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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당선작) 바다를 떠난 은빛이
서해 남쪽의 드넓은 바닷가야.
하루에 꼭 한번은 바다 속으로 해가 숨어드는 걸 볼 수 있는 곳이지. 그럴 때 바다는 온통 주황빛 물감을 풀어놓은 듯해. 붉어지는 바다를 보며 행복해하는 작은 물방울들이 있었어. 그 중에 은빛이라는 물방울도 있었지.
작은 물방울들은 한 낮이면 햇살을 받아 진주 빛으로 반짝이기도 하고, 어깨동무하며 넘실대기도 했어. 맑고 푸른 바닷물들 속에서 작은 물방울들은 하루하루 행복하게 지냈어.
햇살이 무척 따가운 날이었단다. 은빛이와 친구들은 바람을 따라 바다 한 가운데서 넘실대다 모래밭까지 밀려왔어. 모래밭은 부드러우면서도 간지러웠지. 바람그네를 타듯 공중으로 살짝 한바퀴를 돌 때였어. 친구들과 깔깔거리며 작은 거품이 되어 부숴졌지. 은빛이는 자신의 몸이 하얗게 빛나는 걸 느꼈단다.
'그게 뭐였을까?'
은빛이는 궁금하고 궁금해졌어. 은빛이는 항상 우루루 몰려다니는 친구들에게 물었지.
"나는 몰라."
"나두 몰라. 그런데 넌, 왜 그리 쓸데없는 데 신경 쓰고 그러니?"
너도나도 고개를 저을 뿐이었지.
"그건 네 속에 작은 보석이 숨겨져 있어서 그런 거란다."
쑥덕대는 작은 물방울 옆으로 할아버지 물방울이 쓰윽 다가오며 말했단다.
"피이. 은빛이 속에 보석이 있다는 건 말도 안돼."
은빛이를 둘러싸고 있던 친구들이 입을 삐죽였지.
"너희도 마찬가지야. 우리는 누구나 보석을 품고 살지. 암, 그렇고 말고."
할아버지 물방울은 알쏭달쏭한 얘기를 남기고 다른 바닷물들을 따라 너울이 되어 가버렸어. 너울에 밀려 은빛이와 친구들은 까끌까끌한 바위 위까지 오게 되었지.
말미잘 할머니가 허옇게 풀어헤친 머리를 저으며 끼어들었단다.
“또 누군가처럼 보석을 찾겠다고 모래밭으로 달려가지 말아라. 그러다 어딘가에 갇혀 영원히 돌아오 지 못할 수도 있단다.”
말미잘 할머니는 먹이를 발견하고는 흐물거리던 몸을 급하게 웅크렸어.
“하지만 그것은 너희만이 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일이기도 하지. 엄청난 아픔이 따르기도 하겠지만.”
키 작은 파래아저씨는 흔들흔들 고개를 저었어.
물방울들의 눈이 할머니와 아저씨를 따라 왔다 갔다 했지.
“다 부질없는 얘기야. 그냥 지금처럼 여기서 오손도손 사는 것이 행복하지. 보석을 찾는 다는 것은 위험 하고도 힘든 일이야. 그러니 그 일일랑 아예 꿈도 꾸지 말아라."
말미잘 할머니는 걱정스러운 듯 허어연 머리 결로 물방울들을 하나하나 어루만져 주었어.
“할머니 말이 맞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파래 아저씨는 잠깐 몸을 세워 생각에 잠기는 것 같았어.
“여기서 꿈만 꾸며 사는 것보다는 그 것을 찾아 나서는 게 더 힘든 일일지도 몰라. 그것은 자신을 다 내 어주어야만 하는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하고. 그러나 그 고통 후에는 너희들만이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일이 기다리고 있단다. 그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파래아저씨는 목소리에 힘주어 말했지.
은빛이는 자기 몸속에 있다는 보석이 무척 궁금했어. 말미잘 할머니 곁에서 살랑거리는 친구도 있었지만 은빛이는 보석을 찾아보리라 결심했지. 은빛이의 친구 몇몇도 같은 고민에 빠졌어.
은빛이와 친구들은 그 보석을 쉽게 찾을 수가 없었어. 그들은 항상 몰려다녔지. 어깨를 맞대고. 남실남실대며 노래하곤 했단다.
-할아버지 말씀이
우리 몸속에 보석이 있다는데…
아무리 찾아보아도
보석은 보이지 않네.-
그러던 어느 날이었지.
모래밭 쪽에서 자꾸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었어. 그 힘은 세었단다. 날마다 눈이 모래밭으로 향해있던 은빛이는 신이 났어. 열심히 달렸지. 그런데 가도가도 모래밭은 없었어. 발밑에 무엇인가 느껴졌어. 보드라운 모래대신 딱딱하고 매끄러운 느낌이었어. 단단한 밭은 꽤나 넓었어.
