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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예화 85편 모음
1.영혼의 고통과 몸부림
어두운 곳에 있다가 밝은 곳으로 나오면 눈이 부셔서 똑바로 뜰 수 없습니다. 어두운 곳에 오랫동안 있었다면 수건으로 눈을 감싸고 나온 다음에 조금씩 빛에 반응하면서 수선을 벗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실명하거나 눈을 다치게 됩니다.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들어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이후에 산에서 내려오는데 그 얼굴에 광채가 나서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그냥 빛이 아니라 누구든지 그 빛을 보면 즉사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강한 빛입니다. 그 빛의 옆에 있기만 해도 빛의 영향을 받아서 다른 사람들이 눈뜨고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해집니다. 그래서 옛날 성인들의 그림을 보면 얼굴 주위에 둥그렇게 빛나는 후광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보기 위해서는 서서히 그 빛에 적응하는 기간이 필요해요. 그 기간은 영혼이 고통을 느끼며 내면이 깨지는 아픔을 맛보아야 하는 기간입니다. 왜냐하면 밝은 빛에 드러나는 나의 모습을 보면 그 추하고 더러움이 얼마나 심한지 고통스럽게 몸부림치지 않을 수 없거든요. 그런 과정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빛이신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됩니다. ⓒ최용우
2.고통받는 이웃들을 향한 태도
인생의 여정은 고통의 여정입니다. 고통에서 예외인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인생을 살아가며 대체로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을 해석함에는 관대하지만 이웃들의 고통을 해석함에는 너그럽지 못합니다. 나는 억울하게 이런 고통을 당하지만 내 이웃들은 그런 고통을 당함이 당연하다고 간주하는 것입니다.
잠언 기자는 가난한 자를 멸시함은 그를 지으신 창조자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어떤 예술가의 작품을 멸시함은 그 작가 자신을 멸시함인 것입니다. 성경은 창조자는 모든 인생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지으셨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바로 그분의 걸작품들인 것입니다. 가난한 이웃도 동일하게 주님의 작품인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도상에서 전혀 준비되지 못 한 채로 재앙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재앙의 결과도 실로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은 가난하게 되고, 어떤 사람은 장애인이 되기도 하도, 또 어떤 사람은 관계의 상실로 평생을 고독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재앙의 결과로 나머지 여생을 어떻게 살아가든 그들 모두는 하나님의 작품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재앙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웃들을 대하는 성도의 마땅한 태도는 무엇이어야 할까요? 종종 우리 중에는 이런 이웃들을 진지한 긍휼로 대하기 보다 더 오히려 이들의 재앙을 기뻐하는 잔인함을 보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잠언은 이런 사람들이 형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고통 받는 이웃들을 향한 합당한 태도는 긍휼 뿐입니다. /이동원 목사
3.고통 받는 남편들
아이들 앞에서 자기를 무시하는 아내 때문에 점점 무기력해지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남편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남편들은 “남자는 등뼈 대신 가슴뼈를 지니고 있다.”는 말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내를 이끌어갈 수 있는 등뼈에서 나오는 강한 힘은 지니고 있지 못하면서 그저 마음속으로만 아내가 자신의 권위에 복종하고 존경해주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특성을 혹시 자신도 지니고 있지나 않은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이런 남편은 먼저 남편으로서의 책임을 감당할 수 있도록 분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 남편은 가정의 지도자로써 아내와 아이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면서 삶의 모범을 보이도록 애써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쉽지 않음을 깨닫게 될 때 남편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고 하나님이 주시는 변화를 갈구해야겠지요.
이 같은 남편의 헌신과 삶의 변화 앞에서 아내들도 남편의 외형적인 등뼈의 능력 보다는 따뜻한 가슴뼈의 역할에 감동되어 남편에게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남편이 가슴뼈로 상징되는 사랑의 삶으로 변화될 때 그 가정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넘쳐 날 것입니다. 오늘도 고통 받는 남편들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같은 하나님의 원리를 당신 삶 속에 적용하면서 그 고통의 늪으로부터 빠져 나오시기를 소망합니다. 강안삼 장로
4.고통 어루만지기
이해는 깊이 바라보는 과정에서 생긴다.
내가 고통을 받는 유일한 사람이 아니다.
우리의 형제자매들도 고통을 받는다. 그들의 고통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그들을 비난하지 않게 되고 우리의 고통은 멎게 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어루만질 수 있다면
이해는 거기에서 생겨난다. - 브라이언 피어스의《동행》중에서 -
* 우리가 겪는 많은 문제는
서로의 고통을 어루만지지 못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자신의 고통은 크고 중하게 여기면서 다른 사람의 고통은
작고 가볍게 여길 때, 서로의 고통 어루만지기는 불가능합니다.
자기 생각을 잠시 내려놓고 '우리 형제자매들'의 마음을
깊이 바라볼 때 진정한 이해도 생겨나고
소통도 가능해집니다. /고도원의 아침편지
5.고통의 가치
1973년, 호주 출신 작가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패트릭 화이트’는 특별한 삶을 살았습니다. 일찌감치 영국으로 건너가 열심히 작품을 썼지만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는 못했습니다. 낙심한 그는 호주로 돌아와 나무꾼이 되었습니다. 깊은 산속에서 생활하며 『행복의 계곡』과 『인간의 나무』 등 많은 소설을 썼습니다. 마침내 사람들의 찬사가 쏟아졌습니다.
깊은 계곡에서 나무를 베며 살아가는 삶은 고되지만, 그는 그곳을 ‘행복한 계곡’이라 불렀습니다. 작품을 통해 그는 “인간은 자신이 겪은 고통의 분량만큼 진보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인간의 나무』라는 작품에서는 “인간은 진정으로 겸손해질 때 하나님과 가장 가깝게 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고통은 눈에 보이는 것 그 이상입니다. 지금 겪고 있는 그 고통으로 인해 한 걸음 더 나아가십시오.
주님! 고통의 참 가치를 알고 도리어 기대하는 마음을 주소서.
현재의 삶 속에서 겪는 고통이 도리어 축복의 통로가 될 것을 기대합시다.<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6.교통사고로 두 다리를 잃은 여인
14년 전에 사고로 두 다리를 잃은 여인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고통과 근심은 불행하긴 하지만 좋은 성격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나는 경험했습니다. 물론 고통, 그 자체는 반가운 것이 못 됩니다. 그러나 외부에서 찾을 수 없는 행복을 내심에서 찾게 해 주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행복만을 잡으려고 허둥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행복은 근본적으로 내적인 상태, 내적인 성공을 말합니다. 나는 천국이 우리의 내심에 있다고 하고 싶습니다."
고통은 자신을 이해하게 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자신을 이해하는 정도에 따라서 우리는 이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행복은 사물을 추구하거나 소유하는 데서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행복은 나의 고통에서 그리고 이웃의 고통에 참여하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복음 17장 20~21)
7.고통은 새로운 기회이다
미국 오하이오 주에서 태어난 비버리 스미스는 특수한 병을 가진 소녀이다.
머리를 다쳐 피가 흘러도, 뜨거운 물에 손이 데어서 화상을 입어도 울지를 않는다. 잘 참아서가 아니라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병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의사들은 중추신경에 이상이 있는 것으로 추측하고 있는데, 아직 치료방법은 없다고 한다.
이 소녀는 아픔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울지 않을 뿐 아니라 위험한 것을 자각하지도 못한다. 이런 것을 보면 사람이 아픔을 느낀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혜택인지 모른다. 사람에게 아픔의 자각은 꼭 필요하다.
데이비드 브린클리라는 사람은 "신은 가끔 빵 대신 벽돌을 던져주시는데, 어떤 사람은 원망하면서 그 벽돌을 차다가 발가락 하나가 더 부러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 벽돌을 주춧돌로 삼아 기막힌 집을 짓기도 한다"는 명언을 했다.
태평양전쟁 때 일본인 귀족 세 가족이 가장 안전한 곳을 연구한 결과 오키나와 섬으로 결정짓고 그리로 피신을 했다. 그러나 그곳이 가장 위험한 격전지가 되고 말았다.
어둠이나 아픔이나 고통을 피해 다니기만 하려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은 대부분 도리어 그것에 삼킴을 당하고 만다. 서양 속담에 "고난은 맞서서 이기고 죄는 피해서 이기라"는 말이 있다.
8.큰 능력인 고통
금세기초 세계의 존경과 사랑을 받던 지휘자가 있습니다. 토스카니니하면 누구나 잘알고 있는 명성있던 지휘자입니다.
그는 원래 첼로 연주자로서 심한 근시로 인해 연주 중에는 악보를 제대로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연주 때마다 연주할 악보를 모두 외워서 연주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연주회를 앞두고 그 악단의 지휘자가 갑자기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단원들 중에 누군가에게 지휘를 대신 부탁해야 할 입장이었습니다.
그때 악보를 모두 외우고 있던 토스카니니가 선발되어서 임시 지휘를 했던 것이 인연이 되어 세계적 대 지휘자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만약 토스카니니가 그토록 시력이 나쁘지 않았다면 유럽의 한 첼로 연주자에 불과했었을 것입니다.
시력이 나빠서 악보를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악보를 모두 외울 수가 있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세계적인 지휘자로 등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고통을 당한다는 것은 괴롭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고통은 더 큰 능력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토스카니니는 이런 말을 남기고 있습니다. “어려울 때 힘되신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좋은 환경이 아니라고 해서 불평하지 말자, 좋은 환경만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 아담은 에덴동산과 같은 좋은 환경에서도 타락하지 아니했는가. 눈물에 대해서도 감사를 드리자, 눈물 있는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볼 때 더 똑똑히 바라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려울 때일수록 우리에게 가까이 오셔서 우리를 보호해주시고 힘이 되어주신다.”
9.무감각의 고통
일본의 작가 중 엔도 슈우사꾸라는 사람이 (바다와 독약)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2차 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일본의 후방 가지 병원에 있던 젊은 군의관 로다는 일본 군부의 명령을 받아 미군 포로를 잡아다가 마취시켜서 생체 실험하는 데 참가했습니다. 처음에는 미군 포로를 잡아서 진단하는 헐하다가 그 포로들에게 병이 들었으니까 수술을 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미군 포로가 처음에는 의심하고 거부해 보려고 했77만 적의 의사이든 아군 의사이든 혹은 전쟁 중이든 평화시이든 의사만은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의사에 대한 절대 신뢰로 수술을 승락했습니다. 일본 의사는 미국 포로의 몸을 해부해서 왼쪽 폐 전체를 잘라 내고 오른쪽 폐의 상엽을 절단했습니다. 폐를 얼마만큼 남겨 놓았을 때 사람은 얼마 동안 살 수 있는가를 시험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다리를 잘랐을 경우에는 얼마 동안 살 수 있는가에 대한 생체 실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73은 로다라는 의사는 그 순간에 자기의 귓가에 반복해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죽였다. 죽였다. '라는 소리가 들려왔고, 또 '나는 책임이 없다. 내가 한 것이 아니다. 누구도 안 할 수 없다. 나와는 상관없다. 나는 책임이 없다. '라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이후로 의사는 거의 자아를 상실하고 망령처럼 삽니다. 자기가 잘라 낸 미군 포로의 폐를 보며 그 젊은 의사는 무엇을 생각했겠습니까? 그는 미쳐 버렸습니다. 그가 무서워하는 것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살아 있던 사람의 폐를 보고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죽인 인간의 일부분을 보고도 무감각하고 괴로와하지 않는 무시무시한 자기의 마음을 보고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지금 코가 원하는 것은 가책이었습니다. 가슴의 고통이었습니다. 마음을 찢는 회한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생기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설혹 세상의 재판관이 비록 그 상황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정상을 참작해 줄지라도 이대로는 끝날 수가 없는 것이다. '라는 말을 남겨 놓고 그 작품은 끝납니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엡4:19.20)
10.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미시간 주 서부에 사는 15세 소년이 암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화학 요법은 일시적으로 효과가 있었지만 구역질이 심하게 나고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다. 소년은 병이 가장 불확실하고 고통스러울 때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머리카락이 빠진 채 학교에 가야 했다. 그런데 학교에 간 소년은 놀라운 일을 발견했다. 소년의 많은 친구들의 머리에도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친구들은 모두 머리를 면도하고 왔다. 그들은 친구의 고통을 줄여주고 친구가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한 끝에, 친구와 똑같이 머리를 자르는 방법을 생각해낸 것이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다른 사람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인 감정 이입은 공동체 내의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복된 표식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몸의 지체들이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손을 내밀어 서로를 돕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서로에게 제공하는 보살핌의 명칭은 사랑이며, 사랑은 결코 자신의 방법만을 고집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들 각 사람이 하나님께 온전히 이해되는 것처럼, 남녀간의 사랑도 계속해서 상대방을 온전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11.이해할 수 없는 고통
핸들리 모울이 더햄 지방의 주교로 있을 때 광산 사고 사망자 170명의 가족들을 방문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는 어떻게 그들을 위로할까 고민하고 있다가 어머니가 준 작은 책갈피를 집어들었다. 그것은 뜨 개질된 천조각이었는데 그 뒷면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글자만 새겨져 있었다. 세상은 뜨개질로 만든 책갈 피마냥 이리저리 얽혀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뒤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선한 목적을 이룰 수 있도록 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를 통해 고통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으로도 여전히 이해하기 힘든 고통들이 있다. 메이드스톤의 주교인 가빈 레이드는 한살 때 낙상으로 척추를 다쳐 병원 출입을 했던 자기 교회 소년에 대하여 말했다. 그 소년은 “하나님은 공평하시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가빈 은 이렇게 물었다. “몇 살이니?” “열일곱 살이에요.” “병원 에는 얼마 동안 다녔니?” “십삼 년 동안이요.” 가빈은 다시 물었다. “그래도 하나님은 공평하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니?” 소년은 이렇게 대답했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많은 보상을 해주실 영원한 것들을 준비하고 계시거든요.” 하나님은 실로 영원한 것으로 보상해주신다.
12.위대한 고통
위대한 일을 성취하는 사람은
위대한 고통을 느끼는 사람이다.
고통의 해결은 고통의 감지에서 시작되고,
위대한 고통은 그것을 해결함으로써 인간의 자부심을
드높일 수 있는 위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위대한 고통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은
축복을 받았다고...
위대한 고통이라 해서 특별한 것은 아닐 겁니다. 자기 자신의 고통보다 남의 고통, 그것도 자기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지금 무슨 일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지를 알아채고 함께 아파해 주는 데서 비롯됩니다. 오늘 아침, 가까운 누군가에게
"정말 미안하다. 그래, 그동안 얼마나 혼자서 괴로워했니"라고 말하는 순간이 바로 그 출발점입니다.
13.고통으로 맺은 열매
쾌적하고 아름다운 열대지방이 강한 불굴의 진보적인 사람들의 거주지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암시적이다.
개척정신이 풍부한 진보적인 사람들은 어려운 기후와 풍토에 살고 있었다. 사치한 생활은 인내력이 강한 사람을 만들지 못한다. 사람은 고난에 의하여 단련되고 난관을 만남으로 강하게 되며 시련에 의하여 굳은 신앙이 세워지는 것이다.
안일한 환경에서 약하고 우유부단하던 사람도 고통을 맛보게 되면서 성숙되어지고 좋은 열매를 맺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14.경험해 보지 못한 이야기
감나무에 감이 안 달리면 감나무에 개나 소를 매어 놓았단다.
개나 소를 나무에 매어 놓으면 나무의 껍질이 까지는데, 껍질이 까지라고 일부러 짐승을 매어 놓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껍질이 벗겨진 나무는 위기를 느끼게 되고, 그러면 열매를 잘 맺게 된단다.
친구 목사로부터 듣는 감나무 이야기다. 고난이 삶을 성숙시킨다는 이야기를 그는 어릴 적 듣고 본 감나무 이야기를 통해 하고 있었다. 경험해 보지 못한 이야기가 재미있다.
15.고통에서 벗어 나려면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중병에 있는 안티스테네스를 문병했다. "제발 나를 이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게나." 병에 시달린 안티스테네스는 신음하듯 말했다. 그것은 의지의 철학자답지 않은 나약한 모습이었다.
디오게네다스는 잠시 생각하더니 갑자기 허리에 차고 있던 단검을 빼어들고 친구의 가슴을 겨누었다.
뜻 밖의 사태에 놀란 안티스테네스는 "이 사람아, 벗어나고 싶은건 고통이지 목숨이 아니네."라고 소리치며 병상에서 일어섰다. 디오게네스는 말했다. "그 정신으로 살면 해방되네."
16.고통을 당할 때
수잔이 태어난 지 18개월 되었을 때였습니다. 의사가 심하게 튼 입술을 마취도 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꿰매는 동안 나는 진찰대 위에서 수잔을 붙들고 있어야 했습니다. 국소 마취약을 주사하는 것이 마취약 없이 꿰매는 것만큼이나 아플 뿐 아니라 조직이 뒤틀려 흉터가 남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 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설명해 주려고 해봤자 18개월 밖에 안된 아이가 뭘 알겠습니까? 과연 이 애가 고통과 공포 속에서 얼마나 많은 걸 이해했을까요? 내 딸이 백혈병에 걸리기 이전에 누군가 내 딸에게 방사선과 독한 화학 요법을 사용했더라면 나는 분명 화를 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날이 왔을 때 나는 그것을 기꺼이 허락했을 뿐만 아니라 자녀를 사랑하는 아버지로서 더 큰 것을 위해 그것을 적극적으로 요청하기까지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런 까닭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하는 고통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고통을 당할 때 종종 그 이유들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C.S.루이스는 그의 아내가 죽은 후에 이렇게 썼습니다. "당신의 눈이 눈물로 얼룩져 있는 한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17.고통 중에 감사
성가 작곡가인 웬델 라브레스는 64세 된 할머니에 대한 특별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 할머니는 16년 동안 온 몸에 통증이 있고, 사지를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병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할머니는 누구보다도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할머니는 신체의 모든 부분이 마비되었어도, 오른쪽 엄지 손가락만은 아직 쓸 수 있다는 엄청난 복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한쪽 손은 완전히 굳어 움직일 수 없었지만 오른쪽 엄지 손가락으로는 막대기에 매어 놓은 끝이 두 갈래 난 포크를 사용해 안경을 쓸 수 있었고, 음식을 스스로 먹을 수 있었으며, 빨대를 사용해 차를 마실 수 있었고, 성경 책장도 넘길 수 있었습니다. 실로 엄청난 노력을 들여 이 엄지 손가락 하나만을 사용함으로써 할머니는 모든 일을 했습니다.
어느 날 자신을 위로하러 온 한 방문자에게 할머니는 말했습니다. "나는 감사할 일이 너무 많아요. 나의 모든 죄가 용서함을 받았으니 이제는 나의 구주 예수님의 크신 사랑 안에서 거할 수 있으며, 그 사랑을 마음껏 느낄 수가 있거든요." 그러자 그 방문자는 의아해 하면서 "때로는 낙심되지 않으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할머니는 주저하지 않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주님이 저를 이 세상에서 지켜주시는 한, 이곳에 누워 만족할 뿐입니다. 또 언제든지 주께서 부르시면 이 세상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18.고통스러운 기도
화가 알베르트와 그의 친구와의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화가 지망생들이었지만 너무나 가난하여서 그림 공부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알베르트와 그의 친구는 오랫동안 궁리한 끝에 한 방법을 찾았습니다. 한 사람이 먼저 그림 공부를 하고, 그동안 다른 한 사람은 돈을 벌어서 그림 공부를 하는 친구를 돕자는 것이었습니다.
알베르트가 먼저 그림 공부를 하기로 하고, 친구는 잠시 그림을 뒤로 하고 일터로 나갔습니다. 한 친구는 열심히 일을 해서 알베르트의 학비를 도왔고,알베르트는 열심히 그림 공부를 했습니다.
몇 년이 지났습니다. 드디어 알베르트는 이름있는 화가로 성장했습니다. 이제 알베르트의 친구가 공부해야 할 차례입니다. "이제 자네 차례야, 그동안 고생이 많았네. 내 그림이 이제는 꽤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으니 돈 걱정은 말고 그림 공부에 전념하게."
친구는 기쁜 마음으로 그림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새로운 실망과 좌절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너무나 오랫동안 그림을 그리지 않고 일만 해왔기 때문에 손이 굳어져 세밀한 그림을 그리는 데는 이제 쓸모없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는 실망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친구도 원망하였지만, 결국 그는 신앙으로 슬픔을 이기고 하나님께 오히려 그의 친구를 위하여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날 알베르트는 그림 공부를 하고 있는 친구를 만나러 친구의 화실에 들어가려 할 때, 화실 안에서 들려오는 친구의 기도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흐느끼면서 자신의 현실을 안타깝게 하나님께 호소하며,그러나 알베르트를 용서하고 오히려 알베르트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는 친구의 기도 소리를 들으며 알베르트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문 틈으로 보이던 친구의 거친 손을 생각하며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그림이 유명한 '기도하는 손'이라는 알베르트의 대표작입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이 기도하는 손의 주인공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19.인간이 겪는 4가지 고통과 해결책
본문: 시편 107편 1-32절
1. 방황과 불안과 목마름의 고통(4-5절)
사람이 방황하고, 불안해하고, 주리고, 목말라하고, 피곤해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러 이유를 대겠지만 역시 가장 큰 이유는 '돈을 추구하는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평안하게 살려면 '돈을 추구하는 삶'이 아닌 '돈이 따라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면서 땀을 흘리면 행복이 따라오고, 곧 축복도 따라옵니다.
2. 나쁜 습관에 매인 삶의 고통(10-12절)
내가 즐겨하는 일이 내 가치관을 증명하고, 내가 즐겨 찾는 친구가 내 사람됨을 증명합니다. 자신이 즐겨하는 습관이 나쁘고, 자신이 즐겨 찾는 친구가 나쁘면 과감히 정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습관화를 조심해야 합니다. '좋은 습관을 기르는 것'과 '습관화하는 것'은 다릅니다. 나쁜 습관은 행복을 빼앗아 가지만 좋은 것을 습관적으로 하는 것도 행복을 빼앗아 갑니다.
3. 삶에 대한 의욕 상실의 고통(17-18절)
왜 사람이 의욕을 상실하게 될까요? 가장 큰 이유는 '자신에 대한 지나친 기대' 때문입니다. 목표는 필요하지만 지나친 목표는 금물이고, 기대는 필요하지만 지나친 기대는 금물입니다. 주님께 인정받으려는 것은 기대이지만 사람에게까지 인정받으려는 것은 지나친 기대입니다.
사람에게 인정받으려는 욕망이 크면 주름살은 늘어나고 조만간 의욕상실에 빠지게 됩니다.
4.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고통(26-27절)
평소에는 믿음이 있는 줄 알았는데 고난 중에 믿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분이 있습니다. 평소에는 사랑이 많은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의 성공을 보고 시기가 생기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 삶은 내가 나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이 나를 통제하게 하는 불신적인 삶입니다.
참 믿음이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어떤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사는 능력입니다.
위 4가지 고통의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각 고통을 설명한 다음 구절에 해답이 있습니다. "이제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6절)
"이제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13절)
"이제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19절)
"이제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인도하여 내시고."(28절)
사람마다 사는 모습이 다르고, 사는 환경과 성격이 달라도 고통이 있다는 점은 똑같고, 사람마다 겪는 고통의 모습은 달라도 해결책이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라는 점은 똑같습니다. 내게 주어지는 고통은 두려워하고 떨어지는 기회가 아니라 기도하고 올라서는 기회입니다.
20.고통이 주는 선물
도스토예스프스키를 위대하게 만든 것은 간질병과 사형수의 고통이었다.
로트레크를 위대하게 만든 것은 그를 경멸 덩어리로 만들었던 난장이라는 고통이었다.
생텍쥐페리를 위대하게 만든 것도 그를 일생 동안 대기 발령자로 살아가게 한 평가 절하의 고통이었다.
베토벤을 위대하게 만든 것도 끊임없는 여인들과의 실연과 청신경 마비라는 음악가 최대의 고통이었던 것이다.
고통은 불행이나 불운이 결코 아니다.
고통이란 도리어 행복과 은총을 위한 가장 아름다운 번제물인 것이다.
당신이 지금 지나치게 행복하다면 그것은 곧 불행이다.
당신이 지금 지나치게 불행하다면 그것은 곧 행복이다.
인간은 고통을 통해 비로소 자아를 불사를 용광로 속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되며, 용광로 속에서 신의 손에 의해 아름다운 은으로 새롭게 빚어지는 것이다.
- 강유일 <아아, 날이 새면 집 지으리라> 중에서 -
현재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포기하기 보다 행복의 밑거름으로 생각하며 고통을 극복한다면 더 아름다운 행복이 미래를 밝혀 주겠지요.
날이 쌀쌀해지면서 고통 받고 있는 이웃을 생각하게 합니다. 행복한 시간되세요.
21.인생과 고통
북미의 나이아가라 폭포나 남미의 이과수폭포는 그 위용이 거대합니다. 이들 폭포는 쏟아져내리는 물줄기의 폭과 높이가 세계적인 폭포입니다. 아마 이곳을 찾는 관광객은 한 해 수백만명은 될 것입니다. 만일 이렇게 물줄기의 폭이 넓지 않고 낙차가 없이 고요히 흐르기만 한다면 구경거리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물이 바위에 부딪혀 굽이치고 물줄기가 곤두박질쳐 폭포를 이루는 모습이 장관이기 때문에 보고 싶어합니다.
텔레비전이 방영하는 인생극장의 주인공들은 모두 거친 삶을 경험한 인물들입니다. 부딪치고,꺾이고, 떨어지고, 망가진 곳에서 다시 일어선 사람들의 이야기가 감동을 줍니다. 고통은 인간에게 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 덕을 주는 것입니다. 고통은 또 다른 은혜입니다. 마이클 몰리노스는 그의 책에서 “고통은 영혼을 깨끗하게 한다. 고통을 통한 영혼의 정화는 인내를 낳는다”고 말했습니다. 인생이 아름다운 것은 고통이 있기 때문입니다.
22.고통을 이겨내는 길
무엇인가 잘 못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는 있지만 무엇이 어떻게 잘 못되고 있는지를 정확히 설명할 수 없을 때, 어떻게든 벗어나 보려고 발버둥을 쳐보지만 헤어날 수 없을 때, 그리고 고통스럽지 않은 것처럼 애써 부인하려 하지만 여전히 고통스러울 때 ‘고통이 거기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는 일’이야말로 가장 우선적으로 중요하다.
고통은 또한 우리가 그것을 다룰 때에 부드럽고 친절하게 다루어주기를 원한다. 우리가 갖고 있는 두려움과 미움, 염려, 그리고 분노 등은 마치 엄마가 아이를 조심스럽고 사랑스럽게 팔에 안아주듯이 따뜻하게 부둥켜안아 주어야만 할 대상들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 참으로 신비스런 장치를 우리 안에 만드셨는데 그것은 우리가 고통스러울 때 아픔을 느끼게 함으로써 미리 경보장치가 작동할 수 있도록 하신 일이다. 몸의 어떤 일부가 아파하는 것은 바로 ‘나를 좀 알아주세요. 관심을 더 기울여서 돌봐주세요’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만약에 이런 경고를 무시하게 된다면 나중엔 더욱 큰 고통을 당하게 될게 뻔하다. 그러므로 그 고통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이 신체적인 것에서 연루되었는지, 아니면 물질적인 것인지, 혹은 심리적인 것인지를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 우리의 상처, 혹은 고통은 어떻게든 그 존재가 인식되어져야만 하고 그 실체가 되도록 명백히 드러나야만 한다. 내 고통이 바로 내 영성수련의 주제이며 동시에 우리의 명상과 기도의 대상이 된다.
고통을 경험하게 되면 그것으로부터 어떻게든 도망치려 발버둥치지만 사실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통으로부터 도망치는 일부터 중단해야만 한다. 용기를 가지고 가장 부드럽고 따뜻하게 고통을 대면하여 제대로 인식하며, 알아주고 그것을 드러내는 일이야말로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된다. 우리의 고통은 우울 때문인지, 병 때문인지, 인간관계로부터 오는 상처인지, 또는 두려움 때문인지 그 원인이 이해되어져야만 한다. 그런데 고통의 원인은 그것을 알고자 하는 이의 ‘의도가 얼마만큼 강한 것이냐’에 따라 알려지게 돼있다. 왜 고통스러운지 그 원인을 알 수만 있다면 치유가 가능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고통의 원인 그 자체가 곧 고통을 벗어나는 길이 되기 때문이다.
23.고통을 나눈다는 것
고통받고 있는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최상의 일은 무엇보다도 ‘함께 있어 주는 일’이다.사랑한다고 수 백번 고백하는 것보다도 고통스러울 때 함께 있어 주는 것이 더욱 가치 있는 일이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이 가장 듣고 싶어하는 말은 ‘당신을 위해 제가 여기 있어요’하는 소리다.
온 마음과 정신을 집중해서 ‘마음의 소리’를 듣는 훈련을 계속하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고통 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 누구도 그 사람의 고통을 진정으로 알아주고 들어주지 못했다면,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의 고통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고통의 소리를 들어주고 이해해 주기만 한다면 바로 그 순간에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 고통의 무게가 푹 내려앉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 사람이 간절히 듣고 싶은 말은 ‘당신이 고통 당하고 있음을 저는 알아요. 그리고 당신이 고통 당하는 것처럼 저에게 가슴 아픈 일은 없어요’라는 속삭임인 것이다.
고통받는 이를 판단, 비판하지 않고 단순히 그 사람의 고통이 덜어졌으면 하는 순수한 의도만을 갖고 말할 수 없는 사랑과 긍휼의 가슴으로 그 고통을 알아주고 들어주게 된다면 그의 고통은 반드시 치유될 것이다. 지금까지 상담을 할 때마다 계속해서 실천해오는 일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적어도 상담 약속시간 10분전에 도착하여 내담자를 기다리면서 내 가슴 위에 두 손을 얹은 채 ‘상담하게 될 내담자의 고통을 나의 심정으로 느끼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이다. 내가 분명히 확신하는 것은 그 사람의 고통을 나 자신이 함께 느껴 보기 전에는 그 사람을 도울 수도 없고 진정한 치유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상담자로서 내담자를 대할 때마다 그 사람의 상처와 아픔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내담자에 대해 끊임없는 존경과 사랑과 긍휼의 마음 상태를 계속 유지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사랑의 영성이 상담자의 내면 깊숙이 계속 충분히 유지되도록 하려면 깊은 자아성찰과 계속적인 영성수련이 필요하다.
상담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고통의 소리를 들어주는 일’이고 그것을 알아주는 일이다.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은 아마도 이런 말을 가장 듣고 싶어할 것이다.“내가 당신 곁에 있어요.당신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라면 저는 무슨 일이든 할 것입니다. 당신은 제게 참으로 소중한 사람입니다”
24.고통은 왜 있는가?
본문: 애 3:19-39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거의가 다 이렇게들 말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정말 계시다면 왜 이렇게 불행과 고통이 있고, 또 그대로 보고만 계십니까? 그리고 저 공산당들은 왜 그냥 두어서 불안에 떨게 하고, 왜 홍수는 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게 합니까? 왜 고칠 수도 없는 무서운 질병 속에서 고통을 당하게 내버려 두십니까?" 하는 의문을 지닌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사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불행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과 불행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아서 내버려 두시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 보면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라"고 하신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고통과 환난이 있어지는 것은 우리 인생들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 고통은 왜 있고, 무슨 유익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어린 아이들이 낮에 밖에 나가서 놀 때는 전혀 아빠, 엄마, 집 생각 안 하고 재미있게 놉니다. 그러나 갑자기 위험한 일을 당할 때는 엄마! 하고 집으로 뛰어 들어오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인간의 창조주가 되시고 축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게 되어 있는데, 배신하고 반역하며 제 멋대로 살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고통과 불행에 직면하게 되면 그제서야 절대자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게 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자기만을 의지하고 살다가 절망에 처할 때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살게 될 때, 평안할 때에는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부르짖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로 왕에게 고문을 당하고 고역을 받게 될 때 그제서야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편안하고 세상에 소망을 두었을 때는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의지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절망의 벽에 부딪치게 될 때에 그제서야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 들고 옵니다"하면서 하나님 앞에 항복하고 따르게 되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저 여자와 결혼만 하면 예수를 믿겠습니다" "저는 아들이 없는데 귀한 아들 하나 주시면 잘 믿겠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조건이 이루어질 때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하고 잘 믿는 사람은 보기 힘듭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남편, 혹은 아내가 죽어가거나, 철석같이 믿었던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또 사랑하는 자식이 고통을 당하고 죽어가게 될 때, 그 고통으로 인해 하나님께 찾아 나오는 사람은 오히려 많이 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사업의 실패와 질병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찾게 된 경우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여러분 가운데도 평안하고 아무런 시험이 없었더라면 예수를 믿지 않았을 사람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환난과 고통이 그 당시에는 쓰리고 아프지마는 이러한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고 믿게 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바로 깨닫고 하나님을 향하게 되면 여러분에게는 유익이요, 무한한 은혜와 축복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5. 천국을 사모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칼빈(J. Calvin)은 "이 세상에 고통이 많은 것은 천국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이 살기 편하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다면 천국 같은 것은 있으나 없으나 찾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환난과 고통을 당하게 되므로 근심과 고통과 슬픔이 없는 영원한 하늘 나라를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편안하게 살 때에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그리워하지도 않고 , 돌아가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견딜 수 없는 압박과 고통을 당하게 될 때 그제서야 가나안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눈물과 근심과 질병과 심지어는 죽음의 고통을 통해서라도 눈물이 없고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는 영원한 천국으로 우리를 몰아 넣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의 환난과 고통은 우리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안개와 같이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세상에서는 고통을 받더라도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면하고 영원한 천국에서 영생과 복락을 누리게 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백년 미만을 사는 이 세상에서는 고난을 당해도 천국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 휠씬 유익한 것입니다.
26.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대부분의 환난과 고통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고 내멋대로 살고 죄를 짓게 될 때 오는 수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불순총하고 제 멋대로 살다가도 고통이 닥치면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는 사람도 많이 보게 됩니다.
시편 기자는 시편 119편 67절에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고백했고, 계속해서 71절에 보면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당하는 질병이나 고통은 하나님이 우리가 미워서 주시는 벌 값이라기 보다는 그것을 통하여 더 하나님의 뜻에 맞는 생활을 하라는 하나님의 사랑의 채찍으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구약의 다윗도 젊어서 고난과 역경 속에 있을 때에는 오히려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평안할 때 늦도록 낮잠을 잔 후에 옥상을 거닐다가 목욕하는 여인을 보고서 범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그 여인에게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만 그 아들이 병들어 죽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다윗은 자기의 죄를 뉘우치면서 일주일 동안 베옷을 입고 금식하며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아들이 죽었음을 알고는 태연하게 슬픈 기색을 내지 아니하고 식사도 하고 나라도 보살피게 되었습니다. 그 때 궁궐의 많은 신하들은 하나같이 놀랬습니다. 아주 이상할 정도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내가 이 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누구를 탓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히브리서 12장 6절 말씀에 보면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계속해서 12장 8절에도 보면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고 했고, 또 12장 11절에도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환난과 고통과 실패를 통해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이므로 우리에게는 유익이요, 바로 깨닫는 자에게는 무한한 은혜요 축복이 됨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27. 인내와 능력을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미국의 어느 잡지에 5천년 묵은 나무가 있다는 기사가 실린 것을 보았습니다. 이 나무가 어떻게 오래 살았느냐 하면 땅이 좋은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산 언덕에 바람이 부딪치고 바위가 많은 토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나무는 땅도 나쁘고 모든 조건이 나쁘지만 오히려 뿌리는 아주 깊이 박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나무는 다른 나무들은 다 시들어 죽어도 죽지 아니하고 5천년 이상을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대해서 평안하게 온실의 꽃과 같이 돌보시는 것만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온실에서 자란 꽃은 햇볕이 쪼이고 또 조금만 추위가 와도 금방 시들어 죽어 버리는데, 이 온실의 꽃과 같은 사람을 하나님은 원하지 않으십니다. 어떠한 환난과 시련과 역경이 오더라도 힘차게 이기고 참고 나갈 수 있는 그런 신자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 때로는 하나님 자신이 원하지 아니하시지만 시련과 환난과 고통을 당하게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어느 곳에는 강물이 얼마나 물결이 센지 그 강을 건너는 사람은 누구나 다 바윗돌을 하나씩 짊어지고 간다고 합니다. 왜 그런고 하면 바윗돌을 지고 가기는 힘들지만 빈몸으로 건너 가다가는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가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지고 건넌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심령도 평안하기만 하면 기도도 하지 않게 되고, 예배당에도 다니기 싫게 되고, 신앙의 자세가 나태해집니다. 그러나 한 번씩 풍랑이 일어나고 파도에 부딪치게 될 때에 하나님을 향하여 진정으로 부르짖게도 되고 믿음이 자라게 되고 그 심령은 성숙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토록 하나님께서는 시련과 절망을 통하여 믿음과 기도로써 어떠한 환경이라도 이길 수 있는 인내와 힘을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란 광야에서까지 이르렀을 때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가나안 땅을 탐지할 정탐꾼을 12명 택해서 보내게 했습니다. 그 12명의 정탐꾼이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백성들 앞에서 보고하는데 10명은 모두가 다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보고하기를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또 그 사람들은 보니 키가 큰데 우리는 그들 앞에 서면 메뚜기와 같습니다"하면서 근심하며 부정적인 보고를 했던 것입니다.
그 때에 그들 중에 여호수와와 갈렙은 백성들에게 보고하기를 "아니다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그러므로 문제 없습니다. 쳐들어 갑시다"하고 긍정적이고 용감한 보고를 했던 것입니다. 이 말씀 가운데 보면 왜 우리의 밥이라고 했습니까? 밥이란 잘 먹고 소화시키면 힘이 생기고 건강이 오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당하는 시험과 환난은 밥과 같아서 그것을 잘 먹고 소화하기만 하면 힘이 생긴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일찍이 위대한 종들은 절망과 실망할 수밖에 없는 고통을 당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아직 이렇다 할 훌륭한 목사는 못되었습니다만 오늘날 이 만큼이라도 복음을 전하고 가는 곳마다 부흥회를 인도하고 많은 사람을 구원하도록 쓰임을 받기까지는 제 나이에 비해 여러 가지 고통과 절망스런 일들을 많이 겪었기 때문이라고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일 평안하게 아무런 고생도 없이 자랐다면 제가 여러분 앞에서 아무런 말도 할 자격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어떠한 환난과 고통이 밀어 닥치게 될 때 어리석게 원망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 시련과 고통이 지나간 다음에는 어떤 은혜를 주시려나이까? 감사합니다!"하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어려운 시험을 당하게 될 때 믿음이 없는 사람은 "아이구! 난 예수를 잘 믿으려고 하는데 왜 이런 시험이 오나?"하면서 참지 못하고 포기해 버리는 사람도 많이 보게 됩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고 나면 오히려 더 시험이 오고 질병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힘든 시련의 고비가 지난 다음에 축복을 주어야 그 은혜가 고마운 줄 알고 그 축복을 받아서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는 고통과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몇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① 회개하고 돌아서는 것입니다.
역대하 9장 14절 말씀에 보면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환난과 고통과 재난을 당했을 때에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게 되면 그 환난과 고통을 제하시고, 치료하시고, 고쳐주시며, 축복해 주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② 십자가를 자원해서 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남의 아기를 억지로 보라면 정말 귀찮습니다. 그러나 제 자식을 안아 줄 때는 팔도 아픈 줄 모르고 힘든 줄을 모르고 즐겁게 잘 보게 됩니다.
여러분! 어차피 환난과 고통 당할 바에는 내가 자원해서 믿음으로 십자가를 지는 고난을 자취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쓸 데 없는 불행과 고초는 면해 주시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고통과 고생이 있어질 바에는 믿음으로 축복받는 고생을 하자는 말입니다.
모세가 공주의 아들이 되었을 때 장차 대 애굽의 황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분토와 같이 버리고 자기 백성과 함께 고난을 자취하게 될 때에 어리석은 것 같았으나 놀라운 축복을 받았고 영원한 기업을 받은 사실을 우리는 성서를 통해서 잘 압니다. 분명히 믿음으로 하는 수고와 고생은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갚아 주시고, 그 대신에 다른 고난과 고통은 막아 주신다는 사실을 체험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③ 믿음과 기도의 생활을 미리 잘 해야 합니다.
어려운 고통과 시험이 올 때에 "아이구! 하나님 나를 살려 주십시요"하지 말고, 시험과 고통과 재난이 오기 전에 미리 믿음 생활 잘 하고 기도 생활 잘 하라는 것입니다. 나 자신만 아니라 내 가정을 위해서도, 내 교회를 위해서도, 나아가서 우리나라 민족을 위해서 정신차려 기도를 해야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나 하나만 편히 잘 먹고 잘 살겠다고 하면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가정과 나라까지도 말할 수 없는 어려운 수난을 겪게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홍수를 대비해서 방주를 지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방주는 삼층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왜 삼층으로 되어 있는지 아십니까? 홍수가 나서 파도가 부딪칠 때 일층에 내려가 옆을 내다보니 무서운 물결만 보입니다. 이층에 올라가도 망망한 물결과 시뻘건 흙탕물만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 무서운 물결 속에서도 삼층에 올라가 보니까 비로소 맑은 하늘이 보이고 하나님과의 언약이 생각이 나서 기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일층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육신의 생각과 눈을 말합니다. 즉, 우리가 환난과 고통의 홍수를 만날 때에 육신의 생각과 눈으로 보게 되면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층은 인간의 혼를 말합니다.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삼층에 올라와서 즉 믿음의 눈, 소망의 눈을 가지고 보게 되면 국가 정세가 혼란하고 가정형편이 말할 수 없이 비참한 궁지에 몰렸다 하더라도 그 가운데서 소망을 가질 수 있고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난이 오고 고통의 홍수를 만날 때에 일층 즉 육신의 눈으로 바라보지 마십시요! 인간의 지식이나 지혜를 가지고도 해결하려 하지 마십시요! 영혼의 눈, 곧 믿음과 기도로서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④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 9절에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근심 걱정 불안 고통의 짐을 나 혼자 지고 고생했지만 이제는 다 하나님께 내어 맡겨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십자가 앞에 나와서 근심의 짐, 죄의 짐을 다 맡겨 버리고 의지하게 될 때에 하나님은 그를 보살펴 주시고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⑤ 자기 중심의 생활을 버리십시요.
여러분! 나 중심, 내 이기주의적인 생활을 하면 오히려 더 불안해지고 고통은 심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남을 위해서 살겠다고 할 때에는 마음이 기뻐지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의 사람은 남편이나 아내나 자식 혹은 교인을 대하게 될 때에 불안해집니다. 그러나 남편이나 아내나 자식이나 혹은 교회를 위해서 칭찬이나 존경보다는 희생하려는 한 알의 밀알이 되려 할 때, 그는 기뻐지고 그의 생애는 더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여러분들은 자기 중심의 생활을 하지 마십시요! 어떻게 하면 좀더 내가 남을 돕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수 있을까? 하는 거룩한 마음을 가지십시요! 마태복음 6장 33절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 중심의 생활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겠다고 하는 그런 자에게 고통은 물러가고 진정한 평안은 오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10장 31절에 "그런 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이 모든 말씀을 기억하시고 말씀대로 순종하여 축복받는 생애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
28.살아 있는 사람만이 느끼는 고통
어떤 사람이 중병에 걸려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는 마취에서 깨어나자마자 고통을 호소하며 고래고래 소리질렀습니다. 그때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간호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잠깐만이라도 불평과 신음을 멈춰보세요. 그러면 당신이 아직도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거예요.”
그제야 그 환자는 “내가 느끼고 있는 이 고통은 아직 나에게 생명이 있다는 증거입니다”라고 고백하며 자신이 살아 있음을 감사했다고 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만이 고통을 느낄 수 있습니다.
몸이 아파 병상에 누워 있을 때, 사업에 실패해 벼랑 끝에 서 있을 때,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 마음이 아플 때 감사하십시오. 당신이 아직 살아서 이런 고통을 당하고 있음을 말입니다. <오인숙/ 교단작가 >
29.마라의 고통이 주는 유익
본문:출애굽기 15:22∼27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기 23:10)
홍해를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기적적으로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은 뛸 듯이 좋아하며 진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결코 편안한 여행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물을 얻지 못해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던 것입니다. 다행히도 ‘마라’라는 곳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우물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그런데 그 물은 먹을 수 없는 쓴물이었습니다. 그 물을 먹은 백성들은 배를 부둥켜안고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우리 인생의 광야에도 이런 마라의 고통이 있습니다. 어렵게 구한 우물이 먹지 못하는 쓴물일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그때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 한 나뭇가지를 발견했고 그 나뭇가지를 우물에 던지자 쓴물이 단물로 변해 모두가 먹고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 마라의 고통이 가져온 유익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기도하게 되었습니다(25절). 늘 기도의 필요성을 알지만 고통의 구덩이에서 허덕일 때까지 늘 기도를 잊어버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하나님은 종종 우리에게 이 고통을 허락하십니다.
둘째로, 기적을 체험했습니다(25절). 하나님의 지시대로 나뭇가지를 쓴물에 던졌을 때 그물이 단물이 되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이 기적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 돌리게 하였습니다.
셋째로,엘림의 축복을 경험합니다(27절). 그들이 반나절쯤 갔을 때 물샘 열둘과 종려나무 칠십주가 있어서 거기서 음료의 공급과 휴식의 축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로버트 슐러의 글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줍니다.“절벽 가까이로 나를 부르셔서 다가갔습니다. 절벽 끝에 더 가까이 오라고 하셔서 더 다가갔습니다. 그랬더니 절벽에 겨우 발을 붙이고 서있는 나를 절벽 아래로 밀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나는 그 절벽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때까지 내가 날 수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오늘의 고통이 내일의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고난 속에서 기도를 배우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날개는 활짝 펴질 것입니다.조금만 더 가보십시오. 엘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는다고 하여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그런데 갑자기 내 삶 속에서 닥쳐오는 이 환난과 고통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때로 우리는 이것이 축복인지 모르기에 “주여 왜 나에게 이 쓴물을 먹입니까?” 항의하고 원망하기도 합니다.그러나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우리에게 고난을 허용하시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더 놀라운 축복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임을 알았습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가 고통 가운데 던져질 때 불평하지 말게 하시고, 하나님의 선한 계획을 알게 하여주시옵소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30.고통에 동참
독일의 신학자 본 회퍼 목사는 미국에서 편한 여생을 보낼 수 있었으나 조국애를 발휘,독일로 건너가 반나치 활동을 벌이다가 1945년 수용소에서 처형됐다.
그는 옥중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명령에 따라 고통받는 것은 자의로 고통받는 것보다 쉽다.
여럿이 함께 고통 받는 것은 혼자 고통받는 것보다 쉽다.
육체적으로 고통받는 것은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것보다 쉽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의로,혼자서,육체와 정신의 고통을 모두 선택했다』
31.고통은 인격을 파괴하는가?
미국의 설교가 랠프 사크만은 사람이 고통받는 이유를 네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개인의 죄때문에 고통을 당한다.술을 많이 마셔 건강을 잃어 고통을 당하고 혹은 윤리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
둘째, 집단적인 죄악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집단이기주의로 인해 불의를 행하고 부정을 만들 때 무죄한 백성들은 고통을 당한다.
셋째, 고의적 혹은 무의식적인 실수로 인해 고통을 당한다.교통사고 같은 자신 혹은 다른 사람의 실수로 고통을 당한다.
넷째, 불가항 력적으로 고통을 당한다.자연재해 등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고통이 있다.
