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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인생관 -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성경의 교리적 근거 모색)
논문신학성경 김광렬 교수............... 조회 수 3211 추천 수 0 2009.02.13 18:34:46| 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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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 : 성경의 교리적 근거 모색
I. 세상에 대한 교회의 사명으로서의 '자비와 섬김(봉사)의 사역'
교회의 사명 혹은 목적들은 일반적으로 3중적인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 이해된다. 우선적으로 교회는 하나님께 대해서는 예배하는 공동체로서 부름을 받았으며, 다음으로 주의 성도들에 대해서는 양육의 사명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세번째로 교회는 세상에 대해서 "증거"의 사역을 감당하도록 부름받았는데, 그것은 일반적으로 복음전도와 자비의 사역으로 나뉘어진다.
그런데, 우리가 지난 세기 동안 전개되었던 세계선교운동의 역사를 개관하면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교회가 감당해야할 세 번째 사역으로 이해되는 "증거"의 사역에 있어서 성경적인 관점을 회복하는 일이었다. 두 가지의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첫째는 주님의 교회는 변화되는 세상 속에서도 주님이 가르쳐주신 사도적 복음의 순수성을 변질시키지 말고 온전히 지켜나가야한다는 사실이다. 세상에 대한 교회의 사명인 자비와 섬김의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사회-정치적 참여의 부분도 포함시키게될 때에, 그것은 "사도적 복음의 순수성이 간과된 운동들"이 취했던 방식이나 관점과는 달라야한다는 점이다. 기독교의 복음은 지상의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운동이 아니요, 오히려 그것은 초월적인 하나님 나라를 추구할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제도나 사상의 발전으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초월적인 은혜의 역사로 말미암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번째로 배울 수 있는 교훈이 있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주님이 가르쳐주신 복음은 사회적 함축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확인한 점이라고 요약해볼 수 있다. 복음전도의 사명은 사회적 책임의 과제와 무관한 성질의 것이 아니라, 그 둘은 서로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는 점을 보수진영에서 확인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회적 책임의 부분을 복음전도의 사명과 배치되는 것으로만 간주하여, 후자에 대한 강조 때문에 전자를 배제시키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말아야한다는 사실을 복음주의자들은 확인하게 되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인들의 복음사역은 "총체적(holistic)" 복음사역이 되어야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역사적 기독교회의 신앙을 견지하는 복음주의자들에게 지난 세기의 선교운동의 역사가 가르쳐준 두 번째의 교훈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제 한국의 복음주의 신학계, 그리고 보수교단이라고 불리우는 총회의 모임들 속에서도 이러한 방향에서의 성경적 관점 회복을 위한 시도들이 전개되고 있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본 논문 속에서 제출되는 내용도 바로 그와같은 시도들 중의 하나인 것이다.
사실 총체적 복음사역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들과 사역들 속에서 부터 확인될 수 있다. 복음서를 포함한, 신약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행적을 보면, 그는 이 땅에서 천국복음을 전파하실 때에, 두루 다니시면서 그것을 말로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들을 고치"시는 사역도 병행하셨던 것이다.(마4:23; 9:35) 또한 사도행전 10:38절은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다고 설명한다. 즉 예수님의 전도사역은 사람들의 영혼구원에만 국한되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의 육적 질병의 문제를 비롯하여 지상에서의 삶 속의 인간의 연약하고 고통스러운 영역들 속에서도 "복된 소식"으로 다가가셨던 사역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예수님의 모범적인 행적들은 초대교회의 성도들의 삶 속에서도 구제사역, 혹은 가난한 교회를 위한 헌금모금사역 등의 형태로 실천되어왔으며, 그 이후로 그러한 성경적 가르침을 따라 신앙생활을 살아온 과거 교회역사 속의 수많은 신앙인들의 삶 속에서도 계속적으로 실천되어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과거 기독교회의 전역사를 통하여 볼 때, 특히 종교개혁시대 이후로 부터 19세기까지의 기간은, 교회의 사회적 봉사사역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시기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17세기에 독일을 중심으로 전개된 경건주의 운동과 18-19세기에 걸쳐서 영국과 미국에서 전개된 부흥운동 내지는 대각성운동의 시기를 가리키는데, 더욱이 그 시기에 경건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이 가난한 자들과 소외계층들을 위해서 노력한 것이 의미있는 것은, 특히 그 당시에는 유럽과 북미의 자유주의자들 조차도 아직 그러한 일들에 대해서 무관심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17세기부터 계속되어온 복음주의자들의 이러한 총체적 복음사역의 역사는 20세기 초에 이르러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미국의 역사학자 Timothy L.Smith가 자신의 책, Revivalism & Social Reform에서 "대반전(大反轉/ Great Reversal)이라고 명명했고, David O.Moberg가 자신의 책의 제목으로 삼고 연구했던 현상으로서, 복음주의자들이 사회적 책임의 부분을 등한히하게 되었던 시기를 말한다. 정확히 말하면 1830년대 이후부터 시작하여, 야기되었던 몇 가지의 요인들로 말미암아 복음주의자들이 사회적 책임을 등한히하게된 당시의 전반적인 현상을 가리킨다.
그러나, 복음주의의 역사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또 다시 새로운 회복을 향하여 나아갔다. 복음주의자들 중에서 그러한 '대반전'의 흐름을 또 다시 역전시키려는 시도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대표적인 인물로서 우리는 칼 헨리(Carl F.H.Henry)를 들 수 있는데, 그는 1947년에 저술한 Uneasy Conscience of Modern fundamentalism라는 책을 통하여 복음주의자들의 회복을 부르짖기 시작했고, 그 이후 약 30년이 흘러서 세계 복음주의자들은 공식적으로 사회적 책임에 관한 복음적 선언문인 로잔언약(1974)을 작성하게 되었다. 물론, 그 사이에도 1967년에 개최되었던 성공회 복음주의자들의 모임과 같은 사회적 책임의 사역을 위한 모임들도 전개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로잔언약과 같은 복음주의자들의 세계적인 선언문이 제시되면서부터 좀 더 활발한 움직임들이 일어났다. 예를들면, 1982년에 개최되었던 Grand Rapids에서의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관계 협의회"를 비롯하여 그와 같은, 그리스도인의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을 균형있게 이해하려는 복음주의자들의 모임들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고, 점차적으로 복음주의자들은 사회적 책임의 부분을 적극적으로 감당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던 것을 확인해볼 수 있다.
