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미국인의 존경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의 이름은 미국 수도와 주의 이름이 되어 오늘 까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그는 세계 어느 나라도 겪어보지 않은 대통령직을 잘 수행함으로 미국 정치의 첫 단추를 잘 꿰어 놓은 사람입니다. 그는 부유한 농장주의 아들로 태어나 이복형의 영향으로 영국 해군에 입대하려고 했지만 홀로된 어머니의 만류로 15세부터 토지 측량관으로 6년간 직장생활을 하였습니다.
그가 대통령이 된 데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군인이 되어 공을 세운데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연전 연승을 한 것이 아닙니다. 21세에 민병대에 입대하여 영국군 정규군에 편성되어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독립전쟁이 시작되자 식민지군 사령관으로 취임하였습니다.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해군 국가로 훈련된 정예군과 강력한 재정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미국은 단지 영국에서 5,000km 떨어져 있다는 사실 외엔 유리한 점이 없었습니다. 쓸만한 군함도, 훈련된 병사도, 넉넉한 재정도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미국인은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과 무관심하는 사람이 미국인의 2/3가 되었습니다. 워싱턴은 전혀 준비되지 않은 1/3을 이끌고 전쟁을 치러야만 했습니다. 전혀 승산이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당시 44세였던 워싱턴은 패전에 패전을 거듭했습니다. 그는 영국의 약점인 본국에서 5,000km 떨어져 물자 보급이 제때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렵다는 것을 이용하였습니다. 깊이 숨어 적과 전투를 피하며 시간을 끌었습니다. 1776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전날 갑자기 델라웨어 강을 건너 트렌턴 요새를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때부터 독립전쟁의 판도는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우세한 병력은 가진 영국군에게 독립군은 밀렸지만 다시 9월 19일 새러토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두 번의 전승은 결국 프랑스의 지원을 이끌어 냈고 에스파냐, 네덜란드의 지원을 이끌어 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싱턴은 영국군보다 미군과 더 힘겨운 싸움을 하였습니다. 지루한 전쟁이 계속되자 군인들은 도망을 갔고, 밀린 봉급 투쟁이 벌어지는가 하면 아예 전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최악의 조건 속에서도 워싱턴은 굴복하지 않고 1781년 10월 9일 요크타운에서 영국군 사령관 콘윌리스 장군의 항복을 받았습니다. 미국은 드디어 독립을 쟁취하고 마지막 영국인 미국을 떠나던 날 워싱턴은 그가 왕이 되어야 한다는 빗발같은 요청을 거절하고 미련없이 고향으로 떠났습니다. 워싱턴은 매 전투마다 승리한 것이 아닙니다. 많은 패전과 수많은 어려움에 직면했지만 결정적인 전투 세 번의 승리고 미국 독립을 쟁취했습니다. 몇 번의 실패로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결정적인 순간 승리하면 인생의 방향은 바꾸어집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 6:9)”
-열린편지/열린교회/김필곤 목사 섬기는 언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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