상처라도 온몸이 다 힘을 써서 백혈구를 만들듯이, 죽음의 시스템 속에 갇혀서 신음하는 모든 작은 자들, 소외된 사람들을 구하는 데 온 힘을 쏟는다. 소수의 정예들을 살리기 위해서 다수를 정리해고 하고, 소수의 기득권자를 위해 다수를 파트타임으로 전락시키는 이 사회로는 안 된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대접하는 것이 그리스도께 하는 것이라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크리스천으로 하여금 이 사회 속의 백혈구로 살게 만든다.

이제 지난주 총회를 열고 목회계획을 발표하고 우리가 선한 목표를 세우고 한 해를 힘차게 출발하고 있다. 우리가 모이고 헤어지는 일이 그저 일주일에 한번 얼굴 보고 친교를 나누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치닫는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를 멈추게 하고 생명의 길로 돌리기 위한 중요한 역할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이 세상에서 정죄를 받고 유죄 판결을 받아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죄선언을 하는 생명 공동체임을 스스로 깨달아야겠다. 그리하여 죽을 테면 죽으라고 내버려둔 환자 같은 이 세상 속에서 절대로 죽이지 않고 살리기 위해서 백혈구처럼 움직이고 일하는 주님의 생명의 일꾼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낙산교회 05.1.9 주일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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