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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거룩한 등정의 사다리 ("The Ladder of Divine Ascent")

수도관상피정 고려수도원............... 조회 수 3041 추천 수 0 2009.02.07 21: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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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거룩한 등정의 사다리 ("The Ladder of Divine Ascent")
                                요한 클리마쿠스(John Climacus),  최대형 옮김. PP. 289~339.

소개 :
    "The Ladder of Divine Ascent"는 저자 John Climacus에 의하여 쓰여진 책으로, 정교회 전통 사제들과 수도사들과 신실한 신앙인들은 일생에 40~50회 이상 읽는다고 한다. 서방교회의 ?천로역정?이 있다면 동방정교회 전통에는 ?사다리?(창 28:12 상징)가 쌍벽을 이룬다. 이 책은 최대형 역, ?거룩한 등정의 사다리?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본 사다리는 30계단으로 되어 있으며, 전반부는 세상과의 결별, 활동적인 영성생활(수덕생활)을 마지막 부분에서는 지금까지의 계단에 대한 개요와 관상적인 단계를 서술하였다. 여기서는 관상적인 단계인 정적. 기도. 무정념. 그리고 믿음 소망 사랑의 장을 옮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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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계단(1~26)에 대한 개요.
                    거룩한 등정의 사다리("The Ladder of Divine Ascent"),
                    요한 클리마쿠스(John Climacus),  최대형 옮김. PP. 289~339.
                    요약과 개요   PP, 289~296.


강한믿음은 극기와 자제의 근원입니다. 이것과 반대되는 것은 매우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흔들림이 없는 희망은 초연(이탈)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이것과 반대되는 것은 지극히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은 유배생활의 기초입니다. 이것과 반대되는 것은 매우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자기비판은 순종 및 건강하려는 갈망을 낳습니다.
자제는 건강의 근원입니다. 자제의 근원은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며 우리 하나님이 마신 쓸개와 식초입니다.
독거생활은 순결의 기초이며 조력자입니다. 금식은 육체의 불을 소멸시킵니다. 마음의 통회는 더러운 생각들의 적입니다.
믿음 및 세상을 버리는 것은 탐욕의 죽음입니다. 
긍휼과 사랑은 육신의 배반자입니다.
꾸준한 기도는 낙담의 죽음입니다. 
심판을 기억하는 것은 열심을 장려해줍니다.
치욕을 사랑하는 것은 노염의 치료법입니다. 찬송을 부르는 것과 긍휼을 나타내는 것과 가난은 슬픔을 없애줍니다.
감각으로 인식한 것에서 이탈하는 것은 영적인 것을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침묵과 독거는 허영의 적입니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 있을 때 수치를구하십시오.
공공연한 교만은 암담한 환경이 고쳐주겠지만, 우리 안에 감추어져 있는 교만은 영원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이 고칠 수 있습니다.
사슴은 눈에 보이는 뱀들을 죽이고, 겸손은 옆의 뱀들을 죽입니다.
우리는 자연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통해 지성적인 것들을 분명히 인식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뱀은 좁을 구멍으로 기어들어가야만 낡은 껍짙을 벗을 수 있고, 우리는 금식과 수치의 협착한 길을 취해야만 옛 성향들과 낡아빠진 영혼과 옛사람의 옷을 벗을 수 있습니다.
몸이 비대한 새는 하늘을 향해 날수 없듯이, 육체에 굴복하고 육체를 만족 시키는 사람도 하늘나라를 향할 수 없습니다.
돼지들은 마른 땅을 좋아하지 않으며, 말라버린 육체에는 마귀들이 잠복하지 않습니다.
장작을 너무 많이 넣으면 연기가 나고 불이 거질 수 있습니다. 지나친 슬픔은 영혼을 어둡게 만들고 눈물을 마르게 할 수 있습니다.
눈먼 사수(射手)는 소용이 없고, 논쟁을 좋아하는 제자는 버립을 받습니다. 단련된 철은  단련되지 않은 것을 연마할 수 있습니다. 열성적인 형제는 게으른 형제를 구할 수 있습니다.
알을 품고 부화하면 병아리가 나오듯이, 고백되지 않은 악한 생각은 악한행동을 낳습니다.
달리는 말들은 서로 경쟁합니다. 열성적인 공동체는 각 사람의 열심을 장려합니다.
구름이 태양을 가리듯이, 악한 생각은 정신을 흐리게 하고 파괴합니다.
사형선고를 받고 형장으로 가는 사람은 극장에 대해 논하지 알습니다. 진심으르 자기의 죄를 한탄하는 사람은 결코 식욕을 충족시키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국왕의 보물들을 보면 자신의 궁핍함을 한층 더 크게 의식합니다. 교부들의 위대한 덕에 대한 글을 읽는 영혼은 한층 더 겸손한 사고방식을 취합니다.
자석은 철을 마구잡이로 끌어당깁니다. 나쁜 습관에 사르잡힌 사람은 그 습관의 지배를 받습니다.
금식은 육체의 무의식적인 정념의 불을 끕니다.
둑을 쌓아 막으면, 물이 거꾸로 흐릅니다. 위험에 직면한 영혼은 종종 하나님께 돌아가며 회개하여 구원을 받습니다.
향수를 뿌린 사람은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향내에 의해 탐지됩니다. 하나님의 영을 지닌 사람은 말과 겸손함에 의해 탐지됩니다.
 바람은 깊은 곳을 휘저어 놓고, 짜증은 정신을 휘저어 놓습니다.
어떤 것을 보지 못하고 듣기만 했다면 그것을 원하는 마음이 그리 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무지는 순결에 큰 도움이 됩니다.
도둑은 왕의 갑옷이 저장된 곳을 약탈하지 않습니다. 자기 마음을 기도와 결합시킨 사람들을 영적 도둑들은 공격하지 않습니다. 
불은 눈을 만들어내지 못하며, 이 세상에서 영광을 구하는 사람들은 천국에서 영광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작은 불이 큰숲을 태우듯이, 하나의 선한 행동이 많은 죄를 씻어버릴 수 있습니다.(약 3:5, 5:20 참조).
무기가 없으면 사나운 짐승을 죽일 수 없고, 겸손하지 않으면 노염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본래 음식이 없이는 생존할 수 없듯이, 임종을 앞두고 있을 때는 한순간이라도 태만해서는 안 됩니다.
햇빛이 조그만 틈을 뚫고 들어와 집을 밝혀주며 아주 작은 먼지까지도 드러내 주듯이, 주님에 대한 경외심이 마음에 들어오면 우리의 모든 죄를 드러내줍니다.
죄는 어떤 때는 앞으로 가고 어떤 때는 뒤로 가기 때문에 쉽게 잡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때 따라 웃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며 사치하게 사는 사람은 발전할 수 없습니다.
잠자는 사람은 쉽게 약탈당하며, 세상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쉽게 덕을 빼앗깁니다. 
사자와 싸우는 사람이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치명적인 결과가 초래됩니다. 자기의 몸을 대적하여 싸우는 사람이 잠시라도 몸에 굴복하는 것은 치명적입니다.
썩은 사다리를 올라가는 것은 위험합니다. 마찬가지로 명예와 영광과 권세는 겸손을 위협합니다.
굶주린 사람이 빵을 생각하듯이, 구원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은 죽음과 심판을 생각합니다.
물로 얼룩을 씻어내듯이, 눈물은 죄를 씻어버릴 수 있습니다. 물이 부족하면 얼룩을 씻기 위해서 다른 것을 사용하듯이, 눈물이 부족한 영혼은 슬픔 · 신음 · 애통 등을 사용하여 죄를 몰아냅니다.
거름더미에는 벌레들이 많습니다. 음식을 많이 먹으면, 타락 · 악한 생각 꿈 등이 많아집니다.
두 다리가 결박당한 사람은 자유롭게 걸을 수 없고, 보물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하늘나라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새로 생긴 상처는 쉽게 치료될 수 있지만 오래된 상처를 가진 영혼은 쉽게 치료할 수 없습니다. 혹시 치료된다고 해도 매우 힘들게 치료됩니다.
죽은 사람은 걸을 수 없고, 낙심한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참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계속 죄를 범하는 사람은 눈이 없는 사람과 같습니다. 믿음이 없지만 선을 행하는 사람은 물을 길어서 구멍 뚫린 통에 붓는 사람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항해사로 모시고 항해하는 사람은 안전하게 항구에 도착합니다. 과거에 부당한 일을 많이 행했더라도 선한 목자와 함께하는 영혼은 쉽게 하늘나라를 향해 올라갑니다.
아무리 신중한 사람이라도 안내자가 없으면 쉽게 길을 잃을 수 있습니다.
비록 세상의 모든 지혜를 가지고 있어도 홀로 수도생활을 하는 사람은 쉽게 길을 잃을 수 있습니다.
육체가 연약하며 심각하게 타락했던 사람은 겸손의 길을 걸으십시오. 구원에 이르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오랫동안 병을 앓던 사람이 순식간에 건강을 회복할 수 없듯이, 정념들도 순식간에 정복할 수 없습니다.
각각의 정념들과 각각의 덕들의 정확한 상태를 계속 추적하십시오. 그리하면 당신이 얼마나 진보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금을 주고 진흙을 사는 것은 손해 보는 일입니다. 물질적인 이익을 위해서 영적인 것을 제시하는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속하게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신속하게 무정념을 획득한 사람은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많은 시간과 수고와 하나님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씨를 뿌릴 때 싹이 나서 자랄 때 그리고 수확할 때 어떤 짐승과 새들이 우리에게 해를 끼치려 하는지 알아내고 적절히 덫을 준비해야 합니다.
열병을 앓는다고 해서 자살해서는 안 되며, 죽는 순간까지 절망하지 밀아야 합니다.
아버지를 장사지낸 직후에 결혼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자기의 죄로 인해 슬퍼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명예와 영광과 쉼을 구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선량한 시민들이 사는 장소와 죄수들이 사는 장소는 다릅니다. 죄로 인해 애통하는 사람들의 신분과 무죄한 사람들의 신분에는 차이가 있어야합니다. 
왕은 전쟁터에서 자기 앞에서 심하게 부상당한 군인을 퇴역시키지 않고 진급시킵니다. 마찬가지로 하늘나라 왕은 마귀들로부터 오는 많은 위험을 참고 견딘 수도사들에게 면류관을 주십니다.
죄는 영혼의 특성인 지각(知覺)을 과괴합니다. 양심의 산물인 지각은 악을 종식시키거나  감소시킵니다. 양심은 수호천사에게서 오는 말과 비난으로서, 우리는 세례 받을 때부터 그것을 소유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 받지 않은 사람의 영혼은 자신의 악한 행위로 인해서 큰 슬픔을 느끼지 않습니다.
악을 줄이면 악을 삼가게 되는데, 이렇게 악을 삼가는것이 회개의 출발점입니다. 회개의 시작은 구원의 시작이요, 구원의 시작은 선한 의도요, 선한 의도는 노력을 낳습니다. 노력의 시작은 덕이요, 덕의 시작은 개화(開花)요, 덕의 개화는 활동의 시작입니다. 
덕의 결과는 견인입니다. 견인의 결과와 열매는습관이요, 습관의 결과는 성품입니다.
선한 성품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울은 하늘과 땅의 계명들을 준수하게 합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요, 사랑의 출발점은 풍성한 겸손이며, 겸손은 무정념의 결과입니다. 무정념을 소유하는 것은 사랑의 충만입니다. 사랑의 충만이란 무정념을 통해서 마음이 깨끗해져서 하나님을 보게 될 사람들 안에 하나님께서 완전히 거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마5:8).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할지어다. 아멘.