하지만 어떤 종류의 고통을 당하든지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고통의 뜻과 의미를 깨닫도록 도와주고 하나님의 형상을 되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신다.우리가 평안하고 즐겁게 생활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속삭이신다.우리가 열심히 일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보통 말로 이야기하시지만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는 고함을 질러서 완전한 인격자가 되게 하신 다.고통은 우리의 잠을 깨워 새로운 뜻과 의미를 발견하도록 도와준다.
32.고통은 악이 아니다
폭풍이 오기 전에 모든 동물은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폭풍을 동반하는 낮은 기압은 가스와 냄새를 배출하기 때문에 동물들이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 폭풍이 없는 지역은 낙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바람이 없다는 말은 공기가 없다는 뜻이다.
바람은 배를 전진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역경은 곧 바람과 같다.
파멸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도약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도약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알렉산더 벨은 청력을 잃은 아내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보청기를 연구하다 전화를 발명했다. 고통이 곧 악은 아니다.
33.고통의 결과
한 어린 소녀가 그녀의 음악 교사에게 피아노를 치면 손가락이 아프다고 말했더니 그 선생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아픈줄은 나도 알지만 손가락이 튼튼해지기도 한단다."그래서 소녀는 다음처럼 대답하여 옛부터 지금까지의 교훈을 요약했습니다.
"선생님, 튼튼하게 만드는 것은 모두가 아픈 것 같군요."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의 고통을 결코 헛되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슬픔 중에서도 당신을 신뢰하는 자들을 매우 사랑하시며 고통의 통로로 다가오는 귀중한 영혼을 강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고통당하도록 허락하시지 않는 한 당신께서 조차 우리를 위해 하실 수 없는 일들이 있으니, 당신께서도 과정이 없이 과정의 결과만을 이루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 속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합니다! 제 궤도를 운행하는 별들이 그를 위해 싸우고 부는 바람마다 그의 닻을 부풀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가치한 영혼에게 시련을 주시지 않습니다!
34.도스트예프스키의 고통
아침은 언제나 순결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지난 밤의 고통 때문에 아침이 오는 것이 두려웠던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인생이 주는 고통 때문에 아침의 순결함조차 분노를 느낀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러시아의 대문호인 도스트예프스키는 1821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습니다. 도스트예프스키의 부친은 전직 육군 군의관으로서 빈민 병원에서 일했고 가족들은 병원 건물에 부속된 더러운 사택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난폭한데다 알콜중독자였던 그의 아버지는 돈을 조금 벌자 툴라라는 지방에 작은 농토를 구입했지만 농노(農奴)들을 너무 심하게 다루는 것으로 소문나 있었습니다.
도스트예프스키가 열여섯 살 나던 해 그의 부친은 결국 그가 보는 앞에서 농노들의 십장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습니다. 이 무서운 충격으로 인해 생긴 간질병은 일생동안 도스트예프스키를 괴롭혔습니다.
스물여덟 살 나던 해 도스트예프스키는 잘못된 정치단체의 일원으로 체포되어 반역죄의 판결을 받고 슬픈 사형수로 전락합니다. 이 사건은 소위 '페트라셰프스키' 사건이라고 불리우는 것으로 법정에서 도스트예프스키는 총살형을 언도받게 됩니다.
유형열차는 그와 많은 사형수들을 싣고 시베리아의 옴츠크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열차가 잠시 토볼스크라는 이름의 시골역에 멈춰섰을 때 사형수들을 위로하기 위해 장교 부인들이 그들에게 음료수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도스트예프스키에게도 한 장교의 아내가 더운 차를 내밀었습니다. 그는 눈앞에 다가온 죽음의 공포 때문에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장교의 아내는 가슴 속에서 작은 책 한권을 꺼내 그의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그 책은 작은 신약성경이었다고 합니다.
움츠크 감옥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그는 그 신약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죽음 앞에서 형 미하일에게 이렇게 편지했습니다.
"형, 난 다시 태어나 최고에 이를 것입니다."
도스트예프스키는 그의 신념대로 결국 총살형을 받기 2분 전에 황제의 사면령을 받아 기적적으로 되살아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인생 최대의 고통인 사형수의 고통을 이기고 세계 최대의 작가가 된 것입니다.
"형, 나는 다시 태어나 최고에 이를 겁니다."
시베리아 감옥소에서 형에게 보낸 도스트예프스키의 신념에 찬 편지였습니다.
35.고통의 깊이
폴 틸리히( Paul Tillich ) 는 고통의 깊이는 진실의 깊이로 향하는 유일한 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인내한 고통은 인새의 깊은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깊은 물로 이끄시는 것은 물에 빠뜨리기 위함이 아니라 깨끗하게 하기 위함이다"고 말했습니다.
일본 삿포로에는 큰 교회가 하나 있는데 고바야시라는 목사님이 목회를 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반신불수로써 휠체어를 타고 다니며 설교를 합니다. 그가 병원에 입원하고 있을 때에 그를 돌보던 간호원이 그분의 독실한 신앙심에 감동되어 그의 손발이 되어 주기로 결심하고서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이 사모님이 얼마나 철저하게 희생하는지 모릅니다. 교회는 날로 부흥되어 반신불수 목사님의 설교에 수백며이 모이는 일본에서 가장 큰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 교회의 특징은 뜨거운 하나님나라의 사랑입니다. 그 교회에 들어가면 사모님의 뜨거운 희생적인 사랑을 체험하기에 사람들이 그 교회 모여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의 고난을 당할 때 십자가의 사랑을 가진 교회가 될 것입니다.
36.고통의 자리엔
스코틀랜드의 조지 마티슨은 그의 저서에서 개인적인 절망으로 인한 연단을 고백한다. "내 영혼아, 꿇어 엎드리는 장소를 피하지 말라. 과거의 위인들에게 가장 잊지 못할 풍요의 자리가 어디였던가 물어보라. 그들의 대답은 `내가 엎드렸던 차거운 바닥'이라고 답할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물어보라. 모리아 산의 번제단을 가리키리라. 요셉에게 물어보라. 차가운 감옥을 가리키리라.
다윗에게 물어보라. 그의 노래는 밤에 지어졌다고 할 것이다. 욥에게 물어보라. 하나님의 폭풍우 가운데서 응답하셨다고 할 것이다. 베드로에게 물어보라. 그는 바다에서 순종을 배웠다고 하리라. 요한에게 물어보라. 그는 밧모섬에 승리의 면류관을 던지리라. 바울에게 물어보라. 그는 자기의 눈을 멀게 한 빛에서 영감을 보았다고 할 것이다.
나와 함께 가는 순례자들이여, 가는 길이 예상보다 고통스러운가? 만사 형통, 승승장구의 경험을 할 줄 알았는데, 춥고 황량한 땅에 앉아 외롭고, 낙심되고, 상심했는가? 길을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했는가? 내 말을 믿으라.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당신 안에 역사하신다. 하나님의 능력의 손이 당신 위에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당신을 감싸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당신 곁에 있다. 깨어나서 그것을 잡으라."
37.감사하는 고통
일본의 하라사끼 목사의 부인이 43세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폐암말기의 고통은 병으로 받는 고통 중에서 제일 괴로운 고통이다.
그 분 은 자기의 생명이 며칠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준비를 했다. 일기를 썼다.
목사님과 사모님은 사랑한다는 말 대신 "이루로라"라는 암호를 사용했는데, 의식이 거의 사라져 가고 입으로 말을 못하니까 손에다가 "이루로라"라고 쓰고 죽었다고 한다.
그 분의 일기장에는 고통 속에서도 감사하다는 말 뿐이었다.
어제보다 고통이 덜했던 것을 감사했고, 무엇보다도 주님을 믿고 기뻐하게 해 주신 것을 감사했다.
아이들이 신앙을 갖게 된 것을 감사했고, 더욱 신앙생활에 정진해 주기를 바랬다.
그리고 행복했다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38.고통에서 깨닫는 겸손
어느 집사님과 말씀을 나누는 중에 이런 간증을 들었다.
“제가 군에서 사관학교를 나오고 군복무를 하는 중에 모든 일이 너무 잘 되었었습니다. 진급을 할 때는 제 동기 중에서는 제 1호로 진급이 되어서 언제나 최소 연령자로 진급했고 상
관들에게 총애를 받아 제각기 저를 데려가려고 애를 썼을 정도였습니다.
그 당시 도미유학이란 게 하늘의 별따기였는데 시험을 치면 1등으로 합격해서 제일 먼저 가고 싶은 때 갔었고, 이렇게 해서 미국 유학도 군에 있으면서 두 번씩 다녀왔습니다. 제 앞은 탄탄대로였습니다.
월남에 파견된 주월 한국군 총사령관은 그 분대로 저를 데려가려고 교섭이 왔고, 이곳 육군 참모총장은 나를 그 분대에 머물러 있게 하려고 애를 쓸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기치 않은 일이 생겨 구테타 음모에 몰려 1년반 동안 고생했고, 육체적 정신적 타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는 동안 하나
님을 더 가까이 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제가 그 어려움을 당하기 전에는 세상에서 무서운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높아 보이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교만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
만을 꺾기 위해서 저를 고통의 도가니로 몰아 넣으셨습니다.
거기서 저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세상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생각하던 모든 것이 얼마나 일방적이었던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이란 그런게 아닌 것을 알았어요. 하나님의 은 혜가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고마워요.”
그렇다. 겸손해져야, 낮아져야, 부드러워져야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들을 수가 있다.
39.고통의 이유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시69:21)
열일곱 살 때 수영을 하다가 목이 부러진 조니라는 소녀의 이야기가 책으로 출판된 적이 있습니다. 소녀 조니는 하루아침에 전신마비 장애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처지에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불타오르는 재활의지와 주위의 도움을 통해 입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많은 글을 쓰고 또 여러 곳에서 강연을 하곤 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쓴 『조니의 신앙』이란 책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그림 그리는 일과 가족, 그리고 친구들의 도움은 나를 완전히 절망에서 끌어내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휠체어의 인생으로부터 무엇보다도 먼저 감사받으셔야 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성경 말씀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인생의 참된 의미를 깨닫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 보면 마비로 인한 내 모든 시련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제게 임한 것임을 확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고통 뒤에 이유를 두셨고, 그것을 알고 나니 세상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여러분의 고통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이유를 가지고 계십니다.’
고통 가운데서도 기도하면서 기쁨을 찾아내는 지혜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 기도: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하소서. /시편을 통한 매일 묵상집(아가페)
40.자랑할 수 없는 고통
골프 재미에 푹 빠진 목사가 있었다. 구름 한점 없이 화창하고 맑은 일요일이었다. 목사는 갈등하다 결국 교회에 몸이 아파 못 간다는 전화를 하고 골프장으로 향했다. 이를 본 천사가 하나님에게 말했다. “저 목사, 혼 좀 내줘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목사는 1번 홀에서 힘차게 스윙했다. 볼은 무려 350야드를 날아가 그린 위에 떨어진 뒤 홀컵으로 들어갔다. 홀인원이 된 것이다.
목사는 흥분했다. 천사도 충격을 받았다. “하나님! 이것은 뭔가 잘못된 것 같네요. 벌을 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하나님은 미소를 지으며 천사에게 말했다. “목사가 이 일을 누구에게 자랑하겠니? 자랑을 하면 주일에 골프 친 것이 들통날테고, 자랑하고 싶은데 자랑할 수 없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이 어디 있겠느냐.” 오늘 당신의 자랑은 무엇인가? 오직 예수 그분만이 우리의 자랑이 되어야 한다./김은호 목사(오륜교회)
41.고통의 유익
링컨이 어느 한가한 날 시골길을 걷고 있는데 한 농부가 말을 몰아 쟁기로 밭을 갈고 있는 게 보였습니다. 링컨은 농부에게 다가가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 때 링컨은 말 엉덩이에 파리가 붙어 있는 걸 보았습니다.
파리가 말을 귀찮게 하는 게 분명해 보였습니다. 링컨이 파리를 쫓아버리려고 손을 들었습니다.
그 순간 농부가 링컨을 말리며 말했습니다.
“그만 두세요. 그 파리 때문에 이 늙은 말이 그나마 움직이고 있답니다.”
이 파리처럼 쫓아내거나 털어내고 싶은 사람,또는 일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불편과 고통이 삶을 윤택하게 합니다. 어느 정도의 고통은 인간으로 하여금 성숙하게 하는 자극제가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고통을 극복하는 지혜입니다.
이 지혜가 곧 말씀을 통하여 주시는 분별력입니다. / 이성희 목사 (연동교회)
42.고통에 따른 감사
이제 잡지 기사의 질문의 뜻을 알 것 같습니다. 저들은 어떤 고통을 겪었기에 그토록 감사하지 않고 견디지 못했던가?
그들은 먼저 건강을 감사했습니다. 왜냐하면 1620년 12월, 추운 때입니다 긴 긴 항해 중에 함께 출발한 사람이 배 안에서 병들어 죽어갔고, 그해 겨울 굶주림과 괴혈병과 각종 바이러스 병으로 48명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절반이 살아남았습니다.
살아남은 데 대한 감사. 그리고 그만큼 건강을 지킨데 대한 감사. 이것이 첫째 감사였습니다. 또한 의복과 거처가 문제였습니다. 낯선 곳에 도착했는데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여기서 그들은 나무를 찍어서 오두막, 통나무 집 오두막을 일곱 채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통나무집에 들어가서 저들은 불을 피워 놓고 하나님 앞에 감사했습니다.
또한 음식은 어땠습니까?
플리머스(Plymouth)라고 하는 곳에 도착했으나 낯선 땅에 아무것도 없는데 저들이 가지고 온 종자 몇 가지, 그, 중에서 보리와 밀을 심어 보았지만 토양이 달라서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오히려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아서 그들의 덕분으로 옥수수를 얼마 추수할 수 있었습니다. 이 옥수수를 갖다 놓고 그리고 들에 뛰어다니는 칠면조를 잡아서 그걸 구워놓고 감사절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미국에서는 추수감사절(Thanksgiving)이 되면 어느 식당 어느 가정이든지 온통 칠면조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칠면조는 맛없는 조류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미국 학생들한테 “닭하고 칠면조, 어느 쪽이 맛있냐?”고 물으면 열이면 열 모두가 “아, 닭이 맛있지”하고 대답합니다.
그럼 왜 칠면조를 먹느냐.
우리 조상들이 이것을 놓고 하나님께 감사했기 때문입니다. 그 전통을 따라서 그렇게 먹으며 감사를 기억하는 거라고 합니다. /박영준 목사(김포중앙교회)
43.천로역정의 탄생 배경 (위기가 곧 기회)
영국에서 신앙의 자유가 제한되었던 때의 일입니다. 나라의 허락을 받지 않고 설교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힌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무려 12년 동안 감옥 생활을 하던 중 그의 사랑하는 아내 메리가 죽었습니다. 소경이었기 때문에 거지로 살던 아내가 죽자 세 자녀는 스스로 생존을 책임져야 하는 고아의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런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이와 같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너무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제가 할 일이 남아 있을까요? 만약 제가 해야 할 그 일을 볼 수만 있다면 저는 절망하지 않겠습니다."
이 때 주님은 그의 마음 속에 계속해서 이런 감동을 주셨습니다.
"너는 글을 써라. 나는 너에게 글을 쓰는 달란트를 주었단다."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던 그에게 환상이 보였습니다. 주님의 나라를 향해 걸어가는 한 사람이 보였습니다.
감옥에 갇혔던 그 사람, 존 번연은 좁은 감옥 안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혔다는 [천료역정]을 써내려 갔습니다.
44.계산된 고통
절제를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계산된 고통’이라 할 수 있다. 역량과 지구력을 키워 주는 도전 상황에 몸과 마음과 영혼을 밀어 넣는 행동이다. 자신을 절제하는 과정에서 실패의 쓴 잔도 마시고, 굴욕감도 느낄 것이다. 게다가 만족과 성취는 자꾸만 뒤로 미뤄진다. 절제를 아는 사람은 인기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그러나 절제의 시기가 모두 끝난 뒤에야 비로소 세상 사람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박수 갈채와 찬사를 보내는 보상이 찾아온다.육상 선수, 레슬링 선수, 수영 선수들은 모두 자신에게 더 큰 장기간의 지구력과 더 빠르고 강한 체력을 요구함으로써 자기 몸을 한 차원 높은 단계로 밀어 붙인다. 피로하거나 고통스럽다고 해서 멈추지 않는다. 반드시 극복해야 할 정신적 장애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몸의 편안함보다는 의지대로 몸을 움직인다.이 원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엄청난 임무를 감당해야 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 「영적 성장의 길」/ 고든 맥도날드
45.산고의 고통
한국의 여인들은 아기를 낳기 위해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댓돌위에 놓여진 자기의 고무신을 다시 한 번 바라보면서 눈시울을 적신다고 했다. 과연 아기를 순산하고 다시 이 고무신을 신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문지방이 흔들리고 대들보가 내려앉는 것 같은 산통을 겪어야만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고통후에 영광스런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셨다.
46.고통 가르치기
퇴근시간 인천쪽으로 가는 지하철 1호선. 신도림역을 지나면서 사람이 더 밀려 죄이기 시작했다.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부부가 아이 둘을 데리고 있었다. 한 아이는 부인이 업었고,다른 아이는 아빠 손을 잡고 있는데 초등학교에 갓들어간 정도로 보인다. 서있는 아이가 힘들다고 짜증을 냈다. 엄마가 말했다. “참아,아빠는 매일 이렇게 타고 다니셔!” 그러면서 남편을 바라보는 그 여인의 얼굴,그 미소엔 남편에 대한 사랑과 자랑,삶에 대한 건강함이 가득했다. 이런 부모의 아이는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자기 어린 시절을 결코 부정적으로 기억하지 않으리라.
47.고통 속의 나눔
지금은 필리핀에 가서 선교 사업을 하고 있는 마린 베이커라고 하는 목사님이 계시는데, 이 목사님은 우리나라에서 오랫동안 선교사로 있었습니다.
그가 대전에서 선교 사업을 하고 있을 때에 아기를 낳았는데, 그 아기가 선천성 심장병 때문에 18개월 동안 고생하다 가 결국은 죽었습니다. 그 때 죽은 아기를 선교사 묘지에 묻은 다음, 베이커 선교사는 고아원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가장 못나고 몸의 이곳 저곳에서 진물이 나는 보잘것없는 고아를 부둥켜안고
"나는 이 아이를 내 아이 대신 양자로 삼겠소."하며 데리고 가서 진물투성이의 그 못난 아이를 잘 길러서 지금은 미국에 유학을 보냈습니다.
그 후 그는 고아원의 불쌍한 아이를 또 입양하여 잘 길러서 지금 필리핀대학에 입학을 준비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베이커 선교사는 그 아이들을 장차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의 긍휼을 베푸는 삶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아픔과 고통 속에서도 이웃을 향한 선한 일을 계획하고 그들과 함께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48.고통과 시련 중에서
연주를 듣다가 왕이 벌떡 일어났다는 그 유명한 ‘할렐루야’를 작곡한 헨델은 건강이 매우 나빴다고 한다. 그는 병을 고치기 위해 재산을 모두 탕진했고, 그러고도 모자라서 남의 돈을 빌려 썼다. 그러나 건강도 찾지 못했고 돈도 갚지 못했다. 결국 반신불수의 비참한 상태로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때 그는 불행했고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그가 남긴 불후의 음악인 할렐루야를 작곡한 곳은 바로 이 감옥이다. 소설가 O.헨리도 마찬가지다. 그는 은행원으로 근무할 때 부정 대출에 관련되어 감옥에 들어가야만 했다. 거기에서 그는 무료함과 고독을 견디는 방편으로 글을 썼다. 그것이 저 유명한 「마지막 잎새」다. 미국에서 네 번이나 대통령을 지낸 사람은 루즈벨트뿐이다. 그 역시 소아마비로 지체가 부자유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세계 초강대국의 영도자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헨델도, 헨리도, 루즈벨트도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감사했던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이기에 그들은 고통의 심연 속에서도 위대한 음악, 위대한 글, 위대한 업적을 건져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고통과 시련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가만히 귀기울일 일이다. 나직하나 분명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하나님의 소리를 귀담아 들을 일이다. 당신을 사랑하기에,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은 결코 주시지 않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49.고통 속의 감사
고난을 당해 보았기 때문에 드디어 감사할 줄 아는 귀한 형제 자매들을 봅니다. 너무나 돈이 궁색해서 나중에는 불과 단돈 몇 천원을 들고도 눈물로 감사하는 아름다운 사람이 된 모습을 저는 봅니다. 하늘처럼 보이던 남편이 졸지에 몰락하여 낭떠러지 아래로 처참하게 떨어진 모습을 보자마자 비로소 남편에 대한 진한 애정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을 하는 부인을 알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실패를 모르고 승승장구하던 형제가 난관에 부딪쳐 좌초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을 인정하는 겸손한 사람으로 바뀌는 모습을 봅니다. 이 세상의 것보다 더 영원한 것을 관심있게 생각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변모된 모습을 봅니다. “하나님, 제 생각이 무저진 그 폐허에 당신의 집을 잘 세우심을 찬양합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삶에서 마이너스란 절대로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지나온 삶에서 눈물을 흘리며 좌절을 맛보며 깊은 탄식도 자주 했지만 그것이 다 마이너스가 아닙니다. 그 모두가 부정적으로 보아야 할 실패작이 아닙니다. 당신이 울고 있는 그 자리에다 하나님이 자기 생각대로 지어놓은 멋진 맨션을 보십시오. 당신이 지으려던 집보다 훨씬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왜 절망을 해야 합니까? “나의 생각은 끝없이 어리석었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지혜로웠습니다. 주님의 생각대로 된 것을 감사합니다. 내 생각대로 되지 않은 것을 감사합니다.”어려운 고통 속에서라도 이렇게 감사하며 주님 앞에 회개의 눈물을 흘릴 수만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크신 축복을 우리 모두에게 안겨주실 것입니다.
50. 고통은 '보물의 창고'
떠돌이 땜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빈민 농촌에서 자란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열심히 책을 읽으며 꿈을 키워 존 밀턴과 함께 영국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라는 칭송을 받게 되었다. 그가 바로 〈천로역정〉의 작가 존 버니언(1628-1688)이다. 그는 인생이 꽃필 33세 때 종교재판에 의해 투옥돼 12년간 수감생활을 했다.
그러나 가장 고통스러운 기간에 가장 빛나는 문학의 업적을 이루었다. 〈천로역정〉은 이때 쓰여진 것이다.
그는 말한다. "그렇게 찾아다녔던 보물을 고통의 감옥 안에서 찾을 수 있었다."
51.고통을 보상하는 회개
1939년 평양 술실전문학교 강당에서 마펫(1864-1939) 목사 선교4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한국교회 초기선교에 있어 등불이었던 마펫 목사는 감회어린 표정으로 이런 답사를 했다.
"제 턱엔 깊은 상처가 있습니다. 어느날 저녁 예배인도차 교회에 가는데 돌멩이가 마구 날라와 제 턱을 쳐 큰 상처를 낸 것입니다. 평양 깡패들의 소행이었는데 바로 그 깡패 중엔 지금 저쪽에 앉아 있는 이기풍 목사도 있었습니다. 그가 회개하고 목사까지 되었으니 나는 상처가 났어도 기쁩니다." 장내는 박수소리로 떠나갈 듯했다.
52.고통을 아는 영혼
환란은 성장의 법칙이요 우리의 신앙은 이 세계의 폭풍우와 긴장 속에서 만들어진다.
뷔엔나의 어떤 유명한 음악 교사가 자기 문하에서 사사하는 제자 한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그 여자는 참으로 훌륭한 가수이다. 그러나 그 여자의 노래에는 무엇인지 모르게 한 가지 부족한 느낌이 있다. 인생은 지금까지 그 여자에게 너무 친절하였던 것 같다. 즉, 그녀의 노래에는 고통을 아는 영혼이 없다. 그러나 어느 날 무엇인가가 그 여자의 마음에 상처를 주기만 하면 그 여자는 구라파에서제일 가는 가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즉 "Broken heart"에서만 참다운 음악이나 예술이 창조된다는 뜻이다."
서양 격언에 "냇물에서 돌들을 치워 버리면 냇물은 노래를 잃어버린다는 말이 있다. 인생은 과연 마음대로 안되는 반대나 저항이나 방해물이 있어야 우리의 영혼 속에서 괴뇌를 통한 노래가 흘러 나온다.
환란이란 것은 물론 그 자체가 좋은 것은 아니지만, 이로써 연단을 받으면 마침내 우리의 인격 안에서 미를 창조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란을 선용하여 우리의 인격 건설의 자료로 삼아야 하겠다.
53. 고통을 선택하는 자
나치에 처형된 (1945) 본회퍼는 옥중서한에서 이렇게 말했다. "명령에 따라 고통받는 것은 자의로 고통받는 것보다 쉽다. 여럿이 함께 고통받는 것은 혼자 고통받는 것보다 쉽다. 육체적으로 고통받는 것이 정신적으로 받는 것보다 쉽다. 그런데 예수는 자의로 혼자서 육체와 정신의 고통을 받으셨다."
아서왕(King Arther)은 기사들이 일선에서 돌아오면 으레히 묻는 질문이 있었다. "그대는 희생의 흔적을 지니고 왔는가?" 전쟁에서 상처를 입고 돌아왔느냐는 질문이었다. 그 흔적이 있는 기사는 왕의 만찬에 동참했고 없으면 다시 일선으로 보냈다.
54.고통의 배후에는...
김준곤 목사님은 우리가 익히 알고 존경하는 분입니다. 그분이 당하신 고통에 비하면 저의 고통은 내놓기조차 부끄러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 목사님은 어린 시절에 동생이 불꽃놀이를 하다가 심한 화상을 입고 죽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동생이 벌목하는 현장에서 쓰러지는 나무에 치여 비명에 가는 슬픔을 겪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6.25 때는 그 누구보다도 처참한 경험을 했습니다. 가족은 공산당에게 학살당하고 자신은 스물세 번이나 그들에게 끌려가 구타당한 끝에 인민재판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구사일생이 아니라 백사일생으로 살아난 목숨이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몇 년 전에는 고등학교 교감으로 일하던 동생이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 후 사랑하던 딸마저 위암으로 부모의 곁을 떠나버렸습니다. 그의 아픈 심정을 어떻게 다 형언할 수 있겠습니까? 햇살뿐만 아니라 구름과 폭우가 있어야만 자연이 풍요로워지듯이 우리의 인생도 햇살만 창창하다고 해서 풍요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고통은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요, 선한 것이요, 보람된 것일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라도 고통을 비관하지 마세요. 당신이 당하는 고통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선하신 하나님이 당신에게 가장 좋은 것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55.고통의 섭리
고통에 관한 몇 가지 명상
-고통에는 반드시 뜻이 있다.
-전에는 몰랐으나 고통을 당한 뒤 비로소 자산의 모습을 보게 된다.
-고통당할 때는 스스로를 축소 지향적으로 여기지 말라.
-고통의 상황에 절망할 것이 아니라 고통 너머의 절대자를 의지하라.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하신다.
-고통의 때는 새로워질 수 있는 인생의 터닝 포인트이다.
-인간의 절망은 복된 섭리의 시작이다.
-고통의 때에 서로가 하나될 수 있다.
56.고통이 없는 곳
어떤 교인이 목사님과 상담을 나누면서 "제게는 너무 상처가 많아요. 왜 이러한 십자가를 져야 합니까? 이 어려운 시련과 문제가 전혀 없는 곳이 없겠습니까?" 하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때 목사님의 대답은 "상처도, 고통도 전혀없는 세계가 한 곳 있기는 있지요. 공동묘지로 가십시요. 상처도, 고통도 없는 곳은 바로 그곳 뿐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다.(No cross,no Crown) 입니다.
57.누가 목회자 사모(師母)의 고통을 알까
예나 지금이나 위인들 뒤에는 현모양처(賢母良妻)가 있었다는 것은 삼척동자(三尺童子)자라도 아는 것인데 오늘의 훌륭한 목회자들 뒤에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눈물어린 기도와 남들이 알지 못하는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사모(師母)의 협조가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옛말에 "비단 옷 입고 밤길 걷기라"는 말과 같이 아무리 많은 노력을 해도 알아주는 이도 없고 혼자서 만이 주를 바라보고 눈물 흘린 일들이 그 몇 번이던가 때로는 양식이 없어도 밥을 짓는 연극을 해야하고 속상한 일들이 많아도 내색하지 못하고 남몰래 혼자서 울어야하는 일들이 그 얼마나 많았던가? .
아무리 크고 성도의 수가 많은 교회에 살아도 사모의 입장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것은 교회라는 곳은 농촌이나 도시나 지역에 관계없고 크고 작음과도 차별 없이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사모가 하는 일은 같고 당하는 고통도 같은데 사람들이 생각하기는 큰 교회에서 시무(始務)하는 사모님은 얼마나 행복할까 그리고 성도들로부터 환영과 대접만 받는 것으로 알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일 수록 속된 표현으로 시집살이가 더 고통스럽다는 것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 눈치를 밖으로 나타내 보이지 못하고 속을 태우면서 목사인 남편도 몰래 참아내야 하는 것이 바로 사모들이 가는 길이다.
그래서 아내의 고통을 측면에서 지켜본 남편으로서 아니 목회자와 일반 성도의 입장에서 사모의 가는 길이 어렵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현재 목회를 하고 있는 사모님들과 앞으로 사모가 되려고 지망하시는 분들에게 참고가 되고 사모를 바라보는 성도들에게 사모가 가는 길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알리고자 하는 마음에서 "누가 목회자 사모의 고통을 알까?"라는 책을 내놓게 되었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곁에서 30년 이상을 목회자의 아내로서 자녀들의 어머니로서 성도들의 사모로서 묵묵히 참고 견디며 오늘의 이르기까지 나의 목회에 큰 힘이 되어준 아내와 출판을 맡아서 수고하신 성광문화사 대표이신 이 승하 장로님과 직원 모두에게 감사를 드린다.
58.소명감(召命感)없이 목회자 사모(師母)된 고통
결혼을 하기 전에 목회자 사모되겠다고 기도하고 목회자와 결혼하여 사모로 시작하는 여성들도 있고 결혼 전에는 꿈도 꾸지 아니하였던 사람이 결혼 후에 목회자 사모가 되신 분들도 있어 사모가 된 이유나 배경에는 여러 가지 사연들이 개개인마다 있을 줄로 아는데 문제는 사명감으로 시작하였는가 아니면 꿈 많은 처녀시절에 목회자 부인이 되면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아서 결혼의 상대를 목회자로 정했는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목회자 사모는 반드시 사명이 있어야 하고 그 사명에 의하여 사모가 되어야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참고 견디며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목회자 사모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큰 교회 시무 하시는 목회자들의 부인들을 보니 우선은 교인들이 사모님 우리 사모님 하면서 존경하는 것 같고 대접하는 것도 같아 저 정도면 목회자 부인이 되어 그 일을 해볼만하다고 생각하고 뛰어 들었는데 시집오기전의 생각과는 다르고 사모가 되기 전의 생각과는 너무나도 거리감이 있는데 그렇다고 계속 그 일을 하자니 자신이 없고 아니하자니 뜻대로 안되고 정말 그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 때는 사회에서 나도는 말 중에 사(師)자 들어가는 목사(牧師) 의사(醫師) 교사(敎師)들의 부인이 되고 싶어하는 일들도 있었는데 이는 존경받는 직인 줄 알았기 때문에 죽어도 사(師)자 들어가는 이들과 결혼하겠다고 했는데 막상 해놓고 보니 듣던 바와도 다르고 생각했던 바와도 너무나도 다르더라는 것이다.
그 중에 목사 부인이 되는 것이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미처 모르고 맹목적으로 목사부인 되어 사모노릇 해보았으면 하는 무지개 빛깔의 꿈만 가지고 쉽게 뛰어든 것이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렇게 후회막급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의 은사(恩師)인 고(故) 김성환 목사님의 말씀이 생각나는데 "자네들이 앞으로 목회 하려면은 먼저 사모가 소명의식(召命意識)이 투철한지 알기 위하여 고의적(故意的)이라도 개척교회나 농촌교회 아주 어려운 교회로 들어가서 3년 정도는 그곳에서 사모님들의 사명의식을 재확인하여 낙제점수에 이르거든 자네들이 먼저 목회를 포기하라"고하였다 .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목회 전반에 사모가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인데 사명감도 없이 목회자 사모가 좋은 것 같아서 시집을 와보니 시집오기 전과는 너무나도 판이(判異)하게 다르기 때문에 그 때부터 이럴 줄 알았더라면 내가 목회자 사모가 되지 아니하였을 터인데 이럴 줄 모르고 내가 목회자한테 시집온 것이 잘못이라고 하면서 매사에 불평하고 원망하면서 사는 그 고통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렇다고 이혼을 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고 목회자 사모로서 일을 하자니 그것도 죽겠고 정말 어찌할 수 없는 처지에서 억지로 끌려가는 사모의 생활이 날로 괴롭고 죽고싶은 심정이라고 표현해야 맞을 것이다.
이 지경까지 이른 사모들은 생각을 바꾸는 길과 많은 기도를 해서라도 은혜를 받아 목회자가 가는 길이 얼마나 귀하고 영광스러운가를 깨닫는 것이 급선문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비장한 각오와 결심을 가져야 하는데 목회자 사모가 된 것은 의사(醫師)사모들 같이 부유한 생활을 위해서도 아니고 교사(敎師)사모처럼 안정된 생활과 대접받는 생활이 아니며 목사(牧師)생활은 남을 위하여 희생하고 주께서 원하시면 목숨까지 바쳐야할 순교정신(殉敎精神)없이는 흉내도 낼 수 없는 고귀한 삶이라는 것을 깨닫지 않고는 할 수 없음을 알도록 먼저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 해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사모(師母)가 가는 길이 그렇게 어려운 줄도 모르고 철없이 덤볐다가 알고 보니 너무나도 어렵기에 남편에게 말하기를 우리 이제 다른 일해서 먹고살자고 조르고 남편을 괴롭게 하여 남편까지도 그의 사명을 포기하게 만들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별 수 없이 자신이 은혜 받아 목회 하는 남편을 내조해야하겠다는 뜻을 품고 기도하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필자도 딸이 하나있었는데 나이가 들어 결혼을 시키려고 하는데 혼처가 여기저기에서 나타나는 중에 목사후보생들도 있었지만 시집갈 본인이 사모할 자신이 없다고 하면서 사모의 길을 거절하였는데 이는 자신이 그 길을 가겠다는 소명감(召命感)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그러므로 결혼 이전에 사모의 길을 포기하였다면 문제는 다르지만 결혼하여 남편이 목회를 하고 있는데 목회자의 길이 힘들고 어렵다고 해서 사모가 먼저 목회를 그만두자고 하는 심정은 이해하지만 고집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이 글을 대하는 모든 사람들 중에 혹시 호기심이나 다른 뜻에서 무작정 사모가 되겠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신다면 또 한번 생각하고 심중하게 결정해야 할 것이고 한번 결정해서 그 길로 들어섰으면 배가 고파도 해야하고 괴로워도 해야하며 힘들어도 해야한다.
이는 사명이기 때문이고 본인은 사명이 아니라고 해도 남편이 사명자로 목회 길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물론 이해가 되는 것은 무엇이라도 자신이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은 재미가 있거나 없거나 상관없이 하지만 하기 싫어서 하는 일은 재미없으면 그만두는 것이 당연한데 목회자의 사모는 재미를 생각할 성질의 것은 아니고 죽음을 각오할 소명의식(召命意識)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필자가 아는 분도 목회자의 사모로서는 소명의식이 결려되어 결국은 남편과 헤어지는 불행을 초래하였지만 목사님은 다시 결혼하여 목회를 잘하고 계신다.
소명감 없이 뛰어든 사모는 남들이 생각하는 것 같이 즐거운 생활도 아니고 기쁘고 보람된 생활도 아니고 언제 어떻게 이 일을 벗어 던질까 고민하며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고통을 누가 알 수 있을까?
그러므로 결혼하기 전에 사명감이 있어서 사모의 길을 택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아니하고 호기심 내지 모험심으로 그 길에 뛰어들었다면 이는 자신도 망치고 목회자인 남편까지 망치는 일임을 기억하고 쉽게 사모되지 아니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일 것이다.
목회자나 그와 결혼할 여인도 소명감 없이 뛰어들지 말고 결혼하여 살던 분들이 목회 길로 나가고자 할 때는 부부간에 충분하게 의논하고 기도한 후에 합의가 되면 몰라도 어느 한편이라도 극렬(極烈)하게 반대하면 누구라도 목회 길로 들어서는 것은 삼가 하는 것이 좋을 것이고 장래에 후회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예방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59.가정(家庭)에서 주부(主婦)로서의 고통
주부(主婦)하면 그 집안의 주인(主人)의 아내를 말하고 그 주인의 아내는 그 집안 일을 살필 책임이 있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목회자의 아내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항상 사모(師母)라는 의식 때문에 주부이지만 주부답게 처신을 하지 못할 때가 적지 않다는 면에서 문제가 된다.
보통 일반가정의 주부 같으면 돈만 있으면 입고 싶은 옷도 가지가지 골라서 마음대로 해 입을 수도 있고 색상이라든지 모양이라든지 어떤 것이라도 상관없이 사서 입을 수도 있지만 목사의 사모라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자유롭게 무엇을 할 수 있는 권리는 박탈(剝奪) 및 제한(制限)과 간섭을 받는데 이는 간단한 문제 같지만 자존심(自尊心)과 관계가 있고 구매욕구나 소유욕에 침해를 받는 생활이니 그 얼마나 심적인 고통이 따르겠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의 의복과 음식 및 교육까지도 책임지고 맡아서 처리해야할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마저도 마음대로 되어지지 아니하고 또 마음대로 할 수도 없는 형편이니 기분이 많이 상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음식의 량(良)과 질(質)에 있어서도 가족들의 건강에 지장 없도록 해야하는 것은 알고 있지만 환경은 그것을 허락지도 아니하고 그럴 형편도 못될 때에 주부로서 받는 정신적인 고통은 이만 저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모된 것이 잘했는지 잘못했는지는 좀 두고 보아야 할 일이지만 우선 속이 상하는 고통은 극복하기 힘들 때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목사인 남편이 자상하게 위로하며 용기를 주는 것도 아니고 식사하기 바쁘게 교회로 가고 아이들의 교육문제나 가정생활 전반에 걸쳐 세심하게 보탬이 되도록 돕는 일도 없지 여러 가지 면으로 답답할 때가 너무 많아 서운한 감정을 가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물론 모든 목회자들이 한결 같이 그렇게 부정적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가 그렇다고 보아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리하여 목회에 지친 남편을 위로하고 편히 쉬도록 해주어야 되는 줄은 알지만 때로는 짜증을 내면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더러 해야만 기분이 전환될 때가 더러 있는데 이런 속도 모르고 남편은 나름대로 서운하다는 표시를 노골적으로 할 때는 정말 더욱 불만만 쌓이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때는 남편이 정도에 지나치게 손님을 많이 모시고 올 때는 정말 속상하고 너무나도 고통스러울 때가 많은데 그것도 가정 생활이 넉넉해서 경제적인 여유도 있으면 문제는 간단하다 할 수 있지만 경제가 어렵다보니 더욱 짜증이 날 수 밖에 없다.
생각해 보자 손님 하면 가정 식구들처럼 있는 대로 간단하게 식사해도 되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손님이 오셨는데 주부로서는 반찬이나 그 외에 신경 쓸 일이 너무나도 많이 생겨서 남편에게 노골적으로 투덜대면 남편은 그 어려운 속도 모르고 왜 그렇게 신경을 써야하는가 친한 친구들인데 그들에게는 있는 대로 대접을 해도 흉허물이 없고 이해할 수 있는 친구들인데 너무하지 아니하느냐는 식으로 도리어 큰 소리를 지르고 화를 벌컥 내는 일을 두고 적반하장(賊反荷杖)도 이 정도면 국제 수준급이고 아내에 심정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생각에서 부엌에 나가 혼자서 눈물을 흘리는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지만 이 고통을 누가 알아 주는가 아무도 알아주지 아니하여 속으로 불평하고 시집 잘못 온 것 같아 친정을 생각하고 되돌아 갈 수만 있으면 훌훌 털어 버리고 갔으면 하는 마음 없지는 아니하였다고 고백함이 진실일 것이다.
목사 사모 이전에 평범한 가정의 주부로서 소박한 꿈을 이루며 아기자기하게 행복하게 살고 싶은 심정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남편과 같이 외국 나들이도 하고 싶고 국내 여행도 하고 싶고 외식도 하고 싶지만 목회자 가정이라는 테두리에서는 쉽게 이루어질 형편들이 못된다는 점에서 일반 가정의 주부들보다 어려운 점이 많은 것에 남달리 심적 고통이 심한 것이다.
목사인 남편이 이런 점을 알아서 가정의 주부가 바라는 바를 다는 아니라고 해도 그 중에 몇 가지만이라도 알아서 해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며 모든 목사들의 부인도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가하고 물어보고 싶을 때가 많지만 그래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아니하여 묵묵히 참을 때가 많지만 그래도 속상한 것은 사실이라는 점을 공개하고 전국에 있는 모든 목회자들은 아내인 사모에게 목회자 자신들처럼 희생만 요구하지 말고 가장으로서 주부에게 대한 대접을 해주었으면 싶은 마음이 솔직한 심정이다.
아무리 사모라는 직책은 있지만 여자이기 때문에 여자가 바라는 바를 모두 내어버리고 목회자들처럼 전적으로 목회에만 매달리 수 없고 사모 이전에 가정의 주부의 책임을 외면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그 말이다.
목사님은 교회에서 목회자로서의 사명이 중요한 것 같이 아내는 가정에서 주부로서의 책임과 사명을 다할 수 있도록 모든 배려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가정의 주부를 목회자와 같이 취급하는 목사도 무리고 교회도 지나친 요구라 이는 반드시 시정되어야할 문제이고 목회자의 아내로서 가정의 주부로서 주부역할을 제대로 감당하게 하는 것이 목회자 내조를 제대로 하는 것으로 안다.
가정에서 목회자의 아내라 하고 가정의 주부의 사명을 잊고 자신이 목회자처럼 일선에 서서 목사보다 자신이 앞장서버리면 이는 목회도 가정도 제대로 다스릴 수 없어 목회를 실패할 확률이 높다는 것을 알고 사모를 주부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게 모든 배려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사모도 주부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다보니 어쩌다가 사택에 들어와서 자기들 집에 없는 가전제품이나 생활 용품이 있으면 목회자의 집에는 검소한 면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장편의 설교를 하면서 TV, 냉장고 생활도구가 많으면 본이 되지 아니한다고 하면서 속을 긁어 놓으면 그 마음의 고통은 오래가는데 꼭 그렇게 말해야 할 성질의 것인가?
사모도 주부라 생활에 필요한 도구도 장만하고 싶고 사모 이전에 여자이기에 이것저것을 갖추어 놓고 살아보고 싶은 것은 여자라면 누구라도 동일한 마음일 것이다.
그러므로 요즘 같이 문명이 발달하고 도시 농촌 할 것 없이 문명의 혜택을 보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가 목회자 가정도 최첨단의 유행을 따르지 아니하거든 성도들이 이해를 해야하는데 TV. 및 냉장고는 사치품이 아니고 생활 필수품인데 그런 것까지 간섭을 해서 사모의 마음을 괴롭게 해서야 될 말인가 그와 같은 것들이 없으면 자신들이 쓰던 헌 것이라도 갖다 드리고 쓰시라고 해도 무엇할 텐데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서 도리어 괴롭혀서야 되겠는가 그리고 그와 같은 분들은 수시로 사택에 들려서 살림에 대한 간섭을 하는데 이제는 그와 같은 간섭은 시기적으로 시대에 뒤떨어진 말과 행동이 아닌가?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렇게 간섭하시는 분들의 집에 가보면 최고급 생필품들이 방마다 가득히 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자기들은 그렇게 해놓고 살아도 되지만 목회자 가정만은 옛날 보릿고개 시절과 같은 생활을 해야 교인들에게 본이 된다는 논리는 사모의 마음을 무척이나 아프게 하고 괴롭히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오늘의 교회도 허영과 사치와 생활필수품은 구분할 줄 알아야 할 것이고 정도 이상으로 허영과 사치가 심할 때는 교회 덕을 위하여 조심스럽게 충고해주는 것이 옳다고 본다.
그래서 사모 노릇하기가 그렇게 어렵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고 다시 비장한 각오로 그 일을 감당할 마음에 다짐을 새롭게 하고 교회는 사모도 주부라는 점을 인정하여 아이도 낳고 싶고 곱게 키우고 싶으며 이것저것을 하면서 행복한 가정을 꾸려보고 싶은 생각도 있음을 인정하고 너그럽게 그럴 수 있겠다는 이해심으로 곱게 보아야 피차 은혜로울 것이다.
60.자녀(子女)들의 어머니로서의 고통
목사이기 전에 한 가정의 가장이고 사모이기 전에 한 가정의 아내와 어머니인데 목회와 자녀를 어떻게 조화(調和)를 이룩해 나가야 하는지를 살펴보고 지나가야 하는데 단편적으로만 보면 가정과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여야 되는 것 같이 성경은 힌트를 주고 있는데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하였다(마4:18-22).
이는 주님의 종이 되는 조건으로 직업과 가족을 버리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말씀이 기록되었고 그렇게 하는 자들에게는 상급이 많은 것으로 알도록 기록을 하였는데 "베드로가 여짜와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하였다(막10:27-30).
주의 일하려고 가족과 전토 및 직장을 모두 버린 자는 백 배로 받고 라는 말씀은 그렇게 하면 틀림없이 복을 받는 것으로 이해하도록 했는데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단편적(斷片的)으로만 보기는 문제가 있다고 보여지는 것이 바울사도는 말하기를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하였다(딤전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한 말은 '자기 친족'(톤 이디온)은 구체적인 범주를 정하기는 어려우나 '자기 가족'(오이케이온)은 '직계 가족'을 의미한다고 하였고(Guthrie). '돌아보지'의 헬라어 '프로노에이'는 문자적으로 '미리 생각하다', '준비하다', '공급하다'의 뜻을 갖는다.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고 한 말은 혹자는 기독교의 사랑은 모든 사람들을 향한 것인데 자기의 직계가족조차 돌보지 아니하는 자는 불신자보다 못한 자로서 전혀 복음에 참여할 수 없다는 뜻으로 본 구절을 해석한다(Scott).
또한 여기에서의 '믿음'은 개인의 주관적 믿음이 아니라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고백되는 신앙 고백을 일컫는 것으로 해석하여 '믿음을 배반한 것'을 '교회의 가르침을 저버린 것'으로 보기도 한다(Lenski).
결론적으로 본 구절은 일반성도 전체를 향한 교훈으로 볼 수 있으며 그들의 신앙 고백이 어떻든 간에 가족을 돌보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에 봉사할 만한 기본적인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을 뿐더러, 인간의 원초적인 책무를 무시하는 자이므로 정죄받아 마땅하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바울사도는 주의 종들에게 하는 말이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하였다(딤전3:4-5).
이는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 한 말은 감독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기 가정의 훌륭한 가장(家長)이 되어 자녀들을 복종시켜야 한다. '다스려'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이스타메논'은 '앞에 서다' 또는 '앞에 두다'를 뜻하는 동사 '프로이스테미'의 현재 분사로 '앞서서 행하는'이란 의미를 지닌다.
감독이 모든 일에 자녀들의 모범이 될 때에 자녀들은 신뢰를 가지고 부모를 공경하며 예의 범절을 지킬 수 있다.
이는 또한 감독이 자녀들을 신앙으로 양육하는데 있어서 그 품위를 잃지 않고 자녀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것에 힘쓰는 것을 의미하고 '단정함'(셈노테토스)은 '방탕'과 반대되는 말로서 행동이 정숙하고 기품과 규모가 있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다(Calvin).