머리가 성게같이 삐죽삐죽한 아저씨가 멀리 보였어. 풍차를 콸콸콸 돌려서 단단한 밭으로 바닷물을 열심히 모으고 있었지. 바위에 붙은 따개비같이 작은아이가 그 옆에서 바닥을 쿵쿵쿵 밟으며 흉내를 내고 있었어.
"바다님이 다 들어 오셨는 게라. 물꼬를 막어뿌랑께."
얼굴이 온통 미역 빛을 한 노인이 열심히 고함을 질렀어.
"물꼬를 막어뿌랑게이."
아이는 노인을 올려다보며 그 말을 그대로 흉내를 내었어.
노인은 아이의 머리를 콩하고 때리는 시늉을 했지.
"무슨 일이야?"
"이를 어째! 말미잘 할머니가 말하던 단단한 땅에 왔나 봐."
물방울들은 놀란 눈으로 서로를 보았어.
"다시는 먼 바다로 나갈 수 없을 지도 몰라. 난 돌아 갈 테야."
물방울들 중 유난히 하늘빛을 띤 물방울은 쏴아 고개를 돌렸어.
"무서워. 나도 갈래."
다른 물방울도 겁나는 듯 따라 붙었어.
은빛이 주위의 친구들은 앞으로 출렁, 뒤로 출렁거렸어. 은빛이도 문득 겁이 났어. 순간, 친구들과 함께 부르던 노래가 생각났지.
"어쩌면 우리가 늘 꿈꾸던 일인지 모르잖아."
은빛이는 가슴이 뛰었단다.
가슴 설레며 머문 그 곳은 심심할 따름이었어.
내리쬐는 해님의 따가운 빛을 피할 데라고는 없었지. 열린 바다에 있을 때는 햇살에 몸이 더워지면 금방 다른 물방울들 아래로 숨어버리면 되었어. 깊은 바다에서 부드러운 모래밭으로 넘실넘실 달릴 수도 있었고. 그런데 여기 갇힌 바다는 말미잘 할머니 키만큼이나 얕아서 숨을 곳도 없었어. 온 몸을 드러내며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단다. 햇살에 달구어진 몸은 풍선처럼 자꾸 하늘로 날고 싶기만 했어. 그나마 바람이 살짝 볼을 건드리고 갈 때 잠깐 숨을 돌릴 수 있었지. 갇힌 바다의 은빛이와 친구들은 숨이 막혀 헉헉대고만 있을 뿐이었단다.
"괜히 왔어."
"히잉. 이제 어떻게 해. 난 죽을 것만 같아."
"나두. 보석이 뭐고 다 싫어. 이건 사는 게 아니야."
친구들은 웅크리고 있는 은빛이를 보며 한숨을 쉬었어.
"조금만 참아보자. 응? 우리 속에 숨어있는 보석을 발견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거야. 그러니…."
말끝을 흐렸어. 넓은 바다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은빛이도 많이많이 하고 있던 참이었거든.
햇살은 따끔따끔. 몸이 자꾸 아파왔어. 물방울들은 달구어진 풍선처럼 바람의 등에 올라타기도 했어. 몸의 물기는 점점 없어지고 작아져 갔어. 작은 바지락 만하던 몸은 아기 고둥만 해졌어.
"이러다 좁살보다 작아지겠다."
"작아지는 게 문제니? 아예 없어질 것만 같아. 모양도 흔적도 없이."
아기 고둥만 해진 은빛이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어. 정말 그 말이 맞는 것 같았어. 은빛이도 점점 두려워졌지. 요 며칠 사이 몸이 많이 둔해진 것 같았기 때문이야.
해가 지기를 일곱 번쯤 한 날이었을 거야. 멀리 열린 바다에서 아득하게 지는 까치놀은 아름다웠지. 발그스럼한 저녁놀은 고맙기도 했어. 따끔거리는 햇살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었어.
하늘 한 가운데서 보초서는 것 같은 해가 여전히 이글이글 이글거리고 있을 때였지. 미역 빛 얼굴을 한 아저씨 여럿이서 은빛이네가 있는 바다로 나왔어. 따개비같은 아이도 쫄랑쫄랑 쫄랑거리며 따라 나왔지.
"아직도 멀었구만이라. 쬐까 더 기둘려야 될 것 가탕께."
"기다려? 무얼?"
은빛이와 친구들은 서로 마주 보며 눈이 동그래졌어.