요약과 권면
P. 339

   형제들이여, 열심히 사다리를 올라가십시오. 올라가기로 결심하십시오.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신 분(합 3:19)의 전에 이르자(사 2:3)"라는 말을 경청하십시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라고 말한 사람과 함께 달리십시오. 그리스도는 세상에서 삼십 세 때 세례를 받으시고, 영적 사다리의 서른번 째 계단(믿음, 소망, 사랑)에 오르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주권과 권세와 찬송을 돌리십시오. 하나님 안에 모든 선한 것의 원인 · 과거 · 현재 · 미래가 영원히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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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7 계단 정적
                    거룩한 등정의 사다리("The Ladder of Divine Ascent"),
                    요한 클리마쿠스(John Climacus),  최대형 옮김. PP. 289~339.
                    제27단계 정적   PP, 297~315.

   우리는 계약을 맺어 사악한 정념들에게 팔린 노예들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그것들의 속임수와 사기와 책략을 조금은 압니다. 우리는 불쌍한 우리 영혼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것들의 폭정을 압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 및 스스로 성취한 자유 때문에 이것들의  책략을 완전히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병든 우리는 건강의 좋은 점을 상상할 수 있을뿐이지만, 그들은 건강하기 때문에 질병에 따르는 쇠약함을 이해하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나는 약하고 우유부단하기 때문에 독거의 항구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주저합니다. 선한교제의 식탁 앞에는 빵부스러기를 먹으려고 기다리는 개, 다시 말해서 빵부쓰러기를 입에 물고 달려 나가서 천천히 먹는 영혼이 있습니다. 나는 그러한 기회를 살피고 있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제공할 말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담대하게 우리의 왕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전쟁터에 나가있는 용사들에게 평화에 대해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단지 싸움에서 약해지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평화와 평정이라는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다고 말하렵니다.

   그러나 누구의 기분도 상하지 않게 하려면 이 장의 주제를 언급해야합니다. 그러므로 정적(stilIness; hesychia)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하겠습니다.
   몸의 정적은 우리의 감정과 지각작용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관리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정적은 자신의 생각을 정확히 아는 것이요 난공불락의 정신입니다.
   용감하고 단호한 생각은 정적의 동반자입니다. 그것은 항상 마음의 문을 지키며, 침입하는 개념들을 죽이거나 몰아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정적을 실천하는 사람은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하겠지만, 초심자는 그것을 경험하거나 알지 못할 것입니다.
   빈틈없는 헤시카스트(hesychast)는 말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는 말보다는 행위에 의해서 가르침을 받습니다.
   정적의 출발점은 모든 시끄러운 것들이 영혼의 깊은 곳을 어지럽게 만든다고 여겨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것의 종착점은 더 이상 시끄러운 소란을 두려워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외출할 때도 내적 고독을 유지하는 사람은 관대하고 완전히 사랑을 소유하며, 쉽게 말하거나 노여워하지 않습니다.
   이상한 말 같지만,  헤시카스트는 자신의 영적 자아를 몸이라는 집 안에 가두어두기 위해 싸우는 사람입니다. 고양이는 쥐를 붙잡고 놓지 않습니다. 헤시카스트의 생각은 영적인 쥐를 붙잡고 놓지 않습니다. 이 비유를 우습게 여기는 사람은 정적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독수도사와 다른 수도사와 함께 사는 수도사는 같지 않습니다. 독수도사는 많이 경계해야하며, 정신이 민첩해야 합니다. 다른 수도사들과 함께 사는 수도사는 종종 자기 형제의 도움을 받지만, 독수도사는 천사들의 도움을 받습니다.
   영혼 안에서 정적을 실천하는 사람의 삶과 예배에는 하늘나라 권세들이 함께 참여합니다. 교의의 깊은 사상은 위대합니다. 그러나 독수도사의 정신은 안전하게 그것을 뛰어넘습니다.
   옷을 입고 수영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정념의 노예는 신학에 손을 대지 말아야합니다.
   헤시카스트의 수실은 그의 몸입니다. 그리고 그의 내면은 지식의 거처입니다.
   영혼이 정념으로 병든 사람이 독수생활을 하는 것은, 배에서 바다에 뛰어들어 널빤지를 타고 안전하게 해안에 도착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의 몸과 싸우는 사람은 영적 지도자를 두고 적절한시기에 독수생활을 실천해야합니다. 만일 당신이 독수생활을 하려면, 천사의 힘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진정한 독거생활을 하는 사람에 대한 말입니다.
   헤시카스트가 게을러지면 거짓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독수생활을 그만둘 것을 넌지시 암시하며, 수실을 떠날 때는 마귀들을 탓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이 마귀로 변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향해 끝없이 타오르는 갈망을 지닌 헤시카스트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열심에 의해서 열심을, 사랑에 의해서 사랑을, 갈망에 의해서 갈망을 만들어냅니다.

   헤시카스트는 세상에 사는 천사와 같습니다. 그는 사랑의 종이와 열심의 문자로써 자신의 기도를 나태와 부주의로부터 해방시킨 사람입니다. 그는 공개적으로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습니다."(시 57:7),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다"(아5:2)라고 외칩니다.

   당신의 수실의 문을 닫아 당신의 몸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혀의 문을 닫아 말하지 못하게 하고, 내면의 문을 닫아 악한 영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십시오. 한낮의 뜨거운 태양아래 있거나 바람이 없어서 배를 멈출 수밖에 없을 때에 선원의 인내심은 시험을 받습니다. 독수도사의 인내심은 필요한 물건이 부족할 때 시험을 받습니다. 선원은 조급해지면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치며, 낙심한 독수도사는 많은 사람들을 찾아 나섭니다.
   시끄럽고 허튼 말을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애통의 영은 그것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그것 때문에 당황하지도 않습니다.
   참된 기도에 익숙해진 정신의 소유자들은 마치 황제의 귀에 속삭이듯이 주님께 직접 이야기합니다. 소리 내어 기도하는 사람은 원로원 앞에 선 것처럼 주님 앞에 엎드립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은 붐비는 사람들 가운데서 황제에게 청원합니다. 기도의 기법을 체계적으로배운 사람은 내 말의 의미를 분명히 이해할 것입니다.
   할 수 있다면 높은 곳에 앉아서 지켜보십시오. 그러면 도둑들이 오는 것을 볼 것입니다.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어떤 종류의 도둑이 얼마나 와서 우리의 포도송이를 도둑질 해 가는지 발견할 것입니다.
   파수꾼은 피곤하면 일어나서 기도한 후에 다시 앉아서 담대하게 임무를 수행합니다. 이 모든 것들을 경험하여 아는 사람이 그것들에 대해 상세히 묘사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두려웠습니다. 그는 이미 그일을 시작한 사람들을 낙심으로 이끌고 싶지 않았고, 또 자기의 말 때문에 그 일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이 겁을 내어 도망치게 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정적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서 명석하게 말하기 시작하는 사람은마귀들을 자극하여 자신을 대적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은 마귀들의 일을 그처럼 멸시하게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적을 이룬 사람은 신비의 중심에 이른 사람입니다. 만일 그가 먼저 악한 영들의 소리와 파도소리를 보고 듣지 않았다면, 만일 그물이 그에게 튀기지 않았다면, 결코 그곳에 도착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이것을 확인해줍니다. 만일 그가 낙원에 끌려 올라가지 않았다면, 그는 말할 수없는 말을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고후 12:4 참조). 독수도사는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것을 들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극히 지혜로운 욥은 "무슨 말씀이 내게 가만히 임하고 그 가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렸었나니"라고 말합니다(욥 4:12).