그리고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께 교회를 돌아보리요) 한 말은 본 절에 괄호가 있는 것은 이 구절이 앞 절을 설명하는 삽입구임을 암시하는데 가정은 사회 집단의 최소단위인데 이 최소 단위를 잘 다스릴 수 없는 자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잘 돌볼 수 없다.
한편 '교회'의 헬라어 '엑클레시아스'는 '엑칼레오'('불러낸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로 본래 '정규로 소집된 시민의 정치적 집회'를 의미하였으나 점차 이스라엘의 종교적 집회에도 사용되었고 나중에는 '그리스도인들의 집단'을 가리키게 되었다.
따라서 이는 건물을 가리키기보다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가리키고 교회는 가정과 유사점이 많아 복음의 사역자에 대한 권위가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권위와 비슷하고 그리스도의 피로 모인 형제와 자매가 있는 것도 그렇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는 큰 가정이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Barnes).
사모는 가정에서 어머니로서의 역할이 매우 큰데 목회자의 사모라고 해서 가정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적당히 해도 되는지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것은 가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 하였으니 가정에 자녀들의 어머니로서 자녀들을 돌아보고 그들이 남편의 목회 하는데 지장 없도록 최선의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자녀들이 어떤 사업하는 가정의 아이들처럼 용돈을 풍성하게 쓰는 것도 아니고 먹는 것과 입는 것을 남달리 잘 먹이고 잘 입히는 것도 아니라 항상 아이들의 불만이 많은데다가 많은 사람들이 아이들에게 주문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걸맞지 아니하게 주문을 하는데 이들이 어른답게 살아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한 수 더 떠 목회자 집의 아이들을 목회자와 같은 언행을 요구하고 있으니 여기서부터 사모로서는 큰 심적인 부담을 안고 아이들만 보면 너희는 목회자의 자녀들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아버지 어머니 욕먹지 않게 해달라는 주문을 기계적으로 계속하게 되는데 이에 아이들이 반발을 하는데 심하면 정반대로 역효과가 나타나 알게 모르게 문제를 일으키는데 이는 반항하고 있음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는데 이럴 때 서모의 고통은 이만 저만이 아니고 괴로움을 누구에게 털어놓을 수 없고 혼자 눈물 흘리며 목회자의 부인이 되어 이렇게 애들에게 실행성도 없는 무리한 부탁을 해서 결과적으로 효과는 전무하고 도리어 아이들이 반항하여 자신의 속을 태우니 그 고통을 누구에게 털어놓고 속시원하게 말을 할 수도 없으니 그 고통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아무리 사모라고 하지만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나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어보고 싶은 것은 보통 집의 아이들의 어머니 마음이나 마찬가지인데 교회에서 주문하는 것이 아이들로서는 감당키 어려운 것들이라 자녀의 어머니로서는 너무나도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아이들을 위하여 친정에서 옷이라도 사서 주면 받아다가 입히면 교회에서는 목회자의 생활도 넉넉한가봐 저렇게 좋고 고급스러운 옷을 사다가 아이들에게 입히니 하고 여기 저지서 말이 들려온다.
그러면 속도 모르는 사람들이 무심코 던진 말이지만 사모님의 마음에는 못이 되어 깊숙하게 박히는 것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다.
목회자이지만 가정은 일반성도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고 아이들의 성격이나 행동도 아이들의 범위를 넘지 못하고 일반 아이들과 꼭 같은데 목회자 집의 자녀라는 이유하나만으로 기를 펴지 못하고 숨도 크게 쉬지 못하는 숨통 막히는 일들을 당할 때는 정말 고통스러운 것 말로 다할 수 없다.
교회는 모두가 괴롭히는 것이 아니고 몇 사람이 괴롭히는데 상처는 여러 사람이 괴롭게 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이 상처의 크기는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아이들은 어른스럽지 못하고 아이들 본능대로 말하고 행동하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텔레비전이 많이 보급되지 못하여 교역자들은 가난하여 그와 같은 것을 구입할 수 없어 가정에 텔레비전 한 대도 없는 형편이었는데 그래도 성도들 가정에는 그와 같은 것들을 구해놓고 보고 있으니 철없는 목회자 자녀들이 방영시간만 되면 성도들의 눈치고 무엇이고 볼 줄도 모르고 깨끗하게 청소해놓은 방과 마루에 맨발로 뛰어 놀다가 텔레비전을 구경하겠다고 방으로 마루로 뛰어 다니다보니 집사님 아니라 권사님이라고 해도 자연히 그로 인하여 문제가 발생되어 말이 밖으로 나돌게 되고 그 말이 사모의 귀에까지 들리니 그 마음의 고통은 상상할 수 없는 정도라 아이들의 발을 묶어놓는 방법은 매를 때린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꾸지람을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며 한 가지 방법이 있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새 것이 아니라고 해도 좋으니 중고품이라도 텔레비전 한 대를 구해놓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생활도 어려운 가운데서 화면도 잘 나오지도 아니하는 흑백 텔레비전 12인치 한 대를 중고품 상회에서 구입하여 들여다 놓으니 아이들은 좋다고 깡충깡충 춤을 추면서 성도들 가정에 가지 않는데 문제가 또 발생하는 것은 칼라TV가 새로 나오니 아이들은 흑백은 보지 아니하고 컬러 텔레비전을 보러 다니는데 이전과 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으니 사모의 마음은 아프다 못하여 쓰린 것을 느끼며 아무리 아이들을 타일러도 막무가내인데 무엇으로 해결할 방법이 없어 전파상을 하는 타 교회 장로님에게 부탁하여 월부로 컬러 텔레비전 한 대를 들여놓았더니 그 때부터는 성도들 가정에 무례하게 드나들지 아니하여 문제가 해결되었는가 하였더니 이번에는 그 일로 인하여 어느 분이 장로님에게 찾아가서 목사가 먹고살기가 넉넉한 것 같은데 생활비를 낮추라는 주문을 해서 문제가 된 것인데 이쯤 되고 보니 사모의 마음은 갈래갈래 찢어지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목회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자녀를 양육하는 것은 누구나 대동소이(大同小異)할 텐데 그렇게 이해심이 없는가 하고 섭섭하게 생각할 때가 없었다는 것은 거짓말이고 서운함을 금할 길 없었으나 그렇다고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일이고 목회자 사모가 되어 이와 같은 일을 당한다고 생각하니 목사와 같이 사명감도 없고 책임감도 없는 평신도에 가까운 취급을 받는 정(情) 많은 순수한 자녀들의 어머니로서는 심적 고통(心的苦痛)이 이만 저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도 사모를 정이 많은 자녀들의 어머니라는 점을 이해하고 그럴 수 있겠다 라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보아 넘겨 사모의 마음에 상처를 내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61.한 남편(男便)의 아내로서의 고통
사모이전에 한 남편의 아내로서 내조할 책임이 있는데 아내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기도 어려운데 사모역할까지 감당한다는 것은 더욱 벅찬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일이라 옛말과 같이 "들 토끼 잡으려고 하다가 집토끼를 놓인다"는 말이 있는데 아내 역할도 제대로 못하고 사모의 역할은 제대로 하겠느냐는 것이다.
바울사도는 기록하기를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하였다(고전7:3-4).
아내나 남편은 피차에 그들의 의무를 다해야 할 것을 의무를 다하고 하는데 '의무'의 헬라어 '오페일렌'은 '빚', '채무'를 뜻하며 본 절에서는 부부가 서로에게 져야 할 '의무', 특히 성생활에서의 의무를 뜻한다.
그리고 '다하고'의 헬라어 '아포디도토'('다하라')는 '아포디도미'의 명령형으로 단순한 권고가 아니라 강제적인 명령으로서 충실한 책임 수행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당시의 고린도 교인들이 올바른 부부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서로에 대한 무관심과 비도덕적인 음행을 자행함으로 결혼의 고귀한 가치를 망각한 자들이 많았음을 시사한다.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한 말은 의무의 이행은 남편과 아내 각자에게 요구되는 것으로 제시하는데 부부는 상호 책임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에 자기 몸에 대한 자기 주장을 하지 않고 배우자와의 합당한 관계 속에서 정상적인 성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부는 자신의 몸을 전적으로 자기 의사에 따라 사용할 수 없고 순결(純潔)한 결혼 생활은 부부의 평등한 의무가 항상 행해질 때 유지될 수 있는 것이며 부부의 권리도 그 의무 속에서 동등하고 상호적으로 요구될 수 있을 것이다.
아내는 남편을 위하여 모든 면에서 돕는 것이 의무인데 남편을 제대로 돕지 못하는 때가 더러 있는데 몸이 중한 병이 걸려서 아내의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가사도 제대로 돌아보지 못하고 목회자이면서 남편이 때로는 빨래도 하고 밥도 짓고 아이들 수발도 들어 줄 때가 있는데 그 광경을 지켜보는 아내의 심적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남편도 목사이기 전에 건장한 남자라는 점에서 생각해보면 때로는 성적욕구도 참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러울 때가 있을 것을 생각해보면 가슴이 메어지도록 아프고 미안한 감을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목사의 아내였다는 책을 저술한 분은 말하기를 "자기는 건강하여 남편의 성적요구를 다 받아주는데도 남편이 성적기능이 강해서 혹시라도 사고가 날까하여 항상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는 차원에서 자기가 먼저 남편을 요구하는 형편이라"고 하였는데 그와 같은 분을 생각한다면 남편에게 죄를 짓는 죄책감이 들어 더욱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남편이 부부 동반하여 참석할 자리가 있을 때면 더욱 미안하고 고통스러운 마음을 금할 길 없어 전전긍긍(戰戰兢兢)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라는 것이다.
필자가 아는 목사님은 결혼하여 8년간 아내 병간호하느라고 많은 고통을 당했지만 그래도 싫은 기색 보이지 아니하고 아내를 극진히 간호하였는데 수고한 보람도 없이 끝내는 남편을 남겨놓고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남편은 아내를 먼저 천국으로 보낸 서운한 감도 금할 수 없지만 병든 아내가 죽을 때까지 남편과 자식들에게 의무를 다하지 못한 심적 고통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생각하고 더욱 가슴 아파하면서 여보 왜 나만 남겨놓고 먼저 가느냐고 눈물 흘리며 임종을 지켜보는 남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미안해요 여보 하면서 고요히 눈을 감는 아내를 잊을 수 없다.
그뿐 만은 아니고 남편의 아내라는 것 때문에 목사인 남편이 혈기를 내고 때로는 주먹질을 해도 사모의 위치에서 함께 싸울 수도 없고 참고 견디자니 그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때는 성도들이 그와 같은 사실을 알까하여 마음 조아리며 우는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목사라고 해도 수양되지 못하고 옛 성질이 살아 있으면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어 믿음이 좋은 사모님들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까지도 참으려고 갖은 애를 쓰는 것이다.
필자가 본 목사 중에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데 다름 아니고 그가 어느 교회 집회 강사로 와서 강론시간에 간증 삼아 하는 말인데 "나는 목사이지만 아내와 종종 싸우는데 때로는 주일 오전 예배시간 다되도록 싸우다가 예배시간 5분 정도 남겨놓고 기도하기를 "하나님 저희들은 이만 싸움을 그치고 예배 마치고 다시 싸우겠습니다"하고 강단에 말씀 전하러 올라간다는 말인데 필자는 그 당시 왜 저분께서 저런 말씀을 하시나 하고 궁금해하면서도 덕이 아니 되는 저런 말은 하지 아니하였으면 좋겠구나 그 이유는 목사의 인격이 저하되기 때문이고 성도들이 배워서는 안될 일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수양되지 못한 비인격적인 남편과 함께 산다는 자체가 장래성이 없고 살아갈수록 더욱 고통스럽지 아니하겠나 하는 생각을 하면 아내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듯이 아픔을 느끼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믿고 안 믿는 것을 떠나서 교양 있는 아내들은 남편이 하는 일을 심하게 무례할 정도로 대항하지 아니하고 할 수만 있으면 그 자리를 피하여 가정을 조용하게 만들고 싶어하고 자식들에게 그와 같은 것을 보이지 아니하려고 속을 태우는데 사람이 바싹바싹 말라간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성질이 나쁜 사람은 큰 은혜를 체험하기 전에는 본색이 들어 날 때가 많은데 그 때는 물불을 가리지 아니하고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기 때문에 자존심이 상하고 이웃이 부끄러워서 아무 말도 못하고 그렇다고 당장 그만 둘 처지도 아니라 그래도 아내노릇을 해야하기 때문에 더욱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한 남편의 아내노릇을 제대로 하기란 너무나도 어렵고 고통스러운 것은 포기하고 싶어도 쉽게 포기할 성질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살기도 싫증나니 죽을 맛이라 더욱 괴롭다는 것이다.
남편 된 목회자들은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아내를 사랑하여 목회 하면서 고통을 당하는 것도 모자라 남편이 더욱 고통스럽게 한다는 것은 남편으로서 자격을 의심할 수밖에 없음을 기억하고 이제라도 사모님에게 최선을 다하여 위로하는 일에 인색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보통 여인들은 아내 노릇하기도 힘이 든다고 약간만 고통을 당해도 이혼한다고 야단법석을 떠는데 목회자 사모는 아내 노릇도 해야지 대중을 상대하는 사모노릇도 해야지 이중역 할을 하자니 얼마나 힘들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자기들의 사명을 다하기도 벅차지만 가정의 주부요 남편의 아내이며 자녀들의 어머니로서 최선을 다하는 사모님을 위하여 시간을 내가지고 위로하고 쌓인 스트레스(stress)를 확 풀어주는 가정목회도 목회계획에 반드시 넣고 실천해야 목회다운 목회를 한다고 볼 수 있다.
62.개척교회(開拓敎會)목회자 사모의 고통
주께서 명령하시기를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하였다( 막16:15-16).
그리하여 주의 은혜가운데 목회자로 부름은 받았지만 기성교회는 가지 못하고 개척을 시작하였는데 처음에는 큰 건물도 얻지 못하고 20평 내지 30평짜리 지하건물을 월세로 얻어 예배 실 및 사택을 꾸며 아이들과 지하(地下)에서 생활하면서 하루하루를 사는데 인간적으로 볼 때는 너무 초라하고 그 고통은 생각보다 훨씬 더하여 강대상 앞에서 엎드려 하나님 앞에 울면서 기도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고 생활비도 모자라서 굶는 날이 먹는 날보다 많은 때가 비일비재(非一非再)하여 어른들은 그래도 참고 견디겠는데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들이 굶어서 어머니 배고파요 할 때는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느낄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알 수 없다.
같은 목회인데도 큰 교회에서 시무(始務)하시는 목사님들은 그래도 생활비를 넉넉하게 받아 아이들 먹이고 가르치는데 조금도 불편함이 없는 넉넉한 모습을 볼 때는 자신들의 처지가 더욱 서글퍼지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라 아이들을 끌어안고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며 울어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말이 쉬워 개척이지 해보지 아니한 사람들은 그 어려움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하고 있는 말을 무슨 소리하느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더욱 기막힌 것은 성도들이 한 두 명 들어왔다가도 교회 모습을 보고 그 형편을 보고는 그 다음부터는 다시 오지 아니하는 것인데 그 이유는 개척에 동참하겠다는 정신이 결여되어 손해보는 예수는 믿지 아니하겠다는 계산인데 큰 교회 나가면 뒷좌석에 가만히 앉았다가 가면 누가 말하는 사람도 없고 편하다는 것이다.
오늘의 큰 교회들도 처음에는 모두가 개척으로 시작하여 오늘에 대형교회를 이룩했는데 그들은 그렇지 아니한 것 같이 개척교회를 우습게 아는 버릇은 매우 잘못되었다는 것이고 교회를 출입하는 성도들도 큰 교회에 출석하는 것을 무슨 자랑인 것 같이 생각하고 개척교회를 보는 눈이 곱지만은 아니한데 하나님 앞에서 볼 때는 그렇지 아니할 줄로 안다.
그래서 같은 기독교인들이지만 개척하는 목회자 가족들은 이방인 취급하는데 그 이유는 자신들에게 폐를 끼칠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럴 때마다 너무나도 속상해서 견딜 수 없을 때가 수 없이 많았지만 그러나 주님의 종으로서 어려운 일을 시작했다는 것 외에는 죄가 없다는 점에서 하나님께 위로를 받으며 욥기서의 말씀을 기억하고 위로를 받을 때가 있는데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 하리라"하신 말씀인데(욥8:7) 지금은 이렇게 굶주리고 헐벗고 멸시와 천대를 받지만 나중에는 좋은 날이 올 줄로 믿고 위로를 받는데 더욱 위로와 용기를 주시는 말씀은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광활한 곳에 세우셨도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내게 어찌할꼬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여호와께 피함이 사람을 신뢰함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함이 방백들을 신뢰함보다 낫도다"하였다(시118:5-9).
그러나 목회자인 남편이 힘을 잃고 축 늘어진 모습을 보는 아내인 사모로서는 더욱 가슴이 아파 견딜 수 없어 그를 붙들고 울어 본적이 한 두 번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독교 초창기에 개척하는 분들은 그래도 보람을 느끼고 일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들이 개척교회에 대하여 좋은 인상을 가지고 도움도 주고 협력도 했는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서 신학교에서 주의 종들은 많이 배출되고 교회들은 그들을 다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수요는 적은데 과잉 공급이라고 하면 이해가 빠른 것 같다.
그래서 너도나도 개척을 시작하다보니 부작용도 적지 않게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어떤 전도사님은 개척을 시작할 때는 큰 뜻을 품고 시작하였는데 뜻과 같이 결과가 나타나지 아니하여 건물 세를 정리하여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 경우도 발생하고 또한 개척은 도저히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후임자들과 돈 거래를 하여 교회를 물려주고 떠나가서 그것이 말썽이 되며 그 외에도 좋지 못한 일들이 여기저기서 계속 터지니 순수한 마음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자녀들까지 희생시키면서 해보겠다고 노력하는 참신한 교역자들까지도 직접적인 면으로 간접적인 면으로 피해를 보게되는데 개척교회 하는 목회자들을 위로대신에 따가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그 시선에 냉기가 돌고 기독교 냄새는 전혀 맡을 수 없고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그들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거리에 다니다보면 수많은 자동차들이 굴러다니는데 한 두 대가 사고를 낸다고 해서 모든 차들을 사고 내는 차로 보는 것은 잘못인 것처럼 개척하는 모든 종들을 사고 내고 도망간 그들과 같이 취급 내지 그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고 처음부터 경계하는 태도는 개척하는 순수한 주의 종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서글프고 어떻게 생각하면 주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밥벌이를 위하여 한 수단으로 개척하는 기분이 들 때는 더욱 고통스럽다.
그러므로 전체 개척교회 하는 자들을 위해서는 모두가 조심하여 말썽의 소지가 생기지 않도록 해야 전체적인 이미지가 좋을 텐데 몇 분들의 불미스러운 일들로 인하여 전체가 욕을 먹을 뿐만 아니고 모든 사람들이 고운 눈으로 보지 않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그렇지 아니하여도 아이들을 지하에서 재우니까 습기가 차서 얼굴들이 부어오르고 색깔이 누렇게 변하는 모습을 보면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느끼는데 거기다가 개척교회가 어떻고 하는 말을 듣는 순간은 인간인지라 화가 나서 견딜 수 없고 울고만 싶은 심정이다.
때로는 비가 오면 물이 차서 습기는 많아지고 공기는 탁해지며 호흡이 곤란해지는 것을 느낄 때로는 주의일 하지 아니하면 못 먹고사는가 하고 남편에게 가슴아픈 말도 더러 하고 불평도 하지만 그렇다고 남편이 사명이 있어서 하는 일인데 당장 그만두는 일도 아니라 참고 견디며 주 앞에 두 손 모아 기도 드리지만 눈물이 앞을 가리고 목이 매여 기도를 드리지 못하고 하나님 왜 저는 이런 고통을 해야 합니까 아이들도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잘 먹이지도 못하여 얼굴이 부어오르고 제대로 입히지 못하여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도록 하셔야 합니까 하고 해서는 안될 기도를 드리기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그런 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도와는 주지 못하면서 도리어 가슴에 못을 박는 일들을 하는 것을 볼 때는 목회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하자고 할까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올 때가 많지만 그래도 그럴 수 없어 참고 견디며 사는 것이 개척교회에서 목회 하는 사모님들이 당하는 고통이다.
이와 같은 사정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아시고 도우시지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고 제대로 돕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낙심하다가도 자신감이 넘치는 이유는 주께서 내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니 언젠가는 주님께서 영광 받으실 큰 교회로 성장할 것을 믿으며 구약의 요셉을 생각하고 목회에 큰 힘을 얻는데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하였다 (창39:5).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라고 한 말은 마치 야곱으로 인해 라반의 집이 복 받은 것과 같이(창30:27). 이것은 일찍이 아브라함과 체결한 언약에(창12:3) 근거한 복으로서, 은혜 받은 자의 영적 영향력은 그가 몸담고 있는 현실의 모든 부분과 모든 사람에게 미친다는 사실을 잘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비록 지금은 개척교회를 시작했지만 내가 요셉처럼 주의 인정만 받으면 결코 굶주리거나 헐벗지는 아니할 것을 믿는 목회 철학(牧會哲學)을 가지고 현재의 고통이 장차 영광이 되라는 믿음을 가지고 하고 있으니 그 믿음대로 될 것을 믿고 고통스럽지만 참고 견디는 것이다 .
그러므로 개척교회 시작한 목회자들을 기도로 돕는 한은 있어도 그들을 불리하게 헐뜯고 해롭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개척교회 시작한 분들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여 울면서 기도하면 틀림없이 도우심을 받고 곧 자립하고 큰 교회로 성장할 것으로 믿는데 다만 개척교회일수록 무엇이나 분명하게 해야지 그렇지 아니하면 사람들이 들어오지 아니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전주 안디옥(깡통)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 목사님은 14년 전에 개척을 했는데 지금 은 약 3천명의 성도와 년간 예산이 30억이 넘는다는 말을 들었는데 왜 그렇게 급성장했을까 처음부터 분명한 철학과 목적을 가지고 사람들이 긍정할 수 있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어떤 철학과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게만 한다면 기성교회에 대한 실증을 느낀 사람들이 찾을 것이며 처음 교회 발을 들여놓는 사람들이라도 그와 같은 교회를 찾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많은 교회들도 사명감으로 개척하여 고생하시는 분들을 물질로도 돕지만 측면에서 기도로서 협력하여 속회 성장하여 고생하시는 사모님들의 고통을 덜어드리고 눈에 눈물을 닦아드리는 주님의 교회를 위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63.농촌교회(農村敎會) 목회자 사모로서의 고통
옛날에는 농촌교회도 성도들이 많아서 교회가 인정(人情)이 있고 가족적인 분위기로 매우 즐거운 마음으로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공간(空間)으로서 잊지 못할 추억들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향수가 넘치는 고향교회로 기억이 될만한 일들이 많은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옛날 모습을 찾을 수 없고 아름다움보다는 쓸쓸함이 감도는 썰렁한 교회가 되어 찾는 이도 적을뿐더러 목회자들이 기피하는 교회로 되어 버린지도 오래인데 그 이유는 농경사회가 지나가고 공업사회로 변신하면서 농촌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집도 팔고 농토도 팔아 너도나도 도시로 떠나는 바람에 농촌은 텅 빈 장터와 같은 실정이라 교회도 성도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초등학교도 급격히 줄어들어 어쩔 수 없이 통폐합을 하지 아니하고는 안될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은 누구나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라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문제는 농촌교회 실정과 교역자들의 어려운 문제라는 것인데 필자는 도시에서 30년 이상 목회를 하다가 농촌으로 들어왔지만 농촌교회가 너무 어렵다는 것은 어디에 살아도 잘 아기 때문에 목회자들이 도시에서 대기하는 한이 있어도 농촌으로 쉽게 들어가려고 하지 아니하는데 그들만 잘못이라고 나무랄 수 없는 것은 목회자도 가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녀들도 있으니 교육문제라든지 환경문제라든지 여러 가지 고려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 농촌에 살던 사람들이 자녀들의 교육문제로 도시로 이사가는 형편에 교역자 자녀들이라고 교육문제에 신경을 아니 쓸 수 없으니 자연히 망설이게 되고 사명이 있어서 농촌교회로 부임해서 오지만 자녀들 교육 때문에 두 살림을 해야하는 부득이한 사정이 생길 때도 있다.
그리하여 사모는 애들과 같이 도시에 있으며 아이들 밥을 해주고 돌아보며 그 곳에 있지만 마음은 항상 남편이 목회 하는 농촌에 있으니 어찌 고통이 없겠는가 그리고 수요일만 되면 교회로 돌아와야 하고 또 목요일에 또 나갔다가 토요일에 다시 들어와야 하는 번거롭고 고달픔같은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교회 성도들이 이 점을 너그럽게 이해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은 사모가 교회를 그렇게 비워도 되는 것이냐는 비난의 소리를 들을 때마다 교회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그렇다고해서 당장 아이들교육을 포기할 수 없는 상태에서 고민이 이만 저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학비문제도 당장 어렵지만 어떻게 마련할 길이 없어 염치 불구하고 친정에다 도움을 호소하지만 어디나 넉넉한 살림이 못되어 만족한 도움을 받지 못하고 안절부절 하면 여기저기서 약간의 도움도 주지만 전체적인 면에서는 모자라는 형편이다 보니 학기 때마다 교육비와 전쟁을 선포할 정도로 초비상이 걸린다.
교육비도 교육비지만 생활비도 어려워서 허덕일 때가 있어 도시의 큰 교회에 보조를 요청하지만 그것도 쉽지 아니하여 거절을 당하고 어쩌다가 도움을 주면 이것저것 너무 까다롭게 하니까 피곤하고 정신적인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주는 교회는 넉넉해서 주는 것이 아니기에 받으면 받았다는 영수증을 보내드리고 감사의 편지라도 쓰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렇게 할 마음의 여유가 없다보니 차일피일(此日彼日) 미루게 되고 때로는 잊어먹고 하는 것이 다반사이다.
보조를 받는 편에서도 문제는 있겠지만 보조를 하는 편에서도 문제가 있는 것이 더러 있는데 어느 분은 개인적으로 약간의 보조를 하면서 매월 통장으로 입금 해주셔도 되지만 반드시 자기의 집으로 와서 받아가라 하여 찾아가면 이런 말 저런 말하는데 정말 듣기가 민망하고 거북하여 그 돈 없어도 됩니다하고 뛰쳐나오고 싶은 심정이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처지니 보통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 다음부터는 그 집 문턱을 넘으려면 정말 죽기보다 싫다는 표현은 지나치지만 정말 들어가기 싫은 것은 사실이라 왜 꼭 이렇게 해야만 주의 일을 하는 것인지 깊은 생각에 잠길 때가 많고 내가 목회자를 돕는 처지라면 정말 그와 같은 방법으로 하여 주의 종들을 괴롭히지는 아니하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그런 일로 인하여 더욱 교역자는 고마움보다도 다른 생각이 드는데 주께서 주시는 물질을 가지고 자기의 것을 주는 것 같이 생색을 나타내려고 하니 농촌교회 보조비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돈주는 것을 자랑하는 것 같이 생각이 들어 받는 편에서는 기분이 상하고 점점 거리감이 생기고 속된 말로 아니꼬운 생각도 들어 연락도 고의적으로 하지 아니할 때가 있는데 교역자 생각에는 돈만 주지 말고 기도하고 와서 보시기도 하고 농촌실정을 살펴서 헛말이라도 수고한다는 위로의 말 한마디하면 너무나도 감사해서 죽도록 충성하고 헌신하며 보조해주는 것 고마워서 '감사합니다' 하고 보고도 종종 하고 연락을 할 텐데 교역자의 생각과는 반대로 하고 있으니 자연히 교역자도 상대적으로 그렇게 하다보니 보조해주는 교회에서는 목회자가 기본자세가 되어 먹지 아니하였다고 말이 많고 그렇다보니 다음해는 보조가 중단되었다는 통보가 날아오면 또 근심이 생기고 걱정이 되어 잠이 오지 아니할 때가 얼마인지 어찌 말로 다하리 때로는 보조비도 중단되고 본 교회는 돈이 없으니 생활비 지급을 못하게된다.
그렇다고 남들에게 생활비를 달라거나 빌려달라고도 못하고 식사를 못하고 굶주린 배를 허리띠로 졸라매고 강단 밑에 엎드려 기도를 하기도전에 눈에서는 눈물부터 쏟아지는데 무슨 말로 기도를 드려야 좋을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기도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 저희들이 부족해서 양식이 없어 굶주리고 있는데 주여 어떻게 하시렵니까 하고 울고 나면 그래도 다소나마 위로가 되어 모진 것이 잠이라 한밤을 지새우고 새날을 맞이하지만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다.
그렇지만 교인들에게는 굶었다는 표시를 해서는 안되기에 밥을 먹은 것 같이 하고 양식이 생길 때까지는 남모르는 눈물을 흘리며 참고 견디는 것이 농촌 가난한 교회에서 목회 하는 자들이 종종 겪는 일들 중에 하나이다.
어떤 때는 아침도 먹지 못하고 있는데 일손이 모자라는 성도가정에서는 자기 집에 와서 일을 도와달라는 말을 염치불구 하고 하는데 못 가겠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가서 도와주면 점심 때가되기 까지 기다리자면 얼마나 배가 고픈지 굶어 보지 아니한 사람은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루 종일 일을 하고 집에 돌아올 때면 그 가정에서 밥을 넉넉히 주면서 집에 가서 가족들과 같이 먹으라고 하는데 밥을 주시는 분은 목회자 집에 양식이 없어서 밥을 못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하고 그날 자기 집에서 늦게까지 일을 했으니 밥할 시간이 없으니 밥을 가지고 가서 먹으라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간에 한 끼라도 가족들과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예 그렇게 하지요' 인사를 하고 밥을 들고 오는 사모님의 마음은 기쁘기만 하여 부자가 부럽지 아니한 심정으로 발걸음이 빠르게 집에 와서 가족들과 함께 그 밥을 먹을 때는 너무나도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
그러나 내일 아침을 생각하면 기쁨도 잠시고 걱정이 생기고 근심이 되어 밤에 잠이 오지 아니 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애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쌔근쌔근 잠을 달게 자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너희는 부모를 잘못만난것 외에는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는데 남의 아이들은 먹을 것이 풍족하여 먹고 남음이 있는데 너희는 그들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형편에 있는가 생각하니 뜨거운 눈물이 양볼 사이로 흘러내려 아이들 볼에 떨어지는 것도 알지 못하고 하염없이 울고만 있는데 뜨거운 눈물을 맞은 아이가 일어나더니 어머니 왜 울어 하고 까만 눈동자로 정면으로 쳐다 보는 아이를 안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팔에 힘을 주어 그 아이를 끌어안고 소리를 내어 울면서 아무개야 아이 이름을 부르면서 '미안하다 먹고 싶은 과자도 못 사주고 가지고 싶은 장난감도 못 사주어서 정말 미안하다' 하면서 아이와 마냥 울고 나니 그나마 속은 후련하였다.
어떤 때는 양식은 없고 제분소(製粉所)에서 밀가루를 빼고 남은 밀기울을 구해 다가 죽을 쑤어 밥그릇에다 담아주니 그 어린것이 아무 것도 모르고 그 것도 먹을 것이라고 숟가락으로 푹푹 떠먹는 것을 보는 어미 심정은 무엇이라고 표현을 해야 좋을지 적당한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는다 .
지금의 목회자들은 거의가 이와 같은 일은 당하지 아니하였을 것이라 이해하기 힘들지 모르지만 생활이 어려울 때 목회 하신 분들은 충분히 이해할 줄로 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최봉석 목사님은 먹을 것이 없어 너무 굶주리고 나니 정말 돌이라도 먹을 수만 있다면 먹고 싶은 심정인데 앞에 가는 말이 똥을 싸는데 그 똥에 말이 먹은 밀이 삭지 아니하여 노랗게 보이기에 그 마분(馬糞)을 가져다가 물에 흔들어 밀만 가려먹었다는 말은 오늘의 우리 교역자들에게 가슴 뭉클한 충격을 주고 있어 불평할 일은 못되지만 그래도 시대가 그때와는 너무나 다르지 아니한가 생각을 하면서 현재 당한 고통을 정당화하려는 못된 기질이 고개를 들고 일어 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 뿐만은 아니다 농사철이 되면 사모는 성도들이나 불신자들이나 할 것 없이 다니면서 일을 도와주고 그들과 접촉하여 전도도 해야지 그냥 앉아서 교회 나오기를 기다려서는 아무 것도 되지 아니하여 목회자 내외분은 들로 나가야 하는데 가서는 그들과 같이 모도 심어주고 여러 가지 농사일을 도우면서 친해지려고 노력하면 그들과 빨리 가까워지는 것은 사실이다.
여하간 농촌에서 목회 하는 목회자들을 위하여 근본적인 대책이 있어야 하는데 이는 총회 차원에서 정책적으로 어떤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목회자들의 생활비문제 아이들 교육비 문제 여러 가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방안을 마련해야지 '농촌교회 돕자'는 구호로만 되는 일이 아니고 획기적인 어떤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농촌에서 희생하고 있는 목회자들과 사모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용기를 북돋아 주며 농촌지역을 복음(福音)화 하는데 앞장 설 이유는 농촌교회는 도시교회 묘판(苗板)이기 때문인데 묘판을 정성껏 돌보지 아니하면 한 해 농사를 망치는 것은 당연한 일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농촌교회가 잘못되면 도시교회도 손해를 보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라는 말인데 농촌교회는 도시교회 묘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농촌이나 도시를 막론하고 농촌교회에서 목회 하는 목사나 사모가 도시교회에서 목회 하는 이들보다는 훨씬 더 고생을 많이 한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서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임을 알고 각별한 보살핌과 위로가 있어야 할 것이다.
64.목회협력(牧會協力)자로서의 고통
여자는 목회자가 아닌 사람을 남편으로 만나도 그를 돕고 협력하여 보다 더 행복하게 살려고 함께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아는 것이 모든 여자들의 공통적인 생각일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여자로 지음 받은 목적이 남편을 돕기 위하여서였다고 한다면 남편도 아내의 도움을 받지 아니하고는 절대로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는 피차에 돕고 위로하고 협력하여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가는 것은 특별한 일도 아니고 누구를 위해서도 아니며 서로를 위해서라는 것을 잊으면 불평과 불만이 터져 나오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창세기 저자는 기록하기를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하였다(창2:18).
혼자 지내는 것이 좋지 못하니라 한 말은(로 토브) '토브'(좋다)는 상대적으로 '더 낫다'는 뜻인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하신 뜻을 좇아 지으신 피조물 중에 보시기에 좋지 못한 것은 본래 하나도 없었으며(창1:31). 따라서 이 말은 다만 아담이 혼자 지내는 것보다 하와와 함께 거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더 낫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돕는 배필이란 말도(에제르 네게드) 즉 '조력자', 반려자'란 뜻인데 이것은 남편에 대한 아내의 마땅한 역할이 어떠한 것인지를 암시해 준다(고전11:9엡5:24).
그러나 이 말이 남성 우위론(優位論)의 근거로 오용(誤用)되어서는 안될 것이 남녀의 차이는 신체적, 기능적 문제이지 인격적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며 하나님 앞에서는 남자든 여자든 다 그분의 성품을 함께 나눠 받은 동등한 인격체일 뿐이다(고전11:11).
그러므로 목회자 뿐만은 아니고 세상에 모든 아내들은 남편을 도와서 그가 하는 일이 더욱 성공하여 아내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인식이 들도록 해야 여자의 주가(株價)가 높아지는 것은 물론이고 남편들이 아내들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요청할 때 피차가 인격적으로 존경하게되고 아끼고 사랑하게 될 것이다.
특히 목회자의 사모는 남편을 도와 협력하지 아니하면 그 목회는 성공할 수 없는 확률(確率) 99% 이기에 목회자의 사모는 누구보다도 남편을 도와 목회의 협력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재론(再論)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를 돕는 다는 것이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니기에 고통스럽다는 것인데 남편이 아무리 설교를 잘하고 정치를 잘하며 행정을 빈틈없이 한다고 할지라도 아내가 문제를 일으키면 이는 수습할 수 없고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 것은 틀림이 없는 것이다.
어떤 목사님은 부흥강사이고 목회도 원만하게 하는데 사모님께서 교회 안에서 너무나도 나서기 때문에 목사님 목회에 많은 지장을 초래하는 것을 보았다.
사모는 아무리 다재다능(多才多能)해도 앞에 서서 설치면 교회 일군들이 일을 하지 아니하고 모든 것은 '당신이 다하시오' 하고 뒤로 물러서 버리면 이 또한 목회자에게는 매우 어려움을 안겨주는 꼴이 되고 만다.
예를 들면 피아노를 전공한 사모가 전공하지 못한 교사가 치는 것을 보면 맘에 차지 아니하여 전문가의 근성이 발동하여 '비켜 내가 칠께' 한다든지 지휘자를 밀쳐내고 자기가 한다든지 하는 것은 모든 일꾼들의 사기를 죽이는 일이고 교회 밖으로 내모는 일인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개척교회의 경우에는 기성교회와 사정이 달라서 혼자서 피아노 반주도 하고 성가대 지휘도하고 교사도 하며 찬양대에 앉아서 찬양도 해야하지만 기성교회에서 그렇게 하면 문제만 발생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기에 자신의 전문 분야를 살리지 못하고 썩히는 고통도 이만 저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기성교회에서는 더욱 사모의 처신을 신중히 하는 것이 목회자를 돕는 일이지 설치면 문제는 발생하게 되어서 그 일로 목회를 그만두어야 할 위기도 초래할 수 있는 심각한 문제임을 사모들은 알고 그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목회자 사모는 가정에서 가정(家庭)일을 잘 돌보아 아이들 뒷바라지며 남편의 뒷바라지를 잘하려면 이것도 벅차다는 말인데 목회자가 가사에 신경을 쓰지 아니하고 목회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은 목회를 돕는 일이고 협력하는 일이다.
예를 들어 사모님이 심방 한다고 권사들과 여전도사들과 함께 다니다보면 들어서는 안될 말도 듣고 해서는 안될 말도 하게되니 문제의 발단은 여기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모는 교회 정치도 몰라야 하고 행정도 몰라야 하며 교회가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알지 못하여 교회에 대하여는 평신도나 다를 바가 없도록 해야지 알고 이것저것 간섭하다가 그만 문제가 발생하면 목사가 저질러놓은 일 같으면 그가 수습하지만 사모가 문제를 일으켰다면 목사가 수습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모는 외로워야 하는데 그 고통을 참기란 여간 어렵지 아니하다고 말하는 것은 사람이 죄를 짓고 가장 혹독한 처벌을 받는 것은 독방에 가두고 형을 살리는 것인데 이는 죽음보다 더 지독한 고문이고 형벌이라는 것은 고독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해도 무인도(無人島)에 데려다가 놓고 있으면 얼마 있지 아니하여 미치거나 정신이상이 될 가능성 매우 높은 무서운 형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요한을 사람이 없는 '밧모라'하는 섬에 유배(流配)시켰는데 이도 고통을 주는 방법 중에 하나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목사의 사모는 가정이라는 고독한 유배지에 갇혀서 고독을 씹으며 살아가야 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이것이 곧 목회자인 남편을 돕고 협력하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 가정에서 아이들의 어머니 역할만 제대로 하고 아내로서 그 역할만 충실하게 하면 목회 전반에 걸쳐서 돕는 일이 된다.
어쩌다가 교회 말을 들어도 남편에게 말을 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설교시간에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에 목회자가 들어서 기분 나쁜 말은 들어도 못들은 척하고 살 수 있는 생활은 하루아침에 되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고 오랜 세월을 거쳐서 반복적인 연습을 거듭한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은 말을 하고 싶은 것은 말할 특권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선물이기 때문인데 그러나 아무리 받은 특권이라고 해도 목회자 사모는 들었다고 해서 모두다 전하고 말을 하고 싶다고 해서 어떤 말이라도 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고통이라는 것이다.
옛 이야기 중에 어떤 사람이 임금님의 전용 이발사인데 임금님의 귀를 보니 당나귀 귀같이 생겨서 웃음이 나와 참을 수 없는데 임금님은 당부하기를 아무에게도 본 것을 말하지 말라는 어명을 받았으니 말하고 싶어도 본 것을 말하지 못하여 병이 날 것 같은 형편에 이르자 그는 대나무 밭에 가서 큰 소리로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외치고 나니까 속이 시원하더라는 이야기가 있듯이 사람은 말을 들으면 하고 싶어 못 견디는 성질이 있는데 사모라는 직책 때문에 하고싶은 말도 못하고 사는 것은 곧 남편의 목회를 돕는 차원에서 일반 여인들이 받지 아니하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고통인 것이다.
물론 사모가 아니라고 해도 성경의 교훈은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하였다 (약1:19-20).
너희가 알거니와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이스테'는 명령법이라기보다는 직설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였다(Robertson).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라고 한 말은 말을 천천히 하라는 뜻이 아니라 성급하게 자기의 의견만을 주장하거나 자기의 고집만을 내세우지 말라는 것이고 계속하여 말하거나 자기의 주장만을 내세우는 사람은 논쟁에 빠지기 쉽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바를 온전히 깨닫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말을 하기 전에 먼저 겸손히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Burdick, Tasker).
'성내기를 더디하라' 한 본문은 일반적으로 분노, 증오 등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마음을 보존하는 것을 의미하고 감정의 격분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을 때 하나님의 의(義)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며 또한 깊이 생각하지 아니하고 여과시키지 아니한 말은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회자 사모는 여자이라 여자는 남자보다 더 빨리 말을 하고 싶어하고 더 많은 말을 하고 싶어하는 것은 본능이기 때문에 어떤 이들이 말하기를 "남자의 입은 주(酒)둥이고 여자의 입은 조(鳥)둥이라"는 말을 하였는데 그 이유는 대체로 남자는 술을 좋아하기 때문이며 여자는 새처럼 조잘대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모도 보통 여자들과 같기 때문에 말을 많이 하고 싶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과 마주앉아 이런 말 저런 말 할 수 없는 것은 목회자의 아내이기 때문에 절제하고 아예 입을 열지 아니하는 고통을 감수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모는 아는 것도 모른다 모르는 것도 모른다 하니까 성도들은 말하기를 "어떻게 사모님은 모른 다로 일관하십니까?"그와 같은 말을 들어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사모가 해야할 일이고 남편의 목회를 돕고 협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목회가 얼마나 어려운지 웬만하면 누구에게도 말을 아끼는 것인데 때로는 아내에게까지도 말해서는 안된 말들이 있는데 성도들과 상담하다보면 상대가 말하기를 "이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세요"하면 이는 비밀로 묻어두어야 할 사항이기 때문에 아내에게 말하여 혹시 아내가 친한 사람에게 '당신만 알고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라'하고 당부하고는 그 중요한 비밀을 말하면 그와 같은 방식(方式)으로 그 말이 최초에 목회자와 상담한 분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면 이 때부터는 목회자의 신뢰성에 문제가 생기고 인격에 큰 타격이 오며 다시는 상대하지 못할 인간으로 취급을 받으니 목회에 얼마나 큰 지장을 초래하느냐 그 말이다.
미가서 저자는 기록하기를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하였다(미7:5) .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라……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사람이리로다' 한 말은 이스라엘의 죄악은 단순히 지도자들만의 타락이 아니었고 그들의 부패와 타락은 사회를 구성하는 기초 단위인 가정의 파괴를 가져왔으며 인간의 생활 속에서 가장 가까운 존재들인 이웃, 친구, 그리고 가족들끼리도 서로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해를 가하는 관계로 변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은 심지어 한 이불 속에서 잠을 자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까지도,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조차도 파괴되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부패가 매우 심각하여 더 이상 회복될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하였음을 시사한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라고 한 말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진리인데 사람들이 깨닫지를 못하고 실천하지 못하며 실수(失手)와 실패(失敗)를 하여 낭패(狼狽)를 당하게 되는 것이다.
옛이야기를 소개하면 어느 부부가 행복하게 살아가는데 한번은 남편이 담을 쌓다가 원수인 이웃집의 어린아이를 죽여서 그 속에 넣고 쌓았는데 그와 같은 사실을 가족들과 한 상에 둘러앉아 저녁밥을 먹으면서 낮에 있었던 일을 말하게 되었는데 이 때 아들녀석이 아버지 입을 손으로 막아버리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불쾌해서 이놈아 왜 내 입을 막아 하니까 아들이 하는 말이 "아버지 이 집에는 남이 한 사람 있습니다"이때 아버지는 깜짝 놀라면서 누가 남이냐고 물었더니 아들이 하는 말이 "바로 어머니입니다"왜 "어머니는 아버지와 좋을 때만 식구이지 아버지하고 사이가 벌어지면 그 때부터는 남보다 더 무서운 원수가 됩니다"하였다.
그런데 그와 같은 일이 있고 얼마를 지나서 아내와 대판 싸움을 했는데 그 때 아내가 하는 말이 "당신 어느 때 이웃집 아이를 죽여서 담쌓는데 넣어 같이 쌓았지 내가 그냥 있을 줄 알아"하고 가서 그 이웃집에 가서 그 때 있었던 이를 모두 고자질하여 낭패를 당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회자도 입이 무거워야하지만 사모는 더욱 무거워야 한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비밀스러운 말은 아내나 남편에게도 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앙적으로도 남편 이상으로 좋은 면을 보여야만 남편 목회에 도움이 된다는 것인데 남편은 믿음으로 하려고 무척 애를 쓰고 사랑으로 당회원들과 성도들을 대접하고 싶어하는데 아내가 귀찮다는 이유하나만으로 거절하여 가정에서 손님을 대접하는 일이라고는 한번도 없다면 이는 문제가 되지만 그러나 반대로 아내가 남편의 마음을 먼저 읽고 여보 내일 장로님들 모시고 우리 집에서 식사나 한 끼하는 것이 어때요 하면 남편인 목사는 날아 갈 것같이 기분이 좋아 그렇게 합시다 하고 그 때부터 남편은 기(氣)가 살아서 대단한 일이나 하는 것처럼 어린아이 같이 좋아하는 것을 볼 수 있을 텐데 이와 같은 행위는 남편의 목회를 도와 협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남편이 먼저 말을 꺼냈는데도 못해요 귀찮아서 할 수 없어요 나가서 사드리세요 하든지 아니면 무엇 하려고 장로들을 대접합니까 그들이 목사를 대접해야지요 하면 이는 사모로서는 생각할 바가 많은데 목사는 얻어만 먹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종종 보여주면 자녀들 교육상에도 큰 도움이 되는데 아이들이 목회자 가정에서 자라다보면 교인들이 목회자를 대접하는 줄로만 알고 목회자 가정은 교인들을 대접하지 아니하는 것으로 알고 대접할 줄을 모르면 이는 자녀교육상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어떤 분이 말하기를 "목사 가정의 딸과는 사돈(査頓) 삼고 싶지 않다"왜 받는 것만 알고 줄 줄을 모르는 환경 속에서 버릇없이 자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로님들이나 성도들을 자주 사택으로 모셔들여 대접하는 모습을 자녀들 앞에 보여주어야 설득력 있는 교육이 될 것이다.
목사는 설교하는 것으로 전부가 아니고 설교한 것만큼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교인들에게 본이 되고 그 설교가 먹혀든다는 것이다.
때로는 목사가 히브리서 설교를 하면서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하였다(히13:1-2).