이제는 한국교회 안에서도 지난 세기 동안의 세계복음주의자들의 모임들 속에서 확인되어온 "총제적 복음"사역을 위한 시도들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 결과, -앞에서 지적했던 바와같이- 복음주의자들 특히 보수교단에 속한 교회들도 복음의 사회적 의의를 드러내기 위한 일들을 추진하게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먼저, 이는 오늘의 한국교회가 처한 상황 속에서 매우 필요한 일이고 환영할 만한 움직임이라고 평가하게 되지만, 동시에 우리에게는 역사적 기독교회의 신앙을 견지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와같은 복음의 사회적 의의를 드러내며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는 사역에 대한 성경의 기본적인 가르침들을 재확인하고, 또 올바른 신학적 기초를 놓아야할 과제가 주어지게 된다고 하겠다.
그것은 성경과 역사적 기독교회의 신앙이 요구하는 "총체적 복음사역" 안에서 이해되는 사회적 책임이나 사회봉사는 단순히 세속적인 사회봉사 사업과는 구별되야하기 때문이다. 양자는 외형적으로 전개되는 모습들이 유사해보일 수 있으나, 그 추진되는 출발점이나 지향하는 목표점 등에 있어서 전혀 다른 성격들을 지니게되기 때문이다. 지난 20세기 초에 복음주의자들이 저질렀던 "대반전"과 같은 퇴보의 역사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오늘날 복음주의자들이 무분별하게 사회적 책임의 영역들이나 사회복지 사업에 뛰어들게되기 쉬운 것이 사실이다. 물론, 실제적인 사역의 현장들 속에서 복음주의자들이 열려진 마음으로 세속적인 사회봉사에도 협력적일 수 있어야하는 것은 그것도 일반은총의 관점에서 그 정당성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복음사역"을 수행하는 교회의 본질적 사명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출발점과 내용, 그리고 목표를 가지고 수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인식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원리들, 특히 성경의 기본적인 교리들이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 제시해주는 가르침들을 분석해봄으로서, 우리는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는 그리스도인의 신학적 정체성을 확립하며, 그러한 사역의 신학적 기초를 세우는 일을 감당할 수 있게될 것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역사적 기독교회의 신앙("보수적 복음주의") 안에서 이해되는 성경의 기본적인 교리들 (신론, 인간론, 기독론,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의 사역들을 밝혀주는 내용들을 찾아 정리해보려 한다. 복음의 사회적 의의에 대한 신학적 기초를 세우는 작업에 있어서,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논의들을 끌어들이는 일도 도움이 될 수 있겠으나, 그 보다는 먼저 이미 우리에게 전수된 역사적 기독교회의 신앙 안에서 제시되는 성경의 기본적인 교리들의 내용들을 재점검하는 일이 요청된다고 여겨지며, 그 논의의 과업을 수행하려는 것이 바로 본 논문의 목표이다. 그러한 작업을 통해서 우리는 사회적 책임에 뛰어드는 그리스도인들이 올바른 신학적 정체성 안에서 복음의 사회적 의의를 드러내는 일을 성경적으로 감당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교리적 기초를 논하는 기존의 작업들 중에서, 우리는 J.Stott의 논의와 Moberg의 논의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 그 논의가 하나님의 속성이나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의 주제로만 국한되어 제시되었으며, 후자의 경우는 다양한 주제들이 취급하되는 했으나 매우 간략하게 취급되고 말았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그들의 논의들을 참고하면서도, 그 보다는 좀 더 충분하고 또 발전된 논의가 이루어지도록 보완하려했다. 물론, 이하의 내용도 여전히 또 하나의 시도일 뿐이므로, 앞으로 지속적인 토론과 신학작업이 추가되어야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신학적 기초를 놓는 우리 모두의 과제를 효과적으로 성취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II. 성경의 교리적 근거들
가)신론에서
우리는 먼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내용에서부터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교훈들을 찾아볼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우주 만물들이-인간을 포함하여- "선하게(good)" 지음받았다고 설명한다.(창1:31; 딤전4:4) 그렇다면, 성경은 중세적인 성속이원론을 포함한 어떠한 종류의 이원론적 사고도 배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사회와 공동체도 하나님의 선한 피조계에 속한 영역들로서 인정하고, 영적인 생활이나 교회생활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밖의 사회생활이나 직장생활을 포함한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며, 그의 나라가 임하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노력해야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인 신자의 삶의 목적 안에도 온세상과 피조계에 대한 하나님의 포괄적 관심의 의지가 반영되도록 해야할 것이다.
둘째로, 성경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제시하는 창조교리는 곧 이어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의 교리로 이어지고 있다. 즉, 성경의 하나님은 온 세상의 창조주이시므로, 그가 창조하신 만유의 주권자되시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만물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을 뿐 아니라, 또한 오직 그 분께만 속해있고, 그 분의 주권 아래 있으므로, 그것들은 그 분의 뜻을 따라 존재해야하는 것이다. 창1:28에서 인간들에게 분부하신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문화명령은 우리에게 대리적 통치권을 주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므로, 그 말씀을 아담의 타락 이후 시대를 살아가는 신자들은 자신들이 속한 사회와 공동체 속에서 그 분의 주권적인 통치 원리에 어긋나는 모든 부분들을 바로 세워나가라는 명령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고후 10:5에서 사도바울은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할" 사명을 일깨워주고 있는데, 그것은 창1:28에 주어진 문화명령이 단지 이 땅과 보이는 만물들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권의 회복만을 가리키지 않고, 눈에 보이지않는 인간의 지식의 영역들에서 까지도 하나님의 뜻을 세우고, 그 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내용들로 회복시켜야할 것도 포함하고 있음을 지적하고있는 것이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말하게되는 신학적 근거들 중의 하나로서, 하나님이 우리가 속한 사회를 포함한, 인류의 모든 역사와 문명들 속에서도 주권자되신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우리 사회 모든 영역들 속에서, 우리는 그 분의 자녀들로서 그 주권자의 의와 선한 뜻들이 성취되도록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위의 고후 10:5절의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단지 자비나 섬김의 사역, 그리고 사회정의를 외치는 일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왜곡된 지식들과 학문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이 간과되고있는 요소들이 있을 때, 그것들을 바로 잡아가야할 사명까지도 감당해야함을 의미한다.