   독수도사가 사람들에게서 도망치는 것은 그들을 미워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독수도사는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에서 떨어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가서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나누어 주십시오. 가난한 수도사들에게 가진 것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홀로 수도하는 당신과 함께 기도하도록 하십시오. 순종하면서 당신의 십자가를지고 가십시오. 그리고 좌절된 당신의 의지의 짐을 인내하며 지고 가십시오.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마 19:21). 지극히 복된 정적과 함께 오십시오. 그리하면 영적 권세들의 활동과 행위를 가르쳐주겠습니다. 그들은 자기를 지으신 분을 영원히 찬양합니다. 또 정적의 천국에 들어간 사람은 자기를 지으신 분을 쉬지 않고 찬양합니다. 영들은 물질적인 것을 생각하지 않으며, 육체적인 몸 안에서 영적으로 변화된 사람들은 음식에 관심을 두지 않을 것입니다. 전자는 그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후자는 그것에 대한 약속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전자는 돈과 가재(家財)에 대해 무관심하며 후자는 악령들의 악의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하늘에 거하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피조물을 동경하지 않으며, 세상에 거하는 사람들은 감각될 수 있는 것을 동경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전자는 쉬지 않고 사랑 안에서 전진하며, 후자는 쉬지 않고 그들을 본받기 때문입니다. 전자는 자신의 진보의 가치를 잘 알고 있으며, 후자는 자신의 사랑 및 천국으로 올라가는 데 대한 동경을 이해합니다. 전자는 스랍천사의 세계로 올라갈 때만 진보를 단념할 것이며, 후자는 천사가 될 때 천국에 대한 동경을 멈출 것입니다. 소망을 갖는 사람은 복되며, 살아있을 때 천사가 된다는 약속을 보는 사람은 세 배나 복됩니다.

여러 종류의 정적

   모든 학문의 개념과 목표는 각기 다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열심이 부족하거나 능력이 부족한데서 생기는 결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혀를 지배하지 못하거나 육체에 속한 과거의 습관 때문에 독수생활(獨修生活)의 항구나 바다나 심연에 들어갑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좋지 않은 성질을 억제하지 못하거나, 다른 사람의 지도를 받으면서 살기보다는 홀로지내는 것이 낫다는 오만한 생각 때문에 독수생활을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물질들을 소유하고 있는 한 그것들이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에, 독수생활을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은 독수생활이 열심을 강화해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자기의 잘못을 은밀하게 벌하기 위해서 독수생활을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 생활이 가져다줄 영광을 생각합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갈망 때문에 이 거룩한 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낙담을 완전히 버린 후에 비로소 그러한 연합을 성취합니다. 낙담을 하나님 사랑과 연결하는 것은 간음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아는 것이 빈약하여 이류 기술자밖에 되지 못하지만, 지금까지 거룩을 향해 올라가는 사다리를 조립했습니다. 그러나 각 사람은 자신이 올라서 있는 계단에 주목해야합니다. 그것은 이기심의 계단입니까, 명예의 계단입니까, 수다의 계단입니까, 격한 성질의 계단입니까? 아니면 소유욕의 계단입니까? 그것은 대속의 계단입니까, 보다 큰 열심의 계단입니까? 점점 더 뜨거워지는 사랑의 계단입니까?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을 것입니다"(마 19:30). 처음 일곱 가지는 세상에서의 한 주간에 행하는 일인데, 선한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덟 번째 계단은 다음 세대의 표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독수도사는 사나운 짐승들이 활동하는 시간을 경계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적절한 덫을 준비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그가 낙담을 털어버렸다면 이것은 불필요한 일이 되겠지만, 여전히 낙담에 시달리고 있다면 홀로 지내는 생활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왜타벤니사(Tabennisi)의 교부들 중에는 스케티tm(Setis)의 효부들만큼 많은 현인들이 없었습니까?   나는 그 이유를 말할 수 없고, 말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정념들을 억제하기 위해서 일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시편을 노래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기도하면서 보냅니다. 어떤 사람은 깊은 관상기도를 실천합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이든지 사다리에 따라서 조사하고 주님 안에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수도원에는 게으른 영혼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게으름을 키우는 모든 것에 굴복하여 완전히 좋지 못한 결과에 이릅니다. 또 공동체 안에서 살면서 게으름을 완전히 제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일은 부주의한 사람들에게서 발생할 뿐만 아니라 열성적인 사람들에게서도 발생합니다.

   독수생활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많은 노련한 수도사들은  독수생활을 시작했지만 지도자가 없어 실패함으로써 자신이 쾌락을 사랑한다는 것을 입증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 때문에 이 생활을 받아들여 열심을 기울였습니다.

   자만심이 강하고 성질이 더러운 사람, 위선적이고 불평이 많은 사람은 결코 독수생활을 시작해서는 안 됩니다. 자칫하면 전혀 유익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건강한 정신을 잃을 염려가 있습니다. 이러한 결점들이 없는 사람들 중에는 무엇이 가장 선한지 아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다음은 정적을 바르게 실천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징조와 증거요, 그 단계들입니다. 침착한 정신, 정화된 기질, 주님 안에 있는 큰기쁨, 영원한 고통을 기억함, 죽음의 긴박함, 기도하고픈 충족되지 않는 충동, 끊임없는 경계, 육욕의 부재, 애착을 느끼지 못할 세속성의 부재, 탐식의 종식, 신학을 실천할 수 있는 기초 분별의 샘 눈물을 동반하는 휴식, 수다의 종식 등인데, 이것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것들입니다.

   다음은 정적을 잘못 실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표식들입니다. 영적 보물들의 부족, 노염의 증가, 분개의 성장, 사랑의 감소, 허영의 급증, 이것들의 뒤를 따르는 것들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이 조용하고 바람직한 순종의 길과 합법적으로 순결하게 그리고 순수하게 결합한 사람들의 표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날마다 증가하거나 성장합니다. 기본적인 겸손이 진보합니다. 나쁜 기질은 감소하는데, 그것은 결국 쓸개즙처럼 완전히 고갈되어야합니다. 어두움이 흩어지고 사랑이 다가옵니다. 정념들을 멀리하며, 미움을 피합니다. 육욕이 끊임없이 비판을 받아 감소하고, 낙담이 사라지며, 열심이 증가합니다. 자비로운 사랑이 생기고, 교만이 쫓겨납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구해야하는 것이지만, 이 일에 완전히 성공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물이 없는 우물은 우물이라 할 수 없습니다.

   결혼생활에 성실하지 못한 젊은 여인은 몸을 더럽힙니다. 서원에 충실하지 못한 영혼은자기의 영을 더럽힙니다. 결혼생활에 성실하지 못한 여인은 미움을 받고 비난을 받고 매 맞고 쫓겨납니다. 서원에 충실하지 못한 영혼에게 발생하는 일은 타락, 죽음의 망각. 만족을 모르는 식욕, 시선을 제어하지 못함, 허영, 잠자고 싶은 욕망, 냉담한 마음, 무감각, 악한 생각들의 축적, 마음의 포로 됨, 영적 대격변, 불순종, 논쟁을 좋아함, 사물에 대한 애찬 불신앙, 의심, 수다. 그리고 거리낌 없고 안일한 대인관계 등입니다. 가장 비참한 것은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마음이며, 그 다음에는 무감각이 따라옵니다. 무감각은 타락의 근원이요, 마귀들의 근원입니다.

   여덟 가지 악한 영들 중에서 다섯 가지는 독수도사를 공격하고, 세 가지는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을 공격합니다.

   정적(hesychia)을 실천하면서 낙담과 싸우는 수도사는 종종 해를 입습니다. 왜냐하면 기도하고 관상하며 보내야할 시간을 자기의 문제와 싸우기 위해 필요한 씨름에 보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나는 태만하게 수실에 앉아 있었습니다. 실제로 나는 수실을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손님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나의 헤시카스트 생활을 칭찬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나의 태만함은 허영심이 강한 생각으로 변했습니다. 나는 뿔이 세 개 달린 이 마귀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대적하는 방법에 놀랐습니다.

   낙담의 영은 우리의 동반자입니다. 매 시간 그를 지켜보십시오. 그의 움직임 · 성향 · 얼굴의 변화에 주목하십시오. 그의 특성과 그가 취하는 방향을 주시하십시오. 성령으로부터 평온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내 말을 이해할 것입니다.