그런 말을 전하는 목사는 한 사람도 대접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으니 이는 말과 행동이 다르기 때문에 목회에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모님께서 손님 대접하기를 좋아하여 성도들에게 받는 것 보다 주고 대접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면 본인은 피곤하고 고달파도 성도들에게는 인상에 마음에 새겨서 좋은 결과가 나타나 목회자인 남편의 위상이 훨씬 높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 외에도 사모가 목회자인 남편을 돕는 길은 얼마든지 있지만 이만 생략하기로 하겠는데 목회는 남편 혼자만 하는 것이 아니고 아내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기에 목회에 성공한 분들을 살펴보면 배후에는 훌륭한 아내인 사모님들의 눈물의 기도와 희생적인 봉사와 마음의 고통을 참고 견딘 덕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목회자가 목회에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 하는 논란은 그 사모의 협력이 어느 정도 있었느냐가 좌우하는 것을 사모님들은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65.목사(牧師)가 위임 투표할 때의 고통
목사가 청빙을 받을 때 두 가지 경우가 있는데 하나는 위임 청빙을 받고 또 하나는 임시로 청빙을 받는데 위임은 문제가 없는데 임시가 문제가 생긴다.
한 1년쯤 같이 신앙생활 하다가 그 정도면 피차가 큰 문제가 없겠다고 판단이 되면 위임투표 하여 위임식을 하고 일년 정도 지내보고 아무래도 지금의 목사님은 우리교회와 맞지 아니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임시목사로 1년 더 연장해야 하겠다고 생각이 들면 다시 교인들의 신임을 물어야 하는 절차가 있다.
그런데 교회에서 그 절차를 이용하여 기왕이면 임시목사 연장이 아니고 위임투표로 하자는 계획을 세우는 것은 위임투표 해서 위임을 하기 위한 절차가 아니고 그 절차를 거쳐서 부결시켜 내보내면 떳떳하게 내보낸다는 계산 하에 생각하기를 목사를 그냥 내보냈다고 하면 이유야 어떻든 간에 목회자를 내보냈다는 말을 듣게 되니 기왕에 내보낼 바에야 교회가 욕먹지 아니하고 교회는 최선을 다했지만 공동의회에서 부결되어 갔다고 하면 교회는 체면이 서고 모든 책임은 목사에게 있다는 기발한 전략(戰略的)짜여진 각본대로 요식 절차에 따라 결말은 예상대로 되어지는 고도의 지능적인 방법이라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직감한 사모님은 위임투표 허락하지 말고 임지를 찾아서 다른 곳으로 가자고 심각하게 조언했지만 목회자는 사모님과 생각이 다른데 몇 사람의 집사님들이 공동의회에 부결되면 우리들과 개척이나 하지요 하는 말에 힘을 얻어 최악의 경우에는 교회를 갈라서 나가는 한이 있어도 한 번 심판을 받아보자는 용기가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믿고 아내나 타인들의 권고를 들었지만 받아들이기 힘든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
그런데 사모님은 공동의회로 모인다는 광고가 나간 후부터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자나깨나 위임투표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였지만 결과는 교회작전(敎會作戰)대로 예상(豫想)대로 되어졌는데 이 때 가장 충격을 받은 분이 있다면 사모님이라 그 자리에서 세상을 떠나고 마는 불행한 일도 있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너무나도 가슴이 아프고 그와 같은 결과가 나오리라는 예상도 못하고 몇 분들의 옹호하는 것만 믿고 위임투표를 할 수 있게 만든 목회자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차라리 1년만 더 연장해달라고 사정하고 임지를 찾아 나갔으면 그 것이 자신의 목회 하는데도 크게 유익하고 장래성도 있었을 텐데 미련하게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덮어놓고 하고 나니 옹호하던 사람들도 대세에 기울어져 못 본척하는 것이 인간의 생리(生理)임을 미쳐 모른 자신이 미울 뿐이지 교회를 원망하거나 불평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항상 사람들의 인정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인정을 먼저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투표에 임하는 성도들이 그 일의 결과를 좌우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아시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분에 의하여 투표하는 분들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에 대하여 잠언 저자는 기록하기를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하였다(잠16:33).
사람이 제비를 뽑으나 한 말은 신정 국가인 이스라엘에 있어 '제비'는 하나님의 뜻이 나타내어지는 도구적 역할을 수행한다고 믿어졌기에 모세 당시부터 여호수아 시대의 기업 분배 때, 또한 신약의 초대 교회에서도 행해졌었다(민26:55 수18:10 삿20:9 삼상10:20-21
행1:26).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하였는데 여기서 '일의 작정'( 미쉬파트)은 원어상 '법률적인 판결', '법적 선언'을 가리키는 말로서 곧 상반절에 나타난 제비의 결과를 말하는 것인 동시에 가장 최종적인 하나님의 판결을 지시하는 것이며 따라서 본 구절은 제비가 인간의 영역에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서 행해졌다는 점에 미루어 곧 모든 우연처럼 보이는 인간사의 배면(背面)에는 어느 곳이나 하나님의 섭리와 간섭이 역동적으로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잠언 저자는 또 기록하기를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하였다(잠16:9).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 시니라 한 말을 혹자는 이를 '하나님께서(사람이 마음으로 계획한 길을) 확고하게 하신다'란 의미로 해석했으나(Luther, Umbreit, Bertheau,Elster), 그보다는 여호와께서 그 사람의 걸음을 결정하시고 지시하시며 인도하신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더 낫다고 하였다(Jerome, Delitzsch, Zockler).
그래서 목회자는 사람들이 투표해주기를 바라고 사람들의 눈에 들려고 노력하지 말고 투표에서 많은 표를 얻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이 좋은 사모님은 옆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주의 인정을 받아야 된다고 충고하지만 고집이 세고 현실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남편은 도리어 꾸중을 하면서 고함을 치니 그 고통은 상상을 불어 할 정도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믿음이 있고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아무리 많은 경쟁자가 있어도 겁나지 아니하고 두렵지 아니하다.
애굽에 팔려간 요셉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 그 많은 훌륭하고 똑똑한 사람들을 물리치고 그가 당당하게 애굽에 총리가 되어 요셉을 보시고 그 나라에 복을 주시고 요셉이 거하는 가정에 복을 주셨다고 하였다 .
창세기 저자는 기록하기를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하였다(창39:5).
이와 같은 목회자들을 모시고 사는 사모님들 같으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청빙을 받아 가면 2년을 견디지 못하고 위임투표를 하면 매번 떨어지고 그렇다고 어느 교회에서 와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정말 사모가 죽을 맛이라 목회에 환멸을 느끼고 남편에게 우리 목회를 그만 두자고 해도 사명이라고 하면서 고집부리지 정말 죽을 지경이라 그가 당하는 고통은 어떤 단어로 설명을 해야 공감(共感) 형성할까 하는 마음뿐이다.
목회도 하면 실적(實績)이 있어야하고 하면 할수록 보람과 긍지를 느끼고 재미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목회자인 본인은 태연할지 모르지만 측면에서 지켜보며 이모저모로 돕는 사모로서는 마음의 고통만 더할 뿐이다.
그러므로 사모가 바라는 바는 목회를 하려고 하면 내적 외적 소명감(召命感)이 확실해야 하고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증거가 있어야 목회 초에는 고난을 당해도 희망이 보이기 때문에 용기를 잃지 않겠는데 전혀 그런 희망이 보이지 아니하고 거기다가 남편인 목사는 목회보다는 다른데 생각을 많이 가지고 있으니 사모로서는 정말 고통스럽지 아니할 수 없다.
그래서 목회자들이 생각을 잘 해서 아내의 고통을 덜어주는 방법으로 기왕에 목회를 끝까지 하려고 하면 그 일에 최선을 다하여 목회에 실적이 있어 많은 교회에서 청빙 하는 좋은 일들이 생겨서 사모들이 크게 기뻐할 수 있도록 기도도 많이 하고 연구도 열심히 하여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많은 교회들의 사랑을 받는 목회자가 되어 사모님의 고통을 덜어주는 방향으로 가야할 것이고 어는 교회에서라도 위임 목사로 청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66.담임목사(擔任牧師)부인으로서의 고통
담임(擔任)하면 어떤 일을 책임지고 맡아보는 것을 말하는데 교회를 담임하기 전에는 전도사로서 혹은 부 목사(副 牧師)로서 일할 때하고는 목사와 사모의 역할이 다른데 그것은 책임이 무겁다는 것이다.
교육 전도사(敎育 傳道師)시절에는 그렇게 마음에 큰 부담을 느끼지 아니하고 교회 방침에 따라서 성실하게 그 일에만 최선을 다하면 문제가 안 되는 것은 목사님께서 지시하시는 대로 순종하고 단 교육에만 신경을 쓰다보니 사모로서는 아무 것도 신경 쓸 일이 없고 부 목사로서 시무 할 때도 같은 형편이었는데 막상 목사가 되어 단독 목회를 시작하니 사모에게도 무거운 짐을 진 기분이고 부교역자로 있을 때는 정신적인 고통이 전혀 없었는데 담임을 하고 보니 입장이 과거와는 전혀 반대로 되어 목사님도 더욱 신경을 써야하고 덩달아 사모까지도 신경을 더 써야하는데 과거에는 머리를 싸매고 연구하지 아니하여도 된 것은 담임목사님께서 다 연구하여 지시한대로만 하면 되기에 골치 아픈 일이 있을 수 없었는데 이제는 연구해야 하고 매사에 신경을 써야하기에 밤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더러 있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는 사모는 보통 고민이 아닌데 교회에서 제직회(諸職會)를 한다고 하면 이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걱정과 근심이 생기고 가슴이 벌렁벌렁하는 것은 제직회가 무사히 끝났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 회의가 끝날 때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것은 전에는 쉽게 느껴보지 못하였던 일 들이다.
부교역자로 있을 때는 교회에서 제직회를 하다가 큰 소리가 나고 입씨름이 벌어지며 심하면 욕설과 주먹질까지 왔다갔다해도 부교역자들은 입만 꼭 다물고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아니하고 중립만 지키면 문제가 없었기에 그 일에만 신경을 쓰면 되었는데 이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제직회 하다가 문제가 발생하면 과거에 같으면 담임 목사님께서 수습을 하시곤 하였는데 이제는 누가 수습을 해주는 분이 없고 손수 남편이 다해야하는 책임을 지다보니 관심이 없을 수 없고 무책임하게 방관만 할 수도 없기에 사모로서는 고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당회로 모인다는 광고만 들어도 또 가슴이 두근거리고 무엇 때문에 모이시는지 당회가 무사히 끝날지 목사님이 집으로 오시기 전에는 마음이 편하지 아니한 것도 속일 수 없는 사실이다.
요즘에는 목사이고 장로님들이지만 모이면 큰 소리 나는 것은 예사고 주먹이 왔다갔다하는 것도 예사라 그리 놀랄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 남편이 당회장이 되어 사회를 하다 보니 혹시라도 실수하지 아니할까 걱정이 되고 부목으로 있을 때 당회만 하면 큰 소리가 나고 반드시 다투는 불행한 일을 보고 왔는지라 우리가 섬기는 새로 부임한 교회도 혹시라도 그렇지 아니할까 걱정이 되는 것은 상상이 아니고 실제로 그와 같은 일들이 너무나도 많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실제로 목격한 사실인데 그 목사님은 당회만 한다고 하면 그 시간부터 밥맛이 없을 정도로 긴장하고 가슴이 뛴다는 것이다.
당회가 목사·장로로 구성이 되어 천사들이 모이는 곳 같은 느낌이 들지만 사실은 그 당회하는 것을 평신도들이 보았다면 아마 교회를 떠날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는 것이 대다수의 여론이다.
노회나 총회도 마찬가지인데 모처럼 노회 참석하고 총회에 참석하였다가 신앙적으로 큰 손해를 보고 많은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담임목사로서 당회를 주재(主宰)는 남편이 실수라도 하면 그 영향이 남편에게만 미치는 것이 아니고 아내인 사모에게까지도 불똥이 튄다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교회 전체가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어느 목사님은 당회 한번 주재하고 오시면 그만 방안에 쓰러지면서 반죽음을 당한 것 같이 축 늘어진다는 말을 들었을 때가 있는데 직접 담임목사의 아내가 되어보니 그 때 그 사모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나는 것이다.
그 뿐 아니다. 부 목사로 있을 때는 담임 목사님의 처신이 서운한 감정도 가지고 있었는데 담임이 되어 자신도 부교역자들을 대하다 보니 자기가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나도 차이가 많아 당황할 정도였다.
어떤 부 목사는 담임목사가 가혹하게 한다는 이유로 화가 나서 목회 자체를 포기하고 일반직업을 택한 것을 보았는데 얼마나 못된 목사이기에 그렇게 했을까 하고 그 목사를 욕하기도 하고 비방하기도 했는데 막상 자신이 담임 목사가 되고 그 직을 감당하고 보니 어렴 풋이나마 당시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하여 담임목사의 사모로서 처신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부교역자들에게 신경을 쓰는 것이 쉬운 것만은 아니라는 점에서 고통스러운 일들이 적지 아니하게 많았다는 것이다.
수양이 덜된 부교역자는 장로님을 엎고 담임목사를 괴롭히는데 이는 이렇다 저렇다 말도 못하고 정신적으로 받는 괴로움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와 같은 일들을 어떻게 다 말로 할 수 있을까 그러니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아니한 사람은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철인(哲人)의 말을 예로 들지 아니하여도 충분히 전에 모시고 있던 담임목사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부교역자로 있을 때는 내가 담임목사라는 생각을 가지고 대범하게 어려움을 감당해야 하고 담임 목사로 있을 시는 내가 부교역자라는 심정으로 대하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어느 교단에서는 담임 목사가 사임하면 부목사도 사임하는 것을 명문화하였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이유는 부목사가 담임목사 배척하는데 앞장서지 못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인 줄 안다.
왜 그와 같은 조항을 만들어야 하는가 이는 부 목사와 담임목사의 묘한 갈등을 겪지 못한 분들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일 것이다.
그러므로 철없이 담임목사만 되면 모든 것이 해결되고 아무 문제가 없을 줄로 알지만 그렇지 아니한 것이 목회 현장에서 일어나는 알 수 없는 일들이라는 것을 말하고싶다.
정말 담임 목사 사모로서 그 어려운 일들을 당하고 보니 체면이 있고 위신이 있기 때문에 저질스럽게 행동할 수도 없고 모기를 보고 장도(長刀)를 뺄 수 없는 처지라 더욱 사모의 고통은 크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당해 본 사람이 아니면 저 말이 무슨 뜻인가 조차 알 수 없는 처지에 이르기 때문에 말하는 사람을 속 좁다 할 것이고 욕할 것이니 그래서 속을 뒤집어 보일 수 없어 더욱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담임 목사의 부인은 마음이 넓어야 하고 이해심이 많아야 하며 정이 많아야 모든 면을 감싸주고 사랑해줄 것이며 그들을 위하여 봉사자가 되어야 하겠다는 마음을 먹어야 담임목사 사모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담임 목사의 사모 노릇을 제대로 하려고 하면 남편인 담임목사가 속속들이 살피지 못한 부분들을 그의 아내인 사모가 대신해야 하기 때문에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위임목사(委任牧師)라고 하면 교회 모든 일들을 맡아서 해야할 책임을 부여받는 것이지 교회 평생토록 시무 하라는 보장도 아니고 권위를 가지고 휘둘러 독재나 독선 독주하라는 것이 아니기에 더욱 어렵고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67.교회가 시험(敎會試驗)들었을 때의 고통
성경에는 시험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하였다(약1:12-14).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한 '시험'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라스몬은 2절에서 사용된 '페이라스모이스'('시험')와 동일한 것으로 믿음의 연단을 위하여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인데 이것은 본 절이 2-11절과 연결된 것이며 13절 이하의 '시험'(temptation)과는 차이가 있음을 나타낸다(Ropes).
한편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는 표현은 유대의 지혜서와 묵시 문학적인 표현 방법으로 성경에서 자주 사용되었으며(시1:1;32:1 잠8:32,34 사56:2) 예수께서도 동일한 방법으로 축복을 말하였고(마5:3-11).따라서 야고보는 이러한 표현법에 익숙하였음을 밝혀 주고 있다(Burdick).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한 본 절은 '호티'로 시작하며 시험을 참는 자에 대한 결과를 설명하는 목적 본 문은 '인정하심을 받은'의 헬라어 '도키모스'는 3절에서 사용된 것처럼 '금이나 은을 제련하여 귀금속이나 동전으로서 자격을 얻는 것'과 같은 인정함을 의미한다(롬5:4).
이것은 시험의 과정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시험의 과정을 통과하는 자에게 순수함이 인정되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됨을 시사한다. 여기서 '면류관'(스테파논)은 운동경기에서 승리한 자에게 주는 면류관으로(고전9:25 딤후4:8) 시험과 박해 속에서도 끊임없이 주를 사랑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생명의 면류관'을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다는 증거로 보아야 한다(Ropes, tasker).
그리고 그 시험을 참으면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하였다(약5:10-11).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한 본문은 마5:11의 산상 수훈을 반영한 것으로 약1:12의 반복인데 야고보는 인내의 분명한 결과인 축복을 언급함으로 인내해야 할 또 하나의 이유를 제시한다(단12:12 마5:10). '우리'는 모든 사람들의 보편적인 판단을 언급하려는 것으로 성경에서 가르치는 인내로 말미암는 축복을 일반화시킨다(Manton, Tasker).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하면서 고난과 핍박 속에서 인내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되는데 야고보는 이런 경우의 실례로 '욥'을 제시한다.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한 말 중에 '인내'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모넨'은 보복하지 않는 자제의 인내를 의미하는 '마크로뒤미아'와는(7-10절) 달리 '환경 가운데서 변치 않는 인내'(골1:11)를 의미한다(Blue, Burdick).
욥은 순식간에 당한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신앙의 흔들림 없이 오직 하나님만을 기대한 인내의 본이다(욥1:21-22;2:10;12:2;13:4-5;16:2;19:25-27, Tasker, Adamson). 한편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인내의 가장 모범이 되시는 그리스도께 적용한다. 그래서 '결말'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해석한다(Augustine, Bede, Bassett). (2) 혹자는 주께서 욥을 통해 보여주신 결말, 곧 인내하는 욥에게 시련 전에 주었던 것보다 두 배로 크게 복 주신 사실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욥42:5-6, 12-17, Tasker, Burdick, Manton, Martin).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야고보는 어려움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만을 소망한 욥을 예로 제시한 후 인내의 결과인 욥의 결말 즉 갑절의 복을 받은 사실을 언급함으로 수신자들로 하여금 인내토록 권면한다.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한 말 중 '가장 자비하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폴뤼스플랑크노스'는 '많다'는 의미를 가진 '폴뤼스'와 '가장 깊은 부분' 혹은 '감정의 자리'를 의미하는 '스프랑크논'의 합성어로 '온 마음 전체'를 나타낸다(빌 2:1). 이것은 타인의 고난에 대한 '말할 수 없는 동정'을 뜻한다. 또한 '긍휼'에 해당하는 '오이크티르몬'은 '자비'와 구별 없이 사용되나 그보다 더 특수한 경우에 쓰이는 말이다(눅6:33). 이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고난에서든지 인내하는 자를 온전히 이해하셔서 함께 하시는 것은 물론 예비 된 복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심을 시사한다고 하였다(Vincent, Lenski, Blue, Gibson, Martin).
아무리 그렇게 말씀을 하셔도 시험을 받는 교회로서는 견디기 힘든 부분이 많아 이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고 교회 생활을 포기하는 일들이 더러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데 그와 같은 일도 성경에서 교훈 하시는 말씀을 들으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견딜 수는 있지만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 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하였다(신8:2-3).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믿음의 여부를 알려고 시험하시는 것은 필요한 줄로 알지만 시험을 받는 편에서는 많은 고난이 따르고 시험으로 인하여 상처를 받는 일들이 많기 때문에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시험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26:41) 또 주기도문에도 말씀하시기를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하였다(마6:13) .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하였는데 야고보는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1:13)라고 말한 바 있는데 그러므로 본문의 시험(temptation)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고 신약 성경 여러 곳에는 성도들이 시련이나 역경을 만나더라도 그것을 기쁘게 여기라고 가르치는 말씀들이 나온다(고전10:13 약1:2 ). 하지만 이러한 시련(testing)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신앙을 연단 하여 더 큰 믿음을 낳게 하려는 것으로 본문의 시험(temptation)과는 엄격히 구분된다.
혹 어떤 이들은 '시험'이란 주의 재림 때에 있을 종말론적 환난, 즉 배교(apostacy)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러나 본문의 시험(페이라스모스)란 단어에 어떤 한정사가 첨가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문맥상 본문의 기도가 단지 종말에 국한시켜야만 할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위의 주장은 받아들여질 수 없다.
한편 본문을 허용적 뉘앙스를 지닌 문장으로 이해하여 '(악마에) 의하여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해주옵소서'라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이는 '시험'(temptation)이라는 말이 '타락의 결과를 가져오는 유혹'을 뜻하는 것으로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막14:38 갈6:1). 여하튼 이 간구는 분명 시험에 날마다 노출될 수밖에 없으며, 또한 사악한 악마의 미혹에 쉽게 넘어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깊이 자각한 자만이 드릴 수 있는 기도이다. 실로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시련에 빠져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뿐 아니라(고전10:13) 그러한 시험에 직면했을 경우라 할지라도 능히 극복케 해달라는 기도를 잊지 말아야 한다(시50:15).
그러므로 베드로서의 교훈을 기억해야 하는데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하였다(벧전5:8-9) .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한 말 중에 '깨어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그레고레사테'는 '깨어 있다'라는 의미인 '에게이로' 에서 유래된 단어로 잠에서 깨어있는 상태뿐만 아니라 영적인 경각심을 갖도록 할 때 또는 권고나 주목을 요청할 때 사용되었다(마26:40-41 막13:35-37, Lenski).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이 근신하고 깨어 있어야 할 이유는 대적 마귀가 삼킬 자를 찾아다니기 때문인데 여기서 '마귀'(디아블로스)는 '비난하는 자' 곧 '사단'을 가리키는데(대상21:1 욥1:6-12 슥3:1). 베드로는 '마귀'를 배고픈 사자로 비유하여 사단의 유혹이 강력함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시험에 들지 아니하도록 피차가 조심을 해야 하는 줄은 알지만 어느 한 순간에 시험이 들면 교역자는 반드시 고통을 받게 되는데 교회 시험은 두 종류로 볼 수 있는데 성도들 간에 드는 시험이 있고 또 성도들과 목회자와 든 시험이 있으며 어느 시험에 들든지 목사나 사모는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교인들끼리 시험에 들어 서로 싸우고 불목하고 그 일로 인하여 성도 중에 누가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로 가버리면 목회자와 사모의 마음은 그렇게 괴로울 수 없다.
그리고 교회와 목회자와 시험이 들어서 문제가 발생하면 사모로서는 더욱 괴롭고 고통스러운데 무엇에 비할 수 없으리 만치 괴롭다.
교회는 시험들 만한 일들이 너무나도 많아 정말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지 아니하면 매일 같이 울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교회 시험은 아무 것도 아닌 것 가지고 큰 시험으로 발전하는데 한번 시험이 들면 반드시 상처는 남고 반면에 "소나기 지나가고 난 다음에 땅이 굳어진다"는 말과 같이 시험을 통하여 더욱 좋아질 수도 있다 .
그러나 그와 같은 경우는 극히 드물고 큰 상처만 남게 되는데 목회자에게는 잊을 수 없는 상처가 될 수도 있다.
여하간 시험이 들었다면 목회자인 남편은 담대한척하지만 아내인 사모는 아무리 남편이 그렇게 말해도 측면에서 보기가 너무나도 딱해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교회 가서 철야를 하고 돌아올 때가 많다.
교인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목회자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것을 알고 그렇게 하지 말았으면 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기록하기를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하였다(히13:17).
그러므로 교회는 목회자와 좋은 관계를 맺음으로 인하여 은혜롭게 발전하도록 피차가 노력을 해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하고 서로 신뢰하지 못하여 항상 사회의 비판의 대상이 되어 교회만 손해를 보는 불행한 일들이 너무나도 많이 일어나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는데다가 목회자까지 시험에 빠지니 교회 전체가 시험에 휘말리어 교회발전에 큰 지장을 초래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그러니 그 가운데서 더욱 고통을 당하는 분은 사모라는 분인데 그 이유는 교인(敎人)편에서 남편에게 말도 못하고 남편 편에서 교인들에게 무슨 말도 못하고 어디까지나 중립을 지키자니 그 고통은 말로 다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교인들은 그런 줄도 모르고 목사와 한 몸이라고 생각하여 보는 눈들이 곱지 않게 따가운 시선을 보내는데 그 고통은 더욱 견디기 힘든 것이다.
생각해보자 교인들은 시험 들어 속상하면 교회를 옮기면 그뿐이지만 목사나 사모는 그렇게 할 수도 없고 이 교회가 아니면 목회 할 곳이 없다는 마음으로 하기 때문에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참아야 하기 때문에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하겠는가를 누구도 알아주는 이 없으니 심적 고통이 더욱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험은 사모님뿐만 아니고 모든 성도들이 고통스럽기 때문에 시험의 원인이 되는 욕심(慾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인데 야고보서 저자는 기록하기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하였다(약2:14-15).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한 본 절은 사람이 유혹을 받는 근원을 설명하고 있다. '시험'(temptation)이 사람을 연단 시키기 위해서 주신 하나님 섭리라고 합리화시킬 수는 없다. 오히려 사람이 자기 욕심에 이끌려 미혹되는 것이다. '미혹됨'에 해당하는 헬라어 '델레아조메노스'는 원래 사냥이나 고기잡이에서 유래한 말로서 문자적으로 '미끼로 고기를 꿰어 내다', '올가미로 사냥하다'를 의미한다(Mayor). 사람들이 유혹을 받는 것은 마치 물고기가 자기 앞에 놓인 낚시 바늘에 물려 이리 저리로 이끌려 다니는 모습과 같은 것이다. 한편 '욕심'의 헬라어 '에피뒤미아스'는 악한 뜻에 대한 열망이다(롬7:17-23;갈 5:16-21;엡 2:3;살전 4: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하였는데 이는 '욕심이 행동으로 유발되지 않은 상태 즉 내적 상태로 머물러 있을 때는 죄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없다. 야고보는 인간이 욕심을 갖기 시작할 때부터 죄가 싹이 트고 결국에는 사망에까지 이른다고 강조하고 있다. '잉태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쉴라부사'는 문자적으로 '함께 붙잡다'라는 의미이나 여자의 임신을 말할 때 주로 사용되었다(눅1:24).
여기서는 죄의 단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욕심' 그 자체가 바로 죄이다. 혹자는 욕심을 자연적이고 오염되지 않은 상태라고 말한다(Mayor). 그러나 인간의 죄란 욕심에게 굴복 당하는 시점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욕심이 순수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Calvin). 욕심은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 필연적으로 죄를 유발하고 그 마음의 상태가 습관으로 굳어 져서 사망에 이르게 된다(창 3:19; 롬 5:12). '낳다'에 해당하는 두 단어 '틱테이'와 '아포퀴에이'는 '여자가 아이를 낳는 것'을 의미하나 전자는 문학적인 표현이고 후자는 의학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Ropes). 또한 정상적으로나 비정상적으로나 출산하는 것 모두를 뜻하나 본문에서는 비정상적인 출산 즉 유산을 나타내는 말이다(Robertson).이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하는 영적 사망을 잉태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롬 6:23).
그러므로 교회 시험은 각자의 욕심에서 비롯되는 것이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목회자도 욕심을 비우고 성도들도 지나친 욕심을 버려서 시험의 원인을 제거함과 동시에 아울러 고통도 제거하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를 거두는 지혜로운 삶을 살자는 것이다.
사람이 욕심을 버리면 불편하게는 살지만 그 대신 마음의 평안은 누리고 살 수 있으니 육신의 안일을 추구하다가 심령의 고통을 자초하는 일은 버려야할 것이다.
68.목사(牧師)가 배척(排斥)받았을 때의 고통
마13:57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하였다 .
배척한지라 한 말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들이 걸려 넘어졌다', '그들의 감정이 매우 상했다', '그들이 적대시했다' 등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이를 종합해 보면 그들은 예수에 대해 매우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고 또한 예수를 도무지 용납치 않을 태세였음을 알 수 있는데 실로 예수는 고향방문 때마다 모두 거절되고 배척 당하였다(눅4:29).
고향에서조차 배척받았다고 하는 사실은 첫째, 장차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의 유대인들로부터 거부당하고 죽음에 이르게 되는 구속 사건을 예고하고 둘째, 예수의 지혜와 권능이 저희들에게는 거침돌이 되어 저들이 예수의 말씀을 거부함에 따라서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나아가게 될 것임을 암시하며 셋째, 예수를 배척함으로써 그들은 예수로부터 그들의 육신과 영혼의 질병을 치유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상실(loss)하게 되었다.
선지자가...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였는데 이는 유대 뿐 아니라 그리스와 로마의 문학 작품에서도 볼 수 있는 격언구이다(Logia of Jusus, Oxyrincus Papyri). 그런데 구약 선지자 중에 예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고향에서 배척을 당한 선지자는 바로 예레미야인데 아나돗의 제사장의 아들(렘1:1)이었던 그에 대하여 그곳 사람들은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대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렘11:21)고 하였다.
한편 평행구절인 막6:6에서 예수께서 그들의 불신에 대해서 놀라움과 경악을 금치 못하셨는데, 이는 6절 하반부에서 드러나는 대로 나사렛을 제외한 모든 촌에서는 예수께서 가르치시고 기적을 베푸는 일이 가능했으나 고향에서만큼은 그에 대한 불신과 시기가 지나치게 강했기 때문일 것이다.
실로 선지자의 자연적 속성을 익히 알고 있는 자는 그 선지자가 지닌 초자연적 속성(신적 권위에 의한)을 소극적으로 간과해 버리거나 적극적으로는 배척한다(Bengel).
목사가 배척을 당하는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자기들의 마음에 맞지 아니한다고 사람을 갈아치우려는 속셈에서 배척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배척을 당하신 이유 중에 하나가 나사렛에서 태어나시고 신분은 목수의 아들이라는 점과 그런 가운데서도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 그들은 그를 배척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기대하는 메시야관과는 너무나도 어긋나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목사들이 교회에서 배척을 받는 일들이 많은데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고 보는데 어떤 목사는 자신이 잘못해서 배척을 받기도 하고 어떤 목사는 너무나도 억울한 이유로 배척을 받는데 교회는 말하기를 오늘의 교회의 분란과 분쟁은 모두 목사에게 원인이 있다고 말하는데 그와 같은 말은 받아드릴 수 없다.
물론 그런 경우도 없지는 않겠지만 전적으로 목사에게만 책임을 떠넘겨서는 안될 것이 예를 들자면 교회 재정부장 장로가 교회재정을 가지고 자신이 사회에서 하는 고리대금업을 하는데 목사가 그와 같은 잘못됨을 알고 재정부장 직(職)을 그만두게 하니 그가 목사에게 반감을 가지고 목사 배척운동을 하는 것은 적반하장(賊反荷杖)도 유분수(有分數)지 그렇게 할 수 없는 일인데도 그는 그렇게 하다가 안되니까 목사의 뺨까지 때리는 행동은 극악무도(極惡無道)하여 그를 성도라고는 볼 수 없는 상태인데 그래도 목사에게 책임이 있다고 욕을 하며 목사 배척운동 할 때에 사모님은 자기 남편인 목사가 잘못도 없이 장로에게 뺨을 맞은 것을 알 때 얼마나 분통이 터지고 가슴이 아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인데도 사모이기 때문에 참는 그 고통은 아무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오늘의 교회가 진리에 분별력이 흐려서 잘못을 하는 사람에게 잘못한다고 따끔하게 충고는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를 옹호하고 나서는 일이 있는 것인데 속언(俗言)에 "도적놈도 패가 있다"는 말과 같이 잘못하는 사람들에게도 패가 있다는 말을 실감이나 하듯이 목사를 배척하는 수가 생기니 결국에는 그 교회에 있지 못하고 개척을 시작하고 말았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것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뿐 아니고 최근에는 교회가 계획적으로 원로목사 추대문제로 배척하는 일이 일어난다는 말이 들리는데 이는 교회가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인데 헌법에 보면 "동일(同一)한 교회에서 20년 이상 시무(始務)한 목사가 만년(晩年)에 이르러 노회에 시무사면을 제출하려 할 때에 본 교회에서 명예직 관계를 보존하고자 하면 공동 의회를 소집하고 봉급을 작정하여 원로목사로 투표하여 결정한 후 노회에 청원하면 노회의 결정으로 원로목사의 명예직을 준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헌법 정치4장 3조 4항)
옛날에는 원로목사 추대하는 것도 그리 문제가 없었고 사람들의 인심(人心)이 매우 좋아서 헌법을 잘 순수하였는데 요즘은 법은 있으나 그 법을 어떻게 해서라도 피해가려는 수단과 방법을 찾는 것 같은 인상을 강력하게 심어주고 있다.
예를 들어서 한 교회에서 20년간 시무(始務)하면 원로목사로 추대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이 있으니까 교회에서는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20년을 채우지 말고 그 안에 목사가 교회를 떠났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인데 목사는 눈치 없이 버티고 있으니까 교회에서는 배척 운동이 일어나는데 정말 어중간(於中間)한 시기라서 목회자가 처신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다.
헌법대로 만 30세에 목사가 된 사람은 한 교회에서 20년을 목회 하면 만50세에 원로목사가 되는 자격이 있지만 원로 목사가 되기 전에 교회에서 싫어하여 47세쯤 교회를 사임하게 되면 다른 교회에 부임하는데는 큰 문제가 없지만 그렇게 법대로 된 목사들은 드물고 거의가 약 50세 정도에서 목사 된 분들이 많은데 이들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한다면 배척받는 시기가 약 50세 정도에서 목사 된 분들이 많은데 이들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한다면 배척받는 시기가 67세나 아니면 65세쯤 될 텐데 도시 큰 교회들을 빼놓고는 노후가 준비된 분들이 거의 없을 것이다.
특히 농촌에서 목회 하다가 그와 같은 경우를 당한다면 상당한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는데 그때는 연령적으로도 교회를 맡아서 일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교회서 원로목사 부당성을 말하는 것도 일리는 있는데 "교역자들에게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만든 위임목사제도도 바뀌어져야하고 퇴임 후(退任後)까지 생계를 교회에 떠 맞기는 원로목사제도(元老牧師制度)같은 것도 하루속히 폐지되어야 한다"(장로신보 제712호)고 하였는데 여기서도 문제는 없지 않다.
평생에 목회자 양심으로 목회만 전념한 목사는 노후를 돌아보지 않고 돈에 욕심 없이 맡은 일에만 죽도록 충성한다는 일념 하에 아무 생각 없이 오직 교회 일에만 몸바쳐 일하다보니 모은 재산 하나 없어도 노후는 교회에서 최소한 생활비를 제공해줌으로 목회자가 평생 교회를 위하여 일했는데 양로원으로 간다고 해도 먹을 것은 교회에서 책임진다는 주의 순수한 사랑의 마음으로 원로목사 제도 이전에 그런 생각을 가짐이 옳을 줄로 아는데 교회서 보는 눈과 생각하는 것은 일방적이고 한 잣대로 재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런 말이 있는데 "목사노릇 제대로 한 사람 처 놓고 부자가 없고 장로노릇 제대로 한 사람 치고 부자 못된 사람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목사는 받고 장로는 주기 때문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필자의 생각에는 목사가 돈에 욕심 없고 노후 생각도 하지 아니하고 주는 생활비를 성도 위하여 목회활동비로 사용하는 분들은 저축이 되지 아니하고 항상 빠듯하다보니 부자가 없고 장로는 사업이라도 해서 교회 위하여 헌신하고 봉사하니 하나님께서 물질의 복을 주시니 부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목회자를 평할 때 똑같이 보면 곤란할 때가 있는데 정말 목사답게 일하신 분들은 평생에 모은 돈도 없지만 교회에서 정년으로 사임하고 나올 때 지급하는 노후 생활비도 다 털어 주의 일에 바치는 순수한 분들도 많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와 같은 분들에게는 교회가 형편에 따라서 노후의 생활비쯤은 대드리는 것 하나님 앞에서 큰 문제가 없다고 보고 그리고 큰 교회에서 시무 하시다가 정년으로 퇴임하실 때에 집 한 칸과 생활비 될 정도로 대접하는 것은 잘한다고 보는데 그것이 그렇게도 못마땅하다는 말인가 예를 들어 국가 공무원이나 교육공무들은 정년까지 있다가 퇴임하면 퇴직금만 해도 노후에 생활하는데는 크게 불편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목사는 도시 큰 교회 빼놓고는 아무리 한 교회에서 20년 이상을 있었다고 해도 제도적으로 원로목사 대우를 해야된다고 했어도 재정이 약한 교회에서는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농촌에서 20년 이상을 있었다고 해도 현상유지도 어려운 교회가 원로목사로 추대하고 생활비를 대드리겠느냐는 것이다.
지금 원로목사 시비문제는 도시에서 경제적으로 넉넉한 교회들이 하는 쓸데없는 짓들이지 당장 먹을 것을 걱정하는 농촌교회나 재정이 없는 교회에서 목회자들에게는 상상도 못할 일이며 알면 사기 죽이는 짓들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농촌에서는 원로목사는 그만두고 매월 목회자 생활비 10/1도 저축을 못하는데 무슨 소리들을 하고 있느냐는 말이다.
목사를 배척하는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원로목사 대접해주지 않기 위해서 교회에서 짜여진 각본대로 연출하는 연극이라면 그 연극을 지켜보시는 하나님께서 웃으실 것이다.
그 연극 각본 때문에 목사가 배척을 받는다면 큰 교회 같으면 일시불로 노후 생활비를 주겠다고 목사에게 제시할 것이고 농촌교회 같으면 20년이 넘어도 대접할 형편이 못되니 아무문제가 없을 것이니 문제는 큰 교회와 원로목사 신경전(神經戰)내지 호화로운 전쟁(戰爭)이지 전체적인 교회와 목사들의 전쟁은 아니라는 점에서 큰 교회에 목회 하시는 목사님들이나 장로님들의 문제지 한국교회 전체문제는 아니라는 점에서 교회나 목사들이 반성해야할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도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장소를 가리지 아니하고 부르심을 받은 곳에서 열심히 목회 일선에서 생명 바쳐 일하는 목회자들의 사기 꺾는 일은 하루속히 중단되어야 할 것이다.
생각해 보라 목회자 내보내기 위하여 교회가 성도들의 헌금한 돈을 가지고 목사와 협상하여 합의되면 그 돈 지불하여 내보내고 목사가 범죄하고도 못나겠다고 버텨서 교회 성도들이 헌금한 돈을 갈취하여 나가는 일도 있어서도 안되고 있을 수도 없는 것이다.
이 연극을 연출한 분들은 그 책임을 하나님께로부터 추궁 당할 것으로 알아야 할 것이고 상응한 주의 징계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연극이 시작되는 동안 죽어나는 것은 사모인데 그는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처지에 놓여있어 한숨만 쉬고 마음의 고통을 하다가 남편인 목회자에게 그냥 떠납시다 하면 남편은 괘씸한 일이라 버릇을 고쳐야돼 하고 버티는데 그렇게되면 교회는 안면몰수하고 목회자로 보지 않고 삯군으로 보는 따가운 눈초리를 피하는 사모는 그 고통을 누구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없어 울기만 하고 있다.
이 모두가 한국경제가 부유하게 된데 원인이 있는데 경제가 어려워서 교회도 목회자 생활비나 빠듯하게 지불하고 현상유지나 한다면 대형건물이나 호화로운 치장 교인수송용이라고 하면서 대형버스가 가득하여 언뜻 보면 소규모로 버스 사업을 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는 안될 것이고 생활비 시비는 없을 것이며 퇴직금 문제로 교인들과 목회자간에 분쟁도 없을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다.
교회는 순리대로 사랑으로 시작을 했으니 순리대로 문제를 해결하면 될 텐데 믿지 아니하는 사회에서 쓰는 방법을 교회에서 도입하여 사용하고 있으니 문제가 발생할 수박에 없는 것이다.
배척이라는 것은 순리가 아니고 물리적인 힘을 동원하고 경제적인 힘을 앞세워서 밀어내는 것을 말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배척을 당신 것은 잘못이 있어서라고 생각하면 이는 무엇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지 제대로 알고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언제나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인데 배척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가 중요한데 예수는 시기를 받아서 배척을 당하였지만 지금의 목사들은 늙었다는 이유와 싫증난다는 이유로 교회가 손해볼 것 같다는 이유 때문인데 이 모두가 주님의 뜻에는 맞지 아니하는 것들이라 주께서 어느 편을 들어주실지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목회자가 잘못을 해서 문제가 된 것은 배척이 아니고 당연하게 거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는데 잘못이 없이 배척을 당하는 것은 억울하고 속상하고 심적 고통이 큰 것은 사실이다.
남편인 목사가 배척을 당하다 보니 사모는 마음 편할 수 없고 마음의 고통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워 가슴 태우다보니 모진 병에 걸려서 세상을 떠나고 마는 불행한 일들도 있다.
69.목사(牧師)가 병(病)들었을 때의 고통
사람은 누구나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과정을 거치기로 되어 있는 것은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진리인데 목회자가 몹쓸 병에 걸려 누웠으면 그렇게 가슴 아플 수 없는데 처음에는 교인들이 들여다 보지만 조금 시일이 흐르면 찾아와 주지도 아니하고 그 때부터 교역자에게 정신적인 부담을 주고 교회를 떠나달라는 것인데 목사는 이중삼중으로 고통스러운 것은 병들어 육체적으로 고통스럽고 교인들이 싫어하는 눈치니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우며 가족들에게 미안하니 심적으로 고통이 심하여 병은 더욱 악화되고 삶의 의욕을 완전히 상실하여 죽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목사가 병들면 누구보다도 고통을 당하는 이는 바로 사모님이라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는데 필자가 아는 목사님은 약 30년 이상 몸이 불편하여 심방도 제대로 못하고 늘 자신의 몸 하나만 돌보기도 힘에 벅찬 상태에서 목회를 계속하는데 그래도 교회가 사랑이 있어 피를 토하고 입원할 때마다 교회에서 치료비 및 입원비를 계속 부담하고 그러면서도 목사님께서 세상 떠날까 보아 전전긍긍(戰戰兢兢)하며 통성으로 기도하고 목사님을 위하여 온갖 배려를 아끼지 아니하는 생활을 30년 이상을 하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아 필자도 그 목사님께서 강단을 지킬 수 없을 때는 몇 개월간 두 교회를 함께 섬기는 일도 있었다.
그리하여 금연에는 그 교회에서 시무 하시던 목사님께서 정년이 되려면은 6-7년 남았지만 이제는 건강한 목회자를 모시고 자신은 뒤로 물러서겠다고 당회에 말하니 당회는 만류했으나 본인이 강하게 사양하여 당회는 목사님의 뜻을 받아들이되 돌아가시는 날까지 생활비를 드리기로 하고 아파트도 한 채 마련하여 드리고 관리비도 대드리며 사시는데 불편함 없이 해드리겠다는 약속을 공동의회에서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는데 더욱 고마운 것은 그 목사님께서 병약하여 신학을 늦게 함으로 목사 안수 받은 지는 몇 년이 안되어 원로목사의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고 법적으로는 원로목사로 대우하기가 어렵지만 그래도 그 법을 떠나서 그 목사가 그 교회에서 시무한지는 30년이 넘기에 원로목사의 대우를 해드리기로 한 것이다.
병약해서 목회도 제대로 못한 것도 미안한데 교회에서는 상관하지 아니하고 최선을 다하여 끝까지 모시고 목회자로 대접을 해드렸지만 목사 자신이 너무나도 미안해서 스스로 물러나기로 결심하여 건강한 목회자를 모실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필자는 어디 가서라도 그 교회를 자랑하고 싶고 그리고 목사님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런데 사모님은 건강하셔서 목사님 병간호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교회가 좋아서 그렇지 만약에 문제를 제기하는 교회 같으면 벌써 거리로 나앉는 한이 있어도 쫓겨났을 것이고 어쩌면 쫓겨나기 전에 목사가 마음이 상해서 벌써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교회가 주의 사랑으로 참고 견디며 기도한 결과로 목사가 아름다운 결과를 낳게 되었고 교회도 타 교회에 본이 될 만한 아름다운 역사를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그 동안 사모님은 남편의 병을 고치려고 수 십 년간 온갖 정성을 다하였는데 남편에게 약이 된다고 하면 뱀도 삶아 드리고 개고기도 사다가 해드리며 좋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해드리는 정성을 쏟았는데도 어떤 때는 목사님이 때는 심한 각혈을 하고 병원에 실려 가면 그 때부터 교회 대한 미안한 마음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고 또 남편이 이번에는 회복하지 못하고 정말 돌아 가시지나 아니할까 속으로 걱정하며 만약에 돌아가시면 80세가 넘으신 모친은 어떻게 하며 자신의 장래에 대해서도 막막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은 딸들만 있지 아들은 하나도 없는 처지고 보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나 주변에서 지켜보는 자들로서는 충분히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런 일들이 종종 있었으니 그 때마다 마음의 고통은 이루 말로 할 수 없고 교회에 대한 미안한 마음은 더욱 말할 수 없이 많았다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약 30년 넘게 남편의 병간호한다는 것은 얼마나 고달프며 괴롭겠는가 어지간한 여인들 같으면 아마 도망을 갔어도 몇 번이고 갔을 것이지만 그래도 그 남편 살려보려고 온갖 정성을 다하여 끝까지 희생한 결과로 남편이 명예롭게 은퇴할 수 있게 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고 보아 칭찬과 상이라도 주고 싶은 심정이다.
그리고 어느 교회는 목회자가 중한 병이 들어 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아무리 정성을 다하여 치료를 해도 차도가 없어 입원한지 몇 개월만에 교회사면서를 냈는데 교회에서는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교회에서 하는 말이 전도사님께 말씀을 전하지 못하셔도 우리들은 교회 나와서 우리들끼리 찬송 부르고 기도 드리며 성경을 읽고 헌금 드리고 가겠으니 걱정하시지 마십시오 만약에 전도사님께서 세상을 떠나시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로 병 고침을 받고 다시 저희 교회로 돌아오셔서 저희들과 함께 예전과 같이 함께 신앙생활하고 예배드리는 그날이 속히 오도록 최선을 다하여 기도할 테니까 조금도 교회는 염려하지 마시고 치료에만 신경을 쓰십시오 하고 돌아갔는데 목회자는 한 달 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교회는 새로운 목회자를 모셨다는 말을 들었다.
많은 사람들은 말하기를 교회들이 사랑이 없고 문제가 많다고 하지만 그래도 아직도 사랑이 넘치는 성도들이 많고 주님께 바로 살려고 하는 분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오늘의 한국교회가 복을 받아 계속 성장한다고 본다.
엘리야가 생각할 때는 많은 사람들이 바알에게 무릎을 꿇고 자기 혼자만 남아 고난을 당하는 줄로 생각하였지만 그와 같은 생각은 지나친 편견이라는 것이다 물론 환경에 지배를 받는 인간이기에 더러는 타락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모두 다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고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의로운 분들은 있기 마련이다.
노아 홍수 때도 구원받은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소돔성이 완전히 망할 때도 구원받은 사람들이 있듯이 아무리 세상이 타락하였다고 해도 그 중에는 주님의 뜻대로 사는 분들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개중에는 주께서 원치 아니하는 일들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개중에는 성도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래도 처음에는 상당한 신앙과 사랑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접근하였다가 피차에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문제라 처음 계획대로 되지 아니하면 이 때부터는 신앙인의 인격을 벗어 던지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처럼 감정으로 대립되면 사람을 미워하는데 구실은 교회를 위한다고 하면서 문제에 접근하여 교회를 소란하게 만드는 것이다.