셋째로, 성경의 하나님이 지니신 속성들을 고려해볼 때,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진 사회적 책임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게된다.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제시해준다. 신약 성경에서 우리는 자기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박히게 하기까지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되며(요3:16; 롬8:32), 특히 구약성경에서는 가난한 자들을 관심하시며 그들을 돌보시는 자비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모습 속에서(시68:5-6; 146:6-10; 잠17:5; 잠 19:17), 가난한 자를 변호하시며 그 대신에 압제자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 속에서(렘5:26-29; 겔22:23-31), 그리고 타국인과 나그네를 돌보시는 모습 속에서도(출3:7-10; 출22:21-24; 출23:9; 신10:17-19; 신26:5-11) 표현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그와같이 가난한 자들을 배려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구약의 여러 제도들 속에서 분명히 확인되고 있다. 십일조, 안식년, 안식일, 희년제도, 그리고 추수자에 대한 규례나 제사법 속에서 하나님은 나그네와 고아과 과부와 같은 가난한 자들에 대한 사랑을 베풀고 계셨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성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공의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신다. 그는 공의와 공평의 하나님으로서(신32:4; 레19:11-18), 나라를 통치하는 치리자들도 그 분의 공의와 공평으로 다스릴 것을 명령하고 계시며(미3:1-4; 9-12; 잠16:11-12; 렘22:13-19; 겔45:9-10), 또한 법적 제도들 속에서도 그 분의 공의가 이루어져야 하며(신1:16-17; 사10:1-4; 암5:10-15) 경제적 활동 속에서도 그 분의 공의가 구현되야할 것을 명하신다.(신24:10-15; 사5:8-13; 15-16; 22-24; 겔18:5-9) 그리고 결국 그 분의 공의는 메시야 왕국인 그의 나라에서 온전히 성취될 것임을 말씀하셨던 것이다.(사32:15-17; 렘33:14-15)
이와같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속성들은 하나님의 도덕적인 속성들로서,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에 포함된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으로 그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면, 우리도 당연히 그 나라의 왕이신 분의 모습을 본받아야할 것이며, 그 분의 관심과 의지를 이루기위해서 노력해야할 것이다.
나)인간론에서
인간 존재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들 중의 하나는, 그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이해는, 인간의 존엄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노력해야할 당위성이 우리에게 있음을 말해준다. 창세기 9:6에서 하나님은 생명을 죽이는 일을 금하는 명령을 하면서, 그것은 바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마찬가지로 야고보사도는 한 입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또 저주하는 말을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시면서, 다른 사람을 저주하는 것이 부당한 이유로서 바로 그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약3:9)
하나님의 형상론에 대한 개혁신학의 가르침은 -루터교의 하나님의 형상 이해와는 달리,- 타락 후에도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비록 파괴되기는 하였으되) 여전히 지니고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어 -아담의 타락 이후에도 여전히- 그 분의 형상을 지니고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은 자신들의 인종이나 문화, 사회적 계급이나 성별과 연령에 관계없이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들이며, 따라서 기본적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받고, 또 그렇게 대우받아야할 가치를 지닌 존재들인 것이다.
성경은 물론 인간을 하나님보다 더 근본적인 원리로 보며, 죄의 심각성을 간과하는 세속적인 휴매니즘은 거부되어야 하지만,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존중되야한다는 기독교적 휴매니즘은 그 정당성이 인정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인류창조와 타락, 그리고 예수님의 구원사역이라는 기본적인 성경적 세계관의 관점을 떠나서 추구되는 단순한 "세속적 인간화"(humanization)의 선교사역들은 거부되야 하지만, 성경적 가르침의 세계관 속에서 인간 생명의 존엄성과 그에 따른 인간의 기본권의 회복을 위한 노력들은 -성경적 인간론의 관점에서- 그 중요성을 갖게되는 것이다.
성경적인 인간관의 가르침들 속에서 지적될 수 있는 또 다른 요소가 있다면, 인간의 구성요소에 관해서 성경은 전인으로서의 인간을 가르치고 있다는 점이다. 신자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오류로서, 우리는 신자란 영적인 일들에만 관심하는 자들이며, 하나님도 성도들을 영적인 차원에서의 삶에만 관심하시는 분이신 것으로 생각하려는 태도이다. 즉,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일들이고, 육신의 일들이나 물질적 생활은 세속적이고 죄악된 일들이라고 구분하는 헬라의 영육이원론의 관점에서 신자의 생활을 해석하게되기 쉽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관점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사회적 책임의 부분을 간과하게할 위험성을 내포하게 된다.
그러나, 결코 하나님께서 신자에 대해서 관심하시는 부분이 오직 그 인간의 영혼만의 잘되는 일에만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이 잘됨같이- 그의 육신도, 그가 속한 사회 속에서의 삶도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관심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신자가 베풀어야할 이웃에 대한 사랑은- 물론 이웃의 죽은 영혼을 살리는 일의 우선성이 인정되야할 것이지만- 그의 영혼에 대한 사랑과 아울러, 그의 육적,물질적,사회적 삶의 모든 부분들에서의 아픔들에도 관심하는 사랑이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어둠의 권세에서 이끌어내시어 하늘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실 때에, 그들의 영혼들만을 빼내어 오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영혼과 아울러 그의 육신을 포함한 전인의 회복과 구원에 관심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복음사역이 단지 불신자의 영혼만을 돌아오게하는 일에만 머물게될 때, 그 이외의 삶의 영역들에서도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관심들을 이루어드리는 일들을 간과하는 결과를 가져오게될 것이다. 물론, 영혼구원이라는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사역을 간과해서는 안되겠으나, 그와 함께 우리는 그가 속한 사회와 공동체 속에서 전인적인 삶의 회복을 위한 총체적 사역으로 나아가야할 것이다.