   정적의 우선적인 임무는 모든 선한일과 나쁜 일에 개입하지 않는 것입니다. 선한 일에 대한 관심은 나쁜 일로 이어집니다. 두 번째 임무는 절박하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셋째 임무는 거역할 수 없는 마음의 활동입니다. 알파벳을 모르면 책을 읽을 수 없듯이, 첫째 임무를 행하지 않으면 나머지 두 가지 일을 행할 수 없습니다.

   나는 이것들 중 두번째 임무를 행하면서 중간단계에 들어갔습니다. 나는 갈급한 상태에서 주님이 눈에 보이는 형체를 취하시기 전에 어떤 모습이셨는지 질문했는데, 그때 하나의 빛이 나에게 임했습니다. 천사는 그것을 말하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기 때문에 나에게 말해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천사에게 "주님은 지금 어떤 상태이십니까?"라고 물었는데, 주님은 우리에게는 적절하지 않지만 그분에게 적절한 상태에 계시다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우편에 앉거나 서는 것의 본질은 어떤 것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그러한 신비는 인간의 귀로는 들을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내 마음이 갈망하는 곳으로 데려가 달라고 간청했지만, 그는 내안에서 썩지 않는 불이 충분히 강하게 타오르지 않고 있기 때문에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이런 일이 벌어지는 동안에 내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말할 수 없습니다(고후 12:2 참조).

   특히 여름 낮에 졸린 것은 떨쳐 버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럴 때 육체 노동이 허락됩니다.

   낙담의 마귀는 육욕의 마귀가 들어올 수 있는 길을 열어줍니다. 그것은 몸을 매우 약하게 만들고 잠을 자게 만들어 헤시키아를 실천하는 사람들의 내면을 부패하게 합니다. 이러한 마귀들과 열심히 싸우십시오. 그러면 그것들도 무섭게 우리를 공격할 것입니다. 그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노동이 전혀 가치가 없다고 말하여 노동을 그만두게 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들이 난폭하게 우리를 공격하는 것은 그들의 목적이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증거입니다.

   공개적으로 외부에 나갈 때는 우리가 지금까지 쌓아올린 것을 보호해야합니다. 새장의 문이 열리면, 새들은 날아갑니다. 그런 일이 발생하면, 계속정적을 유지할 목적이 없어집니다.

   눈에 들어간 눈썹 하나가 눈을 괴롭게 하듯이, 사소한 염려가 정적을 방해합니다. 정적이란 생각들을 배제하는 것, 심지어 합리적인 염려까지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실로 정적을 획득한 사람은 육체를 무시합니다. 하나님은 거짓 약속을 하지 않습니다.

   깨끗한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기를 원하면서도 염려에 시달리는 사람은 마치 두 다리가 묶여 있으면서도 빨리 걸으려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세상의 철학에 뛰어난 전문가는 많지 않습니다. 정적의 철학에 탁월한 사람은 그보다 훨씬 더 적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없는  사람은 독수생활을 시작하지 밀아야 합니다. 만일 그런 사람이 홀로 수도생활을 하면 많은 위험에 직면할 것입니다. 정적의 경험이 없는 사람을 질식하게 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에 공격을 받고 낙담하고 분심한 상태에서 시간을 허비합니다.

   기도의 가치를 경험한 사람은 마치 야생 당나귀를 피하듯이 북적이는 사람들을 피합니다. 결국, 기도는 그로 하여금 당나귀를 닮게 하고 모든 사람들을 피하게 합니다.

   광야에 살면서 정념에 사로잡힌 사람은 정념이 속삭이는 쓸데없는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나는 복된 조지 아르실라이테스(George Arsilaites)에게서 이것을 배웠습니다. 그는 당신도 아는 분입니다. 그는 과거에 나에게 헤시키아를 가르쳐준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허영의 마귀와 색욕의 마귀는 주로 아침에 우리를 공격합니다. 낮에는 낙담의 마귀, 우울의 마귀, 노염의 마귀가 공격합니다. 저녁에는 식욕과 관련된 마귀들이 공격합니다."

   생각을 지배하지 못한 채 독수생활을 하기보다는 가난하고 순종하며 사는 편이 낫습니다.

   좋은 이유로 인해 헤시키아를 시작했지만 그것이 날마다 얼마나 유익을 주는지 알지 못하는 것은 헤시키아를 실천하는 방법이 잘못되었거나 자부심 때문에 침묵을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헤시키아는 쉬지 않고 하나님의 바라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호흡할 때마다  예수님을 기억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정적의 가치를 이해할 것입니다. 
   이기심은 순종하며  사는 수도사를 멸망하게 합니다. 그러나 독수도사를 망하게 하는 것은 기도를 중지하는 것입니다.

   만일 손님들이 당신의 수실을 찾아왔기 때문에 당신이 기뻐한다면, 당신은 자신이 낙담으로부터 오는 휴가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오는 휴가를 누리고 있음을 깨달아야합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부당한 일을 당한 과부처럼 기도해야하며(눅 18:1-8), 위대한 은수사  아르세니우스를 헤시키아의 본보기로 삼아야 합니다. 독수생활을 하면서 이 훌륭한 헤시카스트를 생각하십시오. 또 그가 좋은 편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어떻게 돌려 보내곤 했는지 기억하십시오.

   종종 마귀들은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부추겨 바르게 살고 있는 은둔자들을 찾아다니게 합니다. 마귀들이 이렇게 행하는 것은 가능하다면 이러한 사람들을 통해서 그들을 방해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사람들을 조심하며, 경건한 행동에 의해서 그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에 대해 근심하지 마십시오. 실제로, 이런 식으로 기분을 상하게 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돌아다니는 일을 그만두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갈급하여 당신에게서 물을 얻으려고 찾아오는 영혼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매사에 신중해야합니다.

   특히 독수도사들이 실천하는 정적 생활은 양심과 상식을 따라야합니다. 만일 당신이 올바르게 경주를 한다면 모든 행동과 말과 생각과 움직임을 주님의 뜻대로 행한다면, 주님이 실제로 그곳에 계시는 것 같은 영적 인식을 가지고  주님의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지 정적을 빼앗기는 사람은 아직 덕에 따라서 생활하고 있지 않는 사람입니다.

   수금으로 나의 오묘한 말과 내가 원하는 것을 설명할 것이며(시 49:4 참조), 그것은 나의 불완전한 판단과 일치할 것입니다. 나는 기도할 때 내 뜻을 하나님께 바치곤 하나님으로부터 보증을 끌어낼 것입니다.

   믿음은 기도의 날개입니다. 만일 그것이 없다면, 나의 기도는 내 품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믿음은 흔들림이 없는 영혼의 자세로서, 어떤 역경에 의해서도 흔들리지 알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모든 것을 얻을 것이라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른편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증명한 것처럼, 믿음은 바라지 않는 것들을 가능하게 해주는 효과적인 원인입니다(눅 23:42-3). 믿음의 원천은 근면한 행위와 고결한 마음입니다. 전자는 믿음을 세워주고, 후자는 믿음이 지속되게 해줍니다. 믿음은 헤시카스트의 근원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정적을 실천 할 수 있겠습니까?

   감옥에 갇힌 사람은 심판관을 두려워하며, 수실에 앉아 있는 수도사는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죄수가 법정에서 느끼는 두려움보다 수도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이 더 큽니다. 우리가 정적을 실천하려면 크게 두려워해야합니다. 두려움은 낙담을 쏟아내는데 가장 효과적입니다. 죄수는 판사가 감옥에 오는지 항상 경계하지만, 참 수도사는 죽음이 오는 것을 항상 경계합니다. 전자는 슬픔의 무게에 짓눌리며, 후자는 하염없는 눈물을 흘립니다.

   인내의 지팡이를 손에 잡으십시오. 그리하면 개들이 뻔뻔스럽게 괴롭히지 않을 것입니다. 인내는 영혼을 짓누르지 않습니다. 인내는 어떤 방해를 받아도 동요하지 않습니다. 인내하는 수도사는 자기의 잘못을 승리로 변화시킨 나무랄 데 없는 일꾼입니다. 인내는 일상적인 고난의 공격에 경계선을 설정합니다. 인내는 핑계를 대지 않으며, 자아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일꾼에게는 음식보다 인내가 필요합니다. 인내는 면류관을 가져다주지만,  음식은 멸망을 초래합니다. 인내하는 사람의 수실은 그의 무덤이며, 그는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인내는 소망과 애통에서부터 오며, 이것들이 부족한 사람은 낙담의 노예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군사는 멀리 있는 원수와 가까이 있는 원수를 공격하는 방법을 압니다. 때로는 싸워서 면류관을 얻고, 때로는 마지못해 싸운 결과 불행을 당합니다. 우리 모두의 성품과 기질은 각기 다르기 때문에, 획일적인 규칙을 세울 수는 없습니다.

   서 있거나 걸어갈 때, 앉아있거나 일어설 때, 기도하거나 잠잘 때, 어느 때든 끊임없이 공격하는 영을 특별히 경계하십시오.