즉 베드로가 주를 위한다는 구실로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하시고"하였고(마16:21-23)"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하였다(마26:51-54)하였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목적은 모두 주를 위하는 것 같았으나 내용은 인간적인 생각에서 주님의 뜻과는 전혀 반대되는 인간적인 생각에서 시작이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와 같은 방법으로 교회를 위한다는 구실로 성도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어느 교회에서 목회자가 병들어 몇 개월 동안 강론을 못하고 있어 교회에서는 목회자에게 하는 말이 목사님 교회를 사면하시고 떠나서 요양이나 하심이 어떻겠느냐는 부탁과 함께 그렇게 해주시면 은퇴금으로 얼마를 드리겠다고 제의를 했으나 목회자 측에서는 금액이 너무 작다는 이유로 협상이 결여되어 교회와 목회자간에 감정이 상하여 교회측에서는 교회를 위하여 목회자가 있지 목회자를 위하여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원론적인 논리를 전개하며 대립이 되는데 목회자 가족 측에서는 그래도 어느 정도 액수가 되어야 전세 하나라도 얻을 수 있지 아니하겠느냐고 피차에 딱한 사정을 놓고 줄다리기를 하는데 교회측에서는 감정이 많이 상해서 어디 저런 목회자가 있어 하고 목회자 삐뚤어진 사고를 고치겠다는 뜻에서 매월 드리는 생활비 지금을 중지하였다.
그러나 목회자 측에서는 생활비를 받지 못하면서까지 떠나지 아니하고 교회에서 눌러 있으니 그 마음의 고통인들 얼마나 크겠는가 결국에는 교회가 노회에 문제를 호소하여 노회 서는 수습위원을 파송 하여 수습을 하는 가운데 목사님은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지경에 이르니 목사 사모는 마음의 고통이 얼마나 하며 교회인들 얼마나 괴롭겠는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차라리 목사님 측에서 교회에서 제시하는 액수를 수용하고 떠났더라면 좋지 않았겠나 하는 아쉬운 마음도 있고 교회측에서도 조금 더 사랑을 베풀어서 유종(有終)의 미(美)를 거두는 방향으로 처리를 했으면 얼마나 좋았겠나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든다.
목회자가 병들면 본인은 물론이지만 교회도 가슴 아프고 사모는 양 사이에서 더 많은 고통을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살다보면 원치 아니하는 병이 들어 자신의 삶의 목적과는 전혀 반대되는 일들이 사람이면 누구에게라도 당할 수 있는 여지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부러 병들어 가정을 근심하게 하고 교회나 직장을 해롭게 하는 사람들은 어느 천지에도 없다는 것을 알고 건강한 사람들이 병든 사람을 위로하고 치료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사람의 도리지 병든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성도 이전에 사람의 도리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하간 누구나 남편이 병들면 병간호하는 부인들이 고통스럽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진리임에는 틀림이 없으니 병든 사람은 투병생활에 고달프고 간호하는 아내는 간호하느라고 고통스러운 처지에 있는 그들을 어떤 이유에서도 괴롭힐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도리요 주님의 사랑인줄로 믿는다.
성경에 보면 예루살렘을 떠나서 여리고로 가던 사람이 길에서 강도를 만나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은 빼앗기고 몸에는 많은 상처를 입고 생명이 위태로운 처지에 놓여 있는데 제사장이라는 분도 그를 보고 그냥 지나가고 레위사람들도 보고 그냥 지나가는데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보고 그냥 지나가지 못하고 맞은 상처를 치료하고 그를 주막으로 엎고 가서 주막 주인에게 그의 치료를 부탁하면서 하는 말이 이 사람을 치료하여 생명을 잃지 않게 하시오 그리하면 내가 볼일 마치고 돌아와서 당신에게 치료비를 더 주겠다는 말을 남겨놓고 떠났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당시의 종교인들도 사랑은 없고 믿는다는 말만 하며 믿어도 누구보다도 잘 믿는 다는 사람들의 행동이 그 정도니 실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이라 결국 죽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책망하고 오늘의 우리들에게 교훈 하시는 것은 그와 같은 신앙생활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늘의 교회가 정말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가 원인이야 어찌되었든 간에 자신들의 이익에 보탬이 되지 아니하면 부모까지도 버리고 처자도 버리는 일들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지 아니한가 하물며 교회는 교회를 위한다는 구실로 주의 참사랑을 저버리는 불행한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께서 에베소서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이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하였고(계2:4-5).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하였으며(요1서4:20-21)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하였다(요15:13고전13:1-1-8).
예수 잘 믿는다고 하고 교회를 위한다는 구실로 사람을 미워하고 가슴아프게 하는 불신자보다 악한 짓을 당장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딤전5:8마12:46-50).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하였다(마25:34-40)하였는데 이는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운 결과가 결국에는 주님을 도운 것으로 간주가 되어 복을 받았으며 반대로 사람을 돌아 보아주지 아니하고 주님만 섬겼다고 하는 자들은 저주를 받았다(마25:41-46).
그렇다면 무엇이 교회를 위하는 것인가 교역자나 교회 피차가 깊이 생각하고 자기 희생 없이는 누구도 교회를 위한다고 하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목회자도 주를 위하고 교회를 위한다고 하면서 교회 사정도 보지 아니하고 자기의 욕심만 채우려는 것은 진정 교회를 위하는 것은 아니고 교회도 교회를 위하고 주를 위한다고 한다면 주님의 사랑의 범위를 벗어난 행동은 앞뒤가 맞지 아니하는 불신자보다 악하고 무서운 죄를 범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70.목사(牧師)가 시험(試驗)들었을 때의 고통
목사가 시험 드는 것은 대수롭지 아니하는 것 때문에 시험이 드는데 항상 마귀의 장난에 놀아나는 때가 많아서 지나고 나면 아쉬움을 더하고 후회하는 일들이 많은데 야고보서 저자는 기록하기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하였는데 이는 목회자가 교회 성장의 욕심을 내는 것은 유익하지만 자기욕심을 내는 것은 시험들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이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한 본 절은 사람이 유혹을 받는 근원을 설명하고 있는데 '시험'(temptation)이 사람을 연단 시키기 위해서 주신 하나님 섭리라고 합리화시킬 수는 없고 오히려 사람이 자기 욕심에 이끌려 미혹되는 것이다. '미혹됨'에 해당하는 헬라어 '델레아조메노스'는 원래 사냥이나 고기잡이에서 유래한 말로서 문자적으로 '미끼로 고기를 꿰어 내다', '올가미로 사냥하다'를 의미한다(Mayor). 사람들이 유혹을 받는 것은 마치물고기가 자기 앞에 놓인 낚시 바늘에 물려 이리 저리로 이끌려 다니는 모습과 같은 것이다.
한편 '욕심'의 헬라어 '에피뒤미아스'는 악한 뜻에 대한 열망인데(롬7:17-23 갈5:16-21 엡2:3 살전4:5) 목회자가 물질에 욕심을 내면 시험 들기 쉬운 것은 가룟 유다가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하였다(요13:2).
그리하여 그는 은 30에 예수를 팔았는데 "그 때에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저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하였다(마26:14 -16).
내가 예수를...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한 유다는 요12:6에서 볼 수 있듯이 돈의 욕심이 많은 자라 이제 그는 그러한 탐욕스런 본성을 분명히 노출시켜 자신의 스승인 예수를 정식으로 팔려고 그 값을 흥정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같은 사악한 흥정에 대해 마가복음에서는 간접 화법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본문에서는 직접 화법으로 묘사함으로써 돈을 탐하는 유다의 죄성이 더 강조되고 있는데 마가와 누가복음에는 약속만 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본문에는 돈을 직접 받은 것으로 되어 있어 그의 물욕에 가득 찬 행동을 더욱 생생히 보여 준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넘겨준다'는 말은 그가 직접 예수를 묶어 공회에 넘긴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예수를 불의 한 죄목(罪目)을 뒤집어 씌워 고소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성경 전체의 흐름으로 볼 때 예수가 피소(被訴)된 것은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그들 수하에 있는 자들에 의해서였다(57-68절). 따라서 '넘겨준다'는 말은 가룟 유다가 예수를 체포할 만한 적기(適期)를 마련하고 또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파송 된 무리에게 예수가 손쉽게 체포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16, 47-59절). 여하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놓고 벌어진 흥정은 순식간에 완결되었는데 실로 죄악 된 계획은 죽음의 화살처럼 빨리 진행되는 것이다.
그때부터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 하였는데 '기회'의 헬라 원어인 '유카이리아'는 본래 '좋은 시기'를 뜻한다.
이는 돈에 시험이 들어 사랑하는 스승까지 넘겨줄 생각을 가지고 기회를 찾는 모습은 측은하기도 하고 불쌍한 인물이라 주께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차라리 너는 나지 아니 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다"고하지 아니하셨는지 알 수 없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는 처음부터 주님의 제자로 부름은 받았으나 구원을 위하여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고 도리어 주의 일을 하기로 부름을 받아 결국 마귀역할만 하다가 죽었다.
요한복음 저자는 기록하기를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 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하였다(요6:64. 70-71 잠16:4).
발람도 아간도 물질 때문에 시험 들어 결국 이로 인하여 모두 망하고 말았지만 예외로 하나님의 선지자인 사무엘은 물질에 초연하여 유명한 하나님의 선지자가 되어 역사에 깨끗한 종으로 기록이 되었다(삼상12:2-5).
목사도 사람이라 가정 생활하는데 생활비가 필요하고 교육비가 필요하며 꼭 써야할 데가 있는데 그러나 수입은 적고 지출할 데는 많아 지게되면 자연히 문제가 생기는데 사치나 허영을 위해서가 아니고 필요한 생활비가 모자랄 때 사모가 매우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어떤 때는 남편 몰래 사회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쓰고 제 때에 갚지 못하여 고민하는 때가 더러 있는데 그렇다고 어느 누가 고생하시지요 하고 말 한마디라도 위로하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고 도리어 살림을 규모 있게 살지 못한다고 수군거리기나 하니 심적 고통이 이만 저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심하게 어려울 때는 속옷하나도 제대로 사서입지 못하면서도 생활에는 쪼들리고 교회 앞에 면목이 없어 말을 제대로 못하는 때가 많다.
그리고 명예에 욕심을 내면 반드시 시험 들게 되어 있는데 세례요한은 명예욕이 없어 그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하였다(요3:30).
그는 흥하여야……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한 이 말은 본서에 나오는 세례 요한의 마지막 진술로서 그의 선지자적 위대성을 단연 돋보이게 하는 구절인데 위대한 이상이나 목표를 내걸고서 수많은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일 자체도 크고 힘든 일이거니와, 그의 주변에 모여든 열렬한 추종자들에게 자신의 한계성(限界性)을 분명히 주지시키고 그들의 관심을 다른 사람에게로 돌리게 하는 일에 이토록 적극성을 보이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세례 요한은 '……해야 한다'는 표현으로써 자신의 주장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뜻이 필연성과 당의성을 확고히 천명하고 있다.
실제로 세례 요한의 삶은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일을 위해 온전히 바쳐졌으며, 예수의 공생애가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르기 시작할 무렵에 헤롯의 핍박을 받아 참수형(斬首刑)을 당함으로써 '주의 길을 곧게 하는 자'로서의 생애를 마감하게 된다(막1:14 눅3:18-20 ).
목사가 돈에 욕심을 내면 시험 들게 되고 이성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 시험 들게 되며 명예에 욕심을 부리면 반드시 시험이 드는데 이는 사모님만 괴롭게 되는 것은 사모와 목사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울사도는 말하기를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부탁하기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 하였도다"하였다(딤전6:9-12).
욕심으로 인하여 시험을 초래하여 자신도 가족도 특히 사모가 고통을 당하게 하는 일은 하지 말고 편하게 목회 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현실 목회는 특히 물질에 깨끗하고 명예에 욕심 없으며 이성에 깨끗하면 큰 문제가 없고 편안한 목회를 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바울사도의 말대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것들을 피하면 히브리서 저자가 기록한대로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하였다(히11:38).
그렇다 청렴결백하여 욕심이 없으면 어느 누구도 그를 해치지 못하고 그의 인격에 그를 해칠 마음은 절대로 가질 수 없다.
생활비도 더 달라고 할 일이 아니고 덜 받으려는 목회자 상을 정립하고 교회는 더 드리려는 아름다운 모습이 보여야 한다.
그렇게 하면 생활은 불편해도 마음은 편하고 사모님의 마음고생도 덜어드릴 수 있고 가족들도 편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욕심을 버리고 교회로부터 인격적으로 성자취급을 받고 존경을 받는 목회자가 되면 이에 더 귀한 것이 없다.
목회는 생활의 불편은 참을 수 있어도 마음의 불편은 참을 수 없고 목회의 의욕을 상실하고 가족들까지도 고생한다는 사실을 목회자들이 감지해야 할 것이다.
어떤 이유로든지 목회자가 시험에 들게 되면 고통스러운 것은 교회이고 성도들이며 목사의 가족인데 그 중에 제일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사모라는 것을 인식하고 모든 면에서 삼가해야 될 것이다.
71.자녀(子女)들이 문제를 일으킬 때의 고통
성경을 보아도 지도자가 자녀들 때문에 고통을 받으신 분이 있는데 그가 바로 엘리 제사장이다. 그의 자녀들은 매우 부모들을 고통스럽게 하였다.
그들의 잘못이 무엇인지는 성경에서 지적하였는데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그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행하는 습관은 이러하니 곧 아무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삶을 때에 제사장의 사환이 손에 세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그것으로 냄비에나 솥에나 큰솥에나 가마에 찔러 넣어서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취하되 실로 에서 무릇 그 곳에 온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같이 할 뿐 아니라 기름을 태우기 전에도 제사장의 사환이 와서 제사 드리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제사장에게 구워 드릴 고기를 내라 그가 네게 삶은 고기를 원치 아니하고 날것을 원하신다 하다가 그 사람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취하라 하면 그가 말하기를 아니라 지금 내게 내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였으니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엘리가 매우 늙었더니 그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였음을 듣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노라 내 아들아 그리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과케 하는 도다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 하면 하나님이 판결하시려니와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 하면 누가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그들이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었더라"하였다(삼상2:12-25).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고 하였는데 '불량자'(不良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베네 벧리야야알은 직역하면 '벧리알의 아들들'이란 뜻으로(고후 6 : 15)' 곧 '사악한 자들' '나쁜 녀석들'(evil men,Living Bible), '쓸모 없는 자들'이란 의미이다.
이는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사람들 보기에 사악한 자들이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도 전적으로 백해 무익(百害無益)한 존재였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한편 제사장 엘리는 자신의 판단력 부족으로 경건한 여인 한나를 오히려 불량한 여자로 보았고(삼상1:16), 참으로 '불량한' 자신들의 아들들에 대해서는 관대하였다(29).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한 이 말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치 아니하며 따라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여 그래서 결국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대적하는 행위를 가리킨다(욥 18:21 렘4:22 호5:4).
목회자 자녀들이 대체로 빗나가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그 이유는 많을 것이지만 그 중에 하나가 교회에 대한 불만과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그 대표가 될 것이다.
개척교회를 하다보면 사택에 성도들이 자주 드나드는데 들어와서는 회의를 한다고 하면서 아이들을 추운 겨울에도 피해달라고 하면 그들이 갈 곳이 마땅치 아니하여 밖에서 울면서 떨고 섰다가 들어와서 보면 아이들의 물건을 제자리에 두지 아니하고 만지고 꺼내보고 한 것을 발견하게 되면 그 때부터 아이들은 기분 나빠하고 투덜대기 시작한다.
그와 같은 일들이 쌓이고 쌓이다보면 불만이 노출되고 성격이 비뚤어지기 시작하면서 교회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게 여겨지고 노골적으로 거세게 반발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부모는 그렇게 하면 못쓴다고 말을 하면 어린것들은 부모에게까지 불만을 가지고 반발하기 시작하는데 정말 속 아픈 일들이 많다.
아이들도 자존심과 인격이 있기 때문에 교회서는 저희 인격을 무시한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회에서 목회자에게 대하는 가슴 아픈 일들을 목격하면 더욱 분통을 터트리고 반발하며 교회를 떠나려고 한다.
그리하여 그와 같은 환경에서 자라난 목회자 자녀들은 대부분 그들이 장성해서 목회자의 아들로서 그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회자가 되려고 하지 아니하고 딸들은 목회자에게는 시집가지 아니하려는 일들이 종종 있는데 이는 주로 개척교회나 농촌교회에서 목회하며 고생한 목회자들의 자식들이 볼 것 못 볼 것 다보고 자란 아이들이었기 때문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그러나 도시의 큰 교회 자녀들은 교회가 문제가 있어서 목회자에게 어려움이 있는 분들의 자녀가 아니고는 거의가 목회자의 자녀로 태어난 것을 보람으로 알고 행복하게 여기는데 그 이유는 목회자를 잘 대접하고 사택도 고급 아파트지 누구라도 찾아와서 저희들의 물건에 손대는 일도 보지 못하였지 종종 목회자의 가정에 좋은 선물과 먹을 것과 여러 가지 좋은 것을 선물하는 것만 보고 자란 아이들은 목회자가 어느 직업보다 좋은 직업이라고 철없는 생각을 하고 저희들도 사명감 없이 앞으로 목사 지망생으로 꿈을 야무지게 꾸면서 성장하게 되어 신학교 가는 자녀들이 많고 목사 부인으로 시집가는 아이들도 많다.
그러나 이것은 좋은 환경에서 목회 한 목회자들의 자녀들의 경우고 대부분 개척교회에서나 농촌교회에서 고생을 무척 하고 교회로부터 목회자가 심하게 당한 것을 보고자란 아이들은 부모와 같은 길을 걷지 아니하려고 엉뚱한 짓을 하는데 이는 유명하고 훌륭한 목사님들에게도 예외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와 같은 경우에는 부모님들도 매우 안타깝게 여기면서 교회가 야속한 생각이들 때가 가 있고 너무 불공평하다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다른 경우에는 자식들이 사고를 당하여 정신적으로 이상이 생겨서 해서는 안될 일을 하고 다니며 교회에 문제를 일으킬 때는 정말 고통스러운데 평범한 가정 같으면 그래도 참고 견딜 만 하지만 목회자 가정에서 자식이 문제를 일으키면 그것은 누구에게 말도 못하고 마음의 고통이 이만 저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엘리 제사장 가정의 자식들은 불량자(不良者)라 하나님도 믿지 아니하고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동침하고 여호와께서 보실 때에 죄가 컸다고 하였다.
그 정도가 되면 목회자가 얼마나 가슴이 아프고 마음의 고통이 컸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그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에 죽었는데 그 일로 인하여 엘리 제사장도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고 비느하스의 아내는 그 소식을 듣고 해산하고 죽어버리는 비극을 초래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는 뜻으로 "이가봇"(영광이 없다)이라 하고 세상을 떠났다 .
알 수 없는 수수께끼는 기독교 안에서 유명하신 분들의 자녀들이 문제를 일으켜 부모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 자녀들이 의외로 많았다는 것을 볼 때는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일이다.
말이 그렇지 교회 지도자들의 자식들이 문제를 일으키면 여러 가지 면에서 문제가 발생되는데 지도자들의 가정에서 먼저 심적 고통이 생기고 주변에서 보는 분들에게도 적지 아니한 고통이 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쯤 되면 누구보다 고통을 당하는 것은 사모인데 교인들 집으로부터 자녀들의 비행(非行)에 대하여 전화가 걸려오면 전화를 받는 순간부터 가슴이 뛰고 숨이 막히듯이 답답함을 느끼고 고통스러운 현상이 나타나는데 정말 참기 힘들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전화 벨소리만 나도 울려도 가슴이 두근두근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어 전화 벨소리에 노이로제가 걸렸다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럴 때와 같이 자식 낳은 것을 후회한 적이 없을 정도라는 것인데 차라리 자식이 없었으면 이와 같은 고통은 없었지 아니하겠나 하는 생각 때문에 눈물이 매말라서 흘릴 눈물이 없어 눈물도 나오지 아니하면서 숨쉬기만 고통스러운 것을 느끼며 가슴을 쥐어뜯으며 땅을 치고 통곡하면서 원망스러운 어조로 하나님 어떻게 저와 같은 자식들이 내게 태어나서 주님의 영광을 가리며 살아야 합니까 정말 더 이상 버티기가 어렵사오니 이 고통이 물러가게 하시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자식을 데려가시든지 해서는 안될 기도를 하고 있는 그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라 그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말이다.
특히 발병의 원인이 타인으로 인하여 그렇게 되었다면 더욱 고통스러운데 학교에서 상급생에게 맞아 가지고 정신이상자가 되어서 그와 같은 결과를 초래했을 때 그 마음의 고통은 상상하기 어렵다.
세상에 많은 어머니들이 자식들 때문에 마음에 고통을 당하는 이들이 상상외로 많은 것으로 아는데 지금도 여전히 학교에서 "왕따"라는 말로 집단적인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이로 인하여 따돌림을 받는 학생이 자살을 하고 가출해버리고 학교 가기를 기피하는 현상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고 학생을 둔 부모님들에게는 잠이 오지 아니할 정도로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는 고통인 것이다.
그런데 학교에서 매를 맡고 정신 이상이 생겨서 정상적인 생활을 못하고 문제를 일으킨다면 이는 사모이전에 아들의 어머니로서 그 고통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고 또 그 아들을 집에서 데리고 있을 수 없어 정신환자 수용소에 맡겨야할 때는 마음의 공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어떤 사모님은 자신의 자녀들은 이상이 없는데 성도 가정에 정신 이상 된 아들이 있어 그 아이 집에서는 감당할 수 없어 괴로워하는데 그 이유는 아이가 집안 식구들의 말은 누구의 말도 듣지 아니하고 행패를 부리고 특히 제 어머니에게 더 포악하게 굴고 괴로움을 주어 할 수 없이 그의 어머니는 고충을 털어놓고 말할 때가 없어 교회 목사님께 말을 하였는데 목사님과 사모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럼 우리 집에 잠시 데려다 놓아보라고 하였는데 정말 그 아이를 목사님 댁에 데려다 놓았더니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는 아이 같지 아니하고 학교도 정상적으로 다니고 멀쩡한 아이처럼 행동하니 그 분은 자기의 집으로 데리려 갈 생각을 하지 아니하고 그냥 그대로 사모님에게 맡겨놓으니 사모님은 교인하나가 귀하다 보니 그 아이의 생활비도 받지 아니하고 그를 거두어주는데 보통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요즘 자기의 아들도 양육하기도 매우 힘들어하는데 남의 집 아이까지 거두기는 이만저만한 희생 아니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도 교인을 사랑하는 사모님의 마음은 친어머니도 할 수 없는 일을 사모님께서 한다는 것은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지만 주님의 사랑으로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참고 희생적인 봉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모님은 딸이 문제를 일으키는데 아무리 타일러도 막무가내라 할 수 없어 딸의 머리카락을 가위로 다 잘라버렸지만 그래도 수건을 쓰고 나다니는데 정말 속된 말로 미치고 환장할 정도로 괴로운 것이다.
정말 속속들이 그와 같은 사정을 다 말하려고 하면은 어떻게 다하겠는가 어떤 목사님의 아들은 교회 안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장로님들에게 들키는 일도 있어 목사님께서 사표를 내려고 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던 사모님은 너하고 나하고 같이 죽자고 애통하는 일이 있는데 목회자의 자식이 아니고 보통 일반가정의 아들이라면 가정에서 담배한대 피우는 것을 누가 본다고 해도 그리 문제가 될 일이 없지만 목사의 아들이라는 것 때문에 덕이 아니 된다는 이유로 말이 많다보니 목회자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그 교회를 사면하려고 하니 그 사모님의 마음인들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우면 너하고 나하고 같이 죽자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여하간 자녀들 때문에 제일로 고통을 받는 분은 가정에서 자녀들의 교육과 양육하는 책임을 맡은 사모님께서 훨씬 더 많이 받는다는 것을 목사님이나 다른 성도들도 알고 많이 위하여야 할 것이다.
72.목사(牧師)가 생활비를 주지 아니할 때의 고통
목사의 가정도 일반인들의 가정이나 다를 바가 없고 먹고 입고 살아야 하며 자녀들 교육도 시켜야하는데 목사인 남편이 생활비를 받으면 그 즉시로 외롭고 병들고 어려운 성도들이나 이웃의 불쌍한 사람들에게 다 주어버리고 처자인 가족들에게는 하나도 주지 아니하는 그와 같은 행동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아니하는 것은 남을 사랑하는 것도 좋지만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면 분통이 터지고 속상해서 도저히 참기가 힘든 상태라는 것이다.
바울사도는 기록하기를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하였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한 '자기 친족'(톤 이디온)은 구체적인 범주를 정하기는 어려우나 '자기 가족'(오이케이온)은 '직계 가족'을 의미한다(Guthrie). '돌아보지'의 헬라어 '프로노에이'는 문자적으로 '미리 생각하다', '준비하다', '공급하다'의 뜻을 갖는다.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한 말은 혹자는 기독교의 사랑은 모든 사람들을 향한 것인데 자기의 직계가족조차 돌보지 아니하는 자는 불신자보다 못한 자로서 전혀 복음에 참여할 수 없다는 뜻으로 본 구절을 해석한다(Scott).
또한 여기에서의 '믿음'은 개인의 주관적 믿음이 아니라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고백되는 신앙 고백을 일컫는 것으로 해석하여 '믿음을 배반한 것'을 '교회의 가르침을 저버린 것'으로 보기도 한다(Lenski).
결론적으로 본 구절은 일반성도 전체를 향한 교훈으로 볼 수 있으며 그들의 신앙 고백이 어떻든 간에 가족을 돌보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에 봉사할 만한 기본적인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을 뿐더러, 인간의 원초적인 책무를 무시하는 자이므로 정죄 받아 마땅하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남편은 이와 같은 성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고 남편이 남들에게는 천사같이 보이겠지만 가정에서는 악마같이 보이니 어떻게 남편의 행위를 옳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자동차를 사시라고 돈을 주면 자동차는 사지 아니하고 개척교회 하는 어려운 목회자들에게 주어 버리고 교회에서 아파트를 사라고 돈을 주면 이 또한 개척교회 하는 자들에게 주어버리니 남편의 그와 같은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마음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그 일로 인하여 자식이 교회를 등지고 세상으로 나가버릴 때 더욱 가슴아프고 괴롭고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신앙을 가진 가정이요 목회자의 가정에서 가족을 제대로 돌아보지 아니하여 자식까지 교회 밖으로 내쫓아버리는 남편을 이해할 수 없고 원망과 불평이 나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내색도 할 수 없고 누구에게 말도 할 수 없는 딱한 처지라 남편이 그 돈을 도박을 했다든지 아니면 여자 때문에 써버렸다든지 하면 이는 다른 사람들의 동정도 받을 수 있어 말하기도 한결 쉽겠는데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을 가지고 남편의 흠을 잡으면 듣는 사람들은 전후사정도 모르고 훌륭한 남편을 흠잡는다고 욕할 것 같은 처지라 이래도 저래도 할 수 없어 정말 그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녀들이 결혼할 연령이 되어 결혼시키려고 하면 혼수 준비할 돈이 없다고 해도 걱정도 하지 아니하고 그렇다고 결혼식을 돈 없이 한다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 그 사정 일일이 어떻게 다 말로 하겠는가 오죽하면 교인들이 한가지씩 혼수를 해주고 음식도 장만해주어 간신히 마치는 웃지 못할 일들이 있었다고 하면 그 누가 믿어 줄 수 있겠는가 아무도 긍정적으로 믿지 아니할 것이다.
그래서 남편이 하는 일에 동참하지도 아니하고 협조도 하지 아니하였지만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사모가 협조하였다는 것이 드러나는데 만약에 협조하지 아니하고 사사건건 남편 이 하는 일에 발목을 잡고 늘어지면 이판사판 이다 하고 너 죽고 나죽자 하면서 교회에서 대판으로 싸움이라도 했다면 남편의 선행도 아무런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 뻔하지 아니한가 그러나 마음속으로만 불평하고 자신만 고통스러웠지 남편에게는 노골적으로 불평하면서 쌈해본 일이 없기에 목회는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아니한 점을 보아서는 결과적으로는 자신이 희생하였지만 남편을 도와 협조하였다는 증거가 된 셈이다.
목회자가 웃고 칭찬 받는 뒤에는 아내의 눈물이 있었다는 것을 누가 알아주랴 자신이나 알고 하나님께서나 알지 하는 마음으로 묵묵히 남편 뒷바라지 한 결과로 목회는 어렵게 하지 아니하고 순탄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 결과는 손해보지 아니하였다는 것을 늦게나마 깨달았는데 교회를 등지고 세상으로 나갔던 자식이 다시 돌아와 신앙생활을 하고 그가 조그만 한 사업을 하는데 남들은 I ·M·F로 인하여 사업도 안되어 야단들인데 그 자식놈이 하는 사업은 잘되고 있으니 하나님께 감하지 아니할 수 없고 더욱 감사한 것은 자식놈의 입에서 하는 말이 내가 이렇게 잘되는 것은 우리 아버지인 목사가 심은 것을 내가 거두고 있다는 말이다.
바울사도는 말하기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 지니라"하였다(갈6:9-10) .
이는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한 본 구절은 마지막 추수의 때가 지연된다는 것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Ridderbos). 임박한 종말을 눈앞에 두고는 누구든지 긴장하게 마련이지만, 간사한 인간은 이 '지연'으로 인하여 스스로 피곤해 하며 넘어지게 될 것이다.
한편 본 절의 내용은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는 살후3:13의 내용과 매우 유사하다. 본 절과 살후3:13을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본 절'(토 칼론 포이운테스 메 엥카코멘), '살후3:13'(메 엥카케세테 칼로포이운테스). 살후3:13에서는 '메'와 연결된 부정 과거 가정법 '엥카케세테'에 의하여 '낙심하지 말라'는 '금지 명령형'을 뚜렷하게 설명하였으나, 본 절에서는 현재 가정법 '엥카코멘'과 '메'의 구문이 앞에 있는 '포이운테스'( '행함')와 함께 사용되어 '계속적이고 반복적인 행함'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라 운'은 앞에 기술된 사실들을 결론적으로 다시 반복하여 강조하고자 할 때 자주 사용되며 구약을 인용하고 나서 부연 설명을 시작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 본 절에서는 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
기회 있는 대로 한 말을 혹자는 '있는'의 헬라어 '에코멘'을 가정 법적인 의미로 이해하여 '기회가 있으면'으로 번역한다(Westcott, Hort). 그러나 바울은 일반적으로 가정법 문장을 사용할 때 언제나 '안'(if)을 썼다. 본 절에서는 '안'을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에코멘'을 '기회가 있는 동안', 또는 '기회 있는 대로' 등의 뜻으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Lenski, Ridderbos, Huxtable). 본문은 한 개인의 생애 가운데 제한되어 있는 기회의 제한성을 나타낸다.
착한 일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가돈'은 9절의 '칼론'('선') 대신에 쓰여졌다. '칼론'이 '윤리적인 아름다움'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라면, 본 절의 '아가돈'은 철저하게 '이웃과의 관계'속에서 이해되는 단어이다. 한편 6절에서는 '아가돈'이 아니라 복수 형태인 '아가도이스'('좋은 것들')가 사용되었으나 본 절에서는 단수로 사용되었다. 비록 단수로 쓰이긴 했어도 '아가돈'은 선한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집합적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아가돈'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베푸는 자비와 동정심을 가리킨다. 6절에서의 '아가도이스'는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것에 역점을 두고 있다면 본 절의 '아가돈'은 일방적으로 베푸는 선행에 역점을 두고 있다.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한 말은 '더욱'에 해당하는 헬라어 '말리스타'는 '무엇보다도', '최고로', '특히'등의 뜻을 가진 '말라'의 최상급이다. 바울이 이처럼 믿는 자들에게 특별히 잘해주라고 권면하는 것은 갈라디아 교인들 속에 있는 거짓 교사들과 유대주의자들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 '가정들'로 번역된 헬라어 '오이케이우스'는 신약에서 바울 서신에만 나타난다(엡 2:19 딤전5:8).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무리들은 신앙 공동체의 불가분리 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음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이처럼 바울이 성도들을 하나의 대가족 단위로 파악한 것은 성도들을 '이웃'보다 긴밀(緊密)한 '형제'(아델포스)로 보았기 때문이다.
주석가들도 이와 같이 성경을 해석하고 있는데 남들을 돋는 것은 자기가족이나 다를 바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가족개념과 일치하는 점이 있어 깊이 생각해 볼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저자는 기록하기를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한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하니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하였다(마12:46-50).
선을 행한 목사님은 가까이는 직계가족(直系家族)으로 보고 넓게는 믿는 성도들을 모두 가족으로 보고 있었기에 직계가족이 고생을 해도 예수 안에서 형제가 고생하는 것에 대한 관심이 더 많은 것 때문에 사모님과 자녀들이 고통을 했는데 그와 같은 생활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날리고 복음전파에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장 눈앞에서 볼 때는 자기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언제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 볼 수 있느냐는 식이라 불평이 나왔고 그 일로 고통도 당했지만 실제로는 잃은 것도 없고 다만 불편하게 살았다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이다.
시편 저자는 기록하기를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 도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영히 거하리니 여호와께서 공의를 사랑하시고 그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저희는 영영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하였다(시37:25-28).
그리고 필자가 아는 사모님은 목사님의 선행 때문에 고생하신 것을 알고 있는데 그 목사님은 어렵게 사시면서도 어렵게 사시는 분들을 돕는 은사가 있어서 교회서 주시는 생활비는 물론이지만 그 외에도 빚이라도 내서 약한 교회들을 도우시고 목회자들을 돕는 분이시라 사모님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번은 얼마나 어려운 처지에 놓였는지 불 땔나무가 없어 밥을 지을 수 없게 되자 사모님은 방망이를 방안으로 들고 들어와 농을 부셔버리려고 하시는 것을 목사님께서 말리시며 왜 이래 하시니 사모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땔감이 없는데 무엇으로 밥을 하라고 걱정도 하시지 아니하시니까 옷장이라도 부셔서 밥을 해야 되지 않겠느냐 하고 목사님에 대한 불만 어린 항의를 노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이 때 목사님은 사모님에게 작은 소리로 말하면서 여보 미안하기 짝이 없다고 사과하고 달래면서 우리가 편하고 만족하게 살고는 어려운 사람을 도울 수 없어 당신이 고생하는 줄 알지만 이렇게 무례를 범하고 있소 이 못난 남편을 용서하시구려 하며 손을 잡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니 눈물에 마음 약한 사모님은 여보 아무리 그렇지만 집안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남들을 돕는다고 하면 남들이 무엇이라고 하겠소 정말 당신 때문에 내가 할 짓이 아니고 애들 보기에도 민망하고 무엇이라고 말도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하고 있다고 눈물어린 어조로 뼈를 깎아내는 듯한 호소를 하는데 남편도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 없어 죽을 지경이었다는 곳이다.
그런데도 남편은 계속해서 어려운 교회를 30 군데가 넘게 돕는데 못 말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이제는 지쳐서 원망할 기력조차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와 같이 사모님과 가족들이 고생하는 댓가로 약하고 어려운 교회들의 힘을 얻어 자신들이 최선을 다하여 얼마가지 아니하여 교회들이 자립하는 놀라운 역사들이 나타나는데 거기에 큰 보람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사모님은 그와 같이 모진 고생만 하시다가 그만 세상을 떠나셨는데 목사님은 선한 사업을 하시다보니 돈도 없고 빛만 지게되었는데 그래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사모님 살아 계실 때나 다름없이 미 자립교회를 도우시는데 계속해서 빚은 눈덩이처럼 늘어가지만 그래도 낙심하지 아니하시고 그 일을 계속하셨는데 사모님 세상을 떠나고 나서 혼자 살면서 목회 할 수 없어 다시 결혼을 하셨는데 새로 들어오신 사모님께서 재력이 있는 분이라 그 일을 하시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목사님께서는 늘 미안한 감과 가슴 한 구석에 못이 되어 빠지지 아니하고 있는 것은 돌아가신 사모님의 생각이 늘 없어지지 아니하고 되살아나는 것인데 그는 너무나도 고생만 많이 하시다가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모님께서 그렇게 고생하신 보람으로 미 자립교회들이 새로운 힘을 얻어 자립하는데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와 같은 경우가 아니고 이는 사정이 다른 측면에서 생각을 하겠는데 교회에서 생활비를 받으면 사모님에게 맡기지 아니하고 목사님께서 가지고 계시면서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주는데 이는 도저히 참을 수 없이 분통이 터질 때가 있는데 그 돈을 맡겨주면 누가 그 돈을 다 없이하는지 아내를 믿지 못해서인지 버릇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물질에 욕심이 많아서 아내의 마음 고생시키는데 이해할 수 없는 정도가 되어 이로 인하여 가정불화가 한 두 번 나는 것이 아니고 계속하여 나는데 아내를 믿지 못하는 남편 만나서 사시는 분들은 사모가 아니라고 해도 그 마음의 고통이 이만 저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모님 편에서 생각할 때는 부인을 믿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자신이 돈 관리하는 것이 취미인지 무엇 때문인지 분간 할 수 없어 더욱 고통스러운데 그 고통이 어느 정도냐고 묻는다면 이 남편과 앞으로 살을 맞대고 살아야할지 아니면 일찍이 헤어져야 할지 고민이 적지 않을 정도라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부부는 일신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던가 그렇다면 믿어야 하고 서로 의지해야 하며 죽을 때까지 동고동락(同苦同樂)을 같이해야하는 것이 부부인데 왜 서로 믿지 못하고 남편이 아내를 고통스럽게 해서야 되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아내가 낭비벽이 심하다보니 빠듯한 생활비로서는 도저히 감당 할 수 없으니까 남편이 그와 같은 비상수단으로 계획적으로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와 같은 경우는 극히 드물고 남편이 생활비 전체를 쥐고 필요할 때만 조금씩 주면서 때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도 하는데 아이들 옷과 아내의 속옷까지 자기가 사들고 들어오는 모양새는 썩 보기 좋은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사사건건 시시비비(是是非非)가리며 싸울 수도 없고 정말 교인들의 시집살이도 만만치 아니한데 산 넘어 산이라고 남편의 사나이답지 못한 행동에는 실망을 금치 못하고 정말 이런 남편과 평생을 같이 살아야할지 자신이 자문자답하면서 그 고통을 참으며 사는 사모들이 예외로 많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모님들의 고통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남편이 충분히 덜어 줄 수 있기 때문에 하루 속히 그 고통에서 해방시켜 자유로운 몸이 되어 고통이 변하여 즐거움으로 목회자인 남편을 도와 목회에 성공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목회자가 할 일이라고 본다.
아무리 목회자 아내라고 해도 그도 모든 여자들과 같은 성품을 가졌기 때문에 남편의 사랑도 받고 싶고 자신이 시장에 가서 이것저것 사 가지고 와서 남편과 아이들이 잘먹는 음식도 만들어 주고 싶고 또한 여자이기에 시장 가는 재미도 있으며 속옷 하나라도 자기 손으로 고르고 싶고 가족들의 옷도 하나씩 사고도 싶은 구매욕구(購買慾求)도 충족시켜보고 싶은데 아내가 할 일을 남편이 볼썽 사납게 하고 있으니 보이지 아니하는 갈등이 생기고 남편을 돕고 싶은 마음보다도 방해하고 싶은 생각이 때때로 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임을 고백하며 전국에 있는 목회자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가정살림은 아내인 사모에게 맡기고 목사님들은 교회 일에 전념하시고 양떼들에게 마음을 두고 그들을 부지런히 살피는 일에나 최선을 다하시기를 바란다 (잠27:23-27).
그리하여 사모들에게 아주 작은 기쁨이라도 주어 사모로서 남에게 말못하고 괴로워하며 고통 하는 것을 다소나마 덜어주어 여자로서의 작은 즐거움이라도 빼앗지 말아 주었으면 하고 구차하게 구걸해본다.
73.목사(牧師)의 이성문제로 휘말릴 때의 고통
목사(牧師)와 산부인과의사 (産婦人科醫師)는 직책상 여자들을 많이 접촉할 기회가 많아서 정말 조심하지 아니하면 엉뚱한 사건에 휘말릴 가능성이 매우 높은 직책이라는 점에서 매우 조심하지 아니하면 고귀한 명예에 큰 손상을 입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다윗도 사람인지라 왕의 고귀한 인격과 명예를 잊어먹고 본능적으로 동물과 같이 욕정(欲情)이 발동하는 대로 군인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여 그는 엄청난 고통을 당하였는데 늦게나마 깨닫고 하는 말이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하였다(시119:67.71).
고난 당하기 전에는 한 본문은 시편 기자의 현재 상황을 분명히 밝혀준다. 70인역(LXX), 벌게이트역(Vulgate) 등의 본문 번역은 현재 시편 기자가 처한 상태를 '비천해지기 전에는'이라고 실감 있게 묘사하고 있는데 시편 기자의 이 고난이 단순히 대적들의 적대감 때문에 임했는지 아니면 그 고난이 이웃들의 조롱과 비웃음을 낳는 어떤 특정한 불행을 뜻하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릇 행하였더니(쇼게그) 한 이는 '방황하다', '실수하다', '범죄 하다'등을 뜻하는데, '범죄 하다'를 뜻할 경우 의도성(意圖性)이 없는 죄를 대체로 가리킨다. 여기서는 그 의무를 잊음으로써 비롯된 죄 정도를 가리킬 수 있다. 그는 말씀 파수의 의무를 잊음으로써 죄에 빠지게 되었다. 많은 성도들의 경우 의도적으로나 적극적으로 죄를 짓지는 않지만, 어떤 이유로 인하여 말씀 파수의 의무를 소홀히 할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적극적인 범죄 쪽으로 기울어지고 만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한 말 중에 '유익이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토브'로서 문자적인 뜻은 '선하니라'이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고통을 신적(神的) 은총의 표식 혹은 부성애적(父性愛的) 교정(交情)의 한 방편으로 고백하는 이 말은 보기 드문 신앙의 확신의 일종이라 볼 수 있다.
유사한 표현이 시94:12에서 등장한다:"여호와여 주의 징벌을 당하며 주의 법으로 교훈 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기자는 고통을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을 좀더 배우도록 박차를 가하는 신적 교육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다윗은 간음한 자로서 받은 고난이 이만 저만이 아니고 자신이 남의 아내를 범하고 자신은 자식놈에게 자기의 아내가 당하며 범죄를 은폐하기 위하여 우리아를 전쟁 최전방에 내세워 의도적으로 그를 죽이게 한 그의 죄는 자신의 아들 압살롬으로 하여금 반역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을 제공한 셈이 되어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했는가?
이 정도면 다윗의 부인은 어떠했겠는가 남편의 무분별한 이성문제로 가정은 파괴될 직전에 있고 왕위는 도전을 받게 되었으며 그것도 아들에게 당하고 있으니 그래도 깨닫지 못한다면 이는 사람이 아니지 그래서 그는 많은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의 법을 잊어버리고 죄진 것이 잘못인 줄을 깨달아 신앙적으로 고백하여 후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간음한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가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음행 한 사실이 있는데 그 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였는지 후대를 위하여 교훈으로 기록한 말씀이 있는데 이 시점에서 한번 다시 읽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바울사도는 기록하기를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하였다(고전10:8.11.).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한 말은 이스라엘 백성이 저지른 또 하나의 범죄는 '간음'이었는데 '간음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르뉴오멘'은 일반적으로 성적인 부정 행위를 나타낼 때 사용된 용어로서 5장에서 사용된 용어들과 어원이 같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을 지날 때 그곳에 있는 모압 여인들에게 이스라엘 젊은 청년들이 유혹을 받아 바알브올 우상을 경배하였는데 바알브올을 섬기는 제사 행위는 처녀들과의 음행을 통하여 이루어졌다(민25:1-9). 따라서 우상 숭배와 간음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비울 당시의 고린도 지역도 종교적인 매춘 행위가 성행하던 도시로 이름이 높았고 고린도 교인들은 여신 '비너스'를 섬겼으며 비너스 신전에서 열리는 우상의 축제에는 바알브올을 섬길 때 행해지던 음행이 그대로 재현(再現)되었기 때문에 그러므로 바울은 본 절의 내용을 통하여 우상 숭배와 간음죄는 하나님께 큰 죄악이므로 그러한 유혹에 빠지지 말 것을 간곡하게 권면하고 있다.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한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브올 우상을 섬기며 그곳 여인들과 음란한 교제를 나눌 때 하나님께서는 징벌로 전염병이 돌게 하셨으며 그 일로 이만 삼천 명이나 죽음을 당해야만 했다(민25:1-9). 한편 그 당시 죽은 사람의 숫자가 민25:9 (70인역), 필로(Philo), 요세푸스이(Josephus) 등에 의해 2만4천 명으로 제시되어 천명의 차이가 생긴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민25:9의 내용이 환난의 전 기간(이틀) 동안의 희생자를 언급한 데 반하여 본 절에서는 당일 하루만 계산한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말세를 만난 이라고 한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 텔레 톤 아이오논'은 문자적으로 '세대들의 끝'이라는 의미인데 이 말은 유대인 시대의 끝을 뜻하기도 하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의미하기도 한다(Hendriksen, 마13:39 히1:2).
또한 '메시야 시대' 자체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Godet). 그러나 바울이 긴 세월의 '완성'을 뜻하는 단어 '운텔레이아'를 사용하지 않고, 한 세월의 '끝'을 뜻하는 '타 텔레'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창조이래 지나간 모든 시대의'끝'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Lenski). 즉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옴으로써 유대 민족이 율법을 통한 제한적인 구원의 길로 인도되었던 시대가 막을 내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시대가 열렸음을 뜻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우리의 경계로 한 말의 '경계'에 해당하는 헬라어 '누데시안'은 '권고하다' 혹은 '교정하다'는 뜻을 갖는 단어로(살전5:12,14) 앞에서 언급한 내용들이 당시 고린도 교인들에게 필수적인 것임을 강조한다.
어찌되었든 간에 이성문제로 휘말리게 되면 목회를 망치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인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중에는 자의(自意)에 의하여 휘말릴 수 있고 타의(他意)에 의하여 휘말릴 수 있는데 어찌되었든 간에 사모님은 그 사이에서 죽어나는 것이고 그 고통은 누구도 짐작하기 힘든 것이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기록하기를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하였다(딤전6:11-12 ).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한 이 말은 '하나님의 사람'(안드로페 데우)이라는 호칭은 디모데로 하여금 자신이 어떠한 존재이며 어떤 삶을 살아야 마땅한 것인가를 일깨워 주는데 이 말은 구약 시대에는 선지자들이나 특별한 인물들에게 적용되었다. 예를 들면 모세(신33:1 시90:1), 다윗(대하8:14), 선지자들(삼상2:27;9:6), 엘리야(왕하1:9), 하나님의 사자들(왕상12:22 ) 등에 적용되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와서는 이러한 호칭이 보다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일반 신자들(딤후3:17)이나 디모데와 같은 복음 사역 자들에게 사용되었다.
이것들을 피하고...좇으며 한 '이것들'이란 4-10절에서 언급된 멸망의 요인들을 가리킨다. '좇으며'의 헬라어 '디오케'는 '추구하다'의 뜻으로 '피하고'(퓨게)의 반의어이다. 여기서 바울은 딤후2:22에서와 마찬가지로 그의 특유의 대조법을 사용하여 권면 하고자 하는 바를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라 하였는데 바울은 하나님의 사람인 디모데가 추구해야 할 여섯 가지 덕목을 열거한다. '의'(디카이오쉬넨)는 법률 용어로 '공의'(公義)를 뜻한다(Lenski). '경건'(유세베이안)은 하나님과 더불어 살고 있다는 경외심을 간직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가는 행위로도 볼 수 있다(벧후1:3). '믿음'(피스틴)에 대하여 혹자는 '이것은 주관적인 믿음으로서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을 뜻한다'고 본다(Hendriksen).