다)기독론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의 내용 속에서 발견되는 중요한 가르침들 중의 하나는 '성육신의 교리'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루어야할 구원사역을 하늘나라의 영광보좌에 앉으신 채로 수행하지 않으셨다. 인류의 구원역사를 이루시기 위해서, 그 분은 하늘의 영광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곳으로 임하셔서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을 입으시고 고통과 시험과 죽음을 겪으시면서, 구원역사를 이루시고 천국복음을 전파하셨던 것이다. 그 분의 복음전파도 말로만 끝난 사역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시면서 동시에 병자를 고치시고 소외된 자들의 삶 가까이 다가가서 친구가 되시는 사역으로까지 나아가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와같은 성육신적 복음사역의 사명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하셨던 말씀(요20:21)을 통하여, 그의 제자들과 그 이후 기독교회의 역사 속에서 살아갔던 수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졌으며, 그들의 삶들 속에서 적용되고 실천되어왔다. 그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서 우리는 사도바울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어" 더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성육신적 복음사역을 수행하였다. 그는 유대인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율법 아래있는 자들에게는 율법 아래있는 자와 같이, 그리고 율법없는 자에게는 율법없는 자와같이 되어서 그들을 구원하는 사역을 진행했다.(고전 9:19-22) 그 이후에도, 우리는 그와같은 성육신적 선교사역을 감당했던 이들 중의 대표적인 인물들로서, 1732년에 활동했던 모라비안파의 지도자 Zinzendorf백작이나, 1882년 인도에서 구세군을 시작했던 Frederick Tucker소령, 그리고 1950년 이탈리아의 카톨릭사제였던 마리오 보렐리와 같은 사람들도 지적해볼 수 있다. 그리고 이제 우리의 복음사역도 바로 그들과 같이, 예수님과 그 이후에 사역했던 많은 선진들이 수행해왔던 "성육신적 복음전도사역의 모델"을 따라야할 것이다. 우리가 처한 문화적 배경이 주는 보호와 안락을 포기하고, 소외된 자들이 처해있는 상황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접근하는 눈높이 조정의 "값비싼 대가"를 지불해야하는 작업이 요청된다고 하겠다.
물론, 여기에서의 '성육신적 선교'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자신의 신적 정체성까지도 상실하면서 내려오신 성육신이라고 해석하려는 시도는 받아들일 수 없다. 예수님의 성육신에 관한 역사상의 이단사상들 중의 하나는, 예수님께서 성육신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으로서의 자신의 신성이 축소되거나 약화된 것으로 혹은 변화가 발생한 것으로 보려는 케노시스이론일 것이다. 그 분은 인간이 되신 후에도 여전히 온전한 하나님으로서 이 땅 위의 사역을 수행하셨다. 따라서,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성육신적 복음사역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전개되었던 복음사역이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성육신적 구원사역의 모범은 오늘 우리의 복음사역이 사회적 책임과 불가분의 관계 속에 놓여있음을 말해준다. 우리가 그 분의 복음사역의 모델을 따르려한다면, 그 분은 그냥 하늘의 영광 보좌에 앉으셔서 복음선포를 하신 것이 아니라, 이 땅의 낮고 천한 구유에 피조물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오셨으며, 그리고 또 소외되고 병든 자들에게로 찾아가셔서 그들의 육적,물질적 고통을 끌어안으시면서 천국복음을 전하셨으므로, -우리가 그 분의 복음사역의 모델을 따르려한다면,- 우리도 사회적 책임과의 동반자적 관계 속에서 이해된 복음사역을 수행해야할 것이다.
둘째로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불가분성의 원리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가르치신 교훈들 속에서도 드러난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주제는 "하나님 나라"였다. 그리고 그의 사역도 바로 같은 주제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따라서, 예수님의 최초의 선포도 바로 그것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회당에서 읽으셨던 이사야의 말씀은 바로 그러한 자신의 하나님 나라 사역이 어떠해야함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물론, 눅4장에서 인용한 이사야서 61:1절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의견의 차이가 어느 정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본문을 주로 물질적, 육체적 문제 해결에 대한 말씀으로 해석하기를 꺼려하는 자들도 부분적으로는 예수님의 복음사역이 육신적 고통이나 가난 혹은 질병의 문제들에 대한 해결도 가져왔던 사실을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이 땅에서 진행되었던, 하나님 나라를 위한 예수님의 사역들 속에서 그러한 사회적 책임의 부분들이 포함되고 있었음을 우리는 성경의 여러 구절들을 통하여 확인해볼 수 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 진리를 말씀으로 선포하시고 가르치기도 하셨지만, 그러한 복음전파의 가르침과 함께 사회적 봉사사역에도 많이 수고하셨던 것을 보게된다. 이 땅 위에 계셨을 때, 팔레스틴의 여러 지역들을 다니시면서 행하셨던 주님의 사역을 간략하게 요약한 마가복음 6:6과 사도행전 10:38의 말씀은 그러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회적 책임수행의 사역에 대한 사실들을 각각 보도해주고 있다.