   정적의 경주를 하는 어떤 사람은 항상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시 16:8)라는 말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천국의 떡덩이들 모두가 같은 모양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눅 11:19), 어떤 사람은 "깨어 있어 기도하라"(마 26:41), 어떤 사람은 "네일을 밖에서 다스리며 밭에서 예비하고"(잠 24:27), 어떤 사람은 "내가 낮게 될 때 나를 구원하셨도다"(시 116:6), 어떤 사람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어떤 사람은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시 50:22)를 끊임없이 숙고합니다. 모두가 경주하지만, 수고하지 않고 상을 받는 사람은 오직 한사람입니다.
  
   일부 진보한 사람은 깨어 있을 때뿐아니라 잠잘때도 일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은 잠자는 동안에 자기에게 접근하는 마귀들을 멸시하며 상상속의 방탕한 여인들에게 순결을 권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을 앞질러 대비하고 경계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정적의 조건은 근본적으로 단순하고 자유로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정적의 방과 탑을 쌓으려고 계획하는 사람은 먼저 앉아서 비용을 계산할 것입니다. 그는 기도로써 길을 더듬어 찾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 안에 그 임무를 완성하는데  필요한 것이 있는지 곰곰이 생각할 것이며, 기초를 쌓은 뒤에 원수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수고하는 다른 사람들을 방해하지 않도록 조심할 것입니다(눅 14:28-30).

   영혼 안에 있을 수 있는 달콤한 것을 주시하십시오. 그것은 잔인하고 교활한 마귀들이 조합해 놓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밤에는 기도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곤 남은 시간은 시편을 찬송하십시오. 낮에는 가능한 한 밤의 기도와 찬송을 준비하십시오.

   성경을 읽으면 정신에 빛과 평정이 임합니다. 말씀은 성령의 말씀이며 읽는 사람들을 인도해줍니다. 당신은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하므로, 행동하기 전에 성경을 읽으십시오(약 1:22 참조). 그 말씀을 실천하십시오. 그런 후에 더 이상 성경을 읽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책이 아리라 노동을 통해서 구원의 말씀의 조명을 받으려고 노력하십시오. 또 영적 능력을 얻기 전에는 다양한 층의 의미를 가진 책을 읽지 마십시오. 그런 책들은 의미가 모호하기 때문에 약한 사람들을 맹목적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포도주의 풍미를 알려면 단단한 잔을 마시는 것으로 충분하며, 헤시카스트가 식별력이 있는 사람에게 하는 한마디 말은 그의 내면의 상태와 활동 전체를 드러내줄 수 있습니다.

   자만심만큼 파괴력을 가진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눈은 항상 자만심을 경계해야합니다. 
   수실 밖에서는 입을 조심하십시오. 자칫하면 한순간에 많은 수고의 열매가 사라질 수 있습니다. 
   당신과 관계없는 것에 개입하지 마십시오. 호기심만큼 정적을 더럽히는 것은 없습니다.

   손님들이 찾아오면, 그들의 몸과 영에 필요한 것을 제공하십시오. 만일 그들이 우리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정적으로 우리의 지혜를 드러내십시오. 만일 그들이 우리와 같은 생활을 하는 형제들이라면, 적절히 그들과 대화의 문을 얼어야합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은  모든 사람을 우리보다 윗사람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나는 수련수사들이 공동철야기도 시간에 힘든 일에 참여하는 것을 금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밤새도록 외투 안에 모래를 담고 다니는 수도사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교리는 피조된 것이 아닌 거룩한 삼위일체에 대해 말합니다. 여기에 찬송 받으실 삼위일체의 세 위격들 중 한분의 섭리적 성육신에 대한 말과 다른 것이 있습니다. 삼위일체 안에서 복수인 것이 성육하신 그리스도 안에서는 단수입니다. 삼위일체 안에서는 단수인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복수입니다. 마찬가지로 정적의 길에 적절한 수행이 있고,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적절한 수행이 있습니다.

   거룩한 사도 바울은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라고 말했습니다(롬 11:34). 나는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헤시카스트가 된 사람의 마음을 누가 알았느냐?"라고 말하렵니다.

   왕의 권세는 부와 많은 신하들로 이루어집니다. 헤시카스트의 능력은 풍성한 기도로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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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8 단계    기도
                    거룩한 등정의 사다리("The Ladder of Divine Ascent"),
                    요한 클리마쿠스(John Climacus),  최대형 옮김. PP. 289~339.
                    제28단계  기도   PP, 316~327.


   본질적으로 기도는 인간과 하나님의 대화요 결합입니다. 그것은 세상을 결속시키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룹니다.

   기도는 눈물의 원천이요 결과입니다. 그것은 죄의 속죄요, 시험을 건너는 다리요, 고통을  막는 방벽입니다. 기도는 대립을 일소해 줍니다. 그것은 천사들의 일이요, 모든 영적 존재들의 양식입니다. 기도는 장래의 기쁨이요, 끝없는 활동이요, 덕의 원천이요, 은혜의 근원이요, 은밀한 발전이요, 영혼의 양식이요, 정신의 조명이요, 낙심을 잘라내는 도끼요, 증명된 희망이요, 제거된 슬픔입니다. 그것은 수도사의 재산이요, 독수도사의 보물이요, 소멸된 분노입니다. 그것은 발전의 거울이요, 성공의 증거요, 우리의 상태를 보여주는 증거요 계시된 미래요 영광의 상징입니다. 진정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의 기도는 법정이요, 주님의 재판정이며, 장래의 심판에 선행하는 것입니다.

   일어나서 거룩한 덕의 여왕이 큰소리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고(마 11:28-29), 상처에 바를 향유를 얻으리라, 나의 멍에는 쉽고 큰 죄를 낫게 할 치료약이라"라고 말하는 소리에 주목하십시오.

   우리 왕이신 하나님 앞에 서서 함께 이야기 하려면 준비 없이 서둘지 말아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적절한 옷을 입지 않고 무기도 없이 오는 것을 멀리서 보시고, 왕은 종들에게 우리를 잡아서 쫓아내고 우리의 청원서를 찢어 우리 앞에 던져버리라고 명령하실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 영혼은 더 이상 기억되지 않는 악들의 실로 짠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기도가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아주 단순하게 기도하십시오. 세리와 탕자는 간단한 기도말로써 하나님과 화해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기도하는 태도는 동일하지만, 기도의 종류는 여러 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친구와 스승을 대하듯이 하나님을 대하며 이야기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자기 자신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 하나님께 요청합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할 때 보다 큰 영적 보물과 영광, 보다 큰 확신을 구합니다. 어떤 사람은 원수에게서 완전히 해방되게 해달라고 애원합니다. 어떤 사람은 지위를 구하고, 어떤 사람은 모든 빛의 탕감을 구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에게 가해진 비난을 제거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할 때 우선 진심에서 우러나서 감사해야합니다. 그 다음에는 죄 고백과 영혼의 참된 통회가 이루어져야합니다. 그 다음에는 우주의 왕께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요구해야합니다. 이 기도방법은 천사가 어느 형제에게 말해준 것이며, 가장 좋은 기도입니다.

   만일 당신이 판사 앞에 출두한 경험이 있다면, 그것을 기도할 때 행동하는 방법의 본보기로 사용해도 좋을 것입니다. 혹시 법정에 서거나 반대심문을 당한 경험이 없다면, 환자들이 수술을 받기 전에 의사에게 하소연하는 방법에서 힌트를 얻으십시오.

   기도할 때 말을 지나치게 많이 하려고 노력하면, 적절한 단어를 찾으려다가 정신이 산만괘지기 쉽습니다. 세리의 한마디, 예수님의 십자가 오른편에 달린 강도의 한마디가 하나님을 회유했습니다. 수다스러운 기도는 정신을 산만하게 하고 미혹시킵니다. 반면에 간결한 기도는 정신집중을 강화해줍니다.

   기도할 때 어떤 단어가 우리의 내면에 즐거움이나 양심의 가책을 일으킨다면, 얼마동안 그 단어로 기도하십시오. 그 순간에 우리의 수호천사가 우리와 함께 기도할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순결하다고 해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주제넘게 행동해서는 안됩니다. 지극히 겸손하게 하나님께 나아가면, 한층 더 큰 담대함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혹시 덕의 사다리를 완전히 올라갔다고 해두 여전히 죄 사함을 얻기 위해 기도하십시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는 바울의 말에 주목하십시오.

   소금과 기름은 음식에 첨가하는 조미료이며, 순결과 눈물은 기도에 날개를 달아줍니다.

   만일 우리가 온유와 노염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옷을 입는다면, 사로잡혀 있는 정신을 어렵지 않게 해방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참된 기도를 획득하지 않는 한, 우리는 어린아이에게 걸음마를  가르치는 사람과 같을 것입니다.

   정신을 들어 올리거나 기도의 표현 안에 담으려고 노력하십시오. 만일 정신이 어린아이처럼 지쳐서 비틀거리면, 다시 일으켜 세우십시오. 정신은 본래 불안정하지만,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는 정신을 견고히 인내하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내하면서 이렇게 행하면, 피곤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정신의 바다에 경계를 정하신 분께서 기도하는 당신에게 오셔서 "네가 여기까지 오고 넘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욥 38:11). 성령은 구속을 받지 않지만, 그분이 발견되는 곳에서는 만물이 영을 지으신분께 복종합니다.