은빛이와 친구들이 고여 있는 밭을 아이가 작은 발로 철벅철벅거리며 돌아다녔어.
"아얏!"
온 몸이 바스라지는 것 같았어.
"할아버지 바닷물이 뜨뜻해요. 그리고 조그만 알갱이 같은 이건 뭐예요?"
"야야. 그라지 말랑께. 인자 쬐까 물건이 될라는 디. 갸들이 힘들꺼여. 바닷물이 뜨겁다고? 암, 더 뜨거워야 하지라. 뜨거움을 참아야 우리에게 보물이 되아야. 그래서 우리 손주 맛난 과자도 사주고 맛있는 국도 끓여주재. 쟈들도 우리도 기다려야 된당게."
"기다림?"
은빛이는 가만히 되뇌어보았어. 그 말은 무엇인가 슬픈 것 같기도 하고 마음이 설레는 것 같기도 했어.
비가 후둑후둑 내리기 시작했어. 정말 정말 시원했단다. 온 몸이 쫘악 펴지고 쌀알처럼 굳어져 가던 몸도 한결 부드러워졌어. 은빛이와 친구들은 비를 흠뻑흠뻑 맞았지. 빗방울이 통통 뛰어다니며 물방울들의 몸을 다시 바지락 만하게 해 줬어.
“히유! 이제 살 것만 같아.”
비구름 빛을 띤 친구가 말했어. 은빛이와 친구들은 잠깐 행복한 것도 같았어. 몸이 많이 편해졌거든.
“그렇긴 한데… 이상하지 않니? 단단한 눈송이 같이 묵직할 때, 몸은 아팠지만 마음은 무엇인가 꽉 차 뿌듯한 것도 같았는 데….”
은빛이도 자꾸만 허전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어.
“맞아. 우리 몸속에 숨어있는 보석을 찾는다는 것은 처음부터 어려운 일이었을 지도 몰라.”
“그러면 그 동안 우리가 참고 기다렸던 시간들이 다 소용없던 것이란 말이니?”
은빛이와 친구들은 밀려가는 비구름처럼 얼굴이 어두워졌어. 어느 덧 하늘은 말갛게 개여 있는데.
비 온 뒤에 해님은 더욱 따가운 햇살을 보냈어. 콕콕콕 몸을 사정없이 쪼아댔어.
다시 은빛이와 친구들의 몸은 작아져 갔지. 몸이 작아질수록 가슴에 모래알이 박히는 것처럼 따갑고 아팠어. 그래도 처음보다는 참을만 했단다.
작아진 몸이 둔하고 갑갑했어.
"은빛이야. 왜 때리니?"
"내가 언제?"
아니라며 고개를 저으려던 은빛이는 옆 친구와 다시 툭!하고 부딪히고 말았어. 서로 부드럽게 어울리던 어깨는 단단한 눈송이가 부딪치는 것처럼 아팠어. 은빛이와 친구처럼 옆에서도 친구들끼리 티격태격했지. 다들 마찬가지였나 봐. 은빛이의 몸을 이루고 있던 물기는 이제 거의 없어져 갔어. 은빛이는 허전한 마음에 햇살의 하얀빛을 자꾸만 들이마셨지. 하늘색을 그대로 담고 있던 물방울의 몸은 점점 햇살의 빛을 닮아가고 있었단다. 작은 눈송이같이. 그것은 힘들고 힘든 일이었어.
"이제 다시는, 다시는 출렁출렁 춤출 수 없어."
한 친구가 힘없이 훌쩍이며 말했어.
"맞아. 정말 다시는, 손잡고 하얗게 깔깔대며 웃을 수 없을 지 몰라."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렸어.
"조금만… 조금만 참으면 우린 정말 보석이…."
은빛이는 곧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어.
먼 바다가 붉게 물든 날이 그렇게 몇 번이나 더 지났는지 몰라.
"우와! 할아버지. 바닷물이 드디어 소금이 되었네요!"
은빛이는 쨍하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어. 은빛이는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단다.
손에 잡으면 부드럽게 흘러내리던 은빛이의 몸은 쌀알같이 단단해져 있었던 거야.
"그라재. 이번 소금님은 차암 빛깔도 고와뿌네."
할아버지는 보물을 다루듯 소금을 조심스레 두 손으로 모아들었어. 아이도 할아버지를 따라 두 손을 모았지. 아이의 손에 들린 은빛이는 아래를 내려다보았어. 하얀 보석들이 작은 무덤을 이루고 있었단다.
고향인 먼 바다는 온통 주황빛이야.
그 속으로 숨어드는 해를 은빛이는 행복한 듯 그리운 듯 바라보았어. 한낮의 햇살 같은 하얀 미소를 머금은 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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