이와같이, 예수님의 사역들 속에서 표현된 사회적 책임에 대한 우리 주님의 관심은 그의 가르침들 중에서 여러 곳에서 표현되고 있다. 하나의 대표적인 예로서, 성경에서 예수님은 "이웃사랑"이라는 새계명을 주신 분으로 나타난다. 마22:34-40에서 예수님은 온 율법과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두 가지로 요약하여, 하나님 사랑의 계명과 이웃사랑의 계명으로 요약해주셨다. 구약에서 두드러지게 제시되는 전자의 계명과 아울러, 예수님은 후자의 계명을 "새계명"으로서 강조하셨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마25:31-46에서 참 믿음의 모습을 설명하실 때 그의 "새계명"을 더욱 분명히 제시하셨다. 그 본문 속에서, 예수님은 약한자, 가난한 자, 억눌린 자, 병든 자, 감옥에 갇힌 자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여부가 참 믿음의 모습임을 지적하셨던 것이다.
Stott교수는 예수님의 가르침들 중에서 잘 알려진 두 개의 비유들을 비교 분석하면서, 그러한 "새계명의 실천"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을 잘 설명해주었다. 하나는 탕자의 비유(눅15:11-32)이고 다른 하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30-37)이다. 그 두 개의 비유를 기록한 누가는 그 비유들을 통하여, 회심과 사회적 책임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을 각각 드러내주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하는 것들 중에는 제 멋대로 살아가는 아들들, 즉 영적으로 잃어버져진 자녀들의 모습만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괴한들에게 희생당하여 사회적으로 버려진 이들에 대한 모습도 포함된다는 것을 누가가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 비유는 모두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이들을 말해주는데, 전자는 자신의 죄로 인해 절망에 처한 사람이고, 후자는 다른 사람들의 죄로 인해 절망에 처하게된 사람이다. 전자가 개인의 죄에 지적하고 있다면, 후자는 사회적인 죄 혹은 공공의 악을 지적해주는데, 이 모두는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함을 누가가 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비유들이 제시하는 그러한 문제들에 대한 답변들로서, 전자는 회개하고 믿음으로 구원받는 일을, 그리고 후자는 자비와 선행에 의한 구제에 의해 구원받게됨을 말해주고 있다. 전자에서는 회개하고 돌아오는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후자에서는 상처를 싸매주는 일을 통하여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과 교훈의 내용들 속에서 영혼구원의 주제와 사회적 책임의 주제가 함께 어우러져있음을 보게되는 것이다.
끝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경에서 만유의 주되신 분으로서 제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예수님은 이 땅 위에서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적 직임을 수행하신 것으로 설명된다. 그 분은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이 전했던 하나님의 뜻을 최종적으로 온전히 전해주신 하나님의 선지자이실 뿐만 아니라(히1:1-2), 또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속죄제물이 되셨으며, 그리고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신 제사장으로서(히 10:12)의 직임을 수행하셨다. 그러나, 그 분은 또한 이 땅 위에 왕으로 오셨는데, 그 왕직은 하나님의 백성과 교회를 다스리시는 "영적 왕권"과 "전 우주적인 왕권"으로 나뉘어진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하려는 부분은 후자의 왕권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그 왕권 아래 살아가는 그의 백성들로서 그 분의 왕적 통치의 뜻이 바르게 세워지도록 노력해야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신자들에게 구세주(savior)가 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주님(Lord)으로 함께하신다. 그 분은 사망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을 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시고(마28:18) 하늘 보좌에 앉으심으로 오늘도 만왕의 왕, 만유의 주로서 우주 만물을 통치하고 계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분은 교회를 다스리시는 분이실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그 분의 뜻대로 다스리시는 만유의 왕이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분의 주되심은(Lordship)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교회 밖의 세상에서의 모든 삶의 영역들 속에서도 드러나야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교회와 더불어, 가정과 사회 및 모든 삶의 영역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모든 사상들과 행위들은 지적되야하고 거부되야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와 원리를 거스리는 모든 일들, 즉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는 불신앙 뿐 아니라, 불의나 압제나 고난의 문제들이 이 땅에서 발생하게될 때에도, 우리가 그 분의 의와 사랑의 통치하심이 세워지기 위해서 노력해야할 책임을 갖게되는 것은 그 분의 우주적인 왕권 때문인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왕권교리는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위한 하나의 중요한 기초를 제공해준다. 사단과 어둠의 권세를 깨뜨리신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으로서, 교회의 주님이실 뿐만 아니라 우주의 주님이 되셔서, 그의 백성들의 영혼을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세계에 끼쳐진 죄의 결과들까지도 제거하시는 우주적이고 총체적인 통치를(롬8:20-21, 38-39) 이루어가시는 왕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그것은 비록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그에게 주어진 것이 사실이나, 아직 만물이 그에게 복종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히2:8)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이 세상과 화목케되었다는(고후 5:19) 바울의 선언은, 결코 모든 인류가 이미 하나님과의 화목 안으로 들어왔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직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모두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영적 축복을 받고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그 우주적인 권능과 통치가 지금은 단지 "불가시적인 은혜의 통치"일 뿐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즉, 주님의 재림 때까지, 주님의 통치에 기초한 심판의 칼은 아직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 때까지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그 우주적인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계신 것이다.
따라서, 비록 우리가 그 분의 의와 사랑의 통치원리를 거스리는 모든 권세들과 제도들에 대해서 침묵해서는 안되고 또 그 문제들을 지적해야할 것이지만, 칼로 최후의 심판을 휘두르는 자세로서 접근해서는 않된다. 그리스도의 법의 궁극적인 집행은 정치적인 권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재림시에 나타날 그리스도의 심판에 의해서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최종적인 심판의 날이 이를 때까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아직 영광의 보좌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칼로 전진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라)구원론에서
첫째로, 성경에서 제시되는 구원의 의미들 중의 하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통치(나라)로 말미암는 축복이라는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는데, 그것은 성경에서 구원이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으로도 설명되기 때문이다.(요3:3,5; 막10:24-26) 그렇다면, 구원이란 하나님의 나라 만큼이나 광범위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전우주적인 왕권에 대한 설명 속에서도 지적되었듯이, 주님의 우주적인 통치 아래서 그 분이 베푸시는 구원도 또한 전포괄적인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그와같이 구원은 성경에서 우주적인 성격을 지닌 사건으로 제시된다. 그것은 신자의 영혼만을 지옥불에서 끄집어내는 사건만은 아니다. 물론, 그것이 중요한 측면임에 틀림없지만, 그와 함께 신자의 육신도 새로워질 것, 그리고 더 나아가 온 우주와 사회와 만물이 모두 죄와 고통과 모든 저주로부터 해방되고, 새로워지는 것까지도 바라보는 사건인 것이다.(롬8:19-23)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복음전도의 목표와 비젼은 죄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사역의 우선성과 중요성을 잃어서는 안되지만, 거기에서만 머물지않고 그 영혼구원의 사명과 더불어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 되는 인간의 육신과 사회적 차원, 그리고 온 우주만물들까지도 회복하며 새롭게하는 사명에까지 확장되는 것이다.