   만일 당신이 태양이신 하나님을 본적이 있다면, 적절한 방식으로 그분과 대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을 본 적이 없다면, 어떻게 그분에게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기도의 출발점은 처음부터 하나의 생각에 의해 분심거리들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중간단계는 기도하면서 하는 말이나 생각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단계는 주님 안에 있는 큰 기쁨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사는 사람에게 주는 기도의 기쁨과 정적을 하면서 기도하는 사람에게 주는 기도의 기쁨은 다릅니다. 종종 전자의 특징은 의기양양함이며, 후자에게서는 항상 겸손이 발견됩니다.

   만일 정신을 방황하지 않도록 조심해서 훈련한다면, 식사를 할 때도 정신은 우리 곁에 머물 것입니다. 그러나 정신이 거리낌 없이 돌아다니는 것을 허락한다면, 결코 정신을 우리 곁에 두지 못할 것입니다. 크고 고귀한 기도를 실천한 사람  바울은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편"을 택하겠다고 말합니다(고전 14:19). 그러나 어린아이 같이 미숙한 영혼들은 이런 종류의 기도에 익숙하지 않으며, 우리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기도할 때 양질(良質)의 말뿐만 아니라 많은 양의 말도 필요합니다. 후자는 전자를 위해 길을 마련합니다.

   기도의 손상, 기도의 사라짐, 기도의 약탈, 그리고 기도의 더러움 등에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우리의 정신에 빗나간 것들이 들끓는 상태로 하나님 앞에 설 때 기도가 손상됩니다. 우리가 무익한 염려에 빠질 때 기도가 사라집니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생각들이 빗나갈 때 기도가 강탈당합니다. 우리가 어떤 모양으로든 마귀의 공격을 받고 있을 때 우리들의 기도는 더렵혀집니다.

   만일 기도하는 시간에 홀로 있지 않으려면, 내면적으로 기도하는 사람의 태도를 형성해야합니다. 만일 칭찬의 종들이 우리와 동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공개적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취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연약한 사람들의 정신은 종종 육신에 순응하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통회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지만, 특히 죄 사함을 얻기 위해서 왕 앞에 나온 사람들에게 필요합니다. 우리는 아직 감옥에 있는동안, 베드로처럼 순종의 옷을 입고 자신의 소원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구하고 기도하면서 주님께 가까이 가라고 말한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합니다(행 12:8 참조). 그렇게 하면 우리 영혼의 키를 잡고 안전하게 안내해 주시는 하나님을 영접할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사랑과 쾌락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벗어나십시오. 염려를 버리곤 정신을 벗어버리고, 육신을 부인하십시오. 결국, 기도란 눈에 보이는 세상과 보이지 않는 세상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늘나라에서 무엇을 소유합니까?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당신외에  무엇을 갈망했습니까? 분심하지 않고 기도하면서 항상 당신에게 매달리는 것 외에 갈망하는 것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산을, 어떤 사람은 영광을, 어떤 사람은 부를 즐기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께 매달리며 하나님 안에 내 무정념의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시  73:25,28 참조).

   믿음은 기도에 날개를 달아줍니다. 날개가 없으면 누구도 하늘나라로 날아갈 수 없습니다. 정념에 휩쓸린 사람들은 쉬지 않고 주님께 기도해야합니다. 정념에 휩싸인 모든 사람들은 정념에서부터 무정념으로 나아갔습니다.

   비록 재판관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영혼이 죄에 의해서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타락에 의해서 하나님을 어지럽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영혼의 원수인 육신 그리고 영혼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영들에게 보복하는 것입니다(눅 18:1-7 참조).  

   선하신 우리의 구속자는 우리가 부탁하는 것을 신속하게 허락하심으로써 감사하는 사람들을 자신의 사랑에게로 끌어당기십니다. 그러나 감사하지 않는 영혼들은 오랫동안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며 자신이 일하는 것을 갈망하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왜냐하면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개는 먹을 것을 주면 주인을 버려두고 서둘러 달려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오래 기도한 후에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는 말을 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당신은 이미 무엇인가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매달리며 끊임없는 주님과의 연합 안에서 참고 견디는 것보다 더 고귀한 선이 무엇입니까?

   죄수가 판결을 두려워하는 것은 열성적인 사람이 기도시간을 갈망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빈틈없고 현명한 사람은 이것을 기억할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책망 ? 노염 · 불안 ? 염려 · 고통 ? 포만 · 유혹 · 분심 등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혼 안에서 쉬지 않고 기도함으로써 정해진 기도 시간을 준비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곧진보 할 것입니다. 탁월하게 순종하는 사람, 정신적으로 하나님을 계속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정신을 완전히 지배하며 서서 기도할 때 한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나는 보았습니다. 거룩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회중 안에서 시편 찬송을 하는 것이 우리를 방해하고 분심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독수도사에게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독수도사는 낙담의 공격을 받을 수 있고, 공동체 안에서 살 때는 열심 있는 형제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전쟁은 왕에 대한 군인의 사랑을 드러내줍니다. 기도의 실천과, 기도하는 시간은 하나님을 향한 수도사의 사랑을 나타내줍니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는 우리가 서 있는 위치를 보여줍니다. 신학자들은 기도가 수도사의 거울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하던 일을 기도시간에도 계속하는 사람은 마귀들의 조롱거리가 됩니다. 왜냐하면, 이 도둑들의 목표는 우리의 기도시간을 차츰차츰 도둑질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에게 기도의 은사가 부족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달라는 부탁을 거절하지 마십시오. 종종 기도를 부탁하는 사람의 믿음이 부탁받은 사람을 구인하는 회개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드린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고 해서 자만하지 마십시오. 기도가 응답을 받는 데 효과적으로 작용한 것은 상대방의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교사들은 아동들이 학습한 것을 살피기 위해서 매일 시험을 치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받는 능력을 생각하려면, 우리가 드리는 모든 기도에 대한 평가가 있어야합니다. 맑은 정신으로 기도한 후에는 곧 우리의 원수들이 목표로 하는 나쁜 성질의 발작에 대처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고결한 행위 중 특히 기도는 매우 분별 있게 드려야합니다. 노염을 극복한 영혼은 분별 있게 기도합니다.

   끈질기게 오래 기도하여 얻은 것은 헛되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주님을 발견한 사람은 기도할 때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친히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그를위해 기도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롬 8:26 참조).

   기도하는 동안에 감각적인 환상이 떠오르면, 분명히 분심될 것입니다.

   구하는 것을 얻을 것이라는 확신은 기도하는 동안에 나타날 것입니다. 확신이란 의심의 부재이며, 불확실한 것들의 증명입니다.

   기도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자비로워야합니다. 자비를 베푼 자는 그보다 백배나 큰 보상을 받을 것이며, 내세에서 다른 모든 것을 밭을 것입니다.

   마음에 들어와 거하는 불은 기도를 소생시킵니다. 기도가 소생하여 하늘로 올가가면, 불의 후손이 영혼의 다락방을 차지합니다.

   어떤 사람은 죽음을 기억하는 것보다 기도가 낫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나는 한 위격 안에 있는 두 본성을 찬양합니다.

   좋은 말은 사람을 태우면 힘을 내어 속도를 내어 달립니다. 시편 찬송은 속도요, 단호한 정신은 말입니다. 그것은 멀리서 전쟁을 감지하고 대비하며 현장을 주도합니다.

   목마른 사람이 마시는 물을 빼앗는 것은 매우 좋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가책을 느끼며 기도하는 영혼이 갈망해온 기도를 마치기도 전에 그에게서 기도를 빼앗는 것은 한층 더 좋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불과 물이 소진되지 않는 한 기도를 멈추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자칫하면 평생 동안 죄 사함을 요청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맛을 아는 사람이라도 부주의한 한마디 말로 정신을 더럽힐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그는 기도할 때 전처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정규적으로 마음을 감시하는 것과 정신에 의해서 마음을 지키는 것은 각기 다른 일입니다. 왜냐하면 정신은 그리스도께 영적 제물을 드리는 대제사장이요 통치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의 거룩한 불은 아직 정화되지 않아 감시받는 마음을 붙잡아 태웁니다. 이것은 신학자라는 호칭을 부여받은 사람의 말입니다. 그러나 정신에 의해 지켜지는 마음은 그것이
이룬 완전함에 비례하여 조명됩니다. 그것은 소멸시키는 불이라고 불리는 것(히 12:29), 비취는 빛(요 1:9)과 동일한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어떤 사람은 기도를 마친 후에 마치 뜨거운 용광로에서 나오는 것처럼 모든 물질적 더러움이 제거된 것처럼 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빛이 가득하고 겸손과 기쁨의 옷을 입은 사람처럼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들 중 어느 것도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기도한 깃이 아니라 육적으로 기도한 사람들입니다.

   한사람이 다른 사람과 접촉하면 그의 행동이 변화됩니다. 그러므로 무죄한 손으로 하나님의 몸을 만진 사람에게 변화가 없을 수 없습니다.

   지극히 선하신 왕께서는 때때로 일부세상의 군주처럼 친히 군사들에게 어떤 때는 친구나 종을 통해서, 어떤 때는 은밀한 방법으로 선물을 나누어주시지만, 그것은 각 사람이 입은 겸손의 옷에 비례할 것입니다.