그런데 렌스키(Lenski)는 이와 다른 견해를 피력한다. 즉 기독교에 있어서 '믿음'은 가장 근본적인 것인데 처음에 열거되지 아니하고 세 번째 나온 것으로 보아 이것은 신앙적인 차원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을 믿고 신뢰하는 하나의 미덕(美德)을 뜻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전자가 타당하다. 본 절에서 바울은 일반적인 미덕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 덕목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아가페)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하신 일 중 가장 위대한 것으로서 인간이 본받아야 할 신앙의 핵심 요소이다(요일4:10). '인내'(휘포모넨)는 불행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고 '견디는 것'을 말한다(살전1:3;5:14 ). '온유'(프라위파디안)는 신약성경 중 본 절에만 나오는 단어로 '온순'으로 번역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자가 지니는 특징 중의 하나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안위를 제공하고 대인 관계에 있어서 늘 여유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마11:29 고후10:1).
어찌 되었든 간에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항상 조심하여 보통 사람들보다는 도덕적으로 높은 점수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목사가 성적인 문제에 휘말려 교회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어 이곳 저곳에서 수군거리는 모습을 보는 사모의 심정은 편할 리가 없고 남편의 인격을 의심해서가 아니고 왜 그와 같은 일에 말려들어 이 같은 창피를 당해야 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사단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삼킬 자를 찾는 가운데 목회자를 목표로 하는 이유는 그 한 사람만 넘어뜨리면 일반 성도 1천명을 넘어뜨리는 것보다 효과적이라는 계산을 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조심하지 아니하면 안된 다는 것이다.
입에 오르기조차 민망한 더러운 성적인 문제로 목회자가 곤욕을 당하는데는 두 가지 요인이 있는데 하나는 마귀의 시험으로 자의(自意)가 아니고 타의(他意)에 의하여 넘어지는 불행을 당하게 되는데 곧 요셉과 같이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기습적으로 요셉을 유혹하는 경우이다.
참고로 요셉에 대한 성경전문을 옮겨보겠다 "주인이 그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임하고 자기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 그 후에 그 주인의 처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처에게 이르되 나의 주인이 가중 제반 소유를 간섭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임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그러할 때에 요셉이 시무 하러 그 집에 들어갔더니 그 집사람은 하나도 거기 없었더라 그 여인이 그 옷을 잡고 가로되 나와 동침하자 요셉이 자기 옷을 그 손에 버리고 도망하여 나가매"하였다(창39:6-12).
이는 요셉이 범죄하고 싶은 마음에서 계획적으로 주인의 아내에게 가까이 함이 아니고 요셉이 자기의 직무를 다하기 위하여 직무상 그 여인을 만났는데 그 여인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아니하려고 적극적으로 동침을 요구해오는 것을 뿌리치고 도망간 죄로 주인으로부터 괘씸하게 여김을 받아 옥에 갇히는 처지가 되고 말았으나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심으로 항상 형통하였더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경우라도 하나님께서 그 누명을 벗겨주시기 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고 그의 심적. 육체적인 고통은 물론이고 그의 인격에 치명타를 입었는데 회복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오늘의 목회자들이 요셉과 같은 경우가 되어도 요셉 이상으로 피해를 입어 목사는 물론이고 그 가족과 사모는 더욱 마음의 고통이 무엇에 비할 바 못되지만 더욱 괴로운 것은 남들 보기에도 부끄럽고 창피하지만 더욱 기막힌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교회에 피해를 주는 것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한 가운데서 사모로서는 도무지 그곳에 얼굴을 들고 살수가 없어 목사에게 우리 다른 데로 가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새로 시작합시다 하였지만 목사는 막무가내로 이곳에서 누명을 벗고 명예를 회복해야 한다고 버티는 바람에 더욱 일이 악화되는 것을 보는 사모로서는 정말 기가 막힐 뿐이다.
사모로서는 남편의 신앙과 그의 인격을 보아서는 아내인 사모가 백 번 믿고 의심하지 아니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의 결백을 믿어주지 아니하니 기가 막히고 그렇다고 한 사람 한 사람 붙들고 남편을 변호하기는 역부족이라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말을 들으며 견디기도 어려워서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겨 새로 출발하자고 해도 도무지 듣지 아니하니 시험들은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 시험을 처리하는 남편의 어리석은 행동에 더욱 실망하여 삶의 의욕을 상실할 정도로 마음의 고통이 크다.
사모의 마음 같아서는 그와 같은 말을 지어낸 사람과 그 말을 믿고 문제를 확대시키는 자들과 담판을 짓는데 그와 같은 죄를 지었다면 목사가 하나님께 죄를 받아 죽어도 좋다고 말하고 그렇지 아니하고 모함이라면 이 일에 가담하여 교회를 소란케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운 죄로 그들이 죽거나 그 이상의 상응한 어떤 벌이라도 받겠다는 조건하에 깨끗이 교회를 사면하고 떠나주면 문제는 자신이 다 뒤집어쓰고 가기 때문에 교회는 큰 상처가 남지 않겠고 또한 목회자가 억울하다면 주께서 그 일을 꾸민 자들이 죽거나 집안이 망하게 되는 것으로 목회자의 누명을 벗겨 하나님께서 공의로 심판하시는 것을 보여줄 때는 목회자의 명예는 회복되고 목회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도리어 그 일로 인하여 합력 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요셉은 망하지 아니하고 애굽의 총리가 되어 떳떳하게 일하도록 인도하신다는 것을 말해도 남편은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남편의 고집은 굽히지 않고 어떤 희생을 치르고라도 명예회복을 해야 된다는 외 골수로 일방통행 하려는데 사모로서는 더욱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한번 생각해 보라 명예회복은 하나님께서 시켜주셔야지 사람의 노력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진실은 언제라도 밝혀지고 거짓은 언제든지 들어 나고 만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인간의 감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니까 문제가 더 복잡해진다는 것이다.
필자가 들은 이야기를 소개하겠다 "어떤 목회자가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독신으로 목회를 하는데 여기 저기서 유혹도 많고 여러 가지 시험도 많았지만 그러나 그는 흔들리지 아니하고 굳건하게 자신의 정조를 지키며 무난하게 목회를 하는데 난데없이 상상도 하지 못할 사건이 발생하는데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본 교회 안에서 어떤 처녀가 아이를 낳았는데 교회 당회원들이 그냥 못 본척하고 지나갈 사항이 아니라서 처녀를 불러다가 전후사정을 물어보면서 누구의 아들이냐고 물었을 때 처녀는 말하기를 "우리교회 목사님의 아이입니다"장로들은 정말이냐고 계속 다짐해서 묻는데 처녀는 계속 그렇게 대답했다는 것이다.
장로들도 그와 같은 중대한 일을 수월하게 취급할 수 없어서 또 묻고 또 물어 몇 번이고 확인해서 물어도 대답은 한결같다.
그리하여 당회를 소집하여 목사님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면서 어렵게 물으며 목사님 우리교회 어느 처녀가 아이를 낳았는데 저희들이 어떻게 된 셈이냐고 물었더니 그 아이의 아버지가 목사님이라고 하는데 이 어찌된 일입니까 목사님께서 말씀 좀 해주셔야 하겠습니다.
이 때 목사님은 대답하시기를 "장로님들 내가 아니라고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이미 그 아이가 그렇게 말을 했다면 내가 어떻게 해명을 하며 해명한다고 해도 믿으시겠습니까?"그렇게 말씀하신 후에 이랬거나 저랬거나 내 이름이 그 처녀의 입을 통해서 나왔으니 교회에 덕이 아니 되고 문제는 이미 발생하였으니 제가 사면을 하겠습니다.
이 때 장로님들은 말하기를 "그럼 이 아이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이때 목사님은 대답하시기를 "예 그 갓난아이도 제가 책임지고 키우겠습니다"하고 그 아이를 데리고 산으로 들어가 아이를 정성껏 기르고 나날을 기도하며 지내는데 얼마 있다가 그 처녀가 어느 기도원에 가서 방언 기도를 하는데 통역하는 사람이 그 기도를 듣고 하는 말이 너는 그와 같은 큰 죄를 짓고도 양심에 가책이 되지 아니하느냐 하고 책망하는 소리를 듣고 그 아이 어머니가 된 처녀는 다시 본교회로 찾아가서 장로님들을 모셔놓고 사실을 털어놓는데 그 처녀가 하는 말이 목사님께서 혼자사시기에 제가 그 목사님에게 시집가서 사모노릇 하려고 했는데 목사님께서 듣지 아니하시고 계속 못 본척해서 제가 일부러 다른 남자하고 부정한 방법으로 임신하여 아이를 낳아서 목사님을 곤란하게 하려고 한 짓입니다.
장로님들 용서하여 주십시오 제가 죽일 년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죄를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하고 엉엉 우는 그의 모습도 처량하기 짝이 없는 처지인데 장로님들은 더욱 난처한 일이 확실한 것을 알지도 못하고 목사님에게 상처를 주어 교회를 떠나가게 하였다는 생각에 그만 아찔한 생각이 들어 등골이 오싹함을 느끼는 것은 죄 없는 목사님께서 누명을 쓰셨고 그 일로 인하여 교회시무를 그만두는 일까지 생겼으니 장로인 우리들의 경솔함을 용서해달라는 기도와 함께 긴급 당회를 소집하여 이를 수습하는데 목사님을 다시 모셔오기로 하고 아이는 처녀가 데려가는 것으로 일단락을 지었는데 그 목사님의 인격은 예전보다 훨씬 높아져서 목사님의 말씀이라면 무엇이라도 믿어드리는 좋은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만약에 목사님에게 사모님께서 계셨더라면 얼마나 마음의 고통이 컸겠는가 아마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내편이시라는 것인데 주 앞에서만 양심적으로 부끄러운 일이 없다면 그와 같은 시험으로 인하여 더욱 좋은 결과가 나타나는데 문제는 어떻게 참고 견디느냐가 문제인데 이는 목회에 사활이 걸렸기에 가만히 있을 입장도 못되고 그렇다고 속을 보여서 결백함을 증명하기도 어려운 때라면 모든 것을 주께 맡기고 참고 교회가 유익하게 하면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더욱 높여 주실 줄로 확신한다.
모르기는 해도 한국교회 안에 계획적인 모함으로 목회자가 난처한 입장에 처한 이들이 많을 것으로 아는데 이는 하나님께 심판 받을 일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무서운 음모는 생각도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위와는 다른 경우가 있는데 이는 타의에 의하여 이성적인 문제로 휘말려드는 것이 아니고 목회자 자신이 자의에 의하여 의도적(意圖的)으로 문제를 일으켜서 고통을 당하는 일들이 있다는 것인데 이는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는 말이 그에게는 적당하다고 볼 수 있다.
다윗은 자신이 정욕에 이기지 못하고 순간적으로 안목(眼目)의 정욕으로 간음죄를 지었는데 그 일로 인하여 왕의 체통이 말이 아니고 위신은 땅에 떨어져 뭍 사람들로부터 손가락 질을 당하고 왕의 체통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오늘의 목회자들이 같은 내용의 죄를 지었다면 사람들로부터 짓밟히고 교회는 사회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게 되며 주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전도 문은 모조리 막히며 교회는 시험 들어 교인들은 흩어지고 당회는 목회자의 거취를 결정하라는 압력은 들어오고 죽을 맛인데 그 중에 제일 고통을 당하는 것은 사모님인데 교인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피해야 하고 동역 자들의 모임에 나가도 모두가 비웃는 것 같은 느낌이며 어디에 발붙일 곳이 없어 야간도주(夜間逃走)하여 남들이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가서 동기(同期)가 개척하는 교회를 물려달라고 하여 또 물려받아 해나가는데 또 그와 같은 짓을 반복하여 거기서도 있지 못하고 또 피해야하는 이와 같은 일을 당하는 사모님의 마음은 무엇과 같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적절한 단어를 찾기가 매우 힘든다.
다른 것도 아니고 더러운 이성문제(異性問題)로 남들에게 욕을 먹고 목회에 지장을 초래하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더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배고파 고통 하는 것도 아니고 병들어 고통 하는 것도 아니며 더러운 이성문제로 고통 하는 것은 가치도 없는 부끄러운 고통이기 때문에 더욱 참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기막힌 일로 사모님들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는 일들이 있지만 글로 옮기기는 필자의 마음이 허락지 아니하여 생략하기로 한다.
우리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종들이기에 우선 양심에 부끄러운 일을 해서는 안되고 특히 사모가 목회자 뒷바라지하기도 고통스러운데 또 다른 고통을 안겨주는 파렴치한 행동은 더욱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74.목사(牧師)가 강론할 때 마음 조아리며 듣는 고통
교회는 말이 많은 것이 특징인데 교인들은 목회자 한 사람만 대하면 그 뿐이지만 목사는 수 백명을 상대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만족하게 해 줄 수 없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데도 교인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자기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목회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고 신령한 면을 요구하며 강론도 잘 해주기를 원하는 것은 그들의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목사도 능력은 모든 면에서 한계가 있기 때문에 성도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지 못하고 실망을 주는 일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라는 점에서는 볼 때는 할 말이 없지만 그러나 그와 같은 요구는 목회자에게 무리한 요구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이다.
교인들이 보는 면이 너무나도 다양하기 때문에 목회자 하나를 놓고 평가하는 것이 가지각색인데 마치 맹인(盲人)이 코끼리 더듬는 것과 같은 형식인데 예를 든다면 목사가 큰 소리로 강론(講論)하면 혈기 낸다고 말하고 작은 소리로 강론하면 잠재운다고 말하며 빨리 걸으면 방정스럽다고 말하고 천천히 걸으면 느리다고 말하고 연구해서 말하면 아는 척 한다고 말하며 대충 전하면 무식하다고 말하니 정말 목회자의 가는 길은 험하고 고통스러운 길이다.
그와 같은 말은 누가 제일로 먼저 듣는고 하니 사모가 먼저 듣는데 사모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만나는 사람들이 목사에 대한 불평을 직접 목사에게는 못해도 사모에게는 말을 하게 되는데 그것도 말을 할 때는 자기들이 직접 하는 말이 아니고 누구에게 들었다는 식으로 말을 하는데 사모로서는 자기의 가족의 일이고 목사의 일이기 때문에 매우 고통스러운 것이다.
특히 설교에 대한 비판을 많이 하기 때문에 그 시간만 되면 사모는 피를 말리는 한 시간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설교가 길다느니 짧다느니 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아니하는데 성도들을 친다는 말을 들을 때는 정말 고통스러워 견딜 수가 없어 남편인 목사에 그와 같은 말을 비슷하게 하면 알아차리고 시정을 하면 좋은데 남편은 남편대로 성경에 입각하여 하기 때문에 자신은 전혀 잘못이 없다는 것으로 아내인 사모의 말은 들으려고 하지 아니하는 데서부터 문제가 발생하는데 아무리 아내이지만 들을 말은 듣고 시정하면 좋으련만 도대체 어찌 된 셈인지 목사님은 사모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그 말을 하면 더 강하게 감정적으로 하기 때문에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사모가 생각하기는 목사님보다도 비평하는 말은 훨씬 빨리 들을 수 있는데 목사님은 사모의 말을 도무지 듣지 아니하는데 문제가 있고 고통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가 강단에 올라가는 순간부터 밑에서 기도하는 사모는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하는데 그 이유는 목사님이 오늘은 어떤 말씀을 어떻게 전하여 성도들에게 은혜를 끼칠지 아니면 강론이 끝나자 마자 교인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여 문제가 발생할지 잠시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이렇게 말하면 무슨 사모가 그렇게도 믿음이 없어 오늘도 성령께서 역사 하시어 하나님의 은혜가 폭포수와 같이 쏟아질 질 줄로 믿지 못하고 항상 부정적으로 잘못되는 방향으로만 생각을 하고 있으니 문제라고 책망할 줄로 알지만 그러나 실제로 밑에서 아내로서 남편의 강론이 끝나기까지는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인데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물론 교회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으면 별개의 문제이지만 교회가 조용하지 못하고 목회자와 성도간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할 때는 서로 미움이 앞서 있기 때문에 약점이나 흠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어 더욱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베드로서 저자는 기록하기를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느니라"하였다(벧전4:8). 그렇다 사랑만 있으면 목회자가 약간의 말에 실수가 있어도 문제삼지 아니하고 넘어가지만 목사가 미움을 받고 있는 상태라면 교인들은 티끌만 한 흠도 덮어놓고 그냥 지나가지 아니하고 반드시 그것을 문제로 삼아 물고 늘어지는 것이 하나도 이상할 것 없다.
그러므로 문제가 발생한 교회일수록 목사는 설교하기가 어렵고 두려우며 사모는 더욱 마음의 고통을 하는 것은 물어볼 필요도 없지만 목사인 남편은 배짱인지 믿음인지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자극적인 성경만 골라서 소위(所謂) 친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강하게 전하니 그 부작용은 불을 보듯이 뻔한 일이다.
교회가 은혜로울 때는 어떤 말씀을 전해도 성도들이 아멘 하고 말씀을 받지만 교회가 시험에 들었을 때는 아무리 옳은 말씀이라고 해도 귀에 거슬려 짜증이 나고 감정이 상하기 때문에 지혜로운 목사님은 교회가 문제가 발생하여 시험에 들면은 그 사건과는 전무한 쪽으로 말씀을 선택하여 전하기 때문에 교회 시험이 쉽게 물러가기도 하는데 극대극으로 치달으면 해결보다는 악화되어 더욱 고통스러울 때가 많은 것을 체험하여 알고 있기에 사모는 남편에게 좋은 것이 좋다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주문해도 고집이 센 남편은 누가 이기나 해보자는 식으로 극대극으로 치닫고 있으니 문제가 제대로 수습되지 아니하고 더욱 악화만 되어 조언하며 지켜만 보는 아내인 사모로서는 그렇게 고통스러울 수 없다.
그러므로 목사님만 말씀을 전하는데 힘든다고 생각하지 강단 밑에서 신경 쓰면서 듣고 있는 아내를 생각하여 말씀 준비에 기도를 많이 하여 은혜로운 말씀만 전해주면 사단의 역사도 물러가는 것을 알고 문제는 내가 해결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실 줄로 믿음을 가지고 목회 하실 때 사모가 편안할 줄로 안다.
목사들이 범하기 쉬운 것은 자신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성급함 때문에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목회생활은 때로는 보아도 못 본척하는 여유도 있어야 하고 들어도 못들은 척하는 너그러움도 있어야 하며 알고 속아주고 모르고도 속아주는 인격적으로 수양이 되어야 하지 보면 보는 대로 말하고 들으면 듣는 대로 말하는 것은 문제만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말씀을 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인데 세례요한처럼 흠이 없고 자신이 깨끗하게 살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힘이 있어 설득력도 있고 먹혀 들어가지만 그렇지 못하고 우리들의 생활에 약점이 많이 노출 된 상태에서 예수 그리도 같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강력하게 전한다면 말씀을 받는 편에서는 거부감을 나타내어 문제를 삼는데 자기는 그렇게 살지 못하면서 우리들에게 그렇게 살라고 강조한다고 거부감만 더 나타낼 뿐이다.
생활과 말씀이 일치되게 강론하면 모든 교인들이 굴복하고 그 동안 순종하지 못하고 불순종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고 부끄럽게 여기는 일도 있지만 행동은 보이지 않고 말로만 고함치면 반항하는 것이 교인들의 생리인 것이다.
세례요한과 같이 훌륭한 분도 직선적으로 전하다가 결국 옥에 갇히고 그 일로 인하여 목 베임을 당하는 비운을 맞이하였지만 나단 선지자 같이 예(例)를 들어서 전하면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점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단 선지자는 다윗의 간음죄를 책망하고 그 죄를 고백하도록 하기 위하여 말씀을 전할 때 그 말씀이 다윗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 같이 빙빙 돌리면서 전할 때에 다윗까지도 그와 같은 일은 참을 수 없겠다는 의분을 나타내도록 하여 다윗이 그를 당장 벌을 주어야 한다고 할 때 선지자는 말하기를 바로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일격에 치명타를 입혀 다윗이 회개하며 엎드려지게 만드는 것을 생각하고 목회자들도 말씀을 전해야 하는데 수양되지 못한 많은 목사들이 직선적으로 전하다보니 그만 문제가 발생하여 피차가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효과적인 면에서는 직선적으로 전한 세례요한은 담대하게 전하는데 까지는 성공했으나 헤롯을 회개시키는데 까지는 미치지 못하였고 나단 선지자는 간접적으로 문제를 제시하였지만 효과적인 면에서는 다윗을 회개시켜 성군 만드는데 일익을 담당한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에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이 교회 평화에 큰 역할을 하여 많은 사람들이 은혜 받게 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어느 설교학자는 말하기를 "설교는 찬양대 지휘자의 지휘봉과 같아서 많은 대원들이 지휘봉이 움직이는 대로 찬양의 방향이 좌우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 말은 목회자가 설교를 어떻게 하느냐 여하에 따라서 교회 분위기가 좌우된다는 말이다.
목회자의 설교 속에는 행정도 있을 수 있고 정치도 있을 수 있으며 건전한 책망도 있을 수 있고 회개의 역사도 있을 수 있는데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하였다(행2:37-38).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했는데 '찔려'(카테뉘게산)라는 동사는 '때리다' 혹은 '격하게 찔러 관통하다','실신시키다'의 뜻을 담고 있고 따라서 이 말은 격심한 마음의 염려와 양심의 가책이 엉켜진 매우 심각한 고통을 의미한다.
호머(Homer)는 '발굽으로 땅을 옴푹 패게 한다'는 단어를 사용하여 그 내면적 의미를 잘 묘사해 주고 있다. 아무튼 무리들이 '마음에 찔렸다'는 것은 양심의 가책과 더불어 이성적인 죄책감(罪責感)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음을 의미한다(Alexander).
이처럼 제자들 속에 역사 하신 성령은 예수의 예언대로(요16:8-11)그들의 죄를 책망하는 일을 행하신 것이라 무리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경청하고 나서 저희의 유일한 소망이며 오랫동안 고대하던 그 메시야를 스스로 배척하여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는 것을 깨닫고 몸서리치도록 놀라며 '마음에 찔린' 것이다.
우리가 어이할꼬 하는 이 물음은 필사적(必死的인 부르짖음이었다(행16:30). 바울도 회개할 때 이와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행22:10).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애통하면서 사도들에게 도움을 청하게 된 것이다. 또한 그들은 이제 성령의 지시를 기다리는 겸손한 자세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회개할 마음이 생기고 그 동안에 지은 죄를 모두 회개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신앙생활에 유익을 가져왔는데 설교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힘이 있음을 기억하고 감정으로 회개시키려는 억지를 부리지 말고 주의 말씀의 능력의 역사만 기다리고 온유한 말로 전할 때에 주께서 역사 하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바울사도는 기록하기를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하였다(딤후2:23-26).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하였는데 '거역하는 자'는 잘못된 교리에 빠져 '주의 종'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반대하는 이단자들(Bernard, Guthrie)이나 신앙이 미숙한 자(Ellicott)를 가리킨다. 교사들은 이렇게 거역하는 자들에 대해 온유함으로 징계해야 한다. '징계할지니'는 심판이나 정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거역하는 자들이 진리의 길에 들어서도록 권면하고 지도하는 것을 가리킨다.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하였는데 본 절은 교사들이 거역하는 자들을 온유함로 징계해야 하는 이유이다. '회개함'의 헬라어 '메타노이안'은 후회나 뉘우친다는 개념 이상의 것으로 사상이나 인격의 근본적(根本的)인 전환을 의미한다. 교사들이 '거역하는 자들'을 온유함으로 징계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그 교훈을 받아들여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서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고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목회자는 감정적으로 성경을 아전인수격(我田引水格)으로 해석하는 것도 문제지만 듣는 성도들이 동문서답(東問西答)식으로 들어 말하는 이의 뜻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 오해하는 것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 정말 교회 안에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듣는 귀도 여러 층으로 분류하고 준비하고 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사람의 보는 눈도 한결 같지 아니하고 듣는 귀도 마찬가지라 눈이 복이 있는 사람은 사물을 제대로 보고 판단하지만 눈이 좋지 아니한 사람들은 같은 사물을 보면서도 엉뚱한 방향으로 판단을 하고 있으며 귀도 마찬가지인데 귀가 복이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올바로 듣지만 귀가 복이 없는 사람은 반대로 들어 화를 자초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한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삼국지(三國志)에 등장하는 인물인 조조는 도망 다니다가 자기의 친척집에 잠시 머무는데 그 집의 하인들이 부엌에서 칼을 갈면서 어떻게 잡을까 하고 그들이 주고받는 말을 듣고 저놈들이 나를 잡아 죽이려나보다 하고 부엌으로 나가서 그들의 목을 베고 뒤꼍으로 나가보니 돼지 한 마리가 묶여 있는 것을 보았는데 이는 친척집에서 귀한 손님이 왔다고 하인들을 시켜 돼지를 잡으려고 묶어놓고 신바람 나게 칼을 갈면서 이 돼지를 어떻게 잡을까 하고 말한 것을 잘못 듣고 오해한 조조 때문에 생명을 잃었고 말을 잘못 듣고 속단하여 하인들을 죽인 조조는 큰 실수를 한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도 어렵고 듣기도 어려운 것을 기억하고 때와 장소를 가리어 말하고 그 말의 뜻을 새겨들어야 큰 사건을 예방할 것이다.
설교자도 마찬가지인데 말하는 자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들려져서 시험에 들어 곤욕을 치르는 일들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목회자는 조심하고 또 조심하지 아니하면 뜻하지 아니하는 시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모는 그와 같은 사고가 날까싶어 항상 전전긍긍(戰戰兢兢)하며 마음 태우는 아내들을 생각하고 목회자인 남편들이 알아서 그와 같은 고통은 덜어주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목사인 남편이 아내인 사모에게 다른 것으로 즉 좋은 선물이나 어떤 무엇으로 편안하게 해주려고 하지 말고 말씀을 착실하게 충분히 준비하여 말씀을 들을 때에 불안한 마음을 버리고 편히 들으며 은혜를 받도록 해주는 것이 무엇보다도 심적 고통(心的苦痛)을 덜어준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전하는 목사님은 당장에 그 반응을 알지 못하지만 뒤에서 듣고 있는 아내인 사모는 그 즉시로 반응을 듣고 보고 알 수 있는 것은 교인들이 예배를 마치고 나가면서 한마디씩 분이 담긴 목소리로 불평하는 것을 곧바로 들을 수 있기 때문에 교인들을 바라보기가 민망하고 인사하기도 힘들어 어찌할 줄을 모르고 안절부절 하다가 사택으로 들어가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마음이 답답함을 느끼게 되는 것은 속일 수 없는 사실이다.
정말 남편인 목회자들이 이와 같은 아내들의 고충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 수 없어 남편이 사택으로 들어오면 있었던 일 즉 오늘의 설교에 대하여 평가가 아닌 평가를 하고 교인들의 반응을 귀뜸 해주면 다소곳이 받아드리며 알았어 하고 시인하면 좋으련만 속담에 "방귀 뀌고 성낸다"는 식으로 화를 벌컥 내며 "당신이 목회해라"할 때는 이는 무엇으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라 정말 괴롭다 못하여 서글퍼지는 고통을 참는 괴로움은 누구에게 말하랴 아무도 그 고통을 아는 이는 없다는 것이다.
75.순교한 목사(牧師)아내로서의 고통
순교(殉敎)는 주를 위하여 몸과 마음과 생명까지도 모두 바쳐 희생하는 것을 말하는데 죽은 자만이 순교자라고 하지 아니하고 살아있는 순교자라는 책자도 나왔는데 이는 루마니아에서 지하교회를 지도하던 범블랜드 목사의 활동사항을 그리며 그의 고통을 생각하고 쓴 책인데 그 내용은 정말 목숨이 붙어 있으니 살았지 그는 죽은 자나 다름없는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긴 것을 읽을 수 있었다.
특히 공산치하에서 무신론주의(無神論主義)자들과 종교적인 전쟁은 목숨을 걸지 않고는 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너무나도 잘 아는 사실이다.
그런 줄을 알면서도 목사가 되어 복음의 사명을 가지고 순교를 각오하고 사지(死地)로 들어 간 것부터 사모에게는 고통이 예견된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데 사모는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정도로 사명감이 투철하지 못할 경우도 있기에 사명에 의하여 받는 고통과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 받는 고통은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목사는 부름을 받는 순간부터 순교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될 것을 주께서 말씀하셨는데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 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하였다(요21:18-23).
'진실로 진실로'라는 도입 문구는 현재 분위기의 엄숙함을 시사한다. 그리고 도입 문구의 엄숙함에 걸맞게 베드로의 순교(殉敎)가 예고되고 있는데 혹자는 본 절이 '어릴 적에는 가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갈 수 있었으나 성인이 되면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는 의미의 속담을 배경에 두고 있다고 보는데(Bultmann) 분명한 근거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한편 본 절이 베드로의 순교 외에 구체적인 그의 죽음 방식에 대해서도 예언하고 있는지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불트만(Bultmann)같은 학자는 본 절이 '그가 전에는 자신의 길을 스스로 택했으나, 그의 마지막 길은 마음대로 가지 못한다'는 의미를 갖는다고 보고 다음절(19절)과 관련시켜 볼 때 베드로가 자연적인 죽음이 아닌 방식 즉 순교의 형태로 죽음을 맞게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본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한 여기서의 '죽음'은 자연적인 죽음이 아니라 복음을 증거하고 양들을 돌보는 목회적(牧會的) 직무를 수행하다 강제적으로 부과된 죽음 곧 순교를 가리킨다.
이 순교는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점에서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 베드로는 이런 죽음을 당할 것이다. 그것은 그의 주님이신 예수께서 죽음으로 하나님을 영광되게 한 것과 같다. 그런데 성경에는 베드로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순교를 당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는 그의 마지막 행적은 헤롯 아그립바I세의 박해를 받아 옥에 갇혔다가 천사의 도움으로 탈출한 후(행12:1-19) 예루살렘 공의 회에 나타난 것으로 끝을 맺는다(행15:1-11). 성경 외의 초기 문헌들에는 베드로의 최후 행적에 대한 기록이 어느 정도 보존되어 있다. 로마의 감독 클레멘트(Clement, 88-97)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낸 서신(클레멘트1서)에는 베드로가 바울과 함께 로마에서 순교 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터툴리안(Tertullian)은 베드로가 네로(Nero) 황제의 통치하에서 바울과 같은 십자가에 처형되어 순교했다고 말했으며 그는 베드로의 십자가 죽음에서 '남이 네게 띠 띠우고' 라는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보았다(15). 유세비우스(Eusebius)는 베드로의 십자가 처형과 관련하여 그가 자청하여 머리를 아래로 두는 형태로 십자가에 달려 처형되었다고 전한다.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진술의 배경에는 '주님이신 예수께서 십자가에 바른 자세로 처형되었는데 내가 어찌 주님처럼 바로 매달릴 수 있겠는가'라는 의미에서 베드로의 겸손하고도 철저한 순종(順從)을 시사하는 뜻이 들어 있다.
또한 신약 외경인 '베드로행전'에는 비록 사실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지만 매우 감동적인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베드로는 박해를 피해 로마를 떠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길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는데 베드로는 그리스도에게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물었다. 그러나 그 분은 "네가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 하니 내가 다시 십자가를 지려고 로마로 간다"라고 대답하셨다. 이 대답을 들은 베드로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로마로 되돌아가 사역을 계속하다 체포당한 후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린 채 처형당하였다는 것이다.
독신(獨身)으로 목회 하는 분들의 경우에는 거침없이 자기의 사명감만 있으면 얼마든지 순교할 수 있지만 아내가 있는 목회자들은 자기들은 순교할 수 있다고 하지만 아내인 사모들은 그와 같은 사명이 없으면서도 목회자 부인이라는 단순한 이유하나만으로 남편과 같이 순교해야 한다는 논리는 무리가 따른다.
사모는 목회자가 아니고 평범한 여자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 그도 여자이기 때문에 사치도 하고 싶고 백화점에 가서 구매욕구(購買要求)도 충족시키고 싶은 것이며 여자로서의 바램을 이루고 싶은 마음이 있는 여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목회자 사모가 되어 그와 같은 욕구를 억제하고 사모답게 살려고 애를 쓰는 것도 벅찬데 순교까지 강요하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 그런데 오늘의 사람들은 사모까지도 순교함이 마땅하다고 보는 거기에 고통이 뒤따르게 되는 것이다.
물론 옛날에는 남편이 세상을 떠나면 아내도 따라서 자살하는 일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와 같은 면을 찾아보기 힘들고 또 그렇게 할 필요도 없으며 필요가 있다고 해도 옛날처럼 남편 따라서 죽으려고 하는 부인들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목회자의 사모만 유독(惟獨)히 그렇게 하라고 강요할 때 그가 순순히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몰라도 그렇지 아니하면 함께 순교하자고 하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에 그의 고통은 이만 저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남편과 같이 순교는 아니하여도 순교자 이상으로 고생을 얼마나 많이 하는가 일제시대 신사참배(神社參拜) 거부로 인하여 목사님은 옥중에서 세월을 다 보내는데 집에 있는 날보다는 감옥에 있는 날이 더 많아 가정은 형편이 없이 어렵게 되니 옥중에서 고생하는 하는 이도 고생이지만 집에서 집안을 돌보는 사모님의 고통은 누가 알아주지도 아니하는 엄청난 고생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누가 알 수 있는가 말이다.
특히 주기철 목사님 같은 분은 마산 문창 교회에서 시무 하시다가 오정모 사모님과 재혼하여 이북 산정현 교회로 가셔서 바로 투옥되어 순교하시는 그 날까지 목사님의 늙으신 모친을 모시고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사는 생활은 말로 다 표현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고생이 심하였다.
그러나 오정모 사모님은 주를 위하여 끝까지 참고 견디어 신사참배에 강요에 굴복하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승리한 분인데 그렇게 살자니 고생인들 얼마나 했겠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순교하시자 말자 그 사택을 신학교 관사로 쓰겠다고 목사들이 비우라고 하는데는 더욱 절망적이고 마음이 아픈 것은 같은 목회자가 어떻게 순교자 가족을 그렇게 괴롭힐 수 있겠나 하는 생각을 하면 그 서러움은 무엇으로 표현 할 수 없어 괴로워하고 있는데 더 가슴 아픈 것은 당장 순교자의 가족을 맞이하겠다고 집을 마련하고 기다리는 사람들도 없어 당장 이사를 하지 못하고 있는데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불신자들도 아니고 평신도도 아닌 그들이 와서 강제로 가재도구들을 밖으로 끌어내어 순교자 가족들의 마음을 한층 더 아프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록에 의하면 사모님께서 세상을 떠나 장례 일에 어떤 분이 기도하기를 사모님과 같이 많은 고생만 하시다가 세상을 떠나신 사모님을 어떤 표적이라도 나타나게 해달라고 하였는데 난데없이 비둘기가 날아와 상여(喪輿)위에 앉아서 장지까지 따라가고 그 날에 무지개가 떠서 그 앞에 있었다는 것이다.
순교자의 가족은 그 목사님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전부터 고생은 시작되어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 육체적으로 많은 고통을 당한다는 것이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핍박은 있기 마련인데 불신자들이 핍박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받을 수 있는데 같은 기독교인들이 신사참배를 하면서 신사참배 반대하는 사람들을 도리어 이단시하면서 괴롭히는 것은 참기가 힘들고 대하기가 더욱 어렵다는 것이다.
손양원 목사님께서는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별명까지 남기신 분이시지만 그는 아들들을 순교의 제물로 바치고 자신도 하나님께 순교의 제물로 바쳤다.
그런데 제일로 고통을 당하신 분이 사모님이 신데 그는 아들 둘을 순교 제물로 바치는 엄청난 일을 당했지 거기다가 얼마 있지 아니하여 사랑하는 남편까지 공산주의자들에게 순교를 당하시는 것을 목격을 했으니 그 정신적인 충격이 얼마나 컸겠는가는 상상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사모님께서 부산 전포동에 사실 때 필자가 찾아 뵙고 위로를 드렸지만 당시의 충격으로 인하여 아직도 그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신 점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목사님께서 세상을 떠나시니 슬픔도 가시기 전에 어린 자녀들을 양육하는데 얼마나 많은 고생이 되겠는가 남편이 살아 있을 때도 고생스럽지만 돌아가시고 난 후의 사모님의 고생은 더욱 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모님이 순교자가 아니고 목회자인 남편이 순교자인데 그는 살아 있는 순교자가 되어 사는 것이 죽는 것 이상으로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사모님들이나 앞으로 사모님 되실 분들은 순교자의 길을 간다고 각오하고 목회자와 결혼하여 앞서간 선배들의 고통의 길을 뒤따라 걸어가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사모님들은 순교할 의무나 책임이 없다고 하지만 남편인 목사님들께서 순교하면 같이 순교하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죽음의 길도 마다하지 아니하고 사모의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다.
믿지 아니하는 여인들도 남편 죽고 과부가 되어 산다는 것은 쉽지 아니하여 거의가 재혼을 하게되는데 목사의 부인이라고 예외는 아니라는 것인데 그러나 재혼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고 혼자 산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재혼하기가 더욱 어려운 것은 순교한 목사님의 자녀들이 있을 때인데 목사는 순교하였지만 사모도 순교하라는 원칙이 없기 때문에 반드시 순교해야 된다고 강요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 재혼을 하든지 아니하든지 전적으로 본인의 의사에 달려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녀들을 데리고 재혼한다는 것도 어렵고 그렇다고 그들을 데리고 산다는 것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모님은 생각하기를 남편과 같이 순교할 사명은 없지만 순교하는 것 이상으로 산 순교자가 되어 자녀들과 함께 일생을 주를 위하여 살겠다고 각오하고 어떤 어려운 일도 마다하지 아니하고 굳게 살아가는 것은 순교이상으로 고통스럽다고 표현하면 지나칠까?
사모도 여자라 때때로 외로울 때는 자녀고 무엇이고 순간적이지만 눈에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외로움에만 사로잡혀 자기의 본 정신이라고는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를 때가 많아 그런 때는 별별 생각을 다하게 되는데 그래도 그와 같은 생각은 순간인지라 저 어린 자녀들 두고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하고 잠시나마 해서는 안될 생각을 했다고 후회하며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먹고 살 것을 걱정하지만 사람인지라 얼마 가지 아니하여 마음이 또 변하여 괴로워하는 반복적인 생활을 거듭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나이가 많아 늙고 자녀들이 장성하였다면 문제는 달라질 수 있지만 나이도 젊고 한창 인생의 맛을 알고 삶을 즐길 나이에 남편이 순교를 했다면 아니 순교가 아니고 때가 되어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해도 혼자 산다는 것은 외로움과 전쟁을 선포하고 어떻게 이기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거기다가 아이들이나 어머니의 말을 고분고분 듣고 따라준다면 한결 쉽겠는데 불행하게도 자식들이 아버지의 순교를 목격하고 충격으로 인하여 곁길로 나아가 순교자의 자식답게 살지 아니하고 정반대로 기독교를 떠나서 철학관(哲學館)을 차리고 엉뚱한 짓을 한다고 생각해 보라 얼마나 기막힐 일인가 아버지는 기독교 진리를 수호하고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순교를 했는데 자식은 기독교를 떠나 순교자인 아버지를 부끄럽게 하는 도무지 해서는 안될 일을 할 때 그 어머니의 가슴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지 아니하겠는가?
이럴 때는 남편이 주의 뜻을 따라 순교하였지만 인간적인 생각에 야속하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하며 그 속상함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기분에 의하여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뇌리에 스쳐가기 때문에 또 한번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마음으로 방황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라는 점에서 혼자 살면서 자녀들을 기른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표현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 부부들은 주님의 종들이라는 것을 함께 생각하고 순교할 정신으로 평소에 생활해야지 어느 순간에 어떤 일을 당해도 당황하지 아니하고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여 현실을 받아들여 차분하게 대처하게 될 것이다.
76.돈 없이 예배당 건축한 목사(牧師)사모의 고통
학1:7-8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볼지니라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하였다 .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볼지니라 한 본 절은 5절과 동일한 내용인데 만군의 여호와이신 하나님은 귀환한 유다 백성들이 삶 속에서 겪는 어려움을 예증으로 제시하며, 자신들의 삶을 성찰하도록 촉구한다.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하신 말씀 중에 '산'(하하르)은 정관사가 첨가된 단수 명사이다. 정관사가 붙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혹자는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백향목을 레바논에서 가져왔기 때문에(왕상5:5-6) 레바논을 가리킨다고 주장하기도 하며 혹자는 모리아 산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하르'에 포함된 정관사는 어떤 특정한 지명을 가리키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일반성을 드러내는 용법이다. 그러므로 당시 유다 백성들이 주변에 있는 산에서 성전 건축 자재를 마련했음을 알 수 있다(Keil, Delitzsch, Verhoef).
이러한 견해는 당시 유다 백성들이 상당히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레바논과 같이 특정 지역의 나무를 가져오는 것은 무리였음을 고려할 때 신빙성이 높다. 당시 유다 백성들이 거하던 그곳에서는 포로 생활 기간인 70년 동안 버려져 있었기 때문에 나무들이 많이 있었다(느8:15-16,).
하나님은 결코 엄청난 재물이 드는 자재를 가지고 성전을 건축할 것을 요구하지 않으셨다. 유다 백성들이 마음만 먹으면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자재로 성전을 건축할 것을 명령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화려한 건물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유다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바라셨음을 시사한다.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한 본 구절은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한 결과를 나타낸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순종을 통해서 기뻐하시며 영광을 얻으신다.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에르체 보)는 문자 적으로 '내가 그것 안에서 기뻐할 것이다'라는 의미이며 이는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이 완공한 성전 안에서 기뻐하실 것임을 시사한다.
또한 '기뻐하고'는 주로 하나님께서 열납 하시는 희생 제사를 나타낼 때 사용된 용어로 유다 백성의 성전 건축이 언약 적인 사랑과 자비를 함축하고 있는, 하나님께서 즐거이 받으실 만한 희생 제사와 같은 것임을 암시한다(P.A.Verhoef). 그러므로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이 성전을 완공할 때 영광을 얻게 되실 것이다.
신약시대에는 예배를 드리는 장소로서의 예배당을 교회 형편에 알맞게 지어서 성도들이 모여서 주께 영광과 찬양을 돌리는 거룩한 장소를 마련하는데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예배드리기 편리한 적당한 장소보다는 화려하고 웅장하게 지어서 목회 성공의 하나로서 내세우는 일들도 배제할 수 없다.
그리하여 처음부터 무리하게 시작하여 건축비가 없어 시작하면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맹목적인 믿음으로 예배당을 크게 시작하여 건축비 때문에 건축자들과 문제가 생겨 심지어는 싸움을 하고 그들이 교회당 앞에 와서 행패를 부리며 예배에 지장을 초래하는 일도 있고 때로는 건축자가 목사님에게 내 입장이 난처하니 목사님과 저와 함께 죽어야 하겠습니다.
하고 제의를 했을 때 목사님은 그럽시다 함께 죽읍시다 하고 둘이 바닷가로 가서 죽기로 하고 가기는 갔는데 서로가 난처한 얼굴로 바라만 보고 있지 선뜻 누가 먼저 물에 뛰어 들지 못하고 있다가 목사님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돌아갑시다 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웃지 못할 희극이 벌어지는 일도 있었는데 이 광경을 지켜본 사모님의 마음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그 심정 누구에게도 말도 못하고 과부 되는 것은 문제가 아닌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울까 그것이 걱정이 되고 이방인들의 조롱거리가 되어 전도의 문을 막을까 그것이 제일로 염려가 되어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그 심정 누가 알아주랴 자식들이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교인들이 알아주는 것도 아니며 목사와 사모만 발을 동동 굴러가면서 몸부림치지만 당장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되다보니 교인들도 얼마 안 되는데다가 건축비의 부담이 생기니까 교회를 떠나는 분들이 생기고 손발이 맞지 아니하여 정말 후회도 해보고 잘못했다는 느낌도 가져보지만 이제는 엎질러진 물과 같아서 이래도 저래도 못하는 안타까운 지경에 이르러 노회에서 돕지만 큰 도움이 아니 되고 동역자들이 돈을 거두어 쌀도 사고 반찬도 사 가지고 와서 우선 밥은 먹고살아야지 되지 않겠느냐는 위로도 잊지 못할 하나의 추억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정말 그쯤 되고 보니 굶기를 밥먹듯 하고 사실은 양식이 있어도 밥맛이 없어서 먹지도 못할 지경에 양식마저 떨어지고 없으니 굶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고 말았고 어쩌다 양식이 생기면 먹으면서도 밥맛을 알지 못하고 먹게되는데 자나깨나 건축비 꿈에도 소원이 통일이 아니고 건축비 마련하여 예배당 짓는 것 마무리하여 하나님께 헌당식 하는 것이다. 이쯤 되니 아이들의 꼴도 말이 아니고 가정은 가정답지를 못하고 목사나 사모는 자녀들에게 미안한 마음 금할 길이 없어 아이들 잠재워 놓고 남편과 같이 손을 잡고 하나님께 기도인지 사정이 딱하니 푸념인지 분명하지도 아니한 말을 하면서 한없이 우는 날이 그 몇 밤이었던가 남들은 다 같이 목회 하는데 예배당도 크게 신속하게 지어서 화려한 헌당식을 하는데 왜 우리는 그렇게 안될까 생각하면 답답하고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는데 그렇다고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아니하여 전전긍긍하는 마음 조아리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라 자칫하면 만성이 되어 이판새판이라는 간 큰 남자가 되어 될 대로 되라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는 일 외에 더 있겠느냐는 막가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건축비도 없이 예배당 건축하신 분들은 이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하리라고 믿지만 그와 같은 일을 당해보지 아니한 분들은 실감 있게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심하게 표현하면 벽돌 하나가 목회자 내외의 뼈를 갈아 시멘트로 사용하고 살을 긁어 모래로 사용하며 피와 눈물을 물로 대신하여 예배당을 지었다고 해도 지나치지는 아니한 말일 것이다.
그 정도가 되었으니 목회자 내외는 얼마나 많이 우는 것은 물론이지만 살이 패이고 뼈가 느슨하기까지 아니 손이 터지도록 일을 하였지만 무엇하나 속시원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없어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울면서 기도하는 그 시간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오 하나님 저를 도와주세요 제가 살기 위한 가정집이 아니고 자식들에게 물려줄 저의 재산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서 대대로 주께 예배드릴 예배당입니다.
다윗은 그렇게도 주의 전을 짓고 싶어했으나 하나님께서 허락지 아니하심으로 돈과 인력(人力)이 있어도 짓지 못하고 솔로몬이 지은 것을 생각합니다.
저도 그와 같은 경우입니까 속 시원히 저에게 말씀하소서 만약에 짓지 아니하는 것이 주의 뜻이라면 지금이라도 중단하고 후손에게 미루겠나이다. 하고 기도인지 넋두리인지 알 수 도 없고 분간도할 수 없는 말을 하면서도 하나님 도와주옵소서 욕심 어린 기도를 드리곤 하다가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꼬박 날을 새운 적이 적지 않다.