구원론의 영역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두 번째의 내용은 '칭의와 선행 혹은 칭의와 성화의 불가분성'에 관한 가르침이다. 종교개혁 이후로 개신교회에서 구원론의 영역에서 강조되어온 내용이 있다면, 그것은 '이신칭의'의 가르침일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라는 개혁자들의 외침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구원역사를 인간의 선행이나 공적과 뒤섞으려했던 중세 카톨릭의 오류에 대항하여 제시된 진리였던 것이다. 그러나, 주의해야할 점은 개혁자들이 '이신칭의'를 가르칠 때, 그러한 카톨릭의 공로주의적 구원관에 대해서 "믿음으로만"이라는 원리를 지적했었던 것이지만, 그와 동시에 강조된 점은 그 믿음이 홀로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즉, 구원하는 참 믿음이란 항상 행함으로 나타나는 믿음이라는 진리도 함께 외쳐졌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오늘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우리들이 오직 믿음으로 주어지는 구원에 대한 강조 때문에, 그 믿음은 또한 선행으로 연결되야한다는 부분을 간과하여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성경에서 우리를 의롭다고 칭하게하는 (도구적)수단인 믿음이 참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반드시 우리를 선행의 삶으로 나아가게하는 믿음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 주님과 같이 두루 다니면서 착한 일을 행하고 병든자들을 돌보는 일들을 감당케하는 믿음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마태복음 25장 31절 이하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도 이해할 수 있다. 그 비유는 분명히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삶이란 착한 일을 하며 병든 자들을 돌보는 사회적 봉사와 섬김들을 감당하는 삶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비유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구원"이라는 개혁자들의 외침과 상충되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 비유 속에서 양의 무리들로 분류된 자들은 선행을 함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게 된 것이라고 해석하게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확히 말한다면, 양의 무리들 가운데 포함되었던 자들은 자기 주변의 연약했던 이웃들, 즉 병든 자나 옥에 갇힌 자, 굶주리거나 목마른 자들을 돌보는 일들을 감당케하는 믿음을 가졌으므로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수 있는 은총을 입게되었던 것이다. 개혁자들이 말했던 믿음이란 항상 행함으로 표현되는 믿음이었던 것이다.
같은 방향에서 우리는 칭의와 성화간의 불가분성에 관한 논의도 생각해볼 수 있다. 롬 6:1에서 바울이 제시한 가상적인 질문은 바로 이 문제에 초점을 맞추게하기 위한 질문이었다. 롬6:1의 본문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칭의의 신분을 확보한 자가 이제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선행(성화)의 삶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겠는가? 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한 물음에 대하여, 로마서 6장에서 제시되는 바울의 답변은 분명하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칭의)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선행의 삶(성화)과 "의의 병기로 드려지는 삶"을 위한 것이라는 답변이 2절 이하에서 제시된다. 그러한 주장 배후에 놓인 바울의 논지는 이것이다: 신자가 칭의함 받은 것이 진공 속에서의 사건이 아니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신자와 연합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 분으로서 신자와 연합하셨으므로, 신자도 이제는 죄에 대해 산 자같이 살 수 없고, 오히려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산 자로서, 자신을 하나님께 대하여 의의 병기로 드려지는 삶을 살며 선행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롬 6:1-14).
이와같이, 성경의 구원론 교리는 신자들로 하여금 착한 일을 하며, 병든 자들을 돌보고, 또 의의 병기로 드려지는 성화의 삶으로 나아갈 것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마)교회론에서
교회론에 관한 논의들 중에서, 본 주제와 관련하여 주의깊게 유념해야할 내용이 있다면, 그것은 "초월성 내지는 거룩성과 세상성 사이의 균형"에 대한 내용이라고 사료된다.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불가분성의 진리를 이해함에 있어서, 우리는 후자에 대한 강조 때문에 교회의 거룩성이 무너지도록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앞에서 기독론과 관련하여, "성육신적 선교"의 중요성을 지적하면서도, 그에 대한 강조가 결코 전도자 자신의 영적 정체성의 상실을 의미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함께 지적하였던 것도 바로 같은 이유에서였다.
교회는 먼저 세상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되이 세움을 입은 무리들이어야 하는 것이다. 교회의 성경적 개념들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가지만, 그들의 정체성의 출발은 초월적인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언약의 백성이 되는 것은 결코 자신들의 혈통적인 관계나 민족적인 근거에 기초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로 말미암아 시작되는 회중인 것이다. 구약과 신약의 성도들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의 존재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이적적인 구속역사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출발하게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교회의 초월성은 결코 이원론적 도피주의나 금욕주의로 발전되어서도 안되는 것이다. 그들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될 것으로 부름받았기 때문이다.(마5:13-16)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지만, 동시에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자들이다. 그들이 빛을 비추고 짠 맛을 내야할 곳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그들이 발을 디디고있는 이 땅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교회의 "세상성"을 말할 수 있으며, 또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말해야하는 것이다. 물론, 그와같은 교회의 세상성은 "세속화"와는 구별되야 한다. 자기의 영적 정체성을 상실하고, 세상과 구별없이 살아가는 세속화란 이미 하나님의 백성의 무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교회의 세상성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교회는 더욱 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초월성과 거룩성을 보존해주어야 한다.