   세상의 임금 앞에 서 있는 사람이 고개를 돌려 왕의 원수들에게 말을 건다면, 왕은 불쾌하게 여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기도하는 사람이 더러운 생각을 향한다면 주님은 불쾌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개가 끈질기게 다가온다면  막대기로 때려 쫓아내며 결코 그것에게 굴복하지 말아야합니다.

   눈물로 구하고 순종함으로 찾고 인내하면서 문을 두드리십시오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입니다"(마 7:8).

   기도할 때 이성(異性)을 위해서 지나치게 많은 것을  구하지 마십시오. 원수가 무방비 상태에 있는 우리를 공격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육욕적인 행동을 상세히 고백하겠다고 고집하지 마십시오. 자칫하면 당신 자신을 배반할 수 있습니다.

   기도시간에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나 영적 임무에 관해 생각하다보면, 더 좋은 것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눅 10:42 참조).  

   기도의 지팡이를 잡은 사람은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는 경건하게 하나님을 조르는 것이므로(눅 18:5), 혹시 넘어져도 치명적인 상처는 입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동안에 마귀들이 우리를 공격하는 방법을 근거로  기도의 가치를 추측할 수 있고, 원수에 대한 승리로부터 기도의 열매를 추론할 수 있습니다. "나의 원수가  승리치 못하므로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시 1:11).  시편 기자는 "여호와여 내가 전심으로 부르짖었사오니"(시 119:145)라고 소리칩니다. 그는 몸과 혼과 영혼을 언급하고 있으며, 혼과 몸이 모인 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마 18:20 참조).

   우리는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모두 통일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빠르게 시편을 찬송함으로써 유익을 얻고, 어떤 사람은 느리게 시편을 찬송함으로써 유익을 얻습니다. 전자는 분심을 대적하여 싸우며, 후자는 무지를 대적합니다.

   만일 당신이 원수들과 관련하여 항상 왕 되신 하나님과 대화한다면, 원수들이 공격할 때다 용기를 내십시오. 원수들이 저절로 항복하기 때문에, 당신은 오래 싸울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 불경한 것들은 당신이 기도를 통해서 그것들과 싸워 이긴 결과로서 면류관을 얻게 될까 두려워할 것입니다. 또 기도의 채찍을 맞으면  마치 불을 피하듯이 도망칠 것입니다.

   항상 담대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누군가가 보는 방법을 말해준다고 해서 보는 방법을 배울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선천적으로 시력이 있어야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가르침을 통해서 기도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지식으로 사람을 교훈하시는"(시 94:10) 하나님이 기도를 가르치는 특별한 교사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기도를 주시며, 의인의 삶을 축복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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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9 단계  무정념
                                     거룩한 등정의 사다리("The Ladder of Divine Ascent"),
                                     요한 클리마쿠스(John Climacus),  최대형 옮김. PP. 289~339.
                                     제29단계  무정념   PP, 328~332.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지의 깊은 구덩이, 몸의 어두운 정념들 사망의 그늘에 빠져 있으면서도 여전히 천국이라는 주제에 관해 장황하게 다루어왔습니다.

   별들이 하늘을 장식하며 덕은 두정념을 아름답게 만들어줍니다. 무정념이란 마음 안에 있는 정신의 천국을 의미하며, 마귀들의 술책을 멸시받을 농담거리로 간주합니다. 육체에서 부패함을 완전히 씻어버린 사람, 정신을 모든 피조물 너머로 들어 올리고 모든 감각의 주인으로 만든 사람, 영혼을 끊임없이 주님 앞에 거하게 하며, 힘껏 주님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은 진실로 무정념의 사람입니다. 무정념이 몸의 부활에 선행하는 영혼의 부활이라고 주장하려는 사람들이 있고, 또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지식으로서 그것을 능가하는 것은 천사들의 지식뿐이라고 주장하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정념은 완전한자들의 완성되지 않은  완전입니다. 이것은 내가 무정녕을 맛본 사람에게서 들은 말입니다. 그것은 정신을 거룩하게 하고 물질적인 것들을 떠나게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거룩한 항구에 들어온 사람은 지상에서 사는 동안 대체로 천국에 있는 사람처럼 큰 기쁨을 느끼며, 하나님을 관상하게 됩니다. 이것을 경험한 사람은 "열방의 방백들이 모임이여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다"(시 47:9)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두 손을 들고 오랫동안 기도한 이집트 사람(Abba Tithoes)도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무정념한 사람이 있고, 무정념한 사람들보다 더 무정념한 사람이 있습니다. 전자는 악을 미워할 것이며, 후자는 다함이 없는 덕을 축복을 소유할 것입니다. 또 순결을 무정념이라고 말하기도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반부활 및 썩어질 것의 썩지 않음을 미리 맛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무정념한 사람은 자신이 주님의 마음을 가졌다고 말했습니다(고전2:16). 자신이 이제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한 이집트사람(St. Antony the Great)도 무정념한 사람입니다. 또 자기의 정념들이 돌아올 수도 있다고 기도한 사람(St. Joh Kolovos)도 무정념한 사람입니다. 시리아의 에프렘만큼 다가오는 영광에 앞서 많은 무정념을 받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가장 영광스러운 선지자인 다윗은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라고 말하지만(시 39:13), 시리아의 에프렘은 "당신의 은혜의 물결로부터 나를 구해 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정념에 사로잡힌 영혼이 쾌락에 빠지듯이, 무정념한 영혼은 덕에 빠집니다.

   만일 배가 고프지 않아도 음식을 먹는 것이 탐식의 절정이라면, 배고픈 사람이 정당한 본성의 충동까지도 억제하는 것은 절제의 절정입니다. 만일 동물들과 무생물에 대해서까지 사납게 날뛰는 것이 색욕의 절정이라면, 모든 사람을 생물처럼 대하는 것은 순결의 절정입니다. 만족을 모르고 모아들이는 것이 탐욕의 궁극적인 단계라면, 자신의 몸까지도 기꺼이 나누어주려 하는 것은 가난의 궁극적 단계입니다. 완전한 평화안에 살면서도 인내하지 않는 것은 낙담의 최종단계라면, 고통의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안식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인내의 마지막지점입니다. 독거하면서도 격렬하는 것을 진노의 바다라고 말한다면, 비방하는 사람이 앞에 있거나 없거나 항상 평정을 잃지 않는 것은 오래 참음의 바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칭찬하는 사람이 없을 때도 잘난체하는 것이 허영의 절정이라면, 어떤 사람이 면전에서 우리를 칭찬할 때도 생각을 제어하는 것은 허영이 없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초라한옷을 입고서도 오만한 것, 즉 교만이 멸망의 상징이라면, 고결한 행위와 큰 성공을 거두고서도 겸손히 생각하는 것은 구원하는 겸손의 상징입니다. 마귀들이 우리 안에 뿌려 놓은 것에 신속하게 복종한다는 것은 정념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다는 증거입니다. 한편 거룩한 무정념의 표식은 "사특한 마음이 네게서 떠날 것이니 악한 일을 내가 알지 아니하리로다"(시  101:4). "나는 악한 자가 오는 이유와 시간을 알지 못하며, 또 어떻게 떠나가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나는 완전히 하나님과 연합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연합할 것이므로, 그러한 일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이러한 사람이 될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은 항상 내면에 하나님이 계셔서 그의 말과 행동과 생각을 인도해주십니다. 내적 조명을 통해서 주님의 뜻이 그의 내면의 음성이 됩니다. 인간의 가르침은 모두다 그보다 못하게 여겨집니다. 그는 "내가 어느때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시 41:2)라고 말합니다. "나는 더 이상 사랑의 힘을 참고 견딜 수 없습니다. 내 육신이 태어나기 전에 당신이 주셨던 영원한 아름다움을 갈망합니다."

   이제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정념한 사람은 이제 그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사는 것입니다"(갈 2:20). 이것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킨 사람의 발입니다(딤후 4:1 참조).

   왕관은 한 종류의 보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만일 우리가 가장 평범한 덕들 중 하나라도 소홀히 한다면, 무정념은 불완전한 것이될 것입니다.

   무정념을 하늘나라 궁전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도시에 많은 집들이 있듯이 그곳에 많은 집들이 있다고 생각하십시오(요 14:2 참조). 죄 사합이 이 예루살렘을 방어해주는 담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우리는 이 궁전의 신방으로 달려 들어가야 합니다. 만일 과거에 보낸 세월이나 습관이 우리를 방해 한다면, 그것은 큰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적어도 신방가까이에 있는 집들 중 하나를 거처로 삼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약하거나 비틀거린다면 적어도 담 안에는 머물러야합니다. 종말이 되기 전에 그것에 도착하지 못한 사람 즉, 담을 넘지 못한 사람은 사막에서 야영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도하는 사람이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 넘나이다"(시 18:29). 라고 말한 이유이며 이사야가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다"(사39:2)고 말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이 막힌 담(엡 2:14 참조), 즉 우리가 불순종하여 세워 우리에게 해가된 담을 헐어야합니다. 지옥에는 우리를 용서할 수 있는 분이 없으므로, 그곳에서 우리 죄의 용서를  구해야합니다. 경건한 사람들의 목록에 우리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이 일에 헌신해야합니다. "타락", "시간이 없다", "짐" 등에 대한 말을 하지 말아야합니다. 세례 때 주님을 받아들인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요 1:12).  그분은"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시 46:10), 그리고 무정념 됨을 알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부터 영원히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복된 무정념은 가난한 정신을 땅에서 하늘로 끌어올려주고 정념의 거름더미에 앉아있는 거지를 들어 올려줍니다. 또 사랑은 그를 왕자들 즉 거룩한 천사들과 하나님의 백성의 방백들과 함께 앉힙니다(시 11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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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0 단계   믿음과 소망과 사랑
                                   거룩한 등정의 사다리("The Ladder of Divine Ascent"),
                                   요한 클리마쿠스(John Climacus),  최대형 옮김. PP. 289~339.
                                   제30단계 믿음, 소망, 사랑   PP, 333~315.