그렇지 아니하여도 목회가 신통하지 아니하여 지금까지 지내오는 과정에서 제대로 무엇이 잘 되지 아니하여 처자들만 고생을 듬뿍 시켰는데 이번에는 그 것도 모자라 메가톤(megaton) 급 고생을 안겨주고 있으니 가족들에게는 정말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그 지경에 이르고 보니 아이들의 먹는 것과 입는 옷에는 신경 쓸 여유도 없어 그 몰골은 거지와 같고 먹는 음식은 말로 표현하기는 적절한 단어가 없을 상 싶다. 그리하여 비참한 몰골로 잠들어 있는 모습을 아내와 함께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니 누가 울자고 하지도 아니하였는데 어느새 두 사람의 눈언저리에는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더니 아내의 음성은 떨리고 있으며 어깨를 들먹이며 울기 시작하고 있는데 남편인 목사는 여보 내가 못나서 이렇게 되었소 당신이 나와 결혼하여 지금까지 목회자의 부인으로서 같이 살아오면서 고생만 하고도 불평 한마디하지 아니하고 내가 하는 일을 잘 도와주었는데 결과는 또 이렇게 엄청난 고생을 시켜서 정말 미안하오 하니 아내는 그래도 불평하지 아니하고 여보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우리편이라고 하시지 아니하였습니까 지금은 울지만 얼마가지 아니하여 반드시 웃는 날이 있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아니합니다.
지금도 어려운 가운데서 예배당을 지으면서 고생하는 분들이 예외로 많다는 것인데 앞으로 목회 하시는 분들은 예배당부터 지어놓으면 교인들이 몰려온다는 사고를 버리고 교회 형편 따라 알맞게 점차적으로 확장하는 한이 있어도 무리하게 시작하여 가족들은 물론이고 교인들에게까지 부담을 주어 교회를 떠나게 하는 일은 없도록 해야할 것이다.
그리고 예배당을 건축할 계획이 있다면 철저하게 미리미리 준비하였다가 어느 정도 준비가 되면 그 때 시작하여 어렵지 않게 건축을 마치는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어떤 교회는 약간 무리를 해서 예배당을 크게 지었는데 건축비 때문에 건축자들과 밀고 당기는 일을 계속하여 부덕한 일도 있었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교회 장로가 목회자에게 하는 말이 목사가 신령하지 못하여 지어 놓은 예배당도 채우지 못한다는 말을 심심치 아니하게 할 때는 그 고통이 적지 아니하여 괴로워하는 모습을 본 아내는 가슴이 아파서 견디지 못하며 울고만 있는 딱한 사정은 차라리 예배당을 크게나 짓지 아니하였더라면 이런 고통은 없을 것인데 하고 후회도 해보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과 같이 되어 버렸으니 이제는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다.
방법이 있다면 예배당이 비좁도록 사람의 수를 채우는 길밖에는 없는데 어디 그것이 사람의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 기도할 뿐이다.
에스겔서 저자는 기록하기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인수로 양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 제사드릴 양떼 곧 예루살렘 정한 절기의 양떼 같이 황폐한 성읍에 사람의 떼로 채우리라 그리한즉 그들이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느니라"하였다(겔36;37-38).
그리고 사도행전 저자는 말하기를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하였으며(행 9:31) 그리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하였다(행2;47).
이는 예배당 좌석을 채우는 비결을 말씀하셨는데 목사에게만 그 책임을 돌리는 교회도 문제가 있는데 교회는 목사 혼자만 잘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성도들 모두가 평안을 유지하고 주변사람들에게 칭찬 받도록 노력해야 하며 목사도 장로도 피 땀흘리는 기도가 필요하고 그리고 온 교회 성도들이 기도하는 일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막 9 : 29 ) .
초대교회 같이 다락방이라도 좋으니 성도들이 구원받은 즐거움 속에서 주님의 재림을 대망하고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증거하며 서로 사랑하고 위로하여 날마다 믿는 자들이 더 불어나는 역사가 일어나면 예배당 짓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아니할 것이지만 예배당부터 지어 놓으면 사람들이 몰려올 것이라는 엉뚱한 생각으로 예배당부터 건축하자는 계산부터 하면 본인은 물론이지만 아이들과 사모님의 고통이 가장 크고 교회 성도들도 그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삼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어떤 목사님은 재정적 능력도 없으면서 은행의 대부를 받아 가지고 예배당을 짓기는 했는데 뒷감당을 하지 못하고 교회는 교회대로 시험에 들고 장로님은 다른 교회로 떠나고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교회를 매각(賣却)하여 빚을 청산하고 원점(原點)으로 돌아가 그 동안 고생한 대가가 장로는 떠나고 사모님의 눈에 그 많은 눈물만 흘리는 결과를 초래하여 주변 많은 사람들에게 마음의 부담만 주는 일은 물론이고 자신과 성도들은 허탈감에 빠지는 바람직하지 못한 일을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아픔의 기억이 될 것이다.
그리고 특히 요즘은 예배당 건축 때문에 많은 교역자들이 고통을 호소하는 말들을 더 많이 들을 수 있는데 I·M·F 이전에 대출을 받아 예배당을 지었지만 은행에 갚아야 할 돈의 액수가 수억이 되다보니 이자만 해도 엄청나 난감한 처지에 빠져 목회자는 떠나려고 하고 교인들은 그들대로 피를 말리는 고통을 하는 모습을 볼 때 심히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지금이라도 모든 교역자들은 예배당 짓는 것을 교회 우선 할 일로 정하지 말고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노력을 하여 사람들이 그 교회를 선호하여 구름 떼와 같이 벌떼와 같이 몰려오면 예배당 짓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고 무리하게 건축에만 신경 쓰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배당 짓는 것은 돈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열심으로 되는 것도 아니며 때가 성숙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예배당을 힘들이지 아니하고 짓게 될 날이 반드시 온다는 믿음으로 차근차근 벽돌하나라도 마련하는 준비만 하면 반드시 지을 것이다.
필자가 아는 부산 어느 교회는 30년 이상 준비하여 예배당 짓는데 큰 무리 없이 거뜬하게 지어 하나님께 헌당식(獻堂式)을 함으로 주께 영광 돌리고 성도들에게 기쁨을 안겨주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았다.
교회 일은 언제나 순리대로 되어야지 억지나 고집으로 하면 반드시 고통만 따르고 역효과만 초래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많은 목회자들은 예배당 짓는 것이 우선 되어야 한다고 논리(論理)를 전개하는데 못을 파놓으면 고기는 생기기 마련이라는 것인데 그럴 듯하지만 연못은 팠지만 물이 고이지 아니하여 고기가 살 수 없음을 알지 못하고 있는 지혜롭지 못한 어리석음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교회는 항상 예배당과 같은 건물이 우선되어서는 안되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우선 되어야하고 화목이 우선 되어야 건물문제는 쉽게 해결될 것이다.
여하간 건물에 욕심을 내면 첫째 자신이 고달프고 그 다음에는 사모님께서 고달프며 교인들이 매우 고달파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사람의 생각에는 개척교회 시작하여 건물이 상가 이층이나 지하이면 교인들이 들어 왔다가도 나가버린다는 말을 하는데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그렇다고 긍정할 수 있으나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어느 교회는 건물은 허술하였지만 그 곳에 모이는 성도들의 신앙이 훌륭하여 선교도 많이 하고 남들을 돕는 일을 많이 할 적에는 교회가 은혜스럽고 사랑이 넘쳤는데 그 교회를 팔아서 장소를 옮겨 대형교회로 지으면서부터 교회는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여 말로 할 수 없는 안타까운 일들이 속출하여 차라리 그냥 그대로 있었음이 좋았을걸 하는 마음이 더 많다고 하는 것이 솔직할 것이다.
전주 안디옥 교회는 건물은 깡통교회이지만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은 건물 때문이 아니고 교회가 할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교회가 하는 일이 옳다고 동정하는 사람들이 대거 몰려오기 때문에 교회는 크게 성장하는 것이다.
건물 크게 지을 형편도 못되면서 무리하여 지어놓고 사람도 채우지 못하고 빚도 갚지 못하여 시험에 들어 모두가 고통스러워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지하가 되었든 2층이 되었든 상관없이 주님이 함께 하시는 교회가 되어 평안한 목회 하는 것이 건물 크고 웅장하게 지어놓고 불안하고 고통스럽게 목회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고 그래야만 처자나 교인들에게 고통을 주지 아니할 것이다.
그렇다고 건물을 짓지 말라는 말은 아니고 교회 형편에 맞추어 무리하게 하지 말고 순리대로 지어야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뿐이다.
77.목사(牧師)인 남편에게 매맞고 배척받는 고통
목사라고 천사도 아니고 모든 사람들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은 많은 사람들이 목사는 모두가 성인(聖人)으로 알고 있다가 어느 날 문제점이 노출되면 크게 실망을 하고 배척하는 일들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는 처음부터 그렇게 여긴 사람들의 잘못이다.
사도행전 저자는 기록하기를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베드로가 일으켜 가로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하였다(행10:24-26).
여기서 중요한 말씀은 "나도 사람이라"하는 대목인데 나도 사람이라 한 고넬료의 겸손한 행위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은 신적 권위를 사양하며 동등한 사람임을 전제하고 있다. 이 같은 베드로의 행위는 겸손을 모범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나 한편으로는 사도와 일반 성도는 하나님 앞에 동등한 사람으로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가 있을 수 없는 것임을 시사하는 것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고넬료가 로마 군인이라는 점에서 그의 경배 행위가 로마인들의 황제 숭배와 관련된 것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인간에 대한 신적인 숭배는 있을 수 없는 것이라는 암시와 함께 로마 황제에 대한 숭배를 부정하는 의도를 가지고 이러한 말을 했을 것이다.
여하간 베드로는 주의 종으로서 고넬료보다 더 높거나 위대한 위치에 자기를 놓지 아니하고 자기도 보통 사람들과 같다는 것을 보여주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점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 많은 성도들은 목회자들을 보통 사람의 이상으로 보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때로는 바람직하지 못한 일들이 생기는데 이런 일들은 있어도 안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 목사도 가정에 돌아가면 가장이요 아이들의 아버지며 지어미의 어엿한 남편이며 가정을 이끌어갈 책임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바울사도는 감독의 직분을 가질 자들의 자질에 대하여 논할 때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하였다 ( 딤전3:2-5).
특히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께 교회를 돌아보리요) 한 본 절에 괄호가 있는 것은 이 구절이 앞 절을 설명하는 삽입구임을 암시한다. 가정은 사회 집단의 최소단위이다. 이 최소 단위를 잘 다스릴 수 없는 자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잘 돌볼 수 없다.
한편 '교회'의 헬라어 '엑클레시아'는 '엑칼레오'('불러낸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로 본래 '정규로 소집된 시민의 정치적 집회'를 의미하였으나 점차 이스라엘의 종교적 집회에도 사용되었고 나중에는 '그리스도인들의 집단'을 가리키게 되었다.
따라서 이는 건물을 가리키기보다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가리킨다. 교회는 가정과 유사점이 많다. 복음의 사역자에 대한 권위가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권위와 비슷하고 그리스도의 피로 모인 형제와 자매가 있는 것도 그렇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는 큰 가정이라 할 수 있다(Barnes).
그리하여 바울사도는 단도직입적(單刀直入的)으로 말하기를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하였다 ( 딤전 5 : 8 ) .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하고 말한 '자기 친족'(톤 이디온)은 구체적인 범주를 정하기는 어려우나 '자기 가족'(오이케이온)은 '직계 가족'을 의미한다(Guthrie). '돌아보지'의 헬라어 '프로노에이'는 문자적으로 '미리 생각하다', '준비하다', '공급하다'의 뜻을 갖는다.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한 말을 혹자는 기독교의 사랑은 모든 사람들을 향한 것인데 자기의 직계가족조차 돌보지 아니하는 자는 불신자보다 못한 자로서 전혀 복음에 참여할 수 없다는 뜻으로 본 구절을 해석한다(Scott).
또한 여기에서의 '믿음'은 개인의 주관적 믿음이 아니라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고백되는 신앙 고백을 일컫는 것으로 해석하여 '믿음을 배반한 것'을 '교회의 가르침을 져버린 것'으로 보기도 한다(Lenski).
결론적으로 본 구절은 일반성도 전체를 향한 교훈으로 볼 수 있으며 그들의 신앙 고백이 어떻든 간에 가족을 돌보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에 봉사할 만한 기본적인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을 뿐더러, 인간의 원초적인 책무를 무시하는 자이므로 정죄받아 마땅하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교회 지도자이기 전에 가정에 가장으로서 가정을 화평하게 다스릴 의무와 책임이 있는데 목사가 가정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자기는 교회 일만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사모들에게 가정의 모든 책임을 다 떠맡기고 가정에 대하여서는 나 몰라라 하는 이들이 있다는데 문제가 되는 것이다.
교회에서는 성도들 앞에 거룩한 것 같이 보이고 감히 어느 누구도 근접하기 힘들어 말도 잘 붙이지 못하는 근엄한 태도를 보이는데 가정에만 돌아가면 밖에서 교인들이 보고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밖에서는 천사(天使)대접을 받던 목사가 집에서는 악마(惡魔)로 돌변하여 아내를 괴롭히는 것은 물론 아이들에게까지도 좋은 아버지가 되지 못하고 자식들에게 본이 되지 아니하여 아이들이 반항하는 참담한 일들이 종종 나타나고 있으니 문제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모님은 솥을 강단으로 가지고 와서 여기가 좋사오니 우리는 영원히 이곳에서 삽시다, 왜 집에서 보는 남편상과 교회 강단에서 보는 남편 상이 너무나도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집에서는 가장으로서는 영점처리 될 남편이 강단에만 서면 100점 만점 짜리 남편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상수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믿으려하지 않겠지만 예외로 아내를 구박하는 목사들이 많다는 것은 놀라지 아니할 수 없는데 특히 신령하다고 하는 분들이 더 그렇다는 데는 아연실색(啞然失色)하지 아니할 수 없다.
사모가 은혜 없다고 구박하고 영력(靈力) 없다고 구박하며 금식해라 산기도해라 그래가지고 사모역할 어떻게 하겠느냐 등등 괴롭히는 방법이 가지가지라 무엇으로 표현하기 힘든 거짓말 같은 참말이라 남들이 설마 그럴 리가 하고 반신반의(半信半疑)하여 말하는 자신이 정신이상자로 몰릴 수밖에 없는 일들이 예화(例話)나 전설(傳說)속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고 현실 목사의 가정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사모는 그래도 목사의 위신을 생각해서 매를 맞으면서도 행복한 척 하는 수준급 연극배우의 역할을 해내야 하는 명 연출가가 되어야하는 한심한 일은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서나 알지 누구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는 겉으로는 남들의 부러움을 사고 속으로는 골병드는 것이 사모가 가는 길이기에 다시 태어나도 사모가 되겠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자신은 다시 태어나면 죽어도 사모는 안되겠다는 결심을 몇 번이고 해보면서 내가 어떻게 끝까지 이 역할을 해낼지 눈앞이 캄캄하여 때로는 자살을 할까 하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면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말이다.
사모는 목회자가 아니기에 하는 일은 가정에서 남편의 아내로서 손색없이 하고 자녀들의 어머니로서 아이들 양육하는데 최선을 다하여 남편인 목사가 마음놓고 교회일만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목사 사모가 할 가장 큰 역할이라고 믿는다.
사모가 자기의 위치를 탈선하여 목사가 할 일까지 간섭하고 나서며 당회장 노릇까지 하고 나선다면 이는 목사의 입지는 점점 더 좁아지고 똑똑한 사모 때회를 망칠 가능성은 다분히 있다는 것 모르지는 아니할 줄로 안다.
사모가 목사에게 매맞는다는 말은 밖으로 노출된 것도 있지만 노출되지 아니한 것이 더 많다는 점에서 다시 한번 집고 넘어가야 할 문제 중에 하나다.
어떤 목회자는 아내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아니한다고 하여 그를 친정으로 보내고는 얼마간 있다가 아내가 친정에서 죽었다는 사망전보를 접하고 그가 장례 치르려고 처가에 다녀왔다고 누구도 사모가 죽지 아니하였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완벽한 연극을 했는데 그 교회 어느 집사가 아무래도 석연치 아니한 구석이 있어서 자기 교회 목회자 사모의 친정 집으로 직접 찾아가서 사망 여부를 확인해야하겠다고 생각하고 목회자 몰래 가보니 죽어서 장례식까지 거행한 사모가 다시 부활한 것도 아닌데 엄연히 살아 있는 모습을 보고 집사가 자기 정신이 이상 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면서 확인한 결과 분명히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돌아와서 문제를 삼고 일어나 결국 그 교회에 있지 못하고 어디론가 사라져 지금도 목회를 하고 있다는 후문이 들린다.
그런데 그 목회자는 그와 같은 완벽한 연극을 연출하고 그 다음 연출은 그 교회 처녀 선생에게 접근하여 기도하기를 하나님께서 어느 선생을 나의 아내로 택하여준 것을 감사하며 앞으로 우리가 결혼하여 주의 일을 잘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하는 가증하고 뻔뻔스러운 기도를 목회자가 아니라고 해도 할 수 없을 것인데 도대체 목회자의 양심이 있는지 아니면 사단의 장난에 놀아나 사단의 극단에 가입하여 대본을 받아 연극에 출연하고 있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머리가 아플 정도로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아니 되는 일들이 사실로 등장하고 있으니 이와 같은 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 수 없다.
그 외에도 사모들이 매맞는 사연을 들어보면 가지가지 사연들이 있는데 종이가 더렵혀질까 옮기고 싶지 아니하여 그만두기로 하지만 이렇게 해서는 안될 일이라는 것을 목회자들이 깨닫고 사모를 귀하게 여기고 목회자의 아내가 되어 말도 제대로 못하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죽은 듯이 살면서 목사인 남편을 돋고 있음을 알고 아내를 사랑하는 가정목회부터 시작하여 많은 성도들을 사랑하는 목회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사모도 목사의 아내라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고 성격대로 산다면 목회자는 아마 목회를 못할 것이 분명하고 해도 그것이 십자가가 되어 많은 눈물을 흘려야 할 것이며 그 일로 인하여 기쁨을 모르고 항상 우울한 상태에서 목회를 해야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사모를 목회 일선으로 끌어내려고 하지도 말고 괴롭히지도 말고 가정의 부부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게 하고 그가 아니면 나의 목회는 계속될 수 없음을 알고 그를 귀하게 여겨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배려(配慮)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목회자들이여 사모가 목회에 지장을 주지 아니하거든 천사같이 대접하고 업어주는 일도 마다하지 말아야 할 것임을 명심하고 사모를 때리거나 괴롭히는 일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목회의 성공도 사모의 협조에 있고 목회를 망치는 것도 사모의 방해여하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사모는 매를 맞고 그 목사와 도저히 살 수 없다고 필자의 집에서 하루저녁 자고 간 일이 있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사모가 잘못해서인지 아니면 목사가 손버릇이 나빠서인지 알 수 없는데 어떻든 간에 매를 때리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라도 설득력을 잃고 호응을 얻을 수 없음을 알아야할 것이다.
78.전도사(傳道師)가 갈곳도 없는데 나가달라 할 때 고통
전도사는 담임목사가 아니기 때문에 임시직원이라는 명칭으로 헌법은 규정하고 있는데 (대한예수교 장로회 헌법 정치 제3장 1항)주로 교육 계통에서 주일학교 교육을 전담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교육 전도사(敎育 傳道師)라고도 부르고 있다.
그의 입지(立地)와 영역(領域)은 매우 제한되어 있고 권한은 당회 아래 있어 지도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무엇 하나도 소신껏 하기가 어려운 상태이다.
그런데 오늘의 모든 담임 목사들도 그 과정을 거쳐서 왔기 때문에 전도사의 사정은 누구보다도 그 교회의 담임목사가 제일로 잘 아는지라 목사님께서 잘 돌봐주시면 큰 어려움 없이 그 과정을 무사히 지나갈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중도에서 목회를 포기하고 옛날 직업으로 돌아가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는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누구보다도 전도사 사모가 많은 고생을 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는 것이 목사님의 눈치도 보아야 하고 장로님들의 눈치도 보아야하며 온 교인들의 눈치도 보아야 하기 때문에 때로는 서러움에 지쳐서 남몰래 울기도 많이 하면서 음지에서 봉사하는 주의 일군이라는 것이다
싶은데 신학을 마치지 아니하였기에 빠듯한 생활비에서 등록금과 교재비를 포함하여 용돈 및 교통비까지 지출하다보니 사모는 굶는 때가 적지 않게 많은데 그래도 누가 알까하여 굶고도 배불리 먹은 것 같이 행동해야하는 삶이 바로 전도사 생활할 때라는 것이다.
어쩌다가 전도사이면서도 단독을 맡을 때가 있는데 교회가 부흥되면 교회 성도들은 당회장 목사님을 찾아가 우리교회는 이제 목사님을 모셔야하겠다고 하고 그렇게 해줄 것을 당회장에게 요구하면 목사님은 교인들의 요구를 들어주어 전도사에게 통고하기를 이제 다른 교회를 찾아보라는 통고로 끝을 내는데 이 때는 정말 같은 목회자이지만 목사와 전도사라는 차이가 이렇게 있으리라고는 미쳐 생각지 못하였다가 그 차이가 얼마나 많은가를 실감나게 체험하는 순간이다.
그리하여 어떤 일이 있어도 속히 목사가 되어야 하겠다는 마음의 다짐이 더 생기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서운하고 분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래도 어떤 목사님은 교회가 그렇게 요구해도 당회장은 이제 전도사님께서 신학졸업이 얼마 남지 아니하였으니 그대로 모시고 계시다가 그 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게 하고 위임목사로 청빙 하라고 타일러 돌려보내는 분도 있지만 대부분은 교회의 요청대로 전도사보다는 목사가 낫지 하고 목사 모시기 위해 전도사를 내보내는 일이 허다하다
이 때 사모님의 생각은 그래도 교회가 약할 때 들어와서 온갖 정성을 다하여 교회가 부흥되었는데 이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터지도록 압박감이 느껴오고 그 일로 인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며 울면서 밤을 지새운 적이 하루 이틀이 아니라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갈 곳도 마땅치 아니하고 신학졸업도 얼마 남지 아니한 상태에서 교회를 떠나달라고 요청을 받으면 마음이 안정되어 공부인들 제대로 할 수 있으며 목회인들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누구라도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하면 당황하고 안절부절 하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때는 교회도 야속한 마음이 들고 당회장 목사에게도 서운한 마음이 들어 속으로는 욕을 퍼붓고 심은 심정이다.
어떤 목사는 전도사를 너무나도 괴롭혀서 그 전도사가 목회를 그만 둔 일을 보았는데 그는 순전히 목사 때문에 상처받고 목회를 포기한 것이다.
물론 목사도 피치 못할 경우가 있는데 목사님은 그대로 그와 같이 일을 더 하도록 하고 싶은데 교인들과 당회원들이 저 전도사는 내보내야 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도저히 목회자 냄새가 나지 아니하고 학생들에게 악영향을 미치고 있으니 더 이상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할 때는 당회장도 어쩔 수 없는 난처한 형편에 처할 때가 더러 있다.
그렇지 아니한 이상은 목회 과정에서 약간의 부족한 것은 지도하면서 신학을 졸업할 때 까지 만이라도 함께 있어 나갈 때까지 숨통을 터주는 것이 후배양성에 간접적이나마 돕는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데 교회가 냉정 하려고 하니 사회 어떤 기관보다 더 냉정함을 느끼게 하는데 요지부동 할 수 없을 정도로 몰아 붙이는데 숨쉴 여유도 없이 하여 결국에는 버틸 수도 감당할 수 도 없어 여기 저기 갈 곳을 알아보지만 여의치 아니하여 몇 날 만이라도 기회를 달라고 하면 그 부탁마저도 거절을 당하는 것이 전도사들이 당하는 서러운 일 중에 하나이다.
솔직히 말해서 목사님들도 전도사만 못한 이들도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데 그래도 목사를 선호하는 한국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어 오늘의 교회들이 안고 있는 고질적인 병폐가 아인가 생각한다.
그러니 전도사 사모된 것이 억울하고 분하여 어서 목사가 되어야하겠구나 하는 생각과 더불어 울분이 터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어 눈물을 머금으면서 꾹 참는 수밖에 없는 것이 일신상 유익하기에 참는 것이다.
만약에 목사에게 잘못 항의나 서운함을 표시하다가는 속된 말로 한번 찍히면 목사 되는데 얼마나 큰 지장이 있는지 당해보지 아니한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물론 전도사가 목사를 괴롭히는 일도 종종 있는데 교인들과 짝하여 목사를 어려운 궁지로 몰아 넣어 목사가 목회를 하지 못하는 일도 있다.
이는 피차가 못할 짓들을 하고 있는데 목회 윤리상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인데도 현실은 있어서는 안될 일들이 여기 저기서 일어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교파에서는 담임목사가 사임하게 되면 부목을 비롯하여 모든 교역자들도 함께 사임하게 하는 제도를 마련하여 부 목사나 전도사들이 장난치지 못하도록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하였다는 말도 들었다.
속담에 "초록은 동색이요 가재는 게 편이라"는 말이 있는데 목회자는 목회자가 돕고 키워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아랫사람의 농간으로 인하여 사면하는 목사님의 사모님도 마음이 아프고 웃어른 된 당회장 목사님의 무성의로 인하여 쫓겨나는 아랫사람의 사모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겠는가? 모두 있어도 안되고 있을 수 없는 일들이다.
어떤 교회에서는 장로님께서 전도사를 내보내라고 목사님에게 주문을 하는데 도저히 갈 곳이 있어야 내보내지 담임 목사님은 입장이 난처해서 어떻게 할 줄을 몰라하는데 장로님은 계속 독촉을 하니 전도사도 못할 일이고 목사도 못할 일인데 한번은 목사님께서 새벽예배를 마치고 교회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데 어디에서 전화가 왔다는 가족들의 전갈을 받고 집으로 가서 전화를 받으니 아무개 장로님의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장로님은 죽을 아들이 없다고 하니 전화를 끊었는데 조금 있으니까 다시 전화가 왔는데 아들이 아니고 사위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장로님이 바로 전도사를 내보라는 장로이고 그 사위는 어느 교회 시무 하는 전도사인데 그가 갑작스럽게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나가달라고 독촉을 받는 전도사가 장로님의 사위가 죽은 교회로 가게되었으니 어떻게 생각하면 우연의 일치라고도 할 수 있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갈 곳 없는 전도사를 계속 나가달라고 재촉을 하니 자기 사위를 죽게 하여 그 자리가 공석으로 남게 하여 갈 곳 없는 전도사를 그곳으로 보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게 되었으니 많은 사람들이 별의 별 말을 할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사건이다.
어떤 전도사는 담임목사가 사임을 하고 후임 목사가 들어 올 때에 먼저 있던 교역자들은 모두 내보내 달라는 주문으로 임시 당회장이 후임 목사의 부탁을 받고 나가달라는 주문을 했는데 아무리 생각을 해도 갈 곳은 없고 생각하니 눈물이 비오듯하고 처자는 어떻게 할까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아니하여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광경을 지켜보는 사모님은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목사도 아닌 전도사가 나가라면 아무 말도 못하고 나가야 하는 위치에서 꼼짝없이 아무 말도 못하고 나가면서 우는 그 모습은 아마 그 눈물이 하늘에 상달하지 아니하겠는가 주께서 그들을 위로하시고 앞으로 목사가 되어 후배들에게는 그와 같은 몰인정한 일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단단히 섰을 것으로 짐작이 되는데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 내에 이와 같은 경우로 우는 전도사들과 사모들이 지금도 수없이 있다고 볼 때 교회는 사랑이 있다고 외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79.사모(師母)의 진실을 알아주지 아니하는 고통
사모는 알고도 모르는 척 할 때도 있어야하고 들어도 못들은 척 할 때도 있어야 하며 보고도 못 본 척 할 때도 있어야 하는 것이 사모가 가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사도는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 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하였다(롬9:1-3).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한 이 표현은 지금부터 진술될 내용의 권위를 보다 강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 안에서'란 말은 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된 바울의 독특한 어법으로서 이것이 맹세의 의미로 사용될 때에는 구약 시대에 '여호와의 사심으로'라는 표현으로 맹세했던 것과 일맥 상통(一脈相通)한다. 바울은 자기의 말과 계시의 최종적인 권위를 나타낼 필요가 있을 때 그리스도의 이름을 내세우고 있다(갈1:1,12).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이란 바울에게 있는 큰 근심과 고통은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것이다. 비록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사역을 하고 있으나(갈2:8) 자기 동족에 대한 깊은 애정은 여전함을 보여 주고 있다.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한 본 구절에서 바울은 자기 동족에 대한 자기의 애정이 거짓이 아님을 더욱 확증하고 있다. 초두에서는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란 표현으로 자신의 진술의 권위를 세운 반면 본 구절에서는 자기와 함께 계시며 자신의 생각을 다 아시는 '성령'의 이름으로 자기 마음의 진실성을 입증시키고 있다. 따라서 바울은 '성령 안에서'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자기 동족에 대한 큰 근심과 고통의 비중(比重)과 지속성 그리고 그 깊이를 보여 주고 있다(Liddon, Murray).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이라고 한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따라 났으며 언약과 약속에 참여한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4-13절). 내 자신이 저주를……끊어질지라도 한 것은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에 있어서 공통된 저주의 의미는 하나님과 분리되어 멸망당한다는 것이다(Murray).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저주가 되신 사건도 이러한 의미의 저주와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러면 바울은 실제로 자기 동족을 위해 저주를 받기를 원했는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와 유사한 표현을 사용했던 모세의 경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모세는 자기 백성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든 죄를 속(贖)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면서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출32:32)라고 탄원했다. 이때 모세는 자기 백성을 하나님의 심판에서 건져내고자 하는 열심에서 그런 기도를 했다.
이것은 자기를 정말 하나님의 책에서 지워 버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사하여 달라는 의미라기 보다는 자기 백성에 대한 사랑과 열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본 절에서 바울은 자기 동족에 대한 연민과 열심을 나타내기 위해 그와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 즉 바울은 모세와 같이 자기 구원을 포기할 만큼 자기 동족을 사랑하고 있음을 로마 교회의 유대인들에게 보여 주고 있다(Calvin, Murray, Barmby).
오늘의 교회 목회자들의 사모들도 자신들이 손해를 보고 억울한 누명을 쓰는 한이 있어도 교회 전체체적인 유익을 생각하여 참고 견디며 비밀을 지키는 것도 모르고 성도들은 사모님에게 서운하다느니 무엇 하느니 하는 것은 사모의 진실을 알아주지 못할 때인데 사모는 아무런 힘도 없고 다만 아이들의 어머니로서 그 아이들의 뒷바라지하는 것과 남편의 아내로서 그의 내조하는 일 외에는 별로 하는 일이 없는데 특히 필자의 경우에는 사모를 앞세워 심방을 한다든지 교회 앞에서 인사를 한다든지 하는 것을 일체 금하기 때문에 교회 일에 대해서는 아는 것도 없고 알려고 하지도 아니한다.
그런데 교인들은 사모를 통해서 무엇을 알려고 할 때 사모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하면 그 사실을 믿어주지 아니하는데 교회 어떤 사건이 있으면 그래도 사모가 제일 먼저 알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이 일반적인 생각인가 본래 그와 같은 생각은 사모의 진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회에서 일어난 일이나 교회에서 일어난 일을 사모는 전혀 모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필자는 무엇도 알려주지 아니하고 자연스럽게 알도록 만드는데 그렇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알 때 사모도 같이 알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가장 가슴 아픈 것은 목사인 남편이 강단에서 말씀을 전했는데 저 말씀은 나를 보고하는 말인데 아무개 집사가 사모님에게 말해서 사모님은 목사에게 말하여 저와 같은 설교를 한다고 할 때인데 사실은 전혀 모르는 일인데 그렇게 말할 때 정말 가슴아프고 견딜 수 없는 일이다.
필자 같은 경우에는 사모를 교인들과 거리를 항상 멀리하도록 하는데 개척교회 같은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심방을 시키기도 하고 데리고 다니기도 하지만 기성교회에서는 여전도가 있고 부목이 있는데 구태여 데리고 다닐 필요가 없다.
교회 말은 거의가 부인들이 주고받는데서 시작이 되는데 사모가 이곳 저곳으로 다니다 보면 이런 말 저런 말 많은 말들을 듣게 되고 그 들은 말을 목사에게 하게 되며 목사는 그 말을 들으면 강단에서 반영할 때가 있어 그래서 아예 듣지 아니하고 목사가 소신껏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가장 편한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사정도 모르고 교인들은 전혀 달리 생각하고 사모에게 서운한 감을 가질 때는 사모자신이 서운함을 금할 수 없다.
그리고 목회자의 생활은 넉넉하지 못한 것은 교회에서 생활비 받으면 별로 여유가 없는데도 많은 성도들은 목회자 가정에 돈을 많이 모아둔 줄 알고 돈을 빌려달라고 할 때 빌려주지 못하는 경우에는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데 그 설명을 듣는 편에서는 변명으로만 알고 긍정하지 아니할 경우에 가장 서운하다.
만약에 여유 돈이 있다고 해도 성도들과 금전 거래하는 것은 목회자 사모로서는 합당하다고 생각지 아니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어려운 문제이다.
그 어는 누구도 사모의 딱한 사정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모의 진실을 알아주지 못할 수 밖에 없다는데 무엇보다도 괴롭다는 것이다.
목회자의 가정은 생활비를 많이 받아도 남는 것이 없고 적게 받아도 굶어죽는 일도 없으며 또한 여유가 있다고 생각이 들면 반드시 그 돈이 다른 데로 나가고 만다는 것은 목회자 사모가 아니면 도무지 알지 못하는 어려움 중에 하나인데 누가 이와 같은 사정을 아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사모가 가정에 경제적인 생활이 어려워도 성도들에게 돈 빌려달라고 하지 아니하니까 상당한 여유자금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아니한 것이 필자의 경우 같으면 교인들에게 금전거래하지 아니하는 것을 목회철학으로 여기고 아무리 없어도 성도들에게는 돈 빌리지 아니하고 남는 돈이 있다고 해도 빌려주지 아니하는데 그 이유는 금전거래는 잘못하면 마음상하는 일들이 생기기 때문인데 예를 들어 교인이 딱한 사정이 생겨 교역자 가정에서 사모가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 그 달의 생활비를 빌려주면 여유 자금이 없는지라 바로 받아야하는데 빌려간 분의 사정이 딱하여 바로 갚지 못하는 일이 생길 때는 그 돈을 달라고 말하면 사정도 몰라주는 몰인정한 사모라고 할 때 정말 가슴아프고 고통스럽다.
교인들에게 돈을 빌리지 아니하는 것은 돈이 있기 때문이 아니고 사람 사는 생활은 목회자나 일반성도들이나 대동소이(大同小異)한데 어찌 목회자가 남에게빌리는 일이 없겠는가 살다보면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갈 때도 있고 자녀들이 있으니 그 자녀들에게 어쩔 수 없이 들어갈 때도 있으며 이모저모로 반드시 써야할 때가 있는 법인데 어찌 돈 빌리는 일이 없겠느냐는 것이다.
다만 돈 빌리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성도들은 알지 못하고 있을 뿐인데 목회자가 돈을 빌리는 것은 성도들이 알아서 좋을 일이 없고 또한 돈을 자주 빌리면 살림을 규모 없이 산다는 말이 반드시 나오게 되어 있고 빌려주면 목회자의 생활은 부유한 줄로 아는 것이 교회의 성도들의 심리인 것이다.
그래서 빌리지도 말아야 하고 빌려줄 수도 없는 이 딱한 사정을 알아주지 못하는 성도들이 있기 때문에 서운하고 마음으로 고통스러운 일 중에 하나인데 그럼 어떻게 돈을 융통해 쓰느냐고 묻는다면 가장 원만한 방법인 은행거래를 하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인데 필자의 경우 같으며 모 은행을 지금까지 상대하여 거래를 해왔는데 어떻게 보았는지 무담보 즉 신용대출의 길이 열려있어 일 천 만원 범위 내에서는 언제나 대출을 받을 길이 있는데 목회자에게는 매우 편리하다고 생각이 드는데 목사의 가정에서 성도들의 가정에 돈 빌려달라 아니면 장로의 가정에 돈 빌려달라 하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아니하고 그와 같은 일들이 반복되면 어떤 말썽이 나도 반드시 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은행을 상대하면 너무나도 편리한 것이 필요할 때는 필요한 만큼 쓸 수 있는 마이너스 통장을 개설하면 최고 편리한 것이 이런 저런 말이 나지 아니하여 좋고 다만 그렇게 하다보니 교인들은 목사는 궁색하지 아니하여 풍부하게 산다는 오해는 받는 것이 그래도 궁핍하게 살아 교회 근심을 끼치는 것 같은 생활은 면하기 때문에 매우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교인들은 목회자의 가정 생활을 속속들이 알 수 없는데 목사의 생활도 일반 성도들의 생활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은 자녀들이 있으니 그들로 인하여 속태우고 마음써야하고 필요하면 약간의 저축을 해두었든 것까지도 모두 빼서 사용해야 하는 것은 일반성도들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때로는 목회자의 생활이 넉넉하지 아니하면서도 없는 표시를 할 수 없고 있으면서도 있는 표시를 할 수 없는 것이 목회자의 생활을 지켜보는 성도들은 맹인들이 코끼리 더듬는 식이 되기 때문인데 그들은 코끼리를 만져만 보고 아는데 다리를 만지고는 코끼리는 기둥과 같다고 말하고 코만 만진 사람은 소방호수 같이 생겼다고 하며 배를 만진 사람은 벽과 같다고 하며 나름대로 일부만 보고 전체적인 면을 보지 못하고 단면만 보고 나름대로 평가하기 때문에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회 성도들이 목회자의 가정사정을 속속들이 어떻게 정확하게 알고 확실하게 평가하겠는가 보이는 단면만 보지 그 속사정은 아무도 모른다는 점에서 오해가 생길 수 있고 서운함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목회자 가정의 일을 속속들이 모르면 이렇다 저렇다 말하여 속상하게 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누구라도 진실을 몰라 줄 때처럼 가슴 아픈 것이 없고 사람의 사정을 파악하지 못하고 억지 소리할 때처럼 괴로운 것이 없는데 교인들이 보고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딱한 사정에 처하여 남에게 들어내지 못하고 속으로 우는 사모들의 진실을 알아달라는 것은 아니고 알지 못하면서 오해는 하지는 말아 달라는 것이다.
80.사택 때문에 받는 고통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매우 값이 많이 나아가는 집에서 살았거나 호화로운 집에서 살았다는 기록이 없는데 목회자들이 거주하는 집을 가지고 고통스럽네 편안하네 하는 것은 말할 가치도 없는 사항이라고 몰아 붙일 가능성도 충분히 고려하지 아니할 수 없어 조심스럽게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마태복음 저자는 기록하기를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쳐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하였다(마8:20).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의 영광과 보좌를 버리시고 죄 많은 이 땅에 오실 때부터 구유에서 태어나시고 가난한 목수의 가정에서 검소하게 사셨는데 그의 종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사택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이치에도 맞지 아니하고 주의 종의 태도로서는 더욱 맞지 아니한다.
잠언 저자는 말하기를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하였다(잠25:11) .
그런데 목회자나 사모가 사택에 관한 말을 하는 것은 경우에 맞지 아니한다고 하면 그렇게 들릴 수 있어 정말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다바르 다부르 알 아페나) 즉 여기서 히브리어 '아펜'은 원래 '바퀴'를 뜻하나(겔1:15) 여기서는 '상황'(에 알맞은)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즉 본 문구는 상황에 꼭 필요한 지혜롭고 시기 적절한 말을 가리킨다.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라는 말은 문자 적인 뜻은 '은 그림 속에 금 사과.' 개역 성경의 번역에서 짐작할 수 있는 바 이것은 은빛을 바탕색으로 하는 접시 따위의 주방 용품에 그림으로 새겨진 신선한 과일 모양을 연상케 한다. 당시 상당히 가치 있는 물건으로 취급된 세공품의 일종이었던 아로새긴 쟁반이 언급된 이유는 상황에 맞게 재주있게 구사되는 언어의 가치를 좀더 생생히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목회자 가정에서 사택을 운운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아니하여 은 쟁반에 금 사과가 아니고 뚝배기에 썩은 생선이라고 하면 맞을지 모른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는데 그의 종들이라고 자처하는 오늘의 목회자들이 사택 타령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말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나는 새도 거쳐가 있으되 한 말을 어떤 학자들은 이 구절을 두고 예수께서 제자 되길 원하는 서기관의 요청을 거절한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제자 됨을 거절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되고 제자가 될 경우 자기 부정, 희생, 봉사, 고난 등이 뒤따름을 깨우쳐 주고자 하였던 것으로 이해함이 좋을 것이다.
한편 여기서 '굴'은 몸을 숨길만한 장소(굴)를, '거처'는 둥지가 아닌 단지 새가 밤을 지새울 수 있는 나뭇가지 등의 임시 처소를 의미한다(McNeile). 결국 이 말은 아주 빈약한 거주지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심지어 하찮은 짐승들조차도 비록 엉성하나마 보금자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주인이고 창조자이신 그리스도가 자신의 세계에 와서 안식처 없는 나그네, 사람들의 거주지에서 내쫓김을 당한 방랑자가 되었다는 이 역설적인 사실을 극명(克明)하게 나타내주고 있는 구절이다.
오직 인자라는 말은 '다윗의 아들'이란 칭호가 유대적 정통성을 강조한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의 신성을 밝힌 칭호라면, '인자'란 칭호는 구약 선지자들에 따르면 종말에 이르러 (단7:13-14)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실 자로 인식되었고, 바로 이 용어를 예수께서는 자신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하셨다.
자칭(自稱)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이 말은 신약성경에서 모두 세 번밖에 사용되지 않았다(행7:56 계1:13;14:14). 이 인자라는 칭호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가 하나님과의 특수한 관계를 내포하고 있는 것과 대칭을 이루어, 사람과의 특수한 관계를 내포하고 있는 칭호인 것이다(눅22:69-70).
특히 본문에 언급된 '인자'는 단순히 거처할 곳조차 없는 바로 '나'라는 말로도 대치시킬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 '인자'는 예수께서 당신의 인성(人性)을 강조하고 앞으로 당신의 당하실 고난을 묵시적(默示的)으로 나타내 보이고 있다.
여하튼 본문에서의 인자란 칭호를 살펴볼 때 예수께서는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이상과 같이 거처도 없는 가난한 삶을 기꺼이 감당하고 있는 초월적 사랑을 지니신 분임을 알 수 있다(눅5:24).
머리 둘 곳이 없다 한 이 말은 머리 놓을 곳, 즉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그곳에서 휴식을 취할 만한 소유나 집조차 없을 만큼 가난하고 피곤하다는 뜻이다. 실로 이러한 절대적 가난을 통해 예수께서는 온 인류에게 충만한 안식과 풍요한 부(富)를 제공해 주신 것이다(고후8:9).
그리고 주의 제자들 중에 베드로를 비롯하여 많은 제자들은 말하기를 "베드로가 여짜와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 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 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하였다 (막10:28-30) .
보소서 우리가 한 말은 두 낱말이 모두 강조 적인데 첫째는 감탄사며 둘째는 부자 청년과 대조되는 우리다, 역시 제자들의 대변자격인 베드로의 발언이었다. 예수와 부자 청년 사이의 대화를 듣고 있던 베드로는 타락해 가는 부자 청년에 대해 저들은 예수의 요구대로 행하였다는 자각에서 이렇게 감동적으로 발언한 것이다.
과연 제자들은 예수의 요구하신 것처럼 모든 길을 버리고 예수를 좇았다 (막1:18.20.2:14). 이와 같은 저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구원이 과연 확실한지를 보장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목회자들은 사택이 좋으니 나쁘니 하기에는 좀 민망한 마음 없지 아니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목회를 하다보니 사모는 목회자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한 목사가 사명이 있어서 목회를 하지 사모가 사명이 있어서 목사가 목회를 하는 것이 아니기에 문제는 대두되는 것이다.
물론 사모가 사명이 있어서 처음부터 목회자에게 시집가서 주를 위하여 고생하기로 작정된 사람은 다르지만 그렇지 못하고 목사만 사명 때문에 목회 하는 분들은 사모가 사명감으로 한다고 하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하다보니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베드로나 예수님과 같은 사명감에 사로잡힌 사모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못하니까 문제가 발생하는데 사모에게 무조건 목사인 남편을 따라 사니 당신도 이유 없이 희생하시오 하고 강요하기는 무리가 따른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돈이 없어 형편이 안되면 몰라도 교회에서 아예 목사는 고생을 하라고 강조하는 것은 거부반응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모가 우리는 목회자이니까 집이 없으면 어떻고 비가 새면 어떠하리 하고 감수하면 더 이상 바랄 것도 없지만 그렇지 못하면 애들과 함께 사는데 많은 애로가 있어 교회에 대하여 말은 못해도 생활에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개척교회를 시작할 때는 지하건물(地下建物)을 세로 얻어 예배당 꾸미고 그 옆에다가 조그만 한 방을 만들고 부엌도 만들어 생활하면 연탄가스 냄새와 음식냄새가 합쳐 생활에 불편은 고사하고 교인들이 싫어하는 모습을 보는 목회자는 미안하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한 것은 좋은 장소를 가지고 교회를 시작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교인들은 그래도 교역자처럼 고생하지도 아니하면서 잠깐 와서 예배드리고 가는 것도 참을 수 없어 저렇게 하는가 하는 것인데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지만 목회자의 지하생활은 생각보다 훨씬 힘든 것이 습기가 많이 차서 그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여 머리가 항상 아픈 상태에서 생활하는 그 형편을 어떻게 말로다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지하는 아니라고 해도 예배당 건물 한쪽이나 이층에 사택을 만들어 놓고 살면 가족들끼리 작은 목소리로 말을 해도 아래층이나 바로 가깝게 붙어있는 예배당에 성도들에게 들리니 대화도 마음대로 할 수 없을 뿐 아니고 아이들도 큰 소리로 나무라지도 못하고 생활에 불편함이 이만 저만 아닌데 교인들은 그와 같은 불편함은 조금도 모르고 있으니 서운하지만 그렇다고 사택 좀 구해 주시든지 어떻게 조치를 취해달라고 말할 성질도 못되어 마음의 고통이 쌓이다보니 생활에 활기를 잃어버리는 일들이 있다.
그리고 사택이 예배당과 떨어지기는 했지만 그것도 근접한 거리라 불편함이 있는 것은 교사들이 사택에 들어와서 회의도 하고 쉬기도 하는데 회의를 하거나 쉬는 것 모두 좋다는 것이다.
다만 아이들의 소지품이나 그 어떤 물건에 손만 대지 아니하면 좋겠는데 이것저것 다 꺼내보고 어지럽게 해놓으니 목사의 아이들이라고 해도 제 물건에 손대는 것은 아주 싫어하는 성격이 있는 아이들은 그만 질색이다.
그것까지도 좋다. 교사들이 회의한다고 아이들을 추운 밖으로 내쫓아 놓고 있는 것은 너무하지 아니하는가 사택에 사는 목회자 가족은 고용살이하는 처지에 이른 기분이고 교회 교사들은 주인과 같은 기분이 들게 만들어 아이들이 성격구조가 삐뚤어지는 것을 볼 수 있고 노골적으로 아이들까지도 아버지 꼭 목사 노릇해야 합니까 무엇을 한들 이 정도 생활은 못합니까 하고 불평 섞인 어조로 교회를 벗어나자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입장이 될 때 사모의 고통은 누구에게 말할 성질도 못되고 너무나도 가슴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교회에서는 이와 같은 점을 고려해서 최선을 다하여 목회자가 목회 하는데 지장 없도록 배려하여야 할 것이다.