교회론 가운데 생각해볼 수 있는 다른 중요한 주제는 "예배관"에 관한 부분이다. 20세기 말부터 한국교회에 관심을 모아온 주제들 중의 하나는 예배회복 내지는 예배갱신에 관한 주제였다. 그리고 그러한 논의들 중의 하나는 "협의의 예배개념의 한계성 극복의 과제"에 관한 것이었으나, 그것은 결코 오늘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러한 문제들은 이미 신구약 시대 속에서부터 잠재해있었고, 선지자들과 성경의 저자들을 통하여 지적되어왔던 내용들이었다.
성경은 주의 백성들이 "참 예배, 참 종교, 참 신앙"에로 나아가야할 것을 가르쳐준다. 성경이 가르치는 진정한 예배의 삶 혹은 진정한 금식과 기도의 종교생활(사1:10-17; 58:1-10), 그리고 진정한 회개나(눅3:7-11) 참 경건(약1:27)의 의미들은 우리의 예배가 일상적인 삶과의 일치를 이루어져야할 것을 교훈하고 있다. 성경은 행함없는 믿음을 경고하며,(약2:14-17) 그러한 거짓 종교행위에 빠져있는 종교지도자들의 오류에 대해서도 경고하고있는 것이다.(눅20:45-47)
즉, 여기에서 말하는 좁은 의미에서의 예배관이란, 주일 공예배에서 드리는 예배만을 예배라고 간주하려는 태도를 의미한다. 그러한 협의의 예배관이 지니는 한계성이란, 신자들로 하여금 종교개혁자 칼빈이 외쳤던 Coram Deo정신을 제한적으로만 수용하게 하며, 주일의 예배자만으로 살아가도록 만들고, 소위 '(성속)이원론'적 신앙생활로 떨어지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찾아진다. 칼빈의 Coram Deo 정신이란, 주일날 종교적 생활을 할 때에만 적용되는 정신이 아니라, 날마다의 일상생활 속에서 부딪히는 인간의 모든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영역들 속에서,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행동하고 있음을 인식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예배가 교회에서 행해지는 단순한 의식적 행위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일상생활 속에서 드려지는 예배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Coram Deo정신 아래서 신자는 그들의 일상 속에서의 모든 삶을 예배로서 하나님께 드려지도록 해야할 것이다.
롬 12:1에서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바와같이, 신약의 성도들이 드려야할 예배는 자신의 몸으로 드려지는 산제사인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구약에서와 같이 죄사함의 문제를 위하여 드려지는 제물의 의미는 아니다. 신자의 구원을 위한 죄사함의 제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한 영원한 제사'(히10:12)를 통하여 완료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드릴 예배란 주께서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며, 자신의 시간과 마음과 전 생애를 그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께 드리는 삶의 제사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사회 속에서 발생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속에서의 수 많은 비윤리적인 부정과 부패의 사건들 배후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그 모습을 드러나고 있다는 점은, 우리의 예배관이 바로 '삶으로의 드려져야할 예배'라는 광의의 예배개념으로 시급히 전환되어야함을, 그래서 협의의 예배와 함께 광의의 예배관이 바르게 정립되어야함을 강력히 요청해주고 있는 것이라고 사료된다.
예배의 행위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과 그의 백성들을 사랑하는 것을 서로 상충되는 개념으로만 이해할 필요는 없다. 물론, 예배란 삼위일체적 구조 속에서 그 분을 기쁘게해드리기 위한 "수직적인" 성격을 지니므로, 예배 가운데서 우리의 초점은 그 분에게로 맞추어지도록 해야한다. 그러나, 그러한 "수직적인" 성격에 대한 강조가 인간적인 필요를 무시해도 된다는 방향으로 나아갈 필요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의 하나님은 인간의 희생제물을 요구하는 이방의 몰록(Moloch)과 같은 신이 아니라, 그의 백성들을 축복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그의 백성들을 사랑하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갈등도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우리의 예배가 인간 중심의 예배로 전락되지 않도록 해야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서로 연관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마 22:37-40; 막 7:9-13; 요일 4:20-21).
바)종말론에서
전통적으로 종말론 논의는 크게 두 가지의 영역들, 즉 개인적 종말과, 예수님의 재림과 연관하여 설명되는 우주적 종말로 나뉘어 설명되어왔다. 그러나, 지난 세기 동안, Geerhardus Vos, Herman Ridderbos, Anthoney A. Hoekema 등과 같은 신학자들의 연구를 통하여, 신약성경에서 종말이란 그리스도의 초림과 연관되어 설명되고 있음이 밝혀졌다. 성경에서는 전통적인 설명과 같이 '세상의 끝'이라는 종말개념도 나타나기는 하나(마13:39,40; 마24:3; 마28:20; 요6:39,40 등), 그러한 표현과 아울러, 지상에서의 예수님의 사역 안에서 종말의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재하였음을 말하는 구절들도 풍부하게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누가복음 17장 20-21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제자들 "가운데" 혹은 그들 "안에" 있음을 지적해주고 있으며, 골로새서 1장 13절에서는 신약의 성도들이 이미 "그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음을 말해준다. 그외에도 우리는 마11:12; 마12:28; 눅16:16 등 신약의 많은 성구들을 지적할 수 있다. 물론,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대한 강조가 C.H.Dodd의 하나님 나라의 비유(The Parable of the Kingdom)에서 제시되는 입장, 즉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의 임함을 거부하는 입장으로 떨어져서는 안되겠으나, 전통적인 종말론 논의가 강조하는 미래성과 함께 균형을 이룰 때, 더욱 성경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줄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와같은 균형잡힌 관점 아래서 주어지는, 예수님의 초림과 함께 이 땅에 주어진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대한 이해는, 많은 복음주의자들에게도 적극적인 사회적 책임수행을 위한 중요한 성경적 기초를 제공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이 땅을 지배하던 죄와 죽음의 통치를 무너뜨렸고,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통치원리가 원칙적으로 이 땅위에 세워지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사건임을 강조하게 되었다. 최종적인 하나님 나라의 절정은 미래에 남아있지만, 그 나라의 현재적 실재성에 대한 이해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지금 이 땅에서부터 죄악과 죽음의 세력에 대항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의의 통치를 신자의 모든 삶의 영역들 속에서 추구하도록 만드는 동기를 제공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19세기 이후로 제시되어온 자유주의 신학의 보편적 경향이었던,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인본주의적 성취를 바라보는 단순한 낙관주의적인 입장에 우리는 동조할 수 없다. 예를들면, 해방신학이 하나님의 나라를 단지 인간적인 노력이나 투쟁으로 이룰 수 있다고 보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관해서 성경이 말하는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그 나라의 현재성에 대한 말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한 그 나라의 미래적 초월적 성취에 대한 말씀도 포함되어 있다. 그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동시에 우리는 마지막 날에 가서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질 그 완성을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할 것을 가르치셨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과 관련하여 사용하신 동사들의 성격을 볼 때 더욱 확실해진다. (하나님 나라가) "온다", "주어진다", "들어간다", "받는다"와 같은 동사들이 함축하는 의미는, 그 나라는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혹은 인간의 노력으로 세워질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는 그 나라의 초월성을 말하고있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초월자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고, 인간은 단지 수동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일종의 "선물"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인본주의적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자들의 낙관론적 입장은, 어쩌면 이 땅이 안고있는 문제들이 근본적으로 우리의 노력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성격의 것임을,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죄의 영향과 인간의 부패함이 얼마나 심각하며 인간과 사회 속에 깊이 뿌리박혀있는지를 충분히 깨닫지 못함으로서 야기된 견해일 뿐이다.