   이제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결합하고 확고하게 해주는 연합인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대해서 말할 단계입니다. 사랑은 하나님 자신의 이름이기 때문에(요일 4:8 참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입니다"(고전 13:13). 내가 보기에, 그것들은 하나는 광선이요, 하나는 빛이요, 하나는 원반 모양의 것처럼 보이며, 세 가지 모두가 하나의 광채를 이루는 것처럼 보입니다. 믿음은 만물을 만들고 창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소망을 둘러싸며 혼란으로부터 보호해주십니다. 사랑은 결코 떨어지지 않고 중도에 정지하지 않으며, 그 복된 기쁨에  의해서 상처받은 사람에게 휴식을 주지 않습니다.

   사랑에 대해서 말하려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며, 경솔한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한층 더 위험합니다. 천사들은 사랑에 대해서 말하는 방법을 알지만, 자기들의 내면에 있는 빛에 비례하여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일 4:6). 그러나 이것을 정의하려는 것은 바다의 모래알을 세려는 것처럼 무모한 일입니다.

   본질상 사랑은 인간적으로 가능한 한도까지 하나님을 닳는 것입니다. 그 활동에 있어서, 사랑은 영혼의 취한상태입니다. 그것의 특징은 믿음의 샘, 인내의 심연, 겸손의 바다입니다.

   사랑은 악을 생각하지 않으므로, 모든 종류의 반대되는 것들을 배척합니다.

   사랑과 무정님과 양자결연은 명칭상으로만 구분됩니다. 빛과 불과 불길은 결합하여 하나의 행동을 만듭니다. 사랑과 무정념과 양자결연도 그렇습니다.

   사랑이 떠나면 두려움이 나타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사랑이 가득 찬 사람이거나, 영이 죽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갈망 · 두려움 · 관심 · 열심 · 봉사 · 사랑 등을 인간직으로 유추하는 것은 전혀 잘못이 아닙니다. 서로를 사랑하는 연인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동경하는 사람은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피소되어 재판관 앞에 선 사람만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충실한 종이 그 주인에게 열심을 나타내듯이, 하나님께 열심을 나타내는 사람은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질투하는 남편이 아내를 감시하듯이, 덕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왕 앞에 선 신하처럼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하듯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끝없이 노력하는 사참은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젖을 먹는 아기가 어머니에게 매달리는 것은 사랑의 아들이 항상 주님께 매달리는 것에 비교할 수 없습니다.

   진실로 사랑에 빠진 사람은 정신의 눈 앞에 연인의 얼굴을 두고 부드럽게 포옹합니다. 심지어 잠자는 동안에도 그는 연인에게 속삭이며, 연인을 향한 갈망은 가라앉지 않고 계속됩니다. 이러한 현상은 육체에도 나타나고, 영혼에도 나타납니다. 사랑의 상처를 입은 사람은 자신에 대해서 "내가(본성의 명령 때문에) 잘지라도 마음은(내 사랑의 풍성함 때문에) 깨었다"(아 5:2)라고 말해야합니다. 사슴, 즉 영혼은 뱀들을 죽이며, 화살에 맞은 것처럼 사랑의 불이 타오르면 하나님의 사랑을 갈망하여 기절합니다.

   배고픔의 영향력은 항상 분명한 것은 아니지만, 갈증은 분명하고 뚜렷한 결과를 나타냅니다. 갈증은 모든 사람에게 열이 있음을 드러내줍니다. 이런 까닭에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은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한다"(시 42:2)고 말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면 우리는 완전히 변화되어, 걱정을 하지 않고 즐거워하고 기뻐합니다. 그렇다면, 깨끗한 영혼 안에 눈에 보이지 않게 거하러 오시는 주님의 얼굴을 볼 때 우리가 느끼는 기쁨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영혼의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두려움은 더러움을 없앱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는 "내 육체가 주를 두려워함으로 떨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시 119:120).

   거룩한 사랑은 무엇인가에 열중하게 하는 방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아 4:9)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또 그것은 사람들을 밝게하고 기뻐 날뛰게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리므로 네 마음이 크게 기뻐하면"(시 28:7)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마음이 즐거우면 얼굴이 기쁨으로 빛나며(창 16:13 참조), 하나님 사랑으로 넘쳐흐르는 사람은 영혼의 광채, 즉 모세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을 때 지녔던 깃과 같은 영광이 몸에 드러납니다.

   이와 같이 거룩한 상태를 획득한사람은 종종 음식을 먹는 것도 망각합니다. 이는 반대되는 갈망이 먹으려는 욕구를 몰아냈기 때문이며, 또 이와 같은 사람들의 몸은 정념의 불을꺼버리는 순결의 불에 의해 성화되고 썩지 않게 되었으므로 병에 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 앞에 차려놓은 음식을 아무런 즐거움이 없이 받는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지하수가 식물의 뿌리에 물을 공급해주듯이, 천국의 불이 그들의 영혼을 부양해주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의 증가는 사랑의 출발점이요, 완전한 순결은 신학의 기초입니다.

   우리의 감각이 완전히 하나님과 연합되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신비하게도 분명해집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연합이 없으면,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공동본질의(또는 내주하시는) 말씀은 순결을 완성하며, 그분의 임재는 사망을 파괴합니다. 사망이 제거되면, 신성한 지식의 제자들이 조명을 받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주님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영원히 순결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추측으로만 이야기합니다.

   순결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제자로 삼으며, 제자는 계속해서 삼위일체의 지식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먼저 형제를 사랑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후자가 전자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비방하는 사람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불을 피하듯이 그를 피할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이웃에게 화를 내는 사람은  실제로 달리지 않으면서 달린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소망은 사랑의 배후에 있는 능력입니다. 소망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의 상을 고대하게 만듭니다. 소망은 감추어진 풍성한 보물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 준비되어 있는 부(富)의 보증입니다. 그것은 노동으로부터의 휴식, 사랑의 입구입니다. 그것은 낙심을 제거하며, 아직 현존하지 않는 것의 이미지입니다. 소망이 부족한 곳에는 사랑도 부족합니다. 싸움은 소망의 속박을 받으며, 수고는 소망을 의지하며, 자비는 소망을 에워쌉니다. 소망을 가진 수도사는 낙담을 죽입니다. 소망은 주님의 선물을 받은 경험에서 옵니다. 그러한 경험이 없는 사람은 항상 의심할 것입니다. 소망은 노염에 의해 파괴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망은 낙심하지 않으며, 성난 사람은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사랑은 예언과 기적을 부여해 줍니다. 그것은 깊은 조명이요, 샘솟아 올라 목마른 영혼을 태우는 불의 샘입니다. 그것은 천사들의 상태요, 영원의 진보입니다.

   모든 덕 중에 가장 아름다운 덕이여, 당신이 어디서 양들을 먹이는지, 어디서 한낮에 휴식을 취하는지 말해 주십시오(아 1:7 참조). 우리를 비추어 주고, 우리의 갈증을 해소시켜 주며, 우리를 인도하며 길을 보여 주십시오. 우리는 당신에게로 날아오르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당신은모든 것을 다스립니다. 당신은 내 영혼을 도취시켰습니다. 나는 당신의 불길을  억제할 수 없기 때문에 당신을 찬양하며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주께서 바다의 흉용함을  다스리시며 그 파도가 일어날 때 평정케 하시나이다. 주께서 교만한 생각들을 부상당한 사람처럼 겸손하게 하시고 주의 원수를 주의 능력의 팔로 흩으셨고"(시 89:9-10 참조), 주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대적할 자가 없게 하셨습니다.

   나는 당신이 사다리 위에 당신이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을 야곱이 어떻게 보았는지 알고싶습니다(창 28:12 참조). 어떻게 사다리 위에 올라갔는지 말해 주십시오. 연인은 자기 마음의 사다리에 고정시킨 계단들을 어떤 방식으로 어떤 법에 의해 결합했습니까? 나는 그 계단들의 수효와 그것들을 올라가는데 필요한 시간을 알고 싶습니다. 당신의 노력과 이상을 발견하신 분은 우리에게 안내자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 이상은 말하려 하지 않았고,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 여왕(사랑)은 마치 천국에서 오는 듯이 내 영혼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사랑아, 네가 육체의 천박함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너는 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지 못할것이다. 그러니, 이 사다리에게서 덕들의 영적 연합에 대해 배우거라. 나는 사다리의 꼭대기에 있다. 어느 위대한 사람, 나를 잘아는 사람은 "믿을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라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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