목사는 사명감이 있지만 처와 자식들은 사명감이 없어 목회자에게와 교회에 불평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하고 그 불평으로 인하여 목회자가 목회 하는데 지장이 되는 것도 알아야 하지 무조건 목회자는 그렇게 살아야한다는 당위성만 주장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다고 목사가 사모나 아이들에게만 그래가지고 목회 하는데 도움이 되겠느냐고 몰아세울 일은 아니고 사람은 누구나 비슷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겠다는 이해심을 가지고 달래야 하며 교회도 목회자의 가정생활을 일반인의 생활이나 다를 바 없다는 이해심을 가지고 사모의 고통을 덜어주는 따뜻한 보살핌이 있어야 할 것이다.
사택이 고급 아파트 60평에 사는 목회자도 있는데 이와 같은 호화판 사택을 바라는 것은 아니고 다만 방한 칸이라도 좋으니 생활하는데 큰 지장 없게 해주었으면 하는 소박(素朴)한 바램일 뿐이다.
81.목사(牧師)가 40일 금식한 후유증으로 인한 고통
금식기도(禁食祈禱)가 필요한 것은 인정하지만 무리한 금식기도는 삼가야할 것인데 바리새인들의 금식기도는 그 목적 자체가 잘못되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부터 책망을 들었는데 마태복음 저자는 기록하기를"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하였다(마6:16-18).
금식자체가 나쁘다는 말은 아니고 금식하는 목적이 사람에게 보이려고 일부러 슬픈 기색을 내고 얼굴을 흉하게 하게 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구약에서 모세의 율법에는 1년에 한 번 지키는 속죄 일에 모든 백성이 다 금식(禁食)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레 16:29-31;23:26-32;민 29:7). 그리고 바벨론 유수 기간에는 하나님이 개입하셨던 지난날의 역사를 회고하면서 새로운 자세를 가다듬기 위해 정기적으로 금식할 것을 규정하였다(슥7:3-5;8:19). 그러나 이런 국가적 차원의 금식 외에 각 집단이나 개인의 차원에서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금식이 행해지기도 하였다.
금식은 때때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서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세를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 또는 주 앞에서 더욱 겸비해지기 위해서(느9:1, 2;시 35:13;사 58:3;욘3:5 ) 그리고 헤어날수 없는 큰 번민과 위기 또는 절망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하기 위한 방법으로(출 24:18;삼하1:12;에4:16;행14:23 ) 행해졌다. 사실 이 금식은 구약 시대 뿐 아니라 신약의 성도들에게 있어서도 신앙적 측면에서 자기 훈련의 한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이미 구약 시대에서부터 금식이 단순히 형식적이거나 위선적으로 행해지는 경우에 대해서는 신랄한 비판이 가해졌다(사58:3-7;렘14:12;슥7:5-6). 그 중에서도 특히 금식을 하면서도 이웃 구제에 무관심한 사실에 대해 혹독한 비판이 내려졌었다(사58:1-7).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말은 바로 앞의 '금식할 때에'라는 말이 현재 시상이라는 사실에 비추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즉 당시에 금식은 어떤 특별한 행사라기보다 유대인들이 계속해 오던 행사였던 것이다. 사실 예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한 주에도 두 번, 즉 월요일과 목요일 경에 금식하였다. 그리고 '안나'와 같은 경건한 여 선지는 일상적으로 금식하였다(눅 2:37).
그런데 이러한 금식을 하게 되면 자연적으로 배고픔과 같은 육체적인 고통 따르게 마련이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 같은 고통을 자기 의(義)와 경건(敬虔)을 자랑하는 도구로 사용하여 자연적 고통에 인위적인 표정까지 가미(加味)하는 위선을 범하지 말 것을 명하셨다. 마찬가지로 일상의 신앙 생활을 결코 자기의(義)를 만족시키는 도구로 전락(轉落)시켜서는 안 된다. 오직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이뤄져야 하는 참된 경건(敬虔)인 것이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금식을 할 때에 자연적으로 용모가 흐트러지고 또한 자신의 내적인 죄악을 깊이 통회하고 자복하는 중에 기름을 바르지 않고 재(災)를 뒤집어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주님이 지적하시는 것은 자신의 진실된 통회의 표시로써 금식이 행해졌던 것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 자신의 종교심을 자랑하고 또 사람의 칭찬과 존경을 받으려는 동기에서 외식적(外飾的)인 금식이 행하여졌던 것에 대해서이다.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하였는데 여기서 '흉하게 하다'는 뜻의 원어 '아파니주신'과 사람에게 '보이려고'라는 뜻인 '파노신'은 그 음운상 비슷한 단어로서 헬라 문학에 있어서의 일종의 재담적(才談的)표현이다(Robertson). 한편 '얼굴을 흉하게 하는'것이란 먼지와 재 등을 머리에 뒤집어씀으로서 본 얼굴을 거의 보이지 않게 하는 행위를 지칭하는 것이다(삼하 15:30;겔24:17).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금식을 하셨는데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 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 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하였다(마4:2-4).
사십 일을 밤낮으로 한 말은 '40이란 숫자는 성경 문학적으로 징벌과 고통, 인내와 완성, 인간 한계의 최대치, 그리고 하나님의 준비기간 등으로 이해된다. 특히 이 숫자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관계가 깊다. 예수의 40 주야에 걸친 금식은 이스라엘의 40년 방랑(신8:2)과 연결되며, 또한 그 기간은 모세와 엘리야의 40일 금식(출34:28 왕상19:8)과 관련되어진다.
소수 비평가들은 '40'일을 신성 수(神性 數)라 하여 무한한 기간으로 해석하나(Koster, Henneberg, Nender), '밤낮'이라는 어구의 추가로 보아 문자 적인 '40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이스라엘과 예수는 이 40일 기간 동안 모두 굶주림으로부터 신령한 교훈을 얻었고(신8:3), 광야에서 대업(大業)을 준비하기 위한 시련을 겪었다.
즉 이스라엘은 애굽의 압제에서 하나님께 구원을 받은 후, 예수는 세례를 받은 후 각각 주어진 일을 준비하기 위하여 필요한 순종과 충성을 증명하려고 시험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전자는 실패하였고 실패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는 완전한 승리로 40일을 마감하셨다. 한편 그때에 사단의 시험이 40일 동안 계속된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Lenski, Alford). 그러나 마태복음은 금식 후에 시험을 받으신 것으로 되어있고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 견해를 취하고 있다.
금식하신 후에 주리 신지라 한 말은 예수께서는 40일 밤낮동안 모든 음식을 전폐하고 육체적 소욕(少欲)을 철저히 제어(control)하셨다. 아마 이 기간 동안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의 세계로 들어가셨을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은 예수께서 금식하는 기간동안에 모세와 같이 영적 무아경(a spiritual ecstasy) 속에 지냈으며, 육체적 욕구는 중지되었다고 주장한다(Alford, Robertson, Lange). 어쨌든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이신 동시에 완전한 육체를 지닌 인간으로서의 음식의 결핍에서 오는 식욕의 고통과 그로 인한 육체적 쇠약을 철저히 감내해야만 하셨다.
실로 그리스도는 세상의 금식 정신과는 달리 금욕과 고행을 위해 주리실 필요가 없으셨다(M. Henry). 다만 그분은 하나님의 뜻을 만족시키시고, 그의 공생애를 준비하기 위해 필요한 순종과 충성을 증명하시려 이 육체적 극기 기간을 할애하셨던 것이다. 한편 그리스도에게는 하나님과의 대화가 곧 그의 양식이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교제에 열중한 나머지 시장기를 잊으셨고,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먹이신 것과 같이 자신의 말씀으로 예수를 먹이셨던 것이다.
하지만 금식 기간이 끝난 후에는 심히 주리셨고 식욕의 고통으로 인해 그분의 육체가 거의 탈진 상태에 이르렀던 것 같다. 간교한 사단은 바로 이와 같은 결정적인 유혹의 순간을 기다렸던 것이다(Godet).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금식하신 후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는데 배고픔의 기회를 놓치지 아니하고 돌로 떡이 되게 하라는 시험을 받았는데 사람은 언제나 약하기 때문에 배고픈 사람이 먹을 것으로 인하여 시험 들기 쉬운 것은 어쩔 수 없는데 마귀는 인간의 허약한 부분을 집중 공격하는데 견디기 어려울 때가 있어 종종 그 시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금식을 시작하였는데 이는 잘못된 금식인데 금식하는 목적이 분명해야 하고 금식하는 방법이 성경적이어야 하며 후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야 하고 사람들에게 덕이 되어야 할 것이다.
금식의 목적은 아담이 먹는 것으로 인하여 죄를 지었다면 금식은 먹는 것을 전폐하고 죄를 회개하는데 있어야하고 금식의 필요성은 죄를 자복하기 위하여(욜2:12-17 삼상7:6 느9:1-2)개인적으로 어려움이 있을 때며(삼상12:16) 단체에 어려움이 있을 때이다(에4:16 욘3:1 10) .
그런데 그와 같은 뚜렷한 목적도 없이 필요성에 의하여 어쩔 수 없이하는 것이 아니고 호기심에서 아니면 모험심에서 아니면 남들이 금식했다고 하니 자신도 해보겠다는 모험심에서 영웅심리에서 자랑삼아 했다면 이는 반드시 부작용이 나타날 것이다.
금식해야할 필요성에 의하여 어쩔 수 없이 하는데 날자는 잡지 말고 주께서 힘주시는 대로하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어렵게 시작하여 소원을 성취하는 일은 금식이 필요하고 그와 같은 금식은 권장도 할만 하지만 부작용이 나타날 잘못된 금식은 말려야 될 것이다.
어느 권사님은 금식을 40일 하고 5일쯤 더 해서 예수님 보다 더 해보자는 마음으로 45일을 하고 결과는 벙어리 되어 말을 못하고 있는 부작용이 났다는 것인데 그와 같은 금식이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어는 목사님은 교회가 너무 어렵고 목회자와 교회간의 갈등이 심해서 목사님께서 괴로워 견딜 수 없어 금식을 시작하였는데 40일이 채 되지 못한 상태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사모님은 얼마나 기가 막히고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한숨과 마음이 찢어지는 고통이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은혜를 더욱 받아야 하겠다는 목적으로 금식을 시작하였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해도 마음이 아파 죽을 지경일 것인데 교회가 문제가 있어 그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죽음을 각오한 그 어려운 금식을 시작하였다가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목사님께 하나님의 나라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문제를 남겨 놓은 채 가신 목사님은 편하고 잘 되었다고 해도 남겨 두고 간 처자는 그들의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고 가슴이 터지는 아픔을 안겨주고 간 것이다.
생각해보자 교회가 문제가 있어 해결해보겠다고 금식하며 기도하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우리 모두의 입장이라고 한다면 마음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기도하고 꺼칠하고 초췌한 모습으로 돌아와도 가슴이 터져 나갈 지경일 텐데 걸어나간 남편이 죽어서 시체로 변하여 관으로 사람들 손에 들리어 들어올 때 그 광경을 지켜보는 가족들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고 교회를 얼마나 원망스럽게 생각하겠는가 이는 누구라도 그렇게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무리한 금식만이 문제해결의 열쇠로만 알지 말고 엘리야 같이 무모한 짓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는가를 보면"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하였다(왕상19:4-8).
여기서 중요한 것은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한 것인데 사십 주(晝) 사십 야(夜)라 하였는데 브엘세바에서 호렙 산까지는 대략 350km으로서 정상적으로 꾸준히 걸을 경우 십여 일 정도면 당도할 정도의 거리이다. 따라서 엘리야의 광야 40일은 행진만을 위한 기간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엘리야는 이 기간 동안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때로는 금식도 하며 때로는 기도에 침익(沈溺)하기도 하면서 호렙 산을 향해 나아갔을 것이다. 그런데 그 기간이 40일이었다는 것은 곧장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를 연상시켜 준다(신9:9 마4:2). 특히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40일 동안 바로 호렙 산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여호와 앞에 엎드려 있었다(신9:18). 그러므로 엘리야의 광야 40일도 모세의 경우에 비추어서 그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즉 이때 40은 인내의 한계를 채우는 수로서 그 이후엔 상황의 변화를 초래케 하는 수이다. 사실 여호와의 진노로 멸망 받아야 마땅할 백성들이 계속 보존케 된 것은 모세의 40일간 중보 기도 덕분이다(신9:18-19). 그런데 이와 마찬가지로 더 이상 손쓸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스라엘의 배교(왜냐하면 갈멜 산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변화가 없었으므로)에 대해 엘리야가 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짐을 지고 하나님을 찾은 기간이 바로 본 절의 사십 주야인 것이다.
먹지 못하여 갈 길을 이기지 못할까 보아 하나님께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어 먹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앞으로 나갔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금식으로만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기도로서 해결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이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하였다(막9:29).
다윗은 밧세바에게서 낳은 아들이 병들었을 때 그는 금식하고 기도하였으나 그 아이는 끝내 죽고 살지 못하였다.
금식기도가 문제해결의 만능의 열쇠처럼 생각해서는 안되고 금식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무리한 금식은 무모한 짓에 불과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무엇이나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서는 순리가 아니고 억지라는 것을 기억해야 하며 억지가 통한다는 사고(思考)는 이제 버려야할 시기가 되었다.
어느 목사는 금식을 40일 하고 성 불구자(性 不具者)자가 되었는데 아내와 성생활을 전혀 할 수 없어 얼마나 고통을 당하는지 저녁만 되면 괴로움의 연속이고 그 형편에 처해 있는 남편도 고통이 이만 저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모한 금식은 몸을 망치고 아내의 고통을 가중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함부로 하지 말아야하며 정말 금식이 필요할 때는 억지가 아닌 순리적으로 주께서 힘주시는 것만큼만 하여 은혜를 받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아야지 많은 날짜를 자랑하겠다는 영웅심리에서 힘겹게 하면 이는 부작용을 초래할 위험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목회자의 가정에 행복이 임해야지 교인들에게도 본이 되지 그렇지 못하고 억지 금식하여 건강에 이상이 생기든지 아니면 가정에 불행을 초래할 정도의 미련한 금식을 하여 가정에 먹구름이 드리우는 일은 막아야 할 것이다.
필자도 21일을 금식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도 가정에서 하였는데 지켜보는 아내는 피를 마리는 심정이었다는 것이다.
혹시라도 금식하다가 잘못되면 어찌할까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고 금식하다가 문제가 생겨 고생하는 분들을 눈으로 보기 때문에 혹시라도 남편이 하는 금식이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아니하는 바리새인들과 같은 기도라면 어쩌나 하고 걱정도 하고 그렇게 하다가 죽기라도 하면 어떻게 할까 하여 남몰래 걱정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금식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고 무모하게 몇 일 하겠다고 날짜를 잡아놓고 그 날짜를 채우려는 억지의 금식은 하지 말고 필요하면 은혜주시는 순리대로 해야할 것이다.
82.부 목사(副牧師)사모의 고통
부 목사는 자신이 목회는 하지만 소신 것 할 수가 없고 당회의 정책과 당회장의 계획에 따라 있는 힘을 다하여 협력하며 교회 일을 하는 것이다.
물론 교회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는데 어느 교회에서는 팀(team)목회라고도 하고 분할(分轄)목회라 하여 서로 전공분야에 맞도록 일을 분담하여 그 일에는 타종을 불허하도록 최선을 다하여 각자가 맡은 일을 하면서 당회장 목사나 부(副) 목사의 거리감과 차별 없이 즐겁게 목회 하는 일들도 있지만 그와 같은 경우는 흔하지는 않고 대부분 당회장 목사의 지시를 받아서 일하는 제한된 권한 안에서 일하는 것이다.
부(副)목사의 할 일에 대하여 헌법에 명시하기를 "부목사는 위임목사를 보좌하는 임시 목사니 당회의 결의로 청빙하되 계속 시무 하게 하려면 당회장이 노회에 청원하여 승낙을 받는다"라고 하였다 ( 대한 예수교 장로회 헌법 정치 4조 4항).
이렇게 그 권한을 법적으로 명시해놓았으니 그 이상 더 무엇을 어떻게 해볼 수 없고 목회를 하면서도 목회인지 목사가 목사의 보좌인(補佐人)인지 때로는 자신도 분간하기 어려울 때가 있어 어서 속히 교회를 담임하여 소신껏 일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없다고 하면 이는 양심을 속이는 거짓말 일 것이다.
부목사의 위치가 그렇다보니까 사모님도 처신하기가 매우 조심스럽고 얼마나 어려운지 매사를 삼가는 신중한 태도를 보이지 아니하고는 그 위치에서 마음 편하게 견디기가 어려운 것은 이런 저런 말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목사 사모는 당회장목사 사모와 같이 입이 있어도 자유롭게 말을 할 수 없고 사람들과 자유롭게 만나서 대화도 하기가 쉽지 아니한 것은 누가 무엇이라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혹시라도 실수하여 자신의 남편인 부목사가 곤란한 처지에 이르지나 아니할까 항상 마음 조아리는 생활은 연속이고 긴장을 풀 수 없어 사람들의 눈치보는데 급급하여 숨도 크게 쉴 수 없는 것이 당연한 것 같이 생각하고 지낸다.
당회장 목사님의 사모가 인격적으로 훌륭하신 분이면 긴장이 풀어지지만 그렇지 못한 분이면 성도들과의 대화도 아예 생각도 말아야 하고 혹시 성도들이 무엇이라도 관심을 보이는가 싶으면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모습은 어쩐지 자연스럽지 못하고 무슨 내용을 담고 쳐다 보는 것만 같아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불안한지 자신도 알 수 없는 불안한 감이 드는 것은 혹시라도 남편에게 누를 끼칠까 두려운 마음에서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당회장 목사님과 관계가 원만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그렇지 못할 때는 더욱 숨도 크게 쉴 수 없고 어떻게 처신해야할지 매우 난처할 때가 있는데 목사님들과의 문제인데 왜 사모가 불안하여 전전긍긍(戰戰兢兢)하는지 이유는 간단하다.
또 안정된 목회를 하지 못하고 자리를 옮겨야하는가 아이들도 학교에서 학우들과 겨우 정이 들어 이제 학교 가기를 즐겨하고 나름대로 친구도 사귀어 학교생활에 적응하여 안정을 찾는가하였더니 또 그 안정이 깨지지나 아니할까 걱정스럽고 불안하기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그렇다고 사모님을 만나서 어떻게 말할 수 있는 성격도 아니고 목사님들의 일이라서 아녀자가 나설 수도 없고 정말 괴로운 나날을 보내는데 남편인 부목사는 투덜대며 정말 속상해서 못하겠네 그 한 마디가 아내인 사모에게는 큰 걱정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남편이 알아 줄 리가 없지만 정말 불안한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아무리 목사라고 해도 인간이고 인간이다 보니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서로가 생각하기에 따라서 문제가 간단할 수도 있고 복잡해 질 수도 있는데 당회장 목사님은 교회 전체적인 책임을 맡아서 일을 하다보니 부목사님의 도움이 절대적이고 부목사님은 당회장 목사님의 배려와 격려가 절대적인 이해가 맞물리는 미묘한 관계라 당회장 목사님은 나도 과거에 부목생활을 해보았으니 하고 이해하면 되고 부목은 나도 언제인가 당회장이 될 때를 생각하고 이해하면 아무 것도 아닌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어 교회가 근심하도록 문제가 확대되기도 하는 때도 있으니 고통스럽지 않다고 할 수 없는 일이다.
때로는 당회장 목사님으로부터 호되게 야단을 맞을 때는 심적 고통이 커서 많은 눈물을 흘리는 때가 더러 있는데 특히 큰 잘못도 없이 필요 이상으로 당할 때는 억울하다는 감정이 들을 때의 고통은 그 중량이 무거워 견디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다.
특히 임지는 없는데 은근히 떠날 것을 바라고 압력을 행사하는 일은 속으로 저런 분이 어떻게 목사가 되었는가하는 생각도 해보면서 마음이 많이 상해도 말도 못하고 약간이라도 표시를 한다면 목회 앞길에도 큰 지장을 초래하게되어 아무 말도 못하고 당하고만 있는 그 심정은 누구도 이해 못할 고통이다.
물론 부목사님들로 인하여 당회장 목사님께서 심적 고통을 당하는 일도 보통이 아닌 것을 알고 있는데 몇 분들의 잘못 때문에 모든 부목들이 한결같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형평성에도 맞지 아니하고 분통이 터질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는 이해가 되는 것도 있는데 어찌하여 부목이 원목을 괴롭게 할 수 있으며 원목의 목회에 지장을 주느냐하는 점에서는 그와 같은 일은 있어서도 안되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오죽하면 부목사를 모시지 않겠다고 하고 정치적으로 원목이 나가면 부목들도 모두 나가는 것으로 제도를 만들겠느냐 하는 점에서 생각해보면 부목들이 알지 못하는 원목들의 고충이 있었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선입견에서 모든 사람들을 대하다보면 색안경을 쓰고 사물을 보면 파랗게 보이듯이 같은 맥락에서 원목이 부목을 보면 협력자가 아니고 모두 해롭게 하는 자들로 보이기 마련이니 깊은 사랑을 주지 아니하고 사무적으로 대하며 경계의 고삐를 늦추지 아니하며 부목의 일거일동(一擧一動)을 주시하여 보는 불편한 모습을 보고 살게되는 것이 바로 부목들의 생활이라는 것이다.
심할 때는 어떤 부목은 목회자체를 그만두는 일까지 생기고 있으니 이래서는 주의 일을 하는 주의 종들로서는 시급히 해결되어야할 문제라고 아니할 수 없는데 피차가 자기의 위치를 지켜서 맡은 일에만 최선을 다하여 교회가 부흥되도록 함이 옳다고 본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고 행정권도 없는 부목은 아무런 힘이 없기 때문에 서러울 때가 많아 남몰래 눈물을 흘리며 소리 없이 우는 남편의 모습을 볼 때는 사모로서 정말 괴롭기 짝이 없다.
그리고 당회장 목사님의 사모는 당회장과 같은 권리를 가지고 부목사 사모에게 대할 때는 같은 여자로서 또한 같은 사모로서 선배와 연령이 많다는 점에서는 존경하고 섬길 마음이 있지만 부목사의 부인으로 대하며 하대(下待)하는 것을 볼 때는 속이 상하는데 아무리 후배라고 해도 인격적인 면에서 대해주면 존경할 마음이 생기지만 당회장 목사님의 사모니까 그렇게 대한다는 것은 도무지 인해가 가지 아니하는 부분이다.
군대가면 같은 장교인데도 계급이 좀 더 높다고 해서 계급이 낮은 자의 부인은 상관의 부인에게 상관을 모시듯 하는 것이 맞지 아니한다는 것은 남편이 상관이지 그의 아내도 상관이냐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아내도 상관과 같은 행세를 하며 계급이 낮은 장교의 부인을 부리는 것은 올바른 처사라고 할 수 없다.
그래도 하급장교의 부인이 그렇게 하는데는 계급도 계급이지만 남편의 진급에 영향을 줄까하여 그 수모를 참아가며 종이 주인을 모시듯 하지만 마음에서 울어나 자의로 하는 것이 아니고 어쩔 수 없어 억지로 하는 것이라고 보면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군대와 교회는 엄연하게 다른 면이 있는데 그것은 군에는 계급사회이기에 그렇다고 치더라도 교회는 사랑의 단체이고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섬기는 것이 기독교의 정신이기에 더욱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하였다(요13:13-17 마20:28).
여하간 인격적으로 수양이 덜 된 분들을 당회장으로 모시는 부목들과 사모들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있는데 이는 당해보지 아니한 사람은 짐작도 할 수 없을 것이다.
83.낙도교회26(落島敎會)사모의 고통
목회(牧會)라는 사명은 같은데 어찌하여 어떤 목사는 큰 교회에서 대접받고 생활에 불편함 없이 즐거움으로 목회를 하고 누구는 같은 목사이면서도 왜 섬에 들어가 정말 육지 큰 교회에서 목회 하시는 분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며 목회를 하는지 때로는 남편을 원망하다가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때로는 나 같은 사람이 이런 곳에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누가 이와 같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주의 복음을 전할까 하는 마음으로 사명감에서 들어 갔지만 정말로 쉽지 아니하다는 것을 있으면서 차츰차츰 알게되었다.
어촌에는 미신들을 많이 섬기기 때문에 전도도 제대로 되지 아니하고 사람들을 사귀기도 힘들며 성격들은 거친 파도와 싸운 사람들이라 거칠기 이루 말할 수 없어 잘못하면 봉변 당할까 보아 매사에 조심하는데 성도들이라고 몇 명이 안되어 교회는 자립하기는 어렵고 대도시나 육지의 교회들이 돕지 아니하면 굶기 쉽상인 상태이고 교인들이 몇 명 있다고는 하지만 주일 예배를 드리다가도 바다에 배가 들어오면 앉아 있다가도 예배를 마치기도 전에 다 빠져나가는 약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교회도 있으니 목회자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느냐는 것이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어려운 점이 한 둘이 아니고 모든 생활 전체가 괴로운 일밖에는 없는데 그 곳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자란 사람들은 열악한 환경에 적응하여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지만 육지에 태어나 많은 문화혜택을 누리고 살던 사람들은 어촌문화에 적응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고 음식까지도 육지와는 다른 면이 있어 쉽게 입맛을 그곳 식생활에 길들이기가 어려워 매우 오랫 동안 고생을 해야한다.
어디 그 뿐인가 목회자인 남편이 신학교를 마치지 아니하여 신학재학 중에 섬으로 들어가면 남은 과정은 마쳐야 하기에 그 어려운 환경에서도 신학을 계속하는데 애로가 이만 저만이 아닌데 우선 배를 타고 나가서 서울로 다녀야 하는 일은 생각처럼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남편이 학교 가고 나면 어린것들과 적막한 가운데서 남편이 돌아오는 날을 기다리며 한 주간을 사는데 어쩌다 태풍이나 불고 파도가 거세게 치면 배가 왕래하지 못하니 남편은 부두 가에까지 와있으면서도 들어오지 못하고 아내로서는 마음이 조리고 가슴이 타서 입술이 바싹바싹 마르는 것이다.
이는 남편을 만나지 못해서가 아니고 사람이야 몇 명이 안되지만 주일에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목회자도 아닌 사모가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할지 그렇다고 교인들 중에서 누구라도 사회를 보며 예배를 주도해서 드릴만한 분이 있다면 모르지만 그만한 성숙된 성도는 없으니 죽으나 사나 사모님께서 해야하는데 전도사도 아니면서 강단에서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보통 두렵고 떨리는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말이 그렇지 섬에서 목회 한다는 것은 정말 육지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힘들다는 것을 고백하지 아니할 수 없는데 물론 그것도 정도 차이는 나는데 교회가 일찍부터 세워져 약간의 자리가 잡힌 교회는 경제적으로 크게 어렵지 아니한데도 있지만 섬에 있는 교회 대부분이 재정자립도도 약하고 모든 면에서 열악하기 때문에 육지 큰 교회들에게 보조를 청하지만 응답은 매우 실망적이라 돕겠다고 나서는 교회들이 별로 없다는 것이 더욱 마음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도시에서 큰 교회를 목회 하시는 사모님들은 성도들이 먹는 것을 비롯해서 입는 옷은 물론이고 최신 가전제품에 이르기까지 선물하여 방안에나 부엌에나 가득가득 쌓여 있고 먹을 것도 과자를 비롯하여 과일 및 육류 생선에 이르기까지 풍성하지만 섬에서는 항상 해물 외에는 별다른 음식을 먹어볼 수 없고 과일이 있다고 해도 신선도가 떨어지고 너무 값이 비싸서 돈은 두 배로 주면서 맛은 없고 그나마 사서 먹을 만한 경제적인 여유도 없다는 것이다.
다 같은 여자로 태어나서 어떤 이는 풍요롭고 부유하게 살고 자신 같은 여인은 너무나도 비참하게 살고 있으니 눈물이 흘러내려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인데도 그러나 소리내어 울지 못하는 것은 주님은 우리보다도 더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하는 신앙적인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인데 그는 근본 하나님이시지만 고생하지 아니하고 큰소리치고 호의 호식 할 수 있는 신분인데도 자신이 비하의 신분을 취하여 모든 것을 다 버리시고 죄 많은 세상에 오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고 죄인들을 위해서라는 것을 생각하고 목회자도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하여 이곳에 오지 아니하고 섬 주민들을 위하여 왔다는 측면에서 생각할 때에 고생을 고생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잠시나마 고통을 참을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하다가 육지 큰 교회에 목사님 사택을 가보게 되면 해놓고 사는 모습이 농어촌 어려운 교회에서 목회 하는 목회자들에 비하면 도무지 비교가 되지 아니하여 이런 생활도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고 같은 목회자이면서 너무나도 차이가 많이 나는구나 하고 불평을 하게되는데 이렇게 말하면 오해가 될까하여 다시 말하지만 도시 큰 교회 목회자들의 생활이 너무나 호화롭다는 비판적인 말이 아니고 농촌과 도시에 차이가 너무나 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도시 목회자들이 너무 잘 먹고 잘 산다는 것이 아니고 도시와 농촌의 생활이 너무나도 차이가 많이 나므로 공평치 못한 현실을 안타 까와서 하는 말이다.
거기다가 어쩌다가 도시에 나오면 별다른 뜻도 없이 목사님이나 사모님께서 얼마나 고생하느냐는 뜻으로 염려가 되어 생활비 얼마나 받느냐고 물을 때는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도 얼굴이 붉어지고 어촌에서 어렵게 목회 하는 것이 죄나 되는 것처럼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주저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도시 큰 교회 목회자들에게 비하면 생활비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대는 고생한다고 안타까워서 묻는 말이지만 대답하는 측면에서는 여간 난처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 또한 기막힌 말은 농어촌 교회 보조하는 이들이 하는 말이 지금 농어촌 교회 목회자들이 도시 웬만한 교회 목회자들보다는 모두 잘 사는데 그 이유는 도시교회로부터 보조를 너무 많이 받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와 같은 말을 들을 때는 속으로 눈물이 나와 억제할 수가 없다.
물론 부지런하게 여러 교회 뛰어도 다니고 도와 달라는 편지를 손수 쓰는 것이 아니고 복사하여 보낼 때까지는 모두 보내보자는 식으로 전국교회로 발송하여 어부가 그물 치듯이 보조 요청을 하면 그 가운데서 현장에 와서 보지도 아니하고 돕는 교회들이 생기는데 어떤 교회에서는 농촌이지만 목회 하는데는 지장 없도록 보조를 받는데도 있지만 대부분 교회는 그렇지 못하고 아이들 교육비도 없어서 쩔쩔 매는 처지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와 같은 가슴 아픈 말들을 하는데 그 때는 총회적으로 농어촌 교회 돕는 정책이 일관되지 못하고 어떤 뚜렷한 대안도 없고 원칙도 없는 것을 원망하게 된다.
주인 많은 나그네가 굶기가 예사라는 말이 있는데 농촌교회는 도시에서 많이 돕기 때문에 자기들 교회에서 돕지 아니하여도 어느 교회에서 돕겠지 하면서 성의를 다하여 돕지 아니하기 때문에 정말 한 교회 도움도 받지 못하는 교회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총회적으로 획기적인 어떤 대안을 내놓지 아니하면 농어촌 교회 목회자들은 언제나 재정적인 자립은 기대도 할 수 없고 복음 전하는데도 큰 지장을 초래하고 목회자들은 농어촌 교회를 기피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불가피할 것이다.
특히 어촌에서 목회하는 목회자들의 사모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고생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는 것이 정확한 말이고 그 중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교회가 얼마나 큰가 아니면 얼마나 많은 보조를 받느냐에 따라서 차이가 조금 날뿐이지 그 외에 교통편이나 특이한 어촌마을 사람들의 성격과 그 지역에 적용하여 살기가 힘든 것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적으로 생각하여 도움이 필요한자는 도움을 줄 수 있는 이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사도행전 저자는 기록하였는데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하였다(행16:6-10).
밤에 환상이...우리를 도우라 하였는데 꿈과 환상은 고대에 있어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 가운데 하나였다
(9:10,12;10:3,17;18:9;22:17). 이는 밤이든 낮이든(10:11) 상관없이 사용되었다. 여기에서는 밤중의 '어느 때'를 뜻하는 '디아 뉴토스'가 사용된 걸로 보아 아마도 바울이 잠들었을 때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지나치게 '말씀' 계시만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러한 환상의 '시각적'요소를 배제하려는 자들도 있었다(Michaelis). 그러나 여기에서 사용되고 있는 '호라마'('환상')나, '오프데나이'('나타나다'), '이데인'('보다')등의 단어는 이 환상의 시각적 명료함을 잘 보여준다(Haenchen). 결국 환상은 단순한 상상이나 추리에 의한 것이 아니고, 시각적인 것을 동반한 초자연적인 현상이었다. 한편 어떤 이들은 드로아에서 바울에게 도움을 구했던 마게도냐인이 바로 누가였다고 주장한다.
이는 누가가 마게도냐인 즉, 빌립보 출신이라는 사실에 근거한 것으로, 대화하는 가운데 이미 누가가 바울에게 마게도냐에 복음이 필요함을 깨닫게 하였을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이 만남이 환상 가운데 이용하셔서 바울 일행을 마게도냐로 가게 하셨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또 혹자는 드로아에서 바울이 실제로 마게도냐인들의 방문을 받은 바 있고, 이것이 심층 심리 속에서 작용하여 꿈으로 나타났으리라 추측하기도 한다(H.Marshall). 어쨌든 이 환상이 하나님이 보내신 초자연적인 환상임에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각양의 짐승들을 보이신 것처럼 바울에게도 환상 가운데서 마게도냐 사람을 보이신 것이다(Lenski). 그리고 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계시가 그 들에게 명확히 전달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도움이 필요한 곳에서 주께서 환상을 통해서라도 도울 수 있는 자들에게 도와주라는 명령인 것이다.
그래서 도시에 큰 교회들이 농어촌 약한 교회의 도움의 호소를 못들은 척 할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주의사랑으로 힘껏 도와야할 의무도 있고 책임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자기의 것을 주는 것과 같은 교만한 태도는 버리고 주의 명령인줄로 알아 최선을 다하여 돕는데 인색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84.목사(牧師)는 좋은데 사모가 나쁘다고 할 때 고통
부부일신(夫婦一身)라는 말이 있는데 목사가 아니고 보통 일반사람들이라고 해도 부부가 함께 협력해야 무슨 일이라도 성공하지 손발이 맞지 아니하면 결코 남편이나 아내가 성공할 수 없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이다.
그런데 목회자의 사모는 많은 교인들을 상대하다보니까 말도 많고 탈도 많아 목회자가 종종 곤욕을 치러야할 때가 많은데 이는 서로가 이해가 되지 아니하는 부분도 있고 사모에게도 약간의 말썽의 소지도 있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서로가 이해심을 가지고 접근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자신들의 생각만 고집하게 되면 피차에 은혜롭지 못한 일들이 예기치 아니하게 벌어지는 수도 있다.
그리하여 어느 목사님께서는 아예 사모를 앞세우지도 아니할 뿐만 아니라 사모를 교인들과 완전 격리시켜 예배 마친 후에도 성도들과 인사도 시키지 아니하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심방도 못하게 하며 할 수만 있으면 교인들과 접촉을 할 수 없어 부목사로 부임한 목사가 사모님이 누구인가를 오랫동안 알 수 없을 정도니까 어느 정도인가는 독자들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개척교회에나 농어촌 교회에서는 경우가 다르고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대상은 도시나 농촌 할 것 없이 기성교회 수 백 명씩 모이는 큰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필자가 아는 이름만 대면 한국교회에서는 누구라도 알 수 있는 목회자도 큰 교회에서 목회 하셨는데 사모님은 완전히 일반성도와 같이 나타나지 못하게 하시고 목회자가 목회를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목사는 좋은데 사모님 때문에 틀렸어 하는 교인들의 말은 목회자나 사모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부분인데 이는 가정에서 목회자를 돕지 아니한다는 뜻으로도 생각할 수 있고 목사에게 도움이 안되고 큰 방해꾼이 된다는 뜻도 있으며 더 비약하면 교인들에게 말썽을 일으켜 목회에 지장을 초래하는 일이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이럴 경우 목사는 어떻게 처신해야 옳을지 난감할 때가 있어 아내에게 말은 하지만 사모는 자신의 성격을 하루아침에 내던질 수 없고 그렇다고 목회자 부인을 그만두고 이혼하자고 할 수도 없으며 자신도 자신을 알면서도 자기의 마음대로 못하는 실정이라 교회에서 자신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모든 일들과 그 일로 인하여 남편인 목사가 궁지에 몰린 것도 알지만 속시원하게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점에서 사모의 고통은 더욱 가중되는 것이다.
위인(偉人)들 뒤엔 현모양처(賢母良妻)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인데 남편이 자신 때문에 목회를 실패한다면 그 책임은 전적으로 사모에게 있어 따가운 시선은 사모에게로 향하고 여론은 사모 때문에 좋은 목사 앞길을 망친다는 말을 들어도 할말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사람마다 개성이 있어 그 천성을 버리지 못하는 괴로움은 인정하지만 그래도 어떤 이유에서 목회를 시작했는지는 몰라도 남편이 목회를 시작했다면 사모가 방해꾼이 되어서는 안되고 목회에 도움이 되는 것이 원칙인 줄을 몰라서가 아니고 알면서도 독특한 성격 때문에 교인들과 문제를 일으켜 교인들 입에서 우리 목사님은 우리 사모님께서 앞길을 막아 하는 말을 들을 때 죽고 싶도록 고통스러운 것이다.
특히 목사는 여성도들과 자의가 되었든 타의가 되었든 좋고 싫고 떠나서 마주쳐야하고 만나서 상담 및 의논도 할 때가 있는데 어쩌다가 그와 같은 광경을 볼 때는 의부증(疑父症)환자처럼 피가 거꾸로 서 참지를 못하고 얼굴 색깔을 변하여 남편에게 대들어 갖은 모욕적인 말을 하고 도무지 상식 밖의 언행을 할 때는 목사도 안절부절못하고 상담하는 성도는 더욱 민망스럽고 사모는 후회막급하며 혀를 잘라내야 하겠다는 말을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사태수습에는 한계가 있어 교인이 떠나지 아니하면 그 일로 인하여 목회자가 자리를 옮겨야하는 불행한 일도 발생하게되는 것이다.
그런 후에 사모는 자신의 잘못을 알고 후회하고 남편에게 미안하고 교인들에게 부끄러우니 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냐 그 말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사모는 나름대로 남편을 위하여 나설 자리도 삼가고 조심성 있게 행동 하다보면 교인들은 사모의 심정도 모르고 입방아를 찧는데 말하지 아니하여 병든 사람들처럼 이런 말 저런 말 할말 못할 말 다해대는데 사모는 변명도 못하고 정말 괴롭다는 것이다.
목사님도 목회하기 어려운 경우가 더러 있는데 빨리 걸으면 방정맞다고 말하고 그 소리를 듣고 천천히 얌전하게 걸으면 저렇게 게을러 터져 가지고 무슨 일을 하겠느냐고 말하고 열심히 연구해서 전하면 아는 척 한다고 말하고 그냥 성경만 보고 전하면 무식하다고 하고 철학이 없다고 말하며 큰 소리로 전하면 혈기 낸다고 말하고 작은 소리로 조용하게 전하면 잠재우는 자장가라고 말하는 것이 교회 실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목회자도 목회하기가 어렵고 따라서 사모도 그와 같은 말많은 교회에서 목사 사모로서 뒷바라지한다는 것은 더욱 어렵기 때문에 사모가 고통스러운 것은 처음부터 알고 시작했다면 이것도 저것도 참고 사모 때문이라는 말은 듣지 아니하도록 최선을 다하는데 고통스러운 것이 목회자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사모 때문에 우리 목사님은 목회에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을 들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사모가 항상 인상을 펴지 아니하고 찌푸리고 있는 것 같이 보이기 때문에 교인들은 그런 것을 가지고 말들 하는데 사람이 사는데는 성격이 다르고 사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항상 웃을 수는 없고 항상 우울할 수 도 없는 것이라 어떤 때는 집안에 좋은 일이 있으면 얼굴 색깔이 환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표정이 어두운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교인들은 그와 같은 사정은 당신의 사정이고 언제나 웃는 모습으로 성도들 앞에 나타나고 기분이 나빠도 좋은 것 같이 슬픈 일을 당해도 기쁜 일을 맞이한 것 같이 연극배우가 되어 명 연출가가 되라는 무리한 주문이기에 따르지 못하는 사모님은 죽고싶도록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85.목사(牧師)가 죽고 난 후 과부로서의 고통
사람은 누구나 결혼식은 두 사람이 한 날 한시에 같은 장소에서 같이 하지만 결혼 생활은 부부가 한결 같이 되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에 둘 중에 누가 먼저 죽어도 죽는 수가 있는데 불행하게도 남편이 먼저 죽으면 남은 사모는 너무나도 외롭고 쓸쓸하며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찾아오는데 그 중에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목회자이기 때문에 모아둔 돈도 없는데 자녀들의 교육이며 생계유지를 위하여 어떻게 살아갈지 생각만 해도 막막하기만 하다는 것이다.
성경에도 보면 그와 같은 경우가 있는데 "선지자의 생도의 아내 중에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의 종 나의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한 줄은 당신이 아시는 바니이다 이제 채주가 이르러 나의 두 아이를 취하여 그 종을 삼고자 하나이다 엘리사가 저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고하라 저가 가로되 계집종의 집에 한 병 기름 외에는 아무 것도 없나이다 가로되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라 빈 그릇을 빌되 조금 빌지 말고 너는 네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문을 닫고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 대로 옮겨 놓으라 여인이 물러가서 그 두 아들과 함께 문을 닫은 후에 저희는 그릇을 그에게로 가져오고 그는 부었더니 그릇에 다 찬지라 여인이 아들에게 이르되 또 그릇을 내게로 가져오라 아들이 가로되 다른 그릇이 없나이다 하니 기름이 곧 그쳤더라 그 여인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고한대 저가 가로되 너는 가서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너와 네 두 아들이 생활하라 하였더라"하였다(왕하4:1-7).
이는 목회자인 남편이 먼저 죽고 사모가 살아서 당하는 고통을 보여주는데 고통 중에 일부인 경제적인 문제로 당하는 고통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데 평소 목회생활이 얼마나 어려웠으면 빚을 내어 생활을 했겠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그 빚도 다 갚기 전에 남편이 죽었으니 눈앞이 캄캄하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으며 맑은 하늘에 갑작스럽게 벼락을 맞은 기분에 무슨 일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할지 도무지 일손이 잡히지 아니하는 것을 자신도 어떻게 할 수 없다.
빚 갚을 돈은 없는데 돈 빌려준 채주는 돈 내놓으라고 졸라대다가 나중에는 아들들을 빚 대신에 데려가서 종으로 부려먹겠다고 위협하는 상황에 처하게되니 그 고통을 무엇으로 비유하여 표현해야 실감이 날지 사람들은 그 사정을 알지 못할 것이다.
남편 죽은 것도 자신의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은 심정이라 삶의 날을 송두리째 누구에게 강제로 빼앗긴 기분인데 그 슬픔도 채 가시기 전에 빚 때문에 자식들까지 빼앗기기 생겼으니 곰곰이 생각하면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아니할 일이다.
물론 목회를 돈벌이로 생각지 아니하고 들어섰지만 막상 목회자인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보니 남는 것은 자식들과 빚밖에 남지 아니하게 되니 나오는 것은 한숨이요 생각하는 것은 불안과 두려움밖에 없고 살길이 막막한데다가 채주는 아이를 데리고 가서 종으로 부린다고 하니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고 소리 없이 눈물이 흘러 뺨을 적시나 누구하나 그 눈물을 닦아주며 따뜻한 말로 위로하는 이가 없는 것은 아이들도 어리지 주변에 친척도 없으니 당연한데도 현실을 받아드리기가 매우 어려워 도무지 참을 수 없어 몸부림을 치는 것은 억지고 자신의 마음의 반항이지 그렇게 해보아야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답답하니까 그렇게 해보는 것이다.
경제적인 문제 뿐 아니고 자녀들의 장래를 어떻게 양육해야 옳을지 도무지 대책이 서지 아니하고 막막하기만 하여 울기만 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고 전에 성경학교 졸업한 적이 있고 신학교도 졸업했기 때문에 어느 교회 여전도사라도 봉사할 수 있는가 하여 다녀보아도 그리 쉽지 아니하고 더욱 어려운 것은 처음부터 여전도사 생활을 했으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목사 사모로서 살다가 시작하려고 하니 우선 노회 고시부에서 실시하는 전도사고시에 합격해서 자격증을 가지고 해야하는 것이 순서라 여간 어렵지 아니하고 그냥 시무 하려고 하니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니라 여간 애로가 많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어중간하게 남편을 사별하고 보니 다시 재혼을 한다는 것도 쉽지 아니하고 전남편의 아이들이 있으니 쉽지도 아니하고 이것저것 아무리 맞추어보아도 하나도 맞는 것이 없으니 정말 두 부부가 평생을 해로하는 것은 복중에도 큰복이라고 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을 과부가 되고 나서 절실하게 깨달은 것이다.
목회자인 남편이 살아있을 때에는 교회성도들이 따뜻하게 대해주고 친절하고 정중하게 대해주더니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속히 사택을 비워주기를 바라는 눈치고 본인의 생각은 교회 짐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며 말로 표현할 수 없고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면서 섭섭한 마음부터 가지게 되고 사람의 심성이 강팍한 방향으로 변하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변해 가는 것을 알게되었다.
이와 같은 사정은 모르고 사모님이 목사님께서 세상을 떠나고 나서 여러모로 변했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으면 더욱 마음의 고통을 느끼지 아니할 수 없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살아 있을때 농담이지만 그가 하는 말이 내 마음 상하게 하지 마라 나 죽으면 과부 되어 후회한다고 하였는데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남편이 죽고 나니까 사모님께서 뼈저리게 느끼고 죽은 남편이 더욱 그리워지더라는 것이다.
그 목사님은 개척교회를 여러 곳에 세우셨는데 필자도 감탄하는 것은 보통사람 같으면 도저히 교회를 개척할 수 없는 상태에서도 개척하여 얼마 있지 아니하여 예배당을 세우는데 이는 주께로부터 특별한 은사를 받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교회를 개척하여 예배당까지 지어놓고 평안하게 목회 할만 하면 또 다른 곳으로 옮겨 다시 개척하여 또 교회를 세우고 예배당도 짓는데 한번은 교회가 문제가 생겨서 분쟁이 잃어나 도무지 그곳에서 있을 수도 없게 되었고 부채도 많이 있어 여간 곤란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상회처리에 따라서 다른 곳으로 개척하러 갈 요량으로 사면을 하고 기다리는데 당장 옮길 장소가 없어 사택에 기다리고 있는데 그 있는 동안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교회에서는 전화도 끊고 생활비는 두 말할 것도 없고 그 외에도 기막힌 일들이 일어나는데 사모님은 병이 날 정도로 수척해지고 온 가족들이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것 같은 나날을 보내는데 그가 잘했든지 못했든지 상관없이 받는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것은 틀림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겨우 다른 곳으로 개척을 하려고 갔는데 마침 어느 교회에서 개척하려는 것을 그에게 맡겨서 개척하기로 하고 갔는데 전에 있던 교회 교인이 부채관계로 목회자 집에 가재도구를 모두 쓸 수 없게 하였으니 더욱 기막힌 일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면 누구든지 고통의 차원을 넘어서 차라리 죽어 천국에 갔으면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런데 목사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잘 참고 견디어 개척한 교회가 성장하여 예배당도 짓고 이제 목회 할 만한데 그만 병들어 세상을 떠났으니 그 광경을 지켜본 사모님은 너무나도 아쉽고 안타까워서 목놓아 흐느껴 울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차마 자세하게 기록할 수 없어 그만 두지만 정말 목회 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십자가의 길인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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