결국, 우리는 "이미와 아직"이라는 성경의 종말론적 관점에 대한 균형잡힌 이해를 잘 견지하여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된다.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 이후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아직 아니(not yet)" 혹은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에 대한 강조 때문에, 주님께서 재림하시기 이전에도 인류의 어두운 역사의 현장들 속에서 그 분이 이루실 수 있고, 따라서 우리도 감당해야할 부분들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즉,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 내지는 초월성에 대한 가르침으로서 우리는 자유주의 낙관주의적 입장을 교정해 주어야 하지만, 동시에 예수님께서 이 땅으로 가져오신 하나님 나라의 실재와 능력들이(마12:28; 눅11:20) 지금도 이 땅 위에서 죄와 죽음을 다스리는 사탄의 세력들을 무너뜨리는데에 사용될 수 있다는 가르침과 함께 균형있게 제시되야 한다.
반복하지만, 우리는 "이미(already)"에 대한 강조 때문에 단순한 낙관론에 떨어져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이 단순히 인간들의 노력에 의해서 성취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될 것이다. 사회적 개선과 정의를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아직 하나님의 나라의 능력과 평화가 그 모든 죄악들과 부패들을 온전히 몰아낸 것도 아니며, 주님의 재림 전까지는 그것이 온전히 성취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이미-아직"의 그리스도인이 되어야한다.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승리의 기쁨을 간직하며 이 땅 위에서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려는 노력을 수행하면서도, 앞으로 주어질 종말론적 완성에 대한 기대를 잃지 않는 자세를 견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완성의 날이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지기 까지는, 인간의 죄성의 잔재들과 사회적 부패의 왜곡들이 남아있게될 것을 인식하면서도, 이미 주어진 성령의 능력으로 그 나라의 삶의 원리들을 선포하고 우리가 속한 사회와 국가, 그리고 세계 속에서 죄악과 죽음의 통치를 주도하는 사탄의 세력들을 쳐부수는 영적 전사들이 되어야하는 것이다.
IV.결론
이제까지 우리는 단순한 세속적 사회봉사와는 구별되야할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사명을 확인하기 위하여, 성경의 기본적인 교리의 내용들이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과 관련하여 제시해주는 가르침들을 정리해보았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사회적 의의는 신론이나 기독론의 항목들에서만 발견되는 가르침이 아니라, 그것은 신론에서부터 시작하여 종말론에 이르기까지 성경의 교리들 전 영역들 속에서 제시되고 있는 하나의 일관된 주제임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 수행은 세속적인 사회봉사와는 달리, 성경적 교리들이 제시하는 성경의 교훈들과 성경적 세계관의 관점에서 추진되는 사역이어야 한다.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이 왜 복음전도의 사역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게되는가에 대한 설명이 된다.
1982년에 작성된 그랜드 래피드 보고서에서 제시된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 사이의 관계에 대한 구분법을 따라 정리해본다면, 이제까지 제시했던 각 교리들 속에서 찾아진 사회적 책임에 관한 요점들은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불가분성의 원리를, 그 보고서의 구분법 중에서 주로 첫 번째와 세 번째의 항목들의 관점에서 설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기독론에서 지적된 성육신적 전도사역이나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 속에서 발견된 요점들과 구원론 중 구원의 전포괄적인 성격에 대한 요점은 사회적 책임의 부분이 복음전도와 동반자 관계임을 드러내주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리고 구원론 중 믿음과 선행(혹은 칭의와 성화)와의 관계에 대한 요점, 교회론 부분에서 교회의 초월성과 세상성 사이의 균형에 관한 요점이나 예배의 광의적 개념에 대한 요점, 그리고 종말론에서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실재성에 대한 요점은, -그것들이 복음전도를 받아들인 자들이 추구해야할 삶의 원리들을 제시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이 복음전도의 결과임을 드러내준 교리들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물론, 그 밖의 내용들도 복음전도와의 직접적인 관계는 아닐찌라도, 성경적 세계관 속에서 근본적으로 이해되는 기독교 진리의 사회적 의의를 드러내주었다고 할 수 있겠다. 결국, 본 연구를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신학적 근거는 성경의 전교리들 속에서 일관되게 제시되고 있음을 확인하였으며,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의 차별성은 그것이 직,간접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한 복음전도사역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수행되야한다는 사실에서 찾아지는 것임을 확인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 총신대학교 김광열교수
출처 : 한국복음주의신학회 논문 자료(총신대학교 김광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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